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56)

엄마와 데이트? 

오늘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날이다.

엄마와 둘이서 만나기로 한, 말하자면 데이트 날이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데이트는 1년에 몇 번 없는 중요한 이벤트였다.

엄마는 스케쥴로 바빠서 시간을 내기도 힘들거니와 직업 특성상 바깥에서는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얼마 전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엄마의 태도가 조금 변한 듯한 느낌이 든다.

겉으론 다르지 않지만, 왠지 나를 피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엄마 안에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

그 현실적인 장애가 엄마에겐 부담이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데이트는 중요했다.

최근 멀어진 엄마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중요한 찬스니까.

엄마와의 금단의 관계가 부담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누나나 동생에게, 혹은 외부인 누구에게라도 들키면 우리 가족은 완전히 파탄이 날 테니까.

내가 원인이 되어 가족이 피해를 입는 것.

그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뒤틀린 길을 바로잡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금단의 과실 조각을 맛본 나는 완전히 중독되어버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실을 따내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런 나이기에 오늘이란 날을 준비하면서 겉모습에서부터 기합이 들어가는 건 당연했다.

나는 전쟁에 나서는 병사의 심정으로 외출 준비를 했다.

내 인생에서 이 정도로 외견에 신경 쓴 일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기합을 넣고 향한 곳은 동네에 있는 어느 고급 한우 고깃집.

남녀 간 데이트 장소로는 미묘하지만, 모자간에 저녁 식사 자리로는 무난하다고 해야 할까…….

사실 데이트라고 기합을 넣는 건 나뿐이고, 엄마는 아들한테 저녁에 고기 사 먹인다는 정도의 인식인 거겠지.

갈 길이 멀구나…….

그런 기대와 불안을 안고 도착한 식당.

나는 예상을 벗어난 사태와 마주해야 했다.

“어서 와, 아들. 수아 씨. 우리 아들 선후예요. 잘 생겼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엄마와의 데이트 장소에는 엉뚱한 훼방꾼이 끼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황수아예요. 와, 선생님, 잘 생겼다 말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눈을 마주치기 겁이 날 정도의 미인이 거기에 있었다.

이런 사람한테 잘생겼단 소릴 들어봐야 비꼬는 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 안녕하세요. 진선후입니다.”

겨우 말문이 막히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지만 옆에 엄마가 있어서 그렇게까지 거북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선후야, 이쪽은 황수아 씨. 누군지 알지?”

“아, 네, '안나의 일기'에서 안나로 나왔던….”

그녀를 못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최대 시청률 40%짜리 드라마의 여주인공인데.

황수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배우 중 한 명이다.

특히 재작년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드라마 '안나의 일기'는 평균 시청률 30%, 순간 시청률 40%를 넘긴 일일 드라마계의 레전드였다.

물론 내가 그 드라마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거기에 엄마도 출연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작은 빵집을 어떻게든 키워보려는 여주인공 황수아와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대형 프렌차이즈 베이커리의 대표이사인 엄마.

이 두 사람은 나란히 연말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렇게 엄마와도 인연이 깊은 배우를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안나의 일기'라는 말을 들은 황수아 씨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언제나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는 나이기에 겨우 구분할 수 있는 미묘한 차이였지만.

“알아봐 주셔서 영광이에요. 이번에 또 임신혜 선생님과 같이 작품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배우라는 인종이 다들 그렇지만, 황수아 배우도 TV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프로필상 키는 160cm 정도였을 텐데 그보다 더 작아 보였다.

얼굴도 작고 손도 작고.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던가?

먼저 내민 손을 잡아보니 세게 잡으면 부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약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황수아라는 이름값에 비해 의외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손을 맞잡자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왔다.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에 오히려 내가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아, 아니요, 저는 그냥… 저야말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사실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는 것 자체가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영광이었다.

내가 가진 타이틀이란 엄마가 배우 임신혜라는 것뿐이니까.

황수아 같은 유명 배우한테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들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왜 황수아 님이 있어?”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엄마에게 소곤거렸다.

매니저나 코디라면 이해한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은 A급 여배우였다.

이렇게 사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신분이 아닌 것이다.

“훌륭한 며느릿감이 있으면 소개해주고 싶은 게 엄마 마음 아니겠니?”

“엄마!”

여유롭게 웃으며 흘려넘기는 엄마의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은 자칫 상대 배우한테는 실례일 수도 있고, 선배 배우의 성희롱이나 갑질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황수아 배우는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그저 살풋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 자체의 카리스마라고 해야 할까, 황수아 배우 특유의 포스 때문에 미소 띤 얼굴도 왠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컴퓨터로 짜 맞춘 것 같은 미인. 그게 황수아라는 배우였다.

TV에서 볼 때는 좋아도 이렇게 실물에 눈앞에 두자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예쁘다는 말은 이런 사람에게 하는 말이겠지.

이런 사람을 데려다 놓고 며느릿감이라니…… 대체 엄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는지도 모르고…….

“후후. 너무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배우라곤 해도 한 꺼풀 벗기면 평범한 여자애니까. 알지?”

“하…….”

엄마가 어드바이스라는 듯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야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TV에 나오는 특별한 사람일수록 실은 특별할 게 없다는 것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눈앞의 이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걸까? 마치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사람인데.

“그리고 오늘 고기는 수아 씨가 사는 거니까 많이 먹어.”

“어, 정말로?”

“네. 많이 드세요.”

당연히 엄마가 사는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 얘길 들으니 이 자리가 3배는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은 선배 여배우가 후배 여배우에게 자기 아들을 소개하면서 돈까지 쓰게 만드는 상황이 아닌가?

혹시 나는 말로만 듣던 연예계 갑질 현장에 있는 게 아닐까. '유명 여배우 임신혜, 후배 여배우 상대 갑질 논란' 같은 기사가 뜨기라도 한다면….

“엄마…. 나 고기 안 먹어도 괜찮아.”

“진선후. 너 지금 무슨 상상 하는 거니?”

“엄마가 후배 여배우한테 갑질하는 상상?”

내 솔직한 대답에 엄마는 깔깔 웃으며 내 등짝을 때렸다.

“얘는! 이상한 걱정 안 해도 돼. 이건 수아 씨 부탁 들어주는 대신에 한턱내는 거니까. 대신 선후도 도와줘야 해.”

“부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뜬금없는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대단한 사람에게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을까?

“선후 씨, 임신혜 선생님이랑 같이 대본 리딩 하신다면서요.”

진지한 분위기로 전환한 황수아 배우의 말에 나는 또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 아, 그건 하긴 하는데…. 엄마?”

가끔 집에서 엄마 연기 연습을 도와주긴 하지만 어디 가서 말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정말, 정말로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낸다는 건 설마 나한테 황수아 배우의 대본 리딩이라도 도와주라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엄마야 가족이니까 그렇다 쳐도, 다른 배우와 맞춰볼 만한 실력은 절대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선후야. 엄마 처음 드라마 복귀하던 때 기억나니? 엄마가 처음 악역 배역 맡았을 때.”

“응. 그야 기억하지. ‘마녀의 유혹’ 때 말하는 거지?”

해묵은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겨우 정상인 흉내를 낼 수 있을 정도까지 나아진 상태였고, 엄마는 그때 스크린에 복귀하기 위해 도전하고 있었다.

“그때 엄마, 슬럼프 굉장히 심했거든. 배우 일 계속할 수 있을지 어떨지 고민할 정도로 말이야. 이제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제정신이 아니었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는 엄마가 TV에 나온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지만, 엄마의 연기 평 자체는 그리 좋지 못했던 거 같다.

드라마 흥행 자체도 실패했고, 엄마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벼랑 끝에 몰려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하나의 작품을 마친 후 곧바로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엄마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던 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엄마랑 같이 대본 연습을 시작한 것도 아마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선후가 도와준 덕분에 엄마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고마워 선후야.”

그러면서 엄마는 내 손등을 꽉 쥐었다.

엄마의 애정이 붙잡은 손을 통해 전해졌다.

“아, 아니 나는 별로…….”

엄마의 진지한 고백에 나는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내가 엄마의 모티베이션이 됐다는 건 기쁜 사실이었다.

엄마가 잡아준 손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이대로 줄곧 잡고 있었으면…….

“그리고 우리 수아 씨도 그때 엄마랑 비슷한 상황이야. 그렇지, 수아 씨?”

황수아 배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의 일기’ 이후로 찍는 드라마는 전부 실패했으니까요.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예요.”

생각해보면 황수아라는 네임밸류에 비해 최근엔 너무 조용했다. 

‘안나의 일기’ 이후 2년.

하지만 그녀도 놀고 있었던 게 아니다.

꾸준히 방송에 나오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조용했다는 건 그만큼 흥행하지 못하고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는 의미였다.

“나랑 같이 나온다는 점에서 실패할 리는 없겠지만. 우후후.”

초조한 얼굴의 황수아 배우와 비교해 엄마한테선 여유가 넘쳐났다.

엄마는 방송계의 골든티켓이다. 나오기만 하면 흥행이 보증되어 있으니 자신감이 넘치는 것도 당연하겠지.

반대로 황수아 배우의 자신감이란 꺼지기 직전의 촛불보다도 약했다.

“……솔직히 그 생각으로 작품을 선택한 것도 있어요. 임신혜 선생님이랑 같이한다면 실패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요. 이번에는 연기자 황수아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아, 예…….”

그러시구나…….

그런데 왜 그런 얘길 나한테 하는 건가요?

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반인인데요.

“그러니까 선후가 그때 엄마를 도와줬던 것처럼, 수아 씨도 도와줬으면 해.”

“아니, 엄마, 잠깐만.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엄마는 엄마니까 그랬다 쳐도, 그게 황수아 배우님한테 똑같이 될 리가 없잖아?”

“아니. 엄마는 알 수 있어. 우리 선후가 수아 씨한테도 똑같이 도움이 될 거라는 걸.”

그럴 리가. 엄마의 근거 없는 믿음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황수아 배우가 슬럼프라는 것, 그리고 황수아 배우가 슬럼프 극복을 위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까진 이해했다.

하지만 거기서 엄마가 나를 황수아 배우에게 소개해주는 의미를 모르겠다.

엄마한테는 가족이니까 나란 존재가 정서적으로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판 남인 황수아 배우에게도 내가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저도 부탁드릴게요, 선후 씨.”

“윽.”

황수아 배우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나에 대해 모른다. 아는 거라곤 엄마에게 전해 들은 정보뿐이겠지.

나에 대한 엄마의 과장된 이야기 탓에 황수아 배우는 쓸데없는 기대를 품게 됐을지도 모른다.

“저기, 황수아 배우님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제가 아니라 연기의 전문가와 상의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는 정말 아마추어 수준이라…….”

나는 어렵게 사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난감해하는 내 얼굴을 보고 황수아 배우도 이해한다는 듯이 웃었다.

“갑자기 이런 얘길 들어서 당황스러우시겠죠. 저도 알아요, 말도 안 된다는 거.”

“그럼…….”

“평소 같았으면 저도 절대 이런 부탁 안 드렸어요. 하지만 저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고, 이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임신혜 선생님께 말씀드린 거예요. 선생님께 부탁드린 이상, 저는 선생님을 믿고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잘 부탁드릴게요. 선후 씨.

황수아 배우는 생긋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 거절해도 소용없는 것 같다.

정상급 여배우의 슬럼프를 극복하도록 지원한다. 나에게는 책임이 너무 컸다.

“대한민국에 이 분야에서 엄마보다 전문가가 있니? 걱정하지 마. 우리 선후가 족집게 선생이니까, 분명히 잘 해결해줄 거야.”

“하…….”

난 이러려고 나온 게 아닌데.

단지 엄마와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어느새 상이 차려지고 불판에는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다.

스폰서 제의를 받다 

  

아마 내가 엄마나 황수아 배우가 기대하는 만큼 도움이 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어떻든 나를 믿고 맡긴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내야 했다.

엄마를 실망시킬 순 없으니까.

나는 각오를 다졌다.

“저, 그럼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선후는 엄마랑 했던 것처럼 수아 씨랑 대본 리딩 도와주면 돼. 그 전에 서로 좀 더 친해질 필요가 있겠지만.”

“…필요하다면 대본 연습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지만, 그…….”

대본 리딩이야 연기력을 따지지만 않으면 할 수는 있다. 황수아 배우가 연습할 때 상대 배역 대사를 읽어주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다른 건 무리한 요구였다.

“이번 작품은 더블 히로인 체제야. 한 사람은 남주인공의 아내인 황수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남주인공의 결혼 전 첫사랑 상대였던 신지혜.”

엄마는 내 얘길 의도적으로 뭉개고 이야기를 진행해나갔다.

그나저나 이번 드라마의 또 다른 여주인공은 신지혜인가……. 만만찮은 캐스팅이구나.

차가운 분위기에 서구적인 미인인 황수아 배우와 달리, 신지혜 배우는 단아하고 청순한 타입이다. 아마 의도적으로 정반대 스타일인 두 배우를 캐스팅한 거겠지.

이렇게 네임드급 여배우 두 사람이 주연으로 나온다면 존재감이 약한 한쪽이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그리고 현재 기세로 봐서는 황수아 배우가 잡아먹히는 쪽이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애초에 말만 더블 히로인이지, 진짜 히로인은 신지혜 배우고 황수아 배우는 들러리 역으로 캐스팅한 건지도 모른다.

“남주인공은 수아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만들고 잘살고 있었어. 하지만 우연히 첫사랑인 지혜와 재회해 흔들리기 시작하지. 지혜는 남주의 모친에게 속아서 남주와 헤어졌지만, 뒤늦게 진실을 알고 다시 남주에게 접근해. 수아 씨는 그걸 알고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걸 막으려고 하는 거야.”

“그냥 남주가 쓰레기 같은데. 이건 그냥 바람이잖아.”

“수아 씨 생각엔 어때?”

“속아서 헤어진 건 안 됐지만, 저도 이런 남자는 좀….”

황수아 배우는 왠지 나를 힐끗 보면서 이야기했다.

제가 아닙니다. 사실은 그 주인공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쓰레기일지도 모르지만, 이건 제가 아닙니다.

“남자가 쓰레기라는 데에는 나도 이견이 없지만, 수아 씨는 그러면 안 돼. 아무리 쓰레기 같은 남자라도 수아 씨가 사랑하는 남자니까.”

엄마가 진지하게 연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은 왠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황수아 배우는 엄마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경청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긴장될 지경이었다.

“내가 볼 때 수아 씨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야.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면 수아 씨는 어떨 거 같아?”

“…그야 화가 나고 기분 나쁘겠죠.”

엄마의 말에 황수아 배우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엄마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니야. 몸을 불태우는 듯한 분노.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질투심.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니까 헤어질 수 없는 복잡한 마음. 이런 걸 표현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거야, 수아 씨는.”

나는 엄마의 연기지도보다 다른 쪽에 더 신경이 팔려 있었다.

사랑을 한 적이 없다는 건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아깝네. 이런 사람은 정말 아무 남자나 골라잡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한심한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엄마의 강의는 계속됐다.

“바람피운 남자 때문에 히스테리 부리면서 복수하는 연기? 그런 건 아무 여자나 데려다 놔도 할 수 있어. 하지만 황수아한테 바라는 연기는 그런 게 아니잖아? 시청자가 봤을 때 몸이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연기가 필요해. 하지만 남자 배우가 그거라서야 이입하기 힘들겠지?”

그러면서 엄마는 내 팔을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우리 아들을 빌려줄게.”

거기서 왜 내가 나오는 걸까.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우리 아들, 선후 상대로 사랑하는 연습을 해 봐. 그리고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는 연습도. 메소드 연기를 하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한번 겪어보면 적어도 진짜에 가까운 연기는 가능할 거야.”

“저기, 엄마.”

중간까지는 나도 이해했지만, 나로 사랑하는 연습을 하라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사랑이란 게 하란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선후 너도 도와줄 거지?”

“아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드리겠지만.”

엄마의 의견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듣기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귀엽다지만 정도가 너무 심한 거 아닐까.

애초에 사랑을 연습하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상대는 오늘 처음 만난 나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 자리에 나뿐이었던 모양이다. 난감해하는 나에게 황수아 배우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부탁드릴게요, 선후 씨.”

“…진심이세요?”

“말씀드렸잖아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 저는 그냥 선생님 말씀만 믿고 따라갈 뿐이에요.”

그녀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이렇게 단정하게 생긴 사람에게 진지하게 응시당하니 차마 눈을 마주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쉬었다.

큰일이다. 황수아 배우 주변에는 올바른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는 걸까. 이상한 종교 같은 데에나 빠지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어머나. 이거 마음이 무겁네. 실패하면 엄마 책임이니까 선후도 수아 씨한테 사랑받을 수 있게 노력해줘. 알았지?”

“그건…..”

말문이 막힌 나는 황수아 배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솔직히 인간이 지나치게 예쁘면 쳐다보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해진다. 

황수아 배우는 그런 타입의 인간이었다. 쳐다보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한 존재.

이런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게 노력하라고? 대체 어떻게?

하지만 그녀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하면서 거절할 만한 배짱은 나오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황수아 배우의 슬럼프 극복을 위한 임시 파트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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