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34 혈거인 (34/40)

00034  혈거인  =========================================================================

*

풀지 못하는 저주란 없었다.

십이 군주와 연관된 저주가 아닌 이상에야, 모든 저주에는 해결 방법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저주에 정통한 슬레이어가 몇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슬레이어는 남쪽 마녀였다.

그녀는 주로 저주를 거는 의뢰를 받았지만, 저주를 푸는 데도 능통한 슬레이어였다.

저주를 거는 것은 쉽지만, 푸는 것은 거는 것의 배는 수고가 들어갔다.

‘과연…….’

혈거인은 진한을 안내하면서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한에게서 엘릭서를 강탈하고 싶었으나, 그 뒤로 따라오는 세 명의 슬레이어 때문에 시도를 포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사 K 때문이었다.

마법사 K를 상대하는 것은 상성 상 어렵지 않았으나, 다른 슬레이어들의 수준을 가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호의를 베푸는 이의 등에 칼을 꽂는 것은 언제나 불쾌한 일이었다.

물론 헤나의 목숨이 걸려있다면, 언제든 웃는 낯을 으깨버릴 수 있는 그였지만 혈거인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진한은 병상에 누운 소녀를 살펴봤다.

학살자는 성역의 지배자뿐만 아니라 여러 길드들과 항쟁을 치러왔다.

애초에 처음 학살자라는 이름 자체도 그들이 지은 이름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작은 파티로 시작했던 모임이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학살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학살자 길드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여 있었고, 그만큼 원한관계도 많았다.

더즌 헬의 주 마을인 열두 마을을 들를 때면, 원한관계 때문에 반수 이상의 학살자들이 마을 밖에서 대기를 해야 할 정도로 그 원한 관계는 넓고 뿌리 깊었다.

그렇기에 학살자 길드가 성역의 지배자를 누르기 전까지는 많은 길드와 집단을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학살자들은 한명, 한명이 자신의 분야에 정통했던 스페셜리스트들이었다.

상대 입장에서는 가만 두기는 거슬리고, 없애자니 출혈이 너무 큰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럴 때 가장 손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되었는데, 하나는 고용인을 부리는 것이고 하나는 바로 저주마법이었다.

그렇기에 학살자 길드원들은 본의 아니게 저주 해독에 능통해져 있었다.

“저주 마법 해독에도 조예가 있으신가봅니다?”

마법사 K는 소녀를 살피는 진한에게 물었다.

그는 흥미가 생기는 것들은 모조리 건드리고 보는 성격이었는데, K에게 저주는 꽤 흥미로운 분야였다.

상성이 맞지 않아 금세 포기해버렸지만, 어느 정도 눈대중은 하는 수준이었다.

진한은 대꾸하지 않고 헤나의 상태를 살펴봤다.

대부분의 저주 마법사들은 하나 혹은 두서너 가지의 저주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는데, 제대로 된 저주 마법사는 세 개 이상의 저주를 복합적으로 사용했다.

학살자들이 당했던 저주 마법 역시 세 가지 이상의 저주가 결합된 복합 마법이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복합 저주 마법을 풀기 위해서는, 각 저주의 속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학살자 길드원들은 편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독제독.

저주에는 저주.

복합적으로 사용된 저주마법은 기이한 균형을 이루며 대상의 몸을 갉아 먹는다.

원리는 간단했다.

그 균형을 깨주면 되는 일이었다.

저주 마법사들이 들으면 게거품을 물 정도로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학살자들은 성공했다.

물론 서로의 몸을 대상으로 한 무수한 인체실험이 뒤따랐지만, 어쨌든 그들은 성공했다.

하지만 간단한 방법은 아니었다.

균형을 깨트리는 순서, 회복해야 하는 타이밍 등등.

진한은 재료아이템을 꺼내 헤나에게 걸린 저주의 속성을 분류했다.

“하나, 둘, 셋…….”

무려 다섯 가지의 저주가 결합되어 있었다.

“어떻게…… 가능 하시겠소?”

혈거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한은 펜과 종이를 꺼내고 속성의 상관관계를 계산했다.

혈거인과 오두막 안에 모인 사람들은 숨죽인 채 그 과정을 지켜봤다.

가뜩이나 좁은 오두막이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진한이 펜을 내려놨다.

“어떻게……. 어떻게 됐소?”

진한은 대꾸하지 않고 종이를 내려다 봤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저주 마법의 해독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정통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한 사람이 기억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양이었다.

그래서 학살자들은 속성의 조합별로 해독법을 서로 나눠 외웠다.

진한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성냥 한 개비를 더 꺼내 종이를 불태우고는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진한의 시선이 잠시 K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

혈거인은 진한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진한은 말없이 혈거인의 손을 잡으며 두 개의 유리병을 쥐어줬다.

“엘릭서…… 써라.”

생명수와 영혼수였다.

진한은 허리를 숙여 보따리를 들고,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재료 아이템은 여기 있다.”

진한은 그 말을 끝으로 오두막을 나섰다.

혈거인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진한의 뒷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헤나에게 걸린 저주 마법은 진한이 외운 해독법으로는 풀 수 없는 저주였다.

진한이 밖에서 담배를 피고 있을 때, 메이첸이 슬그머니 따라 나와 진한의 옆에 자리했다.

“알고…… 있었냐?”

메이첸의 물음에 진한은 흘끗 그를 응시했다.

“여명검수, 아들. 알고 있었냐고.”

대답 없는 진한에게 메이첸이 물었다.

진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첸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대략 다섯 개비 정도 피웠을 때 즘이었다.

“그럼 크라임 타운은…….”

‘왜 온 거냐.’라는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메이첸.”

“……?”

“닥치고 좀 들어가라. 징징대지 말고.”

메이첸은 놀란 눈으로 진한을 응시했다.

평소에 무신경하고, 무뚝뚝한 진한이었지만, 오늘처럼 날이 선 모습은 처음이었다.

메이첸은 영문도 모른 채 벙찐 얼굴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진한은 메이첸이 들어간 후로도 연달아 서너 개비의 담배를 태워버렸다.

애초에 크라임 타운에 온 목적은 엘릭서가 아니었다.

메이첸은 혼자 멋대로 오해를 한 것 같지만, 진한은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엘릭서를 얻으러 왔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혈거인의 딸이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도 알았고, 어지간한 저주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저주는 수법도 다양해지고, 그에 따라 해독법 역시 다양해진다.

병과 같았다.

과거엔 죽을병이었던 것이 현대에 이르러선 별거 아닌 병이 되듯 저주 역시 그러했다.

진한이 알고 있는 저주 마법에 대한 지식은 꽤나 방대했다.

하지만 헤나에게 걸린 저주는 진한이 손댈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물론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도를 해보기에는 헤나의 몸 상태가 너무도 위중했다.

엘릭서는 한 병으로 살릴 수 있는 생명은 하나.

그건 일종의 법칙이었다.

도박을 하느니, 차라리 엘릭서를 사용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진한은 쓰린 속을 달래야 했다.

애초에 가능성이 없었다면 모를까, 헤나의 저주는 회귀 이전 진한이 본 적이 있는 저주였다.

그가 아까워했던 이유는 여기 있었다.

진한은 다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헤나에게 걸린 복합 저주의 해독법은, 회귀 이전 마법사 K가 외웠던 부분이었다.

딸이 눈을 떴다.

“아……빠?”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다시는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한 마디였다.

“아빠, 울어……?”

아버지의 눈가는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딸은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지 오두막을 둘러보고, 아버지를 바라봤다.

“좋은…… 꿈이다. 그치, 아빠.”

딸은 자신의 몸 상태가 나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꿈이라 여기는 듯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너무 아프고 힘들었어. 그래도……. 그래도, 아빠 보니까……. 너무 좋다.”

웃으며 말하는 딸아이의 눈시울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아버지는 입술을 깨물고, 딸에게 손을 뻗었다.

가늘게 떨리는 투박한 손이 딸에게 닿으려는 순간, 딸은 뒤로 물러났다.

“미안, 미안해. 나 아직 깨고 싶지 않아요. 나 지금 너무 좋아요. 아빠가 옆에 있고, 옆에 있고……. 이렇게, 이렇게 아빠가 옛날처럼, 내 옆에 있고…….”

딸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딸은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딸의 행동에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을 삼켰다.

아버지의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 작고 여린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아이가 두려움에, 고통에 떨고 있을 때 아버지는 곁에 없었다.

그게 너무 미안했다.

사무치게 미안했다.

이 작고 여린 아이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이 꿈이라 여기는 것이다.

“아빠,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아니다, 아니다 나의 딸아.’

아버지는 말을 삼켰다.

입을 뗄 수 없었다.

지금 입을 떼면, 울어버릴 것 같아서 입을 뗄 수 없었다.

이 좋은 날, 울어버리면 얼마나 꼴사나울까.

아버지는 입을 떼지 못했다.

“이제, 이제 편하게……. 편하게 살아요. 아빠. 아빠. 아빠. 미안…… 해요.”

‘딸아, 내가 너를 두고 어떻게 편할까. 너는 내 세상의 전부란다.’

아버지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작고 여린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밤이 너무……. 무서웠어. 옆에 아빠가 없어서, 많이 울었어. 근데, 근데 괜찮아요. 그래도, 그래도…….”

딸은 천천히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아버지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그래도, 그래도. 꿈이라도……. 마지막에 꿈에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아빠.”

딸은 아버지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는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딸을 마주 안았다.

작고, 여린 아이였다.

지금도 품에 쏙 들어오는, 가냘픈 아이었다.

그런 아이가 매일 밤 혼자,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빠,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빠. 죄송해요. 죄송해요. 사랑해요.”

아이는 뭐가 그리 죄송한지, 죄송하다, 죄송하다, 용서를 빌었다.

“헤……나야. 꿈이 아니……야.”

아버지는 끝내 입을 열었고,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두 부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

혈거인의 딸이 회복되고, 며칠이 지났다.

“고맙소.”

혈거인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진한에게 인사했다.

진한은 대꾸하지 않고 혈거인을 바라보았다.

“이 은혜는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혈거인은 허리를 들지 않은 채 진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절망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해가 떠도 밤은 끝나지 않았고, 뭔가를 먹어도 모래를 씹는 듯 했다.

결국 끝이 났는가 싶었을 때, 진한이 나타났다.

엘릭서가 목표라 여겼지만, 엘릭서를 딸을 위해 사용해줬다.

그 감사함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고, 물질로는 보답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무엇이든 다 하겠소.”

하지만 혈거인은 알았다.

더즌 헬에는 결코 이유 없는 호의는 없었다.

상대는 자신에게 엘릭서를 건넸다.

혈거인은 많은 슬레이어들을 만나봤다.

눈앞의 남자는 결코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 남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혈거인이 감사하는 이유는, 엘릭서의 가치보다 헤나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무엇을 가져가려 하든, 요구하는 것이 헤나만 아니라면 기꺼이 내줄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엘릭서의 가치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없었으니, 목이라도 내달라면 내줄 수 있었다.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엘릭서에 대한 채무를 갚을 수만 있다면, 그럴 용의가 있었다.

일방적인 호의는 언젠가 올가미가 되어 목을 죈다.

감사함을 떠나서, 딸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엘릭서의 가치를 갚아야 했다.

진한은 무표정한 눈으로 혈거인을 바라봤다.

크라임 타운행에 있어서 엘릭서는 얻으면 좋고, 얻지 못해도 아쉬울 것이 없는 부가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았다.

진한 역시 사람인지라, 아낄 수 있었던 엘릭서를 사용한 데 있어서 속이 쓰리긴 했지만 얼마든 감당할 수 있는 손실이었다.

애초에 크라임 타운에서 얻으려는 아이템은 엘릭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아이템조차도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네가 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혈거인은 진한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크라임 타운을 지배해라.”

진한의 목적은 혈거인이었다.

크라임 타운을 지배자가 된 혈거인, 그것이 이번 여정에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 작품 후기 ============================

저매인// 헬 슬레이어가 그렇게 다크한 작품은 아니에옇ㅎㅎ 막 다 죽고 그러진 않아옇ㅎ

카이마이// 넵, 그 부분 살짝 넣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여명아재는 음... 짠하죠.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짜인 케릭터였습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구상단계부터 여명아재의 아들이 죽어있는 걸 전제로 짜인 에피소드였습니다..ㅠㅠ..... 우리 여명아재..

Leir// 감사합니다!!! 사실 진한이 너무 비정해 보일까 걱정되었는데, 끝까지 참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흑월접// 기본적으로 나쁘진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케릭터라고 생각합니다.

HYouN우//엘릭서는 얻지 못했습니다... ㅠㅠ... 그리고 혈거인 딸은 혈거인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서 손댈 수 없습니다..

제망량//사이다!! 크으... 감사합니다. 그리고 진한의 성향이 악인 이유는 직업과 연관성이 큽니다. 직업이 아니었다면 중립이었겠지만, 직업적 특성때문에 성향이 악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매이나// 처음인거같죠....? 착한일 한게....

이번 편도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부디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트북이 햇수로만 6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삐걱대긴 해도, 재부팅 해주면 잘 돌아갔는데, 이제는 무한부팅이 되네요.

F8누르고 무슨 모드로 해서 겨우겨우 썼습니다..

부팅하고 기다리기만 한 서너시간 한 것 같습니다.

이놈도 이제 놓아줄 때가 된 걸까요.

혹시 몰라 소설자료 다 백업해 놓긴 했는데, 부디 조금만 더 버텨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편은 개인적으로 좀 훈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훈훈하지여???????????????????????????????

dozen 바로 그 더즌이 맞습니다. 열두개.

.....제목이 안티... 흑...

이번 편에서 진한이 살짝 허당끼가 나왔네요.

회귀했지만, 모든 부분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닌것같습니다.

메이첸은 여전히 찬밥신세군요.

크라임 타운의 지배자 혈거인을 얻기 위해 왔다는 진한!

과연 그가 구하려는 아이템은 무엇인가!

회귀 이전 검은달의 배신자들이 독점했던 '어떤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엘리스는 도대체 언제 강해질 것인가...............

뿅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