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의 부탁
잠에서 깼을 때, 시간은 이미 오후였다.
생각보다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이미 옆에 없었다.
혼자라고 생각하자 이상하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늘 혼자 자고 혼자 일어났는데. 왜 그러지?
침대에서 일어나 우선 샤워부터 한다.
엄마와 한 뒤에 씻지도 않고 바로 잠들었으니까.
샤워 물이 닿아 따끔거린다.
아래쪽을 보니 배에 손톱자국이 깊이 나 있었다.
엄마와 정사 도중 엄마가 새겨준 상처였다.
엄마와는 할 때마다 상처가 생기는구나.
저번엔 등에, 이번엔 배에.
다음엔 어딜까?
왠지 기대된다. 상처를 수집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컴플리트 하면 특별 상품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씻고 나와, 엄마가 차려놓은 밥을 먹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음……. 아직 조금 아픈가.”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해본다.
통증은 조금 있지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가 있었다면 못 치게 했겠지.
얌전히 피아노 뚜껑을 덮었다.
나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아마 하루 정도만 더 쉬면 다 나을 것이다.
피아노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칠 수 있다.
전혀 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럼…… 뭐하지?”
생각해보면 나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학교는 내가 쓰러지자마자 엄마가 휴학신청을 냈다.
별다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알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음…… 알바라고 하니.
며칠 뒤에 황수아 배우와 레슨 약속이 있다.
내가 연기 지도를, 황수아 배우한테.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약속은 해버렸고, 한다고 한 이상 최선을 다해야겠지.
대본이나 좀 읽어 놓을까?
…….
………….
나는 엄마에게서 복사해 받은 대본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음…….
잘 모르겠네.
황수아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읽어봤지만, 이해가 잘 안 간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왜 이혼하지 않는 거야?’.
황수아 배우가 연기하는 신아영.
주정환 배우가 연기하는 황진우.
신아영과 황진우는 부부이고, 두 사람 사이엔 수정이라는 7살 딸이 하나 있다.
남편 황진우는 중견기업 회장의 아들로 기업 후계자다.
현재 직책은 실장이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사장으로 승진이 예정되어 있다.
능력도 있고 돈도 있고 얼굴도 된다. 드라마 남주니까 당연하겠지.
하지만 남편으로선 0점짜리 남자다.
결혼해서 애까지 있으면서 첫사랑에 휘둘리고, 아내와 모친에게는 오히려 화를 낸다.
어린 딸에게도 무관심하고 오로지 첫사랑인 김선아(신지혜 분)에게만 마음을 쓴다.
첫사랑인 선아도 싫지는 않은지 어중간한 태도로 유부남인 황진우와 만나고 있고.
사실상 바람이다.
황수아 배우가 연기하는 아내 신아영은 능력도 있고 집안도 빵빵한 여자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시댁에서 살면서 별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시어머니(엄마 임신혜 분)에게는 매일 타박받고 남편도 무시.
시아버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하나뿐인 딸도 반항기다.
신아영은 집안에서 고립된 상태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원망하기보다 남편이 마음을 돌리길 바라며 노력하고 있었다.
“신아영이 남편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뭐지?”
대본에 쓰여 있는 내용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대사는 대본에 나와 있지만, 캐릭터의 감정 묘사 같은 건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니까.
그럼 대본을 쓴 작가에게 물어봐야 하나?
하지만 이 드라마의 작가는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다. 쉽게 만나 이런 걸 물어볼 수 있을 리 없다.
오히려 부외자인 내가 대본을 읽은 걸 문제 삼을지도 모른다.
음…….
그럼 그냥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나.
능력도 있고 집안도 빵빵하고 외모도 받쳐주는 여자, 신아영.
이런 완벽한 여자에게 이혼녀 딱지가 붙는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남편을 사랑해서?
아니면 아이를 위해? 가족을 지키고 싶어서?
일단 전부 다 동그라미 쳐놓고 생각해볼까.
여기서부턴 내 상상이다.
남편 황진우는 바람이나 피우는 쓰레기 같은 남자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연애하던 시절 황진우는 정말 멋지고 좋은 남자였다. 그래서 신아영도 황진우를 사랑해 결혼하게 되었다.
지금은 저렇지만 곧 예전의 좋은 남편으로 돌아올 거라고 신아영은 믿는다.
시부모님도 처음부터 까칠했던 건 아니다.
좋은 사람들이지만 최근 회사에 닥친 악재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중요한 프로젝트에 집중하지는 않고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있다. 말을 해도 안 들어 처먹는다. 그래서 며느리한테 화살이 가버렸다.
지금은 저렇지만 남편만 정신 차리면 다시 좋은 시부모님으로 돌아올 것이다.
딸 수정이도 그렇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여운 딸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외도하며 관심을 주지 않자 비뚤어져 버렸다.
아빠가 원래대로 돌아와 가족의 사랑을 느낀다면 수정이도 돌아올 것이다.
흠…….
이렇게 써놔도 잘 와닿지 않네.
그럼 만약 내가 신아영 같은 상황이라면?
엄마도 누나도 미소도, 다 나를 싫어한다.
나는 이 집안의 불순물.
다들 나만 보면 인상을 쓰고 불평불만.
왜 저런 게 우리 집에 있나 하고 들으란 듯이 한탄한다.
아.
안 된다. 눈물 날 거 같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집을 나갈까? 아니면 원래의 행복한 가족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할까?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죽어도 가족을 버리지 않는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듣고 고친다.
그래도 안 되면 빌어서라도 용서받는다.
그래도 안 되면…… 용서받을 때까지 노력해야겠지.
가족을 버린다는 선택지는 나한테 없다.
그럼 신아영도 그런가?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가족을 버리기보다, 끝까지 노력해서 가족을 되찾으려 하는 건가?
그런 거겠지. 아니면 벌써 이혼을 하든 가출을 하든, 끝내고도 남았다.
결국 문제는 남편 황진우의 마음이구나.
남편의 마음만 돌릴 수 있으면, 김선아만 제거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남편도, 시부모님도, 딸도.
다시 행복한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겠지.
이건 드라마다. 소위 말하는 ‘막장 드라마’.
마지막엔 여주인공인 김선아가 황진우의 마음을 얻고 결국 새로운 가정을 꾸밀 것이다.
아마 남주 황진우는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버리고 여주를 택하겠지.
‘악역’인 황진우의 모친과 아내 신아영은 황진우가 떠난 뒤에 후회 속에서 피눈물을 삼키는 것이다.
회사는 무너지고 집안은 풍비박산.
오직 여주인 김선아와 황진우만이 해피엔딩이다. 덤으로 딸 수정이까지는 따라올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엔딩은 그런 식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게 ‘사이다’니까.
“음……. 근데 이게 정말 사이다인가?”
아내 신아영에게는 고구마밖에 없는 결말이다.
하지만 시청자 대부분은 여주인공인 김선아에게 이입할 테니, 악역인 신아영이 꾸역꾸역 고구마를 쳐드시는 게 시청자로선 반대로 통쾌할 것이다.
“남주 이 쓰레기 새끼.”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이 남주는 쓰레기다. 답도 없는 쓰레기.
시청자들이 보기엔 여주인 김선아에게 다해주니 멋지고 천사 같은 남주겠지.
하지만 무책임하게 가정을 버리고 바람난 쓰레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신아영과 가정을 꾸리지 말았어야지.
이런 남자를 끝까지 기다리며 마음을 돌리길 바라는 신아영.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대체 이 남주는 뭘 어떻게 했길래 신아영이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거지?”
나의 연구는 계속됐다.
* * *
“다녀왔습니다!”
어느샌가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저녁 늦게 미소가 집에 돌아왔다.
나는 현관 앞으로 나가 미소를 마중했다.
“어서 와.”
“오빠! 다녀왔어!”
확 달려와 안기는 미소.
나는 그런 미소를 끌어안아 준다.
살짝 풍기는 젊은 여자애의 땀 냄새.
아마 씻지도 못하고 바로 온 거겠지.
오늘도 열심히 움직였을 텐데.
“미안, 오빠. 냄새나?”
내가 무심코 킁킁대고 있자 미소가 화들짝 놀라 떨어진다. 이런.
“아니. 좋은 냄새야.”
“변태.”
미소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다시 안겨 왔다.
얼굴을 붉히는 게 귀엽다.
나도 질리지도 않고 다시 안아줬다.
“아, 오빠, 부탁이 있는데.”
그러다 다시 떨어진다.
“뭔데?”
미소가 나한테 부탁이라니.
미소는 기분파에 어리광쟁이라 하고 싶은 건 일단 해버리는 스타일이다.
그런 미소가 진지하게 부탁이 있다고 하다니.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드는걸.
“잠깐 이리 와서 앉아봐.”
미소를 따라가 거실 소파에 앉는다.
대체 얘가 뭔 얘기를 하려고 이래?
목욕 중에도 마음대로 쳐들어오면서.
나는 긴장의 끈을 조이고 미소의 말을 기다렸다.
“실은, 오빠 피아노 치는 동영상을 사장님이 봤거든.”
“사장님? 미소네 소속사 사장님?”
그걸 왜 사장님이?
나는 눈짓으로 미소에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미소는 난처하다는 듯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중에 오빠가 피아노치고 내가 노래 부른 거 있잖아. For you. 그걸 우리 SNS에 올리는 게 어떠냐고 해서 말이야.”
“응? 그걸?”
왜 굳이?
노래를 올리고 싶다면 따로 찍으면 될 텐데.
“나는 안 된다고 했는데, 사장님이 이건 기회라고,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면서……. 그래서 올려도 될지 오빠한테 물어보라 했거든.”
미소가 난처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마친다.
음…… 그런 동영상을 SNS에 올리다니.
소속사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마추어의 영상을 올리는 의미가 있을까?
올릴 거면 프로 뮤지션들 데리고 제대로 찍는 게 낫지 않나?
아마추어라서 의미가 있는 건가? 아니면 미소가 자연스럽게 나와서?
미소네 소속사 사장님은 어쨌든 그쪽 방면의 프로다.
아마 나는 몰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응. 괜찮아. 올려도 돼.”
“정말?!”
잠시 생각하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소속사 사장님이 그렇게 말했으면, 뭐든 미소한테 손해는 아닐 거 아냐? 난 어떤 식으로든 미소한테 도움이 된다면 기뻐. 좀 부끄럽긴 하지만.”
“오빠…….”
미소는 감동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평생 도움 안 되는 오빠였으니, 이렇게라도 미소한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도 기쁘다. 뭐, 그나마도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런 영상 보는 사람들은 미소한테나 집중하고 나는 배경 취급이겠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나는 부끄러운 것만 조금 참으면 된다.
“오빠! 고마워!”
또다시 안겨 오는 미소.
나도 미소를 껴안고 등을 쓰다듬어 준다.
음. 역시 미소의 몸은 부드럽군.
미소에게서 풍기는 여자의 기운에 아랫도리가 그만 반응하고 만다.
미소도 내 반응을 눈치챘는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오빠, 대신 내가 서비스해줄게. 어젠 많이 참았잖아?”
아침에 엄마가 이미 빼준 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엄마랑은 불완전연소로 끝난 데다가 그 뒤에 자고 먹고 하면서 에너지도 충전했다.
그리고 미소의 서비스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럼, 오빠 방으로 갈까?”
미소가 음란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