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56)

* * *

그날 식사 자리는 늦게까지 계속됐다.

유명 여배우가 둘이나 있어서 그런지 식당에서 주는 서비스가 끊임없이 나왔고, 의외로 이 여배우들이 마시는 술 양도 장난 아니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는 바지런히 고기를 구워 접시에 옮기고, 간간이 이야기에 맞장구나 치면서 빈 술잔을 채우는데 급급했다.

“그 감독 진짜! 내가 언젠가 턱수염 다 뽑아버릴 거야!”

“선생님도 참. 근데 그 감독 머리 가짜라던데 정말인가요?”

“그거 가발이야 가발.”

술에 취한 엄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연신 황수아 배우와 술잔을 부딪치며 잔을 넘겼다.

거기에 황수아 배우도 지지 않았다. 술에 취해도 여전히 조곤조곤하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약한 체구에 비해 술은 엄청 센 건지도 모르겠다.

“황수아 배우님, 술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순식간에 비어버린 두 개의 잔에 다시 매실주를 따르며 물었다.

테이블 가장자리에는 두 여배우가 마신 빈 매실주 병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저렇게 얇은 몸에 이렇게 많은 술이 들어가도 되는 걸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선후 씨는…….”

“예?”

“……부르는 게 너무 서먹해요. 호칭. 일부러 그러는 건가요?”

수아 씨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묻는다.

“죄송해요. 솔직히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편하게, 해도 되는데…….”

“아, 예. 그럼 수아 씨라고 부를게요.”

“수아 씨……. 훗…….”

황수아 배우는 피식 웃으며 또 술잔을 넘겼다. 나는 무심으로 다시 술잔을 채웠다.

“선후 씨. 술 많이 마시는 여자는 별로죠?”

그렇게 물으면서도 잔을 채우자마자 쭈욱 마셔버리는 황수아 배우. 

이렇게 묻는 걸 보면 의외로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것보단 걱정돼서 그렇죠. 집 못 찾아갈까 봐.”

엄마는 좀 취하더라도 내가 모시고 가면 되지만, 수아 씨는 곤란했다.

차를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술에 취해서는 그냥 대리를 붙여 보내는 것도 불안했다. 그렇다고 택시에 그냥 던져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후… 그땐 선후 씨가 바래다줘요. 아니면 자고 갈까요?”

“전 엄마 모시고 가야 해서요.”

남녀가 바뀌었다면 성희롱으로 걸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흘려넘겼다.

“…미안해요 선후 씨. 엉뚱한 일에 말려들게 해서.”

“제가 죄송하죠. 수아 씨도 엄마 말이라고 너무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어요.”

“어째서?”

멀쩡해 보이던 그녀도 술에 취하긴 한 모양이다. 나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야 사랑을 하라든가,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갑자기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후. 후후후, 후후후훗.”

수아 씨는 뭐가 재미있는지 빈 술잔을 쥐고 웃음을 흘렸다. 웃는 얼굴은 훨씬 인간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말하는 거 치곤 선후 씨, 너무 노력한 거 아니야?”

“예? 제가요?”

그녀는 술잔을 내려놓더니 턱을 괴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왠지 이전과는 눈빛이 달랐다.

“하… 정말 못 이기겠네. 저 잔망스러운 표정 하며.”

“잔망…….”

“자기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할 생각? 그런 게 선수라는 건가요? 아하하. 그래요. 내가 졌어요. 선생님도 그렇고, 꼭 뭐에 홀린 기분이라니까.”

“아니요, 저는….”

황수아 배우는 양손을 팔랑거리며 항복 선언을 했다. 뭐에 대한 항복인지는 모르겠지만.

“선후 씨. 우리 사귈까요?”

“아~ 아까 말했던 연습 같은 의미에서라면.”

“저 돈 많아요. 청담에 빌딩도 있어요. 많이 올랐고 앞으로도 오를 거예요.”

“아, 예. 축하드립니다.”

“어디까지나 나랑은 비즈니스적 관계라는 의미? 알겠어요.”

수아 씨는 자조하며 또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취한 게 분명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였는데, 마치 스위치라도 누른 것처럼 사람이 한순간에 변해버렸다.

도움을 요청하며 엄마를 바라보자 왠지 흐뭇한 눈으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 흐뭇해할 요소가 있었나?

“수아 씨.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 그만 일어나죠. 엄마도.”

“선후 씨.”

먼저 일어서려는 내 손을 황수아 배우가 붙잡았다. 작은 손 크기에 비해 잡는 힘은 강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다.

“알았어요. 진심이 되지 말란 얘기죠?”

“예?”

“그럼 제가 어떻게 할까요? 원하는 조건이 있을 거 아니에요.”

나는 여전히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나 대신 엄마가 끼어들었다.

“한 번 만남에 얼마씩, 월 몇 회 만나냐에 따라 다르지. 스폰 계약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

“스폰?”

“스폰서……제가 그런 건 잘 몰라서.”

엄마의 말에 황수아 씨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스폰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그런 스폰서? 돈을 내고 스폰서가 되어주는 대신에 만나준다고? 

“제가 돈을 내고 수아 씨랑 만나는 건가요?”

“무슨 소리예요? 제가 준다구요. 선후 씨한테.”

“아니요. 잠깐만. 오해하신 거 같은데 저 그런 거 아니에요.”

“네. 알아요. 그러시겠죠. 이건 그럼 레슨비라고 쳐요. 주 1회, 한 번 만남에 200만. 그거면 될까요?”

“수아 씨.”

영문을 모르겠다. 돈을 내면서 나랑 만나겠다고? 

엄마 말을 믿고 따른다고 해도 보통 이렇게까지 할까?

게다가 액수도 너무 크다.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경제 관념이 망가진 게 아닐까.

“일단 돈 얘기는 다음에 맨정신일 때 해요. 오늘은 너무 취했으니까 그만 일어나죠.”

“부족해서 그래요? 그런 거라면…….”

“아 진짜! 됐으니까 빨리 일어나자고! 엄마도 웃지만 말고!”

점점 망가져 가는 수아 씨를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엄마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우리를 보며 배꼽이 빠지게 웃고 있었다.

하…….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정말로.

로맨틱하지 않은 첫 외박 

  

술에 취한 황수아 씨를 어떻게 집까지 데려다줄지가 고민이었지만 의외로 문제는 쉽게 해결됐다.

“집이 바로 옆 동이라고요?”

수아 씨의 집은 같은 아파트의 옆 동이었다.

약속 장소를 굳이 근처 식당으로 잡은 이유가 있었군.

“어머. 내가 말 안 했었나?”

“착각하지 마세요. 선후 씨 때문에 이사 온 게 아니니까.”

“하아…….”

술 취한 두 여자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비록 유명 여배우라 하더라도 주정뱅이는 주정뱅이였다.

나는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두 사람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눈물 나는 분투의 이야기는 당사자의 이미지를 위해 생략하도록 하자.

“그럼 수아 씨 먼저 집에 데려다 주고 올 테니까 엄마는 차에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아파트 주차장까지 겨우 도착한 나는 먼저 수아 씨를 집까지 데려다 주려 했다.

그런데 조수석의 수아 씨를 부축하는 사이에 뒷좌석에 타고있던 엄마가 차에서 내리더니 휘청휘청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게 아닌가.

“엄만 혼자 갈 수 있어. 뒷일은 젊은 사람끼리 사이좋게 이야기해~.”

“엄마!”

아무리 주차장에서 집까지 금방이라지만 술에 취한 엄마를 혼자 가게 둘 순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수아 씨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엄마를 쫓아가야 했다.

“미안해요, 수아 씨. 엄마 먼저 모셔다 드리고 올게요. 차에서 조금만 기다려줘요.”

“오호호. 어머니, 살펴 가세요.”

덤으로 수아 씨가 엄마를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선생님에서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의미를 생각하면 무서우니 깊이 생각하는 건 그만두었다.

나는 먼저 엘리베이터에 탄 엄마를 뒤쫓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술기운에 멍하니 있던 엄마는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선후 너 왜 여기 있니? 수아는?”

“엄마가 혼자 나와서 따라왔지. 수아 씨는 차에 있어.”

“안돼. 여자애 혼자 두면. 엄만 혼자 갈 수 있다니까.”

“됐어. 나한텐 수아 씨보다 엄마가 더 중요해.”

엄만 혼자 걸을 수 있다며 부축하려는 나를 떼어내려 했다. 물론 난 떨어져 줄 생각이 없었지만.

“우리 아들, 아직도 엄마만 찾아서 큰일이라니까. 엄마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제 엄마한테서 독립할 나이 아니니?”

은근히 나를 거절하는 엄마. 역시 엄마는 나를 떼어낼 생각이었나 보다.

대신 나한테 저 여자를 붙이려는 거였나. 엄마를 대신할 수 있는 여자 같은 건 없는데.

물론 엄마도 고민 끝에 결정한 거겠지만, 은근히 속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엄마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내가 엄마한테서 멀어질 일은 없어.”

“선후야.”

토라진 투로 얘기하는 나를 엄마가 타이른다.

나는 술에 취한 엄마를 부축하는 척하며 허리에 팔을 두르고 품에 끌어안았다.

놀라서 떨어지려는 엄마. 하지만 나는 엄마가 도망칠 수 없도록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를 여기까지 키워준 엄마. 나는 엄마 품속에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 엄마가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옷 위로 전해지는 엄마의 체온이 뜨겁다. 오늘 하루종일 인내하고 있던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밀폐된 공간에 엘리베이터의 가동음만이 울리고 있었다. 나도 엄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엘리베이터는 우리 집이 있는 층에서 멈추었다.

“꺅.”

나는 그대로 엄마를 훌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엄마를 안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왠지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다만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지금 나는 엄마와 많은 선을 넘었다는 거다.

……엄마는 혹시 그 일을 후회하고 있는 걸까.

엄마는 어째서 이런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걸까.

앞으로 한 걸음이었는데. 마지막 한 걸음을 남기고 엄마는 나에게 벽을 치고 말았다.

엄마의 안에서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거란 건 안다. 단지 성욕이 향하는 대로 따라가는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고민이 있었겠지.

집에 도착해 엄마 방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침대에 엄마를 눕힌다.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운 엄마와 그런 엄마를 내가 위에서 덮치는 듯한 구도가 만들어졌다.

술에 취해 살짝 붉어진 피부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이, 따뜻하게 달아오른 숨결이 나를 유혹한다.

지금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억지로라도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엄마도 그렇게까지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선후야. 이러면 안 돼…….”

지금 엄마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은 어떨까.

욕망에 일그러져 있지는 않을까.

짐승처럼 보이지나 않을까.

엄마한테는 추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은데.

“사랑해, 엄마.”

불안감에 흔들리던 엄마의 눈이 내 고백에 크게 뜨였다.

“엄마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그렇지만 포기할 수도 없어. 그러니까 난 엄마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릴게.”

“선후야…….”

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전해졌으리라 믿는다.

나는 엄마의 뺨에 키스한 뒤 침대에서 떨어졌다.

“엄마 쉬고 있어. 난 수아 씨 마저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

나는 그 말만을 남기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후우…….”

문밖으로 나온 나는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을 누르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 심정은 복잡했다.

이게 최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남자라면 억지로라도 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틀림없이 엄마에게 상처를 남겼겠지. 나는 키워준 은혜를 원수로 갚은 후레자식이 되는 거고.

그런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허황된 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한다.

특히 엄마는.

그러니까 나는 엄마의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끝까지 허락하지 않으면? 그럼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밖에. 

“수아 씨.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지하 주차장에 돌아와 보니 수아 씨는 얌전히 차 뒷좌석에 잠들어 있었다.

술기운 탓인지 수아 씨는 너무 깊이 잠들어버렸다. 흔들어 깨워도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수아 씨. 잠깐만 일어나 봐요. 업힐 수 있겠어요?”

몇 번을 불러봐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완전히 널브러진 수아 씨를 힘들게 등에 업고서 옆 동 엘리베이터를 탔다. 카드키를 미리 받아둬서 다행이었다.

“으…… 선후 씨…….”

“수아 씨. 정신 좀 차려봐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수아 씨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정신을 차렸다고 하기에는 좀 부족했다. 간신히 의사소통만 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선후 씨…… 어머니랑 사이좋아 보이던데요?”

“예? 아, 예. 그야 뭐…… 보통 모자 사이보단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후, 후후후. 안 되겠네요, 저. 제가 이렇게 단순한 여잔지 몰랐어요. 설마 이야길 들은 첫날부터 그 말대로 될 줄이야……. 거기다 어머니 상대로 질투라니.”

내 목에 감긴 수아 씨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엄마를 향한 내 사랑은 아무리 자랑해도 부족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연예계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엄마한테 폐가 될 테니까.

“수아 씨 집이 703호랬죠?”

7층에서 내리자 수아 씨는 갑자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윽…… 이만 내려줘요. 혼자 갈 수 있어…….”

“무슨 소리예요? 그렇게 취해놓고선.”

“그냥 현관 앞에 내려줘요. 술 깨면 들어갈 테니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지만 그런 고집을 부리는 것도 잠시, 수아 씨는 다시 건전지가 떨어진 인형처럼 다시 잠들어버렸다.

아무래도 수아 씨는 나를 집안에 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역시 오늘 처음 만난 남자를 집안에 들이는 건 꺼려지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본인 말처럼 이대로 복도에 내려놓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안해요. 수아 씨. 맹세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부디 허락해줘요.”

703호에 가서 카드키를 도어락에 대자 문이 열렸다.

나는 수아 씨를 업은 채 현관문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 하?”

자동으로 켜진 전등 아래 비친 집안 풍경을 본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흔한 인테리어 가구 하나 없는, 처음 모습 그대로의 아파트가 거기 있었다.

거기에 커다란 골판지 상자만 방마다 몇 개씩 쌓여있을 뿐.

사람이 사는 집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일단 침실부터 찾자.”

나는 우선 등에 메고 있는 짐부터 내려놓기로 했다.

하지만 집 안에 있는 방을 전부 뒤져도 침대가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설마 여긴가?”

6개의 방 중 가장 작은 방.

유일하게 커튼이 설치된 그 방의 바닥에는 허름한 핑크색 이불이 깔려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계속 써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레트로한 이불이었다.

상황적으로 볼 때 아마 여기가 침실인 거겠지. 나는 그 허름한 이불 위에 수아 씨를 내려놓고 마찬가지로 허름한 베개로 머리를 받쳐주었다.

그리고 외투만 벗겨 옷걸이에 걸었다. 맹세컨대 다른 건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이만하면 됐겠지. 내가 할 의리는 다 했다고 본다.

하지만 집안을 둘러보자니 왠지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집안이란 말인가?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집은 처음 봤다.

명색이 배우의 집에 TV도 PC도 없는 게 말이 되나? 그나마 주방에는 냉장고가 하나 돌아가고 있었지만, 내용물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생수가 한 통 들어있을 뿐이었다.

방송에선 그렇게 화려한 모습만 보이던 여배우가 사실은 이렇게 허술하게 살고 있다니. 대체 소속사나 매니저는 뭘 하는 거야? 소속 배우 관리를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이런 불건전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그야 연기든 뭐든 제대로 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켜서 황수아로 검색해 보았다.

황수아. 만 25세. 대한민국의 여배우.

그리고 그 아래에 텅 비어있는 가족란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하아…….”

나는 스마트폰을 끄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어떡하지. 솔직히 이대로는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 잘못이 아닐까. 고기도 얻어먹었고.

나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찝찝함에 손바닥으로 바닥을 쓱 문질러보았다. 그러자 손바닥에 언제부터 쌓여있었는지 모를 먼지가 묻어나왔다.

“이건……청소부터 해야겠는걸.”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눌러 엄마한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오늘 좀 늦을 거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긴긴밤이 될 것 같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