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256)

* * *

“대체 연기자 구해왔어요!”

수아 씨가 회의실 문을 벌컥 열며 목소리를 높였다.

회의실 안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거기에는 엄마, 제작진들, 배우들, 협찬 관계자들, 모르는 사람들 등등.

많은 이들이 모여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체 연기자 오디션 참가자 진선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신혜 씨 아들? 나이가 어떻게 되지?”

감독, 최태헌PD.

이 자리의 책임자였다.

한 번 인사를 드렸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네. 스물 한 살, 대학교 2학년, 만으로 열아홉 입니다.”

“진선후 씨. 이런 장난 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지 않아?”

살짝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역시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다.

그나마 책임자인 감독님은 본 척이라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수아 씨.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런 장난칠 때야?”

엄마는 수아 씨를 나무란다.

표적을 내가 아니라 수아 씨에게 옮기려는 거겠지.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이건 장난이 아니니까.

“선생님. 선후 씨 실력은 선생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어릴 때부터 계속 같이 연기해오셨으니까.”

“신혜 씨, 그랬어?”

원로 배우인 강창재 배우가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엄마의 시선은 수아 씨에게 고정돼 있었다.

“수아 씨. 무슨 생각으로 선후를 끌어들이는 건진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둬. 수아 씨 마음대로 선후를 쥐흔들지 말란 말이야.”

“엄마. 그런 거 아니야.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선후 넌 가만히 있어!”

엄마가 날카롭게 소리지른다.

그건 배우 임신혜이기 이전에 엄마로서의 혼신의 연기였다.

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나에게 비난이 쏠리기 전에 이 자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냉정한 임신혜를 연기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지금 나는 진심이니까.

“엄마.”

나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 황진우에 ‘빙의’한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이란 걸 알아도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미완성품, 황진우에.

날 쥐흔든 건 누구야?

엄마다.

내 인생은 엄마가 원하는 대로.

오직 엄마가 그린 그림대로 살게 했다.

선아와 내 사이를 갈라 놓고, 신아영과 결혼하게 하고.

그리고 나서도 잠시도 나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다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하면 뭐든지 해도 돼?

이제 나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제발 그만 좀 해. 나 좀 내버려 둬!

나는 엄마의 인형이 아니야.

나도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쿵.

회의실 안이 충격에 휩싸였다.

엄마는 말할 것도 없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는지 믿지 못하는 얼굴이다.

이 장면은 엄마와도 연습했었는데 엄마는 떠올리지 못 한 걸까.

잠시나마 엄마를 슬프게 한 건 나도 마음이 아프다.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연출’이다.

사과는 모든 게 끝난 뒤에, 둘만의 시간에 하자.

지금은 ‘대체 연기자 오디션 참가자 1번 진선후’ 연기를 계속해야 하니까.

“이건 11화에서 엄마 김영선의 잔소리에 황진우가 반항하는 장면입니다.”

“아.”

누군가 그 장면을 떠올렸는지 탄성을 흘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로 내가 엄마한테 대들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내가 감히 엄마한테 대들 리가 없잖아?

그 ‘연출’ 덕분에, 이번엔 제대로 나에게 주목이 모였다.

“다시 한번 자기소개 드리겠습니다. 진선후입니다.

급히 오디션에 참가하느라 서류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여기 계신 임신혜 배우님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제 신분은 임신혜 배우님께서 증명해주실 겁니다.”

엄마는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옆에서 강창재 배우가 뭔가 소곤소곤 이야기하지만 엄마는 대답하지 않는다.

엄마. 미안.

“이전에 출연한 작품은 없고, 오디션도 이번이 첫 도전입니다.

그러니 ‘임신혜 배우님’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엄마뿐만이 아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같은 의견이겠지.

전작이 없다. 실력이 증명되지 않았다.

이 긴급 오디션을 통과하기 위해 넘어야 할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이신 임신혜 배우님의 연기를 보며 연기자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어머니와 연기 연습을 해왔고, 이번 드라마에서는 황수아 배우님과도 함께 연습을 해왔습니다.”

“수아 선배랑도? 그냥 매니저 아니었어요?”

질문한 것은 신지혜 배우였다.

신지혜 배우는 젊지만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이다.

그녀 또한 발언권이 있는 중요한 면접관 중 하나였다.

“예. 연기자가 되기 전에 현장을 배우라며 황수아 배우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랬구나. 어쩐지 안 쓰던 매니저를 데려왔더라니. 난 또, 수아 선배 애인인 줄 알았네.”

신지혜 배우의 농담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신지혜 배우와 비슷하게 생각한 사람도 많았던 거 같다.

자리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다.

거짓말이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은 나와 수아 씨뿐이다.

진실을 아는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

“그렇게 전 임신혜 배우님과 황수아 배우님, 두 분과 연기 연습을 하면서 이번 드라마의 대본도 전부 외웠습니다. 지금 당장 촬영에 들어가더라도 바로 연기할 수 있습니다.”

한 남성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제작지원의 김영웅입니다. 대본을 전부 외우고 있다는 건 정말입니까?”

“네. 궁금하시면 시험해보셔도 됩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수정이 역을 맡은 아역배우, 나승희였다.

“아빠! 어제 학교에서 그림그렸는데! 집에 가서 같이 볼래?”

갑자기 연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됐다.

입으론 백날 떠들어봤자니까.

“수정아. 아빠 운전 중이잖아. 운전 중에 말 시키지 말랬지.”

장면은 자동차 안.

나 황진우는 의무감에서 가족과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오랜만의 외출에 수정이는 신이 났지만, 엄마 아빠는 내내 굳은 표정.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수정이는 일부러 더 활달하게 이야기한다.

“응? 아빠~ 선생님도 칭찬해줬단 말이야. 내가 우리 반에서 제일 잘 그렸다고. 아빠도 보면 깜짝 놀랄걸?”

“엄마랑 봐. 아빠 피곤해.”

하지만 귀여운 딸의 애교에도 황진우는 귀찮을 뿐이다.

“피. 아빤 맨날 피곤하대.”

여기서 아내 신아영(황수아)도 대화에 참여한다.

“여보. 그러지 말고 수정이랑 같이 좀 봐.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수정이 상대는 당신이 좀 해. 난 바로 나갈 거야. 일 있어.”

“무슨 일? 또 그 여자야?”

“일이라고 했잖아!”

수정이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쳐다본다.

차 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진다.

거기서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수정이.

“……아~기 상어 뚜루루뚜루~.”

수정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차에서 같이 부르던 노래다.

“귀여운~ 바닷속~ 아기 상어~.”

이 노래를 부르면 아빠는 ‘아빠 상어’를.

엄마는 ‘엄마 상어’를 연기하며 같이 부른다.

사이 좋게 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웃었다.

수정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행복했던 가족의 기억이다.

그러니까 엄마도 아빠도, 이 노래를 부르면 그때를 떠올릴 거라고.

싸움을 그만두고 같이 노래를 불러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이 노래를 불렀다.

“…….”

하지만 아빠도 엄마도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리고 서로를 보지도 않는다.

수정이의 노래도 들리지 않는 척을 한다.

“……엄마~ 상어~ 어여쁜~ 바닷속~ 엄마 상어~.”

견디지 못하고 수정이가 뒷부분을 이어서 부르지만 

수정이의 목소리에 아까 같은 쾌활함은 없었다.

“아빠~ 상어~ 힘이…… 바닷속……으흑.”

그 노래는 점점 울먹임으로 변해, 결국 수정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으아앙~.”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우는 수정이.

하지만 아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운전에만 신경 쓴다.

엄마도 반대쪽 창문 밖만 보고 있다.

울고 있는 딸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으앙! 허엉! 어엉!”

회의실 안에는 수정이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얘, 승희야, 나가자. 죄송합니다.”

그런 승희를 보다 못해 승희 엄마가 안고 나간다.

승희의 울음소리가 멀어진다.

승희가 나가고 나자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도,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승희의 눈물 연기가 여기 있는 모두의 혼을 빼놓았다.

나승희. 무서운 아이.

“저도 해봐도 돼요?”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여기에 한 명 있었다.

신지혜 배우였다.

“예. 부탁드립니다.”

오디션 참가번호 1번 진선후 2 

“진우 씨, 그때 기억나요?”

“그때 언제?”

“왜, 예전에 여기 같이 왔었잖아요.”

물론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내가 아직도 선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쿨한 척, 도도한 척.

그러면서도 스윗할 땐 한없이 스윗한 남자.

그게 선아와 함께 있을 때의 나, 황진우니까.

“그때가 내 첫 키스였는데. 여자에겐 잊을 수 없는 첫 남자라도, 남자에겐 그저 지나간 여자일 뿐이라는 게 정말인가 봐요.”

“선아야.”

선아의 쓸쓸한 얼굴이 마음에 걸린다.

그런 표정 짓게 하고 싶진 않았다.

혹시 선아는, 아직도 날…….

선아의 두 팔을 잡는다.

“우리 다시 시작할 순 없을까? 많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난 아직도 선아 네가.”

“그만둬요, 진우 씨. 안 되는 거 알잖아요. 아니면 진우 씬 다 버리고 나한테 올 수 있어요?”

다 버리고.

아내도 딸도, 부모님도 회사도.

다 버리고 오라고.

나는 할 수 있을까?

모든 걸 버리고 선아를 선택할 수 있을까?

나는 선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현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선아를 버리고 현실을 선택하는 나를, 선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못 하잖아요. 못 하면서 왜 이래요. 왜 사랑하는 척해요.”

나를 밀어내는 선아의 눈에는 애증이 넘친다.

“당신 같은 남자, 정말, 싫어.”

나를 비난하는 말과는 달리.

선아는 나에게 키스했다.

그 달콤하고, 안타까운 키스는,

선아와의 첫 키스를 떠올리기도 전에,

나에게서 멀어졌다.

“우리 이제 여기까지 해요. 안녕.”

눈물지으며 돌아서는 선아를

나는 잡을 수 없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