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256)

한세아 

한세아와 손을 잡고 호텔 안을 걷는다.

요즘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나는 역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맞잡은 손에서 약한 떨림이 전해져왔다.

잔인하다.

세상은 어째서 이렇게 잔인한 걸까.

엘리베이터를 탄 뒤, 한세아의 손을 놓는다.

그 남자가 말려주길 바랐다.

세아의 손을 잡고 가는 나를 보고, 후회하고, 내가 틀렸다고,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 남자는 어떻게 나를 보낼 수 있는 걸까.

한세아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세아 씨는.”

겨우 입을 열었다가,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물어봐도, 대답을 들어도, 나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 뒤로 객실에 도착할 때까지 세아와 나는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건 방에 들어온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먼저 씻겠습니다.”

방에 세아 씨를 두고, 나는 샤워실로 도망쳤다.

나는 세아의 팬이지만 실제로 얼굴을 본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그런 상대와 호텔 방에 단둘이 집어넣는다고 해서 뻔뻔하게 있을 정도로 나는 그릇이 큰 인간이 아니다.

소심한 찌질이 찐따. 그게 나다.

불편하다.

아침에 가슴에 채워 넣은 콘크리트가 딱딱하게 굳은 것 같다.

일단 찬물을 맞으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하지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계속 샤워실에 숨어있으면 안 될까.

“후.”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만 칠래? 또 엄마가 구해주기만 기다릴 거야?’

누나의 말이 나를 때린다.

도망쳐서는 안 된다.

진짜 불안한 건 내가 아니라 세아 씨일 거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이 한세아를 위한 길이지?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고.

샤워를 마쳐야 할 시간이 됐다.

옷은 어떻게 해?

입고 나가? 아니면 벗고?

영화에선 이럴 때 어떻게 하더라?

나는 어디선가 본 것처럼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샤워실을 나왔다.

세아 씨는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눈에 떠오른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화면 안에선 완벽한 아이돌.

그러나 한 꺼풀 벗기면 한세아도 약한 여자아이였다.

나는 일단 그 옆자리에 앉았다.

잠시 침묵.

“……그럼, 저도.”

이번엔 한세아가 샤워실로 도망쳤다.

거기에 안심한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머리를 뜯어서 해결될 거 같으면 대머리라도 됐겠지만.

그런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샤워룸 저편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그 한세아가 바로 저기서 샤워하고 있다.

그런데도 내 자지는 꼼짝도 안 한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한세아가 씻는 동안 도망칠까?

하지만 그런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또 다른 남자를 골라 내 자리에 집어넣을 뿐이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세아가 상처받는 건 아닐까?

아~!!!~~!!

짜증 나!!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해?

그 변태 새끼! 그 미친 사장!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다!

내 사랑을 존중받기 위해서는 남의 사랑도 존중해야 하겠지만.

이런 건 존중할 수 없다!

이건 아니잖아?

사랑하는 여자한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를 입고,

그래야만 채워지는 사랑이라니?

이런 사랑이 있어도 되는 거야?

젠장.

빼앗아주겠어.

한세아를.

나에게 해롱해롱해져서 두 번 다시 그 변태는 쳐다보지도 않게.

누나의 보증을 받은 이 자지로.

그 남자가 땅을 치고 후회하도록.

이런 더러운 취미, 고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한세아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나처럼 수건 한 장으로 가슴과 중요부위를 가리고 있었다.

물기에 젖은 검은 머리가 반짝거린다.

한세아는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조금 전까지 빼앗아주겠어! 하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목석처럼 굳어서 한세아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뭐부터 말해야 할까.

“혹시.”

일단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부터.

“녹화나 녹음 같은 거 하고 있습니까?”

“……아니요. 필요하시면 지금이라도.”

“아뇨. 없으면 다행이고요.”

세아 씨는 내가 그런 걸 원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남자가 그런 취향이라길래 찍고 있는 게 아닐까 한 건데.

“……역시 이런 건 불쾌하시죠?”

“네?”

내가 물은 게 아니다. 세아 씨가 물은 거다.

“갑자기 모르는 여자랑 잠자리를 가지라고 하는 거요. 정 싫으시면…….”

“아뇨.”

내가 세아의 팬이라는 건 절대 말할 수 없지만.

세아가 그런 비참한 생각으로 이 자리에 있는 건 내가 견딜 수 없다.

“세아 씨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세상 어떤 남자라도 안고 싶어 할 만큼요. 저도 물론 그렇고요.”

세아 씨는 민망한지 고개를 떨궜다.

“제가 망설이고 있는 건, 이게 정말 옳은 일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장의…… 이런 방식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넘기는 기분 같은 건 영원히 알 수 없을 거 같다.

알고 싶지도 않고.

“세아 씨는 정말 괜찮으세요? 혹시 빚이나 약점 같은 게 있으신 거라면.”

“후후.”

이상하다.

내가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여자가 웃는다.

내가 웃기게 생겼나?

“죄송해요. 사장이 왜 진선후 님한테 부탁한 건지 알 거 같아서요.”

“……왜죠?”

“보통 이런 이야기, 선후 님처럼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사람 없을 테니까요. 선후 님 말처럼 한세아와의 하룻밤 티켓을 내밀면 누구라도 거절하지 않겠죠. 근데 어제 선후 님은 거절하셨다면서요. 화내고 나가셨다고.”

“아. 그건.”

세아 씨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건 사장이 잘못한 거죠. 하지만 사장도 그때 확신한 거 같아요. 이 남자라면 괜찮다고.”

어제 나는 사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오해니 뭐니 했지만 결국 오해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좀 다르다만.

“저는 괜찮냐고 물으셨죠. 저는 괜찮아요. 사랑하는 남자가 선택한 남자니까. 그거만큼 믿을 수 있는 보증이 어디 있겠어요?”

“사랑.”

기가 막힌 마법의 단어, 사랑.

사랑이 들어가면 뭐든 괜찮은 걸까.

사랑하는 사람이 바란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랑하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사랑이란 말에 내가 먼저 떠올리는 건 엄마다.

바로 어제, 세상 전부가 내 적이 되더라도 엄마는 내 편이 되겠다고 했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

세아 씨의 사랑도 그런 걸까.

세상 전부가 그에게 등을 돌리더라도, 세아 씨만은 그 남자의 방식을 인정해준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게 정말 그 남자를 위한 건지도.

세아 씨를 위한 건지도.

하지만 그렇게 원한다면.

나도 원하는 대로 해줄 뿐이다.

세아 씨를 본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나는 계속 눈을 피하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모여있다.

예쁜 얼굴. 나의 아이돌 세아의 얼굴이었다.

뺨에 손을 대고 천천히 접근한다.

“저, 키스는 좀…….”

“키스를 하지 않으면 다른 것도 안 하겠습니다.”

내 말에 세아 씨는 못마땅한 듯이,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감는다.

할 거면 제대로 한다.

나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

불만이 있다면 나를 선택한 남자에게 가서 이야기해라.

츄우…… 츄웁……

한세아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이전에 미소는 멤버들과 키스 연습을 했었다고 했다.

그때 미소는 한세아에 대해서 ‘순진해 보여도 제일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지금 한세아는 적극적이기는커녕 가만히 입술을 대주고 있을 뿐이다.

미소는 괜찮고 나는 안 되는 이유는 뭐지?

다른 남자에겐 키스하지 않겠다고?

섹스는 괜찮고 키스는 안 돼?

웃기고 있네.

한세아의 몸을 가리고 있는 수건을 떨어뜨린다.

새하얀 피부 위에 떠 있는, 한 손에 딱 잡힐 듯한 가슴이 드러난다.

미소와 진이의 가슴을 합쳐서 정확히 둘로 나눈 듯한.

적당한 크기에 이상적인 모양을 한 가슴이다.

내가 아는 가슴 중엔 작은 편이지만, 이것도 평균 이상인 거겠지.

신성한 아이돌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부드럽지만, 아직 다 여물지 않은 햇과일 같은 감촉.

반응도 딱딱하다.

애무에 익숙하지 않은 건지, 나한테 만져지는 게 싫은 건지.

어차피 많은 남자들이 거쳐 갔을 테니 익숙하지 않을 리는 없고.

그렇게 싫으면 안 하면 될 텐데.

왜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안기는 거야, 한세아.

그렇게 그 남자를 사랑해?

그 남자가 시키면 싫어하는 남자와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 지금 한세아를 안고 있는 건 나일 텐데.

어째서 나는 다른 남자를 질투하는 거지?

이상하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나에게 가슴을 만져지고 있는 지금도, 한세아의 사랑이 그 남자를 향하고 있어서일까.

부럽다.

빼앗고 싶다.

한세아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키스하던 입술을 떼고 가슴을 핥는다.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다.

간지러움, 부끄러움, 그리고 쾌감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어떻게 하지?

이렇게 반응이 적은 상대는 처음이다.

사랑이 없는 섹스란 이런 건가.

지금까지 나는 사랑이 있음으로, 그 사랑이 섹스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반대다.

섹스를 통해 사랑을 얻어내야 했다.

마치 한 번도 풀어보지 못한 시험지를 받은 듯한 기분.

자신이 없었다.

한세아의 마음을 내가 빼앗을 수 있을까?

초조해하지 마라.

여자의 몸은 배웠잖아?

많이 경험해봤잖아?

여자의 몸은 정직하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느낀 대로 반응한다.

입처럼 거짓말하지 않는다.

목을,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천천히, 천천히.

서두르지 않는다.

거부감이 있는 상대를 억지로 자극해봐야 소용없다.

내 손길에 익숙해지도록.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세아 씨.”

입술로 귓불을 깨문다.

혀는 내밀지 않고 약하게 애무한다.

가슴과 가슴을 맞댄다.

동시에 등과 허리에 손가락을 스치듯이.

조금이라도 특별한 반응이 있는 곳을 찾는다.

으음. 잘 모르겠는데.

대화로 풀어볼까. 누나도 그랬고.

“세아 씨. 최대승 사장님과는 어떻게 그런 관계가 됐어요?”

세아 씨를 안고서 귓가에 묻는다.

“……그런 이야기는, 좀.”

“말해주세요. 세아 씨에 대해 알고 싶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서로 알몸으로 몸을 맞대고 있는데.

더이상 숨길 게 뭐가 있을까.

세아 씨는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저는 부모님이 안 계셨어요. 할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사장님은 그런 저한테 아버지 대신이었구요.”

아버지 대신.

그 말이 내 마음에 울렸다.

이게 뭐지? 동질감?

왠지 한세아의 마음이 조금은 알 거 같았다.

나도 친부모 대신 엄마가 되어준 새엄마를 여자로서 사랑하게 됐으니까.

사장과 20살 넘게 차이 난다고 도둑놈이라고 했지만.

생각해 보면 나와 엄마는 그보다 더했다.

느낌이 왔다.

여긴가. 한세아를 공략할 포인트는.

사람은 상대와 공통점을 찾으면 안심하게 된다.

비밀을 공유하면 가까워진다.

‘사실은 저도.’

이거라면 한세아의 단단한 마음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포기했다.

엄마와의 관계를 밝히는 리스크.

한세아의 마음을 얻는다는 리턴.

두 가지를 저울질해 본 뒤.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밝힐 수 있을 리가 없다.

엄마를 리스크에 올릴 수 있을 리가.

그렇게밖에 얻을 수 없는 사랑이라면 포기해야했다.

그런가.

한세아는 이런 마음이었나.

내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처럼, 한세아도.

나는 한세아에게 일방적인 동질감을 느낀 채,

그녀의 작은 몸을 그러안았다.

내 체온이 이 약한 소녀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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