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56)

위기를 기회로 

수아 씨와는 그날 이후로도 나름 절도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직 키스와 애무뿐.

그것도 수아 씨의 집에 둘만 있을 때 한정이다.

밖에서는 배우와 매니저라는 관계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그날의 수아 씨는 몹시 저돌적이었지만, 그날 이후로는 원래의 청순한 여배우로 돌아왔다.

풋풋하고 순진한 수아 씨로.

지금은 손만 잡아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다.

그날은 어떻게 알몸으로 돌진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수아 씨와의 관계를 급하게 진행시키고 싶지 않다.

수아 씨는 내 마음의 청량제다.

부디 그 청순함을 오래오래 지켜줬으면 한다.

“선후 씨. 그 인간 아직도 연락 안 된대요.”

아침, 차 안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수아 씨가 말한다.

“그 인간? 주정환 배우요?”

“배우는 무슨. 그 인간은 배우라고 불릴 자격도 없어요.”

이번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주정환 배우.

오늘까지 펑크면 벌써 3일째였다.

덕분에 다른 배우나 제작진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방송이 3주도 안 남았는데. 이제 와서 주연 바꾸는 거 아닌가 몰라.”

“설마요. 돌아오겠죠.”

“돌아와도 사절이에요.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날 나와 싸우고 나서 벌써 3일째 연락이 안 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단순 펑크가 아니라 실종이 아닐까.

“소속사에서는 뭐래요?”

“찾고 있다고 그러죠. 정말 찾고는 있는 건지 원.”

무책임한 태도에 수아 씨도 드물게 화를 냈다.

엄마도 집에서 불평할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리.

대체 그 사람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용서해줄 테니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내가 용서해도 다른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수아 씨한테도 엄마한테도 중요한 드라마인데.

이렇게 망치는 건 진짜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기자님들, 회의실로 모여주세요.”

“또 회의야. 선후 씨는 잠깐 기다려요.”

방송국에서.

수아 씨는 투덜대면서 회의실로 향했다.

수아 씨뿐만이 아니다. 

촬영장에 있는 모든 이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배우도 스탭도.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분량은 밀려있는데 주연 배우가 없으니 진도가 안 나간다.

개인 분량을 당겨 찍는 것도 이제 한계였다.

덕분에 이번 사태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나는 좌불안석.

아무리 내 탓이 아니란 말을 들어도 마음이 완전히 개진 않았다.

“저, 커피 드세요.”

“네? 아, 고맙습니다.”

문득 눈앞에 종이컵이 있었다.

인사하고 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 그때.”

세트장 소품 옮길 때 도와줬었던.

그리고 주정환 배우한테 커피를 던지기도 했던 어린 알바생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그때 괜한 짓을 해서.”

시무룩하게 사과하는 알바생.

“아니요. 그땐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로.”

만약 그 커피가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지.

“그래도 저 때문에 안 나오시는 거 같아서.”

“그럴 리가.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인 거지. 자책할 필요 없어요.”

알바생은 왠지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나 때문에 안 나오는 거 같아서 괜히 자책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도 내가 들은 위로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꼴 보긴 싫지만.”

“그러게요. 꼴 보긴 싫지만.”

나와 알바생은 마주 보고 웃었다.

왠지 남 같지 않게 친근했다.

그런 일을 겪어서 그런가?

“저는 진선후라고 해요. 황수아 배우 매니저로 왔어요.”

“아, 네, 저는, 세트장 알바로 온 김선하입니다. 고3이에요.”

알바생이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했다.

모자를 벗자 안에 숨어있던 긴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졌다.

“학생이었구나. 어쩐지 되게 어려 보이더라.”

“저, 오빠는 몇 살이세요? 아 맞다.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스물하나예요. 편한 대로 불러요. 그럼 나는 어, 뭐라고 부르지?”

“편하게 선하라고 부르세요.”

“아, 응. 잘 부탁해, 선하 씨.”

“씨는 빼구요. 저 막내라서 아무도 그렇게 안 불러요.”

“응. 그럼 잘 부탁해. 선하야.”

“네. 선후 오빠.”

배시시 웃는 얼굴이 귀엽다.

다행이다. 친해질 수 있어서.

역시 사람은 공통의 적이 있으면 뭉치기 편하구나.

“근데 고3이 이런 알바 해도 돼? 너무 늦게까지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네. 전 생계형이라 괜찮아요.”

윽. 그랬구나.

그런 민감한 얘긴 건드리고 싶지 않은데.

본인이 신경 안 쓰는데 남이 신경 쓰는 건 안 되겠지.

나도 되도록 모른 척해야지.

“세트장 알바는 시급은 적어도 시간이 길어서 벌이가 좋거든요. 쉬는 시간도 길고. 좋아하는 연예인도 볼 수 있고.”

“그랬구나. 연예인 누구?”

“원래는 주정환 좋아했는데, 지금은 제일 싫어졌어요. 이제 바꾸려구요.”

“그, 그래. 바꾸는 게 좋겠지.”

그 좋아했던 연예인 뒤통수에 커피를 던지다니.

요즘 애들은 무섭네.

“선후 씨!”

선하랑 잡담하고 있자니 수아 씨가 급하게 불렀다.

의외로 회의가 빨리 끝났네.

“아. 미안.”

“아니에요. 가보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선하를 두고 수아 씨에게 달려갔다.

“선후 씨, 빨리요! 큰일 났어요!”

“예? 왜요?”

“뉴스 봐요, 뉴스!”

수아 씨가 내 얼굴에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거기에는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거로 유명한 언론사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단독] 유명 배우 주정환, 200억대 사기 혐의로 피소’ 

이게 뭐야? 주정환?

“200억?!”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코인 투자인가 뭔가 한다고 주변인들 돈 다 끌어다 갖다 박았대요. 그래놓고 잠적한 거라고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나는 눈을 끔벅이며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주정환이 사기 혐의로 피소됐다.

현재 밝혀진 피해자만 30명 이상.

피해 금액은 200억 이상.

내연 관계에 있던 여성과 가족, 친척, 동료 배우, 소속사 직원 등.

피해자와 피해 금액은 더 늘어날 수도 있어.

본인은 연락 두절 상태.

소속사에서는 아직 공식 발표 없어.

주정환 본인도 100억 가까이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 300억.”

머리가 핑 도는 금액이다.

그 돈을 모은 것도 대단하지만, 전부 코인에 넣어서 날리다니.

믿고 투자한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해?

“혹시 수아 씨는 안 했죠?”

“제가 그런 걸 왜 해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다행이다.

엄마는? 안 했겠지?

별로 사이 안 좋았으니까.

아니, 그보다 촬영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 사람 계속 찍을 수는 있는 거야?

“바꿀 거 같아요. 저런 사람을 썼다고 하면 방송 시작도 하기 전에 망하겠죠. 민심 떡락하기 전에 바꾸면 그래도 살릴 수는 있어요.”

아직 재판 결과는 안 나왔어도, 본인이 잠적한 걸 보면 확실한 거겠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악재도 이런 악재가 없었다.

“그럼 황진우 역은 누가 해요?”

“안 그래도 그거 땜에 지금 회의 중이에요. 회의 해봤자 뾰족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아!”

수아 씨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한 얼굴로 나를 본다.

유레카! 라고 외칠 것 같다.

“왜 그래요?”

“선후 씨가 해요!”

“예? 뭘요?”

“대체 배우요!”

마치 굉장히 좋은 생각이라는 것처럼 말하는 수아 씨.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연기자도 아닌데 제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일단! 와 봐요!”

요즘 수아 씨의 성격에 대해 알아낸 게 있다.

평소엔 얌전한데, 필 받으면 저돌맹진.

이거다 싶은 일엔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든다는 거다.

“수아 씨. 잠깐만요. 진짜.”

“되든 안 되든 일단 해보자구요. 어차피 땜빵 배운데 누가 들어와도 선후 씨보다 나을 수가 없다니까요. 선후 씨 연기력은 저랑 임신혜 선생님이 보증하는 거니까. 최고 여배우 두 사람이 보증한다는데 오디션 조건으로는 충분하지 않나요? 감독님도 작가님도 다른 배우들도 척 보면 다 알 거예요.”

“진정해요, 수아 씨. 이런 일로 다른 사람들 시간 뺏으면 안 돼요. 다들 날카로워져 있는데.”

“끄으응~~!”

수아 씨는 낑낑대며 억지로 내 팔을 잡아당기지만, 그런다고 끌려가 줄 수는 없었다.

이런 큰 드라마 주연으로 경력도 없는 신인을 쓴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분위기 안 좋은데 나섰다가 괜히 불똥 튈지도 모르니까.

저번 주정환 배우……아니, 주정환 그 인간과 싸웠던 때처럼.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인간도 날카로워져 있었던 거겠지.

코인 투자 실패로 본인 돈에 주변 사람들 돈까지 다 꼬라박았으니.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지랄할 만하다.

거기서 내가 때렸으면 합의금 명목으로 엄마한테서 돈 뜯어낼 생각이었어?

어휴. 병신.

그리고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날카로워져 있는 상황인 거다.

괜히 쓸데없는 행동으로 기름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다.

“선후 씨. 사람 인생에 기회는 3번 온다고 했어요. 알아요?”

수아 씨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끌려오지 않자 수아 씨는 말로 설득하기로 작전을 바꾼 것 같다.

“2번의 기회는 이미 모르는 사이에 지나갔고, 선후 씨한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선후 씨 장래희망이 뭔지는 몰라도 이번 기회 놓치면 영영 못 이룰지도 모른다구요.”

마지막 기회.

장래희망.

수아 씨의 말이 내 가슴을 두드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엄마의 얼굴이다.

내 장래희망, 내 소원은 엄마와 가정을 꾸리는 것.

엄마와 아들로서의 가정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로서, 부부로서의 가정이다.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

그건 사회초년생이 몇 년 일한다고 해서 벌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그리고 시간제한도 있다.

엄마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 기한의 끝이 언제 올지도 모른다.

짧은 기간에 큰돈을 벌어야 한다.

망해서 잠적한 주정환처럼 코인 투자라도 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코인도 초기자금은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수아 씨 말대로.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수아 씨. 저 도와주실 수 있어요?”

“네!!”

수아 씨는 기쁘게 대답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 했다.

나에게 연기만큼 쉬운 일은 없으니까.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였으니까.

되든 안 되든.

욕이야 먹든 말든.

나는 도전해보기로 했다.

오디션 참가번호 1번 진선후 

내 인생은 연기의 연속이었다.

울어도 용서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어린 시절부터.

행동 하나, 표정하나,

목소리, 말투, 시선, 숨소리까지.

내 인생 모든 것이 연기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착한 아들로.

말 잘 듣는 남동생으로.

좋은 오빠로.

불쌍한 학대 아동으로, 아픈 환자로, 귀여운 학생으로, 좋은 이웃 주민으로.

매력적인 남자로.

한 순간도 연기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내 안에 아예 없는 부분을 끄집어낼 수는 없다.

착한 아들을 연기하기 위해선 나에게 조금이라도 착한 아들인 부분이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연기라고 해서 모든 것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진실에 약간의 거짓을 더하는 것.

상대가 바라는 모습을 극대화시켜서 보여주는 것.

그게 나의 연기였다.

세상 모든 사람이 연기를 하며 산다.

나는 그 정도가 좀 심했을 뿐.

살아남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나는 연기해왔다.

나에게 연기만큼 쉬운 일은 없다.

숨 쉬듯이 연기를 해왔으니까.

지금은 발작을 일으킨 척, 기절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뭐가 연기고 뭐가 진짜인지 나 자신도 모를 정도로.

인생이 연기고 연기가 인생인 내가 되어 버렸다.

엄마를 사랑하는 내가 진짜인지 연기인지.

아니면 모든 게 연기였다고 망상하는 정신병인지.

아무것도 모르게 됐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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