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20 인연 (20/40)

00020  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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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두 남녀가 배신 마을을 빠져 나오는 길목을 걷고 있었다.

“토끼님, 토끼님, 엘리스 졸려.”

진한은 팔에 매달려 칭얼대는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토끼님, 저기 애꾸눈 따라와.”

엘리스는 뒤를 보며 손가락질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배낭을 한 보따리 맨 메이첸이 딴청을 피우며 걸어오고 있었다.

“가만 둬라. 집 잃은 개니까.”

“이 씨발, 사람 새끼보고 개새끼라니.”

그 말에 발끈한 메이첸은 곧장 둘에게 따라 붙어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이 미친년은 자꾸 애꾸눈이라고 하네.”

“페어리문은 어쩌고 여기까지 왔나.”

진한의 물음에 메이첸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미 끝난 길드 미련 둬봐야 뭐하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숨길 수 없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페어리문은 그가 더즌 헬에서 이뤄놓은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휴지조각보다도 못하게 전락해 버렸다.

길드장은 군주의 끄나풀이었고, 유일하게 생각했던 친우는…….

“그리고 어떤 잡것이, 내 칼을 쌔벼서 태수 목을 그어버렸어. 그거 존나게 잘 드는 칼이거든. 신규 슬레이어도 힘만 좀 주면 내 목도 댕겅하는. 응?”

죽어버렸다.

“신규 슬레이어를 강조하는군.”

“죽여도…….”

진한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아니, 씨발 좀 들어봐.”

“오다가 주웠다.”

진한은 품에서 푸른 단검을 꺼내 메이첸에게 내밀었다.

메이첸은 단검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잃어버렸다는 단검이 진한의 품에서 나온 것이다.

“죽여도……. 내가 죽여야 했거든. 그 씨발럼이 정신 차리면……. 나한테 칼을 들이밀 거 아니냐. 그리고 살아도 지옥일 거 아니냐. 그냥 끝내는 게 서로를 위하는 일 아니겠어?”

진한은 말없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메이첸은 멍청하지만, 감각적인 슬레이어였다.

그도 모를 리 없었다.

태수가 정신을 차리면,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 것이라는 사실을.

정에 연연하는 슬레이어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었다.

김태수는 죽여야 했다.

“근데, 씨발……. 여간 미안한 게 아니더라. 죽이는 게 당연한 건데. 씨발.”

진한이 출입증을 요구했을 때, 그는 진한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렇기에 자신의 서재에서 진한이 단검을 빼 갈 때도, 못 본 척 한 것이다.

그는 김태수의 죽음을 묵인했다.

“못 죽일 거 같았다. 근데 어떤 잡것이 대신 죽였더라.”

“그렇군.”

“그래서 그 잡것이 어떤 놈인지 궁금하니까…….”

진한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씨발 좀 들어 보라고오!”

“따라 올 거면 닥치고 따라와라.”

“맞아, 애꾸눈. 좀 닥쳐. 토끼님, 엘리스는 잘 닥쳐. 착해. 칭찬해줘.”

진한은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 일주일째다. 일주일.”

메이첸이 품에서 담배를 찾았지만, 남아있는 담배가 없었다.

그가 진한을 따라 나선지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진한은 그 일주일동안, 그저 걷기만 했다.

메이첸은 슬슬 진한을 따라 나온 것을 후회했다.

페어리문은 자신의 손으로 괴멸시킨 것이나 다름없었고, 더 이상 남아있어 봐야 미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페어리문은 결국 남은 길드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터였다.

그 꼴을 보고 있을 바에는 떠나는 편이 나았다.

진한은 여러모로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슬레이어였다.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정보를 신규 슬레이어가 알고 있었고, 결단력 역시 뛰어났다.

신규 슬레이어라고는 하지만 셀리나의 목을 자를 때 보여줬던 움직임은 그조차 본 적 없는 움직임이었다.

비록 진한이 김태수를 죽였지만, 진한이 죽이지 않더라도, 끝내 자신이 죽였을 것이다.

그는 특유의 감각으로 진한을 정의 내렸다.

‘슬레이어.’

다른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도 없이, 진한은 슬레이어였다.

신규니, 중견이니 하는 구분은 무의미했다.

‘비밀은 많지만…….’

비밀이 많다는 것은 곧 알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

오히려 그편이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 빌어처먹을 지옥에서 이런 흥미라도 있어야지.’

그렇기에 그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진한은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벌써 일주일째 야영을 반복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메이첸은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간간이 나오는 몬스터라도 때려죽이면 좀 나았겠지만, 진한은 철저히 메이첸을 배제했다.

“씨발, 심심해 죽겠다고오.”

“꼭 똥마려운 개새끼 같군.”

“토끼님, 애꾸눈 개새끼야?”

“아니, 사람이다. 하지만 개 같을 뿐이지.”

“개 같은 애꾸눈?”

“그래, 바로 그거다. 똑똑하구나.”

“애꾸눈은 개 같다. 기억했어. 토끼님, 엘리스 칭찬해줘.”

진한은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씨발, 좆같은 연놈들이…….”

메이첸이 화를 못 이기고 폭발하려 할 때, 진한이 산 중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저기가 우리 목적지다.”

“일주일째 걸어서 온 곳이 고작 산?”

메이첸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진한을 바라봤다.

배신 마을 인근의 유적지는 전부 꿰고 있는 메이첸이었다.

진한이 가리킨 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진한은 배낭에서 담배를 꺼내고 불을 붙였다.

“대가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라. 일주일이나 걸어서 산을 왔겠는가.”

“그럼 뭐냐고.”

메이첸의 시선이 진한이 물고 있는 담배에 머물렀다.

“유적지.”

진한은 메이첸의 시선을 느끼고 담배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메이첸의 눈동자가 진한의 손끝에 머물렀다.

“토끼님, 우리 집 해피는 간식주면 조용해졌어.”

“유……적지? 저긴 유적지 없는데? 아무 산이나 들어간다고 유적지가 있는 건 아니…….”

진한은 배낭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좀 닥치고 따라와라.”

“…….”

메이첸은 입을 꾹 닫았다.

대부분의 유적지에는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간혹 이 세계의 주민이 만들어낸 유적지가 존재했다.

슬레이어는 스킬의 도움으로 기술을 익힐 수 있었지만, 주민들은 달랐다.

오직 수련과 탐구.

성장치가 슬레이어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느렸지만, 주민들 중에는 간혹 괴물같은 이들이 존재했다.

일명 마스터라 칭해지는 존재들.

이따금 마스터들은 깊은 산중에 유적지를 만들었고, 몬스터를 불러들이거나 나름의 방법으로 슬레이어의 침입으로부터 유적지를 보호했다.

진한이 가고 있는 유적지 역시 마스터가 만든 유적지였다.

회귀 이전에는 어떤 슬레이어에게도 밝혀지지 않은, 진한 역시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유적지.

진한은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이 유적지야말로 진한이 배신 마을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

“씨발, 유적지가 있는 게 맞기는 맞냐?”

모닥불 앞에서 잠자리를 준비하던 메이첸은 역정을 냈다.

산에 들어서고 벌써 삼일이 지났다.

삼 일간 유적지를 탐사했음에도 유적지는커녕 몬스터조차 보지 못했다.

“엘리스.”

진한은 메이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엘리스를 불렀다.

“네, 토끼님.”

엘리스는 능숙하게 진한의 배낭을 뒤져 담배를 한 까지 꺼내 메이첸에게 내밀었다.

“뭉뭉이 밥 먹자, 밥.”

“이 미친년이?”

메이첸은 눈을 부라리면서도 엘리스에게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아, 유적지가 있기는 있는 거냐고오.”

메이첸의 투정은 담배를 입에 물고도 멈추지 않았다.

“엘리스.”

진한은 다시 엘리스를 불렀다.

“네, 토끼님.”

엘리스가 마법을 영창하자 그녀의 손에 마법이 깃들었다.

“아, 씨발. 그래, 닥친다 닥쳐.”

엘리스가 영창 한 마법은 물 속성 마법이었다.

“담배 하나가지고, 드러운 년놈들…….”

메이첸은 담배를 마저 피고 침낭에 들어가 누웠다.

진한은 모닥불 앞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엘리스는 쪼르르 달려와 성냥불로 담뱃불을 붙여줬다.

진한은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유적지는 이 산에 있는 것이 맞았다.

삼일 간 산을 뒤지며 확인해 봤지만, 그가 알고 있는 특징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진한에게 확신을 더해줬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유적지는 나오지 않았다.

다시 삼일이 지났다.

메이첸은 이미 지루함에 탈진 상태였다.

“저 미친년은 지루하지도 않나.”

그는 진한에 팔에 매달려 쫑알대는 엘리스를 바라봤다.

“엘리스.”

“네, 토끼님.”

엘리스는 진한의 배낭에서 담배를 꺼내 메이첸에게 건네줬다.

“썅, 내가 개냐.”

말을 하는 와중에도 메이첸의 손은 이미 엘리스가 건네주는 담배를 쥐고 있었다.

“뭉뭉이 밥 줬어, 토끼님. 칭찬해줘.”

진한은 대꾸하지 않고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진한은 자리에 멈춰 서서 곰곰이 생각했다.

유적지는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유적지의 입구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적지의 입구는 감춰져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지금까지처럼 육안으로 찾아봐야 같은 결과의 반복일 것이다.

“오늘까지 못 찾으면…….”

“못 찾으면?”

메이첸은 떨리는 눈빛으로 진한의 입을 주시했다.

그는 진한이 드디어 유적지 찾기를 포기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산을 불태운다.”

“이런 미친놈이?”

메이첸은 진한을 바라봤다.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진지한 표정에 메이첸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불장난하면 밤에 쉬야해, 토끼님. 토끼님 밤에 쉬야하겠다.”

아무리 임자 없는 산이고, 몬스터가 없다지만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괜찮다, 불 지르는 건 메이첸이니까.”

“애꾸눈 쉬야한대 오늘밤에.”

“이런 미친년놈들이…….”

메이첸은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그리고 그날 밤, 그들은 거짓말처럼 유적의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갈하게 정돈된 방 안에 한 여인이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은 달빛을 연상케 하는 탐스런 은발의 미인이었다.

“이런 똥물에 튀겨죽일 새끼가.”

하지만 그녀의 고운 입에서는 상스러운 단어가 튀어 나왔다.

“남의 집에 불을 질러?”

그녀의 수정구는 유적지 입구 앞에서 야영하는 진한 일행을 비추고 있었다.

“오냐, 어디 한번 들어와 봐라. 뭘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수정구슬 안의 남녀의 얼굴을 하나, 하나 응시했다.

“끔찍한 악몽을 꾸게 해줄게. 특히 너.”

고운 손가락이 진한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한은 야영준비를 마치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런 씨발, 진짜 이 인원으로 유적지로 들어간다고?”

메이첸은 진한을 보며 말했지만, 진한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담배를 피웠다.

엘리스는 말없이 진한의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메이첸에게 내밀었다.

“야이 광년아, 너도 말 좀 해봐. 저 토끼새끼가 지금 우리를 다 죽이려 그러는데.”

엘리스는 진한의 허벅지를 배고 진한의 배에 고개를 파묻었다.

“저 썅년이 이제는 내 말은 들은 채도 안하네.”

메이첸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훅 내뿜고, 진한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엘리스.”

“애꾸눈, 너 닥치래.”

“하, 썅.”

메이첸은 담뱃불을 바닥에 지져 끄고는 침낭에 들어가 누웠다.

진한은 무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토끼님, 쉬야해? 불장난 안했는데.”

진한은 팔에 오소소 돋은 닭살을 매만지며 유적지 입구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실수 한 것 같군.”

“그래, 셋이서 유적지를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야. 특히 저런 미친년을 데리고.”

메이첸은 침낭에서 벌떡 일어나 반색했다.

진한은 담뱃불을 끄며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토끼님이 너 닥치래.”

진한의 이름을 빌려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엘리스였다.

============================ 작품 후기 ============================

酒狂者 //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니메디아 // 응원 감사합니다 ㅠㅠ 오늘은 이상하게 글이 더디네요..

Damaoka // 사냥의 시간!!이 끝나면 발전의 시간!!

길치곰 // 머리통.... ㅎㅎ.. 불쌍한 셀리나입니다..

귤오렌지레몬에이드// 하루만에 정주행 해주셨군요!! 모든 댓글 다 감사합니다!!

유적지 안의 은빛머리 여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이제는 엘리스가 영악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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