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6 실리아 =========================================================================
실리아는 그런 진한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녀로서는 아직 진한에게 알아내야 할 것이 남아있었다.
진한이 말하지 않은, 회귀 이전의 두 번째 만남.
분명 두 번째 만남에서 자신과 진한 사이에 어떤 스토리가 있었다.
그녀로서는 꼭 듣고 싶은 스토리였다.
“뭘 대가로 바친 건데?”
하지만 진한은 서둘러 유적지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행동의 변화.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비극의 관람자가 되기 위해 지불하는 관람료.
도대체 무엇을 바쳤기에 이토록 서두르는 것일까.
진한은 말없이 가방을 챙겼다.
짐이라봐야 얼마 되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시간 사이에 짐을 다 챙긴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물었다.
“스승님, 아니. 실리아.”
“……?”
실리아는 진한을 응시했다.
진한은 실리아와 마주했다.
‘비극 관람자’가 되기 위한 관람료.
비극 재경험.
비극 재경험은 단순하게 과거의 괴로운 기억을 다시 보는 것이 아니었다.
비극의 이름은 ‘실리아의 죽음’이었고, 진한은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문제는 그 뒤에 나온 알림음이었다.
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실리아의 죽음2’가 진행됩니다.
분명 극은 끝났다.
실리아가 죽고, 칼날 사냥꾼이 그녀를 화장시키는 것으로.
하지만 새로운 극이 시작되었다.
실리아의 죽음2.
‘비극 재경험’을 대가로 지불하겠냐는 알림음이 떴을 때, 진한이 생각에 잠긴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알림창은 분명, 대가를 비극 ‘재관람’이 아닌, ‘재경험’이라고 표기했다.
관람과 경험은 다르다.
진한은 그에 대한 이유를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대가를 지불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극이 마침내 끝났을 때, 진한은 대가가 왜 ‘재관람’이 아닌 ‘재경험’으로 표기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관람료는 ‘비극의 재경험’.
즉 진한이 실리아를 다시 잃는 것이 관람료였다.
진한은 일주일간, 시스템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비극 관람자’는 타인의 비극을, 불행을 자양분삼아 힘을 키우는 클래스였다.
관람료를 지불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타인의 불행으로 힘을 얻으려면, 당사자 역시 불행해야 했다.
‘비극 관람자’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불행하게 만드는 클래스.
즉, 시스템은 이렇게 판단한 것이다.
실리아를 잃는 것이, 진한에게 가장 적합한 비극이다.
여기서 진한은 다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실리아의 죽음2’를 실리아가 죽지 않고 완결 지을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했다.
시스템은 ‘실리아’를 진한에게 ‘소중한 존재’로 인식했다.
‘실리아’의 상실은, ‘소중한 존재’의 상실.
즉 불행이며 비극이다.
그렇다면, 진한에게 실리아가 더 이상 소중하지 않다면?
이것 역시 시스템은 ‘소중한 존재의 상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실리아.”
진한은 재차 실리아를 불렀다.
실리아는 멍한 얼굴로 눈만 꿈뻑 거렸다.
진한은 실리아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은하수가 담긴 것 같다, 라고 진한은 생각했다.
저 눈을 보고 사랑을 속삭였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더즌 헬에서는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감정이라 생각했었다.
무채색의 일상에 그녀의 존재가 나타났고, 일상은 황홀한 은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녀는, 진한이 밤이 되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유였다.
“……실리아.”
진한은 수천, 수백 가지의 말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할 수도 없었지만, 해서도 안 되는 말이 되어버렸다.
진한은 실리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감정을 도려냈다.
속에서 그녀를 지워갔다.
그것은 살인이었다.
내면에서 한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었으며, 자해였다.
감정의 한 구석을 도려내는 자해였으며, 희생이었다.
지키기 위해 놓아주는 희생이었으며, 직시였다.
진한이 사랑하는 실리아는 죽었다.
그날, 그 언덕에서 타들어가는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실리아는 이미 죽어있었다.
진한은 이제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사랑했던 그녀는 죽었다.
“실리아.”
“……진한?”
실리아는 진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첫 번째 부름에는 그리움이 담겨 있어 대답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부름은, 세 번째 부름은 지독하게 슬퍼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네 번째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너와 나의 이야기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진한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두 번째 만남의 이야기를 궁금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진한과 자신은 스승과 제자가 아닌, 좀 더 깊은 관계였다는 것을.
그것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적인 문제였다.
“궁금해 하지 말고, 미련을 버려라.”
실리아는 진한의 말에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해 하지 말라는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으나, 미련을 버리라는 말은 진한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실리아는 생각에 잠긴 듯 움직이지 않았다.
진한은 그런 그녀를 두고, 짐을 챙겨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선 진한의 눈앞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실리아의 죽음2’가 막을 내렸습니다.]
*
진한과 엘리스, 메이첸은 유적지를 나서서 걸음을 옮겼다.
셋 사이에는 살얼음 같은 침묵이 맴돌았다.
엘리스는 진한의 곁에 다가서지 못한 채 한 걸음 떨어져 걷고 있었고, 메이첸은 담배를 뻑뻑 피우며 한참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엘리스는 진한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유적지의 입구를 바라봤다.
어느새 유적지의 입구는 사라져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짐을 챙겨 방을 나설 때, 엘리스는 진한의 방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엘리스는 실리아와 진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진한이 부르는 실리아의 이름에서, 엘리스는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 확신할 수 있었다.
진한이 실리아에게 한 모든 이야기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실리아를 향한 진한의 감정은 특별했다.
아니, 특별했었다.
엘리스는 진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큰거렸다.
‘토끼님…….’
엘리스는 머리를 도리질 치며 잡념을 떨쳐냈다.
“토끼님, 우리 어디가요?”
그녀는 한 걸음 달려가 진한의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진한은 말없이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녀는 머리칼을 흩트리는 손길을 느끼며 진한의 팔에 코를 부볐다.
“아, 이번엔 어디 가는지 알고나 가자, 응?”
메이첸은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진한은 메이첸의 재촉에서 말없이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토끼님이 닥치래, 발정 난 메이첸.”
엘리스는 진한의 팔뚝에 머리를 기댄 채 웅얼거렸다.
“아, 그래서, 씨발. 이번엔 어딜 가는 건데.”
모닥불 앞에서 메이첸이 불만스럽게 투덜댔다.
엘리스는 진한의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메이첸, 우응. 토……끼님이 닥치래…….”
“저 미친년이, 잠꼬대로도.”
진한은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기며 재가 흩날렸다.
“아이템 구하러 간다.”
진한의 말에 메이첸은 고개를 갸웃했다.
“또 뭐 숨겨놓은 유적지라도 있나?”
메이첸은 이제 진한이 유적지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해도 믿을 수 있었다.
탐사를 실패한 지역에서 유적지를 찾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유니크 클래스를 두 개나 얻고, 유적지의 주인에게서 가르침까지 받은 마당이었다.
단순한 메이첸은 이렇게 정의했다.
진한은 결코 헛소리는 하지 않는다.
“투기장.”
“투기장?”
진한의 말에 메이첸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아이템을 투기장에서 구한다는 말인가.
“무슨 헛소……. 후우, 그래,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럼 어느 마을 투기장을 갈 건데?”
메이첸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진한 역시 배낭에서 담배를 꺼냈다.
얼마 남지 않았던 담배가, 반 가까이 사라져 있었다.
메이첸이 피고 있는 담배의 출처가 명확해졌다.
“엘리스.”
진한의 부름에 엘리스는 눈을 부비며 일어나, 진한과 메이첸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는 이내 마법을 영창했다.
즉시 찬 물줄기가 메이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썅, 미친년이.”
엘리스는 메이첸의 말은 가뿐히 씹어주고, 다시 잠을 청했다.
“도둑질 하지 마라.”
“씨바, 이깟 담배 얼마나 한다고. 빌린 거야, 빌린 거. 아, 그래서 어느 마을을 갈 건데.”
메이첸은 웃옷을 벗어 불가에 널고는 다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마을 투기장이 아니다.”
“……뭐?”
메이첸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투기장의 종류는 두 종류.
하나는 마을의 뒷골목에 생성된 슬레이어들이 만든 투기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스템이 공인한 공인 투기장이었다.
공인 투기장은 마을 밖에 세워지는데, 슬레이어들은 공인 투기장이라는 명칭보다는 다르게 부르길 선호했다.
“이 시점에 크라임 타운으로 간다고?”
크라임 타운.
범죄 마을.
무법지대인 더즌 헬에서조차 무법지대로 뽑히는 곳.
그곳이 바로 공인 투기장이었다.
“그래. 이제 자라.”
진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엘리스를 자리로 돌려보내고, 자리에 가 누웠다.
크라임 타운.
더즌 헬 최고의 무법지대.
길드에서 척살령이 내려진 도망자들뿐만 아니라, 공인 투기장의 보상을 위해 떠돌이 슬레이어들이 모여드는 통제 불능의 공간.
대부분의 길드가 공인 투기장이 있는 마을을 점령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어떤 길드의 세력권에도 포함되지 않은 중립지대라 할 수 있었다.
공인 투기장은 유적지 탐사를 다니지 못하는 슬레이어들이 능력치 상승과 아이템을 얻기 위해 찾는 최후의 보루였다.
전투마다 투기장 코인이 걸려있었으며, 승자는 코인을 얻는다.
코인은 투기장 내에 존재하는 시스템 상점에서 아이템과 맞바꿀 수 있었다.
이 시기의 크라임 타운은 이름 그대로 무법지대가 되어 있었다.
척살령이 내려진 범죄자와 떠돌이 슬레이어, 거대 길드간의 세력 싸움이 한창이었다.
메이첸은 자리에 돌아누운 진한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크라임 타운에 있던 슬레이어들도 떠나오는 판국에, 진한은 크라임 타운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 목숨이 간당간당할 거 같은데…….”
메이첸 역시 과거 크라임 타운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크라임 타운에 대한 메이첸의 소견은 단 한 단어로 정의 되었다.
뒷골목.
크라임 타운은 말 그대로, 마을 전체가 뒷골목과 같았다.
상점에서 버젓이 마약을 판매하고, 여관에선 매춘이 성행한다.
길거리에서는 주민들뿐만 아니라, 같은 슬레이어를 노예로 사고팔며, 공인 투기장 이외에서 슬레이어 투기장 역시 댓 개는 갖추고 있는 곳.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슬레이어가 어디 있겠냐마는, 크라임 타운은 미친놈들이 득시글거렸다.
진한은 몰라도, 아직 신규 슬레이어에 불과한 엘리스를 챙기며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크라임 타운을 제대로 알고 있는 슬레이어들은 크라임 타운을 이렇게 표현했다.
노예를 사러가서 노예로 팔려갈 수 있는 마을.
“씨발, 고생 톡톡히 하겠네.”
메이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의 인원으로는 유적지 탐사가 어렵다 할지라도, 크라임 타운은 영 아니었다.
메이첸은 담뱃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그는 깊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공인 투기장은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유적지 이상으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전제가 하나 붙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실력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메이첸은 눕자마자 곧바로 잠들었다.
얼마 뒤 진한은 자리에 일어나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진한이 살아남기 위해 스킬을 연구하며 투쟁했던 투기장이 바로 크라임 타운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먼 과거였으며, 아직 크라임 타운에 질서가 생기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범죄자, 떠돌이 슬레이어, 길드.
세력 간의 삼파전이 끝나면, 크라임 타운에는 새로운 질서가 바로 서게 된다.
진한은 그 전에 크라임 타운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작품 후기 ============================
Damaoka // 비극의 재경험의 숨은 뜻이 나왔습니다!
流江// 비극을 되돌아본다... 흠... 기억은 결국 어느 정도의 주관이 섞이지 않을까요?
은의칸// ㅎㅎ..... ㅠㅠㅠㅠ 제가 글쓰는 기계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酒狂者//감사합니다. 이번 편도 잘 보고 가셨기를..
이토록아름다운//연참하겠습니다!!
이번편 쓰다 잠들어서..
오늘 대충 보니까.
앞으로 적어도 두편, 많으면 세편 더 적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2시 전까지 최소 목표 2편 더, 최대 목표 3편 더.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