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256)

* * *

며칠 뒤.

한세아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이상한 비디오나 USB 같은 게 들어있는 게 아닐까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편지뿐이었다.

『진선후 님께.

곤란한 부탁에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 뵐 기회가 없어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선후 님 덕분에 그 일은 잘 마무리됐습니다.

사장도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했습니다.

아마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사장의 병이 다시 도진다면,

저는 부디 선후 씨에게 또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한세아 올림.』

“칫.”

나는 편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누구 염장 지르나?

젠장.

…….

…….

잠시 후, 나는 다시 쓰레기통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다리미로 열심히 다림질해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다.

한세아의 귀한 친필 편지다.

세아의 팬으로서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젠장!

황수아 배우와 대본연습 

30여 년을 부모의 구속 아래 살았다.

아버지도 엄마도, 지금은 나를 회사의 부속품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아내 황수아, 아니, 신아영도 마찬가지다.

사사건건 나에게 잔소리하며 구속하려 든다.

회사가 흔들리자 구속은 더 심해졌다.

회사와 재산만 보고 결혼한 여자니 당연하겠지.

지겹다.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사람은 선아뿐이다.

나의 재산이나 집안이 아니라, 인간 황진우 자체를 봐주는 유일한 여자.

그때 선아와 결혼했더라면…….

하지만 엄마 때문에 모든 게 틀어져 버렸다.

선아와의 관계도, 내 인생도.

……지금이라도 되돌릴 방법은 없을까?

모든 구속을 벗어던지고 선아와 자유롭게 떠날 수만 있다면…….

“여보. 우리 얘기 좀 해.”

“얘기? 무슨 얘기?”

또다.

어차피 낮에 선아와 만난 일이겠지.

“수정이 학교 선생님한테 전화 왔었어. 수정이 요즘 수업에 집중 못 하고 반에서도 겉돈다고. 가정에 무슨 문제 있냐고.”

“수정이?”

내 딸 수정이. 초등학교 2학년이다.

아니, 3학년이던가?

……입학식에 갔던 게 3년 전이니까 4학년인가.

수정이가 벌써 4학년이라니.

“그런 건 당신이 알아서 해. 내가 그런 일까지 신경 써야 해?”

“그런 일? 수정이 일이 그런 일이야?”

또다. 조그마한 일만 있으면 나한테 떠민다.

공부 좀 안 한 거 가지고 일일이 나한테 말하면 어쩌라고?

“난 일하잖아. 당신은 놀고. 수정이는 당신이 신경 써야지, 내가 수정이까지 어떻게 신경 써?”

“나도 노는 거 아니……!”

내 말에 화를 내려던 아내는 한숨으로 참는다.

“후. 어쨌든, 당신이 수정이랑 이야기 좀 해 봐. 엄마한텐 이야기 안 한단 말이야.”

“됐어. 알아서 하겠지. 하기 싫은 거 억지로 시켜봤자 무슨 소용이야?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게 내버려 둬.”

“여보. 어떻게 그래?”

“뭐가?”

“수정이 당신 딸이잖아. 딸한테 어떻게 그렇게 관심 없어? 수정이가 무슨 고민 있는지, 왜 그러는지, 아빠가 이야기 정돈 해줄 수 있잖아.”

“당신 그런 거 하라고 집에 있는 거 아냐. 그런 일 일일이 나한테 가져오지 말고 당신 선에서 좀 끝내.” 

“여보.”

“됐어. 나 피곤해.”

나는 아내를 두고 방에서 나온다.

* * *

“선후 씨. 한 대 때려도 돼요?”

“예?”

“어떻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있어요?”

수아 씨의 말에 나는 뺨을 긁적인다.

“얄밉게 해야 수아 씨가 더 잘 몰입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나는 지금 황수아 배우와 대본연습 중이다.

장소는 황수아 배우의 집.

지난번엔 와서 놀기만 하고 갔지만, 이번엔 오자마자 대본연습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대사까지 달달 외워왔는데 시작조차 안 하고 끝내면 너무 억울하니까.

“휴.”

문득 수아 씨가 깊이 한숨을 쉰다.

“왜 그래요? 뭐가 잘 안 돼요? 연기는 좋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상대 배우가 좀…….”

“상대 배우? 주정환 배우요?”

주정환 배우는 내가 지금 연기한 황진우 역을 맡은 배우다.

혹시 몰라서 다른 배역도 준비해오긴 했지만, 황수아 배우의 몰입을 위해서 나는 일단 황진우 역을 주로 연습하고 있었다.

“그게 좀…… 연기에 집중을 못 한다고 해야 할까. NG도 많고.”

“주연 배우가 그래선 큰일이네요.”

주정환 배우라면 그래도 네임밸류가 있는 배우인데.

특히 중국 쪽에선 엄청 인기라고 하고.

이번 주연도 엄마가 말하길 중국 쪽 스폰서에서 강력하게 요청했다고 들었다.

“네. 그래서 촬영장 분위기도 별로 안 좋고. 촬영 시간도 늘어지고.”

황수아 배우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심각한가 본데.

상대 배우까지 신경 쓰이게 할 정도라니.

엄마도 수아 씨 잘 케어해주라고 했었고 나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제가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을까요?”

그래도 일단 말이라도 물어볼까.

그런 생각으로 물어본 건데.

“도와주실 건가요?”

수아 씨의 눈이 반짝 빛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 예,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수아 씨가 예상외로 적극적이라 좀 쫄린다.

대체 뭘 시키려고 그러지?

주정환 배우를 정신 차리게 해달라거나, 그런 건 불가능한데.

“선후 씨가 제 임시 매니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예? 매니저요? 제가요?”

내가 왜 매니저를?

그런 건 소속사에서 해주는 거 아니야?

얼마 전에 엄마 있는 데로 소속사도 옮겼다면서.

“네. 실은 새 소속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전담 매니저가 없거든요.”

“매니저가 없어요?”

엄마네 소속사도 엄청 큰데.

매니저가 부족할 리가 있나?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황수아 급 배우한테 붙여주지 못할 리가 없는데.

“그래서 이동도 항상 직접 운전해서 하고…… 그러다 보니 연기에만 신경 쓰기 힘들어서요. 운전이랑 잔심부름 정도만 해줄 사람 있으면 좋을 텐데…….”

확실히 배우가 직접 운전하는 건 피곤하겠지.

10시간 이상 촬영한 후 운전하면 위험하기도 할 테고.

“운전만은 자신 있긴 한데…….”

“운전만 해주셔도 돼요!”

……황수아 배우의 로드 매니저라면 무급으로라도 하고 싶어 할 사람 널렸을 텐데.

굳이 나한테 부탁할 필요가 있나?

난 매니저 해본 적도 없는데.

“아무래도 이런 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여자 혼자 다니다 보니 성희롱 같은 것도…….”

“성희롱이요?!”

그건 큰 문제다.

이럴 게 아니라 신고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물론 신고하거나 일을 크게 만들 정도는 아니긴 한데요, 매니저도 없이 여자 혼자 다녀서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무래도 덩치 큰 남자 매니저가 옆에 붙어 있으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겠지.

그래도 내 얼굴에 그런 역할이 가능할까?

“선후 씨가 운전만 해주시고 옆에만 있어 주셔도 마음이 편할 거 같아요.”

음.

수아 씨가 나를 믿어주는 건 고맙지만……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런 일 하다 보면 낯선 사람이랑도 많이 부딪히게 될 거고.

엄마도 걱정하실 텐데.

“어머니께는 미리 허락받았어요. 선후 씨만 좋다고 하면 괜찮다고.”

“엄마가요?”

수아 씨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례차례 이야길 던져왔다.

근데 엄마한테 미리 허락까지 받다니.

수아 씨는 마침 생각났다는 것처럼 말했지만, 엄청 철저하게 준비한 듯한 느낌이다.

솔직히, 나는 해보고 싶다.

이런 일도 경험해보면 나중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학교도 휴학 중이라 하는 일도 없고.

불안한 건 내가 정말 수아 씨한테 도움이 될까 하는 점인데.

수아 씨가 말한 운전이나 잔심부름, 경호원(흉내뿐이지만) 역할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부담가지실 거 없어요. 저도 선후 씨한테 완벽한 매니저 역할을 바라는 게 아니니까. 운전만이라도 해주시면 충분해요. 일단 해보시고 정 안 될 거 같으면 그만두셔도 되구요. 그땐 회사에서 새 매니저 붙여줄 테니까.”

어떻게든 나를 붙잡고 싶어 하는 수아 씨의 마음이 느껴진다.

설마, 성희롱이 엄청 심한 건가?

여배우는 그런 거 큰 소리로 말하기 힘들 테니까.

어쩌면 수아 씨는 보기보다 절박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한테 SOS를 보내고 있는 건지도.

“……알겠습니다. 그럼 일정 알려주시면 제가…….”

“네! 문자로 넣어드릴게요!”

수아 씨가 휴대폰을 조작하자 마치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메시지가 주르륵 들어왔다.

흠. 당장 오늘 저녁부터 촬영인가.

마치는 건 자정 지나서.

그리고 내일은 또 아침 일찍부터.

분명 배우가 직접 운전해서 다니기엔 무리한 일정이다.

“저, 그리고 지난번에, 선후 씨 가고 나서 자리에 이런 게 떨어져 있었는데…….”

“앗!?”

수아 씨의 손바닥 위에 놓인 물건을 보고 나는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콘돔이었다.

익숙한 포장의.

0.01밀리, XXL 사이즈.

대체 저게 왜 수아 씨 집에??

그건가? 그때 엄마가 넣어준 걸 수아 씨 집에서 흘린 건가?

아악! 왜 하필!

얼굴에 불이 난다.

“저, 이건 그, 음, 남자의 소양이라고 할까…… 죄송합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솔직하게 사과했다.

……설마 수아 씨가 말한 성희롱이란 게 나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요. 저야말로…… 선후 씨가 그럴 생각인 줄도 모르고 쿨쿨 잠이나 잤으니…….”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요. 남자분이니까 당연한걸요. 제가 생각을 못 한 게 잘못이죠.”

아아, 어머니.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안기시나이까.

“그래서 그…… 만약 선후 씨가 이번 일 잘 도와주시면…….”

수아 씨가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잘 도와주시면?

그럼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고?

그럼 제대로 안 하면?

경찰에 신고? 혹은 9시 뉴스에?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개처럼 일하겠습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수아 씨도 활짝 웃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잘못하면 수아 씨한테 성희롱으로 고소당할 뻔했다.

굳이 이런 협박 같은 거 안 해도 도와줬을 텐데.

그래도 이런 일로 눈감아준다면 나로선 다행이겠지.

“그럼 그때까지 이건 제가 맡아 놓을게요.”

부끄러운 듯 콘돔을 챙기는 수아 씨.

“윽…… 알겠, 습니다.”

콘돔은 인질인가.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폭로하겠다는.

으윽.

황수아…… 무서운 여자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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