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 씨와 데이트2
“아하하! 선후 씨, 방금 정말 영화 같지 않았어요?”
“뭐가요? 수아 씨가요?”
내 눈에 수아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같았는데.
“선후 씨가 제 손 잡고 뛸 때요!”
“아…….”
바닷가에서 수아 씨가 ‘엄마 아빠 미안해~’ 하면서 소리친 직후.
주위 사람들은 황수아 배우를 알아보고 웅성웅성 몰려왔다.
상황을 판단한 나는 곧장 수아 씨 손을 잡고 차로 도망쳤다.
만에 하나라도 불상사가 생겨선 안 되니까.
“꼭 영화 보디가드에서 케빈 코스트너랑 휘트니 휴스턴 같았어요! 그렇게 두근거린 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보디가드?
또 그런 옛날 영화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잖아?
지난번 로마의 휴일도 그렇고, 이런 게 세대 차이인가?
“보디가드 모르세요? 엔다~ 이야~ 하는 거요!”
“하하하.”
휘트니 휴스턴에 빙의되어 어설프게 노래하는 수아 씨를 보고 나는 웃어버렸다.
영화는 본 적 없지만 노래는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았다.
수아 씨와의 바다 데이트는 그렇게 금방 끝났다.
차 안에서 빵과 커피로 브런치를 때우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휘트니 휴스턴이~.”
돌아가는 길에도 수아 씨의 보디가드 이야기는 계속됐다.
협박 편지를 받고도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휘트니 휴스턴과 그런 휘트니가 불안한 케빈이 티격태격하는 부분부터 시작해서.
위기에 빠진 휘트니를 케빈이 멋지게 구해내면서 사랑에 빠지고.
하지만 호위 대상자와 사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으려는 케빈과 휘트니의 갈등.
휘트니에게 쏜 저격총을 케빈이 대신 맞기까지 하지만, 결국엔 각자의 길을 걷는 결말까지.
나는 영화 한 편을 다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모의 여자 가수와 남자 경호원의 사랑 이야기라.
로마의 휴일 때도 그랬지만, 확실히 우리 관계와 전혀 통하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공주와 신문기자, 팝스타와 보디가드.
여배우와 매니저도 그와 비슷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주역 남녀가 이어지지 않는단 말이지.
아마 우리도 마찬가지일 테고.
“고마워요. 선후 씨. 덕분에 마음이 후련해졌어요.”
아파트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길.
수아 씨는 둘만의 엘리베이터에서 살포시 내 손을 잡았다.
수아 씨의 손은 따뜻하다.
손을 통해 수아 씨의 체온과 긴장감이 전해져온다.
수아 씨가 가벼운 마음으로 이 손을 잡은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손을 뿌리쳐야 했다.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수아 씨.”
“선후 씨, 피곤하면 우리 집에서 한숨 자고 갈래요?”
우리 집이 바로 옆집인데, 굳이?
하지만 그게 정말 잠만 자고 가라는 말이 아니라는 건 새빨개진 수아 씨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어제 라면 먹고 가라는 말도 그런 뜻이었는지 모른다.
수아 씨가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 마음을 아는 만큼,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 권유를 받을 수는 없었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끊어내야 했다.
결정해라. 진선후.
“……수아 씨. 미안합니다. 착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에? 뭐가요?”
갑자기 사과하는 나에게 의아하게 되묻는 수아 씨.
나는 내 손을 잡은 수아 씨의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 건 수아 씨가 아닙니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건 아니지만, 그분과는 이미 남녀로서 깊은 사이입니다.”
거절당할 거라곤 추호도 생각 못 했던 거겠지.
수아 씨는 충격받은 듯 띄엄띄엄 말을 흐렸다.
“아…… 저, 는 그냥…… 피곤하실 거, 같아서…….”
“제가 우유부단한 탓에 미리 말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난 그냥…… 별로, 거기에 깊은 뜻이 있었던 건…….”
그 예쁜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뚝뚝 눈물을 흘리는 수아 씨를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배우 황수아의 눈물 연기가 아니었다.
인간 황수아의 진짜 눈물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저 사과밖에 할 수 없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수아 씨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달려나갔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선 채 수아 씨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
……죄송합니다. 수아 씨.
…….
……얼레?
집 현관문 앞까지 갔던 수아 씨가 다시 달려서 엘리베이터로 돌아왔다.
닫히려던 엘리베이터 문에 수아 씨가 다리를 뻗는다.
양쪽 문 사이에 수아 씨의 다리가 끼였다.
“왓!”
나는 얼른 그 문 사이에 팔을 끼워 넣어 억지로 문을 열었다.
“수아 씨!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수아 씨는 대답 대신 내 넥타이를 확 잡아당겼다.
그리고 울분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자고! 가요!”
* * *
수아 씨한테 이런 강제적인 면이 있을 줄이야.
나는 수아 씨에게 넥타이를 잡혀 집까지 끌려 왔다.
작은 몸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나는 흥분한 수아 씨가 다칠까 봐 강하게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 수아 씨, 일단 진정하시고.”
“진정하고 있거든요?”
전혀 진정하고 있지 않다.
“수아 씨. 이러지 말고 침착하게 대화를.”
“침착하고 있거든요?”
마구잡이로 끌려간 나는 현관에 허둥지둥 신발을 벗어놓고 집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수아 씨 방으로.
처음 봤을 땐 빈방에 이불만 깔려 있었지만, 지금은 침대와 탁자, 장식품이나 화장품 같은 것도 잔뜩 있었다.
그런 수아 씨 방에 들어와, 수아 씨는 나를 그대로 침대에 내동댕이.
……내동댕이치려 했지만, 가녀린 수아 씨가 성인 남성을 쉽게 넘어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어정쩡하게 침대에 앉아 수아 씨와 마주 보았다.
눈가는 눈물로 얼룩지고 표정에도 화가 가득하다.
그런데도 아름답다고 느낀다.
치사하네.
“수아 씨.”
“남녀 관계에 있으면서, 아직 사귀지는 않는다고 그랬죠?”
수아 씨는 씩씩대며 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정장 재킷을 벗어 던지고, 이어서 블라우스 단추도 푼다.
“수아 씨.”
“그럼, 저와도 남녀 관계가 되면.”
블라우스도 벗어 던진다.
청순한 하얀색 브래지어.
그리고 거기에 가려진 가슴이 드러난다.
수아 씨처럼 다소곳한 가슴이었다.
“그럼, 저도 똑같은 거잖아요?”
“수아 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아 씨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움찔.
욱해서 저지르긴 했지만, 뒷일까진 생각하지 못했겠지.
화난 표정 안에 작은 두려움이 떠오른다.
“……옷, 입어주세요.”
나는 바닥에 떨어진 블라우스를 주워 수아 씨에게 내밀었다.
“싫어요!”
그런 내 태도에 오기라도 생긴 걸까.
수아 씨는 욱한 표정으로 내가 내민 블라우스를 내팽개쳤다.
살짝 고개를 내밀었던 작은 두려움마저 울분에 눌려버렸다.
수아 씨는 등 뒤로 팔을 돌려 브래지어까지 벗으려 한다.
나는 탄식하며 수아 씨에게 다가섰다.
“수아 씨.”
수아 씨를 안는다.
최대한 피부의 접촉 면적을 줄이도록 노력하면서,
브라 훅을 풀려던 손을 등 뒤에서 잡는다.
“이러면 수아 씨만 상처받아요. 수아 씨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수아 씨는 좋아한다.
예쁘고, 착하고, 순수하고.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고.
엄마가 골라준 며느릿감이니, 최고의 신붓감이란 건 틀림없겠지.
하지만 내가 수아 씨를 좋아하는 마음과, 수아 씨가 나에게 바라는 마음은 다르다.
나는 수아 씨만을 사랑할 수 없다.
가장 많이 사랑해줄 수도 없다.
무책임하게 관계를 맺더라도 질질 끌다 결국엔 상처만 남기고 말 것이다.
수아 씨를 좋아하는 만큼 수아 씨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이런 충동적인 행동으로 수아 씨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나한테는 이제 선후 씨밖에 안 남았는데. 왜 안 받아주는 거예요.”
“수아 씨…….”
수아 씨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나는 아무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천장을 보며 한숨만 쉬었다.
* * *
“이제 좀 진정 됐어요?”
“……미안해요 선후 씨. 곤란하게 해서.”
잠시 후.
겨우 울음을 그친 수아 씨와 나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수아 씨는 여전히 상의 브래지어 차림이라 내 윗도리를 덮어줬다.
“수아 씨. 그만 옷은 입는 게…….”
“싫어요.”
으음. 왜 그런 고집을 부리는 건지.
나야 상관없지만, 수아 씨는 부끄러워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여자의 마음이란 알 수가 없구나.
“어차피 선후 씨는 제 몸 봐도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닌데요.”
“그럼요? 흥분돼요?”
“그…… 음…….”
이런 건 뭐라고 대답해야 해?
어느 쪽을 골라도 터지는 폭탄 아니야?
“……예. 흥분돼요. 황수아 씨 몸을 보고 흥분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헷갈릴 땐 솔직한 게 제일이지.
“그럼 만지고 싶으세요?”
왜 또 이런 이야기가.
역시 안 되겠다.
도망치자.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 돼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 팔에 수아 씨가 매달린다.
그 바람에 걸쳐주었던 윗도리도 떨어졌다.
“절 혼자 두고 가지 말아요……. 혼자는 너무 외로워요.”
“수아 씨.”
날 올려다보며 울먹이는 수아 씨를 보면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전 계속 혼자였어요. 거기에 선후 씨가 나타났어요. 절 이렇게 선후 씨한테 길들여놓고, 이대로 버리고 가실 거예요?”
마음이 아프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빛이 나의 죄책감을 푹푹 찌른다.
이런 눈으로 보는데 두고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늘만 자고 가요. 내일부턴 힘내서 일할게요. 앞으론 떼쓰지 않을게요.”
이렇게 매달리는데 어떻게 두고 갈 수 있을까.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럼 오늘만. 그리고 잠만 자고 가겠습니다.”
“고마워요, 선후 씨!”
겨우 웃어주는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아 씨의 눈물은 정말로 무섭다.
보는 사람에게도 슬픔이 전염된다.
수아 씨가 우는 걸 계속 보고 있는 건 그만큼 스트레스였다.
“그럼 전 씻고 올게요. 선후 씨는 어디 가면 안 돼요.”
뭘까.
수아 씨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방금 전까지 울먹이던 게 마치 연기였던 것처럼.
그래. 마치 연기였던 것처럼…….
……설마 그게 연기였어?
…….
어쩌지.
불안한 예감밖에 들지 않는다.
손만 잡고 잘게요
“……수아 씨.”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수아 씨는 목욕 가운 한 장만 걸치고 돌아왔다.
“저 원래 잘 땐 다 벗고 자요. 옷 입고 자면 불편해서.”
“거짓말하지 마요.”
그 선정적인 분위기에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선후 씨.”
부르는 목소리에 내가 돌아보자,
수아 씨는 그 한 장뿐인 가운마저 떨어뜨렸다.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내 눈엔 잔상이 남았다.
새하얀 나체의 잔상이.
“손만 잡고 잘게요. 정말이에요.”
“……보통 그건 남자 대사 아닌가요?”
내 말에 수아 씨는 웃는다.
“외로워서 그래요. 너무 외로워서.”
외로워서.
그 말에 내 무장은 해제당한다.
나 또한 외로움의 의미를 아니까.
“어서요. 옆에서 같이 자요.”
수아 씨가 침대 위에 누워 나를 부른다.
슈퍼 컴퓨터가 만들어 낸 듯한 완벽한 여자.
황수아의 나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