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16 덫 (16/40)

00016  덫  =========================================================================

*

“토끼님이 오래.”

더글라스는 자신의 방으로 처들어 온 엘리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에게 토끼라는 호칭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나, 저 미친 여자는 그를 항상 토끼라고 불렀다.

늦은 밤이었으나 더글라스는 곧장 옷을 챙겨 입고 진한의 방으로 향했다.

“빨리 와. 토끼님이 데려오랬어.”

그는 앞장서서 자신을 재촉하는 엘리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로서는 진한이 왜 엘리스를 옆에 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글라스는 엘리스의 안내를 받아 진한의 방으로 들어섰다.

“토끼님, 데려왔어. 칭찬해줘.”

엘리스는 곧바로 진한의 품으로 파고들려 했지만 진한은 엘리스의 이마를 손으로 막고 옆으로 치워 뒀다.

더글라스는 진한을 제외하고도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오랜만이오.”

“그러게, 오랜만이오.”

일전에 자신을 찾아온 방문자였다.

“둘이 통성명부터 하지.”

진한의 말에 메이첸은 담배를 꼬나물고 손을 휘휘 저었다.

“이미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 텐데. 무슨.”

“본론 먼저 말해줬으면 좋겠소.”

더글라스는 불퉁한 메이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진한을 응시했다.

그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드디어 자신에게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진한은 더글라스를 보며 말했다.

“내일 페어리문의 길드원 전부를 모아라.”

“대체 무슨…….”

진한은 더글라스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

셀리나는 더글라스가 호위를 시켜 보내온 요구서를 읽어 내려갔다.

요구서에 적힌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정오까지 페어리문의 모든 길드원들을 모아주시오. 단 한 명도 빠짐이 없어야 하오.’

갑작스러운 요구에 당황스러웠지만, 요구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것은 페어리문을 위한 일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더즌 헬의 슬레이어들에게 중대한 일이 될 것이오. 맹약서에 적힌 내용에 따라, 협조를 부탁하오.’

모든 길드원들을 모아라.

상당히 무례하고, 무리한 요구였지만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실수했어.”

셀리나는 더글라스와 맺은 맹약의 서를 읽고 또 읽었다.

‘페어리문의 길드장 셀리나는 페어리문을 위하는 클로버의 총관 더글라스의 행동에 협조할 것을 약속한다. 

클로버의 총관 더글라스는 더즌 헬의 슬레이어를 위한 정보를 페어리문 길드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할 것을 약속하며, 페어리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페어리문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문구였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어떤 클래스 능력도 없이 클로버의 창립 멤버들과 함께 클로버를 창립했고, 키워냈다.

그 와중에 무수한 정쟁도 있었을 것이고, 전투 능력이 없는 더글라스는 가장 만만한 상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더글라스는 정쟁에서 승리하고 지금의 확고한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이런 약조를 했을까.

그는 정말 더즌 헬의 슬레이어들을 위한 정보를 알고 있을까?

슬레이어들의 사명이 십이군주 처치라지만, 그 사명에 따라 움직이는 슬레이어들은 생각보다 몇 되지 않았다.

지구에서보다 더한 권력을 쥔 슬레이어도 있었고, 지금의 상황에 충분히 만족하는 슬레이어들도 있었다.

더즌 헬의 슬레이어들을 위한다는 말은 언뜻 보기에는 꽤나 그럴 듯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자가 더글라스라면, 한 번 더 생각해 봤어야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페어리문에 안 좋은 조약은 없었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무엇보다 더글라스는 페어리문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말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더글라스가 찾아 온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메이첸의 죽음과 더글라스의 방문.

전혀 연관성 없는 두 사건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건에는 어떤 개연성도 없었다.

‘대체 왜…….’

왜 이리도 불안할까.

잠 못드는 밤 그녀는 사그라들지 않는 불안함에 방을 나섰다.

*

태수는 홀로 방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메이첸…….”

성격이 워낙 지랄 맞은 놈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메이첸은 그 성격을 이기지 못해 홀로 마을을 떠도는 떠돌이 슬레이어였다.

떠돌이 슬레이어에서 동료가 되기까지, 동료에서 친우가 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단 셋뿐인 파티에 사람이 모이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길드를 만들고.

길드 간의 항쟁이 시작되고, 동료들이 죽어 나가고, 사람들이 들어오고.

둘은 그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메이첸과는 방향성이 달랐다.

그렇기에 길드를 운영하면서 번번이 충돌하고, 이따금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 자신할 수 있었다.

자신도, 메이첸도 언제든 서로에게 등을 맡길 수 있다고.

서로 부딪히지만 그편이 오히려 길드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메이첸은 여전히 자신의 훌륭한 파트너였다.

분명 그러했다.

그랬는데……. 메이첸은 자살했다.

메이첸은 총교관으로 적성검사에서의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길드 내의 모든 실권을 빼앗겼다.

그것이 메이첸에게 그렇게 큰 상실감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실책이라는 죄책감마저 가슴을 짓눌렀다.

메이첸이 받은 패널티 중 절반은 자신이 짊어져야 했던 것들이었다.

술맛이 썼다.

태수는 맞은편의 빈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메이첸이 생전에 즐겨 마시던 술이었다.

“함께 지옥을 나가자 약속했건만, 결국 먼저 가는구나.”

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때 그의 방문이 열리고 의외의 방문자가 찾아왔다.

“……셀리나?”

셀리나였다.

셀리나는 말없이 태수에게 다가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대체 무슨…….”

“불안해, 불안해서.”

셀리나는 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셀리나의 약한 모습이었다.

“너는, 너는 어떤 상황이어도 내 편이지?”

셀리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과 같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배신 마을에서, 인간의 더러운 모습이 극대화되는 더즌 헬에서 셀리나는 밝은 태양이었다.

언제나 환하게 웃고, 힘을 잃지 않게 자신을 지탱해주는 찬란한 빛.

밝게 빛나는 태양 아래서 그녀의 웃음을 봤을 때, 김태수는 생각했다.

나는 셀리나를 사랑하는구나.

가슴이 시큰거렸다.

자신이 셀리나를 사랑하고, 또 그 마음을 셀리나가 알게 되면 지금까지와 같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평생을 셀리나의 뒤에 서자.

평생을 이 여자를 지켜주자.

그것이 이 남자가 이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너를 떠나지 않는다.”

태수는 셀리나를 꼭 껴안았다.

셀리나는 고개를 들어 태수와 눈을 맞췄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둘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응시했다.

어떤 말도 없었다.

입술이 맞닿고, 셀리나의 혀가 태수의 입을 파고들었다.

둘의 입술이 끈적하게 얽히고, 서로의 타액을 주고받았다.

태수와 셀리나는 서로의 입을 탐하면서도, 둘 사이를 방해하는 천 쪼가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거둬냈다.

둘 사이에 어떤 것도 남지 않았을 때, 셀리나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턱 끝에서 목덜미로,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셀리나의 혀는 태수의 몸을 핥았고, 그녀가 남긴 타액은 태수의 몸에 끈적한 흔적을 남겨 놨다.

그녀의 머리가 태수의 다리 사이에 머물렀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셀리나는 볼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에 볼을 부비다가, 입을 벌렸다.

“셀……리나.”

태수는 셀리나를 불러봤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날 두 남녀는 뱀처럼 끈적하게 서로를 탐닉했다.

*

새벽부터 시작된 보슬비는 정오 무렵 거센 폭우로 지면을 강타했다.

궂은 날씨에도 소집령은 철회되지 않았다.

연무장에는 갑작스런 소집령에 당황한 페어리문의 길드원들이 집결해 있었다.

단상이 설치되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페어리문의 몇몇 중진들과 더글라스와 그의 호위, 그리고 로브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단상에 올라섰다.

셀리나는 김태수를 옆에 대동하고, 더글라스를 응시했다.

보고받지 못한 남자가 더글라스의 옆에 서있었으나,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만약 더글라스가 어떤 수작을 부린다 해도, 이곳은 페어리문이었다.

고작 한 사람 추가된다고 그녀의 권위는 무너지지 않았다.

“기대되네요. 이렇게 요란하게 사람을 모을 정도의 정보가 무엇인지.”

셀리나의 가시박힌 말에도 더글라스는 오히려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아마 기대 이상일 겁니다. 군주 토벌을 몇 년 남기지 않은 페어리문으로서는, 배신 마을로서는 특히나 중요한 정보이지요.”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이 정보를 제공해주신 제공자입니다.”

“불쾌하네요. 제게 알리지 않으시고 사람을 부르시다뇨.”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워낙 중요한 일이라.”

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단상 위의 사람들은 길드원들이 모두 소집될 때까지 말을 아꼈다.

진한과 엘리스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연무장의 길드원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퍽이나 좋은 날씨군.”

“추워, 질척거려요, 토끼님. 엘리스 들어갈래.”

팔에 매달려 칭얼대는 엘리스를 가뿐히 무시한 진한은 단상 위를 올려다봤다.

어느덧 길드원들이 모두 모이자, 더글라스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시오. 페어리문의 길드원 여러분. 굳은 날씨에도 모두 모여주어 감사하오.”

더글라스는 침착하고 또렷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더즌 헬의 슬레이어들의 제일 목표는 무엇이오? 바로 십이 군주의 처단 아니오?”

더글라스는 더즌 헬의 슬레이어로서의 본분을 설파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멍청이들은 없었지만, 더글라스의 언변은 상당했다.

당연한 사실을 말함에도,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뛰어나군.’

진한은 더글라스의 언변에 감탄했다.

이전 생에서 클래스를 밝히고도 멀쩡히 이 길드, 저 길드 옮겨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저기 있었다.

사람들을 잡아끄는 언변과 뛰어난 수단.

당장 접촉할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디텍터가 더글라스 뿐이기에 그를 택한 것인데, 아주 적합한 인재였다.

“……이길 바라오. 그 와중에 우리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고, 여기 페어리문의 여신 셀리나께 도움을 요청했소. 길드장 셀리나에게 무한한 영광을.”

더글라스는 뒤로 돌아가 셀리나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그녀를 앞으로 잡아 끌고 왔다.

셀리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웃으며 길드원들에게 인사했다.

길드원들은 셀리나를 연호하며 함성을 내질렀다.

더글라스는 함성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진한은 셀리나를 바라봤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

더글라스는 급작스레 그녀를 앞으로 불러왔고, 그녀가 다시 되돌아 가지 못하게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더글라스의 손을 뿌리치기에는 상황이 애매했다.

그녀는 생각할 것이다.

‘대체 왜?’

더글라스는 자신을 앞으로 불러냈으며,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인가.

뿌리치려면 쉽게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진한은 그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그녀는 밝게 떠있는 태양과 같았다.

뭇 슬레이어들의 찬양을 받으며, 양 옆으론 김태수와 메이첸을 끼고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던 슬레이어.

그녀가 있는 한 페어리문은 영원할 것이고, 페어리문이 영원한 이상 그녀의 권위는 영원할 것이다.

이 길드 안에서만큼 그녀는 여왕이었다.

고고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절대의 성역이었다.

진한은 회귀 이전에도 저런 슬레이어들을 많이 봐왔다.

홀로 고고한, 깨끗한 슬레이어들.

자신의 이미지를 결코 더럽히지 않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채가는 인간들.

더글라스는 몇 마디 더 하고는, 셀리나를 앞에 내세우며 팔을 활짝 벌렸다.

“슬레이어들이여! 만약! 만약에! 우리 슬레이어들 사이에, 십이군주의 끄나풀이 숨어있다면! 배신자가 있다면 어찌하겠소?”

셀리나의 표정이 백짓장처럼 하예졌다.

“서, 설마 그런 슬레이어가…….”

‘있을까요?’라는 그녀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더글라스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만약 그 배신자가…….”

더글라스는 품에서 주먹만한 구슬 하나를 꺼냈다.

“여러분의 여신 셀리나라면, 어찌하겠소?”

진한은 그 광경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더즌 헬에 선인은 없었다.

있다면 오직 위선자만 있을 뿐.

그들은 자신의 본성을 숨기고, 언제나 선하고 고고하게 남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한은 안다.

그들이 궁지에 몰리는 순간, 본성이 나온다.

처절하고, 초라하게,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고 살기위해 발버둥 친다.

진한은 사냥꾼이고, 셀리나는 덫에 걸린 짐승이었다.

덫만으로 짐승을 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발버둥이 심해지면, 사냥꾼이 나서야 될 때였다.

더글라스가 공유의 수정 구슬을 발동시키고, 셀리나를 응시했다.

광장에 모인 모든 슬레이어들에게, 더글라스의 시야가 공유되었다.

영상에는 셀리나의 뒷모습이 투사되고 있었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군주의 씨앗’이라는 타이틀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 작품 후기 ============================

잉여소굴 // 코멘트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디오스 // 잘 읽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가니메디아 // 연참 ㅠㅠ.. 비축분이 없어서 큰일입니다.

드디어 밝혀지는 셀리나의 정체!

과연 셀리나는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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