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페이크 =========================================================================
종이 울리자, 상대는 거대한 도끼를 들고 진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덟, 일곱, 여섯…….’
진한은 상대와 자신의 거리를 쟀다.
상대와 자신의 신장차이 그리고 서로가 가진 무기의 사정거리를 재고는…….
“컥!”
곧장 놈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목을 꿰뚫고 들어간 검은 뒤통수를 삐죽 뚫고 나왔다.
“끄, 끄윽!”
진한은 검을 뽑았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붉은 핏줄기가 진한의 가면을 적셨다.
진한은 놈의 옷에 검을 닦았다.
싸움판은 조용해졌다.
환호하던 관중도, 사회자도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진한은 놈의 시체를 옆으로 치우며 대기석을 쳐다봤다.
“다음 없나. 올려 보내.”
그때서야 싸움판의 관중들은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
싸움판의 가장 큰 재미는 역시 피륙이 덩어리지고, 핏줄기가 튀는 광경이었다.
그런 면에서 진한은 관중들의 재미를 철저히 충족시켜 주었다.
9연승.
한 경기에 일 검.
상대는 살아서 내려가지 못했다.
아홉 번째 경기가 끝나자 어떤 참가자도 진한이 선 싸움판 위로 올라오려 하지 않았다.
“대단한 슈퍼 루키입니다-! 신규 슬레이어가 맞기는 한 걸까요! 어떤 과거를 보냈을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자-! 다음 참가자를 모시겠습……!”
사회자는 멘트를 치며 다음 상대를 물색해봤지만, 대기석에 자리한 싸움판 직원이 손을 휘젓자 말을 멈추고 직원과 수신호를 주고 받았다.
“아-! 이런 아쉽습니다. 아무래도 토끼맨의 경기는 여기서 끝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토끼맨! 수고하셨습니다!”
진한은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차며 싸움판 밑으로 내려왔다.
배신 마을의 최하급 싸움판에는 스탯이 15가 넘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움직임도 뻔히 눈에 보이고, 틈을 노리기도 쉬웠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참가자들의 내구력 능력치가 없다시피 했기에 단 일검도 버티지 못했다.
‘5등급 싸움판 수준이 이정도면, 4등급으로 참가해도 될 뻔했군.’
“토끼님! 토끼님!”
검을 반납하고 돌아서는 진한에게 엘리스가 달라붙었다.
‘확실히 미쳐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엘리스는 신규 슬레이어다.
거기에 얼마 전에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고.
신규 슬레이어가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떨치기에는 비교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는 좀 전까지 아홉 명의 슬레이어를 죽인 진한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스의 하얀 가면이 진한의 몸에서 묻어난 피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엘리스는 재능이 있다.’
보통의 재능이 아니었다.
회귀 이전에도 몇 보지 못했을 정도의 재능이었다.
‘이러니까 애먹을만 하군.’
과거 엘리스는 토벌 당하던 당시에도 토벌대의 반수를 죽이거나 상처 입히고 생포 당했다.
엘리스의 마지막은 썩 좋지 않았다.
생포당한 그 자리에서 분노에 찬 토벌대에게 강간당하며 생을 마무리했다.
옷을 갈아입고 뒷골목에서 나온 진한은 엘리스의 가면을 벗겨줬다.
“토끼님?”
천진한 웃음이었다.
얼굴이 썩 이쁜 편은 아니었지만, 천진한 얼굴에는 한 톨의 더러움도 묻어나지 않았다.
진한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걸음을 재촉했다.
‘미래는 바뀔 수 있는 거다.’
사소한 변화로도 결과는 달라진다.
진한의 존재로 그녀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
투기장에서 돌아온 진한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엘리스의 클래스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마법 계열 노멀 클래스는 총 네 가지 속성으로 분류된다.
물, 불, 독, 땅.
한 슬레이어 당 하나의 속성을 익히는 것이 정석이었다.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익히는 것은 스킬 숙련도상 성장이 너무 더뎠고, 영창에 익숙해지는 시간도 너무 길었다.
회귀 이전에 엘리스가 스패셜 혹은 유니크 클래스로 추정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영창 속도에 네 가지 속성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점.
메이첸같은 경우엔 한 번에 두 개의 스킬을 영창할 수 있었고, 속성마저도 달랐다.
그의 스킬 활용은 본인의 센스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두 가지 속성을 한 번에, 빠른 속도로 영창하는 것은 클래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엘리스는 아니었다.
노멀 클래스로도 그 이상의 결과를 낼 수 있는 재능.
‘오히려 노멀 클래스를 선택한 것이 다행이었군.’
클래스의 도움을 받는 다면 더 빠른 속도로 스킬을 영창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면 뇌가 버티지 못했다.
엘리스는 더 나은 클래스를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과거 그녀의 주특기는 다속성, 다영창.
마녀 엘리스라는 이름 말고도, 마법 연사기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서로 다른 속성을 빠르게 쏘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노멀 클래스로서의 약점은 분명히 있었다.
각 속성별로 어떠한 이점도 얻지 못한다.
스페셜 클래스 중 하나인 ‘불의 마도사’같은 경우는 물계열 마법의 위력이 대폭 감소하는 불이익이 있었지만, 불계열 마법의 위력이 대폭 상승하는 이익이 있었다.
한 마디로 엘리스는 질보다 양.
물량으로 승부하는 개인전보다는 대인전에 특화된 마법사였다.
스탯 중 마법력은 마법의 위력을, 지력은 마법의 사용 횟수를 결정했다.
과거의 엘리스는 마법력보다는 지력이 높았다.
그리고 스킬에 의존해서 무차별 마법 난사를 벌여왔고.
그 정도만 해도 슬레이어들을 상대하는 데 충분했을 것이다.
엘리스가 토벌당하던 당시에는 군주 토벌 준비로 대다수의 정예 슬레이어들이 빠져 있었을 때이니까.
하지만 자신과 함께 하려면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지력도 지력이지만 마법력도 신경을 써야 했고, 무엇보다 속성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더즌 헬에는 스킬이라는 편리한 시스템이 존재했고, 대다수의 슬레이어들은 그 편리함에 취해 성장을 멈춰버렸다.
하지만 더즌 헬은 게임이 아니었다.
같은 숙련도의 같은 스킬을 쓰더라도, 스킬에 의존하는 슬레이어와 이해도가 있는 슬레이어의 격차는 상당했다.
진한은 비교적 낮은 스탯을 가지고도 나이트를 잡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진한은 투기장에서 돌아온 날을 시작으로 엘리스를 방으로 불러 교육을 시작했다.
‘우선은 기초적인 속성 교육부터.’
제 정신이 아닌 엘리스라 과연 잘 따라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교육을 시작해보니…….
‘물건이군.’
엘리스의 이해도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토끼님, 엘리스 칭찬해줘.”
엘리스는 양 손에 두 가지 속성의 마법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있었다.
독과 물.
비록 섞이기 쉬운 속성이었지만 두 속성에 대한 이해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쳐서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 저 정도였을까.’
엘리스는 양손에 마법을 유지하고 침대에 걸터앉은 진한에게 다가왔다.
“마법은 없애고.”
진한은 엘리스를 제지하며 말했다.
엘리스는 곧장 양손에 깃든 마법을 디스펠하고 진한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엘리스를 다루는 데에는 호통보다는 칭찬이 효과적이었다.
진한은 무심한 얼굴로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배신 마을에서 불행 마을까지는 꼬박 사흘.’
오늘이 메이첸이 죽은 지 딱 사흘이 지난날이었다.
*
엘리스의 교육을 시작한지 다시 며칠이 지났다.
메이첸의 자살로 신규 슬레이어 육성 커리큘럼은 시행되고 있지 않았다.
그편이 진한에게는 수련에 매진하기에는 편했다.
엘리스의 교육을 진행하면서 진한 역시 투기장을 왔다 갔다 하며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4등급의 싸움판은 5등급의 싸움판과는 달리 진한의 욕구를 충족시켜 줬다.
체력, 근력, 민첩, 내구력 스탯이 모두 19를 달성한 상태였다.
앞으로는 ‘사냥꾼의 검’이 문제였다.
현재 완성도는 99%.
하지만 남은 1%는 채워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3등급 투기장으로 가야하나…….’
4등급도 위태로웠다.
4등급의 슬레이어들은 모드 클래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간혹 가다 하나의 스탯이 20을 넘은 슬레이어들도 존재했다.
3등급으로 넘어가면 기본 두 개 이상의 스탯이 20을 넘어간 이들로 넘실댈 것이었다.
‘모험은 좋지 않지만.’
도전은 즐기는 편이었다.
여차하면 ‘기억의 반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최악의 경우였다.
기억의 반지는 조만간 쓸 일이 있었기에 아껴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진한은 엘리스와 함께 투기장으로 향했다.
진한과 엘리스는 이미 투기장 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크레이지 걸과 토끼맨.
투기장으로 향하는 내내 둘을 알아보는 슬레이어들이 술을 한잔씩 권했지만, 진한은 대꾸하지 않았다.
진한은 투기장에 도착해 신청서를 접수했다.
진한은 3등급, 엘리스는 4등급 싸움판으로 신청했다.
가명은 토끼맨에서 학살자로 바꾼 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진한을 토끼맨으로 호칭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엘리스를 간신히 떨쳐낸 진한은 대기실에서 3등급 싸움판의 전투를 감상했다.
‘확실히 차이가 좀 있군.’
4등급과 3등급 싸움판의 차이는 극명했다.
몸놀림이나 전투 방식을 보건데, 기본적으로 2개 이상의 스탯이 20을 넘은 슬레이어들이 존재했고, 본격적으로 스킬 활용도가 상승했다.
클래스가 없어 스킬이라고 해봐야 사냥꾼의 검뿐인 진한으로서는 꽤나 버거운 싸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하프 스킬들은 이해도만 충분하다면 그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하프 스킬의 장점은 바로 여기 있었다.
이해도가 뒷받침 된다면, 어설픈 액티브 스킬 몇 개로를 익히는 것보다는 하프 스킬 하나를 익히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이해도를 쌓기 위해서는 오직 스킬 하나만을 파고들어야 했으므로, 스탯 육성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회귀 이전의 대부분의 상위 슬레이어들은 각각 하나씩의 하프 스킬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하프 스킬의 효용성은 증명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 먹힐지는.’
진한은 싸움판 위에서의 전투를 눈여겨봤다.
자신의 상대가 될 지도 모르는 이들인 만큼 몸의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예의주시했다.
그렇게 몇 차례의 전투가 끝나고.
“자아-! 이번 참가자는-! 5등급에서 4등급 싸움판에서 무패의 신화를 기록한-! 혜성처럼 나타난 슈퍼 루키-! 학살자 토끼맨-!”
진한의 차례가 다가왔다.
진한의 상대인 반항아는 신규 슬레이어 시절 길드에서 제법 촉망받는 슬레이어였다.
그의 클래스는 암살자.
두 자루의 짧은 단검을 활용해 상대를 빠르고 신속하게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대로 길드에 몸을 담고 있었으면 길드의 비밀스러운 일을 처리하는 ‘그림자’가 되어 전폭적인 지원과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며 지낼 수 있었겠지만, 타고난 반골 성향이 문제였다.
그는 상급자와 크게 다투고 길드를 떠나왔다.
몇 번은 레이드 파티에 참가해 레이드를 다녀 봤지만 그의 클래스와 레이드는 맞지 않았다.
거기에 거듭되는 파티원들과의 마찰에 그는 곧 레이드 파티를 떠나게 됐다.
그 뒤로 그는 혼자 수준 낮은 유적지나 지역을 탐사했다.
그러던 중 그는 하나의 아이템을 발견하게 된다.
스페셜 클래스, ‘비밀의 집행자’가 담긴 단검 하나.
뛸 듯이 기뻤으나 ‘비밀의 집행자’를 얻으려면 조건이 필요했다.
‘슬레이어와의 결투 승리 100회. 단, 패배시 초기화.’
반항아는 그 길로 곧장 투기장을 찾았다.
그는 오직 이길 수 있는 상대만을 상대하며 퀘스트를 완료해 나갔다.
혹여나 승리 횟수가 늘어나면 투기장 측에서 억지로 강한 상대와 매치시킬 수 있으니, 적당한 기간이 지나면 적당한 위장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항아는 눈앞에 선 토끼맨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템도 별 거 없고, 검도 투기장에서 제공해주는 검이군.’
4,5등급 싸움판에서 무패를 자랑하고 있다지만, 자신 역시 무패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는 토끼맨의 싸움을 몇 차례 구경해 본 적이 있었다.
사용하는 스킬 하나 없이, 타고난 전투감각만으로 스킬과 능력치의 격차를 메꾸는 전형적인 승부사.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반항아는 양손에 쥔 단검을 혀로 핥으며 토끼맨을 응시했다.
‘마지막 결투다. 비밀의 집행자를 위한 제물이 되어라.’
지금까지의 결투 승리는 99.
반항아는 토끼맨이 자신의 스페셜 클래스 전직의 위대한 제물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작품 후기 ============================
가니메디아님 댓글 감사합니다~~
드디어 진한이 엘리스를 받아들였습니다!
두둥..
그리고 진한은 투기장을 전전하네요.
즐거운 감상 감사드립니다.
코멘트, 추천, 선작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