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장에서
나는 엄마의 대기실을 나온 뒤로도 다른 배우님들, 감독님, 작가님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승희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럴까.
화면에서만 보던 배우를 봐도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왠지 좀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잘 대해 주셨다.
엄마의 후광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새삼 느꼈다.
임신혜 배우의 아들이라고 하면 사람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여긴 엄마의 홈그라운드니까 더 그렇겠지.
“어차피 다 사람이 하는 일인걸요. 배우든 스태프든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수아 씨 말처럼 배우도 스탭도 다 똑같은 사람이다.
특별히 무서워하고 긴장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세트장에서는 많은 스탭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 옮기고 설치하고.
촬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거기서 나는 거의 구경꾼 신세였다.
남들은 일하는데 보고만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린다.
“괜히 선후 씨가 나설 필요 없어요. 뭔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변상해야 할 수도 있고. 다치면 더 큰일이고요.”
뭐라도 도울 게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자 수아 씨가 말한다.
그건 그렇긴 해.
괜히 부외자가 나서면 오히려 싫어할지도 모르고.
전문가들이 하게 맡겨두는 게 제일이겠지.
그래도 자기 몸보다 큰 상자를 낑낑대면서 옮기는 스탭을 보고서도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왠지 불안한 예감도 들었으니까.
“아. 고맙습니다.”
“아니요. 어디로 옮기면 돼요?”
“저쪽…….”
나는 얼른 상자를 옮겨다 주고 수아 씨 옆으로 돌아왔다.
수아 씨 분위기는 왠지 냉랭했다.
“……선후 씨. 그렇게 젊은 애한테 잘 보이고 싶었어요?”
“예?”
그 스탭이 어린 알바생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그런 건 아닌데.
“몰라요.”
수아 씨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런. 수아 씨를 케어해주러 왔으면서 반대로 기분을 상하게 해버렸다.
“미안해요 수아 씨. 앞으론 안 나설게요.”
수아 씨는 걱정해서 나서지 말라고까지 얘기해줬는데.
괜히 도와주려다 잘못되면 다른 사람들을 더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날 데려온 수아 씨한테도 피해가 갔을지도 모르고.
“……아니에요. 제가 괜히. 미안해요 선후 씨.”
오히려 수아 씨가 사과했다.
“아, 아니요. 제가 잘못한 건데요 뭘.”
“놀구들 있네.”
웬 남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니들 연애하냐? 촬영장에 데이트 하러 왔어?”
“정환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남주인공 역을 맡은 주정환 배우였다.
이건 뭐지? 몰래카메라?
이렇게 대놓고 시비거는 사람이 있다고?
“연애질은 집에 가서 해. 촬영장 분위기 흐리지 말고.”
“촬영장 분위기 흐리는 게 누군데 이래요?”
우와. 이게 뭐야?
진심이야? 연기가 아니고?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수아 씨도 그만 해요.”
내가 고개를 숙이자 주정환 배우는 혀를 차고 가버렸다.
“괜히 저래요. 자기 연기 잘 안 된다고 화풀이나 하고. 오늘도 사실 정환 씨 때문에 밀려서 추가촬영하는 거예요.”
“네…….”
난감하네. 왠지 저 사람한테 찍힌 거 같다.
아까 인사 다닐 때도 불편해했었고.
“선후 씨는 괜찮으세요? 불안하거나 어디 이상한 데는 없으세요?”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왜지?
저렇게 대놓고 악의를 드러내는데도 내 마음은 고요했다.
흠. 별로 위협적인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아무튼 되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해요. 괜히 불똥 튀면 안 되니까.”
“네. 조심하겠습니다.”
나야 눈에 안 띄게 다니면 된다지만, 같이 연기하는 수아 씨는 그럴 수도 없을 텐데.
수아 씨가 주정환 배우 태도에 하소연하던 것도 이해가 됐다.
촬영 때마다 저렇게 날이 서 있으면 골치 아프겠지.
그것도 주연 배우가.
“그럼 전 촬영하고 올게요. 선후 씨는 거기서 지켜봐주세요.”
“네. 잘하고 와요.”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는 수아 씨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천생 여배우구나. 정말로.
나는 어디 구석에라도 숨어서 보고 있을까.
촬영 중인 수아 씨는 연습할 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화려한 차림이다.
그야말로 부잣집 사모님.
장소가 집안인데도 번쩍대는 보석에 명품 옷으로 치장하고 있다.
상대 배우인 주정환 배우도 마찬가지.
명품 수트에 시계, 넥타이.
성격은 좀 이상하지만 확실히 그림은 멋졌다.
“여보. 우리 얘기 좀 해.”
“얘기? 무슨 얘기?”
오. 낮에 나랑 연습한 장면이잖아.
내가 연습하던 장면을 촬영하는 걸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다니. 신기하기도 해라.
“수정이 학교 선생님한테 전화 왔었어. 수정이 요즘 수업에 집중 못 하고 반에서도 겉돈다고. 가정에 무슨 문제 있냐고.”
“수정이?”
흠. 이게 그런 이야기였군.
아까 승희 연기를 봤더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아빠 황진우의 바람이 딸의 친구들한테까지 다 퍼진 건가.
요즘 애들 너무 무섭네.
“그런 건 당신이 알아서 해. 내가 그런 일까지 신경 써야 해?”
흠?
뭐지?
왠지 위화감이.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순조로운 거 맞나?
별다른 NG가 없었는데도 같은 장면을 4번이나 촬영한 뒤에야 OK 사인이 나왔다.
수아 씨는 잠시 촬영 카메라로 연기를 체크한 뒤, 내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휴.”
“수고하셨어요, 수아 씨.”
수아 씨는 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왠지 좀 지친 것 같다.
“실제 촬영은 큰일이네요. NG도 아닌데 같은 장면을 몇 번씩 촬영하고.”
“감독님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요. 저도 그랬는걸요.”
“아.”
왠지 알 거 같았다.
주정환 배우의 연기가……좀 그랬다.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마음이 여기에 없는 느낌?
연기에 집중을 못 한다는 수아 씨의 말이 떠오른다.
흠. 이게 그런 거구나.
엑스트라라면 몰라도, 주연 배우가 저러면 안 되겠지?
원톱 남자 주인공인데.
“오늘도 제 시간에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수아 씨의 걱정과 함께 촬영은 계속됐다.
주정환 배우가 아버지, 엄마, 딸과 차례로 연기한다.
남주인공이니까 당연하겠지만 분량 많네.
주정환 배우는 촬영에 거의 빠지질 않는다.
그리고 매번 촬영마다 애를 먹는다.
“주정환 배우 촬영분이 밀려서 그래요. 지난번엔 펑크도 한 번 냈었고.”
“펑크요?”
우와. 괜찮은 건가?
연기가 아니라 드라마 자체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이제 와서 주연 배우를 바꿀 수도 없을 텐데.
“아무래도 전 이번에도 힘들 거 같아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온 건데.”
수아 씨가 허무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면 수아 씨도 긴 슬럼프 중에 재기를 노리고 있었지.
이건 수아 씨 잘못도 아닌데.
외부 요인으로 또 실패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촬영장을 둘러보니 주정환 배우는 감독님과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정환 배우가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지?
이전 작품들 생각하면 그렇게 연기력이 나쁜 배우는 아닐 텐데.
사생활에 뭔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 눈 마주쳤다.
그쪽을 보면서 생각하던 중에, 마침 고개를 돌린 주정환 배우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뭐야? 또 나야?
내가 뭘 어쨌다고?
자기 일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
괜한 화풀이에 짜증이 난 나도 마주 쏘아보았다.
아차. 나까지 왜 이러지.
문제 일으켜서 좋을 것도 없는데.
나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주정환 배우는 씩씩대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뭘 꼬라 봐? 구경났어?”
이건 무슨 양아치도 아니고.
아무리 만만해 보인다고 해도 배우가 일반인한테 이렇게 시비 걸어도 되는 거야?
“정환 씨. 어른스럽지 못하게 왜 이래요?”
수아 씨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억울하긴 했지만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내가 잘못하면 수아 씨나 엄마한테도 피해가 갈 테고.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하. 참 나. 남자 새끼가 기집애 뒤에 숨어선.”
“정환 씨!”
내가 사과했는데도 주정환의 시비는 멈추지 않았다.
거기에 수아 씨까지 모욕했다.
수아 씨가 연기자로는 선배일 텐데.
대체 뭐야? 뭘 원하는 거야?
이런 데서 싸움을 거는 이유가 뭔데?
이런 일로 분란을 일으켜봐야 본인도 손해 아냐?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환 씨. 왜 큰 소릴 내고 그래? 우리 아들이 뭐라도 했어?”
소란을 듣고 엄마까지 와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 임신혜 배우한테까지 대들진 못 하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선배님. 여기가 애들 놀이터도 아니고 촬영장에 아들을 데려오면 어떡합니까? 연예인 구경시켜주려고 데려왔어요?”
“뭐라고?”
설마 했더니 엄마한테까지 막말을 했다.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촬영장이 탁아소냐고요.”
“이 새끼가!”
주정환의 멱살을 잡고 오른팔을 치켜든다.
“안 돼요! 선후 씨!”
수아 씨가 나를 말리느라 내 팔에 매달렸다.
“어쭈? 쳐 봐. 쳐 보라고 새끼야.”
주정환은 역겹게 웃으며 나를 부추겼다.
이게 연기라면 남우주연상감이다.
그 연기력을 촬영에나 쓸 것이지.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
주정환의 뒤통수에 갑자기 커피가 든 종이컵이 날아왔다.
“앗 뜨거!”
커피를 맞고 펄쩍 뛰는 주정환.
내가 잡고 있던 멱살도 자연히 풀렸다.
“꺄! 죄송해요!”
아.
커피를 쏟은 건 아까 세트장을 준비하던 알바생이었다.
“죄송해요! 닦을 거 가져올게요!”
“너……!”
주정환이 뭐라 시비를 걸려고 했지만, 알바생은 이미 도망친 뒤였다.
“주정환! 뭐하는 짓이야!”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려퍼진다.
원로 배우인 강창재 배우였다.
“씨이발.”
엄마한테까지 큰 소릴 치던 주정환도 원로 배우한테는 대들지 못했다.
머리에 묻은 커피를 털며 자리를 떠났다.
“후.”
머리에 쏠렸던 피가 내려온다.
뭐야 저새낀?
대체 뭐하자는 거야?
“선후야. 잘 참았어.”
“그래요. 저건 일부러 맞으려는 거 같았어요.”
엄마와 수아 씨가 나란히 말한다.
내가 참았다기 보단 갑자기 커피가 날아오는 바람에 당황해서 멈췄다는 게 맞을 거다.
그런데 일부러 맞으려고 해?
주연 배우가 그런 짓을 대체 왜?
“……엄마. 죄송해요. 수아 씨도요. 제가 좀 더 잘 대처했어야 했는데.”
“엄마한테 그러는데 가만히 있을 아들이 어딨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 후, 나는 감독님을 비롯한 촬영 스탭들, 그리고 다른 배우들에게도 일일이 돌며 사과했다.
주정환 배우는 그대로 촬영장을 떠나고 없었다.
커피를 쏟은 스탭도 정말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좆같아도 일단 사과하려고 찾았지만, 주정환 배우는 촬영장에 나오지 않았다.
펑크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주정환 배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완전히 잠적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