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덫 =========================================================================
이른 오후 더글라스는 점심 식사 후 셀리나를 독대했다.
“안녕하세요, 페어리문의 길드장 셀리나입니다.”
“반갑소. 불행 마을 길드 클로버의 총관 더글라스요.”
셀리나와 김태수, 더글라스와 호위 헥스가 회의실에 자리했다.
더글라스는 김태수와 셀리나를 바라봤다.
‘……! 과연.’
더글라스는 셀리나의 상태창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군주의 씨앗.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직접 확인했으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김태수는 문제가 없었다.
클래스가 보지 못했던 것이니, 스패셜이나 유니크 클래스라는 점이 주목할 만 했지만, 그가 만나는 이들은 단순히 클래스로 판단할 수 없었던 이들이니 놀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셀리나의 타이틀이 문제였다.
‘군주의 씨앗이라는 게 거짓은 아니었군.’
더글라스의 등은 식은땀으로 금새 축축해졌다.
그러 귀로만 들은 것과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더글라스는 꽤나 명석한 슬레이어였다.
여태까지 몇 차례 더즌 헬에서는 군주 토벌이 있어왔고, 이번에는 틀림없다 싶은 전력들도 허무하게 토벌에 실패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일전의 방문자가 자신에게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모두 군주의 씨앗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다.
단순한 개인이라면 집단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하지만 그 개인이 집단의 주인이라면?
‘심각하군.’
더글라스는 셀리나의 머리 오른편에 뜨는 상태창을 읽고 또 읽었다.
능력치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타이틀이 문제였다.
더글라스가 셀리나의 타이틀의 상세 설명을 읽으려는 찰나였다.
“클로버의 더글라스라 하면 모르는 슬레이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요. 뛰어난 지략가라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과찬입니다. 오히려 페어리문의 여신 셀리나님의 명성이 자자하지요. 마을 특성에도 불구하고 끈끈한 유대감을 이끌어 내신다고요.”
더글라스는 셀리나와 눈을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셀리나의 타이틀에 대한 상세 설명을 읽고 싶었지만,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더즌 헬은 아직까지 미지의 세계였고, 어떤 클래스와 어떤 시스템이 있는지 전부가 밝혀진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슬레이어들은 조심스러웠다.
상대와 적대적인 관계, 혹은 경각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면 안 되었다.
그렇기에 한 길드를 대표하거나 이끄는 이들은 절대 당사자들끼리 만나지 않았다.
자신은 오직 상대에게 집중하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상대를 파악하는 것은 호위의 역할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호위란 가장 믿을 수 있는 자여야 했고, 상황 판단이 뛰어난 슬레이어야 했다.
둘은 티타임을 갖으며 이런 저런 서로의 마을 돌아가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누구도 양측의 길드에 대한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충분한 이야기가 오갔다고 생각이 될 때 즈음 먼저 입을 연 것은 셀리나였다.
“그래서, 더글라스는 저에게 어떤 볼일이 있으신가요?”
셀리나의 말에 더글라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셀리나의 질문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다.
더글라스는 한 길드의 대표로 이 자리에 찾아 왔으니, 셀리나 개인을 찾아 왔을 리는 만무했으니, 왜 페어리문을 찾아 왔느냐. 이것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글라스로서는 찔리는 면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더글라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차를 홀짝였다.
“유람이라고 말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 런지요? 길드 일에 치이다 보니까. 기분 전환도 좀 필요하겠다 싶더군요.”
“호호, 농담도 잘하세요. 길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분이 더글라스 아니신가요? 물론 휴식도 중요하지요. 정말 유람을 위하신 거라면, 배신 마을에서 좋은 관광지를 소개시켜 드릴게요. 숙소도 마음에 드실 거 에요.”
“이거, 이거. 농담은 집어 치우겠습니다. 사실은 길드 차원, 아니…….”
더글라스는 차를 홀짝이고는 품에서 잎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더즌 헬의 슬레이어들에게 크게 중요한 정보를 건내기 위해 왔습니다.”
“정보라 하면…….”
셀리나는 차를 홀짝이며 더글라스를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메이첸의 자살.
갑작스러운 더글라스의 방문.
우연이 겹치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마땅히 둘 사이의 연관성은 찾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메이첸의 시체는 그녀가 직접 확인했다.
메이첸 본인이 맞았다.
그의 몸에 있는 신체적 특징, 그리고 민망한 말이지만 음경의 모양새나 흉터까지 모두 그녀가 직접 확인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 무언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의심은 거둘 수 없었다.
‘설마…….’
셀리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더글라스를 응시했다.
클로버의 성장은 폭발적이었고, 더 이상 불행 마을에서 성장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그러던 때 마침 지리적으로 가까운 배신 마을의 삼대 길드에서 총관이 자살했다.
‘영역을 넓히려고?’
죽은 메이첸이 유령이 되어 더글라스를 찾지 않은 이상.
혹은 죽은 메이첸이 더글라스를 찾아갔다 해도, 더글라스가 그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으니.
그녀로서는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정보입니다. 그 전에 길드에 머물며 좀 분위기를 살펴도 좋겠습니까?”
“……왜지요?”
셀리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더글라스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더글라스의 말은 개인 대 개인이라면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집단과 집단의 이야기라면 꽤나 무례가 될 수 있는 말이었다.
너희 길드를 파악해 보겠다.
면전에 대고 상대를 깔본다는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글라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실례인 것은 압니다만,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일부러 삼대 길드 중 페어리문을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 그렇게 까지 말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어떤 정보인지만 말해 주신다면…….”
더글라스는 셀리나의 요청에 품에서 작은 스크롤을 꺼내 내밀었다.
“여기 맹약의 서입니다.”
그가 꺼낸 것은 맹약의 서였다.
양측에서 동의하기만 한다면, 개인 대 개인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계약서였다.
맹약의 서를 걸고 한 약속을 어긴 슬레이어는 끝없는 작열통을 겪으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꽤나 편리해 보이지만, 즐겨 쓰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맹약의 서는 딱 거기에 적힌 내용대로만 이행이 되었기 때문에, 조금만 장난을 치면 상대를 농락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맹약의 서는 무순되게도, 맹약을 상징하지 않았다.
준비된 거짓말을 상징했다.
‘맹약의 서를 꺼내며 약속하는 자는 경계해라.’
한때 이 말이 슬레이어들 사이에서 격언으로 떠돌 정도로, 맹약의 서는 믿을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맹약의 서를 꺼내며 약속하는 자는 경계해라. 저도 이걸 격언으로 삼았던 적이 있었지요.”
셀리나의 말에 더글라스는 맹약의 서를 셀리나에게 내밀었다.
“셀리나께서 원하는 것을 한 문장만 적으십시오. 저는 어떤 요구사항도 적지 않겠습니다.”
더글라스는 망설임 없이 맹약의 서를 셀리나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되면 셀리나로서도 할 말이 없어진다.
비록 한 문장이라지만, 길드와 길드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한 문장으로도 얼마든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더글라스가 승낙을 한다면.
셀리나가 맹약의 서를 보며 고민할 때, 더글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셀리나 쪽으로 몸을 굽혔다.
“이런, 제가 이걸 잊어버렸군요.”
더글라스는 자신의 엄지를 이빨로 물어뜯어 상처를 내고는 바로 맹약의 서에 피를 몇 방울 떨어 트렸다.
“이것으로 제 마음이 증명되었기를 바랍니다. 이 더즌 헬을 위하는 제 마음이요.”
망설이는 셀리나의 마음에 쐐기를 받았다.
더글라스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담배를 빨았다.
태연해 보이지만 더글라스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 개인적인 용무로 찾아온 것이 맞았다.
하지만 페어리문에는 클로버의 총관으로서 방문을 알렸다.
그렇지 않으면 셀리나를 만날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일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이상, 의심 없이 행동하기 위해서는 이 편이 수월했다.
되도 않는 어설픈 핑계나 이유를 가져다 대면 상대도 이상함을 알아챌 것이다.
셀리나는 더글라스를 응시했다.
‘뭐지…….’
말로는 더즌 헬을 위하는 정보라 하지만, 그것은 말뿐일 수 있었다.
클로버에서 배신 마을로 영역을 넓히기 위한 수작일 줄 누가 안다는 말인가.
하지만 더글라스가 맹약의 서를 내민 순간 그럴 가능성은 사라졌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정말 순수한 의도로 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맹약의 서에 이미 피를 흘린 이상, 자신의 피만 흘린다면 페어리문으로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진심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셀리나는 깃펜을 꺼내 맹약의 서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더글라스는 짐짓 여유있는 척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담배를 빨았으나, 한 글자, 한 글자 적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작이 긁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원같은 순간이 지나가고 셀리나는 맹약의 서에 자신의 피를 떨어트렸다.
맹약의 서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빛은 양 갈레로 나뉘어 더글라스와 셀리나에게 깃들었다.
셀리나는 더글라스에게 맹약의 서를 내밀었고, 더글라스는 맹약의 서에 적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클로버의 총관 더글라스는 더즌 헬의 슬레이어를 위한 정보를 페어리문 길드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할 것을 약속하며, 페어리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흠…….”
더글라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호호, 미안해요. 이런 좋은 기회는 놓칠 수 없잖아요?”
“그렇지요. 이쯤은 예상했습니다.”
더글라스는 셀리나의 웃는 낯짝에 담뱃불을 지지고 싶었다.
페어리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이 문구가 문제였다.
셀리나는 은근슬쩍 클로버 길드의 총관 더글라스를 친 페어리문 인사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이 더글라스의 자의든 타의든 앞으로 더글라스는 길드간의 항쟁이 있어도, 페어리문의 편에 서야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회의실의 공기가 차갑게 식어가자, 더글라스와 셀리나는 인사를 나누고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더글라스는 셀리나와 헤어지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됐다.”
더글라스는 자리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의 창문 너머로는 페어리문 길드원의 숙소가 훤히 보였다.
‘공포의 심장’을 가진 남자가 머물고 있는 숙소 역시 저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이른 새벽의 만남을 회상했다.
그는 페어리문의 길드원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즈음 경비의 눈을 피해 군주의 권능을 가진 남자를 찾아 갔었다.
둘의 만남은 길지 않았지만, 더글라스에게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더글라스는 그에게서 한 가지 약조를 받아 냈고, 남자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맹약의 서도, 그리고 거기에 적은 장도 모두 남자가 요구한 것이었다.
‘당신이 내게 방문자를 보낸 겁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니 찾아온 것 아닌가.’
‘당신은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겁니까.’
‘알만한 것은 모두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너의 여동생의 일도 그리고…….’
‘그리고?’
‘클로버가 곧 붕괴할 것이라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시오. 무엇을 안다고.’
‘불행 마을의 특성을 너무 우습게 아는군.’
‘…….’
‘너의 여동생에게 찾아온 불행이 세인트 스타의 그들이라면…….’
‘닥쳐! 이…….’
‘네게 찾아온 불행은 클로버의 붕괴겠지. 아니, 네 여동생의 일도 네게는 불행이려나.’
‘이 개 같은……. 네가 대체 뭘 안다고!’
‘모르긴 몰라도, 이건 알지. 클로버는 붕괴되고, 넌 복수를 잊지 못해. 이곳, 저곳을 떠돌겠지.’
‘엿 같은, 내가 잘못 찾아왔군. 허무맹랑한 정신병자의 말에 홀려서……!’
‘최후는 그렇게 좋지 않을 거야. 클로버가 아닌 곳에서 네가 자리를 잡으려면, 너는 클래스를 밝혀야 하니까.’
‘…….’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해. 그러니까 지금도 네 클래스를 숨기는 것 아닌가.’
‘내, 내 클래스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생각보다 멍청하군.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찾아온 거 아닌가. 디텍터 더글라스.’
‘……!’
‘클로버는 붕괴한다. 아니, 붕괴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내게,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오.’
‘넌 그저 보험을 들어두면 될 뿐이야. 나는 내 능력을 사는 거고, 너는 네 능력으로 보험을 들 뿐이고.’
‘당신의 정체, 그것부터…….’
‘내가 무어든, 네 눈으로 보고, 네가 판단할 문제이지.’
‘당신은 군…….’
‘많은 것을 보는 것도 때로는 모르느니만 못하군. 내가 뭐든 그게 중요한가?’
‘…….’
‘너는 그저 만일의 상황을 위해 보험을 들어두면 그만이지.’
‘후우, 대체 무슨 보험을 들라는 말이오.’
‘클로버가 붕괴된다면, 내가 복수를 돕겠다.’
‘……. 내 원수가 누군지 알고?’
‘세인트 스타. 선택해라. 기회는 이번뿐이다. 내가 네게 손을 내밀 일은 두 번 다시 없어.’
‘…….’
‘내가 네가 생각하는 존재이든, 아니든. 네게 필요한 것은 하나 아닌가.’
‘대체 무엇이?’
‘날카로운 칼과 냄새를 잘 맡는 사냥개.’
‘사냥개라면?’
‘세인트 스타의 중진이라는 것만 알지, 원수를 특정 짓지 못하지 않았나. 그것 또한 찾아주지.’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
‘그저 시키는 대로.’
더글라스 침대에 누워 담배 연기를 뻑뻑 내뿜었다.
남자의 화법은 굉장히 불친절했으나, 이상하게도 자신의 생각을 아는 듯 자연스러웠다.
‘당신의 생각대로 되기를 바랄 뿐이오.’
더글라스는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이미 그의 손에서 떠난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가니메디아// 즐거운 감상 감사합니다.
유리별b// 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진한이 회귀 이전에 사용했던 스킬들 중에서도, 스킬 시스템에 의지하지 않고 학살자의 검처럼 익힌 스킬이 있다면 앞으로도 충분히 익힐 수 있겠지요!
더글라스의 쓸모는 과연!
셀리나 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