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한세이2 (3)]
한가로운 이야기다.
세이를 '육성'시키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누군가의 손으로 인해 한방에 머리를 다치고 바닥에 널부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와중에,
"자, 일단 식사부터 하자.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먹더군, 그래서는 중요한때 방패역할을 제대로 못할거다."
태연하게 식사를 권유하고,
"아, 곧 치료해줄테니까 걱정말고, 라나. 내가 죽이지 말라고 했을텐데..."
"네? 아.. 안죽였어요 마왕님! 저, 저는 그냥 그저.."
"네 부모가 생각났을 수도 있겠지만, 잘못 맞았으면 죽일 뻔했잖아. 준비되지 않은 살인만큼 위험한건 없다니까 글쎄"
"죄..죄송해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태연한 이야기를 왠지 모르게 소름끼치게 전달했던 그런 이야기.
세이는 멍하니 그런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펑펑 울어버리려고 했던것이 수초전이고, 서러움에 울컥 눈물을 쏟아내려고 했던 것도 십수초 전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어? 우리엄마 죽을 뻔한거에요?"
"그렇지 뭐! 하지만 안죽었어!"
"히익... 진짜 저 무슨 집단에 들어온건데요.. 이, 라, 라나라는 분은 왜.. 무, 무서운데.."
"괜찮아. 밥부터 먹어 빨리!"
"왜 그렇게 밥에 집착.. 아니 먹을께요! 먹을테니까 저좀 놔둬 주실래요!?"
그럭저럭 즐거워 졌다.
즐거움의 기준이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 적어도 긴장을 풀고 마음 편하게, 그들과 하는 이야기에 역시 몸을 맡겨 솔직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정도의 이야기.
그렇게 시간이 다시 흐르고 나면 현재.
<대국민 오디션: 1차 예선장>
"1032번, 합격입니다."
합격자에게 주어지는 목걸이를 목에 걸고, 예선장을 빠져나오면서 대기하고 있던 카메라에 몇마디 하면서 기뻐하는 얼굴을 보여주고...
"저...! 저 합격했어요!!!"
이 기쁜 소식을 그들에게 달린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없다.
그도 그럴것이 그날, 녹음실에서 발을 헛디뎌 녹음기기의 모서리 부분에 두번정도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면서 기절했기 떄문에, 입원했으니까.
그래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면 뛸듯이 기뻐하시겠지.
... 기억이 멀쩡하시다면 말이다.
그런 어머니 대신 있는 것은 그 남자 마정수와 그 여자 유라나, 그리고 최미리네.
가장 믿을만한 한건 역시 미리네 언니이긴 했지만, 그녀는 조금 다친듯 보였고..
"분명 이쪽으로 왔는데!?"
"그 조그마한 키가 눈에 안띌리가 없지! 다들 몸을 낮추고 사족보행으로 수색해요!"
"분명히 여기 어디에 전설이 되려 하는 능력자이자 외부세계의 네임드 마물을 수십마리나 도륙하여 마물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공포를 모르는 것들에게 공포를 건네준 미리네 님이 이 근처에 숨어계실거야!"
"자! 이 기준 아래로는 일단 사로잡고 와! 보호자가 없는 어린이나 작은 사람을 찾아! 우릴 구해주신 미리네님을 찾아야 해!"
"시발..염병! 존나 빨리 쫒아오네! 으윽... 아무튼 세이야! 합격 축하한다!"
근처에 있던 마물을 토벌하면서 이름이 어느정도 알려지는 바람에 쫒기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네는 곧 그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셋이서 남게 된 이야기었지만,
"라나는 가서 정리좀 부탁해"
"정리요!"
"미리네 녀석은 자기가 돈 벌어야 한다면서 일부러 옷을 입지 않았지만, 너는 괜찮잖아? 평범한 복장으로 피해상황이랑 나타난 마물의 정보를 좀 가져다 줘. 할 수 있지?"
"네!! ,,, 근데 마왕님... 저기..."
"응?"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왕으로부터 일의 지시를 받은 라나는 몇번인가 세이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난 다음에 또 자리를 벗어났으니,
남게된건 단 둘,
'와.. 나 완전 도둑고양이 같은건가봐...'
세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가방을 양손으로 쥔채로 물끄러미 정수를 바라보았다.
방긋 웃으면서, 왠지 모르게 정이 들것같은 정수의 모습을, 밥 못먹었다면서 챙겨주던 사람이 어디에 있었는지. 격한 운동 속에서도 부드러운 말과 격려의 말을 건네준 사람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저 열심히해라, 더 해라, 많이 해라, 빨리 해라, 그 따위 말밖에 듣지 못했던 세이의 삶에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하!"
"아무튼 일단 돌아가자. 다음 오디션이 있으면 그 사이에서 시간을 좀 빼야겠군."
얼마나 마음에 닿는지.
'아니, 아니지. 이대로 가면 쓸데없이 말에 의미를 생각하게 되버리니까 조심하자.'
모를 일이다.
신경쓰이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처음 겪어보고 있었으니 그랬을까? 없는 아버지와도 같은 느낌이라? 우스운 이야기다.
그래서 정수는 흘끔 세이를 보아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지금부터 거길 가는게 좋겠군!"
"어딜요?"
"섹스하러 간다."
"엗."
... 이 말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 * * *
<모텔거리>
"악! 악!! 싫어! 싫다니까요?! 키운다며! 잘 키울거라며어어어!!"
"조용히 하고 따라와! 역시 네 잉여 마력은 너무 많아! 노래에 마력을 담을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버려지는 마력이 하루에 얼만지나 알아!?"
"자, 잘 먹일거잖아요! 저 아이돌로 만들어주신다면서!? 이런건 아니죠! 아이돌은 섹스 안해요!!"
"아니! 안보이는데서 할걸?! 섹스 안하는 인간이 있을리가 없지! 모든 인간은 대부분 섹스하기 위해 태어났다!!"
모텔이 모여있는 거리,
정수가 아는 곳이라곤 이전날 미리네와 함께 왔던 그곳 밖에 없어서 일단 세이를 데려왔지만, 여러모로 트러블이 일어나는 중이다. 투닥거리는 정도나, 살려달라고 구해달라고 소리지르는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주변을 거닐던 대부분의 커플들과 아저씨들이 차마 다가기기 힘든 정도의 대화 내용과 상황.
"엇. 어."
무언가 반박할 말을 찾고들은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맞는말 같고, 그래도 역시 아닌 것 같아 말리려고 하면
"안돼요! 싫어요! 제가 목표로 하는 톱은 이, 이런게 아니라.."
"넌 분명 그 1차 오디션에서 재능이라는 것을 봤을거다! 나한테 몸을 맡기면 널 더 쉽게 도와줄 수 있어!"
"아니 존나 고마운 말이긴 한데! 그렇긴 한데! 그... 그래도... 으...음"
뭔가 끼어들기 어려운 분위기.
명확히 거절하는 듯 하나, 그다지 거절하는 것 같지도 않았던. 애매모호한 상황의 연속.
점차 다툼이 잦아들기 시작하면 한참 그 모습을 구경하던 사람들도 흩어지기 시작했지만, 떠나는 이들은 모두가 키득거리며 웃거나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로 자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 ... 아니, 그... 뭐냐. 진짜. 진짜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잖아요."
흥분을 가라앉힌 세이는 그렇게 조용해진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난 후에 침을 꿀꺽 삼켜 넘겼다. 조금은 긴장된다. 그도 그럴것이 경험이 없었는걸,
경험은 커녕 이성이랑 손잡은 적도 없는데, 지금 이렇게 손잡고 있고,
실제 나이가 얼마나 되건 외견은 어디까지나 자신보다 연하처럼 보이는 몸을 한게 정수였기도 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고 말을 곱씹어보면, 다른 수많은 이유도 많았는데,
대부분이 목숨과 직결되어 있거나, 남이 들으면 안될 것 같았던 이유로.
"그... 제 잉여 마력이라는게 그렇게까지 필요하다면... 제가 거절할 입장도 아니고, 그 방법이 조금.. 뭐냐 거시기 하긴 해도, 제가 다른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것 자체는 좋은데..."
그렇게 납득할 수 있었으나,
몇가지 이해되지 않는점이 있어서, 세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늦추어 정수를 바라보았다.
정수는 살짝 인상을 쓰고 있다. 세이의 손을 잡은 채로 '원래 이런 정돈 아닌데'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래! 네 마력은 도움이 돼! 나에게!"
떵떵거리고 있는 그런 정수.
세이는 이때에 지금껏 신경쓰이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그..근데, 뭐냐, 그.. 미리네 언니랑 사귀시지 않아요?"
미리네랑 사귀는거 아니냐고...
* * * *
<모텔거리>
사귀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거 안하는데?"
한세이는 나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곤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곤 아무말도 하지 않으니, 잠시 후에는
"네? 그럼 두사람 뭔데요? 둘이. 막..쓸데없이 꽁냥거리고 있던데?"
"뭔소린데"
진짜 진짜 놀랐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이상한 이야기었을테지. 어디까지나 마왕의 입장에서는...
"아니, 아뇨. 그.. 뭐냐. 둘이 서로 안좋아한다고?"
"아니 나는 미리네가 꽤 마음에 드는데?"
...
"..."
... 세이는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이 말의 부조화는 무슨 이야기인지. 서로 좋아하는게 아니라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보는 눈빛 사이에 꿀이라도 떨어지는 듯 했고, 미리네는 특히나 이 남자에게 하는 행동이 눈에 띌 정도였다.
...
"설마 둔감하다는 그런 설정이에요?"
혹여 설정인가,
혹여 정말로 둔감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미리네를 나름 마음에 든다고도 말하고 있으니,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아니, 뭐 그런 흔한 오해라고 하기에는 정말로 이상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라나씨는?"
"잘 따라와 주는 좋은 부하고"
라나도 미리네도..
세이가 보기에는 분명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 속에서 느꼈는데,
그런 사람들을 배신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보통 이런식으로 나오기나 할까?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것이었고,
곧 세이는 다시금 질문을 꺼냈다.
"아니,"
사귀지 않는다. 라는 것 까지는 이해했다. bss 같은 장르가 된다고 납득해도 괜찮다. 다만,
"미리네 언니랑 라나씨는 당신 좋아하는거 알아요?"
"...? 사랑같은걸 말하는거 아니지?"
"...? 네 대충 그런거 말하는건데요?"
이 이상함의 정체는..
"하하, 재미없는 농담도 다 하는구나"
"네?"
"난 마왕이야."
"네"
"마왕은 사랑받지 못하니까 마왕이라고 불리우는거다."
"..."
그의 사고방식.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마왕은 마왕이 되는거야. 그 녀석들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감각과 경험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인거지. 난 마왕이고. 빈틈없는 이야기지."
"...와. 당신 진짜."
"날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이 몸이라면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빨리가자! 만족시켜줄 자신은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이 육신정도는 좋아하게 만들어주도록 하마!"
마왕이라 할만 하다.
그러니까 마왕이 되어버린거겠지.
아무도 자길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같은걸 하고 사니까, 마왕이 된거겠지.
어리석은 사람이다.
...
<모텔거리: 바로 그 모텔>
"아, 여기 얼마라고 했더라, 미리네랑 왔을땐..흠. 미리네를 불러서.."
"아니! 아니 아니! 됐어요! 전화하지 마요! 이 미친자야!"
모텔에 도착하고 나서는 반쯤 채념해버린 세이.
무언가 말로 할 순 없지만, 자신을 절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단언해버리는 저 남자로부터, 다른 사람들 정도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을 놔두면 분명 문제가 생길거야!'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까..
"아니, 내가 한번 연락해보지. 괜찮아 마법으로 할거니까, 그냥 너랑 모텔에 왔는데 결제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면..."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요! 내, 내가 할테니까 좀 비켜요! 아 씨...! 대체 내가 왜 이런걸... 미리네 언니한테 절대 전화하지 마요! 라나씨한테도 절대 하지 말고! 오, 오늘여기 온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는거에요! 알았죠!? 네!?"
"...곧 알게 될텐데.."
"그땐 그때고! 아무튼 절대 말하지 마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모텔에 들락날락거렸다는 이야기 들으면 그 사람 맘이 얼마나 무너지겠냐고!'
세이는 목숨을 건졌다.
당분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