아침부터 웬 한숨.
복 나갈라.
“됐어.”
누난 뭔가 불만스러운 거 같다.
따로 물어봐야 하나.
하지만 나도 오늘은 별로 시간이 없는데.
“선후도 앉아. 아침 먹고 가게.”
“응.”
별로 입맛이 없었다.
어젯밤에 과음한 탓인가?
그래도 엄마가 차려준 거니 먹어야겠지.
“아. 누나. 나 혹시 어제 술 취해서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
자리에 앉으며 누나에게 물었다.
혹시 그래서 짜증이 났나 싶어서.
“하아~.”
하지만 누나는 또 한숨만 푹 쉴 뿐.
이게 아닌가?
아니겠지.
만약 그랬으면 누나한테 벌써 맞아도 몇 대나 맞았을 텐데.
그럼 혹시 다른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누나. 고민 있으면 나한테라도 말해. 고민은 다른 사람한테 말하는 것만으로도 많이 나아진대.”
“……오냐. 꼭 그러마.”
누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주제넘은 말처럼 들렸을까.
누나 눈엔 못 미더울지 몰라도, 누나한테 고민거리가 있다면 뭐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만은 진심인데.
“많이들 먹어.”
상차림을 돕고 다시 식탁에 앉았다.
아침은 맑은 콩나물국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는다.
맛있다.
익숙한 엄마의 손맛이었다.
그리고 쓰린 속이 확 풀리는 이 기분.
이래서 사람들이 해장국을 찾는 거구나.
“엄마 안녕. 오빠 언니도 안녕.”
미소도 벌써 일어났다.
오늘따라 일찍──
“푸훕!!”
“아. 드럽게.”
누나가 짜증을 냈지만, 나는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었다.
“미소, 너, 콜록.”
뭔가 말하려 해도 기침 때문에 말이 나오질 않았다.
미소는 알몸이었다.
완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가슴도 엉덩이도 보지도, 전부 내놓고 있었다.
“응?”
미소가 의아하게 나를 본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양.
……잠이 덜 깬 거야?
아니, 잠이 덜 깼더라도 어떻게 알몸으로 나올 수 있어?
나 혼자 있으면 몰라도, 엄마랑 누나도 다 있는데.
“진미소. 너 뭐하냐?”
누나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응? 이제 괜찮은 거 아니었어?”
미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다.
영문을 모르는 건 나다.
대체 뭐가 어떻게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
“거봐, 엄마. 안 된다니까.”
누나가 엄마한테 거봐라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뭐지, 이 반응은?
엄마도 누나도 펄쩍 뛸 줄 알았는데.
마치 별일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같이 목욕도 하는 사이라곤 해도.
알몸으로 집안을 활보하고 있는데.
이상하다.
기묘한 소외감을 느낀다.
혹시 자고 일어났더니 상식개변 세계?
여자는 알몸으로 다니는 게 당연하다든가, 그런 거?
“……미소도 옷 입고 와. 아침 먹게.”
“귀찮은데~. 잘 때 오빠가 안에 싸는 바람에 옷 입으려면 안쪽까지 씻어야 한단 말이야. 바로 안 씻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는데.”
“밥 먹는데 더러운 얘기 할래? 숟가락으로 맞고 싶지?”
혼란스럽다.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말하는 것도 엉망진창, 듣는 내 머릿속도 엉망진창이었다.
“미소 너, 대체, 무슨…….”
말하는 동안에 머릿속 퍼즐이 맞춰진다.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떠오른다.
띄엄띄엄, 흐릿하게 떠오른다.
등에 난 상처.
‘안 돼, 선후야! 안 돼!’
‘안 돼!소영아, 미소야, 보지 마!’
누나와 미소 앞에서 억지로 엄마를 덮치고, 내 아래에 깔린 엄마가 내 등을 할퀴던 기억.
이유도 없는 근육통.
‘야! 진선후! 풀어! 당장 안 풀어?!’
‘빼, 빼주세요…….’
‘아아아악──!!’
저항하는 누나에게 억지로 수갑을 채워, 강간했던 기억.
미소 질 안의 정액.
‘응…… 후…….’
‘변태 새끼. 자는 동생한테 그런 짓 해서 좋냐?’
잠든 미소를 수면간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
……나는, 무슨 짓을.
숟가락이 식탁 아래로 떨어진다.
탱그랑.
하나하나 떠오르는 간밤의 기억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죽어도 씻을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술은 사람의 본성을 끄집어낸다고 한다.
알고 싶지 않았던 나의 더러운 본성.
어제의 그게 ‘그 친부모’의 피가 흐르는, 성욕에 미친 나의 본모습이었다.
“이제 좀 기억이 나냐? 이 쓰레기 새끼야?”
누나의 말이 내 가슴을 후벼판다.
쓰레기…….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 아니, 핵폐기물이다.
나는 쓰레기한테 사과해야 한다.
“진소영. 동생한테 말이 그게 뭐니?”
“동생은 무슨. 제 엄마 누나 동생 따먹는 것도 동생으로 쳐야 돼?”
“윽.”
누나 말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동생은커녕 인간 취급받을 자격도 없었다.
이미 선은 오래전에 넘었지만, 어제 나는 정말 짐승 이하였다.
“오빠. 나 씻겨주면 안 돼? 오빠가 더럽혔으니까.”
미소가 내 허벅지 위에 올라앉는다.
어제 그런 짓을 당했는데도, 미소는 나를 오빠라고 불러준다.
이렇게 착한 동생에게 나는 무슨 짓을.
“선후야. 누나 말 신경 쓰지 마. 부끄러워서 괜히 저러는 거니까. 그리고 미소 너도 내려와. 오빠 아침에 바빠.”
“치.”
엄마의 위로도 지금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바람처럼 내 귀를 통과해 빠져나갔다.
나는,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내가 상처 준 가족에게.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얼씨구. 쇼를 해요, 쇼를 해.”
누나에겐 비난할 자격이 있었다.
“누나, 미안. 엄마. 미소도 미안. 어젠 내가 너무 술에 취해서…… 술에 취했단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용서해달라고?”
“만약 용서받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게.”
용서받고 싶었다.
그게 터무니없이 이기적인 마음이란 건 안다.
그럼에도 용서받아서, 원래 가족관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손에 쥔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버림받는 것만은 싫다.
사이가 멀어지는 것도 싫다.
그러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용서받고 싶었다.
“신랑 신부 맞절~!”
미소가 내 맞은편에 엎드리며 절한다.
……역시 내가 진지하면 웃긴가 보다.
“야. 진선후. 무슨 짓이든 한다고 했지?”
누나가 나와 미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당당히 섰다.
강자의 품격을 담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뭐든지, 할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이 아니다.
할 수 없는 것도 한다.
정말 뭐든지 할 생각이었다.
“흥.”
누나는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럼 성공해.
말도 안 되게 성공해서, 여자 셋쯤 거느리고 있어도 아무도 뭐라 못할 정도로.
엄마랑 나, 미소까지 셋이서 함께, ‘우리가 진선후의 여자입니다’하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해.”
“누나…….”
누나의 말은 대단했다.
너무 대단해서 목적지가 보이지 않았다.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탑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뭘 어떻게 성공해야 그런 일이 가능하지?
미국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런 건 당당히 말할 수 없을 텐데.
황망해하는 내 옆에 엄마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서 말한다.
“선후야. 엄만 처음부터 화 안 났어. 그러니까 선후가 사과할 것도, 엄마가 용서할 것도 없어.”
“엄마…….”
엄마의 손도, 말도, 눈빛도 따뜻했다.
지금 당장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오빠 나도! 아니지, 같이 목욕하면 용서해줄게!”
“미소야…….”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야?
“누나. 성공할게. 성공해서, 내 남자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내 동생이라고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할게.”
“오~ 진선후, 멋있는데?”
“엄마. 고마워. 앞으로 엄마 실망 안 시키게 더 잘할게.”
“엄만 선후가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내면 그거로 충분해.”
“미소야. 갔다 와서 같이 목욕하자. 깨끗이 씻겨줄게.”
“꼭이야. 약속.”
미소와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한다.
그래.
엄마에게, 누나에게, 미소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될 수 있도록.
자랑할 수 있는 아들, 동생, 오빠가 될 수 있도록.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더 노력하고 잘해서.
가족이 나에게 준 행복만큼, 나도 가족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하자.
너무 멀리까지 볼 필요는 없다.
우선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당장 오늘부터 야외촬영이니까.
지금 내가 할 일은 연기자로서 좋은 연기를 선보이는 것.
매 순간 눈앞의 일에 최고의 성과를 내자.
그럼 성공도 행복도 따라올 테니까.
본격적인 촬영 시작
회사 빌딩의 입구.
내 앞에는 한 여자가 걷고 있었다.
두 손으로 석 잔의 커피를 모아들고서.
왠지 위태롭다.
떨어뜨리면 내 쪽에도 튀지 않을까.
조금 떨어져서 걷는 게 나으려나?
그 앞에서 바쁘게 걷던 한 남자가 빌딩 입구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다.
급하게 열린 유리문은 그 반동으로 강하게 닫힌다.
하필 커피를 든 여자가 통과하는 그 순간에.
“아.”
텅.
여자가 문에 부딪히기 직전, 팔로 유리문을 막아 멈춘다.
“괜찮아요?”
위험하게 이런 짓 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작은 트러블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여긴 내 회사니까.
커피를 든 여자가 돌아본다.
“아, 감사합니…다…….”
시간이 멈춘다.
동그란 눈동자.
날렵한 콧날.
장난기 어린 입술.
익숙한 얼굴, 익숙한 목소리.
내 첫사랑.
선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