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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9 인연 (19/40)

00019  인연  =========================================================================

 진한은 셀리나의 머리를 들고 단상 위로 걸음을 옮겼다.

“전투는 끝났다!”

그는 셀리나의 수급을 높이 치켜 올렸다.

전투의 소음으로 난잡한 연무장에 진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한의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셀리나의 탐스런 금발이 태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셀리나의 편에 서서 싸우던 중진들도, 메이첸의 윽박에 검을 빼들었던 길드원들도 모두 진한을 바라보았다.

“아, 아아…….”

중진들은 망연히 진한을 바라봤다.

“개자시익-!”

그중 중진 한 명이 창을 빼들고 진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한은 그에게 시선을 옮기지도 않고 걸음을 반보 옆으로 움직여 창을 피해내고는…….

서걱.

목을 잘라냈다.

목을 잃은 몸뚱이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중진들은 어쩔 줄 모르고 김태수를 바라봤지만, 김태수는 이미 셀리나의 죽음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투 의욕을 상실했다.

“메이첸.”

진한은 먼 곳에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메이첸을 불러들였다.

“……너 대체.”

“수습해라.”

진한은 바닥에 떨어진 창을 골라잡고는, 셀리나의 수급을 효시했다.

“얘기는 나중에 하지.”

진한은 그대로 연무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방으로 돌아온 진한은 담배를 태우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처리는 메이첸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셀리나의 편을 든 중진들은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속박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태수.’

김태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수는 속박되는 그 순간까지도, 셀리나의 몸뚱어리를 놓지 못했고, 그의 시선은 효시된 셀리나의 수급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신 마을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셀리나와 김태수 때문이었다.

하지만 셀리나는 군주의 씨앗이었고 김태수는 셀리나의 죽음으로 무너져 버렸다.

‘무너져 버렸군.’

김태수의 눈은 죽어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셀리나의 죽음으로 무너져버릴 슬레이어였다면, 이전 생에서도 자신과 함께하지 못했으리라.

셀리나의 품에서,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벗어난 김태수는 이전보다 더 날카롭고, 예리한 칼이 될 것이다.

김태수는 그런 슬레이어였다.

꺾여도, 부러져도 다시금 일어나 길을 걷는 고행자.

재능도 충분했고, 정신력도 대단했다.

시련이 김태수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는 더 강해질 것이다.

진한은 담배연기를 뿜으며 김태수를 응시했다.

다시 일어난 김태수의 칼날은 과연 누구를 향할까.

메이첸? 더글라스?

아니다.

김태수의 칼을 든다면, 그 칼은 자신을 향하리라.

“엘리스.”

“응, 토끼님.”

엘리스는 바닥에 앉아 진한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김태수에게 다녀와라.”

“싫어. 토끼님이랑 있을래.”

“…….”

진한은 눈살을 찌푸리고 엘리스를 내려다 봤다.

엘리스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연무장에서의 전투가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인지 그녀는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진한은 말없이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래라.”

엘리스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진한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잠들었다.

얼마 안 지나서 진한의 방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역시 보험은 알고 들어야지.”

더글라스였다.

그의 얼굴은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진한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능력치는 역시 그대로군요.”

더글라스는 진한의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진한 역시 담배를 입에 물며 그를 응시했다.

더글라스는 기억의 반지를 사용한 진한의 능력치를 봤을 것이다.

디텍터는 스킬 숙련도에 따라 볼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달라졌다.

“어디까지 봤지?”

진한의 물음에 더글라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나를 저기 밖에 있는 멍청이와 동급으로 생각하나본데…….”

“어설프게 머리 굴릴 바에는, 멍청한 편이 좋지.”

더글라스는 말없이 담배 연기를 뿜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더글라스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미안하오. 아니, 미안합니다.”

더글라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진한은 표정없는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더글라스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슬레이어였다.

디텍터라는 클래스를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그처럼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분위기를 읽는 그의 감각은 매우 뛰어났다.

“그저, 말도 안 되는 능력치를 보았을 뿐입니다. 스킬도, 타이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사실 그대로 전달했다.

더즌 헬에서 정보란 곧 목숨과 같았다.

알아야 할 정보를 알지 못하면 죽는다.

하지만 반대로 알지 말아야 할 정보를 알아서 죽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말을 듣지 않는 디텍터들이 사냥하고, 약과 정신마법으로 길들이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알지 말아야 할 정보를 알기 때문에.

더글라스는 진한의 상태창을 보았을 때, 두 눈을 파버리고 싶었다.

많은 상태창들을 봐왔지만, 진한과 같은 슬레이어는 없었다.

비밀이 많은 남자였다.

그러면서도 숨기지 않았다.

진한이 단상에 올라서 소리쳤을 때, 더글라스는 직감했다.

‘내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메이첸이 자신을 찾은 것은, 셀리나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처음 자신을 찾아와, 페어리문에서 자신이 만나야할 사람이 있다 할 때, 그자의 목적도 메이첸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한이라는 슬레이어가 자신을 찾은 이유는 페어리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한은 페어리문의 슬레이어가 아니었다.

더글라스가 보기에 이번 사건에서 진한은 제 삼자였다.

“나를, 나를 왜 페어리문으로 부른 겁니까?”

“메이첸과는 달리 대화가 빠르군.”

“메이첸은 이런 계획을 세울 정도로 영악하지 않습니다. 왜 당신은 그를 도왔으며, 저를 부른 겁니까?”

진한은 더글라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본래의 목적은 셀리나와 김태수.

그러나 목적은 틀어지고, 배신 마을에 온 이유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새로 얻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재밌게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슬레이어들이 얽혀버렸다.

엘리스, 메이첸, 더글라스.

셋 모두 이전 생의 자신과는 인연이 없었던 이들이었다.

셀리나와 김태수를 얻을 수 없다면, 그리고 마침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이 당연했다.

더글라스는 머리가 잘 돌아가도, 너무 잘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상태창을 보고, 왜 자신이 그에게 상태창을 보여줬는지를 생각할 것이다.

더글라스는 결코 진한의 상태창을 떠벌리고 다닐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진한은 보험이었고, 진한의 상태창은 그 보험에 대한 확신을 줬을 것이다.

“제게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글라스는 자신의 숙원을 이룰 수 있다면, 뭐든지 줄 수 있는 남자였다.

“그저 보여줬을 뿐이다. 네가 원하는 것을 이뤄줄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아니요, 아닙니다. 당신은 제가 필요합니다. 분명 그럴 겁니다.”

더글라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한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없을 리가 없었다.

어떤 이득도 없는 일에 나서는 슬레이어는 없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진한의 미소가 짙어졌다.

“클로버는 결국 무너질 것이다. 그때 나를 찾아와라.”

“……?”

“약속한 대로 복수를 도와주지, 대신 그 후에 너는 나를 위해 능력을 사용해라.”

진한은 담뱃불을 지져 끄며 더글라스를 응시했다.

“정말, 정말 그것이면 됩니까?”

더글라스는 진한을 바라봤다.

애초에 길드에 들고, 클로버를 키웠던 이유는 동생의 복수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뤄준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이 위험한 남자가 바라는 것이 자신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었다.

“그래, 그거면 된다.”

진한의 말에 더글라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그는 바로 클로버로 돌아갈 것이다.

더글라스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첸이 찾아왔다.

“저년, 저 미친년은 지가 고양이라도 되는 줄 알아?”

그는 진한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잠든 엘리스를 가리켰다.

진한과 메이첸은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할 말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하지.”

진한의 말에 메이첸은 입술을 삐죽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역시 질질 끄는 건 역시 성미에 안 맞아. 너 대체 뭐냐?”

메이첸은 담뱃불을 붙이며 진한을 쏘아봤다.

그는 진한의 정체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신규 슬레이어라고 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정체를 노련한 슬레이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먼저 진한에게 접근한 것도 자신이었고, 도움을 받은 것도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더 궁금했다.

더즌 헬에서 대가없는 호의는 없다.

대가없는 호의를 받았다면, 그날 이후로 잠잘 때 목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네게만 몇 번째 듣는 질문인지 모르겠군.”

“더글라스한테 물어봤거든. 너 신규 슬레이어가 맞냐고.”

“뭐라 그러던가?”

“맞다 그랬단 말야? 근데 네가 아까 보인 움직임은…….”

메이첸은 진한과 태수가 대치하던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태수가 검을 휘둘렀고…….

그 뒤는 보이지 않았다.

진한의 몸이 사라지고, 다시 제 자리에 나타났을 때 그의 손에는 셀리나의 수급이 들려 있었다.

“난 신규 슬레이어가 맞다.”

“조또, 되도 않는 구라를 치네.”

메이첸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진한을 응시했다.

“믿지 못하면 하는 수 없지.”

“씨발…….”

메이첸은 진한의 태도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페어리문은 몰락했다.

자신 역시 김태수와 같았다.

셀리나가 자신에게 먼저 칼을 들이밀지 않았다면, 그래서 셀리나가 자신에게 걸었던 스킬이 풀리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김태수와 같은 위치에서 맞섰으리라.

자신 역시 셀리나의 품에서 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셀리나는 죽었고 자신은 갈 곳을 잃었다.

“소꿉놀이는 끝났다.”

진한의 말에 메이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소꿉놀이……?”

“알지 않나.”

진한의 말에 메이첸은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이 맞았다.

소꿉놀이.

셀리나가 만들어놓은 울타리 안에서, 안주해버렸다.

그녀가 만들어주는 목표를 향해 달렸고, 그녀를 위해 싸웠다.

“이제 슬레이어의 본분으로 돌아갈 때지.”

“틀린…… 말은 아니군.”

메이첸은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내게 바라는 게 뭐지? 왜 날 도와준 거지?”

“딱히. 그저 목적이 맞았다고 할 수밖에.”

“어떤 목적?” “슬레이어의 목적이 뭐가 있겠나.”

“……셀리나가 군주의 씨앗이었기 때문에, 날 도운 것뿐이다?”

메이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과연 슬레이어들 중 십이 군주 토벌에 열을 올리는 슬레이어가 몇이나 될까.

물론 많았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군주 토벌은 계속되고 있었고.

하지만 메이첸이 보기에 진한은 그런 부류의 슬레이어가 아니었다.

“나보고…… 믿으라고?”

“믿지 못하면 하는 수 없지.”

메이첸은 진한의 눈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채색의 눈동자였다.

그 안에는 어떤 욕망도, 열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한의 눈동자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방을 나섰다.

진한은 방을 나가는 메이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더글라스는 말로서 제어가 가능한 존재였지만, 메이첸은 아니었다.

어두운 밤, 진한은 홀로 중진들이 가두어진 감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메이첸이 작성해준 출입증을 제시하니, 손쉽게 들어설 수 있었다.

김태수는 가장 안쪽, 다른 감옥과 한참을 떨어진 독실에 있었다.

그의 양 팔과 양 다리는 구속구로 제압되어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진한은 독실 앞에 서서 초점 없는 김태수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김태수는 곧이어 진한을 발견하고 몸부림쳤다.

구속구에 묶인 몸은, 겨우 대가리만 창살 가까이에 붙을 수 있었다.

진한은 김태수와 눈을 마주했다.

“미안하다.”

그의 손에는 푸른 단검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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