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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3 실리아 (23/40)

00023  실리아  =========================================================================

 ‘시간 회귀…….’

실리아는 진한의 말을 통해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진한은 시간을 되돌아온 슬레이어.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클래스가 더블 클래스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손에 꼽았다.

진한은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서 클래스 계승 조건마저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녀는 클래스 ‘비극 관람자’의 주인이자 ‘균열의 마법사’의 주인이었다.

‘균열의 마법사’ 클래스를 계승하기 위한 조건은 바로 정신에 균열이 있어야 할 것.

누구나 정신에 균열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리아가 원하는 균열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자아가 깨져버리기 직전의 균열.

여태까지 모든 ‘균열의 마법사’들이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했다.

그래야 ‘균열의 마법사’ 클래스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서기 전에도 정신에 균열은 상당했지만, 그녀에게는 의지가 있었다.

돌아가겠다는 의지.

균열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원하는 슬레이어는 미친 슬레이어이지, 부서진 슬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엘리스는 최적의 슬레이어였다.

“저와 엘리스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카이센이 약속한 기회입니다. 카이센이 주는 단 한 번의 기회.”

진한은 실리아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실리아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넌 대체…….”

더 이상 추궁할 수 없었다.

진한은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진한은 ‘카이센의 슬레이어’를 상징하는 문양을 보여주고, 그가 알고 있는 실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하지만 모든 걸 밝히지는 않았다.

딱 자신이 밝힐 수 있는 범위만큼만, 자신이 밝히고 싶은 범위만큼만.

그것만으로 실리아에게 진실성을 보여줬다.

실리아가 진한을 믿을 수 있는 만큼만 보여줬다.

“우선, 우선 안으로 들어가.”

그녀는 진한을 지나치며 검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한은 실리아의 뒷모습을 돌아보고는,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유적지 안쪽은 입구와는 달리 정갈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좀 더 안쪽으로 향하자 그때서야 복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양식을 갖춘 길이 나타났다.

복도로는 좌우로 문이 있었고, 복도의 맨 끝은 거대한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중 문이 열려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

진한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은 실리아가 평소 거주하는 공간인지 몇 가지 가구와 마법 아이템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진한은 수정구가 놓인 탁자 앞에 앉았다.

‘적합한 카이센의 슬레이어가 나타나면, 일곱 마스터의 염원이 이뤄진다.’

회귀 이전에 진한 역시 익히 들었던 문구였다.

모든 일곱 마스터들 역시 저 문구 때문에 카이센의 슬레이어를 정하기 망설였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진한이 카이센의 슬레이어가 되고, 몇몇 마스터들은 염원을 이룰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 와중에 오직 실리아만이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극 관람자’의 계승자를 진한으로 점찍었으나, ‘균열의 마법사’의 계승자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끝내 실리아는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런 의미였나.’

진한이 회귀를 하고, 엘리스를 만나고 실리아를 찾아왔다.

‘카이센의 슬레이어’가 나타났으며, 실리아의 앞에 두 클래스를 계승할 슬레이어가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실리아의 염원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카이센, 카이센이라.’

진한은 그 스스로가 ‘카이센의 슬레이어’였지만, 카이센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많지는 않았다.

그저 십이 군주와 반대되는 곳에 위치한 존재라는 것 정도.

그렇다고 그 존재가 십이 군주처럼 슬레이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진한보다 더즌 헬을 잘 아는 슬레이어는 없었다.

그럼에도 진한이 알고 있는 더즌 헬의 비밀은 많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탐구자도 아니었으며, 연구자도 아니었다.

진한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십이 군주의 목을 베어버리고, 더즌 헬을 끝내는 것이었다.

미래에 관한 굵직굵직한 정보를 알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충분히 활용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더즌 헬은 정보만을 가지고 무언가를 꾀하기는 너무도 척박한 세상이었다.

히든 피스와 앞으로 발견 될 아이템들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개인의 힘뿐만이 아닌 집단의 힘.

집단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이 필요했다.

회귀 이전처럼 순차적으로 힘을 쌓기에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바로 ‘비극 관람자’였다.

실리아를 다시 보는 것은 편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실리아는 몸을 웅크린 두 남녀를 바라봤다.

메이첸과 엘리스.

실리아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둘을 감싼 검은 안개가 사라져갔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메이첸이었다.

“……?”

그는 식은땀으로 범벅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실리아를 발견했다.

“씨발, 이건 또 뭔…….”

“닥치고 자라.”

실리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메이첸이 정신을 잃고 픽 쓰러졌다.

그녀는 엘리스에게 다가갔다.

“토끼님, 토끼님, 토끼님. 날 버렸어. 토끼가 날 버렸어. 토끼가 엘리스를…….”

“고개를 들어보렴.”

엘리스는 실리아의 말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엘리스를 버렸어. 토끼가 엘리스를 버렸어. 아냐, 아냐, 아냐.”

“아이야, 고개를 들어보렴.”

거듭된 실리아의 부름에도 엘리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실리아는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균열의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큰 균열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망가져 버려서는 안 된다.

지금의 엘리스는 실리아가 보기에는 완전히 망가져 버린 모양새였다.

실리아는 고민했다.

‘균열의 마법사’를 계승하기에 최적의 조건인 줄 알았건만, 실상을 보니 실 끊어진 인형이었다.

‘차라리 죽이는 편이…….’

그 편이 엘리스를 위해서도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실리아는 고개를 돌려 흘끗 동굴 안쪽을 바라봤다.

진한과 엘리스는 동료였다.

그리고 ‘듣는 법’을 배웠다는 진한은, 누가 뭐라 해도 ‘비극 관람자’를 계승하기 위한 최적의 슬레이어였다.

그녀의 가슴 안쪽에서 짓궂은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이 상황에서 엘리스를 죽이면, 과연 진한은 어떻게 행동할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남자는, 과연 동료의 죽음을 두고 어떻게 반응할까.

“자, 우리 꼬마 숙녀님. 이 언니가 악몽을 끝내줄게요.”

그녀는 엘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

“방도 많을 텐데, 하필 이 방이야?”

팔짱을 낀 채 꾸벅 졸던 진한은 문가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실리아였다.

“……엘리스는?”

진한은 실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옆으론 정신을 잃은 메이첸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엘리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글쎄?”

실리아는 진한을 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진한이 보기에는 다분히 악의적인 미소였다.

그녀의 시선은 진한의 눈동자, 표정, 몸 전체를 끈적하게 훑고 있었다.

반응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됐을까? 응?”

그녀는 진한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실리아의 고운 손이 진한의 볼을 타고 내려와 턱 끝을 매만지더니, 미끄러지듯 가슴팍 옷깃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그 여자애, 균열이 너무 컸어. 슬슬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한계를 초과해버렸지 뭐야?”

그녀는 진한의 옷깃을 풀어헤치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 사이로 고개를 내민 혀가 진한의 가슴을 훑고는, 목덜미로 올라갔다.

“네가 데려온 계승자는, 하아. 적합하지 않았어. 흐응.”

그녀의 들뜬 숨결이 진한의 귓불을 자극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손은 진한의 상의를 완전히 풀어헤치고,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그 아이를, 어떻게 했을까?”

그녀는 행동을 멈추고 진한을 바라봤다.

“……응?”

무심한 눈.

한 톨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눈이었다.

진한은 실리아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밀어냈다.

“원하는 반응은 볼 수 없을 겁니다.”

진한만큼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만약 그녀가 엘리스를 죽였다면, 그 사실을 결코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균열의 마법사’의 계승자보다 찾기 힘든 것이 ‘비극 관람자’의 계승자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비극 관람자’를 전승할 때까지, 자신에게 엘리스의 죽음을 감췄을 것이다.

만약 엘리스의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을 지라도, 죽이지 않고 살려서 이 자리에 데려왔으리라.

그편이 자신을 다루기에 편할 테니까.

진한의 반응에 실리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재미없네. 너 시간 회귀자지?”

“그렇습니다.”

“흐응, 그래.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사제지간이었으니까요.”

진한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담담히 대꾸했다.

실리아는 그 모습에 피식 미소 지었다.

“그래? 뭐, 그래 그렇다면. 그러면 우선 ‘비극 관람자’를 계승하러 가볼까?”

그녀는 메이첸을 땅에 놓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진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방을 나섰다.

그녀가 진한을 안내한 곳은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철문이었다.

그녀가 손을 휘젓자 육중한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둘을 맞이했다.

철문 안쪽은 빛이 닿지 않는 듯 시커먼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듣는 법을 배웠다 그랬지?”

“그렇습니다.”

‘비극 관람자’는 단순히 타인의 불행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불행 속에서 흐느낌을 들어야 비로소 비극을 봤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 ‘듣는 법’이라기보다는 ‘공감하는 법’에 가까웠다.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은 천차만별이고, 불행이라 해도 그 사람이 느끼는 정도와, 불행을 느끼는 요소가 달랐다.

‘듣는 법’은 그것을 보는 방법이었다.

얼마나 불행한지, 어떤 점에서 불행을 느꼈는지.

과거 그녀는 진한에게 ‘듣는 법’까지 만을 알려주고 죽음을 맞이했다.

“비극 관람자가 되면 대가를 치러야 돼.”

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그녀의 말로는 그녀는 그 대가로 ‘망각’을 잃었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

타인의 ‘비극’을 보면서 힘을 얻는 비극 관람자에게 실로 어울리는 대가가 아닐 수 없었다.

“준비 됐으면, 저 안으로 들어가. 저기 들어가면 네가 치러야 할 대가를 정할 거고, 대가가 지불되고 나면, 너는 비극 관람자를 계승할 거야.”

그녀는 설명을 마치고, 옆으로 물러섰다.

진한은 시커먼 문 너머를 응시했다.

‘비극 관람자’는 경험한 불행과 봐온 불행을 통해 힘을 얻는 클래스.

진한이 ‘듣는 법’을 익히고 경험하고 봐온 불행은 셀 수 없었다.

‘기억의 반지’가 진한이 기억하는 회귀 이전의 힘을 재현해 주었을 때 진한은 추측뿐인 사실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회귀 이전의 경험들 역시 시스템의 보조를 받을 수 있다.

‘비극 관람자’는 진한에게 단번에 힘을 줄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었다.

설령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할지라도 진한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길이었다.

진한은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리아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진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균열의 마법사와 비극의 관람자 모두다 시험에 들어섰다.

그녀의 염원이 하루아침에 해결되었다.

그녀는 꽤나 오랜 시간동안 굴레와 염원에 사로잡혀 억눌려 있었다.

심리적 압박이 사라지자, 그녀의 호기심이 뭉글뭉글 솟아났다.

“너는 나랑 어떤 사이였니? 왜 밝히지 못할까?”

밝힐 수 없었다면, 애초에 모든 것을 밝힐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한은 두 번째 만남부터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은 어떤 형태였으며, 그 끝은 어떻게 되었을까.

실리아는 ‘비극 관람자’라는 직업을 사랑했다.

그 어떤 연극이나 소설보다 살아있는 생생한 스토리, 거기서 느껴지는 절망감.

그녀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회귀 이전 진한과 자신 사이에는 어떤 ‘스토리’가 있었다고.

그녀의 호기심이 향하는 종착지는 바로 진한이었다.

============================ 작품 후기 ============================

이토록아름다운// 흠흠... 쉿.... 목이 안빠지셔서 다행입니다.

혼// 네! 화이팅 하겠습니다.

길치곰// 회복은 꽤 빠른 편이 아닐까,합니다.

Damaoka// 넵.. 금주하고 있습니다.

조이코르// 감사합니다. 몸조리 잘 하겠습니다.

酒狂者 // 감사합니다. 이번 편도 잘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끙.. 이번 에피소드는 너무 중구난방인 것 같네요.

처음 방향 잡았을 때 쭉 썼어야 하는데, 중간에 수술때문에 좀 처진 감이 없잔아 있습니다.

수술때문에 금주중입니다.

사실 헬 슬레이어 분량 중 태반이 취중에 쓴 글들입니다.

술을 안마시니까 글이 매끄럽지 않은 것 같네요..

술 안마시고도 좋은 글 쓸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과연 '비극 관람자'로 전직한 진한은..?

과연 실리아의 호기심은 어떤 결과로 나타날 것인가?

과연 엘리스의 행방은...?!

추천, 선작,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저는 특히 코멘트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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