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으로
그날 저녁.
나는 황수아 배우의 차를 운전해 방송국 드라마 세트장에 왔다.
집에 연예인이 2명이나 있는데, 방송국에 오는 건 내 생에 처음이었다.
그것도 다른 연예인 차를 운전해서 로드 매니저로 오게 될 줄이야.
“긴장하실 거 없어요. 선생님 아들인 거 알면 아무도 무시 못 할 테니까.”
“그건 그거대로 좀 그런데요. 전 황수아 배우 매니저로 왔으니까요.”
엄마는 감독이나 스태프를 제외하면 배우 중에선 거의 최고참일 거다.
10대에 데뷔했으니 배우 경력만 30년을 향해가고 있다.
그런 임신혜 배우의 아들이라고 하면 다른 배우들이 괜히 어려워할 거 같아서 걱정이다.
“그러고 보니 수아 씨는 몇 살에 데뷔했어요?”
“저 일찍 했어요. 아역 출신이거든요. 6살 때요.”
“6살?!”
지금 27살이니까 경력 21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2번 변할 동안 배우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니.
“그럼 나이 많은 배우가 수아 씨 후배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 분 많아요. 20대 넘어서 데뷔한 분도 있으니까. 같이 연기하는 주정환 배우도 그렇고.”
“그럼 그런 분들은 수아 씨 뭐라고 불러요? 선배님이라고 불러요?”
“부르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주정환 씨는 서로 씨 붙여서 존칭해요.”
“그렇구나.”
새삼 황수아 배우의 대단함을 알 거 같다.
경력 21년이라니. 어지간한 직종에서는 이미 달인이라고 불리는 수준이다.
6살에 데뷔인가.
나는 6살에 입양됐는데.
왠지, 음…….
인간으로서 격의 차이를 느낀다.
“선후 씨, 스탭이랑 연기자들한테 인사하러 가요.”
“아, 예.”
일개 매니저가 그럴 필요가 있나? 싶으면서도, 수아 씨가 가자면 가야겠지.
제일 먼저 간 곳은 ‘강창재 배우님 대기실’이라고 적혀있는 곳이었다.
강창재 배우라면 이번 드라마에서 엄마의 남편, 그러니까 대기업 회장님으로 나오는 원로배우였다.
“선생님. 저 수아예요.”
『어어, 들어와요.』
노크를 하자 안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수아 씨를 따라 쫄래쫄래 방에 들어갔다.
강창재 배우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서 와요, 수아 씨.”
“안녕하세요, 선생님.”
수아 씨를 따라 나도 90도로 고개를 숙인다.
강창재 배우는 드라마에서 카리스마 악역을 많이 맡는데, 실제로 보면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어찌보면 엄마와 비슷하네.
“이쪽은 진선후 씨라고 임신혜 선생님 아들이에요. 오늘은 제 임시 매니저로 왔어요.”
“안녕하십니까. 진선후입니다.”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드린다.
강창재 배우는 엄마보다도 훨씬 선배님이시다. 나 같은 게 고개를 들고 있을 수는 없다.
“으응? 신혜 아들이 매니저야? 거 훤칠하니 잘 생겼네. 배우상이야. 매니저 하긴 아까운 거 아냐?”
“가, 감사합니다.”
“안 돼요. 선후 씨 없으면 저 운전해줄 사람 없어요.”
잠시 그 방에서 덕담을 들은 뒤 나온다.
조금 긴장했지만 생각보단 괜찮았던 거 같다.
“다음은 이쪽이네요.”
아. 엄마 대기실이다.
“선생님. 저 수아예요.”
『들어오세요.』
노크를 하자 안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데서 엄마를 만나게 되다니. 왠지 신기한 기분이다.
수아 씨를 따라 방에 들어간다.
“선생님. 제 매니저 소개해드리러 왔어요.”
“매니저?”
엄마는 분장 중이었다.
거울을 통해 나와 눈이 맞는다.
“안녕하십니까. 진선후입니다.”
약간 장난기를 섞어 90도로 인사한다.
거울 안에서 엄마의 입이 벌어진다.
엄마는 놀란 거 같다. 마치 전혀 몰랐던 것처럼.
……얼레? 엄마한텐 허락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수아 씨를 보니 싱글벙글 웃고 있다.
마치 장난이 성공한 아이 같다.
“……수아 씨. 얘기 좀 해. 선후는 잠깐 나가 있을래? 얘기 끝나면 부를 테니까.”
“아, 응.”
좀 무섭다.
엄마는 화가 난 것 같다.
나는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대기실 밖 복도로 나왔다.
역시 수아 씨가 허락받았다고 했어도 엄마한테 전화해서 말했어야 했나.
휴. 설마 엄마 대기실에서 이렇게 긴장하게 될 줄이야.
반갑게 인사하고 나오려고 했는데. 으으.
그런데 수아 씨는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엄마가 안 된다고 했는데, 허락받았다고 거짓말한 건 아닐 테고.
아니면 물어봤다는 거 자체가 거짓말이었어?
으음. 모르겠다.
안에선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을까?
“응?”
문득 옆에서 한 아이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인형처럼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왠지 아역 배우라도 할 것 같다.
아. 여긴 방송국이니 진짜 아역 배우겠구나.
그럼 이 애가 딸 역으로 나오는 수정이인가?
“아, 안녕? 네가 수정이니?”
워낙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먼저 인사해보았다.
아이는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대답 대신 나에게 양팔을 뻗어왔다.
“응? 안아줘?”
끄덕.
흠.
안아줘도 되나?
암살자는 아니겠지?
……뭐 문제 생길 일 있겠어?
이 문 뒤에는 엄마도 수아 씨도 있으니까.
팔로 아이의 다리 밑을 받치고 안아 올린다.
눈높이가 맞는다.
“안녕. 네가 수정이니?”
다시 한번 눈을 보고 묻자, 그제야 끄덕, 하며 대답한다.
역시.
“나승희…….”
“본명은 승희구나. 이름도 예쁘네. 승희는 여기 왜? 임신혜 배우님 만나러?”
“응…….”
그런데 초면에 안아달라는 것치고는 낯가림이 심한 아이다.
목소리도 들릴락 말락 하고.
나는 조금 전까지 수정이 아빠 연기를 하고 와서 그런지 남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황진우는 이런 딸내미랑 황수아 같은 아내를 두고 바람피운 거야?
개연성 너무 없는 거 아냐?
“승희야!”
저쪽에서 젊은 엄마가 승희를 부른다.
안경에 활동적인 검은색 정장 차림.
얼핏 보면 매니저로 보인다. 그럼 나랑 동종업자구나.
아마 저 사람이 승희 엄마겠지.
“승희야. 엄마 온 거 같은데? 이제 내려올까?”
도리도리.
바닥에 내려놓으려 하자 승희는 오히려 내 목을 안고 얼굴을 숨겨버렸다.
으음. 난감한데.
아이 엄마가 보면 오해할 수도 있으니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일단 웃음으로 때우면 어떻게든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승희 어머니 되세요?”
엄마를 녹이는 필살 스마일로 먼저 인사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저희 승희가…….”
납치범으로 오해할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아이 엄마가 송구스러워한다.
하긴, 방송국에 납치범이 있을 리 없지.
“승희야. 엄마한테 와.”
“싫어.”
“나승희!”
엄마가 불러도 승희는 꿈쩍도 안 한다.
중간에 끼인 나는 난감할 뿐.
“아하하. 괜찮으시면 제가 좀 안고 있을게요.”
“죄송합니다. 저희 승희가 아직 철이 없어서.”
“뭘요. 아직 그럴 나이니까요.”
연신 고개를 숙이는 승희 어머니.
그렇게까지 죄송스러워할 필요는 없는데.
힘든 일도 아니고.
“혹시 임신혜 배우님 만나러 오셨어요?”
“아, 네. 인사드리러.”
“지금 안에 황수아 배우님도 계세요. 잠깐 이야기하신다고.”
“아.”
뻘쭘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승희 어머니도 어색하게 딴짓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버티지 못하고 문을 노크했다.
“저, 승희랑 승희 어머니 오셨는데요.”
“……들어오세요.”
잠시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화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조금 안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어머.”
엄마와 수아 씨는 나를 보고, 정확히는 승희를 안은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후 씨는 벌써 승희랑 친해지셨네요.”
“하하. 어쩌다 보니.”
대기실 안에 들어와 승희를 내려놓는다.
“안녕하세요.”
승희가 엄마와 수아 씨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한다.
옆에서 승희 어머니도 인사했다.
“어서 와, 승희야. 승희 어머니도 어서 오세요.”
“할머니, 엄마, 이 아저씨 누구예요?”
할머니. 엄마. 아저씨.
여기서 할머니는 우리 엄마인 임신혜 배우, 엄마는 황수아 배우, 그리고 이 아저씨는 나다.
낯선 호칭 총출동에 머리가 혼란스럽다.
우리 엄마한테 할머니라니!
이 쪼끄마한 녀석이!
아. 그러고 보니 배역상 엄마는 수정이 할머니구나.
“승희야. 이 오빠 잘생겼지? 할머니 아들이야.”
“할머니 아들? 그럼 우리 아빠야?”
순진한 물음에 방 안 분위기가 철렁 내려앉는다.
왠지 나도 이마에서 땀이 날 것 같다.
“승희야. 아빠는 따로 계시잖아?”
내 말에 승희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아빠 없어.”
“엑.”
이번엔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이런 애한테 무슨 상처 주는 말을…….
“무슨 소리니? 아빠 있잖아. 승희 너 왜 아빠 없는 척해.”
이건 승희 어머니 말이다.
뭐야.
있었냐고.
괜히 사람 놀라게 해.
“우리 아빠 아니야. 우리 아빠…….”
승희가 울먹이기 시작한다.
“내가 말 걸어도 모른 척하구, 친구들은 우리 아빠 바람났다고 놀리구…….”
우와.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떡하면 좋아.
승희는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엉엉 울면서 다시 나한테 안겨 왔다.
“아저씨가 우리 아빠 하면 안 돼? 나 말 잘 들을게. 착하게 있을 테니까 아저씨가 우리 아빠 하면 안 돼?”
우와. 이걸 어째?
나도 덩달아 울어버릴 것 같다.
“괜찮아. 괜찮아, 승희야. 아빤 잠깐 방황하고 있는 거야. 마음속에선 승희를 사랑하고 계시니까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실 거야.”
나는 승희의 등을 토닥이며 무책임한 위로밖에 해줄 수 없었다.
승희 아버지!
도대체 뭘 하고 다니시는 겁니까!!
딸이 이렇게 우는데!!
당신이 그러고도 승희 아빱니까?!
혼자 열 내고 있자 옆에서 승희 어머니가 난처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괜찮아요. 배역 이야기에요. 승희가 너무 심취해서.”
“엑.”
뭐야!?
연기였어?
“자, 승희야, 가자. 죄송해요, 저흰 먼저 가볼게요.”
승희 어머니가 억지로 승희를 안고 방을 나갔다.
“싫어어~! 아빠아~!”
안겨 나가는 승희는 나에게 팔을 뻗으며 세상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정말로 납치당하는 아이 같았다.
“참 승희가 연기를 잘해. 꼭 수아 씨 어릴 적 보는 거 같다니까.”
“에이, 선생님도. 전 저 정도는 아니었어요.”
나는 승희가 나간 방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