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실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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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어들이 강해지기 위해서 선택하는 길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다.
첫째는 몬스터 레이드.
능력치는 곧 힘의 척도였으며, 능력치를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실전이 필요했다.
수련에서 칼을 천번 휘두르는 것보다, 실전에서 한 번 휘두르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둘째는 아이템을 통한 보조.
슬레이어는 아이템을 통해 몇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약점 보완, 강점 강화.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슬레이어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유적지 탐사는 두 가지를 모두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거대 길드는 전용 유적지를 몇 개씩 확보해 놓고 있을 정도로 유적지 탐사를 중요시했다.
일반 필드와는 다르게, 몇몇 유적지들은 한번 소탕한 후에도 시일이 지나면 몬스터들이 채워졌다.
하지만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최초의 한 번뿐.
그렇기에 슬레이어들은 유적지를 탐사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더즌 헬을 탐사했다.
“왜 밝혀지지 않았을까.”
이른 새벽 메이첸은 유적지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신 마을에서 꽤나 떨어진 거리였고, 다른 마을들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산이었지만, 탐사하기 어려운 지역은 아니었다.
그의 기억에 이 지역은 몇 년 전 탐사가 끝난 지역이었다.
“느낌이 쎄한데…….”
그는 진한을 바라봤다.
진한은 어느새 일어나 검을 손질하고, 수련을 하고 있었다.
메이첸이 봐온 진한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슬레이어’였다.
더즌 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앉은 자리에서 한 길드의 길드장을 추락시키는 수단까지.
동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과감히 버릴 것만 같은 인간이 바로 진한이었다.
슬레이어라는 단어가 진한만큼 잘 어울리는 인간이 있을까.
그런데도 이번 결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탐사되지 않은 유적지는 미해결 유적지라고 불렀는데, 미해결 유적지를 단 셋이 탐사한다는 것은 더즌 헬에만 존재하는 색다른 자살 방법이었다.
“씨발, 몰라.”
메이첸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진한은 결코 이유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진한은 사냥꾼의 검을 시스템의 도움 없이 펼친 후 땀을 닦아냈다.
검술 스킬과 같은 하프 스킬들은 일정한 식이 있었다.
하프 스킬은 그런 식들을 충분히 익혀야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냥꾼의 검은 진한이 학살자의 검을 창조하려다 생긴 파생 스킬이었다.
그 식이 학살자의 검과 유사한 부분이 많았지만, 진한의 전투 경험이 녹아들어 변형되었다.
진한으로서도 익숙하지 않은 식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진한은 식을 익히기 위해 하루도 수련을 거르지 않았다.
그에게 수련은 삶의 일부였다.
편리한 시스템의 도움 없이, 스킬을 파헤치고 분석하는 일은 생각보다 지난했다.
이런 쪽으론 어떤 사전 지식도 없는 현대인들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었고, 대부분은 금세 지쳐 나가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진한 역시 처음부터 이런 방법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슬레이어로서의 진한이 성장한 곳은 바로 투기장.
다른 슬레이어들이 아이템을 얻기 위해 유적지를 돌고, 탐사를 할 때 진한은 투기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킬을 분석했다.
방향을 잡아줄 스승이 없는 그로서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흔히 말하는 천재가 아니면 행할 수 없는 지난한 작업.
진한은 유적지를 바라봤다.
‘오랜만이군.’
결과적으로 그는 결국 더즌 헬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슬레이어가 되었다.
하지만 진한은 결코 천재가 아니었다.
이른 오후 채비를 마친 진한과 엘리스, 메이첸은 유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오는구나.”
은발의 여인은 수정구를 보면서 발을 동동 굴렸다.
번잡함이 싫어 유적지를 만들어 은거한 그녀였지만, 예상치 못한 손님들은 때로는 그녀를 들뜨게 했다.
“흐응, 흐응, 어떻게 해줄까나.”
그녀는 유적지의 손님을 대접할 생각에 가쁜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도 더 되는 방법이 떠올랐다.
“흥……. 어떻게 해주지?”
수정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일렁였다.
“귀여운 꼬마 숙녀는……. 트라우마를 좀 건드려 볼까? 하아…….”
그녀는 손끝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수정구를 바라봤다.
“입이 걸걸한 우리 아저씨는……. 얼마 전에 딱한 일이 있었네?”
그녀의 혀는 어느새 손가락을 핥고 있었다.
슬쩍 내려간 반대편 손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탁상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아, 그리고 남의 집을 불태우려한 괘씸한 놈은…….”
그녀는 탁상위에 턱을 괴고 진한을 바라봤다.
순간 베베 꼬던 다리도, 바쁘게 움직이던 가랑이 사이의 손가락도 정지했다.
“왜, 왜 보이지 않지?”
끈적한 열기는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사라지고, 싸늘한 삭풍이 몰아쳤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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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안은 평범했다.
대다수의 유적지가 그렇듯, 내부는 동굴로 이루어져 있었다.
횃불을 든 메이첸은 선두로 나아갔다.
“난 칼받이냐.”
그는 지금의 포지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법사라 하면 당연히 안전을 위해 후진배치를 해주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진한에게서 그런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진한은 대꾸하지 않고 유적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함정 있으면 난 그냥 뒈지는 거 아냐? 탐지 마법도 없는데, 씨바.”
비상식적인 배치였고,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파티 구성이었다.
수준을 떠나서 단 셋뿐인 파티에 마법사만 둘이었다.
몰살당하기 딱 좋은 구성이었다.
파티에 유일한 근접 계열 슬레이어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는지 말이 없었다.
진한은 주위를 슥 둘러봤다.
이곳은 마스터가 만든 유적지였다.
유적지에는 마스터의 성격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는데, 이 유적지는 사람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듯 완전한 자연 상태였다.
‘이제 슬슬 반응이 올 텐데.’
진한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 안개가 진한을 비롯한 두 사람을 휘감았다.
뭉글뭉글 뭉친 검은 안개는 셋을 휘감고 꿈틀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를 해치고 진한이 걸어 나왔다.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온 진한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대상에게 악몽을 보여주는 정신계열 마법이었다.
당장은 손쓸 방법이 없었다.
진한 역시 타이틀 ‘카이센의 슬레이어’가 아니었다면 안개 속에서 악몽을 꾸고 있는 둘과 같은 처지였을 것이다.
그때 유적지에 빛이 환하게 들어오더니,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너 대체 뭐야?”
진한은 은발의 여인을 응시했다.
“당신까지 그런 질문을 할지는 몰랐습니다.”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녀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나타냈다.
“씨발, 이럴 줄 알았다.”
검은 안개에 휩싸인 메이첸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충분한 인원도 갖추지 못한 유적지 탐사 파티의 말로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메이첸은 노련한 슬레이어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함정인가. 아니, 마법인 거 같은데.”
메이첸은 검지에 낀 반지를 응시했다.
반지는 ‘기회의 반지’라는 아이템으로 착용자를 물리적 마법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일전에 진한의 방에 들어섰을 때 엘리스의 마법을 삼켜버린 반지였다.
메이첸은 대기 시간을 확인했다.
강력한 마법까지는 막아주지 못했지만, 물리적 마법이었다면 반지가 작동하지 않을 리 없었다.
[메이첸.]
메이첸은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끝없이 펼쳐진 검은 안개 사이로, 탐스러운 금발이 일렁였다.
“이런, 씨발. 정신계였군.”
안개 너머에는 셀리나의 목을 품에 안은 김태수가 메이첸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끼님? 토끼님 어디 갔어?”
엘리스는 검은 안개에서 진한을 찾고 있었다.
“엘리스 무서워. 어디 갔어요, 토끼님?”
그녀는 진한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토끼님?”
걷고, 걷고 또 걸었지만 안개는 끝나지 않았고, 진한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끝나지 않는 안개속에서 진한을 부르고 또 불렀다.
“토끼님, 어디…… 어디 갔…….”
걷다 지친 그녀는 끝내 자리에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어디 갔어요, 토끼님. 엘리스 무서워요…….”
진한이 사라졌다.
토끼가 사라졌다.
토끼는 엘리스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할 구원자였다.
그런 토끼가 사라졌다.
그녀는 상실감과 불안감에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울다 지쳐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가 앉아있는 곳은 안개속이 아니었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매끈매끈한 돌바닥.
무저갱같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복도와 그 끝에 일렁이는 불빛.
엘리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불빛 반대쪽으로 앉은 채 뒷걸음쳤다.
“싫어……. 싫어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간절한 그녀의 바람과는 무색하게, 복도 끝의 불빛은 가까워졌다.
뒷걸음쳐도, 뒷걸음쳐도 멀어지기는커녕 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마침내 그녀가 불빛이 흘러나오는 입구에 도달했을 때.
“아아아아…….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눈앞에는 거대한 광장이 펼쳐져 있었고.
적색 피부의 난쟁이들이.
인간을 도축하고.
겁간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그녀의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엘리스.]
엘리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토끼님……!”
진한은 평소와 같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끼님, 토끼님, 토끼님, 토끼님, 토끼님.”
그녀는 진한을 부르며 다가갔고.
[너는 엘리스가 아니다. 너는…….]
진한은 그녀를 광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엘리스가 아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녀의 토끼는, 그녀를 지옥으로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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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아는 진한을 응시했다.
그녀는 사람의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트라우마를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비극’이라고 칭해질 만한 사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본 ‘비극’을 토대로, 상대를 나락에 빠트리는 마법사였다.
‘비극’을 보는 것은 그녀의 숙명이었으며 하나의 업보였다.
살면서 ‘비극’을 겪지 않는 지적 생명체는 없었다.
아니, 존재하기는 했다.
바로 십이 군주.
십이 군주가 아닌 이상에야 그녀는 ‘비극’을 볼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눈앞에 선 슬레이어에게서는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설마 십이 군주……?”
“그럴 리가요.”
말도 안 되는 그녀의 추측에 진한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너는 보이지 않지? 뭐야 넌?”
진한은 대답 대신 자신의 상의를 풀어 헤치고 가슴에 박힌 문양을 보여줬다.
타이틀 ‘카이센의 슬레이어’를 상징하는 문양.
문양을 알아본 실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카이센의 슬레이어였어? 그럴 리가?”
카이센의 슬레이어라면 자신이 ‘비극’을 볼 수 없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 ‘카이센의 슬레이어’는 있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슬레이어들은 마스터들을 그저 클래스나 스킬을 전수해주는 NPC정도로 생각했지만, 그들에게는 역할이 있었다.
마스터들 중에서도 일곱 마스터들만이 맡은 역할.
바로 ‘카이센의 슬레이어’를 정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카이센의 슬레이어’가 되기 위해서는 일곱 마스터들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실리아는 바로 그 일곱 마스터 중 하나였으며…….
“기억 못하겠지만, 보고 싶었습니다. 스승님.”
진한의 스승이었다.
이것이 진한이 실리아의 유적지를 알고 있는 이유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진한의 눈동자에는 얼핏 뜻 모를 감정이 내비춰졌다.
그 감정의 정체는 죄책감이었다.
============================ 작품 후기 ============================
酒狂者 // 감사합니다! 이번 편도 잘 보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잉여소굴 // ㅋㅋㅋㅋ엘리스가 참... 메이첸은 속터지겠지요
Damaoka // 엘리스는 귀엽게! 유적지는... 털릴까요?!
바다속괴수 // 메이첸은 뭉뭉이로 전락....
귤오렌지레몬에이드 // 귀엽귀엽!! 이번편에서는 불쌍..
길치곰 // 은발여인은... 후회 하긴 할겁니다!
0라이노0// 음음! 과연 트라우마를 마주한 엘리스는 어떻게 될까요
가니메디아 // 어느새 마스코트가 되어버렸네요!!
카이센의 슬레이어 타이틀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진한이 실리아에게 죄책감을 갖는 이유는....?!?!?!
진한에게 스승이라니!!
추천, 선작, 코멘트는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됩니다!
저는 코멘트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