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256)

애인 계약 

낯선 방이었다.

순간 불안해졌지만, 곧 여기가 수아 씨 집이란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자기 전에 했던 행위를 떠올린다.

나와 수아 씨는 손으로 서로를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건드리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결국 나는 또 욕망에 지고 말았다.

침대 옆에 수아 씨는 없었다.

내 옷은 왠지 전부 벗겨져 있고, 완전 알몸으로 자고 있었다.

몸은 물수건으로 닦은 것처럼 깨끗했다.

내 옷은 어디 있지?

방안을 둘러봐도 눈에 보이는 곳에는 없었다.

옷장이라도 뒤져봐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옷장을 뒤지는 대신 수아 씨를 찾기로 했다.

이불을 로브처럼 뒤집어쓰고 방을 나왔다.

“아. 일어났어요, 선후 씨?”

“……수아 씨.”

수아 씨는 주방에 있었다.

날씬한 등과 귀여운 엉덩이가 보인다.

알몸에 앞치마.

남자의 판타지를 체현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저런 건 어디서 배운 걸까.

“밥 이제 거의 다 됐어요. 식탁에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요.”

식사 준비 중인 걸까.

된장찌개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지난번에 먹었을 땐 맛있었지.

수아 씨는 의외로 요리가 능숙했다.

“수아 씨, 제 옷은.”

“구겨져서 스타일러 돌리고 있어요. 식사하고 드릴게요.”

수아 씨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식탁에 앉았다.

옷도 없는 상태에서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식탁 위에 밥과 찌개, 반찬이 차례차례 놓인다.

그릇을 놓느라 수아 씨가 몸을 숙일 때마다 앞치마 안으로 속살이 힐끔힐끔 보인다.

“선후 씨가 좋아한다는 반찬으로 준비해봤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식탁에 소시지가 올라와 있는 걸 보면 정보의 출처는 엄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하다.

수아 씨는 상상이나 하고 있을까?

내가 말한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라는 걸.

“드세요, 선후 씨. 차린 건 없지만.”

“……수아 씨, 옷은.”

“집안인데 어때요.”

그러면서 수아 씨는 하나뿐인 앞치마마저 벗어 의자에 걸어두었다.

세상에.

“그러는 선후 씨야말로 밥 먹는데 이불은 좀 벗어요. 잠꾸러기라니까 정말.”

나는 방에서 나올 때부터 계속 이불을 뒤집어쓴 채였다.

옷은 압수당하고, 팬티 한 장 안 걸치고 남의 집을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얼른요!”

“알겠습니다!”

안 벗으면 뺏으러 달려들 태세였다.

어차피 볼 장 다 본 사인데.

이제 와서 가려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순순히 벗어 옆 의자에 걸쳐두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수아 씨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서로 알몸으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어때요? 입맛에 맞아요?”

“……읍, 네, 콜록!”

“어머. 어떡해.”

“콜록! 콜록!”

……정말 밥이 코로 들어가 버렸다.

실컷 차려놓은 음식에 뱉을까 봐 참았더니, 사레가 더 심하게 들려버렸다.

음식에 튀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지만…….

“선후 씨, 괜찮아요? 여기 물이요.”

“아, 네, 콜록! 감사…… 콜록콜록!”

한참을 기침한 후.

수아 씨가 열심히 등을 두드려준 덕분에 사레는 겨우 진정됐다.

휴. 죽는 줄 알았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눈앞에 수아 씨의 나체가 있다는 것.

봉긋한 가슴이, 핑크색 유두가, 잘록한 허리에 귀여운 배꼽이.

그리고 그 아래에는…….

“선후 씨. 이제 좀 괜찮아요?”

“……네.”

방심한 틈에 거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는 목이 베여도 할 말이 없었다.

“아.”

내 눈앞에 수아 씨의 나체가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수아 씨의 눈앞에 내 나체가 있다는 것.

“죄송해요 선후 씨. 전 그런 줄도 모르고.”

부디 모른 척해주길 바랐다.

남자의 징그러운 본성 따위.

하지만 수아 씨는 정면에서 돌격해왔다.

“이러면 식사하시기도 힘드시겠죠. 자기 전에 했던 대로 해드리면 될까요?”

“아, 아니요. 모른 척하셔도 됩니다.”

제발 모른 척 넘어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수아 씨는 잔인한 여자였다.

“어떻게 그래요. 선후 씨는 식사하고 계세요. 이쪽은 제가.”

“아니요, 정말로.”

“한 번 해봐서 이번엔 더 잘할 수 있어요. 맡겨두세요.”

수아 씨는 식탁 아래로 들어갔다.

식탁 아래에 무릎 꿇고 앉아, 내 자지를 애무하기 시작한다.

“수, 수아 씨.”

“다 먹을 때까지 안 놔줄 거예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알몸으로 밥 먹는 것도 이상한데, 이런 서비스까지.

“천천히 드세요. 선후 씨.”

“웃.”

다 먹기 전엔 안 놔준단 말에 허겁지겁 밥을 퍼먹는다.

하지만 밥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밥이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반찬이 입맛에 맞으세요?”

“네, 맛, 있습니다.”

솔직히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모든 감각은 다리 사이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다, 먹었습니다!”

“벌써요?”

“네! 그러니까 이제 놔주세요.”

“싫어요.”

윽.

“……다 먹으면 놔준다면서요.”

“다 먹기 전엔 안 놔준다고 했지, 다 먹으면 놔준다고는 안 했어요.”

그런가!!

아니, 그런 건 그냥 말장난이잖아.

“수, 수아 씨.”

“낼 때까지 안 놔줄 거예요.”

아.

모르겠다.

그냥 받아들이자.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지친다.

저 황수아가 손으로 해주는 걸 언제 또 받아보겠어.

나는 이제 자포자기였다.

“선후 씨, 어때요? 기분 좋아요?”

“네…… 기분 좋습니다.”

“좀 더 세게 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요, 이대로…….”

조금이라도 나를 기분 좋게 해주고 싶은 수아 씨의 마음은 잘 안다.

나도 겪어봤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고픈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을 이용해선 안 된다.

솔직히 이런 짓이나 저런 짓도 시켜보고 싶다.

하지만 이 이상 바라선 안 된다.

그 사랑을 보답해줄 수 없다면.

“윽. 수아 씨, 이제 나올 거 같아요.”

“저, 정말요? 어떻게 하죠?”

내 말에 오히려 허둥대는 수아 씨.

“수아 씨의…… 얼굴에 뿌려도 될까요?”

“제 얼굴에요? 네!”

내 요구에 놀라면서도, 수아 씨는 기쁘게 받아들여 주었다.

이 이상 바라선 안 된다고 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란 인간은…….

수아 씨는 눈을 감고 얼굴을 내민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순순히 내어주는 모습은 어째서 이렇게 마음에 울리는지.

“윽!”

거기에 나는 더러운 정액을 뿌린다.

아름다운 것을 더럽히고 싶다는 욕망.

내 소심한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수아 씨의 얼굴을 더럽힌다.

얼굴에 닿는 낯선 감촉에 수아 씨는 흠칫 놀라지만, 피하지 않는다.

계속 그렇게 얼굴을 대주고 있었다.

사정이 다 끝나고 보면 수아 씨 얼굴에 정액이 묻은 곳보다 안 묻은 곳이 더 적었다.

얼굴이 작아서 그런 걸까.

“끝났나요?”

“……네. 고맙습니다.”

“뭘요.”

수아 씨가 눈을 뜨고 깜빡인다.

눈꺼풀 위쪽에 정액이 묻어 있어서 신경 쓰이는 거겠지.

“저, 눈에 들어가면 안 좋으니까 얼른 닦는 게 좋아요.”

뿌려놓은 본인이 할 말은 아니지만.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선후 씨, 얼굴에는 왜 뿌리는 거예요? 이건 자궁에 들어가야 아이가 생기는 거 아니에요?”

너무나도 순수한 의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건 그…… 내 거라는 표시? 동물이 영역 표시하듯이…… 남자의 본능 같은 게 아닐까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왠지 그런 거 아닐까.

내가 이상한 걸지도 모르지만.

“그럼 전 이제 선후 씨 건가요?”

“아…… 그건…….”

기쁜 듯이 묻는 수아 씨에게 돌려줄 말이 없었다.

……아니. 말해야 했다.

“수아 씨.”

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수아 씨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수아 씨와 눈높이를 맞춘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할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진지한 태도에 수아 씨도 긴장한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얼굴에 정액을 뿌린 직후에 남자가 할 말이 아니다.

“……네.”

수아 씨는 벌써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수아 씨가 저를 아무리 사랑해주셔도……저는 돌려줄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그럼! 그럼 저 혼자 사랑하면 안 되나요? 선후 씨는 돌려주지 않으셔도 돼요. 저 혼자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도 안 되나요?”

마음이 아프다.

나도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일까.

상대에게 거절당한다 해도 쉽게 포기할 순 없겠지.

같은 상황이면 나도 수아 씨처럼 매달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사랑은 수아 씨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나는 수아 씨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수아 씨 같은 사람은 행복해져야 한다.

진심으로.

“십 분의 일, 백 분의 일만이라도 좋아요. 선후 씨가 저한테 질릴 때까지만이라도 좋아요. 그분에게 줄 사랑을 저에게 조금만 나눠줄 순 없나요? 선후 씨가 사랑한다는 그분은 그것조차 용납해주시지 않나요?”

엄마라면 용납한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환영하겠지. 나보다 수아 씨를 더 사랑해주라고 말할 것이다.

“그, 건…… 그런 건 수아 씨만 불행해질 뿐이에요.”

그 사실이 내 말투에 망설임을 만들고 말았다.

“전혀요! 저에게 불행은 선후 씨에게 버려지는 거예요!”

어째서 수아 씨는 이렇게까지 나를.

“저는 선후 씨에게 버려지면 살아갈 수 없어요.”

나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수아 씨에게 사랑받는 걸까.

수아 씨의 그런 성실한 사랑은 받을 자격도 없는데.

너무나도 올곧은 수아 씨의 사랑이 너무 눈부셔서 나는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수아 씨.”

“네, 선후 씨!”

수아 씨의 눈은 기대로 가득했다.

거절해야 한다.

포기하게 만들어야 했다.

“저는 이미 마음에 둔 여성이 셋이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받아들인다면 어떡하지?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 어떡할 거지, 진선후?

“수아 씨는 아무리 잘해도 네 번째 이후가 됩니다. 수아 씨만을 사랑해줄 수도 없고,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나눈 뒤에 남는 시간에만 겨우 상대해줄 수 있습니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그런 취급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네!”

수아 씨의 얼굴에 기쁨이 터져 나온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는 건가요, 수아 씨.

“네 번째든 다섯 번째든 좋아요. 질릴 때만 가끔씩 상대해주셔도 좋아요. 선후 씨 곁에만 있게 해준다면.”

아.

어째서 수아 씨는.

이런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부탁드릴게요, 선후 씨!”

어째서 이렇게 좋은 여자가.

이런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속아서.

몸도 마음도 망치고 마는 걸까.

“……알겠, 습니다. 그럼 수아 씨와 저는…… 앞으로 그런 관계라는 걸로.”

“네! 고맙습니다! 선후 씨!”

수아 씨는 울 정도로 기뻐했다.

수아 씨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내 안의 천사는 울었다.

내 안의 악마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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