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덫 =========================================================================
“슬레이어들은 군주 토벌에 성공한 적이 없었소. 전력을 키우고, 게이트에 들어서면 우리는 귀환자가 없는 게이트만을 바라봐야 했지. 그때마다 우리 슬레이어들의 다시 처음부터 전력을 키워야 했소.
저번 토벌보다 더한 병력으로, 다음에는 저번보다 더. 전력을 증강시키고, 토벌대를 꾸려도 결과는 항상…….”
더글라스는 셀리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멸. 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소. 바로 군주의 씨앗.”
그는 셀리나를 응시하는 한편 타이틀 ‘군주의 씨앗’에 대한 설명을 눌렀다.
[군주의 씨앗]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슬레이어에게 전해지는 칭호.
군주로부터 힘을 받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연무장에 모인 슬레이어들을 동요시키기는 충분했다.
“더, 더글라스. 이게 대체 무슨 짓인…….”
“닥치시오, 셀리나. 맹약의 서에 적힌 내용이 기억나지 않소?”
“그, 그대야 말로 맹약의 서에 적힌 내용이…… 아!”
셀리나는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더글라스의 방문이 클로버의 영역 확장을 위한 초석이라고 생각했다.
총관 메이첸이 죽고, 페어리문이 혼란스러운 틈을 노리고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기에, 맹약의 서에는 페어리문 길드의 안위를 보장받았다. 거기에는 셀리나의 안위는 적혀있지 않았다.
또한 더글라스의 페어리문을 위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자신이 협조를 해야 했다.
“자, 지금부터 나는 페어리문에 내가 알고 있는, 슬레이어들을 위한, 페어리문을 위한 정보를 모조리 전해줄 것이오.
그리고 그 정보는……. 군주의 편에 선 슬레이어에 대한 정보가 될 것이고. 협조 부탁하오.”
“이, 이…….”
외통수에 걸려버렸다.
더즌 헬의 모든 슬레이어는 십이 군주 처단에 사명을 갖는다.
길드의 존재 역시 그런 것이다.
만약 십이 군주에게 붙은 배신자를 속아내는 행위라면, 길드에 도움이 되는 행위로 간주될 것이다.
그녀가 맹약의 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 올가미에 대가리를 들이민 것이다.
누구에게도 자신을 구하라 명령할 수 없었다.
그 명령 자체가 맹약의 서를 위반하는 내용이었으니까.
“다, 다 거…….”
‘짓이야.’라는 말은 끝맺음 짓지 못했다.
이런 사소한 발언조차도, 맹약의 서를 위반하는 내용이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어떻게 더글라스가 이 사실을 알았을까.
그리고 더글라스는 왜 이런 쇼를 하면서까지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 것일까.
‘정보 제공자, 제공자가 있다고 했어.’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로브를 뒤집어쓴 슬레이어에게 꽂혔다.
익숙한 체형, 익숙한 분위기, 익숙한 자세.
셀리나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너, 너 서, 설마…….”
그녀가 말을 끝내기 전에, 그녀의 뒤편에서 칼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무례하군. 더글라스, 길드장님께 떨어져라.”
김태수가 쌍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섰다.
“뭣들 하는가. 너희는 페어리문의 길드원인가, 클로버의 길드원인가. 길드장님께서 붙잡혀 계신다.”
태수는 중진들과 길드원들을 보며 외쳤다.
좀전까지 더글라스의 말에 우왕좌왕하던 길드원들이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것은 클로버 길드의 수작이다. 페어리문을 집어 삼키기 위한 거짓된 영상이다.”
더글라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한의 말을 듣고, 너무 순조로운 계획이라 생각하긴 했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전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덫이었다.
셀리나는 맹약의 서에 따라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끝내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저항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니까.
오히려 저항을 하는 것도 더글라스로서는 좋은 선택이었다.
그 순간 셀리나는 맹약의 서에 따라 작열통을 맛보며 끔찍하게 죽어갈 것이니까.
‘……정신이 너무 팔렸군.’
이런 상황도 염두에 뒀어야 하는 것인데, 진한이라는 사내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었다.
단상에 포진해있던 중진들은 저마다 장비를 꺼내들고 더글라스와 호위,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를 포위했다.
“길드장님을 이쪽으로 넘겨라. 더글라스, 네 말에 대한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그 후다.”
중진들은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듯 어물쩍거렸으나, 태수의 말을 어길 강단은 없었다.
어느덧 연무장에 모인 슬레이어들 중 일부가 앞으로 나서 더글라스를 포위했다.
대부분이 셀리나와 오랜 시간 함께한 중진들이었다.
진한은 더글라스를 포위한 이들과 물러나는 이들 사이에 서서 사태를 관망했다.
‘배신 군주에게 받은 스킬이 뭔지 짐작이 가는군.’
정신계열 스킬을 받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한 이들에게 더 큰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메이첸이 셀리나의 능력에서 벗어난 것을 보면 절대적인 능력은 아니었다.
‘조건이 있겠지. 적대했을 시 효과에서 벗어난다거나.’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더글라스는 주위를 빙 둘러봤다.
모든 길드원들이 나선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정예들은 앞으로 나서서 자신을 적대하고 있었다.
‘보험은 잘 알고 들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는 이번 일에 나선 것을 후회했으나, 뒤늦은 후회였다.
“상황 좆같이 흘러가는군. 머저리 같은 새끼들.”
그때 침묵을 고수하던,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여, 역시 넌……!”
“……설마.”
남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셀리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역시는 무슨, 씨발년아. 뒤통수 치고 잘 처먹고, 잘 살줄 알았냐? 여, 태수 오랜만이다.”
메이첸은 로브를 벗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길드 잘 돌아가는 꼴이다, 병신들. 두 눈깔로 직접 보고도 몰라? 저년 배신자야, 배신자.”
“분명, 분명 죽었는데, 대체 어떻게……. 시체도…….”
셀리나는 살아 돌아온 메이첸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더즌 헬에 그런 아이템이 있다는 사실은 듣지고, 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귀신을 보는 듯 메이첸을 응시했다.
반면 태수는 상황이 파악이 안 되는 지 망연한 눈빛으로 메이첸을 바라봤다..
“메이첸, 네가 어떻게……. 왜 거기 있는 것이냐. 어서, 어서 셀리나를…….”
“아, 씨발 조또. 순딩이 새끼. 저년 배신자라니까?”
메이첸은 귀를 후비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담배를 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날씨 봐라. 좆나게 좋아 그렇지? 응? 썅년아?”
메이첸은 셀리나에게 다가가 상의를 뜯어냈다.
“꺄악……! 읍!”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순간 메이첸은 셀리나의 뺨을 후려쳤다.
“메이체엔-!”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셀리나의 매끄러운 나신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요거 봐라, 요거. 아 씨발, 빨통 보지 말고, 이걸 보라고.”
메이첸은 특유의 웃음을 머금고 셀리나의 날갯죽지를 가리켰다.
“이거 많이 보지 않았어? 이게 뭘까? 응? 배신 군주의 문양이잔어. 대가리 제대로 박혔으면 이딴 걸 문신으로 새기겠어?”
메이첸은 셀리나의 머리채를 붙잡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았다.
“눈깔이 쳐 박혔으면 보시라고요. 병신들아. 군주의 끄나풀이라니까?”
셀리나를 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중진들조차, 셀리나의 문신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동요는 길지 않았다.
그들은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각자의 무기를 꼬나 쥐었다.
“메이첸, 셀리나를, 셀리나를 이쪽으로 보내라.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김태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메이첸에게 호소했다.
“그녀가 그럴 리가 없잖아-! 설령, 설령 그렇다 해도……! 셀리나는, 셀리나는……!”
“하, 씨발. 야이 병신아. 덜떨어진 새끼. 여자한테 미쳐서 돌았구나?”
“메이체엔-!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김태수는 절규했다.
셀리나와 메이첸.
그의 인생에서 절반을 차지하던 이들이 지금 그의 눈앞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메이첸이 살아 돌아오고, 셀리나는 반라의 모습으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더글라스가 보여준 셀리나의 타이틀과 설명도, 그녀의 날갯죽지에 새겨진 배신 군주의 문양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메이첸.
그가 유일하게 믿었던 메이첸이.
셀리나.
그가 사랑하는 여자 셀리나를 붙잡고, 셀리나를 죽이라 종용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냐고? 응?”
메이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으르렁거렸다.
그라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 감정이 김태수가 셀리나에게 갖는 감정과는 다르다곤 하지만, 그라고 셀리나를 의지하지 않았을까.
시궁창같은 삶에서 꺼내준 것이 바로 셀리나와 김태수였다.
셀리나, 셀리나, 셀리나.
한때는 이 이름을 부를 때면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다.
그녀가 자신을 적대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설마했다.
그녀가 자신을 숙청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설마했다.
하지만 마법이 깨어지듯, 서서히 셀리나에 대한 마음은 빠르게 죽어갔다.
그리고 진한에게서 군주의 씨앗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셀리나에게 가졌던 감정들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군주의 힘에, 그녀의 스킬에 놀아난 것뿐이었다.
“이 씨발년이, 어떤 년인지 내가 설명을 해줘야 알겠냐, 이 잡것들아.”
메이첸은 울분을 토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빗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슴에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무장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움직이는 이 하나 없었다.
메이첸의 말이 끝날 때 즈음, 내리붙는 빗줄기가 서서히 멎어들기 시작했다.
“씨발, 뭣들 하냐! 이년 배신자라니까아! 다들 칼 안 빼들어!”
메이첸의 외침에, 뒤편으로 물러났던 슬레이어들이 어물쩡 거리며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더글라스와 셀리나, 메이첸을 김태수와 중진들이 포위하고 있었고, 다시 그들을 일반 길드원들이 포위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진한과 엘리스는 그 애매한 대치 속에서 홀로 고요했다.
‘이제 슬슬…….’
초를 세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이 곧 이빨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셀리나는 살아나갈 수 없었다.
설령 빠져나간다 해도 그녀를 포위한 모든 슬레이어들을 죽이지 않는 이상, 그녀는 추격을 받을 것이고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셀리나, 셀리나. 정말, 정말 그런 것이냐?”
태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셀리나를 보며 물었다.
믿을 수 없었다.
셀리나는 밝게 빛나는 태양이었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쏟아지고 나면, 결국에 밝은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듯, 이번 일 역시 그런 것이리라.
셀리나는 결백하리라.
태수는 그렇게 바라고, 또 바랐다.
“태수…….”
“그래, 그래, 셀리나. 말해라. 단 한마디면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준다 그랬지?”
셀리나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태수가 바라던 말이 아니었다.
태수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태수의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래, 그래.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 널 돌아서지 않는다.”
“그럼 다, 다 죽여줘. 전부, 다.”
셀리나의 입 밖으로, 나와선 안 될 말이 나와 버렸다.
그녀는 죽음을 결심했다.
결심한 이상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녀는 맹약의 서를 어겼고, 발끝에서부터 시작한 작열통은 서서히 퍼져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때 셀리나의 눈앞에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많은 슬레이어들이 당신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배신의 준비’ 스킬이 진화합니다.]
[‘배신의 준비’ 스킬이 ‘배신의 기회’로 진화했습니다.]
그녀가 익힌 ‘배신의 준비’ 스킬은 상대에게 호감을 주고, 신뢰를 주는 정신 계열 스킬이었다.
작열통 속에서도 그녀는 정신을 잃지 않고, 스킬 설명을 읽어 내려갔다.
[배신의 기회]
당신은 훌륭한 배신자입니다.
배신자들이 느끼는 배신감만큼, 당신은 힘을 얻습니다.
이 힘을 이용해 배신의 기회를 잡아 보십시오.
사용 가능한 배신감 : 95833
(배신자도 동료가 있습니다. 배신을 함께하는 동료에게도 힘을 분배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빌어먹을 정도로 불친절한 설명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한 줄기 끈이었다.
그녀는 스킬을 발동시켰다.
[배신의 기회가 발동합니다.]
[배신을 함께하는 동료들이 47명 있습니다. 힘을 분배하시겠습니까?]
…….
몇 가지 알림음이 나타났고, 그녀는 배신의 기회가 제공하는 힘을 모조리 분배해 버렸다.
“다, 다 죽어…….”
그녀로부터 뻗어 나온 검은 빛 무리가 중진들에게 스며들었다.
더글라스의 눈에는 힘을 받은 중진들의 능력치 변화가 똑똑히 보였다.
“하, 역시 보험은 알고 들어야 했는데.”
메이첸이 존재하고, 주위로 메이첸의 말에 부응한 길드원들이 포위하고 있었지만 실력차이가 너무 컸었다.
겨우 균형이 맞았다 생각했는데, 능력치가 향상된 중진들을 보니 가망이 없어 보였다.
“씨발, 뭔데?”
메이첸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고.
“뭐긴, 우린 다 뒈진거요.”
더글라스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 작품 후기 ============================
카르디오스// 감사합니다! 이번 편도 잘 읽어주시길!
길치곰// 두근두근 하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두근두근.. 이번 화도 두근두근 하셨으면..
Damaoka//사냥꾼.. 사냥꾼의 검! 진한은 사냥꾼입니다!
솨라솨라// 연참.. ㅠㅠ 열심히 쓰겠습니다.
가니메디아// ㅠㅠㅠ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비축분 따위는..
추천, 선작, 코멘트는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특히 코멘트 정말 좋습니다!
위기에 빠진 메이첸과 더글라스..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