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하얀(5)]
잠시, 그렇게 된 하얀은 재쳐두고, 여기 라나에게는 문제가 좀 생겼다.
아니 생각해보면 라나에게 문제가 없던 적은 없었다.
항상 문제 투성이. 모든 것이 라나에게는 크나큰 문제이며 자신을 가로막는 벽이나 다름 없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기만 해도 그렇지, 잘 생각해보자,
자신만 하수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미리네가 나타났고, 미리네 언니는 조금 수상쩍게 카론님 앞에서 부끄러워 하며 이상한 냄새가 함께나질 않나,
그래도 자신이 가장 강하니까,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도움이 될 수 있으며 가장 칭찬받고 가장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하얀이라는 소녀가 나타나버렸다.
그 하얀이라는 소녀는 자신보다 강했고, 유능했으며, 다재다능했으니, 그것이 어찌 문제가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그건 사실 라나에게 상관 없는 일이다.
노력하면 된다.
세상 대부분의 일들은 노력하면 대체로 해결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야 하겠지만, 라나는 축복받았으니, 노력하면 대부분은 간단하게 이룰 수 있었고, 뭐하면 그냥 하얀이라는 소녀를 견제하거나, 아니면 그녀보다 더더욱 열심히 더더욱 잘. 더더욱 잘 보이면 되는 일.
그건 오랜시간, 한두번도 아니고 꾸준히 시간을 들여가면서 하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라나의 조금 특이한 ‘사랑방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라나의 집.
“뭐하시는거에요 두분?”
“호호, 아무것도 아니란다 라나야.”
라나의 부모님들에 관한 문제다.
그날 밤.
열심히 던전을 끝마치고 난 이후의 그날 당일 밤 이야기다.
라나의 생활 습관은 대부분이 부모님이 만들어 둔 것이다.
라나가 먹는 것, 라나가 입는 것 자는 곳, 친구나 여러 기타 모든 생활습관 말이다.
물론 라나는 그것에 특별히 구애받지 않지만, 특별히 다른 것을 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것에 따르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통금시간.
학원이 없는 날에는 오후 7시가 될 때까지는 돌아올 것.
또 하나는 출석.
학교가 아니라, 학원은 절대 빠지지 말 것.
같은 이야기.
한시간 단위로 어디에 있고 뭘 하고 있는지, 잘 되었는지 공부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이고 친구가 어떤 말을 했으며 공부잘하는 그녀석의 공부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학원 강사가 무슨 말을 했고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지 안했는지 얼마나 예습했고 얼마나 복습하고 있는지 간이시험은 몇문제를 맞추었고 몇문제를 틀렸는지, 잠은 얼마나 잤는지 컨디션과 정신상태. 눈, 건강상태, 피의 상태...
할 수 있는 모든 보고들을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날,
라나는 그모든 것을 하지 않았다.
시간은 오후 8시가 넘어서 들어왔고,
학원은 모조리 결석했다.
한시간 단위로 보고해야 하는 모든 정보들은 6시간이 넘도록 하나도 보고하지 않았다.
이건 전쟁이라도 일어날 사안, 당장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안을 들쑤시며 이것저것 다 부수고 다니거나, 아니면 라나의 다리를 부러트리겠노라고 야구배트를 가지고 쉴세없이 패려고 하겠지.
…
‘생각하니까 웃겨’
생각해보면 조금은 우스울 수도 있는 그런 일이 일어날 예정이었다.
물론 라나,
지금껏 단 한번도 어겨본적이 없었던 것들이기에 그렇게 예상만 했을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저번에 통금시간을 10분 어겼을때에는 정말로 자신을 구타하곤 했던 아버지가 있었으니, 영 말이 안되는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랬어야 했는데….
“지금…”
“어서오렴. 밥은 먹었니?”
“…. 네.”
“후후, 올라가서 쉬렴.”
무언가 이상했다.
공부상자를 만들다가 지치고 지친 탓일까?
“아참, 라나야. 네 공부상자 말인데, 이제 필요없어서 옆옆옆집인 재력이네 집에 주었단다.”
“네.”
“강철금고 에디션에 스틸펑크 소재를 사용해 디자인과 멋을 살려놓았고 보안용 공기제거 장치와 더불어서 침입자 분쇄용 파라오함정세트까지 전부 줘버렸어.”
“네. 그러세요.”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그들이 죽고 못사는 상자를 이렇게 남에게 줘버린것이야 뭐 그렇다 치기로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 일.
게다가 저들의 표정을 보라,
아까부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실실 웃으면서 쇼파에 앉아있는 아버지.
그리고 아까부터 웃는 얼굴을 한번 일그러트리지도 않고 말하고 있는 어머니 말이다.
…
‘별거 아니겠지.’
하지만 라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부모님들이야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라나, 저들이 죽건 말건 이상한 짓을 하건 말건,
이제 라나에게 부모요 연인이고 신이며 숭배해야 마땅한 주인님은 단 한명이 되었으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래서 라나는 그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정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의문은 그냥 집어 던져두고서 말이다.
비록 라나의 부모님들이 라나가 올라가는 순간 숨막히는 듯한 눈동자로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따라가며 소름돋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음을 알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닌데’
하루이틀 그런 짓을 한건 아니니까!
라나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몇분 후,
똑똑-
“과일 가져왔어요.”
처음듣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
<라나의 방>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누구세요?”
당연히 그렇게 질문을던지는 것이 라나였지만 오히려 그쪽에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이주전에 왔던 새 가정부... 인데요...”
“새로운 가정부?”
생각해보면 들은것도 같다. 이전에 근무하고 있던 가정부가 기절하고 실신하여 더이상은 못버티겠다고 나가버렸던가?
뭐, 그런 일이 일어난 후에 금방 새로운 가정부가 집안에 들어온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던 이야기이리라,
“듣고보니 그런것 같네요. 처음보네요.”
라나는 평범하게, 그리고 배운대로 상냥하고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이건 거의 버릇이다.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보이는 것. 배워왔던 그 흔적.
“많이 봤는데”
“아, 그래요?”
물론 별 가치 없을 것 같은 이들에게만 하는 것이 라나의 이 표정과 모습이었고, 그러니까 라나는 아무렇지 않은듯 다시 할 일을 시작했다.
과일을 가져왔다고 말하는 가정부가 그 후에 무슨 말을 하건 어떤 표정을 지어보이건 무슨 생각을 하건 전혀 관심 없이 말이다.
사소한 사람 하나하나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바로 옆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것도..
라나에게는 관심이없었겠지.
* * * *
물론,
하얀의 입학이 결정되고, 라나의 집에 수상쩍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동안, 미리네 역시 큰 진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진전이라기 보다는 변화에 가까운 것이지만,
"짜란- 이게 바로 법인카드라는 거란다!"
라나는 카드를 하나 받았다.
마왕 정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검은색 카드를 하나 건네주었다.
"맨날 까만거나 주고 말이야."
미리네가 그 카드를 받고서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긴 했지만,
"너한테 검정색이 잘 어울려!"
"시...! 시발아!"
뭐 금방 부끄러움을 감출 거센 욕을 내뱉어버렸으니 별 상관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튼간에 카드다.
미리네가 받은 카드는 이른바 법인카드.
물론 진짜 법인용 카드가 아니라 그저 미리네의 신용을 이용한 신용카드였으며, 도통 은행을 이용할 줄 모르는 미리네의 은행잔고를 이용하는 것이지만, 아무튼그러했다.
"이걸로 여러명이 돌려쓰자."
현재 마왕일행.
미리네와 라나, 하얀. 조금 잘 쳐준다 해서 재력과 부자영. 그리고 양아치 일행들을 동료라고 친다고 해도, 정상적인 수입원은 미리네 뿐.
정식 능력자일을 하고, 마력을 이용해 만드는 '정제된 마석'을 이용한 벌이 뿐이었으니 뭐 어쩌겠는가?
"난 어쩌고?"
여기서 미리네가 주장하는 자신의 수입에 대한 권리는 없는편이다.
그도 그럴것이, 미리네는 결국 마왕의 하수인. 마왕의 소유물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며 신세인데, 얻는 돈이야 바로바로 마왕인 정수에게 상납하는 것이 당연!
"부자영은 그렇게 하고 있다. 너는 왜 그렇게 하지 않지?"
실제로 부자영은 남편으로 부터 받는 생활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는데 성공했지만, 남는돈은 그대로 정수에게 가져다 바치고 있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자영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재력은 매일아침 반찬 두어개가 비게 되거나, 소스없이 튀김을 먹게 되거나, 배달음식을 시키지 않게 되고, 신상품이 아니라 중고왕국에서 구입한 물건들로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겠지.
그런 이야기다.
"야! 그래도 그건..!"
"큭큭! 너는 나에게 착취당할 운명이라는거지."
잊고 있었겠지만,
극악하고 흉악한 마왕이라함은 바로 마왕 카론을 뜻하는 것.
이정도 노동착취를 통한 자금벌이는 당연한 일!
"그래도 걱정마라, 장비 구매비용과 식사비용 주거비용과 약간의 생활을 위한 기타지출 정도는 내가 해줄테니! 용돈을 받으며 지내게 되는 비참함이 더해지겠지만 말이야! 큭큭, 기름값따위라면 그것도 걱정하지 않는게좋을거다"
미리네는..
미리네는..!
"내, 내가 무슨...! 어...?"
그 상황이 조금..
'이거 왠지... 느낌이 이상한데..'
"크하하! 용돈을 늘려받고 싶다면 늘려달라고 어디한번 간곡하게 부탁해보시지! 애들 키우는 돈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던전을 한바퀴 더 돌라고! 쥐꼬리만한 돈 벌어오면서 어딜 맘대로 소비하려고!"
"아니, 그건...어? 야, 아니 말좀 그렇게 하지말고, 그러니까 나는 그냥..."
"하얀이 학원비랑 학교등록금, 라나 대학까지 보내려면 착실하게 저금을 해둬야 한단 말이다! 오늘부터 너의 배달음식은 일주일에 한번으로 제한하겠어!"
"... 아니 말투 시발아! 그러니까, 어... 야! 이거 막, 살림 합치고 그러는거 같..."
"그래도 불쌍하니 조금 정도는 챙겨주마! 곧 맞벌이를 해야 할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아니 시발 살림합치는거 같잖아 시발아! 말투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흠! 그렇군! 월세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긴 하겠어!"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지 않은건 아니었던, 그런 미리네다.
카드가 생겼다.
미리네의 수입중 일부를 모두가 사용할 수 있게된 공용카드.
이름은 '마왕카드'
"법인등록같은거 할 수 있으면 해봐, 그쪽으로 지출할 수 있도록 카드를 조정할 수 있다고하네"
"..."
* * * *
여하튼간에 그렇게 되어,
하얀,
능력자 학원 입학.
'하지만, 하얀의 기타지출도 좀 필요하고 겉보기로 멀쩡한 집도 있으면 좋겠는데, 결국 수입을 위해서라도 멀쩡한 능력자 하나정도는 더 필요하겠군'
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건 이러한 것이다.
돈이필요해졌다.
그녀들의 지상 생활이 조금 심화되면서 제대로 활동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해졌다.
이전과 같이 자영에게서 뜯어오는것도 나쁘진 않은 방법이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기고 그것이 커지는 것은 영 사양하고 싶은 일.
아무튼 필요한건 돈.
그리고 하얀의 능력자 학원 입학에 따른.
기회의 증가.
생각해보자. '능력자 학원'이다. 전국의 무르익지 않은 능력자들은 물론이요 우수한 능력자들도 모조리다 모여들 수 있는 곳이 바로 교육시설이라는 곳.
아마 능력자 학원에 있는 학생들은 그 대다수가 나이어린 이들일텐데..
아마 이들중에는 내 파편을 지닌 이들은 없겠지.
꽤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발생해버린 진짜베기 마력능력자일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 중에서 하얀과 같은 사례와 같이 악마가 장난을 쳐놓았을 수도 있고, 또 그런 학생들을 가르치게되는 교사들 중에서 내 파편, 혹은 악마의 관련자를 찾기도 쉬울 것이다.
게다가 학원의 경우라면 다양한 방면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준비는 철저하고 조심스러워야 할지도 모르지.
그를 위해서는...
'하얀의 영향력은 조금 키워두는게 좋아'
영향력을 키워두어야 한다.
최소한 학원에서는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 때쯤이었을까...
<능력자 학원>
-"아, 안녕하세요. 하 얀.이라고 합니다."
화면속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머리칼의 가녀린 그 소녀 하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능력자 학원에 입학. 그 수속은 상당히 빨랐으며, 이미 하얀은 학원의 학원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얀의 또래들이 가득 모여있는 그 교실은, 평범한 교실과 달리 흉흉한 분위기를 잔뜩 내뿜으며 하얀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하얀은 기죽지 않는다.
말을 조금 더듬은 것은 하얀의 원래 성격일 뿐이지 기에 밀린것이 아님을 말한다.
아무튼 하얀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 한걸음씩 앞으로 내딛고있었다.
저것이 바로, 하얀의 학원첫 발걸음.
목표는 친구 100명 만들기, 그리고 영향력을 키워 나의 보탬이 되길. 그 학원을... 그녀가 지배하길. 그렇게 바라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