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56)

레슨 계약을 맺다 

“선후 씨.”

잠시 후, 수아 씨가 방에서 나왔다.

화장도 지우고 복장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로.

평소에 집에서는 이런 모습으로 지내는 거겠지.

“아, 수아 씨, 식사 다 하셨어요?”

“네. 덕분에. 아깐 죄송했어요. 많이 놀라셨죠?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그만…….”

옛날 생각이라……그만한 사연이 있는 거겠지.

아마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들이기는 힘든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나도 이제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아뇨, 그럴 때도 있는 거죠. 수아 씨가 사과하실 거 없어요.”

화장을 지워서 그런지 황수아 배우 특유의 냉정한 이미지는 사라지고 훨씬 순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거실을 둘러보는 수아 씨의 표정에 당혹감이 퍼진다. 

생각해보면 말도 없이 마음대로 집안을 정리해버렸구나. 역시 지나친 오지랖이었을까.

“아. 짐 쌓여있던 건 제가 정리했어요.”

“그걸 혼자 다 하셨어요? 밤새?”

“예, 뭐…… 왠지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말도 안 하고 건드려서.”

“아니요, 제가 해야 되는 일인데……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수아 씨는 얼굴을 붉히며,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서로 사과해댔다.

“원래 제가 이렇게까지 게으른 성격은 아닌데, 한 번 방치하니 정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일 마치고 돌아와도 잠깐 잠만 자고 다시 나가기 일쑤고, 가끔 쉬는 날에도 지쳐서 꼼짝도 하기 힘들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돼버렸어요.”

수아 씨가 부끄럽다는 듯이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만큼 주변도 못 돌아볼 만큼 바쁘게 일했다는 거잖아요. 저는 오히려 존경스러워요. 그렇게 자기 일에 열중할 수 있다는 게.”

“……고마워요, 선후 씨. 선후 씨한테는 정말 못 볼 꼴 다 보이는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러워요.”

“하, 하하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뭐, 이렇게 말해도 신경은 쓰이시겠지만. 정 신경 쓰이면 그냥 사람이 아니라 큰 멍멍이라고 생각하세요.”

“멍멍이라면…… 골든리트리버?”

“오, 그거 좋네요. 저도 좋아해요, 골든리트리버. 애교도 많고 충성심도 높고. 맹인 안내견도 하는 개잖아요.”

“큰 개…… 저도 키우고 싶네요.”

수아 씨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밥 먹으면서는 울고, 대화하는 동안에도 내내 우울한 표정이었던 수아 씨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럼 수아 씨, 전 이만 가볼게요. 저도 슬슬 집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쓰레기는 제가 나가면서 버릴게요.”

가능하면 엄마가 자는 사이에 돌아가고 싶었다. 외박한 걸 들키면 오해할 수도 있고 혼날지도 모르니까.

몰래 돌아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돌아가는 게 좋겠지.

“아, 저기! 선후 씨!”

“예?”

집을 나서려던 나를 수아 씨가 불러 세웠다.

“저기, 어제 이야기했던, 그, 레슨 말인데요.”

레슨… 아, 스폰 운운하던 그거 말인가.

“아. 그거요. 제가 프로도 아니고, 돈 받고 뭔가 할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니라서요. 그냥 없었던 얘기로…….”

“그건 안 돼요!”

우와. 깜짝이야.

갑자기 수아 씨가 소리를 질렀다. 집안이 거의 비어있어서 그런지 큰 목소리를 내자 집안에 잘도 울렸다. 정작 수아 씨 본인도 큰 목소리를 내서 당황한 눈치였다.

“아, 안 돼요. 그런 건 임신혜 선생님한테도 예의가 아니에요.”

어젠 어머니라고 했었는데 다시 선생님으로 돌아왔구나. 어제 그건 역시 술에 취해서 그런 거였던 걸까.

“어, 돈은 안 받아도 대본 리딩하는 건 도와드릴게요. 아무래도 돈 받는 건 좀 그래서.”

“안 돼요. 그러면 제가 미안해서 부르기 힘들잖아요.”

그런가? 으음. 하긴, 공짜로 하게 되면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이 되니까. 차라리 돈을 내고 고용하는 개념으로 하는 게 수아 씨 입장에서는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해서 시급 만원 정도?”

“……선후 씨는 저를 악덕 업자로 만들 생각이세요?”

“예? 아, 아뇨, 그럴 생각은.”

“1주일에 1회, 6시간 기준으로 200만원. 초과하면 초과하는 만큼 수당으로 줄게요.”

“수아 씨. 어제도 말했지만 금액이 너무 커요. 말도 안 돼요.”

“대신 저와의 약속을 최우선으로 해주셔야 해요. 다른 약속이 있어도.”

“그건…….”

그만큼 돈이 걸려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최우선으로 취급하겠지.

하지만 다른 약속을 취소하면서까지 가는 건 어떨까. 엄마나 누나보다 우선순위를 앞에 둘 수 있을까?

엄마와의 약속을 취소하는 건 내가 싫고, 누나와의 약속을 취소했다간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갑자기 불러내는 일은 없을 거에요. 스케쥴은 미리 나오니까, 최소한 전날, 가능하면 일주일 전에는 약속 잡을게요.”

내가 고민하고 있자 수아 씨가 덧붙였다.

“그런 거라면 좋습니다. 아, 그런데 역시 그 금액은 좀…….”

“선후 씨. 이건 임신혜 선생님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해주세요. 이 정도 드리지 않으면 제가 선생님을 볼 낯이 없어요. 그리고 이 바닥에서는 원래 이 정도 금액이 기본이니까요.”

“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 없지. 나중에 엄마 통해서 돌려드리든가 해야지.

“그럼 계약서를 쓰죠!”

“계약서요?”

이 황량한 집안에 종이랑 펜은 있는 건가 싶었지만 수아 씨는 종이와 펜 대신 스마트폰에 터치펜으로 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다 됐어요. 읽어보시고 여기 사인해주세요.”

“아, 예.”

수아 씨의 폰을 받아서 내용을 읽어본다. 

혹시나 불리한 조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꼼꼼히 읽어봤지만여기서 한 이야기를 그대로 글로 옮겨놓았을 뿐인 정직한 계약서였다.

“여기요.”

나는 계약서에 사인한 후 수아 씨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서로 번호를 교환해서 나도 계약서를 복사해 받았다.

받은 계약서를 다시 읽어봐도 역시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럼 선후 씨, 오늘은 고마웠어요. 스케쥴 정리되는 대로 다음 주 약속 잡을게요.”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바로 옆 동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편하게 연락하세요.”

그렇게 황수아 배우와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아침 7시를 지나고 있었다.

엄마한테는 조금 늦을 거라고만 문자 했었는데, 결국 외박이 되고 말았구나.

이상한 오해는 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밤에는 주정뱅이에 시달리고 새벽에는 청소하느라 시달린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녹초 상태였다. 나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그렇게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온 나를 동생 미소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왠지 화난 표정의 미소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오빠. 아침부터 어디 갔었어?”

“아~ 잠깐 아침 운동하느라.”

순간적으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침 일찍 운동을 다닌다는 건 미소도 잘 아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보다 훨씬 일찍 다니긴 하지만.

미소는 미심쩍다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을 이었다.

“오빠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 오늘이 미소 생일이었어?”

“오빠! 오늘 나랑 데이트 하기로 한 날이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약속을 했었던가.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아침부터 기다릴 필요는 없을 텐데?

“오늘 하루종일 나랑 같이 보내기로 해놓고선! 1시간이나 기다렸잖아!”

“1시간? ……설마 새벽부터 나랑 같이 있을 생각이었어?”

“당연하잖아!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내가 아는 데이트와 미소가 아는 데이트는 개념이 다른 것 같다.

“선후 왔니?”

“아, 응, 엄마. 몸은 좀 괜찮아?”

“후후. 걱정 안 해도 돼. 엄마도 아직 젊으니까.”

현관에서 미소와 떠들고 있자 엄마도 소리를 듣고 나왔다.

엄마는 내가 외박한 걸 알고 있다. 그것도 수아 씨를 집에 데려다 주고 외박을 했으니 이상한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걱정했지만 의외로 엄마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그것대로 좀 그런데…….

“엄마! 오늘 하루동안 오빠는 나랑 같이 있을 거야!”

“…미소야. 미안한데 오빠가 어젯밤에 제대로 못 자서 지금 많이 피곤하거든? 오전엔 쉬고 오후에 나가면 안 될까?”

“오빠. 난 어제 새벽 4시까지 촬영하고 6시에 들어왔거든?”

“아, 응. 굉장하네…. 노동법 같은 건 제대로 지키고 있는 거야?”

“그런 건 모르겠고, 아무튼 오늘 하루 오빠 시간은 내꺼니까!”

“……알았다 알았어. 구워먹든 삶아먹든 마음대로 해.”

나는 결국 미소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취소하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피곤하다 해도 미소보다 피곤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하루 통째로 스케쥴을 비우는 것도 미소에게는 큰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빠! 그럼 바로 나갈 거니까 10분 내로 준비해!”

“후후. 둘이 잘 놀다 오렴. 엄마는 숙취 때문에 오늘 좀 쉬어야겠어.”

엄마는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나도 미소의 성화에 못 이겨 5분만에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마쳤다.

“근데 운전하다 졸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괜찮아 오빠. 차는 안 가지고 갈 거야. 오늘은 대중교통 이용할 거니까.”

“대중교통? 미소 너 대중교통 타본 적 있어?”

“오빠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다 예습해왔으니까 걱정 마.”

“예습이라니…….”

그리고 나는 미소가 시키는 대로 변장을 했다.

선글라스에 마스크, 모자까지 나란히 눌러 쓴 수상한 남매가 완성되었다.

이렇게까지 숨기고 다니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이는 게 아닐까?

하지만 미소는 이렇게 변장하는 거 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왠지 비밀 데이트 같아서 두근두근하네.”

“정말로 비밀 데이트니까 말이지.”

“맞아. 그랬지. 히히.”

미소는 비율과 스타일이 워낙 좋아서 꽁꽁 싸매고 있어도 은근히 눈길을 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방 들킬 것만 같다.

불안한데. 정말 괜찮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약을 좀 받아놓는 건데.

“오빠 뭐해? 빨리 와!”

“……만약에 미소가 들키면 나는 매니저인 척할게.”

“오~ 그거 좋은 생각! 누가 사인해달라고 하면 오빠가 와서 막아주는 거야. ‘죄송한데 사인은 안 됩니다’하면서. 아하하!”

미소는 그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것 같다.

나로선 제발 오늘 하루 아무 일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미소와 데이트 

아파트 대지에서 나오자마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미소와 나란히 섰다.

미소는 정말로 버스를 탈 생각이었구나. 미소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줄 안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왔다.”

그리고 미소는 정류장에 도착한 첫 번째 버스에 올라탔다.

생각해보니 어디서 뭘 할 건지도 안 물어봤네. 이 버스는 어디로 가는 거지?

“두 사람이요!”

버스를 타며 미소가 큰소리로 외친다.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의 시선이 순간 우리 쪽으로 쏠렸다.

세상에. 집을 나선 지 5분 만에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미소는 일행이 아닌 척하는 내 손목을 억지로 잡아끌며 버스에 올라탔다.

“나 이거 꼭 해보고 싶었어, 오빠!”

“그래그래. 잘됐네.”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미소는 무척 흥분해있었다.

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워하다니. 

“오빠. 이렇게 ‘두 사람이요’라고 하고 같이 타는 거 왠지 엄청 낭만적이지 않아?”

“그래그래. 낭만적이네.”

미소는 감수성이 풍부하구나.

하긴,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울고 웃을 나이지.

“오빠. 다음 정류장에서 환승할 거야.”

“환승? 어디 가려고?”

“어디? 딱히 목적지는 안 정했는데. 그냥 환승 해보고 싶잖아.”

“……그게 재밌어?”

“응.”

“그래… 네가 재밌다면야…….”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지만 꾹 눌러 삼켰다. 본인이 재밌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빠! 다음은 지하철 탈 거야!”

“그래그래…….”

버스 환승까지 해본 후, 버스에서 내린 미소와 나는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오빠 그거 알아? 지하철은 ‘두 사람이요’가 안 된대. 그건 버스에서만 된대.”

“응…. 알고 있어.”

미소와 함께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도 목적지는 없다. 지하철을 타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오빠 나 여기 구석에 손 짚어줘.”

지하철에 타자 미소는 또 엉뚱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남녀가 복잡한 지옥철에 탔을 때 여자가 다른 승객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남자가 보호해주는 시추에이션. 옛날 드라마나 만화에서나 자주 나오는 연출인데, 미소가 어디서 그런 걸 본 모양이다.

“지금 별로 복잡하지도 않은데…….”

“빨리~.”

“하아… 알았어.”

당연하지만 이렇게 널널한 지하철에서 그런 짓을 해봐야 허무할 뿐이다.

내가 양팔 사이에 미소를 가두자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여성 승객은 혀를 차며 저쪽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미소는 뭐가 그리 좋은지 기분 좋게 웃었다.

뭐, 미소만 만족한다면야…….

“그래서, 이번엔 어디까지 갈 건데?”

어차피 목적지도 없겠지. 금세 질려서 내리자고 할 게 뻔했다.

하지만 미소는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마스크 위로 손가락을 세우며 조용하란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

미소가 그런 신호를 보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빈손을 살금살금 움직여 내 사타구니를 쓰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옷 위로 느껴지는 관능적인 손놀림에 내 자지는 이런 공공장소에서도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낮춰 항의했다.

“진미소, 뭐 하는 거야?!”

“뭐가?”

나는 혹시나 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승객 대부분은 졸고 있거나 휴대폰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게 안전하다는 보장은 되지 않는다. 가벼운 기분으로 장난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진짜로 하지 마.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공연음란죄로 잡혀가고 싶어?”

“그럼 정말로 그만둘 수 있겠네.”

선글라스 안쪽에서 미소의 눈이 초승달을 그리고 있었다.

“진미소. 너 자꾸…… 그런 소리 할래?”

그만둔다는 말을 너무나 쉽게 꺼내는 미소에게 따끔하게 충고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를 세운 채 말해봤자 오빠의 위엄도 뭣도 없었다.

“……정말 안 된다니까. 이러다 옷 더럽히면 데이트고 뭐고 엉망이잖아.”

미소 성격상 하지 말란다고 안 할 리가 없다. 질려서 스스로 그만두길 바랄 수밖에 없다.

나는 반쯤 애원하며 말했지만 미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아. 이런 상황에서도 느끼는 내 자지가 원망스럽다.

“오빠. 저 사람 눈치챘나 봐.”

소곤거리는 미소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혀를 차고 갔던 여자 승객이 오만상을 쓰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100% 들켰구나.

하지만 미소에게 전염된 건지 초조한 감정보단 이제 될 대로 되라는 감정이 더 컸다.

“진짜 들킨 거 같은데. 이쪽 보고 있어.”

“알아. 일부러 저쪽에서 보이게 하고 있으니까.”

나는 순간 미소가 제정신인지 의심했다.

“너 미쳤어? 누군지 알아보면 어쩌려고 그래?”

“절대 안 들키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은 안 들키더라도 신고하면? 다음 역에서 역무원이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그 여자 승객을 다시 보자 심각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조작하고 있었다. 문자 메시지로 지하철에 신고하는 걸지도 모른다.

인기 여자 아이돌이 지하철에서 공연음란죄로 체포. 이만큼 어처구니없는 뉴스가 또 있을까.

“그러네……. 그럼 오빠, 다음 역에 도착하면 도망치자.”

“……그래. 그러는 게 좋겠네.”

그리고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미소는 질리지도 않고 내 자지를 계속 문질러댔다.

사정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발기는 풀리지 않을 정도의 미묘한 자극.

덕분에 지하철이 멈췄을 때 나는 꿋꿋이 텐트를 친 채로 내려야 했다.

“오빠, 뛰어!”

미소가 내 손목을 잡고 지하철에서 내려 승강장을 달리기 시작한다. 단단히 발기한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미소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죽고 싶다…….”

겨우 위험지역에서 벗어나 벤치에 앉은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오빠, 기운 내. 익숙해지면 오빠도 즐기게 될 거야.”

“그럴 일 절대 없거든?”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나의 흉한 모습이 노출됐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2호선 변태남’ 같은 이름으로 이미 사진과 영상이 퍼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이대로 돌아다닐 용기는 없었다.

“그럴까? 내가 사줄게, 오빠!”

“……그래. 고맙다.”

나는 바로 눈앞의 지하철 상가 옷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옷을 상하로 골라 사이즈만 확인한 뒤 바로 탈의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에에~ 오빠, 이런 데서 사게? 이 위에 백화점 있던데 거기 가자.”

“가게 주인 들을라. 제발 목소리 좀 낮춰. 그리고 따라 들어오지 마.”

미소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탈의실에 따라 들어왔다. 미소의 손에도 갈아입을 옷가지가 들려있었다.

“우리 사이에 뭘 가리고 그래, 오빠. 가게 주인도 연인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래. 너한테 상식을 바란 내 잘못이지.

좁은 탈의실에 두 사람이 들어와 옷을 갈아입으려 하니 서로의 몸이 부대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이건 일부러구나.

미소는 옷을 벗으면서 점점 나한테 달라붙어 왔다. 자연스럽게 미소와 부딪히는 걸 피하려던 나는 구석으로 몰리고 말았다.

“……진미소. 옷 좀 입게 좀 떨어져 줄래?”

“응? 뭐가?”

미소는 시치미를 떼며 싱긋이 웃었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며 요즘 항상 하던 요구를 해왔다.

“오빠, 안아줘.”

나는 팬티 차림, 미소도 상의는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할 말은 많았다. 이런 데서 이러면 안 된다든가, 빨리 나가지 않으면 주인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든가.

하지만 내가 말한다고 해서 미소가 그만둘 리도 없었다.

여러 생각 끝에 나는 미소 말에 따르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응~♡”

내가 꽉 끌어안자 미소가 기분 좋은 듯 소리를 냈다. 밖에선 들리지 않았을까 조금 걱정이다.

뛰어다닌 탓인지 살짝 땀 흘린 피부가 서로 착 달라붙었다. 

“오빠. 내 심장 소리 들려?”

“어. 잘 들려.”

미소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와 함께 오늘 하루 쌓여가던 초조함과 불안이 천천히 씻겨져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미소의 엉뚱한 요구가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포옹은 나에게 스트레스가 쌓이는 걸 염려한 미소의 배려였다고.

“……고마워.”

“응? 뭐가?”

여전히 시치미를 떼는 미소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팔을 풀었다.

“오빠, 섰지? 여기서 뽑아줄까?”

“……내가 너무 앞서 생각한 것 같네.”

“뭐가?”

나는 최대한 미소에게 신경을 끊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옷은 입고 갈게요.”

“네~ 잠시만요. 태그 떼드릴게요.”

그리고 잠시 기다리고 있자 미소도 옷을 다 갈아입고 나왔다.

가벼운 셔츠에 데님 핫팬츠 차림. 미소의 생기 발랄한 느낌이 더욱 살아났다.

역시 미소는 스타일이 되니 아무거나 주워 입어도 잘 어울리는구나.

“오~! 역시 우리 오빠야. 아무거나 입어도 잘 어울린다니까.”

“아무거나라니……. 제발 좀.”

나도 비슷한 생각은 했지만 그런 말은 입 밖에 내면 안 된다고.

옷가게에서 나온 뒤, 미소는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내 손을 끌었다.

마침 우리가 내린 역이 백화점이 있는 역이라 자연히 다음 장소는 백화점으로 정해졌다.

백화점이라. 사람이 많은 장소가 서투른 나에겐 별로 인연이 없는 장소였다.

아침이라 그런지 한산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빠, 백화점 안에는 영화관도 있어. 알고 있어?”

“그랬구나. 백화점 대단하네.”

이미 기진맥진한 나는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오빤 영화관에 온 적 있어?”

“아니. 처음인데.”

“예쓰!”

내 대답에 미소는 뭐가 그리 기쁜지 제자리에서 두 바퀴 반을 도는 세레모니를 선보였다.

오빠가 삭막한 문화생활을 보낸 게 그렇게 기쁜 걸까.

“그럼 뭐 볼까? 오빤 보고 싶은 영화 있어?”

“글쎄. ‘노래의 신’ 같은 게 무난하지 않아?”

‘노래의 신’은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둔 국산 대작 영화였다.

미소도 나도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니니 이런 대중적인 영화가 맞겠지.

“응…… 나는 이거!”

미소가 고른 영화는 ‘은밀한 비밀’이라는 외국 영화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에, 포스터에 찍혀있는 여성의 노출 상태만 봐도 어떤 영화인지 알 수 있었다.

“……미소야.”

“‘은밀한 비밀’ 2장 주세요!”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미소는 호기롭게 매표소로 향했다.

하지만 미소도 거기서 뜻밖의 난관을 맞이하게 되었다.

“네. 은밀한 비밀 2장요.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신분증요?”

매표소 직원의 말에 미소가 당황하며 나를 본다.

나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미소는 분명 성인이고 영화 등급에 상관없이 볼 수 있는 나이다.

하지만 신분증을 보여주면 적어도 매표소 직원에겐 누군지 들키고 만다.

그 직원이 아이돌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못 알아볼지도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다.

영화관에서 에로영화를 보는 여자 아이돌이라. 그것도 남자와 둘이서. 누군가에겐 좋은 먹잇감 아닐까?

“오빠,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신분증 보여주든지, 아니면 노래의 신 봐야지.”

“손님?”

“으…….”

“네가 망설일수록 이상하게 생각해서 더 유심히 확인할걸? 지금이라도 그냥 노래의 신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겠어?”

“큭……. 여기요!”

내 충고에도 미소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미소는 신분증을 내밀었고, 나도 할 수 없이 신분증을 꺼내야 했다.

그렇게 이 영화가 보고 싶었을까.

“……죄송한데 선글라스 좀 벗어주시겠어요? 신분증 본인 확인해야 해서.”

“윽…. 이러면 됐죠?!”

미소와 함께 나란히 선글라스를 벗고 마스크를 내린다. 얼굴을 확인하면서도 매표소 직원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다.

“네. 확인했습니다. 은밀한 비밀 두 자리요. 좌석을 선택해주세요.”

“여기, 커플석이요!”

누군지 들켰을까. 역시 들켰겠지?

“저기, 혹시 영화관에서 고객 정보 퍼뜨리거나 그러진 않죠? 저희 소속사가 그런 거에 워낙 민감해서요. 심심하면 소송 거리 없나 찾아다닐 정도로.”

“네, 물론이죠. 안심하셔도 됩니다.”

미소는 은근히 협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직원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우리는 안심하고 상영관에 입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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