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56)

미소의 부탁, 두 번째 

“오빠! 나 오늘 오후에 또 피아노 쳐주면 안 돼?”

아침에 출근하기 전, 미소가 말하기 어려운 듯이 나에게 말했다.

“저번처럼? 이번에도 SNS에 올리게?”

“응……안 될까?”

미소는 미안해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부담가질 필요 없는데.

지난번에 미소의 공식 SNS에 올린 영상은 꽤 반응이 좋았다.

변변한 음향장비도 없이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했는데도.

미소도 평상복 차림이었고, 인기 아이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오히려 먹혔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상한 댓글도 있었지만 예전처럼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 사건 이후 나도 상당히 마음이 너그러워진 것 같다.

이런 게 충격요법인 걸까.

“안 될 게 뭐 있어. 곡만 미리 알려줘. 연습해놓게.”

“고마워 오빠! 끝나고 서비스 잘해줄게!”

미소는 손을 오므리더니 위아래로 문지르는 시늉을 한다.

뭘 문지르는 건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저번 같은 서비스는 안 해줘도 돼.”

딱히 미소의 서비스를 받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정말이니까! 특히 저번 같은 서비스는!

이 정도는 오빠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고!

미소가 나가고, 나는 미소가 요청한 곡을 들어보았다.

요청곡은 네버러브와 브리즈, 두 곡이었다.

네버러브는 미소네 그룹 스프링의 최고 히트곡이다.

당연히 나도 많이 들어봤으니 잘 안다.

브리즈는 최신곡의 후속곡으로,나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아서 모르는 곡이었다.

나는 한 번 들은 곡을 척하니 쳐낼 정도로 똑똑하질 못하다.

최소 3번은 들어봐야 했다.

첫 번째엔 멜로디를 익히고, 두 번째엔 가사에 집중해 노래의 의미를 파악하고, 세 번째엔 피아노로 어떻게 옮길지 생각한다.

네버러브는 파워풀한 안무에 빠른 비트가 들어간, 그야말로 요즘 아이돌 같은 곡이다.

내용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남자 따위 다신 안 만나!’.

브리즈는 반대로 보컬에 중점을 둔 발라드곡이다.

봄에 부는 산들바람처럼 애틋한 소녀의 사랑을 노래한 곡이었다.

이건 좀 살살 치는 게 좋겠네. 보컬이 죽으면 안 되니까.

대충 머릿속에 입력이 됐으니 연습 삼아 쳐본다.

브리즈는 느린 발라드니까 치긴 쉽네.

분위기만 잘 잡으면 되니까 솔직히 연습할 것도 없다.

이건 내 피아노보다도 미소가 제대로 부를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노래 난이도가장난 아닌데.

가족의 눈으로 볼 때 미소는 노래도 춤도 완벽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땐 다른 멤버들한테 밀리는 게 사실이다.

보컬은 진, 댄스와 랩은 에이, 종합적으론 리더인 세아.

……응? 이렇게 보니까 미소는 잘하는 게 없지 않아?

아니, 그래도 미소는 귀여우니까. 아이돌은 외모도 실력이고.

그렇다고 다른 멤버들이 미소에 비해 외모적으로 밀린다고 하긴 어렵지만…….

…….

힘내라 진미소!

내 눈엔 네가 최고야!

네버러브는 브리즈와는 반대로 화려하게 치는 게 좋을 거 같다.

흠. 얘는 대놓고 화려하게 가볼까. 어레인지도 좀 주고.

그런데 이러면 팬들은 원곡 파괴라고 싫어하려나?

그럼 원곡 버전이랑 어레인지 버전이랑 두 가지로 준비해봐?

그래서 둘 다 들려주고, 더 좋은 쪽으로 올리라고 하지 뭐.

일단 던져주면 미소네 소속사에서 알아서 해줄 거다.

그렇게 나는 오후에 있을 촬영을 위해 꼼꼼히 준비했다.

지난번엔 갑작스러운 촬영이라 준비도 없이 즉흥으로 했다.

피아노 자체도 너무 오랜만이었고.

그래서 아쉬운 점도 많았다.

솔직히 다시 보기엔 부끄러운 퀄리티였다고 생각한다.

댓글로 그렇게 말한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이번에는 더 열심히 준비했다.

개인적으론 만족할 만한 퀄리티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한다.

흠.

기왕이니 복장도 제대로 갖춰 입을까?

지난번엔 평소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올 초에 누나가 맞춰준 정장을 꺼냈다.

거울을 보며 머리도 좀 손질하고.

그리고 피아노에 앉는다.

실력은 아마추어지만, 겉으로 봐서는 프로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훗. 이렇게 보면 나도 꽤 잘생겼을지도?

…….

좋아. 준비는 완벽해.

언제든지 덤벼라!

……라고는 했지만.

“오빠! 나 왔어!”

“안녕하세요, 미소 오라버니.”

현관 앞에서 나는 굳어버렸다.

미소는 원군을 데리고 왔던 것이다.

미소 외 1명.

진이었다. 같은 그룹 멤버인.

우와! 연예인이 우리 집에 왔어!

라고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미소 오빠 진선후입니다.”

나는 뻣뻣하게 인사했다.

“와! 오빠 정장 입었네?”

“어, 응. 기왕 찍을 거 제대로 할까 싶어서. 이상해? 벗을까?”

“아니! 하나도 안 이상해! 꼭 이대로 해!”

미소는 좋아하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미소와 함께 온 그룹 멤버, 진에게 살짝 눈길을 돌렸다.

진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실물로 보니까 너무 멋있어요! 사인해주세요!”

마치 아이돌을 만난 팬 같은 반응.

이건 반대 아냐? 아이돌은 넌데.

그리고 현실에서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사람 처음 봤어.

그런 컨셉인가?

화려하게 물들인 금발 머리에 작고 귀여운 소악마 같은 이미지.

외모는 이렇지만, 이래 봬도 진은 아이돌 중에선 손꼽히는 실력파 보컬리스트다.

“사인은 제가 받아야 할 거 같은데요?”

나는 의외의 방문객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미소의 지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미소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하지만.

“미소. 잠깐만.”

나는 소곤소곤 미소를 데리고 거실 구석으로 갔다.

“오빠 미안. 말도 안 하고 데려와서. 진이도 영상 같이 찍을 거야.”

그 구석에서 미소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사과했다.

“미리 말하면 오빠 계속 긴장하고 있을 거 같아서. 그래도 진이는 정말 좋은 애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나한테 대하듯 막 대해도 돼!”

“미소야…….”

내가 언제 너한테 막 대했니?

그래도 미소의 마음은 이해가 된다.

미리 온다고 이야기했으면 나는 하루종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겠지. 연습도 제대로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해줬으면 했다.

집에 혼자 있으면서 이렇게 멋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우니까.

“……알았어. 그냥 좀 놀랐던 거뿐이야. 그래도 다음부턴 말해줘.”

“응! 대신 내가 서비스──.”

나는 얼른 미소의 입을 막았다.

“쉿. 그런 소리도 하지 마.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아……. 응. 미안.”

미소는 멋쩍은 듯 웃었다.

뭐지? 이 반응은?

“……혹시 너, 이미 말한 건 아니지?”

“아, 아닌데?”

미소의 반응이 수상하다.

설마 정말로 말했어?

진은 그래서 온 건가? 

동생한테 손댄 쓰레기 같은 오빠를 처리하러?

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히 각오를 다졌다.

“아무튼 조심해. 진이 있을 땐 이상한 티 내면 안 돼. 알겠지?”

“응……. 오빠.”

일단 미소와 함께 진에게 돌아갔다.

너무 오래 시간 끌면 오히려 수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죄송해요 오라버니. 갑자기 찾아와서.”

“아니에요. 대접해드릴 게 없어서.”

“말 놓으세요 오라버니. 저랑 미소는 소울메이트니까, 미소한테 대하듯이 똑같이 대하시면 돼요.”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내미는 진은 정말로 좋은 아이 같았다.

나도 조금 안심하며 손을 마주 잡았다.

“알았어. 그럼 말 놓을게. 대신 오라버니는 부담스러우니까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네, 오빠!”

윽.

진이는 와락 내 목에 안겨 왔다.

역시 아이돌. 팬 서비스가 대단하다.

내가 아다였으면 이 한 방으로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와. 오빠 몸 진짜 좋으시다. 운동하세요?”

“아, 응, 조금.”

……근데 너무 만지는 거 아니니?

진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내 어깨나 가슴에 찰싹찰싹 손을 댔다.

내가 아다였으면 얘가 날 좋아한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입장이 반대였으면 나는 즉시 성추행 현행범으로 잡혀갔을 것이다.

“내가 말했잖아. 우리오빠 멋있다고.”

미소도 말리지 않고 옆에서 웃고만 있었다.

미소야. 네 오빠를 이렇게 막 만지는데 넌 아무렇지도 않니?

“그, 그럼 얼른 촬영부터 할까? 뭐 준비할 거 있어?”

“응, 오빠. 우리 옷 좀 갈아입고 올게.”

“그래. 갈아입으면 내 방으로 와.”

미소와 진이는 속닥거리며 미소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방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휴. 

깜짝 놀랐네.

설마 미소가 다른 멤버를 데려올 줄이야.

미소가 그룹으로 데뷔한 지는 5년도 넘었지만, 그 그룹 멤버를 실제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마 나 때문에라도 집에 데려오지 않았겠지.

낯선 사람 만나면 내가 긴장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데려온 걸 보면 미소가 보기에도 내 증상이 많이 나아졌다는 걸까?

실제로 진이를 봤을 때 긴장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병적인 증상은 나오지 않았다.

숨쉬기 힘들다든가, 심장이 너무 뛰어서 괴롭다든가.

나는 심장에 손을 얹어보았다.

좀 두근대긴 했지만, 진이 같이 예쁜 여자애가 끌어안으면 누구라도 두근댔을 것이다.

……혹시, 정말로병이 나은 건가?

아니. 그렇게 갑자기 나을 리가 없다.

지금은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인 거겠지.

다음 정기 검진 때 윤서아 선생님께 물어봐야겠다.

윽. 윤서아 선생님…… 생각하니 또 발기가…….

휴. 진정하자.

손님도 와 있는데 흉한 걸 보여줄 순 없지.

그런데 진이는 미소랑 동갑치고는 정말 작구나.

검색해보니 프로필 상 키는 155cm에 몸무게 37kg.

참고로 본명은 박수진이었다.

프로필엔 155cm라고 돼 있지만 실제 키는 그보다 더 작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 몸무게가 어떻게 30킬로대가 나오지? 내장 다 들어있는 거 맞아? 

황수아 배우도 정말 가녀리다고 생각했지만, 진이는 그 정도를 넘어섰다.

수아 씨 손을 잡았을 때 ‘세게 쥐면 부러질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진이를 안았을 때는 정말 ‘건드리면 부러질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긴장됐나? 부러질까 봐?

똑똑.

아. 왔다.

“오빠. 들어갈게.”

미소와 진이가 나란히 들어온다.

두 사람은 평상복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무대의상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계열의 반짝이는 가죽 소재로 된, 카리스마 넘치는 의상이다.

그리고 조금 야하다. 아니, 제법.

이런 옷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데, 원래 이렇게 야한가?

미소는 맨다리를 훤히 내놓고 있고, 진이는 그물 모양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솔직히 눈 둘 곳이 없었다.

“선후 오빠 침대다!”

진이는 방에 들어오자 내 침대에 뛰어들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의상에 비해서 하는 짓은 어린애였다.

아니…… 이건 어린애라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것도 다 계산된 행동인가?

내가 긴장하고 있으니까, 더 친근해져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과연. 이게 아이돌인가.

넘치는 친화력이 부럽다.

나한테도 좀 나눠줬으면 좋겠다.

아. 팬티 보인다. 

근데 저건 팬티가 아니구나. 속바지였다. 

속바지면 괜찮나?

“나도!”

이어서 미소도 침대에 뛰어들었다.

미소는아무 생각 없겠지.

아마 진이가뛰어드는 걸 보고 그냥 따라했을 거다.

두 사람은 깔깔거리며 내 침대에서 장난쳤다.

……그나저나 이상한 기분이네.

내 방 침대에 아이돌이 누워있어.

으음.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말자.

진이 앞에서 서버리면 골치 아프니까.

“침대에서 장난치면 안 됩니다.”

“네~.”

내 말에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카메라를 세팅한다.

“이렇게 찍으면 돼?”

“좀 더 카메라를 이쪽으로.”

방금 전까지 장난치던 게 거짓말처럼 진지하게 상의하는 두 사람.

내 방에 카메라가 있다.

신기하게도 긴장되진 않았다.

어렸을 땐 그렇게 찍는 걸 싫어했는데.

특히 중학교 때 ‘그 사건’ 이후로는 거의 카메라 공포증 수준이었다.

지금은 어차피 나는 들러리고 메인은 이 두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도 있지만, 분명히 무섭지 않았다.

나를 해치는 건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 너머에서 찍는 사람이다.

카메라 자체를 무서워할 필요 없다.

그 카메라로 찍는 사람에게 악의가 있는 거니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나도 성장한 건지도 모른다.

“응. 이제 됐어!”

카메라 세팅은 끝난 거 같다.

“선후 오빠, 먼저 브리즈부터 갈게요.”

“처음에는 연습 삼아 맞춰볼게. 리허설이야.” 

미소가 카메라를 작동시키고, 얼른 정해진 자리에 섰다.

나는 건반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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