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캇뜨! 좋아!”
그날 당장 내 촬영은 시작됐다.
우선 실내 세트에서 찍을 수 있는 장면 위주로.
집안에서 가족들과, 회사에서 직원들이나 김선아(신지혜 역)와.
김선아는 회사 직원은 아니지만 프로젝트 협력사인 벤처 기업의 공동창업자란 설정이다.
김선아의 회사는 황진우(진선후 역)가 맡은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협력사.
황진우와 김선아는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김선아는 자신을 버리고 신아영(황수아 역)과 결혼한 황진우를 원망했다.
황진우에게 접근했던 것도 그에게 한 방 먹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둘 사이를 갈라놓은 건 황진우 어머니(임신혜 역)의 계획이었다는 걸 알고,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황진우의 태도에 마음이 흔들린다.
동시에 벤처 기업 공동창업자인 선배 백현철(조재원 역)에게도 대쉬를 받는다.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김선아.
그러던 중, 황진우의 어머니나 아내와도 신경전을 벌이고, 회사는 함정에 빠지고, 황진우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대충 그렇게 진행되는 스토리다.
대본은 안 나왔지만 마지막엔 황진우와 이어지겠지.
이 드라마가 팔리는 포인트는 뭐가 있을까.
우선 여주인공인 김선아다.
평소엔 자유분방한 성격이지만, 일할 때는 진지하고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한다.
그러면서 사랑에는 미숙해서 순진한 모습도 보여준다.
그런 김선아에게 매달리는 능력 있는 남자들.
시청자는 김선아에게 이입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다음은 남주인공인 황진우 실장.
애까지 딸린 유부남에게 여주인공이 흔들린다는 스토리 상, 황진우는 매력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외모는 물론이요 능력과 성격까지.
“진선후 배우님, 메이크업 고칠게요.”
사실 이 중에서 가장 우려했던 건 외모였다.
능력이야 극 중 능력이니 내 실제 능력과 관계가 없다.
잘난 척 연기하기만 하면 되니까.
성격 연기도 어렵지 않다.
기본적으론 멋있지만 한없이 찐따 같을 때도 있고, 그 찐따 같을 때도 ‘너에게만 보이는’ 귀여운 모습을 언뜻언뜻 내비치면 된다.
문제는 외모.
설정상 30대 중반의 애 딸린 유부남인 황진우지만, 내 나이는 겨우 20대 초반이다.
내 딸 수정이를 연기하는 승희와도 10살밖에 차이가 안 난다.
이 얼굴로 수정이 아빠라고 우기는 게 과연 통할까?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나는 방송국 분장팀의 실력을 모르고 있었다.
“젊게 화장하는 건 많아도 나이 들어 보이게 화장하는 건 별로 없어서 더 재밌어요.”
분장팀 누나는 아직 젊은데도 그 손길에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 손을 거치면 나는 순식간에 황진우로 변신했다.
“하아. 너무 멋지다.”
분장팀 누나가 내 얼굴에 화장하며 중얼거린다.
나는 그게 ‘남자로서 너무 멋지다’라는 게 아니라 ‘실험체로서 너무 멋지다’라는 뜻이란 걸 금방 알아들었다.
왠지 시체 분장 같은 걸 좋아할 거 같다.
“좋아요. 다 됐어요.”
“감사합니다.”
“뭘요. 진선후 배우는 분장하는 보람이 있어서 좋아요.”
즉석에서 순식간에 화장을 다듬고 옷매무시를 고쳐준다.
나는 바로 다음 장면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여기서 허무한 표정으로 카메라 이쪽을 보면서 말이지.”
“예.”
감독님의 지도를 들으며 동선을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리허설을 하는 둥 마는 둥 얼른 끝마치고 바로 본 촬영으로 들어갔다.
다른 배우들에 비해 분량이 너무너무 밀려있으니 잠시도 낭비할 틈이 없었다.
배우가 바뀌었으니 나는 황진우의 모든 분량을 처음부터 전부 다시 찍어야 했으니까.
아버지 역인 강창재 배우와 촬영, 엄마와 촬영, 신지혜 배우와 촬영, 수아 씨와 촬영, 회사 직원들과 촬영…….
아무리 대본을 다 외우고 있어도 순서가 뒤죽박죽이니 눈이 핑핑 돌 정도였다.
“감독님! 우리 아들 쓰러지면 책임질 거에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림이 술술 잘 나오니까 재미있잖아.”
“그렇다고 첫날부터 이렇게 찍는 게 어딨어요!”
결국 엄마가 한바탕하고 나서야 겨우 오늘 촬영은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으윽. 지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드네.
연기를 제대로 하긴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배우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걸까.
나름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오늘 촬영이 비정상적인 거예요. 분량이 밀려있다고 한 사람만 이렇게 붙잡고 찍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수아 씨는 본인 촬영이 먼저 끝났는데도 의리있게 기다려주었다.
“수아 씨. 오늘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뭘요. 우리 사이에.”
계획에도 없던 오디션을 억지로 진행해 버리고, 거기에 뛰어들게끔 내 등을 밀어주고.
평소엔 얌전하면서 여차할 때 발휘되는 추진력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이렇게 연기하고 있는 데에는 수아 씨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지.
수아 씨에겐 대체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까.
“저, 그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오늘…….”
“오~ 진선후 배우님! 수고했어!”
내 어깨를 탁, 치며 친한 척하는 이 사람은 바로 여주인공인 신지혜 배우다.
뭔가 말하려던 수아 씨는 덕분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신지혜 배우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누나라고 부르라 했지?”
그러면서 이번엔 턱 하니 어깨동무를 하는 신지혜 배우.
이 사람은 너무 친화력이 높아서 무섭다.
인싸 그 자체다.
“네, 지혜 누나. 오늘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지? 그럼 오늘은 선후가 한 잔 살래?”
“아. 죄송합니다. 오늘은 집에서 가족들이 축하해준다고 해서. 다음에 살게요.”
엄마는 오늘 있었던 일을 벌써 누나와 미소에게도 알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가족이 다 모여서 축하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냥 한 번 던져 본 말이었을까.
의외로 신지혜 배우는 순순히 물러났다.
“수아 씨도 오늘은 안될 거 같아요.”
“네…….”
신지혜 배우가 끼어들면서 우물쭈물하고 있던 수아 씨.
내 말에 시무룩하게 수긍한다.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모른 척 해두자.
이 빚은 나중에라도 꼭 갚을게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나는 아직 남아있는 스태프들과 선배 배우들에게 일일이 돌며 인사했다.
나는 오늘 데뷔한 신인.
조금이라도 건방지다는 인상을 주는 건 금물이다.
나의 허물은 엄마의 허물이기도 하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배우 진선후로서의 첫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축하 파티
“선후 씨. 오늘은 어머니랑 같이 돌아가요.”
“네? 수아 씨는요?”
“저 원래 선후 씨가 운전해주기 전엔 직접 운전하고 다녔잖아요.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수아 씨의 배려는 기쁘게 받기로 했다.
오늘은 수아 씨의 매니저로 출근해서 배우로 퇴근하는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엄마 차에 탔다.
나와 엄마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운전은 오랫동안 엄마의 매니저로 일해온 낯익은 누나였다.
“세상에. 선후가 우리 소속사 배우가 되는 날이 다 오다니. 선후가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 몰랐어. 깜짝 놀랐지 뭐야.”
“잘 부탁드립니다, 매니저 누나.”
그러고 보면 엄마의 매니저도 제이업 소속이지.
이 누나랑도 같은 회사 소속이라고 생각하니 신기하네.
“자기도 우리 선후가 오디션 받는 걸 봤어야 한다니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어.”
“알았어요 알았어. 한 번만 더 들으면 열두 번째야.”
엄마가 어지간히도 자랑했는지, 매니저 누나는 질렸다는 듯 웃었다.
“선후야. 오늘 수고했어. 잠깐 눈이라도 붙여.”
“응…….”
엄마랑 대화라도 나누면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오늘 종일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풀리니 졸음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오디션부터 배우 계약과 실제 촬영까지.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였다.
“엄마…….”
엄마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엄마의 향기에 마음이 안정된다.
나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 *
“안녕히 가세요, 매니저 누나.”
“신혜 언니 안녕, 선후도 내일 봐.”
우리를 집까지 데려다준 매니저 누나가 가고, 엄마와 둘이서 엘리베이터를 올라간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은근히 말했다.
“엄마. 오늘 축하 끝나고 해도 돼?”
“……안 돼. 소영이 미소 다 있는데.”
엄마도 싫지 않은 눈치지만, 누나랑 미소가 둘 다 집에 있으니 역시 어려울까.
핑곗거리도 없이 이 밤중에 모자끼리 호텔에 가는 것도 이상하고.
어쩌지.
흠.
집 현관을 열고 들어오니 눈앞에서 폭죽이 터졌다.
펑! 퍼펑!
생일에 터뜨리는 작은 폭죽이었다.
“오빠! 배우 데뷔 축하해!”
“미소…… 너…….”
나는 미소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미소는 버니걸 차림이었다.
어깨와 쇄골이 다 드러나고, 풍부한 가슴이 유난히 강조되는.
거기에 하이레그 컷에 그물망 스타킹.
옆에 누나가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에 덮칠 뻔했다.
“상 받은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데뷔한 거로 호들갑은.”
“언니! 처음부터 주연이라는 건 대단한 거야! 초보자가 첫 타에 홀인원 넣은 거나 마찬가지라구!”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아니, 그보다 그 복장.”
“어머. 귀여워라.”
엄마도 미소의 복장을 보고 놀라긴 했지만, 반응은 그것뿐이었다.
귀여워?
너무 야하지 않아?
“예쁘지? 오빠 축하하는 의미에서 입어봤어!”
미소가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포즈를 취해 보인다.
겨드랑이가 훤하다. 옆 가슴도.
“아예 다 벗고 다녀라. 다 벗고 다녀.”
“집인데 뭐 어때?”
누나의 반응은 그나마 정상적이었다.
힐끔힐끔 미소를 훔쳐보는 나를 누나는 불만스럽게 째려보았다.
“야. 진선후. 너 너무 본다?”
누나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위협한다.
아니,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저기에 눈길이 안 끌리는 건 남자가 아닌데.
“오빠, 케이크랑 샴페인 사 놨어. 먹고 자.”
“응. 고마워.”
미소가 내 팔짱을 끼고 식탁으로 데려간다.
식탁에는 작은 생크림 케이크와 샴페인, 네 개의 잔이 놓여있었다.
“그럼, 우리 선후의 성공적인 데뷔를 기원하며, 건배.”
“건배!”
찌링.
엄마의 선창으로 네 개의 잔이 부딪친다.
“고맙습니다.”
……눈물 날 거 같다.
내가 무언가 해서 축하하는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기쁘다.
요즘은 누나가 우승하는 것도 당연해지고,
미소가 잘 나가는 것도 당연해지고,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별로 축하할 일이 없었다.
다들 바쁘기도 하고.
이렇게 오랜만에 가족이 다 같이 모여서 축하하고 축하받는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야. 진선후. 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 술을 못 마셔?”
“아니……. 그냥, 좀.”
건배만 하고 샴페인 잔을 내려놓는 나를 보고 누나가 찌른다.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친부가 술 냄새를 풍기며 때리던 기억이 남아있기도 하고.
나도 혹시 술에 취하면 본성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서.
술은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야. 너도 이제 사회인인데 술 한 잔 못 해서 되겠냐? 어차피 사회생활 하다 보면 먹을 수밖에 없을 텐데. 밖에서 잘못 먹고 사고 치지 말고, 집에서 먼저 마셔. 본인 주량은 알아야지.”
“누나 말이 맞아, 선후야. 본인이 얼마나 마셔야 취하는지는 알아놔야 해.”
“응…….”
누나와 엄마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무조건 뺀다고 안 마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강창재 배우처럼 연예계 어른이 주면 마실 수밖에 없을 텐데.
그때 처음 마시고 실수하는 것보단 미리 주량을 알아놓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음……그럼 딱 한 잔만.”
샴페인 도수는 14도였다.
이게 높은 건지 낮은 건지 모르겠다.
일단 한 모금.
달콤한 탄산음료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어때? 별거 아니지?”
“응……. 괜찮은 거 같아.”
음료수나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그대로 한 잔을 다 마신다.
꿀꺽꿀꺽.
“오~ 잘 마시는데? 어디, 이 누나 술도 한 잔 받아 봐라.”
“응? 응.”
정면에 앉은 누나가 내 잔을 채우고, 나는 누나 잔을 채웠다.
찌링.
“축하한다. 진선후.”
“……고마워, 누나.”
누나의 무뚝뚝한 말 한마디가 마음에 울린다.
기쁘다.
사람들이 축하할 때 왜 술을 마시는지 알 거 같았다.
“오빠! 내 잔도 받아.”
“어? 응.”
이번엔 옆자리의 미소가 내 잔을 채웠다.
“미소 넌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왜? 나도 이제 성인이야. 술 배워야지.”
엄마가 타이르지만 미소한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 술 취해서 이상한 남자 쫄래쫄래 따라가지 말고 미소도 주량 알아놔.”
“안 따라가거든? 언니 경험담 아니야?”
“이게.”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선후야, 엄마도 한 잔 따라줄래?”
“응.”
미소와 서로 잔을 비우고, 다음은 엄마 차례였다.
엄마와 내 잔을 채우자 샴페인 병은 딱 비었다.
“선후 오늘 너무 고생 많았고, 잘했고, 자랑스러웠어.”
“고맙습니다. 선배님.”
고개를 꾸벅 숙이자 엄마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엄마와도 서로 잔을 비운다.
이러면 몇 잔째지? 4잔인가?
“어때. 취하냐?”
누나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어. 누나 보기엔 취한 거 같아?”
“겉보기엔 멀쩡한데. 도수가 약해서 그런가?”
그러면서 누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외로 마셔도 별문제 없는 것 같다.
아직 취하질 않아서 그런 건지.
좀 더 마셔봐야 하나?
“오빠. 나 오늘 어때? 예뻐?”
미소가 내 팔에 가슴을 누르며 묻는다.
“응. 예뻐. 미소는 매일매일 예쁜데 오늘은 더 예뻐.”
어라?
지금 나 좀 이상하지 않나?
이제 취한 건가?
“예쁘다고 더 해줘.”
“예뻐. 미소 예뻐. 예쁘다 예뻐.”
미소가 기분 좋은 듯이 내 팔을 안고 머리를 기댄다.
개다래에 취한 고양이 같다.
엄마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