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실리아 =========================================================================
“내가, 네 스승이라고?”
실리아는 진한을 응시했다.
그녀는 평생을 살면서 제자를 두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무언가를 알려줬다 해도, 스스로가 제자라고 자칭할 만한 뭔가를 알려줬을 리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방인은 자신을 스승이라고 지칭했다.
“그리고, 어떻게 카이센의 슬레이어가 존재할 수 있는 거지?”
“확인해보십시오.”
진한은 가슴팍을 풀어헤쳐 카이센의 슬레이어를 상징하는 문양을 보여줬다.
“이, 이럴 수가.”
넘실거리는 일곱 줄기의 불꽃 중 한 줄기가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빛을 발하는 불꽃의 줄기에서는 그녀의 기운이 뚜렷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아, 아. 그렇다면…….”
“스승님께 지워졌던 굴레는 사라졌습니다.”
진한은 흔들리는 실리아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카이센의 슬레이어’를 임명하는 것은 일곱 마스터들에게 하나의 굴레였다.
‘카이센의 슬레이어’가 생기지 않는 이상, 일곱 마스터들은 자신들의 염원을 절대 이룰 수 없다.
대신 그들이 적합한 ‘카이센의 슬레이어’를 임명하게 되면, 그들의 염원은 반드시 이뤄진다.
이것은 그들에게 저주임과 동시에 축복이었다.
진한은 실리아의 염원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그녀를 제외한다면 오직 진한만이 그녀의 숙원을 알고 있으리라.
“스승님, 제가 당신의 숙원을 이뤄드리겠습니다.”
실리아의 숙원이란, 그녀가 가진 능력에 대한 것이었다.
“스승이라는 호칭도 거슬리지만……. 나의 숙원이 뭔지나 알고 지껄이는 거지?”
“비극을 보는 당신의 눈…….”
진한은 실리아의 눈을 바라봤다.
머리칼과 쏙 빼닮은 은빛 눈동자.
인지 가능한 모든 불행을 지켜봐온 눈이었으며, 마지막 순간엔 진한에게 사무치는 비극이 되었던 눈동자였다.
“클래스 비극 관람자를 이어 받겠습니다.”
진한과 눈을 마주한 실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그녀의 염원은 클래스의 계승이었다.
*
“이 씨발년놈들이…….”
메이첸의 주위로는 금빛 털이 달린 공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하나, 둘이 아니었다.
족히 십 수개는 됨직한 숫자.
그 옆에는 한 남자의 시체가 십 수 개 널브러져 있었다.
공들은 셀리나의 머리였고, 시체들은 모두 김태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메이첸은 과거 몸을 섞었던 여자의 머리와 친우의 시체들 한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그만 좀 해라아-! 이 새끼들아아아아!”
메이첸은 주저앉아 소리쳤다.
끼리릭.
그때, 셀리나의 머리가 일제히 메이첸을 향해 돌아섰다.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눈동자.
[메이첸, 내가 그렇게 미웠니?]
“씨바아아아알-! 좆같은 년아! 네가 날 죽이려 했잖아!”
메이첸의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이건 정신계 마법이다, 이건 정신계 마법이다.
그렇게 되뇌어 봐도, 어쩔 수 없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불로 태우고, 얼리고, 찢어 발겨도 같은 환상이 나타나 똑같은 말을 던졌다.
끼리릭.
[이제 만족해?]
사방에 널브러진 김태수 모가지가 돌아가며 메이첸을 응시했다.
“만족? 씨발! 만족?”
셀리나는 자신을 죽이려 했고, 김태수는 살려두면 자신을 죽이러 쫓아올 것이다.
죽기 싫으면 죽여야 한다.
이것이 당연한 세상이 바로 더즌 헬이었다.
그래서 셀리나를 죽였고, 김태수의 죽음을 묵인했다.
“저 미친년은 날 죽이려 하고, 멍청한 니 새끼는 저년한테 빠져서어어-! 나한테 칼을 들이밀었지,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살려둬어어어!”
[메이첸, 잘 생각해봐. 내가 정말 널 죽이려고 했을까?]
[메이첸, 셀리나만 산다면, 난 너를 용서할 수 있었다. 설령 셀리나가 죽었다 해도, 나는 너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지랄 마. 지랄 마. 지랄 마. 지랄 마.” 메이첸은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한 치의 의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셀리나가 자신을 숙청하려고 했지만, 정말 자신을 죽이려 했을까? 김태수가 정신을 차리면, 정말로 자신에게 칼을 들이댔을까?
“이런 세상이잖아. 이런 세상이잖아, 이 좆같은 것들아. 이게 더즌 헬이잖아, 원래. 그동안 너희가 너무…….”
[더즌 헬스럽지 않았다는 거니?]
[함께 그런 길드를 만들자고 하지 않았나.]
[페어리문은 그런 길드가 되자고 하지 않았니?]
[근데 왜 그랬나.]
[내가 군주의 씨앗이라서?]
[네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셀리나는 그저 겁이 났기 때문이다.]
[왜 나에게 먼저 안 찾아오고, 진한을 찾아간 거니?]
[말로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수 있었다.]
셀리나와 김태수의 말이 계속될수록, 메이첸은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좀 해 이 씨발것들아…….”
몸을 둥글게 만 메이첸의 주위로 셀리나의 머리통이 굴러왔다.
[응? 그만 하라고? 싫어, 메이첸.]
“토끼님, 엘리스를 버리지 마세요.”
엘리스는 살육의 현장 한 가운데서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는 피난체의 난쟁이들이 여자들을 강간하고, 남자들을 도축하고 있었다.
고통에 찬 신음과 가쁜 숨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엘리스.]
엘리스는 지척에서 들리는 토끼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목뿐인 토끼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엘리스가 아니다.]
툭, 데구르르르.
그녀의 옆으로 하나의 머리통이 굴러왔다.
토끼였다.
[너는 엘리스가.]
[아니다.]
다시 하나의 머리가 굴러왔다.
[너는.]
[엘리스가.]
[아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토끼님. 저는 엘리스에요. 저는 엘리스에요. 나는 엘리스에요. 나는 엘리스에요. 저는 엘리스에요.”
엘리스는 다리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엘리스야. 엘리스라고, 엘리스야. 엘리스라고…….”
*
진한이 알고 있는 실리아의 능력은 총 두 개있었다.
하나는 정신계 마법.
더즌 헬에서 정신계 마법이란 썩 편리한 마법은 아니었다.
더즌 헬에서 마법의 제일 가치는 살상력과 효용성이었다.
일반 속성마법은 살상력은 물론 사용하기에 따라서 전투를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는 효용성마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계 마법은 그런 면에 있어서는 형편없었다.
정신계 마법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세뇌계 다른 하나는 환상계.
셀리나의 ‘배신의 준비’와 같은 마법이 세뇌계 마법이었는데, 상대를 알게 모르게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데는 탁월하지만,
대상의 의지와 반하는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셀리나처럼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고, 그것마저도 조건을 위배하면 깨어져 버리기 일쑤였다.
가장 간편한 방법은 약물과 마법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전투에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마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환상계.
환상계는 대상에게 환상을 보여줘 대상의 정신을 파괴시키는 마법으로, 대상을 자살에 이르게 하거나, 이지를 파괴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환상계 마법에 당하는 순간 대상도 즉각 자신이 마법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환상은 대상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 효과가 반감된다.
그렇기에 실제로 이지를 파괴시키는 마법을 구사하려면 적잖은 준비가 필요했다.
같은 준비라면, 속성 마법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정신계 마법만으로 유효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슬레이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진한이 알기로도 그런 존재는 십이 군주와 몇몇 마스터들뿐이었다.
그중 실리아의 정신계 마법은 군주들을 제외한다면 최고라 칭할만했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의 정신계 마법이었다.
실리아의 능력 두 번째는 바로 클래스 ‘비극 관람자’의 능력.
“너 ‘비극 관람자’를 어떻게 알지?”
실리아에게서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힘으로서 진한을 압박해보려는 심산이었지만, 진한은 무심히 대답했다.
“당신이 직접 말해주었습니다.”
“마스터 카덴? 핀도르? 누가 말해 준거지?”
그녀는 힘을 끌어올렸다.
거친 파동이 진한의 몸을 압박했다.
그럼에도 진한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내가? 그럴 리가. 그러고 보니 너는 날 왜 스승이라고 부르지?”
실리아는 진한을 사납게 응시했다.
진한은 그녀와 눈동자를 마주했다.
애송이 슬레이어와 변덕쟁이 마스터의 애매한 관계가 남녀 관계가 될 것이라고는 그녀도 진한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나는 망각을 몰라. 난 이게 저주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너무…… 행복해.’
진한과 실리아가 서로를 받아들인 날, 그녀는 진한의 품에서 행복을 속삭였었다.
‘진한, 진한, 진한, 진한, 진한……. 어떻게 네가 날…….’
훗날 그녀는 진한을 원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한은 상념을 지웠다.
“당신은 제게 듣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진한의 말에 실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듣는 법을?”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은 ‘비극 관람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밟아야 하는 단계 중 하나였다.
거기까지 가자, 실리아는 더 이상 진한을 의심할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없지만, 너만 기억하는 일이 있어. 그렇지?”
그녀의 물음에 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내게 말해줘.”
“그러지요.”
진한은 짧게 대답한 후 뒤를 돌아봤다.
메이첸과 엘리스를 둘러싼 검은 안개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녀가 아직 자신을 경계한다는 증거였다.
엘리스의 정신이 위태했지만, 그녀는 결코 엘리스의 정신을 붕괴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진한에게 들을 것이 있는 이상, 그녀는 엘리스를 망가뜨리지 못한다.
그것이 그녀의 성격이었다.
“말씀드리지요.”
진한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금은 먼, 진한으로서는 떠올리기 힘든 기억이었다.
진한이 엘리스와 만난 것은 시기상으로 두 번이었다.
한 번은 진한이 투기장에서 스킬을 분석하던 시절.
혼자서는 지난하기만 했던 그 일에 도움을 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진한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실리아는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그만큼 여러 분야에 능통했다.
주특기는 마법이었으나, 검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어중간한 슬레이어들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의 검수였다.
그녀는 진한에게 방향을 제시했고, 진한은 그 방향을 자신의 방식대로 착실히 따랐다.
첫 번째 인연은 이렇다 할 특이점은 없었다.
실리아는 진한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고, 진한의 말하는 그녀의 행동은 모두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다음에 당신을 본 것은…….”
진한은 첫 번째 인연을 얘기하고 잠시 말을 멈췄다.
마지막에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본 것은?”
실리아는 진한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진한의 눈동자에는 뜻 모를 감정이 맺혀있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알아채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죄책감.
지금 진한은 망설이고 있었다.
“조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실리아는 진한의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입이 걸걸한 아저씨는 몰라도, 귀여운 꼬마 숙녀는 곧 한계치일걸?”
진한은 뒤를 돌아봤다.
실리아의 정신계 마법은 위험했다.
정신에 관한한 실리아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인간의 정신을 복구 시키는 방법은 몰라도, 파괴 시킬 방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엇보다 엘리스의 정신은 이미 붕괴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한계치라 하면, 엘리스의 정신은 말 그대로 한계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진한 역시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그녀의 뜻대로 따라줬지만, 진한 역시 하나의 카드를 쥐고 있었다.
“엘리스의 정신은 딱 그 정도가 좋습니다. 그편이 스승님께도, 제게도 좋을 겁니다.”
실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 설마?”
그녀는 확신에 찬,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진한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저 아이의 정신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가기를 기다렸던 거니?”
그녀의 염원은 클래스의 계승.
그녀는 더블 클래스였다.
그리고 엘리스는 그녀의 또 다른 클래스를 계승할 최적의 슬레이어였다.
“카이센의 슬레이어가 나타났고, 당신의 염원을 들어줄 슬레이어가 나타났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 작품 후기 ============================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걱정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공지라도 올렸어야 하는데 경황이 없었습니다.
간단한 수술이고, 하루 입원 후 다음날부터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았습니다만, 생각보다 많이 째서, 앉아있기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방석 깔고 앉을 수 있기에 글을 써서 올립니다.
의자에 앉으면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심각한 병은 아닙니다.
부위가 문제였던 거지요... 엉덩이 쪽이었습니다.. 흠흠..
화장실 갈때마다 지금도 지옥을 경험하고 있지만, 이제는 한결 살만해졌습니다.
그래도 화장실 갈때는 앞으로 며칠은 지옥일 거라는데, 앉아있을 수는 있으니 다행입니다.
몸조리가 끝났으니 다시 힘내서 쓰겠습니다.
기다려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 추가 연중을 예고해드리지 못한 점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시 파이팅 해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