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사냥개 =========================================================================
열 두 개의 마을은 이미 거대 길드들이 먹어치운 지 오래였다.
이미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했고,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훗날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은 짓밟거나 포섭한다.
이것이 그들이 기득권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회귀 이전 학살자들은 원한 관계도 원한관계이지만, 기득권을 거머쥔 길드들의 견제에 시달렸다.
길드들의 견제는 거세게 몰아치는 폭우 같았지만, 비를 막을 우산이 없었다.
진한은 크라임 타운을 견제를 막아주는 방파제로 삼으려 한 것이다
.
열 두 개의 마을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곳은 많았지만, 그중 크라임 타운이 제일 적합한 장소였다.
“왜, 왜 나입니까?”
혈거인은 허리를 펴고, 진한에게 물었다.
진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장은 혈거인이 은혜에 감사하고 있다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가족이 있으니까.
슬레이어들이 가족의 존재를 숨기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가족은 곧 약점이 된다.
가족의 존재는 유사시에 혈거인의 행동을 제약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행여나 혈거인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그때는 헤나를 쥐고 혈거인을 흔들 수 있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몇 가지만 약속해라.”
“무엇을……?”
“우선은 나중에 내 이름을 대고 오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지켜라.”
진한은 크라임 타운을 훗날의 위험을 피할 은신처로 삼기로 한 것이다.
*
공인 투기장에는 시스템 상점이 있고, 시스템 상점에서는 코인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
공인 투기장에서 코인을 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일반적인 결투로 승리수당을 받는 것이고, 하나는 상대 슬레이어와 ‘내기’를 하는 것이다.
승리수당은 승마다 지급되는 코인이 정해져 있었고, 수당은 결투장의 등급에 따라 차등지급이 되었다.
‘내기’는 말 그대로, 상대 슬레이어와 합의하에 코인을 걸고 내기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해당 등급 결투장의 승리 수당의 2배의 코인을 기본 판돈으로 한다.
하지만 지금의 크라임 타운에는 공인 투기장을 이용하는 슬레이어들이 없었다.
삼파전으로 삼등분 되었던 크라임 타운이 삼파전이 끝나자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라임 타운은 누구도 지배하지 못한다.
이런 생각은 삼파전의 영향으로 깨져버린 지 오래였다.
슬레이어들은 하나, 둘 뭉쳐 파벌을 만들고, 크라임 타운을 지배하기 위해 세력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눈에 띄게 강세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공인 투기장을 사용하던 슬레이어들도 뜻이 맞는 집단에 들어가 세력 싸움에 가세했다.
그때 혈거인이 다시 나타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크라임 타운은 지금 삼파전 이후 제2의 세력싸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공인 투기장을 이용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
공인 투기장에는 ‘시스템 상점’ 말고도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 상점’이라는 것이 있었다.
사실 공인 투기장의 진짜 목적은 ‘비밀 상점’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과거 검은달의 배신자들은 비밀 상점의 ‘열쇠’를 독점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밀 상점’과 ‘열쇠’를 모두 통제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진한이 원하는 아이템은 ‘검’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래서는 투기장을 이용할 수도, 열쇠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진한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여명검수를 통해 당분간 사용할 아이템들은 구했고, 혈거인에게 비밀 상점의 열쇠를 부탁해 놓았으니 크라임 타운에서의 볼일은 끝났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것이 하나 남았다.
바로 마법사 K였다.
“토끼님, 제 자꾸 따라와. 싫어 쟤. 가라 그래.”
진한과 일행은 크라임 타운을 나서고 있을 때, 엘리스가 보채며 진한에게 매달렸다.
“토끼뉘임, 제 자꾸 따라와아. 시뎌어 쟤에 가라 그뤠에.”
마법사 K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엘리스의 말을 따라했고, 그럴수록 엘리스는 진한에게 매달리며 더 심하게 보챘다.
마법사 K는 아직 흥미가 식지 않은 듯 진한의 일행에 끼어 길을 걷고 있었다.
“이 파티에 미친놈은 하나면 족해, 이 미친놈아.”
“맞아, 이 미친놈아. 메이첸 착해, 일루와 뭉뭉이 밥묵자, 밥.”
어찌된 일인지 메이첸이 엘리스의 말에 동조했고, 엘리스는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메이첸에게 내밀었다.
“이런, 미친년이.”
메이첸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담배를 받아 물었다.
그때 마법사 K가 가방에서 종이로 곱게 포장된 물건을 내밀었다.
“이거, 투기장 시스템 상점에서 파는 담배입니다만, 그런 싸구려 피지 마시고 이거 좀 펴보시죠.”
메이첸은 담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코인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따낸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그런 코인을 가지고 담배를 사는 미친놈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법사 K는 그런 미친놈이었다.
“워, 시벌. 내가 받아도 되나?”
“아유, 메이첸. 우리가 초면도 아니고, 앞으로 쭈욱 같이 다닐 건데. 잘 부탁한다고 드리는 겁니다.”
메이첸은 입에 문 담배를 엘리스의 손에 쥐어주고, 마법사 K의 담배를 받았다.
“흠, 흠. 고맙다.”
메이첸은 머쓱하게 담배를 건네받고는 포장을 벗겨 입에 물었다.
그러고 메이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법사 K는 의기양양하게 엘리스를 깔아봤다.
“줏대 없는 메이첸…….”
엘리스는 고개를 획 돌려 마법사 K를 외면했다.
밤이 다가오고, 각자 야영준비를 끝내자 마법사 K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종이로 곱게 포장된 술과 말린 안주였다.
마법사 K의 짐은 이상할 정도로 많았는데, 그중 대부분이 술인 듯 술이 끊임없이 나왔다.
“날씨도 좋은데 우리 술이나 한잔 할까요?”
메이첸과 엘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진한의 눈치만 살폈다.
의외로 진한은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엘리스는 몰라도 메이첸이나 마법사 K는 술 때문에 긴장을 풀 정도로 녹녹한 슬레이어들이 아니었다.
넷은 모닥불 옆으로 둥글게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가장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엘리스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가떨어지게 했다.
엘리스가 술에 취해 주사가 시작되려 하자, 마법사 K는 망설임 없이 마법을 사용해 엘리스를 재웠다.
그 뒤로 잠자리에 든 것은 메이첸이었다.
그는 술이 들어갈수록 말수가 적어졌다.
급기야는 마법사 K가 떠들든 말든 담배만 뻑뻑 피우다가 말없이 자리로 가 잠을 청했다.
자연스럽게 마법사 K와 진한 둘만 남게 되었다.
마법사 K는 더 이상 떠들지 않고,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진한도 이렇다 하는 말은 하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우리 언제 본적 있습니까?”
K의 물음에 진한은 K를 바라봤다.
“없다.”
“그렇군요.”
K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로 가 잠잘 채비를 시작했다.
진한은 그 뒤로도 혼자 술잔을 비웠다.
‘진심의 구슬’이라는 아이템이 있다.
‘진심의 구슬’은 사용자에게 원하는 대상의 기억을 보여주는 아이템이었다.
한 마디로 기억을 엿보는 구슬이었다.
하지만 기억에는 몇 가지 제약이 있었다.
하나는 대상의 기억 중 사용자와 연관된 기억만을 볼 수 있다.
둘은 사용자에 대한 기억 중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만을 볼 수 있다.
일회성에 용도도 불분명해 잘 사용하지 않는 아이템이었지만, 마법사 K는 진한을 처음 만난 날 ‘진심의 구슬’을 사용했다.
원래는 편지만을 남기고 크라임 타운을 떠나려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겁쟁이 곰방대가 알려준 진한은 자신이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미지의 존재였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지만, 진한의 행동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하는 행동.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위험성.
마주친 적이 있는 슬레이어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호기심은 풀고 싶지만, 다시 접근하기는 너무 위험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진심의 구슬’이었다.
만약 이전에 마주친 적이 없었다면, ‘진심의 구슬’은 유니온 해체를 요구한 만남의 장면과 진한의 속내를 보여줄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K의 호기심은 풀리는 것이었으니, K는 망설임 없이 구슬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뜻밖의 장면이었다.
마법사 K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진한을 응시했다.
진한은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전에 만나 적이 없다라…….’
그는 진심의 구슬이 보여준 장면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일행들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슬레이어는 엘리스였다.
메이첸과 마법사 K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숙련자들이었으나, 엘리스는 아니었다.
타고난 재능에 더불어 유니크 클래스 ‘균열의 마법사’를 얻었다지만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비록 실리아에게 교육을 받았다지만, 전투의 경험이 없었다.
정신계 마법사들은 숙련도를 높이기 쉽지 않았다.
숙련도를 위해서라면 몬스터 보다는 지적 생명체에게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길드간의 항쟁이 아닌 이상에야 충분할 정도의 전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크라임 타운에 남아있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겠지만, 진한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토끼님, 엘리스 다리아파.”
최근 들어 엘리스의 상태가 조금 모호했다.
정확히는 ‘균열의 마법사’로 전직한 이후부터였다.
여전히 ‘토끼’에 집착하고 있긴 했지만 조금 달랐다.
옛날에는 ‘진한’이 아닌 ‘토끼’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토끼’가 아닌 ‘진한’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미친년이었지만, 진한은 그 차이를 확실히 인지했다.
밥 먹을 때, 잠잘 때는 물론 샤워할 때나 심지어는 화장실 갈 때도 엘리스는 ‘토끼’가 없으면 불안해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진한은 엘리스의 정신이 돌아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더즌 헬에 적응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말이었다.
만약 무고한 슬레이어가 있다 했을 때, 그를 죽이라 한다 치자.
일반적인 슬레이어들은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필요성이 추가된다면, 슬레이어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그 슬레이어가 죽을 만한 이유가 있냐, 없냐 혹은 죄를 지었는가 짓지 않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럴 필요성이 있는가, 없는가 이 차이였다.
하지만 만약 엘리스에게 조금이라도 제정신이 돌아왔다면 엘리스는 그런 행위에 대해 심각한 거부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엘리스는 기본적으로 ‘현대인’이었다.
그렇기에 진한이 선택한 것은 현상금 사냥꾼이었다.
‘현대인’의 기준에서도 죽을 만한 이유가 있어 현상금이 붙은 슬레이어들부터 사냥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진한 일행은 질투마을에 들어섰다.
*
“씁, 하필 질투 마을이냐.”
메이첸은 질투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특성이 믿음, 불신, 배신이었던 배신마을과는 달리 질투 마을의 특성은 단 하나였다.
말 그대로 질투.
연인 사이의 질투와 더불어 자신보다 잘난 사람에 대한 시샘이 극대화되는 곳이었다.
자신보다 잘난 놈은 가만 두고 보지 못하고, 연인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된 동성들을 가만 두고 보지 못했다.
마을의 특성은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배신 마을에서야 셀리나가 규합시킨 페어리문 내에서 머물렀기에 마을의 특성을 느낄 틈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심심하긴 않겠네요. 재밌는 꼴 참 많이 보는 마을이니까.”
마법사 K는 흥미롭게 마을을 둘러봤다.
슬레이어들이 꽤 지나다니고 있었는데, 더러는 남녀 사이에 언성을 높이고 싸우는 모습이 꽤나 보였다.
다른 마을 같았으면 사람들이 모여 구경했겠지만, 질투 마을은 일상인 듯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각자의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너는 행동 조심해야 쓰겠네, 미친년이 미쳐 날뛰는 꼴 보기 싫으면.”
메이첸이 진한을 보며 말했다.
지금 일행 중 최고의 위험인자는 바로 엘리스였다.
진한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질투마을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현상금이 걸린 슬레이어들을 잡기 위해서는 길잡이가 필요했다.
추적에 능통한 슬레이어.
질투 마을에는 사냥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