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떻게 목욕이 끝났는지 모르겠다.
욕실에서 나온 나는 이미 해롱해롱.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누나와 그렇게나 하고 와서는 욕실에서 두 번이나 더 사정했다.
자지가 이제 그만 용서해달라고 빌고 있었다.
흑염룡이 아니라 흑염소였다.
내가 침대에 풀썩 쓰러지자, 내 양옆으로 무게가 걸렸다.
“언니! 거긴 내 자리야!”
오른쪽에는 엄마, 왼쪽엔 누나가.
각각 내 팔을 잡고 누워있었다.
자리를 뺏긴 미소는 발을 동동 굴렀다.
“내 자리 네 자리가 어딨어? 먼저 온 사람이 임자지. 넌 바닥에서 자. 아니면 네 방에서 자든가.”
누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엄마는 본인과는 상관없는 얘기라는 듯 내 손을 잡고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역시.
내 다리는 두 개뿐인데 세 다리를 걸치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구나.
이렇게 되면 z축으로도 누울 수 있는 3차원 침대를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
“흥. 그럼 난 여기 누울래!”
“컥.”
미소는 3차원 침대의 개발을 기다리지 않았다.
2차원인 침대를 강제로 3차원으로 만들었다.
내 배 위에 올라타 누운 것이다.
“야. 진미소. 네가 거기 누우면 걔는 어떻게 자?”
“그래. 오빠 힘들어. 내려와.”
“오빠, 괜찮지?”
“그……래.”
……그래.
세 다리를 걸친 이상,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카르마였다.
깃털처럼 가벼운 미소 한두 명쯤은 배 위에 올리고도 잘 수 있어야 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티격대는 누나와 미소, 그걸 지켜보는 엄마와, 그사이에 끼인 나.
나는 왠지 지금 상황이 너무 행복하게 느껴졌다.
오른쪽엔 엄마를. 왼쪽엔 누나를. 그리고 가운데엔 미소를.
나는 사랑하는 가족 세 사람을 한꺼번에 팔로 끌어안았다.
“엄마. 그리고 누나도, 미소도. 고마워.”
“선후야, 갑자기 왜 그래?”
“뭐야? 너 미쳤니?”
“불안하게 왜 그래, 오빠.”
따뜻하다. 포근하다. 행복하다.
나는 지금 가족들의 품에 안겨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에.
“날 새 가족으로 받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너무 잘해줘서 고마워.”
“선후야. 선후가 건강하게 커 줘서 엄마가 더 고마워.”
“오글거리긴. 찌질하게 울긴 왜 울어?”
“울지마, 오빠. 앞으론 내가 더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거기에 담긴 따뜻함은 같았다.
그날 그렇게 우리는 한데 뭉쳐서 잠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안고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면서.
새 가족이 너무 잘해준다.
1부 完.
선인장과 콘돔, 그리고 피아노 -2부 시작-
화창하다.
나는 오랜만에 햇빛을 받으며 거리를 걷고 있다.
목적은 있지만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집 근처 상가를 둘러본다.
내가 살만한 물건이 있나 하고.
오늘은 황수아 배우와 연기 연습이 있는 날.
장소는 수아 씨 집이지만 아파트 옆 동이라 멀리 나갈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남의 집에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뭐라도 선물을 사갈 생각이었다.
엄마의 지인이니까. 그럴수록 예의는 지켜야지.
그렇다고 너무 비싼 물건은 살 수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돈이란 엄마나 누나가 준 용돈이니까.
그런 돈으로 주제에도 안 맞게 비싼 물건을 살 순 없다.
엄마나 누나는 아무리 써도 신경도 안 쓰겠지만 나는 신경 쓰인다.
난 학생 신분이니까 비싼 건 못 사더라도 수아 씨도 이해해주겠지.
지금은 학생조차 아니긴 하지만.
그래서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싸면서, 너무 초라하지 않고, 버려지지 않을 물건.
기왕이면 실용적인 게 좋으려나.
먼지떨이? 화장지? 세제?
으음. 뭐든 선물로는 이상한데.
상가를 헤매던 내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어느 작은 꽃집이었다.
거창하지 않게 꽃 한 송이 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아 씨 집 상태를 생각해보면 그냥 쓰레기만 늘리는 거 아닐까?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꽃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자 꽃집 직원으로 보이는 누나가 말을 걸어왔다.
“아, 네. 아는 분 집에 선물로 하나 사갈까 싶어서요.”
“생각해둔 꽃은 있으세요?”
“아니요. 제가 꽃은 잘 몰라서.”
꽃집 누나는 꽃의 종류나 꽃말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낯선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 했을 텐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마치 정상인처럼.
“혹시 오래 놔둬도 괜찮은 꽃도 있을까요? 아마 선물해도 그분이 신경을 못 쓰실 거 같은데.”
“그러시구나. 그럼 화분은 어떠세요? 선인장 같은 다육이는 오래 놔둬도 괜찮은데.”
선인장 화분인가. 귀엽네.
그중에는 미니어처 장난감같이 생긴 화분에 담긴 선인장도 있었다.
“그럼 이걸로.”
나는 ‘1개 만원’이라고 적혀있는 자리에서 하나를 골랐다.
만원이면 부담스럽지도 않고, 생긴 것도 귀여워서 선물용으로 딱 맞았다.
“오늘 처음 오셨으니까 싸게 드릴게요. 오천 원만 주세요.”
“정말요?”
자주 와서 싸게 주는 것도 아니고, 처음 와서 싸게 준다고?
“네. 그리고 하나만 하면 외로우니까 이것도 가져가세요.”
꽃집 누나는 ‘1개 2만 원’이라고 적혀있는 자리에 있던 선인장 하나를 같이 올렸다.
예쁜 선인장 머리 부분에 빨간 꽃이 피어있는 작은 화분이었다.
“아, 저, 돈이 별로 없어서.”
“이건 서비스로 드리는 거예요. 자주 오시라구.”
“아…… 네. 고맙습니다…….”
장사를 이렇게 해도 되나?
만 원짜리를 사는데 5천 원으로 깎아주면서 서비스로 2만 원짜리를 얹어준다고?
가게 주인이 알면 잘리는 거 아냐?
배보다 배꼽이 큰 서비스.
괜히 부담스러웠던 나는 뭐라도 하나 더 사야 할 것 같았다.
“저, 그럼 이것도 따로 싸주세요.”
내 눈에 띈 건 ‘1개 5천 원’짜리 화분.
한쪽 귀퉁이가 말라서 시들시들한 선인장 하나를 골랐다.
그 시들시들한 모습이 왠지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눈에 밟혔다.
“그것도 선물하시게요?”
이렇게 시들시들한 건 선물하기 좀 그렇겠지.
꽃집 누나가 미묘한 얼굴로 묻는다.
“아니요. 이건 제가 키우려고요. 이쪽 2개는 선물로 드리고.”
“그러시구나. 그럼 이건 제가 손님한테 선물로 드릴게요. 예쁘게 키워주세요.”
“예? 아니, 그렇게까진…….”
부담스러워서 하나 더 샀는데, 그걸 또 서비스로 주겠다니.
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꽃집 누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미 포장하기 시작했다.
남한테 뭘 서비스 주는 걸 좋아하는 누나인 것 같다.
꽃집 누나가 인형 같은 작은 팻말에 예쁜 글씨로 무언가를 적는다.
힐끔 보니 선인장 이름과 함께 ‘물은 1주일에 1번’이라고 적혀있었다.
선인장 화분마다 각각 팻말을 꽂아준다.
그 팻말도 따로 파는 물건 같은데……
나는 그냥 말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들시들한 선인장은 따로 예쁘게 포장해주었다.
어차피 내가 키울 거니까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고맙습니다. 또 올게요.”
아마 또 올 일은 없을 것 같다.
서비스는 고맙지만,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수아 씨 줄 선물은 싸게 살 수 있어서 좋았네.
포장도 그럴듯하고.
집에 돌아와서 시들시들한 선인장 포장을 뜯어보니.
팻말 뒷면에 ‘이서화, 010-3xxx-xxxx’라고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
그 누나도 덜렁이구나.
개인정보 유출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악용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나는 못 본 척하고 팻말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시들시들한 선인장은 피아노 위에 올려두었다.
* * *
“엄마! 제발 그만 좀 해!”
“그만 좀 해? 뭘 그만해? 아들이 처자식 놔두고 바람이 났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엄마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추궁한다.
실제의 나, 진선후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표정이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반박했다.
“바람 아니라고. 선아랑은 일 때문에 만나는 거라고 했잖아.”
“이 사회에선 그런 걸 바람이라고 불러. 일 때문에? 너 정말 그런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