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256)

결단 

『선후야!』

“엄마, 놀라게 해서 미안해. 이제 괜찮아.”

『지금 소영이랑 같이 있니?』

“응. 누나랑 있어.”

『그래. 누나랑 꼭 같이 있어. 다른 마음 먹지 마. 엄마가 선후 사랑하는 거 알지?』

“응. 이제 괜찮아. 정말로. 잠깐 착각했던 것뿐이야.”

한순간이라도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다니.

내가 어떻게 됐었나 보다.

엄마와 누나와 미소의 성공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만든 거지, 거기에 내가 끼어들 틈 같은 건 없다.

분명 내가 도움이 된 점도 있겠지.

하지만 거기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갔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엄마의 연기 연습에 나보다 연기 잘하는 사람이 어울려줬으면.

누나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상대가 달리 있었으면.

미소의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이 있었으면.

그랬으면, 엄마 누나 미소는 지금 보다 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내 덕이라고 생각하다니.

그 사장은 미친 게 틀림없다.

“엄마. 고마워. 나 사랑해줘서.”

그런 이상한 저주가 없는데도.

그런데도 엄마는 나를 사랑해주었다.

엄마의 사랑은 정말 위대한 사랑이다.

이런 몇 마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선후야. 선후가 엄마 인생에 와 줘서 엄마는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그러니까 고맙다고 하지 마. 엄마가 아들을 사랑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응…….”

“지랄은. 아 오글거려. 좀 끊어! 이 찐따야!”

“……어, 엄마, 끊을게. 응, 나도 사랑해.”

누나의 재촉에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누나. 좀 봐주면 안 돼? 엄마 걱정하시니까 전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너, 지금 뭐 하던 중인지 까먹었냐?”

잊을 리가 있나.

이렇게 기분 좋은데.

“지 누나랑 섹스하면서 엄마랑 통화하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개자식아.”

음. 그건 그렇지.

다음엔 반대로 해볼까.

엄마랑 섹스하면서 누나랑 전화 통화.

그쪽이 더 희귀할 거 같은데.

“근데 너, 엄마랑 통화하면서 자지 더 커진 거 같은데. 너 괜히 엄마한테, 윽.”

나는 누나의 잔소리를 막기 위해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그런 얘기가 되면 자지에 힘이 빠져버릴지도 모르니까.

“누나. 누나도 나 사랑해?”

“이, 찐따, 새끼가, 진짜.”

안쪽을 푹푹 찌르면서 누나에게 묻는다.

누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날 노려본다.

“말해줘, 누나. 나 사랑하는지 말해줘.”

“……사랑, 한다고.”

“더, 더 말해줘.”

“윽, 사랑, 한다고, 했, 잖아. 윽, 이 찐, 따, 새끼야. 윽.”

누나의 부끄러워하는 얼굴.

그건 누나와 섹스하면서 엄마와 통화하는 것보다 희귀할지도 모른다.

누나의 그 얼굴을 더 보고 싶어서 나는 자꾸자꾸 물어봤다.

그때마다 누나의 질도 나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누나가 날 사랑한다.

누나의 사랑과 내 사랑이 같은 사랑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이제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지만.

그 사장은 용서할 수 없다.

한세아를 제물로 내밀다니.

소속 아이돌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남자에게 미소를 맡길 수는 없다.

미소는 그만두게 하자.

위약금은 엄마랑 누나한테 빌리고.

그 돈은 내가 막노동을 해서라도, 남창을 해서라도 갚는다.

나에게는 누나가 보증한 이 자지가 있으니까.

“누나! 나도 사랑해!”

“읏, 으으읏! 아아아앗!”  

나는 누나와 함께 침대에 가라앉아간다.

* * *

누나와 질펀한 섹스를 마치고.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머릿속이 말끔했다.

현자 타임에 들어간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한다.

엄마가 그런 일을 용서할 리가 없다.

아이돌을 접대부처럼 쓰는 행위를.

내가 그만두라고 하지 않더라도 아마 엄마가 그만두라고 하겠지.

누나는 아직 힘들어 보였지만 억지로 깨워서 데리고 나왔다.

오늘이 지나기 전에 결판을 지어야 했다.

그렇게 집에 와보니.

집에 그 사장이 와 있었다.

“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말하려는데.

사장의 옆에는 또 한 사람.

한세아도 있었다.

엄마와 미소, 사장과 한세아가 있고.

거기에 나와 누나가 들어왔다.

“선후 왔니?”

“엄마. 나도 왔거든?”

“…….”

사장이 집에 와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한세아는 예상에 없었다.

그런 얘기를 들은 직후에 무슨 낯으로 이 사람의 얼굴을 본단 말인가.

그리고 이 사람을 앞에 두고 엄마한테 사실대로 얘기할 용기는 없었다.

“진선후 님. 죄송합니다. 저희 사장이 이상한 얘기를 해서.”

울컥.

어째서 세아가 나에게 머리를 숙이는 걸까.

당신은 그 남자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일 텐데.

옆에선 사장도 같이 뻘쭘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하고 싶으신 말은 많으시겠지만, 우선 대화를 좀 나눠볼 수는 없을까요? ‘그 일’에 대해선 오해도 있으신 거 같고.”

‘그 일’인가.

한세아도 엄마나 미소가 듣는 앞에서 말하고 싶진 않겠지.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그 앞에 앉았다.

이야기는 한세아가 이끌었다.

“먼저 주공작 설화에 대해서. 그 이야긴 픽션이니 진지하게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우주의 기운이.”

뭔가 말하려는 사장의 뒤통수를, 한세아가 후려쳤다.

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얼레?

“미정갤 좀 작작 하라니까.”

“미정갤?”

“미스터리 정보 갤러리입니다. 세상 모든 정신 나간 음모론이 판치는 곳이죠.”

“정신 나간 음모론이 아니라.”

퍽.

뭔가 말하려는 사장의 뒤통수를 또 한세아가 후려쳤다.

사장은 시무룩하게 침묵했다.

뭐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이도 많은 사장인데, 저렇게 자연스럽게 팬다고?

‘항상 이렇게 패고 있습니다’ 같은 느낌으로?

“저희 사장은 좋은 사람이지만, 그런 음모론에 심취해서요. UFO나 불가사의한 현상 같은 걸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혼자 믿는 건 상관없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다니…….”

“그래도 UFO는.”

퍽.

사장은 다시 침묵했다.

“보시다시피 사장은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지만, 바보 같을 정도로 좋은 사람입니다. 소속 아이돌을 소홀히 대하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건 제가 목숨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미소도, 다른 멤버들도, 저에겐 자매나 마찬가지니까요.”

“풋. 자매?”

미소와 진짜 자매면서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누나는 자매라는 말에 실소했다.

엄마가 눈치를 주자 누나는 딴청을 피운다.

한세아의 말이 진심이란 건 알 수 있다.

사장이 음모론자라는 것도. 소속 아이돌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도.

하지만, 그럼 그건 뭐야?

‘이 방에, 한세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오해라고?

어떻게 생각해도 그건 그런 의미잖아?

대놓고 묻고 싶지만 한세아 본인이 눈앞에 있으니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눈에서 묻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눈치챘겠지.

사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실은, 저와 세아는 서로 사랑하는 사입니다.”

“예!?”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한세아가 살풋이 웃으며 그 남자의 손등에 손을 올리는 모습에.

그건 어떻게 봐도 사장의 말이 실없는 농담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아아. 나의 아이돌 세아가…….

“저희는 진지하게 사귀고 있습니다. 아이돌을 은퇴하면 정식으로 결혼할 생각입니다. 반대로 결혼하면서 은퇴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혼을 허락해주십시오, 장인어른!’

사장은 왠지 당장 그렇게 말하며 큰절을 올릴 분위기였다.

‘누가 장인어른이냐! 이 도둑놈 새끼! 너 같은 늙은이에게 우리 세아는 못 준다!’

나는 그렇게 마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거 같다.

진지한 얘기 중이었는데.

그 정도로 그건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진선후 씨도 남자라면, 제가 ‘그 말’을 했던 의미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니요?! 더 모르겠는데요?!

세상 어느 남자가 자기 여자랑 자라고 호텔 방을 잡아 준다고?

그건 사랑하지 않는단 소리잖아?

역시 안 된다. 이런 남자에게 우리 세아는 줄 수 없다.

우리 세아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업을 위해, 미신을 위해, 자기 여자를 척척 내미는 그런 남자에게.

세아를 줄 수는 없다.

“진선후 님. 저희의 사랑은 진짜입니다. 모든 걸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순 없지만, 부디 믿어주시면 안 될까요? 미소는 저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세아, 너까지?

세아는 어째서 이런 남자를 편드는 거지?

자기를 팔아먹으려고 했던 남자를?

“그래 오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오해일 거야. 이 두 사람은 바보지만, 나한텐 좋은 사람이니까. 오빠가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

오해. 오해인가.

그런가. 내가 들은 건 ‘그 방에 세아가 있다’는 말뿐이었다.

그 방에 가서 세아랑 자고 그 대신 계약해달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들은 건 아니다.

어쩌면 사장은 그 방에서 세아랑 달고나 뽑기나 하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어떻게 생각해도 그건 그런 뜻이잖아.

아니면 내 머릿속이 음란마귀로 가득 차서 그런 생각밖에 못 하는 거야?

“……선후는 미소한테 아이돌 그만두라고 했다며? 선후가 그렇게까지 말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지? 그 이야기를 해줄 순 없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엄마가 입을 열었다.

엄마는 지금 엄마가 아니라 여배우 임신혜 모드였다.

카리스마에 지릴 것 같다.

“죄송합니다. 부부간의 사적인 문제라.”

사장은 고개를 깊이 숙여 사죄했다.

엄마의 카리스마 앞에서도 사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일을 말하는 것만은 타협할 수 없다는 각오를 느끼게 했다.

“선후야. 엄마는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네 편이야.”

엄마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내가 미소한테 아이돌을 그만두라고 하면 엄마는 내 편을 들겠지.

엄마가 강하게 나오면 미소도 사장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게 정말 미소를 위한 일일까?

만약 정말 오해였다면?

달을 보고 해인 줄 알고 헐떡인 거라면?

그래서 그만두게 하면, 그거야말로 미소의 인생을 망치는 거 아닐까?

미소는 불안한 얼굴로 나와 엄마를 보고 있었다.

누나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사장과 세아는 진지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지금은, 사장님과 세아 씨의 말을 믿겠습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단, 가까운 시일 내에 ‘그 일’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제 오해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오해가 아니라면 미소는 D.S.에 맡길 수 없습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단호히 말했다.

지금 나는 이 집안의 가장이니까.

가장 무능하고 쓸모없지만, 지금 이 자리에선 내가 대표였다.

엄마가, 누나가, 미소가, 나를 그렇게 인정해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금방 연락 드리겠습니다.”

사장과 세아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야기 끝났지? 난 자러 간다.”

누나는 하품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누나. 고마워.”

“흥.”

만약 그때 누나가 나타나 주지 않았다면.

누나가 날 위로해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누나한테는 아무리 감사를 해도 부족하다.

누난 내가 고마워하는 것조차 귀찮아하겠지만.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사장과 세아도 자리를 일어섰다.

“언니, 사장님, 잘 가.”

두 사람을 배웅하고.

집안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돌아왔다.

“그럼, 우리도 그만 쉴까?”

엄마의 그 말에 마음이 놓인다.

나는 생각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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