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24 실리아 (24/40)

00024  실리아  =========================================================================

*

진한은 어둠속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저 꽉 막힌 어둠뿐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길 때, 진한의 눈앞에 파노라마가 스쳐 지나갔다.

“악취미군.”

진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파노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진한의 과거였다.

회귀 이전의, 더즌 헬에 처음 떨어졌을 때, 죽음 마을에서 길드에 들어갔을 때, 길드에서 나와 떠돌이 슬레이어가 되었을 때…….

제 삼자의 입장이 되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환상은 한참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진한은 말없이 환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진한의 눈앞에 숫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색, 붉은 색, 푸른 색.

삼색의 숫자들은 파노라마가 스쳐지나감에 따라 숫자가 하나씩 올라갔다.

파노라마가 끝나자, 숫자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검은 색 6.

붉은 색 31.

파란 색 137.

진한의 눈앞에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듣는 법을 익힌 후 슬레이어 진한의 모든 비극을 조사하였습니다.]

[듣는 법을 익힌 후 슬레이어 진한이 경험한 비극은 6개입니다.]

[듣는 법을 익힌 후 슬레이어 진한이 만들어낸 비극은 31개입니다.]

[듣는 법을 익힌 후 슬레이어 진한이 관람한 비극은 137개입니다.]

검은 색의 숫자는 진한이 경험한 비극을, 붉은 색의 숫자는 진한으로 인해 생긴 비극을, 파란 색의 숫자는 진한이 봐온 비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슬레이어 진한의 관람료를 검색합니다.]

시스템 창이 뜨자, 파노라마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되감아졌다가 다시 재생되었다.

관람료란 실리아가 말한 대가를 뜻했다.

[슬레이어 진한의 관람료는 ‘비극의 재경험’입니다.]

[슬레이어 진한이 경험한 6개의 비극 중 적합한 비극을 검색합니다.]

진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비극의 재경험’이라니.

채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다시 하나의 시스템 알림이 나타났다.

[슬레이어 진한이 재경험할 비극을 찾아냈습니다.]

[비극의 제목은 ‘실리아의 죽음’입니다.]

…….

그 뒤로 몇 개의 알림창이 나타났지만, 진한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실리아의 죽음.’

진한은 한참을 뚫어지게 시스템 알림창을 응시하고는, 추가로 뜬 설명까지 모두 읽어 내려갔다.

진한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관람료를 지불하시겠습니까?]

시스템 알림음이 재촉하듯 진한의 눈앞에 나타났다.

진한은 주위를 빼곡이 채운 알림창을 쭉 훑어보고는 눈을 감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진한의 입이 열렸다.

“지불하겠다.”

진한의 말이 끝나자, 가면을 쓴 꼭두각시 인형이 어둠속에서 걸어 나왔다.

꼭두각시 인형이 손을 뻗자, 허공으로 무대가 생기고, 커튼이 나타났다.

[비극을 재경험합니다.]

꼭두각시 인형이 익살스런 몸짓으로 커튼을 걷으며 퇴장하자, 진한은 무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사방이 회색빛으로 가득 찬 공간에 한 여자가 있었다.

작은 키에 흑발, 예쁘장한 얼굴에 품에 토끼 인형을 품에 안은 여자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토끼님은 날 버렸어.”

그녀는 엘리스였다.

엘리스의 두 눈망울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그녀의 양 손은 품에 안은 토끼 인형을 꼭 움켜쥐었다.

“아니야. 그는 토끼가 아니야.”

그때 공간 저편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와 엘리스 앞에 자리했다.

단정한 정장에,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 목에 찬 사원증.

사원증에 적힌 이름은 ‘김소연’이었다.

“그리고 너는 엘리스가 아니고.”

김소연은 엘리스의 맞은편에 앉아 엘리스와 눈을 마주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나는 엘리스야. 진한님은 토끼고, 여기는 이상한 나라야.”

“아니야, 너는 엘리스가 아니고, 진한님은 토끼가 아니고, 여기가 이상한 나라는 더더욱 아니야.”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토끼님, 엘리스 버리지 마요. 엘리스 버리지 마요, 토끼님. 토끼님 엘리스 말 잘들을게. 잘 듣고 있었잖아. 

응? 토끼님, 어딨어, 어딨어, 어딨어, 어딨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엘리스는 울며 토끼 인형에 고개를 파묻었다.

김소연은 그 모습을 보며 쓰게 웃고는,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엘리스, 너는 엘리스가 아냐. 너는 김소연이야.”

“싫어, 싫어, 싫어.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알아. 여기는 이상한 나라란 말이야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너에 대한 모든 걸 알아. 너도 알잖아. 너는 엘리스가 아니고, 진한님도 토끼가 아니라는 걸.”

엘리스는 김소연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상한 나라.

엘리스.

토끼.

동화 속 이야기대로라면, 엘리스는 토끼에 의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녀가 읽었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분명 그랬다.

원작과는 다른 각색이었지만, 엘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이끈 것도,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것도 결국 토끼였다.

진한은 무뚝뚝했고, 매정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엘리스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진한은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더더욱 필사적으로 진한에게 매달렸다.

누가 뭐라 해도 진한은 자신의 토끼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엘리스, 고개를 들어봐. 너도 알잖아. 진한님은 토끼가 아니고, 그리고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진한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이었다.

항상 진한의 곁에 붙어있는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진한의 사소한 습관, 행동, 숨소리 하나까지 신경 써야 했던 엘리스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김소연의 말에 엘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토끼님은 쓸모없는 거 싫어해. 토끼님은 엘리스 쓸모없어지면 버릴 거야. 싫어, 싫어. 토끼님은 엘리스 버렸어.”

“다 알면서 부정하지 마. 진한님은 너를, 아니 우리를 버리지 않을 거야.”

김소연은 엘리스의 등 뒤로 가, 그녀를 껴안았다.

엘리스는 대꾸하지 않고, 토끼 인형에 고개를 파묻었다.

“못 따라오면, 두고 가실뿐이지.”

“그게 버리는 거랑 뭐가 달라. 그게 뭐가 달라. 토끼님은, 엘리스, 버릴 거야.”

“따라올 수 없었으면, 곁에 두지도 않으셨을 거야, 엘리스.”

김소연은 엘리스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엘리스는 한참을 김소연의 품에서 흐느꼈다.

회색의 공간이 점차 옅어지고, 김소연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엘리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어. 이제 받아들이자.”

김소연은 엘리스를 품에서 떼어놓고, 눈을 마주했다.

엘리스와 엘리스.

김소연과 김소연.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너는 엘리스도 아니고, 진한님은 토끼도 아니고, 이곳은 이상한 나라도 아니야.”

김소연의 몸이 발끝부터 점차 흐릿해져 갔다.

“더즌 헬은 엄연한 현실이야. 동화 속 주인공처럼, 해피엔딩을 맞을 수 없을지도 몰라. 이 끔찍한 세상에서 죽을 수도 있어.”

김소연읜 엘리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손이 어느새 흐릿하게 사라졌다.

“이제는 받아들이자, 엘리스. 아니, 김소연.”

그 말을 끝으로, 김소연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녀가 사라지자, 회색의 공간이 완전히 깨져나갔다.

깨져나가는 공간 사이로, 엘리스의 눈앞에 시스템 알림창이 나타났다.

[유니크 클래스 ‘균열의 마법사’ 전직 조건을 만족하셨습니다.]

[전직을 수락하시면, 현재 클래스는 자동으로 사라집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

철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실리아는 뒤를 돌아봤다.

“빠르네, 우리 꼬마숙녀.”

처음 실리아는 엘리스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판단하고, 죽이려 했었다.

그때, 그녀는 엘리스에게서 강렬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

엘리스는 완전히 망가져버린 것이 아니었다.

엘리스를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려줄 토끼라는 존재의 상실 때문에,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실리아는 엘리스를 죽이는 것을 뒤로 미루고, ‘균열의 마법사’가 되기 위한 시험에 들게 했다.

만약 실리아가 본 것처럼 엘리스가 망가져 버린 것이 아니라면, 엘리스는 균열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나 균열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랬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이정도로 빠르게 시험에 통과한 계승자는 없었다.

시험에 들면 이전보다 강한 정신을 갖게 되거나, 완전히 망가져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십중팔구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채 죽어나갔다.

자기 자신의 균열과 마주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엘리스는 결국 해냈다.

“정말 카이센이 약속한 기회인가?”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나도 찾기 힘든 계승자가 둘이나 한꺼번에 나타났다.

그것도 한 명은 이미 클래스를 계승하기 위한 준비까지 끝마쳐진 상태였다.

“이리 오렴, 꼬마 숙녀님.”

실리아에게서 뻗어나간 하얀 빛줄기가 복도를 따라 입구로 뻗어나갔다.

*

성역의 지배자 길드와 학살자 길드의 항쟁은 더즌 헬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사건이었다.

더즌 헬에서 손꼽히는 길드, 성역의 지배자.

칼날 사냥꾼 진한을 필두로 최정예 슬레이어들이 모인 길드, 학살자.

한쪽은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맘모스 길드였고, 다른 한쪽은 치명적인 독니를 가진 독사와 같았다.

더즌 헬의 슬레이어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맘모스가 독사를 짓밟는 게 먼저인가, 독사의 독니가 맘모스를 파고드는 것이 먼저인가.

물론 정말 맘모스와 독사의 대결이었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지만, 결국엔 길드와 길드 사이의 대결이었다.

결과는 독사의 승리였다.

물론 학살자 길드 역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반절이 넘는 길드원들이 찢기고, 윤간당하고, 능욕을 당하며 죽어나갔다.

누군가는 몬스터의 먹이가 되었고, 누군가는 성역의 지배자 길드원들의 사이에 깔려 죽는 그 순간까지 정액받이로 끌려 다녔다.

하지만 마침내 승리한 것은 학살자 길드였다.

결과는 의외로 허무했다.

야습을 틈탄 성역의 지배자의 길드장 암살, 그리고 세력권을 노린 다른 길드들의 합공.

그렇게 성역의 지배자 길드와 학살자 길드의 길드 항쟁은 한쪽의 승리로 끝이 나는 듯싶었다.

표면적으로는.

성역의 지배자 길드에는 생존자가 있었다.

부길드장 할리.

무대 안으로 빨려 들어온 진한은 무심히 풍경처럼 스쳐지나가는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 주위에 사람들은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역의 지배자 길드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성역의 지배자 길드원들을 도축 내는 장면이 지나갔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 어느덧 칼날 사냥꾼과 실리아의 두 번째 만남이 영상에 나타났다.

진한은 제 삼자가 되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두 사람이 몸을 섞고, 사랑에 빠지고.

그러던 중 학살자 길드에 사고가 터져 칼날 사냥꾼이 길드로 향했다.

칼날 사냥꾼이 학살자 길드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실리아에게 떠나갈 무렵 그의 앞으로 한 통의 상자가 배달되어 왔다.

칼날 사냥꾼의 옆에 선 진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제일 기억하기 싫은 기억.

상자엔 쪽지와 동그란 물체가 두 개 들어있었는데, 하나는 영상 기록 수정구였고, 다른 하나는 진한 역시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바라보고, 또 바라봐도 질리지 않았을, 은하수를 담은 듯 밝게 빛나던…….

칼날 사냥꾼은 고개를 저으며,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쪽지는 피로 쓴 듯, 검붉게 얼룩져 있었고, 모퉁이는 무언가 묻었다가 마른 듯 누렇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칼날 사냥꾼이 쪽지를 읽어 내려갈 때, 진한은 눈을 감았다.

[어딜 보낼지 참 고민했는데. 무뚝뚝한 자네가 그녀를 단 한번 칭찬했다네. 그게 눈이더군.]

칼날 사냥꾼은 영상 기록 수정구를 재생시켰다.

수정구에는 실리아와 할리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진한은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갔다.

칼날 사냥꾼은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켰고, 진한은 창밖에 뜬 달을 바라봤다.

============================ 작품 후기 ============================

디블라스//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글 쓰기위해 노력하겠습니다.

whanlee // 과찬이십니다. 더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酒狂者 // 이번 편도 잘 보고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르리엔// 감사합니다, 카르리엔님. 이번 편도 재밌게 감상하셨기를..

rmswnrjs// 그랬었지요...

길치곰// 졸귀 엘리스가 각성해쯥니다!!

Damaoka// 단번에 회귀 이전의 힘을 갖추지는 않습니다.

과연 '비극 재경험'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각성한 엘리스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기억속에 잊혀져버린 메이첸!!

추천, 선작,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즐거운 감상 되셨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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