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키드 피아니스트
『바람이 불어와─ 내 안의 너를 데려가게──』
……굉장하다.
이 작은 몸의 어디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눈앞에서 듣는 진이의 진심 라이브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대단했다.
보컬이 묻혀? 그러니까 피아노를 작게 쳐?
아마추어의 얕은 생각이었다.
사람의 목소리야말로 궁극의 악기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진이의 노랫소리에 내 피아노는 묻혀버렸다.
역시 프로는 다르구나.
미소도 프로지만, 진이의 노래를 듣고 나면 비교하기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미소야, 힘내라.
그래도 오빠는 널 응원하니까……!
곡이 끝나고.
미소는 돌아가던 카메라를 끄고, 진이는 눈을 감은 채 여운에 잠겨 있었다.
나는 감동에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아이돌에 열광하는지 알 수 있었다.
“미소. 봤어?”
“어. 봤어.”
미소와 진이, 두 사람은 무언가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방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칭찬 한마디 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진이는 정말 노래 잘 부르는구나. 노래에 빠져서 숨 쉬는 것도 잊고 있었어.”
“선후 오빠. 오빠 피아노도 정말 좋았어요.”
“내가 친 건 말 그대로 반주야.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면 나 대신 누굴 갖다 놔도 비슷하게 쳤을 거야.”
겸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브리즈는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 노래를 진이 만큼 부를 수 있는 가수는 손에 꼽을 것이다.
보컬은 잘 모르는 내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오빠! 나는?”
“미소는 귀여웠어.”
“뭐야, 진짜.”
미소가 삐친 것처럼 투닥거린다.
귀여운 걸 어떡해. 달리 뭐라 말하라고.
“그런데 선후 오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진이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어린애처럼 행동하다가도 노래가 시작되니 진지해지는구나.
왠지 멋있었다.
“선후 오빠가 반주 쳐주시니까 노래 부르기 정말 편했어요. 왠지는 모르겠는데 고음도 쭉쭉 나오고.”
“그래? 반주가 좋았다니까 기분은 좋은데, 진이가 노래를 잘 부른 건 진이 실력이지 반주 덕은 아니잖아?”
“아니요. 브리즈는 연습까지 포함해서 300번은 넘게 불렀는데, 이번이 제일 잘 나왔어요. 이건 확실해요.”
“그럼 난 진이가 득음하는 순간을 목격한 거야? 운이 좋은데.”
“그런 건가…….”
진이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어떡해? 그냥 이걸로 해?”
“한 번 더 해보고 싶긴 한데……. 선후 오빠,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진이의 노래를 또 들을 수 있다면 나도 영광이다.
다시 녹화가 시작됐다.
나는 반주를 치고, 미소와 진이가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부른다.
물론 하이라이트 부분은 진이의 독무대였다.
아까보다 더욱 진지해진 진이.
리허설 때는 약간 장난기도 섞여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건 그야말로 ‘열창’이었다.
이런 작은 방에서 아마추어의 반주에 맞춰 부를 노래가 아니었다.
5만 명이 듣는 콘서트장에서 불러야 할 노래였다.
내 귀는 호강했지만, 이걸 현장에서 듣는 사람이 2명뿐이라는 게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돈을 내고 들어야 할 텐데.
그렇게, 노래가 끝나고.
나는 감동의 물결에 실려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미소가 카메라를 끄는 걸 보고서야 나는 겨우 숨통이 트였다.
“와.”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뭐라고 칭찬해야 할까.
영혼을 울리는 노래였다.
“읏…….”
칭찬하려고 진이를 보니 울고 있었다.
아니, 왜!?
“진아, 왜 그래? 괜찮아?”
미소가 진이를 달래며 밖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진이는 손을 흔들어 거절했다.
밖으로 나가는 대신 두 사람은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왠지 울컥해서. 이제 괜찮아.”
나는 얼른 티슈를 뽑아 진이에게 건네줬다.
노래 부르다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리다니.
어려 보이기만 했던 진이의 의외의 면모였다.
“휴. 선후 오빠. 진정될 동안 리퀘스트 해도 돼요?”
진이가 빨갛게 충혈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어, 그럼. 뭐든지 말해봐.”
“정말요?”
“응. 내가 칠 수 있는 거라면.”
설마 말도 안 되게 어려운 곡을 신청하진 않겠지.
하지만 진이의 리퀘스트는 내 얕은 상상을 벗어나 있었다.
“오빠, 옷 벗고 쳐주세요. 피아노 칠 때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싶어요.”
“……어?”
“아! 그거 나도 보고 싶어!”
“아니…… 그게 리퀘스트야?”
“네……. 역시 안 될까요?”
그리고 진이는 또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오빠! 진이를 이렇게 울리고! 너무해!”
“아니…….”
아니, 내가 울렸냐?
나는 당황스러움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옷을 벗고 피아노를 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클래식은 격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연주자가 타이를 안 매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관중에 대한 예의 운운하며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오는 세계다.
물론 나는 아마추어고, 돈 내고 듣는 프로 연주자의 무대와 비교해선 안 되겠지.
그렇지만 그건 피아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
생각해보면 엄마와 할 때는 피아노를 짚고 했고, 누나와 할 때는 피아노에 정액을 뿌리기까지 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나만큼 피아노를 모독한 인간이 피아노에 대한 예의를 따지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겠지.
피아노 위의 시들이(선인장)가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후 오빠, 혼자 벗기 좀 그러시면 저도 벗을게요.”
“나도!”
“잠깐!”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의상을 벗으려 드는 두 사람을 막는다.
“피아노 칠 때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싶다고 했지? 그럼 상의만 벗으면 안 될까?”
“기왕이면 아래쪽도.”
“페달도 밟잖아.”
그건 그렇지만.
“부탁드려요. 이런 부탁 다른 사람한테는 할 수 없어요. 뭐든지 할게요.”
그야 그렇겠지!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발가벗고 피아노 쳐달라고 해?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할 수 없는 부탁이면 나한테도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그리고 여자애가 뭐든지 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면 안 돼.
“오빠, 제발…….”
“제발…….”
두 아이돌이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한다.
이 거미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
남자의 알몸에 그렇게까지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상으로 남기면 문제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알았어. 대신──”
“해냈다!”
“예아!”
내 대답에 미소와 진이는 신나서 하이파이브를 한다.
너희들…… 특히 진이 너는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지?
그것도 연기였어?
“……대신. 녹화는 안 돼. 아무한테도 이야기하면 안 되고. 만져도 안 되고 눈으로만 봐. 그리고 이건 이 자리에서 끝이야. 이 이야기 다시 꺼내기도 없어.”
“알겠습니다.”
“알았어!”
미소는 원래 언제든지 보고 싶으면 볼 수 있고, 대놓고 욕실에도 들어올 정도고.
진이도 뭐…… 그런 게 궁금할 나이고.
떠들고 다니지만 않으면 문제 될 거 없겠지.
……없겠지?
마음을 굳히고 넥타이를 풀자 꺄꺄 거리는 환호성이 울린다.
이 애들은 내 알몸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친구와 함께 비일상을 체험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겉옷을 벗고 와이셔츠 단추를 푼다.
왠지 조용해져서 보니 두 사람 나란히 손을 맞잡고 나의 스트립쇼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민망한데.
에라. 망설일 거 뭐 있어.
보여주기에 부끄러운 몸도 아니고.
기왕 하는 거 제대로 서비스 해주자.
나는 셔츠와 바지를 벗어 관객석에 던졌다.
“꺄아!”
자지러지게 좋아하는 관객들.
단 두 명뿐이지만, 일기당천의 관객들이었다.
이제 남은 건 팬티 한 장뿐인가.
두 명의 관중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보고 싶으면 마음껏 봐라!
“꺄아악!”
오늘 가장 큰 함성이 들렸다.
“몽골리안 데스웜!”
진이가 내 가랑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뭐야 그건?
요즘 젊은 애들 말은 못 알아듣겠다니까.
내 알몸 정도로 미소녀 두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싼 거겠지.
나는 이제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발가벗은 채 관중석에 인사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나를 맞이한다.
피아노 의자가 차갑다. 처음 알았네.
뒤늦게 수치심이 밀려왔지만 애써 진정한다.
옷을 입든 벗든, 할 일은 똑같다. 나는 피아노를 칠 뿐.
피아노 칠 때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싶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마침 딱 맞는 곡이 있지.
요즘 내가 열심히 연습하는 곡.
어렸을 땐 어려워서 포기했던 곡.
‘라 캄파넬라’.
이 곡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던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감명받은 ‘초절기교’ 리스트가 피아노로 편곡한 곡이다.
아무튼 멋진 거라면 뭐든 좋아했던 나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느니, ‘초절기교’라느니, 이런 멋진 네이밍을 보고 어떻게든 이 곡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치기엔 실력도 신체 조건도 부족했다. 저런 옛날 괴물들이 만든 곡을 아무나 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땐 포기하고 묵혀놨지만,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면서 연습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제대로 치진 못한다.
남에게 들려줄 만한 연주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지금 관객들은 연주를 듣고 싶은 게 아니다.
피아노 칠 때 움직이는 근육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곡이 딱 맞겠지.
어쨌든 내가 칠 줄 아는 곡 중에선 이게 제일 힘든 곡이니까.
“후.”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어느 근육이 움직이는지 의식하면서.
피아노를 칠 때 어떤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런 건 나도 생각도 못 했지만, 의외로 중요할지도 모른다.
한 음 한 음 누를 때마다 근육의 움직임을 느낀다.
옆에서 볼 땐 어떤 느낌일까?
역시 영상으로 찍었어야 했나?
아니, 영상은 나중에 직접 찍어도 된다.
지금은 연주에 집중하자.
집중해도 치기 어려운 곡이니까.
4분 40초는 의외로 짧았다.
땀도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몸에 열이 오른 건 수치심 때문이겠지.
연주는 어렵지만 근육 자체는 많이 쓰지 않았다.
관객들은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네.
연주를 마친 나는 일어나서 관객석에 인사한다.
미소는 멍한 얼굴로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짝.
진이는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섹최몸!”
뭐야 그건.
요즘 애들 말은 못 알아듣겠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