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0 은백의 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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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과 일행은 초원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쟤는 무슨 일 있다냐?”
메이첸은 엘리스를 보며 물었다.
마법사 K는 마주 걸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을 특성이 좀 크게 작용한 거 아닙니까?”
마을 특성은 마을을 벗어나면 사라지지만, 사고의 흐름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런데, 사람이 백팔십도 변했네.”
24시간 진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던 엘리스였다.
하지만 여정을 시작하고, 이제는 진한에게 붙어있는 모습을 보기가 더 어려워졌다.
습관적으로 진한에게 다가가려다가, 도중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멀리 떨어지는 모습은 제법 볼 만한 구경거리였지만,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 뒈질 때가 되면 변한다던데.”
메이첸의 말에 마법사 K는 피식 웃었다.
“메이첸은 죽기 전에 어떨지 참 궁금하네요. 상스러운 아가리 좀 닥치고 가시려나.”
“난 신사답게 뒈질 거야, 신사답게. 깔쌈하게. 너야말로 궁금하네. 구렁이 새끼마냥 능글대던 새끼가 뒈질 땐 어떠려나.”
“전…… 글쎄요.”
마법사 K의 말을 끝으로 둘의 대화는 끊겼다.
평소라면 둘이 정답게 얘기를 할 일도 없었겠지만, 근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여정은 너무도 지루했다.
차라리 질투 마을에 있을 때가 편했다.
마을 특성 때문에 불쾌하긴 해도,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
재미 중 으뜸이 불구경이랑 싸움구경이라는데, 질투 마을은 싸움구경 만큼은 실컷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꽤 괜찮은 파티네요.”
사냥개는 진한의 옆으로 따라 붙으며 말을 건넸다.
그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진한에게 내밀었다.
“쌍대에요. 보니까 담배도 다 피신 것 같던데.”
마지막으로 마을에 들린 것이 이주 전이었다.
식료품을 사는 양이 많아 평소처럼 담배를 챙기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진한은 담배를 건네받았다.
뒤에서 메이첸이 뭐라, 뭐라 지랄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둘은 가뿐히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불화가 없네요. 부러워요.”
사냥개가 말한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질투 마을에서는 어떻게든 불화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연인에 대한 질투와 잘난 사람에 대한 시기심은 누구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것을 잘 조절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하지만 진한 일행은 엘리스를 제외하고서는 전혀 불화가 없었다.
이것은 마법사 K와 메이첸이 엘리스에게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았다는 사실과, 서로를 시기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진한은 피식 웃으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냥개의 생각만큼 그렇게 아름다운 관계들은 아니었다.
메이첸은 몰라도 마법사 K는 저 잘난 맛에 사는 놈이었으니, 시기심이라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놈이었다.
메이첸은 엘리스를 그나마 오래 봐왔지만, 엘리스가 워낙 미쳐 있어서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다.
사냥개는 신규 슬레이어 시절부터 쭈욱 질투 마을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그건 앞으로 몇 년간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질투 마을의 특성의 효과를 많이 봐왔다.
그녀에게는 질투 마을의 특성이 작용하는 파티가 일반적인 파티일 것이다.
남녀 문제, 시기심으로 갈라지고 대척하는 집단이 그녀가 겪어온 일반적인 집단이었다.
물론 추적꾼이 되어 밖을 나다니며 여러 집단을 만나 봤겠지만, 어느 집단에고 있는 것이 남녀 문제와 잘난 사람에 대한 시기심이었다.
질투 마을에서 지낸 그녀는 당연히 그런 부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초점이 그쪽으로 맞춰졌을 것이다.
반면 진한의 파티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저 꼬마 아가씨만 풀어주면 될 것 같네요.”
사냥개의 말에 진한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과 함께 뿌연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냥개, 그러니까 제니는 진한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시간만 충분히 가진다면 엘리스의 마음을 풀기는 가능했다.
하지만 진한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엘리스의 감정을 알게 된 이상,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저 아가씨, 더즌 헬에 온지 얼마 안 됐죠?”
사냥개의 질문에 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눈에 봐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엘리스는 어수룩했다.
그리고 감정 표현에 솔직했다.
노련한 슬레이어라고 모두 다 진한처럼 감정을 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리스처럼 솔직한 슬레이어는, 아니 사람은 드물었다.
“한번 놀아주는 건 어때요? 저만하면 괜찮지 않아요?”
제니의 말에 진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벌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웬만한 일은 다 감당이 가능했지만, 감정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진한도 장담하지 못했다.
“설마 저 아가씨가 평생 진한씨를 좋아하겠어요? 빨리 타는 불일수록 뜨거운 법이에요.”
현대에서도 감정을 장담하지는 못한다.
더즌 헬은 더 심했다.
엘리스가 진한을 따라다닌다고는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고 계속 될 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받아줄 게 아니면 빨리 잘라 내는 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죠.”
사냥개의 말에 진한은 대답하지 않고, 손바닥에 담뱃불을 지져 껐다.
“이야, 이제야 도착했네, 씨발. 징하게 힘들었다.”
그때 뒤쪽에서 메이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주시하니, 마을이 보였다.
“벌써 하룬이네요.”
마스크의 위치로 특정한 세 장소 중 첫 번째 위치였다.
*
백성진은 하룬 마을의 사람들의 정보를 토대로 탐색을 시작했다.
그에게 이런 일은 꽤나 익숙한 일이었다.
주로 혼자 행동하는 그로서는 기본적인 추적술은 필수였다.
한 달 남짓한 간격으로 사람이 실종 된다.
슬레이어인지, 몬스터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백성진은 범인을 슬레이어로 추정하고 있었다.
더즌 헬에는 알려지지 않은 몬스터가 많았지만 그의 지식범위 내에서는 이런 행동 패턴을 가진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범인이 슬레이어라는 쪽으로 무게추를 두기로 했다.
‘한 달이라. 우선…….’
주기적으로 사람을 납치한다는 것은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간혹 사람을 먹는 슬레이어도 있으니, 그쪽으로도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마법사였다.
일반적인 슬레이어들이 몰라서 그렇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체 실험을 하는 마법사들이 적은 편이 아니었다.
이것은 주민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었다.
몬스터의 소행인 듯해도 막상 닥치고 보면 슬레이어들의 소행인 경우가 많았다.
주민들에게는 몬스터보다 슬레이어들이 더 위험한 존재였다.
‘마법 물품, 재료, 식료품.’
우선 백성진은 범인을 슬레이어로, 그것도 인체 실험을 하는 마법사로 특정 지었다.
재료나 식료품은 몰라도 마법 물품 같은 경우는 옮기는 데에 제약이 많았다.
백성진은 몇 군데 위치를 특정 짓고 걸음을 옮겼다.
*
동굴 속 실험실, 마스크는 신경질적으로 메스를 집어 던졌다.
“이 씨발! 좆같은 영감탱이!”
수술대 위에는 하반신을 잃은 시체가 놓여 있었다.
아니, 시체가 아니었다.
허리 아래로는 달려있는 것이 없었지만,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몸 곳곳에는 채 풀리지 않은 실밥과 살을 이어붙인 듯 흉터가 남아있었다.
“이 좆같은 실험을 얼마나 더……! 아, 이 씨발.”
마스크는 단상 위에 있는 실험체를 바라봤다.
분명 살아있는 듯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했지만 눈동자는 흐리멍텅하게 죽어있었다.
마스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실험은 키메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과 몬스터 혹은 몬스터와 몬스터의 결합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과 인간의 결합은 어렵지 않은 수술이었다.
자신의 몸 자체도 그런 결합을 통해 강화시킨 개조 육체였다.
하지만 인간과 몬스터의 결합은 쉽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체가 몬스터가 될 것이냐, 인간이 될 것이냐의 문제였다.
하지만 주체를 몬스터로 할 필요성은 없었다.
애초에 인간보다 우수한 신체 능력의 몬스터인데 거기에 인간의 육체를 이식해 봐야 어떤 쓸모가 있을까.
그렇다고 몬스터보다 뛰어난 육체를 지닌 슬레이어나 주민을 실험 대상으로 삼기에는 재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로서는 인간을 주체로 몬스터의 육체를 이식해 키메라를 만드는 선택지 밖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의 선택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을 주체로한 키메라를 만들어야 했다.
마스크는 그렇게 명령 받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실험체의 정신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옷같은 영감탱이, 씨발 새끼. 씨발 새끼.”
그는 신경질 적으로 주사기를 꺼내 실험체의 목에 박아 넣었다.
주사기 속 액체가 실험체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흐릿하던 실험체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 어어.”
실험체의 초점이 완전히 돌아 왔을 때, 실험체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낯선 풍경.
수술대와 수술 도구들, 그리고 알 수 없는 마법 물품에 시약들까지.
“씨발, 어때, 정신이 좀 드냐?”
마스크가 킬킬대며 말을 걸었다.
실험체는 시선을 돌려 마스크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하반신을 바라 봤다.
아니, 바라보려 했다.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실험체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으, 으어. 아, 으. 아, 으.”
실험체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하반신을 바라봤다.
“으어! 어! 으! 으어어! 아아아아아! 아악!”
그는 자신의 몸상태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비명을 내질렀다.
“좋아, 좋아. 씨발. 애새끼들 우는 소리보단 이게 훨씬 정겹지.”
실험체의 비명소리는, 마스크에게 있어서 그 어떤 교향곡보다도 정겨웠다.
하지만 마스크가 기분이 좋은 것도 잠시였다.
실험체는 이내 정신을 잃고 픽 쓰러져 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정신을 놔버린 것이다.
“이 씨발!”
마스크는 신경질적으로 수술대를 걷어 찼다.
수술대가 넘어지고, 실험체의 몸뚱이가 동굴 바닥을 굴렀다.
“내가 왜! 이! 좆같은! 실험을! 해야 돼!”
마스크는 실험체의 몸뚱이를 잘근잘근 짓밟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간의 화를 못 이겨 ‘숭고한 희생’의 동료 마법사를 죽여 버렸다.
다음 연구 과제를 정하는 자리였는데, 자신은 육체 개조를 하자고 제시했고, 동료 마법사는 다른 실험을 제시했다.
따로 만나 의견을 나누던 중 대화에 불이 붙었고, 이내 언쟁으로 번졌다.
거기까지는 언제나 있는 일이었다.
동료 마법사가 딱 한 마디만 하지 않았다면, 참고 넘길 일이었다.
‘고자새끼가.’
그 한 마디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는 동료 마법사의 목을 꺾어 죽이고, 그대로 ‘숭고한 희생’을 벗어나 도망쳤다.
그렇게 쫓기고, 쫓기고 계속 쫓겼다.
마법사이면서도, 스킬 숙련도를 실험 쪽으로 맞춘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개조 육체 덕분이었다.
하지만 한계가 곧 찾아왔다.
돈을 노리는 사냥꾼들은 많았고, 그는 혼자였다.
무엇보다 몸이 엉망이었다.
그는 이름 없는 야산에서 추적꾼들에게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자신을 구해주고, 이 동굴까지 안내해 주었다.
처음 동굴의 실험 도구들은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지 녹이 슬어 있었다.
노인은 자신에게 실험을 시켰다.
인간이 주체가 되는 몬스터 결합 키메라를 만들어라.
하필이면 죽인 동료가 제시했던 연구 주제였다.
격하게 반항했으나, 마스크는 결국 노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괴물 같은 노인네…….”
마스터.
소문으로만 듣던 마스터를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노인은 자신의 몸에 제약을 걸어 놨다.
어떤 종류의 마법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특정 조건을 어기면 죽는다.
그날 이후로 마스크는 동굴에 처박혀 하기 싫은 실험을 진행했다.
“씨발, 씨발. 어서, 어서 성과가 나와야 되는데.”
노인이 약속한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한이 다가오면, 노인이 찾아온다.
그는 성과를 내야했다.
============================ 작품 후기 ============================
HYouN우// 짝사랑은 마음아픈 건가봐요 ㅠㅠ 불쌍한 엘리스..
카이마이//언제나 댓글 감사합니다. 카이마이님, 조언 감사합니다. 진한의 5분 카레는 곧 나올 예정입니다.
조회수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군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열심히 쓰는 것밖에 없겠네요.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쓴소리도 많고 단 소리도 많습니다.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한편, 한편 정성껏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실리아가 나오기 전에 외전격으로 실리아의 에피소드를 그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