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8 여명검수 =========================================================================
[아들. 엘릭서.]
여명검수의 동공이 크게 팽창했다.
엘릭서에 관한 소문이 돌았을 때, 진실을 알고 있는 슬레이어들은 모두 죽였다.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단 두 부류였다.
자신의 측근이거나…….
‘혈거인.’
혈거인의 측근이거나.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아들의 존재.
아들의 존재는 최측근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주기적으로 어딘가에 아이템을 보낸다는 사실은 몇몇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숨기려 하면 더 드러나는 법이니, 그는 굳이 아이템을 보내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떠돌이 슬레이어 중 주민에게 은혜를 입어 주기적으로 보답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니 대부분의 슬레이어들은 그렇게 이해했다.
하지만 쪽지는 아들을 언급하고 있었다.
말이 조금이라도 길었으면 의중을 짐작하기라도 할 텐데 내용은 단 두 단어뿐이었다.
아들과 엘릭서.
“나가서 이들을 불러오게.”
여명검수의 말에 문지기는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문지기를 내보낸 여명검수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집무실에 뿌옇게 내리깔렸다.
여명검수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쪽지를 준 슬레이어가 혈거인의 사람이라면, 굳이 번거롭게 이런 일을 벌일까.
‘아니, 놈의 성격이라면…….’
쪽지보다 먼저 놈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아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쪽지를 보낼 바에는 아들의 머리를 보내는 것이 혈거인이었다.
혈거인은 미친놈이었다.
제멋대로 계산 없이 움직이는 듯하지만, 수단이 거칠고 가진 힘을 십분 활용할 뿐이지 결코 멍청한 놈이 아니었다.
삼파전은 결국 엘릭서의 필요에 의해 생긴 전쟁이었다.
엘릭서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순간, 전쟁은 급물살을 타고 절정에 달할 것이다.
‘혈거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 남았다.
유니온.
마법사 K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슬레이어였다.
혈거인과는 다른 의미의 미친놈.
그가 길드 연합을 구축하고, 삼파전 양상을 만들 때 검은달과 베가본드는 엘릭서의 정보가 유출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결과는 'No'였다.
하지만 쪽지의 출처가 혈거인 쪽이 아니라고 심증이 굳어진 이상, 당연히 유니온 쪽일 가능성이 컸다.
마법사 K라면 충분히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선택할 위인이었다.
여명검수가 결론을 내렸을 무렵, 예의 그 문지기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시고 왔습니다.”
여명검수의 아미가 살짝 찡그려졌다.
마법사 K의 주요 슬레이어들이라면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어온 셋은 전혀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자가 맨 앞에 서있었고, 뒤로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지기가 문을 닫고 나가려 할 때 여명검수는 그에게 손짓했다.
“자네 잠깐 들어와 보게. 우리가 아무리 격이 없어도 호위는 있는 편이 좋지 않은가.”
문지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문지기가 여명검수의 기준으로 가장 앞에선 방문자를 지나칠 때, 여명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여명검수의 검은 문지기의 목을 날려버리고 그대로 방문자를 향해 뻗어 나갔다.
“토끼님……!”
“이런 썅!”
여명검수의 시선이 짧은 시간동안 셋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뒤에 선 남자는 곧장 마법을 영창 했지만, 여자의 반응 속도는 남자보다 느렸다.
그리고…….
여명검수는 무표정한 방문자의 목 한치 앞에서 검을 멈추었다.
가장 앞에선 방문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급한 장난을 하는군.”
남자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여명검수의 검을 옆으로 치웠다.
여명검수는 표정을 굳히고 검을 갈무리했다.
전력을 다하진 않았지만, 어중이떠중이들이 반응할 만한 속도는 아니었다.
뒤에 선 여자는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는 못했지만, 옆의 남자는 검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마법을 영창했다.
평범한 수준의 마법사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가장 앞에 선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둘 중 하나였다.
파악하지도 못할 정도로 형편없거나, 자신이 멈출 거라는 걸 알았거나.
여명검수는 후자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정말 호위가 필요할 뻔 했군. 어디서 왔지?”
여명검수의 질문에 앞에 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적은 아니라고 말해두지.”
여명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셋에게 자리를 권했다.
“미친 거 아니요?”
메이첸은 자리에 앉으며 이죽거렸다.
그는 목을 잃은 문지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명검수는 대꾸하지 않고 손수 차를 타서 셋에게 내밀었다.
쪽지를 전달한 문지기를 죽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혹시나 문지기가 쪽지를 열어 봤을까봐.
단 두 글자로 뭔가를 파악하기는 힘들 테지만, 만일을 위해 문지기를 죽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이 쪽지, 무슨 뜻이지?”
여명검수의 질문에 진한은 그를 응시했다.
노련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여명검수는 쪽지에 자세한 설명이 없으니, 얼마나 알고 있는 지 떠보고 있었다.
대화를 하다가 자신이 우려했던 상황이 아니라면, 언제든 처리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이미 쪽지를 보고 셋을 이 자리까지 불렀다는 점에서, 두 키워드가 확실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뜻했다.
“아들을 위해, 엘릭서가 필요한 거 아니었나?”
진한의 말에 여명검수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댔다.
“내게, 내게 뭘 바라기에 온 거지?”
여명검수는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진한은 여명검수를 바라봤다.
혈거인, 마법사 K, 여명검수가 일대일로 맞붙는다면 단연 여명검수의 승리였다.
또한 베가본드가 저평가 되고 있기는 했지만, 집단의 단결력 면에서는 검은달에 비해 뛰어났다.
그런데도 베가본드가 유니온이 빠진 전쟁에서 검은달에게 패배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들의 존재.
그가 전쟁을 벌인 이유인 아들의 존재가, 패배의 원인이 된 것이다.
머지않아 몇 년 이내에 아들의 존재는 혈거인에게 알려지고, 그때 마법사 K 역시 검은달과 베가본드의 목적을 알고 발을 빼버린다.
“아이템.”
진한의 말에 여명검수는 진한과 메이첸, 엘리스를 쭉 훑어 봤다.
셋 다 로브로 몸을 두르고 있어 파악이 힘들었지만, 메이첸을 제외한 둘은 이렇다 할 아이템을 하나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정말 그뿐인가?”
여명검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템을 노리고 온 작자들이라면, 차라리 편했다.
원하는 바를 쥐어주고 물러가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영혼수를 제외한다면 넘겨줄 수 없는 아이템은 없었다.
“어떤 아이템을 원하는 거지? 구할 수 있는 거라면 최대한 구해보지. 다만…….”
여명검수는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진한을 응시했다.
“베가본드는 길드가 아니고, 내가 베가본드를 대표하지만 절대적인 우두머리는 아니다. 그러니…….”
“뭔가를 해달라는 것이군.”
여명검수가 얘기하는 바는 간단했다.
아이템을 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베가본드를 움직여야 했다.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둘 사이에는 거래가 명확했지만, 베가본드에도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 움직일 것이었다.
“그렇지. 그래야 제대로 된 거래가 되지 않겠나?”
과연 노련했다.
진한의 목적이 자신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것이 아닌, 거래라는 것을 알자 그는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유니온을 삼파전에서 물러나게 해주지.”
진한의 말에 여명검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유니온을? 역시 마법사 K가 보낸 거였나?”
여명검수의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아이템이나 노리고 온 잡배들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한 가지 가정이 추가되었다.
뒷배가 있다.
마법사 K와 연관이 있거나, 뒷배가 있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꺼낼 리 없었다.
“그건 아니라고 대답해두지.”
진한의 말에 여명검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좀 전까지의 자신이 너무 섣불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들이 뒷배가 있든 없든, 아이템을 받고 아들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을 거란 보장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자신은 아들이 담보로 잡혀 있었다.
‘그냥 죽일까…….’
꽤 뛰어난 자들이지만,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는 있었다.
‘아니, 너무 위험해.’
만약 저 셋이 다가 아니라면?
여명검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래, 이렇게 하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여명검수가 입을 열었다.
“담보, 담보를 맡겨라.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셋 중 하나는 여기 남아라.”
그의 판단은 적절했다.
진한은 그의 폭탄 스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그 폭탄은 여명검수에게 아주 치명적이었다.
정당한 거래가 되기 위해서는 그 역시 상대의 폭탄 스위치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물론 남은 하나를 버릴 수도 있었지만, 상대가 정당한 거래를 할 생각이 있다면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인질을 버리는 경우는 딱 하나였다.
처음부터 정당한 거래를 할 생각이 없었을 때.
진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씨발? 누가 남아?”
메이첸은 안 좋은 예감에 진한을 바라봤으나, 진한의 입이 열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스.”
진한은 엘리스를 불렀고.
“네, 토끼님.”
엘리스는 명랑하게 대답하고는 배낭을 뒤졌다.
“그래, 씨발. 나 같은 인재를 한낱 인질이라니. 인간 재앙인 미친년을 남겨야지. 야이, 광년아 여기서 짐…….”
‘풀지 마.’라는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엘리스가 꺼낸 담배가 메이첸의 아가리에 틀어 박혔다.
“이런…….”
메이첸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 진한은 성냥을 꺼내 손수 메이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토끼님이 네가 남으래. 발정 난 메이첸아.”
“조또……. 썅.”
엘리스는 메이첸과 진한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진한의 팔에 볼을 부볐다.
여명검수는 그 광경을 보며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남으면 당연히 엘리스라는 여자가 남을 거라 생각했다.
언뜻 모자란 듯 아닌 듯 보이는 것이 이번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그다지 쓸모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엘리스를 남긴다 하면, 메이첸이라는 마법사나 진한을 남으라 하려고 했었다.
둘 모두 뛰어난 슬레이어였다.
뒤에 집단이 있다면, 어떤 집단도 저 정도 슬레이어를 소모품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인질은 진한 아니면 메이첸이어야 했는데, 진한이라는 남자는 선뜻 메이첸을 지목했다.
“이만하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겼나.”
“그렇군. 이제 어떤 아이템이 필요한지 말을 해줬으면 좋겠군.”
여명검수는 펜과 종이를 찾아 진한에게 내밀었다.
진한은 망설임 없이 종이에 아이템 목록을 적고는 여명검수에게 내밀었다.
여명검수는 아이템을 보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꽤나…….”
구하기 까다로웠다.
그렇다고 못 구할 아이템들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투기장에서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으니, 크라임 타운 내에서 수소문하다보면 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 구할 거라는 장담은 못하겠군.”
여명검수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다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건…….”
여명검수는 아이템 목록에서 몇몇 이름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았다.
“아니, 아니군.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아이템이 있었지만, 그로서는 상관할 부분이 아니었다.
“유니온은 언제쯤 물러가게 해줄 건가?”
밑져야 본전이었다.
이들이 정말 유니온을 물러가게 할 수 있든 없든 그로서는 전혀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다.
유니온을 물러가게 한다면 이 지루한 삼파전을 끝낼 수 있을 것이고, 물러가게 하지 못한다면 뒷배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피고 바로 일어나지.”
진한이 담배를 물자 엘리스가 불을 붙여 주었다.
“씨발, 내가 인질이라니.”
메이첸은 궁시렁 대면서도 인질의 역할을 거부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잉여소굴// 넵! 감사합니다!!
ㅇㅈㅂㅇㅂ//나중에 충분히 나올 수 있습니다.
Damaoka// 뚜둔! 좋은 추측 감사합니다!
soulslayer// 취향에 맞으신다니 감사합니다!
이토록아름다운//3연참.. 오늘도 3연참 할 수 있을까요... 훔..
Luminarie// 대작이라뇨! 과찬이십니다! 요샌 금주하면서 건강 챙기고 있습니다!
은의칸//제가.. 제가 기계가 되길 바라시나요ㅠㅠ
저매인//감사합니다! 이번 편도 재미있으시길!
流江 //만화책방에 꽂혀있는건 참 많이 봤는데.. 사실 베가본드 이름 정할때 그 만화책 생각도 좀 났습니다!
lestiaM// 즐감! 근데.. 유감이라뇨.....ㅠㅠㅠ
넵.. 오늘 보니까.. 선작이랑 조회수가 엄청 올랐더군요..
투베 20위에 진입했습니다.
더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토록아름다운님 후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o(__)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