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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2 혈거인 (32/40)

00032  혈거인  =========================================================================

*

“드디어 끝입니까?”

진한과 메이첸, 엘리스가 베가본드의 본거지를 나설 때, 마법사 K가 따라 붙었다.

그 역시 등 뒤에 짐을 메고 있었다.

누구도 마법사 K에게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지만, 그는 알아서 준비를 끝마쳤다.

엘리스는 따라붙는 마법사 K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혀를 내밀어주고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메이첸은 어쩐 일인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 끝이다.”

진한의 말에 마법사 K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세가 기울었나 보내요.”

베가본드는 최후의 공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기습 아닌 기습이었다.

알려진다 해도, 막지 못할 기습.

여명검수가 진한에게 언급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그런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공인 투기장? 아니면 다른 마을? 뭘 할 겁니까?”

마법사 K는 진한이 짊어진 짐을 보며 물었다.

얼핏 봐도 장비들이었으니, 사실 아이템을 위해서라면 공인 투기장을 향할 필요는 없었다.

알면서도 물어본 이유는 단순한 흥미본위였다.

진한은 고개를 저었다.

“검은달의 본거지 근처로 간다.”

진한의 말에 마법사 K는 과장된 몸짓으로 진한을 손가락질했다.

“이분, 이거 취미가 고약하시네.”

이제 와서 베가본드의 전쟁을 돕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검은달의 본거지로 향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혈거인을 돕기 위해서.

몇 안 되는 인원으로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지만, 그 이유를 제외하면 생각나는 이유가 없었다.

“근데 이 아저씨는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하대?”

그는 심심한 듯 메이첸을 자극했으나, 메이첸은 입을 꾹 다물고 연기만 내뿜었다.

마법사 K는 가뿐히 무시당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

여명검수는 베가본드의 본거지가 보이는 곳에서 상태를 점검했다.

“드디어…….”

끝이 멀지 않았다.

“내 아들, 내 아들 크리스.”

그는 양손을 맞잡고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참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파푸아 병은 사람을 점점 말라 죽게 하는 병이었다.

검은 피를 토하고, 서서히 생기를 앗아가는 저주와 같은 병.

본격적으로 발병하면, 급격하게 생기를 잃고 미라처럼 말라 죽어버린다.

크리스는 다행히 진행이 느린 편에 속했다.

여명검수는 아들을 위해 사용해보지 않은 아이템이 없었다.

회복 포션부터, 아이템은 물론이고 독에 저주 아이템까지.

사용하기 까다로운 것들도 많았지만, 돈만 쥐어준다면 도움을 줄 슬레이어들은 얼마든 존재했다.

그렇게 죽어가는 아들의 마지막 생을, 꺼져가는 촛불을 살리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벌써 몇 년이나 아들을 보지 못했다.

참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심장에 가시가 박힌 듯, 피 마르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시간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아들아, 조금만 기다려다오.”

여명검수는 전의를 불태웠다.

*

“…….”

혈거인은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봤다.

평소라면 슬레이어들이 북적거릴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검은달이 쇠락하는 기미가 보이자, 상당수의 슬레이어들이 검은달을 떠나갔다.

그를 추종하던 추종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범죄자 슬레이어들의 속성이 그러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소속감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남은 이들이 대단한 것이었다.

혈거인에 대한 의리나 신뢰로 남은 이들부터 무너져가는 검은달을 살렸을 때의 부귀영화를 바라는 미친 도박꾼들까지.

하지만 전세는 명확하게 기울었다.

창밖의 풍경은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황량했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는 베가본드가 숨어 칼을 갈고 있으리라.

날이 선 살기가 눈에 보이 듯 선명했다.

“헤나, 내 딸 헤나…….”

혈거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너무 성급했다.

좀비독을 써도, 엘릭서는 치유할 수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좀비독을 쓰는 것이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좀비독을 쓰면, 헤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벌고, 차분히 엘릭서를 구해내면 되는 것이었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그게 잘 안 되었다.

좀비독을 쓸 최악의 상황까지 가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밝게 웃는 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피 묻은 손이지만, 딸의 손을 잡고, 그 웃는 뺨에 키스를 하고, 턱을 부비고 싶었다.

며칠 깎지 않은 수염 때문에, 딸아이가 짜증을 내도 행복할 것이었다.

담배 냄새 난다며, 면박을 줘도 행복한 시간일 것이었다.

“미안하다, 이 아빠가. 미안하다…….”

마지막까지 이성을 유지해야 됐다.

이 가슴이, 이 심장이 아무리 요동쳐도, 꾹 눌렀어야 했다.

혈거인은 스스로 제 심장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스스로 골통을 빠게 버리고 싶었다.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 뛰던 심장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머리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양 손을 내려다 봤다.

이 손에 죽은 슬레이어만 해도 셀 수 없었다.

셀 수 없는 생명이 이 손에 사그라 들고, 찢겨져 갔다.

“이 아빠가, 이 아빠가 너를 죽이는 구나.”

조금만 더 침착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딸은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딸의 말을 듣고, 외딴 곳으로 들어가 살아야 했다.

딸이 불안하다고, 무섭다고 할 때 슬레이어들의 틈에서 빠져나와 딸과 함께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딸을 위해서,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부를 탐했다.

그 무렵이었다.

헤나가 자신에게 떠나자고,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길드장은 잘 못 된 선택을 했다.

자신을 잡아 두기 위해, 좌지우지하기 위해 딸에게 저주를 내렸다.

그래서 길드장을 죽였다.

하지만 길드장은 죽는 그 순간까지고, 저주의 해독 방법을 말하지 않았다.

“차라리, 차라리 그때…….”

길드장에게 고개를 숙였더라면, 어땠을까.

비참한 삶이지만, 딸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저주를 건 남쪽 마녀는 의뢰인이 죽자 홀연히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녀를 찾기 위해, 자신을 따라 나선 수하들이 무던히 노력 중이었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신이 있다면 그 어린 아이에게 이런 시련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

막 고등학교를 입학한 아이가 이 정신 나간 세계에 떨어졌다.

혈거인은 그날부터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차라리 신이 있기를 바랐다.

신이 있어야 악마가 있는 것이니까, 차라리 신이 있기를 바랐다.

“헤나, 헤나. 여보, 미안하오……. 나는 헤나를 지키지…….”

혈거인은 끝내 뒷말을 삼켜버렸다.

아직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여명검수.”

지난 번, 영혼수를 여명검수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를 죽이고, 영혼수만 탈취할 수 있다면 전쟁은 패배했어도 헤나는 살릴 수 있었다.

*

진한은 검은달의 본거지가 한 눈에 보이는 여관 지붕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스는 진한의 팔을 꼭 붙잡고 있었고, 마법사 K는 관람이라도 나온 듯 먹거리를 풀어놓고 쩝쩝대고 있었다. 메이첸은 말없이 멀리 떨어져 자리 잡고 있었다.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검은달의 본거지 주변은 조용하다 못해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해가 넘어가면, 베가본드는 검은달을 칠 것이다.

지금의 고요함은 폭풍전야였다.

진한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회귀 이전의 크라임 타운은 혈거인이 없는 검은달이 장악하고 있었다.

검은달이 전쟁에 승리하고, 혈거인은 엘릭서를 얻었지만 결국 딸을 살려내지는 못했다.

배신.

검은달 내부 혈거인의 추종자들의 배신이었다.

그들은 혈거인이 전쟁에 승리해 영혼수를 손에 쥐었을 때, 혈거인의 팔다리를 자르고 그가 보는 앞에서 좀비가 된 딸을 찢어 죽였다.

배신자들은 검은달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 크라임 타운의 지배자로 우뚝 서 새로운 규칙을 정한다.

그것까지는 상관없었지만, 그들은 공인 투기장의 ‘어떤 것’을 자신들끼리 독점했다.

알만한 공인 투기장 슬레이어는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검은달의 행태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독점해 힘을 불렸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군주 토벌에 나서지 않았다.

군주 토벌에 나서지 않고, 더즌 헬의 삶에 만족해버린 이들.

진한은 그것을 위해 공인 투기장에 왔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평소라면 등불로 휘황찬란했을 거리가, 질식할 듯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그때 빛이 번쩍이며 귀를 찢을 듯 굉음이 들려왔다.

검은달의 본거지가 불길에 휩싸여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베가본드의 검은달 공습의 시작이었다.

*

공급이 시작되었음에도, 혈거인은 자리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문밖으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폭발음이 들려왔다.

창밖을 보니, 베가본드의 슬레이어들이 빙 둘러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고, 몇몇은 무리를 이뤄 진입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수적으로 베가본드가 우세했지만, 본거지에 들어설 수 있는 인원은 몇 없었다.

혈거인은 담배를 창밖을 응시했다.

팔짱을 낀 채 전황을 가늠하는 여명검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귀로는 본거지 안의 상황을 가늠하고, 눈으로는 포위 인원과 진입 대기 인원의 수를 가늠했다.

기회는 단 한번이었다.

이곳에서 여명검수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가 여명검수를 공격하는 것이 승산 있는 싸움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베가본드의 슬레이어들이 바로 아래층까지 밀고 들어왔다.

혈거인은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달이 중천을 넘어 어느새 밤의 끝을 고하고 있었다.

길어질 것만 같던 삼파전이 끝나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혈거인에겐 피 마르는 기다림이었다.

어느새 대기 인원들이 모두 본거지로 들어섰다.

혈거인은 창가에 발을 올렸다.

혈거인의 하체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어느새 혈거인이 있는 층까지 베가본드의 슬레이어들이 진입해 들어왔다.

“혈거인! 전쟁은 끝났다!”

베가본드의 길드원이 혈거인의 방을 여는 그 순간.

혈거인은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아니, 쏘아져 나갔다.

여명검수를 향해.

꿍-!

“……!”

여명검수는 눈앞에 선 혈거인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놀랄 틈도 없이, 혈거인의 주먹이 날아왔다.

여명검수는 급히 검을 뽑아 혈거인의 주먹을 막아냈다.

무식한 근력 능력치에, 무식한 내구도였다.

“여, 여명검수님-!”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슬레이어들이 급히 다가왔으나, 섣불리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다.

혈거인이 혈거인이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그의 스킬에 있었다.

피를 흘릴수록, 강해지는 그의 능력.

죽음이 임박할수록, 혈거인은 강해졌다.

어설픈 공격은 오히려 여명검수에게 좋지 않았다.

반면 여명검수는 상대를 일검에 죽일 수 있는 쾌검수였다.

여명검수는 혈거인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며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기습도 기습이거니와, 혈거인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들고 있었으니 여명검수로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혈거인은 궁지에 몰려 목숨을 걸고 있었고, 여명검수는 목표가 눈앞이라 몸을 사려야 했다.

뻐억!

혈거인의 거대한 주먹이 여명검수의 왼쪽 어깨에 틀어 박혔다.

“끄윽.”

여명검수는 신음도 내뱉지 못하고, 한 차례 허공에 떠올라 나뒹굴었다.

혈거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명검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슬레이어들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베가본드의 슬레이어들은 여명검수를 치유하고, 곧이어 조를 이뤄 혈거인에게 달라붙었다.

마법이 혈거인의 몸을 지지고, 쇠붙이들이 살을 파고들었다.

혈거인은 피를 흘리면서도, 신음 하나 내뱉지 않고 여명검수를 향해 나아갔다.

양 손으로 골통을 부수고, 입으로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방어는 도외시 한 채 오직 한 방향으로 진격했다.

등 뒤로는 셀 수 없는 화살이 박혔다.

혈거인은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진한은 먼 곳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베가본드는 어째 멍청하네요.”

혈거인에게 대응하는 베가본드 슬레이어를 본 마법사 K의 소감이었다.

차라리 여명검수만 지원했다면 더 적은 피해로 혈거인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진한은 대꾸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기다려라.”

진한은 혈거인이 폭주하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저매인 // 뚜둔! 둘다 치료... 흠.. 어떻게 될까요.. 둘다라..

제망량 // 2입니다. 제, 제가 계산기인가요? ㅠㅠㅠㅠ

RoadSeeker// 그건 그렇습니다..... ㅠㅠㅠㅠㅠ 그래도 금주도 괴로워요..

후... 내일부턴 자정에 업로드 해야겠습니다!

투베 순위가 빠르게 떨어지는군요.

마음에 안정을 취하고 양질의 소설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편도 재밌게 감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엘릭서를 노리는 진한!

여명검수와 혈거인!

과연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진한의 목적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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