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3 혈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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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버지는 전쟁을 벌였다.
이미 승자와 패자는 갈렸고, 그 차이는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명확했다.
그러나 승자는 안심하지 못했고, 패자는 주저앉지 않았다.
두 아비는 결코 안심할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그 어깨엔 제 목 하나만 붙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헤나, 헤나, 오 나의 헤나…….”
한 아비가 딸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찢기고, 불타고, 베이고, 문드러진 육신이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다.
콰칙.
쉴 새 없이 달려왔던 몸뚱이가, 드디어 고장이 난 듯 파열음을 내질렀다.
팔뚝으론 쇠창살이 뚫고 나오듯 허여멀건 뼈가 튀어나왔다.
“헤나야, 헤나야.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갈게.”
하지만 아비는 고통을 모르는 듯 결코 멈추지 않았다.
마법사가 사용한 마법이, 아비의 어깨를 짓눌렀다.
제 한 몸 지탱하기도 벅찬 다리에, 열배는 됨직한 체중이 실렸다.
뼈가 우득, 우드득하고 고통에 신음했으나, 아비는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한 걸음 나아갈 때 마다 서너 개의 쇠붙이가 몸을 파고들고, 마법이 온몸을 강타했다.
상처에선 저주로 썩은 진물이 흘러나오고, 몸은 문드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비는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았다.
아비의 눈으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골통을 바수고, 다시 손을 뻗어 목을 꺾었다.
‘아빠, 사랑해.’
‘아빠, 그게 뭐야. 넥타이 좀 똑바로 메.’
‘이 나이에 아빠랑 손잡고 다녀? 창피해.’
‘칠칠맞게 또 우산 잃어버리고 왔어?’
‘아빠, 담배 좀 끊으면 안 돼? 냄새나.’
‘아빠! 어버이날 축하드려요! 사랑해요.’
밝고, 근심 없는 소녀는 그의 보물이었다.
‘여긴 어디야? 아빠, 무서워…….’
‘아빠, 우리, 우리 그냥 아무도 없는 데 가서 살자. 응? 무서워 아빠.’
세상에는 신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작고 여린 아이에게, 이 가여운 아이에게 이런 불행을 주실까.
그래도 그는 매일 밤 기도했다.
내 딸만은, 이 작은 아이만은 행복하게 해주소서.
설령 기도를 들어주는 존재가 악마라 해도, 그는 기도했다.
‘아빠, 아파, 아파, 아파. 너무 아파, 아빠. 아빠.’
‘아빠, 미안해. 미안해. 나 너무 아파.’
‘아빠 나 너무 힘들어 차라리……. 아니야, 아빠.’
그는 딸의 부탁이 무엇인지, 딸이 삼킨 말이 무엇인지 알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그는 기도하기를 그만뒀다.
‘다녀오세요. 저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아빠.’
‘아빠, 그냥, 옆에 있어주면 안 돼? 나…….’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 아빠……. 아빠아……. 차라리 나…….’
‘아빠, 나 부탁이 있어.’
‘차라리, 차라리, 아빠, 차라리…….’
‘나 때문에 아빠가 고생 하는 거 싫어, 차라리…….’
딸이 말을 삼키는 횟수가 많아졌고, 그런 날이면 그는 가슴을 쥐어 뜯어야 했다.
심장이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신이시여, 차라리 저 고통을 제게 주시옵소서.
그는 다시 신을 찾았다.
하지만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아빠, 차라리, 차라리 죽여줘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차라리 아빠 손으로, 아빠. 죽여줘요. 너무 힘들어.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죄송해요, 아빠. 너무 힘들어. 죽여줘. 아빠. 죽여줘. 아빠, 부탁해요. 죽여주세요.’
딸이, 처음으로, 삼켰던 말을 온전히 내뱉었다.
그의 세상은 무너졌다.
갈가리 찢어진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고, 진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썩어문드러진 속으로, 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딸아, 아빠만 믿어. 아빠만 믿어.”
그는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이 어깨만이, 이 두 다리만이 그의 보물을 지킬 수 있었다.
빛을 잃은 보물에게, 날개를 다친 어린 새에게, 빛을 찾아주고, 새 날개를 줄 수 있었다.
그의 촛불이 꺼지지 않는 한, 그는 활활 타오를 것이다.
그는 지금 불타고 있었다.
“…….”
여명검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혈거인.
검은달의 수장.
미친놈 중에 미친 슬레이어.
포악하고 흉악한 범죄자.
그를 수식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어떤 것도 오늘의 그를 표현할 수 없었다.
피 칠갑 된 혈거인은 자리에 땅에 두 무릎을 대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여명검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의 손에 죽어나간 슬레이어만 해도 두 자릿수는 넘고, 세 자릿수에는 못 미칠 듯 보였다.
지금도 혈거인은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헤나……. 헤나야아아아아아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혈거인을 보며, 여명검수는 이를 악물었다.
혈거인에게도 엘릭서를 얻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지만, 여명검수는 결코 엘릭서를 포기할 수 없었다.
여명검수는 혈거인에게 다가갔다.
이미 힘을 잃은 혈거인이었다.
단 일 검이면 혈거인은 목 잃은 시체가 될 것이다.
여명검수는 한 걸음 내딛었다.
여명검수는 검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달은 모습을 감추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파리한 날붙이가 햇빛을 받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만…… 끝냅시다.”
여명검수의 검이 혈거인의 목을 잘라냈다.
아니, 자르려 했다.
싸구려 칼이 여명검수의 검을 막아냈다.
그의 검이 싸구려 칼에 반절이상 박혀 들어갔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딱 반절이었다.
여명검수는 시선을 옮겼다.
손, 팔뚝, 팔꿈치, 어깨 마침내 칼의 주인을 바라봤다.
“……진한.”
진한은 평상시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마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했는지 관심이 없다는 듯 제 삼자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칼을 거두시오.”
여명검수는 진한을 보며 말했으나, 진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진한의 시선이 혈거인에게 옮겨졌다.
“진한, 다시 말하겠소. 물러나시오.”
진한은 말없이 칼을 거두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명검수는 다시 혈거인을 죽이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다.
“아들, 얼굴을 본지는 얼마나 됐지?”
진한의 말에 여명검수는 검을 멈추었다.
“아들이 살아있는 걸 눈으로 확인한 적이 있나?”
“……그게 무슨 말이오?”
여명검수는 불안한 눈빛으로 진한을 바라봤다.
“당신, 당신 설마…….”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들고 있었다.
진한은 아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자신을 찾아왔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아들의 존재를 알았으며, 왜 자신을 찾아왔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했다.
크라임 타운으로 오기 전에, 진한은 아들을 만났다.
진한은 자신의 아들을…….
“크, 크리스는 잘 지내고 있답니까? 진, 진즉에 말을 했으면…….”
그는 안 좋은 생각은 집어 치우고, 진한을 바라봤다.
여명검수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지.”
“하, 하하. 그, 그렇지요. 잘 지내고 있겠지요. 그, 그놈이 많이 마르긴 했어도, 저를 닮아서…….”
“이런 말로만 안부를 전해들은 지 몇 해가 지났지?”
“진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안!”
여명검수는 비명인지 절규인지 분간이 안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진한은 말없이 담배를 쭉 빨아들였다가, 내쉬었다.
쾌쾌한 연기가 아침 공기를 불쾌하게 버려 놨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네가, 네가 크리스를……!”
여명검수는 진한을 보며 돌아섰다.
그는 검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취했다.
“나는 묻고 있는 것뿐이다. 아들을 본 지 얼마나 되었으며, 저런 안부만 주고받은 게 몇 해인지.”
“죽였어? 크리스를? 네가? 네가? 네가?”
“아니, 나는 그 아이의 얼굴도 모른다. 그리고…….”
진한은 담배를 쭉 들이마시고는 연기를 내뿜었다.
“죽은 아이를 어떻게 다시 죽이나.”
여명검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여명검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 진한, 장난은, 장난은 그만, 그만 치시오.”
“확인해 본 적 있나? 심부름꾼에게, 그 집에 가족이 몇인지 여인은 어떻고, 그 자식은 어떤지 물어본 적 있나?”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과 아내, 아들과의 관계가 들통 날까 염려되어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물어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몇 해 전인가 폭우가 심하게 몰아치던 밤, 그 이후부터 그는 기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불안감을 확인할 수 없었다.
홀로 아들을 간병하는 아내를 의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저 편지로만,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았다.
“영상기록 수정구를 보내, 아들의 얼굴을 확인해 본 적이 있나?”
꽤 비싸긴 하지만, 여명검수가 못 구할 정도의 가격은 아니었다.
여명검수는 입을 열지 못했다.
‘크리스가 많이 안 좋아졌어요. 약값이 모자라 보태야 했어요.’
영상기록 수정구를 보냈을 때, 아내가 보내온 편지였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가슴속 깊이 묻어둔, 꾹꾹 눌러 숨겨놓은 추악한 불안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애써 외면했던 것들이, 하나, 둘 튀어나오고 있었다.
“심부름꾼은 누굴 썼지?”
진한의 물음에도 여명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닐 거야. 아냐. 아냐. 아냐. 아냐.”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고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이 자리에, 한 번이라도 여명검수의 심부름을 해본 사람이 있나?”
진한의 물음에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때 한 슬레이어가 앞으로 나섰다.
“머, 멀리 가는 심부름은 고용인을 씁니다.”
“고용인을 데려와라.”
혈거인은 어느새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상처가 엄청났지만 내구력 능력치가 얼마나 높은지 숨은 붙어있었다.
진한은 혈거인을 챙겨 자리를 벗어났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슬레이어는 고용인을 데려 왔고, 여명검수는 진한이 보는 앞에서 고용인과 대면했다.
그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울음소리가 크라임 타운에 울려 퍼졌다.
*
회귀 이전에 여명검수가 혈거인에게 패배했던 이유.
혈거인이 자식의 목숨을 쥐고 협박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슬레이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혈거인은 슬레이어이기 전에 아버지였다.
혈거인은 여명검수에게 정보를 흘렸을 뿐이다.
진한이 했던 것과 같이, 그저 정보를 흘렸을 뿐이고 여명검수는 아들의 죽음을 알아챘다.
전쟁이 길어져 아들이 죽은 것이라면 혈거인이라도 원망할 진데, 아들이 죽은 것은 삼파전이 발생하기 전이었다.
애초에 엘릭서를 위한 삼파전은, 베가본드와 검은달의 전쟁은 무의미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여명검수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급기야 망상에 망상을 거듭해, 증오의 화살을, 원망을 혈거인에게 돌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베가본드의 패배로 끝나고, 혈거인 역시 배신자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은 혈거인을 농락하던 중, 혈거인을 찾아온 수하를 잡아들여 딸의 존재를 알아채고, 혈거인의 좀비가 된 혈거인의 딸을 혈거인의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 죽였다.
회귀 이전 크라임 타운에선 꽤나 유명한 얘기였다.
크라임 타운을 장악한 검은달의 수뇌부들은 딱히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자랑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녔다.
그들에게 그 사건은 일종의 훈장이자, 무용담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전혀 달라졌다.
검은달은 무너지고, 여명검수는 죽지 않고 아내에게 돌아갔으며, 생명수와 영혼수는 진한의 손에 들어왔다.
“나를 왜 살렸나.”
진한은 정신을 차린 혈거인을 보며 담배를 건넸다.
혈거인은 담배를 건네받고는 불을 붙였다.
그의 표정은 꽤나 담담했다.
정신을 잃기 전, 진한과 여명검수의 대화를 들었다.
왜 마법사 K가 갑작스럽게 사라졌는지, 유니온이 해체되었는지, 베가본드에서는 왜 장비를 구하고, 회복, 저주는 물론 재료아이템을 구하려 했는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은달은 유니온의 해체에 당황했지만, 베가본드는 대응이 미흡했을 뿐이지 미리 알고 있는 듯 침착했다.
연관이 없는 사건이 계속되면 무언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검은달의 슬레이어들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낯선 이방인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 혈거인은 이방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으나, 전쟁의 양상이 급박하게 돌아가 신경을 쓸 경황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알았다.
이방인들이 크라임 타운에 방문한 이유.
“엘릭서를 얻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진한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반 개비의 담배를 피울 때 즈음, 진한의 입이 열렸다.
“딸, 내가 살려주지.”
그 말에 혈거인은 입을 열지 못했다.
“일어날 수 있다면 당장 가지.”
진한은 대답을 듣지 않고 나섰다.
============================ 작품 후기 ============================
Leir // 혈거인과 철거인은 별칭만 비슷합니다.//(31화)둘다 치료는 안되버렸네요..
HYouN우 // 움.. 어떻게 될 지는 다음 편에 공개됩니다!! 와아아!!! 그리고 엘리스는 귀욤귀욤해여!
카이마이// 깜짝놀랐습니다. 처음엔 그런 방향으로 스토리를 구상했었습니다만, 지금의 스토리대로 진행했습니다. 새벽에 댓글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네요.
(31화)길치곰// 음.. 깡소주는 안마십니다... 혼술은 즐겨마시죠..
(31화)매니아//진한이 사이코패쓰는 아닙니다. 무정하긴 하지요. 음... 좀 애매하긴 하지만, 진한한테도 정도라는 게 있기 때문에! 그런건 아닙니다!
이번편도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작가의 리리댓을 바라시는 분들은 댓글 앞에 #을 붙여주세요.
하지만 앞으로의 스토리에 연관된 내용들은, 즉 스포성 있는 질문들은 살짝살짝 피하겠습니다!
이번편은 엘리스가 안나왔네요!
여명검수는 처음부터 저런 운명으로 짜여진 케릭터였습니다.
그리고!
#은.... 최신화에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눈에 보이는 데로 답글을 해드리겠지만..... 최신화가 아닐 때는 누락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작가가 확인을 못하는 것 같다 싶을 때는! 쪽지를 주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감삼이 되시길 바라면서!!!!!!!!!!!!!!!
여기서 잠깐!!!!!!!!!!!!!!!!!!!!!!!!!!!!!!!!!!!!!!!!!!!
@@@@우선 25일 연재는 아쉽지만 2편으로 마감!합니다.
@@@@그리고 26일부터는 00:00분에 업로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