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인연 =========================================================================
“토끼님, 저기, 저기 까만 빛 이뻐.”
진한의 팔에 매달린 엘리스가 셀리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좀 닥쳐라.”
“네, 토끼님. 엘리스 잘 닥쳐.”
진한은 엘리스를 떼어놓고 상황을 주시했다.
셀리나는 군주의 씨앗이다.
회귀 이전에도 군주의 씨앗을 제거하기 위한 활동이 활발했다.
눈에 띄는 특이점 없는 군주의 씨앗을 찾기 위해 온갖 비도덕적인 활동이 활발했다.
마치 마녀 사냥과 같이.
의심이 간다 싶은 슬레이어들이 표적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진짜 군주의 씨앗이 정체를 탄로 났을 때는, 단 한 번도 좋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밝혀졌을 때는 모든 슬레이어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군주의 씨앗이었다.
군주의 씨앗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씨앗을 심은 군주들 역시도.
군주의 씨앗이 가장 위험할 때는 최후의 순간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을 대비하고 있었고, 군주의 씨앗은 목을 베기 전까지 제거한 것이 아니었다.
‘원수는 살려두되 씨는 남겨두지 말라.’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격언처럼 나돌 문구였다.
이 문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첫 번째는 원수는 살려두되 그 자식은 살려두지 말라는 말이었고.
두 번째는 원수는 살려두되 원한이 없는 군주의 씨앗은 살려두지 말라는 말이었다.
자신에게 원한을 갖게 될 원수보다도 이해관계가 없는 군주의 씨앗을 경계하라는 말이었다.
진한은 그 문구를 잊지 않았다.
그 격언을 가장 뼈저리게 실감한 당사자중 하나가 진한이었으니까.
진한은 팔짱을 끼고 사태를 관망했다.
굳이 나설 필요가 없는 상황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셀리나에게서 뿜어져 나온 검은 빛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도 해결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지켜보는 편이 나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아아악!”
그때 셀리나가 온몸에 퍼진 작열통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더글라스와 메이첸은 당황했고, 김태수의 마음은 급해졌다.
셀리나의 비명소리가 도화선이 되어 싸움이 시작 되었다.
“씨발! 길 뚫어!”
메이첸은 더글라스의 호위에게 호통을 쳤다.
셋은 지금 중진들에게 포위되어있는 상황이었다.
생사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일단 포위를 벗어나야 했다.
더글라스는 셀리나를 보며 우왕좌왕했다.
“아, 씨발 버려!”
“욕짓거리는…….”
더글라스는 메이첸의 말을 무시하고 셀리나의 뒷목을 움켜쥐고 앞으로 나섰다.
“와 보시오. 셀리나, 셀리나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소.”
그는 셀리나의 목에 단검을 들이대며 외쳤다.
작열통에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셀리나는 더글라스의 손아귀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난 감당 못해. 네가 잡아라.”
“네, 네넷!” 셀리나의 전투력 능력치가 아무리 낮다고 해도, 더글라스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단순 근력 능력치만 비교해도 더글라스가 한참 밀렸다.
호위는 따라 나서며 셀리나의 뒷목을 잡고 앞으로 나섰다.
“씨, 씨발! 물러, 물러서!”
호위는 셀리나의 뒷목을 잡고 좌우로 흔들며 앞으로 나섰다.
호위의 단검이 셀리나의 목덜미를 짓누르고 있었다.
“참말로 쓰레기네…….”
메이첸은 그런 호위와 더글라스를 보며 혀를 찼다.
“모가지 잘리고 그런 말 해보시오. 난 쓰레기로 살겠소.”
셋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포위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포위를 풀지 마라.”
태수가 명령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금 셋의 포위를 푸는 순간, 셀리나를 구할 수 있는 기회는 없어진다.
“저들은 셀리나를 죽일 수 없다.”
태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약 셋이 셀리나를 죽인다면, 그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먼저 나설 수도 없었다.
여차하면 셀리나의 목을 그어버리는 것도 하나의 수였다.
셀리나가 궁지에 몰려 중진들에게 전투를 명령했듯, 메이첸과 더글라스 역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병신, 저거. 어차피 뒈질년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고. 등신이네, 등신.”
메이첸은 태수를 보며 혀를 찼다.
셀리나는 맹약의 서를 어겼다.
그렇기에 죽을 때까지 작열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죽느니만 못한 삶이었다.
그럼에도 태수는 희망을 놓지 못하고, 셀리나를 살려두려 했다.
“그리고 너희는 참말로 쓰레기고. 알지?”
“좀 닥치시오. 그 모가지가 몸뚱이랑 분리되면 그런 말도 나올 수 없으니까.”
“씨발, 그러니까 분리되기 전에 맘껏 지껄이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총관 나으리.”
“같은 총관끼리 그러지 맙시다.”
“난 백수고.”
더글라스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전투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일반 길드원들은 중진들을 밀어 붙였고, 중진들은 일반 길드원들을 막으면서도, 더글라스와 메이첸에게서 셀리나를 구출할 틈을 보고 있었다.
언뜻 보면 균형이 맞는 듯싶었다.
하지만 진한이 보기에는 확연히 세가 갈렸다.
무엇보다 김태수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김태수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태수는 전투에 들어서면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날카로운 슬레이어였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진한이 잘 알았다.
겉으로 보기엔 얼음처럼 차갑지만, 알고 지내면 누구보다도 어수룩하다.
하지만 전투에 들어서면 누구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는 천부적인 검수였다.
‘곧이군.’
진한은 태수를 주시했다.
태수는 몸을 낮춘 채 앞으로 서서히 나아갔다.
그의 쌍검은 각각 길이가 달랐는데, 그 중 긴 검이 땅을 가볍게 긁고 있었다.
그것은 태수가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나타나는 고질적인 습관이었다.
그그극.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였지만, 진한의 귓가에는 또렷이 들리는 듯 했다.
“여기 가만히 있어라. 절대 전투에 참가하지 마라.”
“응, 엘리스 가만히 있어.”
엘리스는 대답을 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진한을 바라봤다.
진한은 엘리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기억의 반지를 사용합니다.]
[5분간 기억속의 모습이 깃듭니다.]
진한의 눈앞에 시스템 알림창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메이첸은 태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김태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썅노무 새끼, 똥줄타게.”
“똥줄 타면 앞에 나와서 좀 거드시오.”
“아, 거 모르면 닥치고 있읍시다, 총관 나리.”
“댁도 총관이오.”
“난 백수고.”
메이첸이 잠깐 더글라스에게 시선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아, 썅. 놓쳤네.”
그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김태수는 사라져 있었다.
메이첸은 김태수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김태수는 근접 계열 클래스고, 메이첸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뛰어난 전투 마법사라지만 근접 계열 클래스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하, 씨발. 진짜.”
메이첸은 전신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 올렸다.
이럴 때 기댈 것은 오직 감뿐이었다.
그가 뛰어난 전투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그때 그의 감각에 날카로운 살기가 포착되었다.
“야이 머저리 새끼야-!”
메이첸은 앞장서서 가는 더글라스의 호위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호위는 의아한 듯 뒤를 돌아 봤고, 그 순간 날카로운 실선이 허공에 그어졌다.
하나는 호위의 양 팔뚝을, 하나는 호위의 목을.
사선으로 가르듯 실선이 그려졌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호위의 목과 양팔이 선을 따라 떨어져 나갔다.
눈부신 햇빛 아래, 피분수가 솟구쳤다.
그 모습을 본 더글라스와 메이첸은 각자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피분수가 솟구치는 가운데, 셀리나를 품에 안은 김태수가 눈에 들어왔다.
“허, 보험은 역시…….”
“조또, 씨발. 저게 호위야?”
“닥치고 뭐라도 좀 하시오.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더글라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메이첸의 양손에 마법이 깃들었다.
메이첸은 곧장 마법을 김태수를 향해 쏘아 보냈다.
작은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비산했다.
더글라스는 그 광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저 정도 위력의 마법을 이 정도 속도로 영창하는 슬레이어는 드물었다.
“그래도 이름값은 하는…….”
“닥치고 튀어 병신아.”
그럼에도 메이첸은 더글라스의 뒷목을 잡고 포위망이 가장 약한 쪽으로 달려 나갔다.
시간이 부족했다.
노련한 전투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근접전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물론 준비가 충분히 갖춰진다면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마법사의 주력은 애초에 원거리였다.
무엇보다 김태수의 움직임이 평소랑 달랐다.
평소에도 눈으로 쫓기 힘든 몸놀림이었는데, 뭔가 달랐다.
“저 썅년이 뭐했냐?”
분명 셀리나에게서 뿜어져 나온 검은 빛이 원인이었다.
“버프…… 비슷한 거요.”
“조또, 버프면 버프지 뭐가 비슷해.”
“지속 시간이 없소.”
더글라스의 말에 메이첸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버프라면 지속시간이 끝날 때까지 피해 다니면 어떻게든 해결책이 보일 터였다.
그런데 지속 시간이 없다니.
“걍 뒈진 거네.”
“말했잖소. 우린 그냥 뒈진 거라고.”
주위를 둘러보니, 일반 길드원들은 속수무책으로 도륙당하고 있었다.
메이첸은 마법을 영창하는 중진의 뒤통수에 마법을 때려 박고는,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포위를 뚫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홀몸이었다면 어느 정도 가능했겠지만, 더글라스를 끼고 가기는 불가능했다.
‘이걸 버려 말아.’
메이첸은 더글라스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김태수 이 머저리는…….’
따라올 리 없었다. 김태수에게 제일 목표는 셀리나를 구하는 것일 테니까.
고개를 돌려 김태수를 바라봤다.
김태수는 셀리나를 자리에 눕힌 채 검을 빼들고 한 남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저, 저 미친놈은 저길 왜…….”
김태수와 대치하는 남자는 바로 진한이었다.
“너는…….”
김태수는 자신의 앞에 자리한 진한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진한, 적성검사에서 살아나온 두 명 중 한 명이군.”
“그렇게 기억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태수는 진한을 보며 명령했다.
“비켜라. 너 따위가 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역시 무르구나. 나 같으면 그냥 베었을 거다.”
진한의 말에 태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신규 슬레이어이기에 기회를 주려했다.
무엇보다 상황이 급박했다.
셀리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 셀리나를 구할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설령 마약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할지라도 살아있으면 언젠가 기회가 있는 법이었다.
진한은 무심한 눈길로 셀리나를 바라봤다.
그 아름답고 고고한 자태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추한 몰골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눈은 붉게 충혈되고, 입으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아랫도리는 분비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지독한 고통에 제 가슴을 손톱으로 긁어대고 있었다.
셀리나의 몸에는 그녀가 남긴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차라리 죽여주는 편이 그녀로서는 편한 말로였다.
이제 페어리문의 여신은 없었다.
진한은 다시 태수를 바라봤다.
셀리나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되었어도, 태수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태수는 자리에 눕혀둔 셀리나를 품에 안았다.
더러운 분비물이 옷을 축축하게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태수는 셀리나를 품에 안은 채 자리를 박찼다.
“원망하지 말거라.”
그는 곧장 검을 들어 진한의 목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태수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허전한 검의 감촉에 태수는 뒤를 돌아봤다.
진한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그의 손에는 못 보던 물체가 들려 있었다.
탐스런 금빛 실타래가 달린 구체였다.
태수로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물체였다.
“아, 아아……. 아아…….”
태수는 제 품에 안은 셀리나와, 진한의 손에 들린 구체를 번갈아 응시했다.
“으어, 어……. 억……!”
“미안하지만, 군주의 씨앗은 살려둘 수 없다.”
진한은 그렇게 말하고는 셀리나의 목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떠난 자리엔 언어를 상실한 짐승이 울음을 참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카르디오스 // 언제나 감사합니다
엄나무 // 두둥! 등장했습니다!
가니메디아 // ㅠㅠㅠㅠ 비축분 따위 없이 연재중인데.. 다른 마감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Damaoka // 사냥의 시작입니다!! 꼬꼬!
酒狂者 // 또 보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길치곰 // ㅠㅠ 넥스트 텍스트가 많이 늦었지요..?
流江 // 꿀잼이라니!! 감사합니다!! 계속 지켜봐주세요!!
태수 불쌍합니다..
과연 힘을 되찾은 진한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