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여배우
그날 저녁, 임신혜는 촬영장에 와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하고 화장도 일부러 진하게 칠했다.
이번에 맡은 배역은 대기업 회장님의 아내이자 기업 후계자의 어머니.
그녀의 대명사가 된 악역 시어머니였다.
스으.
숨을 깊이 마시고 분위기를 전환한다.
지금부터 그녀는 엄마가 아니라 배우 임신혜였다.
* * *
“엄마. 나 오늘 선아 만났어.”
“선아? ……아, 그 선아? 그래서?”
“엄마가 선아한테 나랑 헤어지라고 했어?”
“누가 그래? 선아 그 계집애가 그러디?”
“엄마!”
“황진우. 황.진.우.실.장.님. 언제까지 철없는 소리 할래? 프로젝트에 목숨 걸어도 부족할 판에, 네가 지금 옛 여자 생각할 때야?”
“엄마! 그 프로덱트… 프로젝트!”
또 NG였다.
* * *
“자기 어제부터 왜 이래? 잠 못 잔 거 아냐?”
“아~ 진짜 왜 이러지? 선배님이랑 연기한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긴장돼서 발음이 안 돼요.”
남자는 그러면서 혀를 풀려는 듯 경박하게 날름거렸다.
주정환. 30대에 나름 커리어도 있는 남배우였다.
인기는 있고 연기력도 된다. 오늘은 엉망이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 경박한 언동 때문에라도 임신혜는 친해질 수 없었다.
“정신 좀 차려. 오늘은 제시간에 들어가고 싶으니까. 아무리 반 사전제작이라도 무한정 찍고 있을 수는 없다는 거 자기도 알잖아.”
“옙! 알겠습니다! 그럼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오늘 마치고 한 잔 어떠세요? 제가 근사한 데로 모시겠습니다.”
임신혜는 눈앞의 남자한테 한 발 날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그녀는 회장 역을 맡은 원로배우를 제외하면 최고참 배우였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촬영장 분위기를 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정환 씨. 제발 진지하게 해줘.”
긴말하고 싶지 않았던 임신혜는 한숨을 쉬고서 돌아섰다.
사실 잠이 부족한 건 오히려 그녀 본인이었다. 피곤한 와중에 귀한 휴식 시간을 괜한 입씨름으로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비록 경박한 남자의 연속 NG가 원인이었다곤 해도, 귀중한 휴식 시간인 건 변함이 없었다.
“휴. 저런 게 내 아들 역이라니…….”
대기실로 돌아온 임신혜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각본상의 캐릭터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연기자가 저래선 이입하기도 힘들었다. 캐릭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런 걸 쓸 바엔 차라리 선후를 데려다 놓는 게 낫지 않을까.”
무심코 뱉은 말에 그녀는 괜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의 과욕이었다. 아들이 원한다면 전력으로 지원해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억지로 시켜선 안 된다.
그건 이미 피아노를 시켰을 때 뼈저리게 배웠다.
“선후가 치는 피아노…… 오랜만에 듣고 싶네.”
소파에 기대며 아련하게 중얼거린다.
아직 어렸던 아들이 피아노를 치던 모습을 떠올리며, 임신혜는 눈을 붙였다.
남은 휴식 시간은 앞으로 20분이었다.
* * *
“어머님, 부르셨어요?”
“얘, 너희 남편이 오늘 누구를 만났는지 아니?”
“아니요. 누구 만났는데요?”
“선아. 김선아 만났다더라.”
“김선아? 그게 누구예요?”
“누구긴 누구야? 네 남편 첫사랑이지.”
“아…… 네.”
“지금 회사에나 네 남편한테나 중요한 시기인 거 알지? 네 남편 관리 좀 잘해. 마누라가 제대로 못 하니까 서방이 한눈을 파는 거 아냐.”
“……죄송합니다, 어머님.”
* * *
“수아 씨, 연기가 좀 건조한 거 아니야?”
“그랬나요?”
이번 상대 배우는 며느리 역을 맡은 황수아였다.
재벌가 맏며느리로 분장한 황수아는 임신혜가 보기에도 어울려 보였다.
‘이런 아이가 진짜 재벌가에 시집가는 거겠지.’
그녀는 황수아를 보며 실제 재벌가에 시집간 동료 여배우들을 떠올렸다.
임신혜 본인도 황수아에게 아들을 소개해 줬을 정도다. 다른 어머니들도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할 게 틀림없었다.
“응응. 좀 더 이렇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기분으로,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하는 느낌으로 말이지.”
“네, 네.”
임신혜는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황수아를 대하기가 조금 껄끄러웠었다.
아들을 소개해준 것까진 좋았지만, 아들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신혜의 심층 심리가 황수아를 적으로 인식해버린 탓이다.
임신혜가 이미 잃어버린 빛나는 젊음을 황수아는 가지고 있었다.
그 아들의 마음이 어떻든, 그날은 황수아의 집에서 외박까지 하고 왔으니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제까지 쌀쌀맞게 대한 보상이라는 건 아니지만, 임신혜는 황수아의 연기를 꼼꼼하게 체크해주었다.
그녀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고.
“시어머니 앞이니까 그런 표정을 내지 않으려고 참는데, 대놓고 티를 못 내니까 답답하잖아? 실제 상황이라면 정말로 숨겨야 하겠지만, 연기라면 시청자가 알아볼 수 있게 어느 정도는 드러내 줘야 한다는 거야. 시청자가 보면 감정 이입해서 ‘아! 답답해! 그냥 한 대 쳐버려!’ 싶은 생각이 들도록 말이야.”
“네, 선생님.”
한편 황수아는 임신혜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머릿속에 새겨넣고 있었다.
업계 흥행 보증수표인 대선배의 연기지도.
돈을 주고도 받기 어려운 귀한 기회였다.
어제의 차가웠던 태도가 거짓말처럼 친절하게 조언해주시는 임신혜 선생님.
처음 황수아는 그전 미팅에서 자신이 실례라도 저지른 줄 알았다.
실제로 그녀의 기억 속에 ‘어머니’라고 부르던 기억이 남아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겐 친근감의 표시일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 젊은 배우답지 않게 선후배 관계를 깎듯이 따지는 황수아에겐 그것도 크나큰 결례였다.
임신혜의 속사정을 모르는 황수아는 전전긍긍했다.
하루가 지나자 평소의 자상한 태도로 돌아왔으니 다행이긴 했지만, 황수아는 임신혜를 대하기가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황수아에게 있어서 임신혜는 무척 어려운 사람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임신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황수아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질투했다거나, 그 질투심을 아들과의 섹스로 해소했다거나 하는 일 따위.
“그런데 수아 씨, 우리 선후 쓰러진 거 알아?”
“네? 선후 씨가 쓰러져요?”
임신혜의 말에 황수아는 깜짝 놀랐다.
당장 어제부터 촬영이라 정신없었던 것도 있지만, 원래 뉴스 기사 같은 건 잘 찾아보지 않는 황수아였다.
자기 동네에 지진이 난 것도 모를 정도로 세상일에 어두웠다.
“그래. 몰랐나 보네. 실은 그저께 동생이랑 외출 나갔다가…….”
가족들만 아는 세세한 사정까진 이야기할 수 없지만, 외부에 공개된 내용은 대강 알려주었다. 거리낌이 해소된 지금 황수아는 아들의 여자 친구 후보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선후 씨는 괜찮은 건가요?”
“오늘 아침에 퇴원했어. 지금은 건강해.”
너무 건강해서 탈이지만.
오늘 아침 선후와의 농밀한 시간을 떠올린 임신혜는 아랫배 안쪽이 꾹 조이는 걸 느꼈다.
멋진 경험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래가 젖어버릴 정도로.
임신혜는 어려서부터 배우의 길에 뛰어들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한참 나이 많은 감독과 결혼했고, 그 남편과도 오랫동안 섹스리스였다.
게다가 남편과 이혼한 후로는 일과 육아에 치여 사느라 남자를 사귈 시간 따윈 없었다.
화면에 비치는 임신혜는 백조처럼 우아하게만 보이지만, 실제 그녀는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인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젊을 때만 즐길 수 있는 청춘의 특권을 경험하지 못하고 시들어만 가는 자신에게 서글픔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새로운 사랑에 눈떴다.
그 상대는 자신이 애지중지 키워온 양아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그 꿀이 달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아들 또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자신을 요구했다. 시들어가는 그녀의 몸에 애정을 가득 담아 물을 뿌려주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 그 시나리오의 끝에 배드 엔딩만이 기다린다고 해도, 이제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아 씨, 선후랑은 따로 만날 약속 같은 거 했어?”
“아니요. 아직 조율 중이에요.”
황수아는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녀는 선후가 괜찮아졌다는 말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연락조차 해주지 않은 선후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연락처는 교환했지만 사적인 연락은 한 번도 없었다. 먼저 연락이 오면 그 기회에 약속을 잡을 생각이었던 수아는 선후의 문자만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한편 임신혜는 더이상 황수아를 견제하지 않았다.
아들과 그런 관계가 되었다고 해서 아들을 독점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어울리는 상대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황수아는 대환영이었다. 수아 쪽이 선후 보다 연상이지만, 여배우와 일반인 사이에는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
“선후는 저래 보여도 낯가림이 심하니까 수아 씨가 먼저 연락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수아 씨가 누나잖아? 좀 억지스럽게라도 접근하면 돼. 걔는 거절할 줄을 모르니까.”
“그런가요?”
선후의 엄마로서 수아에게 적절한 팁을 건네는 임신혜.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선후에 관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들을 자랑하고 싶은 엄마와 그 아들의 신상을 알고 싶어 하는 수아.
그런 두 사람 사이에는 이야기 소재가 떨어질 일이 없었다.
“어머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들 재밌게 하고 계세요?”
거기에 새로운 인물이 참전했다.
이번 드라마의 실질적 여주인공인 신지혜였다.
단아한 미모의 신지혜는 황수아의 2년 후배로 지금 가장 핫한 여배우다.
쟁쟁한 두 배우 사이에 끼어드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지혜 씨도 볼래? 수아 씨한테 우리 아들 사진 보여주고 있었어.”
임신혜는 연예계에서도 유명한 아들 바보다. 물론 신지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훨씬 유명한 두 딸, 진소영과 진미소 보다 일반인인 아들 이야기를 더 자주 하는 걸 신지혜는 의문으로 생각했다.
“선생님 아들이요? 저도 봐도 돼요?”
임신혜의 휴대폰에는 사이좋게 웃고 있는 모자가 비치고 있었다.
모친이 저 임신혜라는 걸 빼면 평범한 가족사진이었다. 그 두 사람이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 따윈 꿈에도 모를 정도로.
“선생님 아들 진짜 잘생겼다. 눈이랑 콧대가 선생님이랑 똑 닮았어요.”
“그렇지?”
연예계 대선배의 기분을 맞춰주기에는 아들 칭찬만큼 좋은 게 없다.
실제 감상이 어땠는지는 제쳐두고, 일단 신지혜는 열심히 칭찬했다. 하지만 그 아들이 임신혜의 친아들이 아니라 닮고 자시고 할 리가 없다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신혜는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었지만.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나아.”
거기에 황수아가 한마디 거들었다.
“어? 수아 선배, 실제로 만나보셨어요?”
“며칠 전에 선생님 소개로 같이 저녁 먹었거든.”
신지혜는 황수아의 말에 담긴 묘한 감정을 예민하게 캐치했다.
그 감정의 정체가 뭔지 지금은 알 수 없었지만, 황수아가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신지혜도 업계 탑급 여배우다. 그 정도 눈치가 없어선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선생님~ 저는 왜 안 불러주셨어요~.”
“후후. 지혜 씨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해줄게.”
서운하다는 듯 애교를 부리는 지혜에게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지혜와 아들을 만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황수아가 사슴이라면 신지혜는 여우다.
신지혜와 만나면 토끼 같은 선후는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런 면이 배우로서는 강점이 되겠지만, 며느릿감으로 생각하기에는, 좀 그랬다.
“그런데 선생님.마치고 회식 참석하세요?”
“회식? 아니?”
“아니에요? 선생님도 참석하신다고 하던데. 주정환 선배가.”
“아~.”
신지혜의 말에 임신혜는 탄식했다.
분명 안 간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도 참석한다고 해서 갔더니 남배우와 단둘이었다, 하는 일은 이 업계에서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
임신혜는 여배우들 사이에선 하늘 같은 대선배이므로 그녀가 참석한다고 하면 후배 여배우들은 참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혜 씨, 나쁜 말 안 할 테니까 웬만하면 가지 마. 별로 좋은 소문 없으니까.”
임신혜는 지혜에게 당부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지혜도 새파랗게 어린 후배였다. 선배로서 충고하는 건 당연한 의무였다.
연예계 뜬소문을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임신혜 본인도 그런 헛소문의 피해자니까.
하지만 그런 헛소문 사이에 진실도 숨어 있다는 걸, 그녀는 오랜 업계 생활에서 배웠다.
그런 사람을 구분하는 법도.
“……알겠어요. 그럼 대신 저도 아드님 소개해주시는 거예요?”
“그럼. 기회가 되면 얼마든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대답만은 긍정적으로 해두었다.
그 곁에서 황수아가 미묘하게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걸 신지혜는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