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페이크 =========================================================================
*
근 며칠간 길드는 조용했다.
진한 역시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셀리나를 죽이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타이틀 군주의 씨앗을 주는 아이템은 게이트가 닫혔다가 열릴 때 단 하나만 빠져 나왔다.
즉 토벌대 하나가 들어가 게이트가 닫히고, 토벌대가 전멸하고 게이트가 열릴 때, 하나가 나오는 것이었다.
즉 현재 배신 마을에 군주의 씨앗은 셀리나 뿐이었다.
그녀를 빨리 죽이면 죽일수록, 토벌대의 승산은 높아졌다.
‘우선 그전에…….’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체력(18) 근력(18) 민첩(17) 내구력(19)
체력과 민첩이 각각 +1이 된 상황이었다.
중견 슬레이어의 기준은 보통 능력치 20을 넘었느냐, 못 넘었느냐로 판단했다.
슬레이어들이 세운 기준이었다.
실제로 그보다 낮은 능력치를 가지고도 중견 슬레이어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반대도 존재했다.
왜 중견 슬레이어의 기준을 20으로 잡았느냐 하면, 19에서 20으로 넘어갈 때의 실제 상승 폭이 9에서 10으로 넘어갈때나, 29에서 30으로 넘어갈 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19에서 20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만큼 힘들었다.
그런 고비가 두 개 있었다.
20과 45.
슬레이어들은 20 이전을 초급, 20과 45사이를 중견, 45이상을 상위 슬레이어라 명칭했다.
같은 중견 슬레이어라 해도 수준의 차이가 극명한 것은 중견 슬레이어 구간 폭이 넓기 때문이었다.
‘우선 주요 네 개 스텟을 19로 맞춘다.’
기본적으로 뭔가를 하려 해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빠른 상승률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19에서 20스텟으로 넘어갈 때였다.
굉장히 오래 걸렸다.
어떤 기준으로 상승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지난한 시간이었기에 진한은 우선 19로 맞추는 데에 초점을 뒀다.
진한은 이제 사냥꾼의 검을 살펴봤다.
사냥꾼의 검의 완성도는 현재 67%였다.
스킬을 만드는 것은 끝이 아니었다.
만들고 숙련도를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으니, 사냥꾼의 검을 완성시키는 것도 당장 해야 할 일이었다.
창조된 스킬의 완성도는 오직 실전이 아니면 채울 수 없었다.
스킬 공포의 심장은 아직 공포의 지배를 제외하고는 전혀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시간이 꽤 필요하겠어.’
--
이름 : 진한
성향 : 중립
직업 : 없음
타이틀 : 카이센의 슬레이어
능력치 :
체력(17)근력(18)민첩(16)마법력(5)지력(5)
스킬
공포의 심장
사냥꾼의 검
(Unlock)
(Unlock)
(Unlock)
(Unlock)
(Unlock)
--
그것뿐만이 아니라 잠겨있는 다섯 개의 군주 스킬을 여는 일은 아직 요원하기만 했다.
‘천천히, 천천히 해야겠군.’
서두른다고 단 시일 내에 해결되는 일들도 아니었다.
“우선은…….”
당장은 실전이 필요할 때였다.
스텟이나, 사냥꾼의 검이나 실전에서 올리는 편이 제일 좋았으니까.
마침 적당한 장소가 있었다.
진한이 막 상태창을 닫고 일어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토끼님!”
“……이런 씨발.”
엘리스였다.
엘리스는 헤맑게 웃으며 진한의 품에 안겼다.
“토끼님! 애꾸눈 죽었대요!”
“애꾸눈?”
엘리스가 알고 있는 애꾸눈은 단 한명밖에 없었다.
“응! 엘리스가 토끼님 찾은 날 봤던 애꾸눈! 무서운 애꾸눈!”
바로 메이첸이었다.
엘리스는 진한의 팔에 매달린 채 조잘대고 있었다.
“나 오래 잘 참았어. 그렇지? 토끼님 보고 싶었는데 잘 참았어, 그렇지?”
“…….”
진한은 입을 꾹 다물고, 엘리스를 철저히 무시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맞다, 맞다. 그거 얘기 했나? 외꾸눈 오늘 죽었대, 외꾸눈. 꽥! 하고 자살했대. 배에서 내장이 질질질 멍청해, 멍청해.”
적성검사 유적지서 돌아오고, 진한은 엘리스에게 공포의 지배를 사용해 자신을 찾아오지 말 것을 명령했다.
죽이는 편이 제일 확실했으나, 급한 대로 공포의 지배를 사용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엘리스에게는 공포의 지배가 잘 통하지 않았다.
분명 엘리스에게 자신은 구세주이면서 한 편으론 공포의 대상이었다.
자신을 다른 세계로 보내줄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존재.
진한은 말 한마디로 그녀를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세상으로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다.’
진한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녀는 공포에 떨었고, 진한은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공포의 지배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엘리스는 채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자신을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미친놈들한테도 정신이상 스킬이 먹히는지 확인해본 적이 없군.”
“응? 응? 애꾸눈 죽었다고.”
진한은 엘리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애꾸눈! 애꾸눈!”
“알겠다. 그래, 애꾸눈이 죽었겠지.”
진한은 보채는 엘리스를 대충 달래주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진한은 메이첸이 죽었다는 현장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한이 찾아갔을 때는 이미 길드에서 현장을 정리한 후였다.
“쯧.”
진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메이첸이 죽은 사건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사건 현장을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으니까.
진한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렸다.
메이첸이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자신은 자신의 일을 해야 했다.
한시 빨리 스텟과 사냥꾼의 검을 완성하는 것.
“돌아가라.”
진한은 길드를 나서기 전에 엘리스를 떼어 놓으며 명령했다.
“싫어어…….”
엘리스는 잔뜩 풀이 죽은 채 고개를 땅에 떨어트렸다.
‘죽일까.’
진한은 이를 악물고 인내했다.
지금은 최대한 눈이 띄는 행동은 자제하는 편이 좋았다.
엘리스가 하도 진한을 따라다니는 통에 둘 사이의 관계가 이상하게 소문난 터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세상으로…….”
“싫어! 싫어! 싫어! 엘리스 토끼님이랑 있을 거야!”
“이런 씨발.”
진한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확신했다.
미친년한테는 정신계열 스킬은 통하지 않는다고.
*
마을은, 마을이라기보다는 성에 가까웠다.
그 정도로 규모가 컸다.
슬레이어들이 모여들면서, 마을이 조금씩 커져간 게 그 이유였다.
사람이 모여들면, 뒷골목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진한과 엘리스가 향한 곳은 바로 그런 뒷골목이었다.
마약, 매춘, 노름이 당연한 곳.
슬레이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버려지는 곳.
더즌 헬의 뒷골목은 상상 이상으로 추잡했다.
뒷골목을 방문하는 이들 중에는 가면으로 신분을 감춘 이들도 더러 존재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신분이 노출되면 곤란한 깨끗한 놈들도, 남몰래 찾는 향락의 근원지.
진한과 엘리스 역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진한은…….
“토끼님! 토끼님!”
토끼가면을 쓰고 있었고, 엘리스는 특징이 없는 눈만 뻥 뚫린 가면을 쓰고 있었다.
진한의 가면은 물론 엘리스가 골라준 것이었다.
가면 너머의 진한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진한이 뒷골목에서 향한 곳은 바로 투기장이었다.
슬레이어들끼리 돈을 걸고 죽고, 죽이는 광란의 투기장.
회귀 이전에 진한이 성장한 곳도 바로 이런 투기장이었다.
*
투기장의 싸움판 종류는 여러 개였는데, 우선은 슬레이어의 실력에 따라 다섯 가지 등급으로 나뉘어졌다.
가장 최하 등급은 주로 길드에 들지 않거나, 적성검사에서 도망쳐온, 혹은 운이 나빠 잡혀온 신규 슬레이어들이 참가했는데, 대부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가거나, 투기장을 떠나갔다.
실력으로 등급을 나누고 나면, 이제는 직업군으로 등급을 나눴다.
비슷한 직업군은, 비슷한 직업군끼리.
하지만 직업군을 가리지 않는 투기장 싸움판도 있었으니, 무차별 싸움판이었다.
진한은 최하 등급의 무차별 싸움판에 참가를 신청해두고 대기하고 있었다.
진한이 가면을 쓰고 온 것도 싸움판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최하 등급의 무차별 싸움판은 가장 인기 있는 싸움판이었다.
싸움도 하수 싸움이 재미있다고, 딱 그런 꼴이었다.
한 경기가 끝나면, 승자는 배당금을 받고 물러날지, 혹은 계속 싸움판에 남아 다음 도전자를 기다릴지 정할 수 있었다.
진한은 무심히 좀 전의 전투에서 승리한 승자를 살피고 있었다.
지금까지 3연승.
‘이제 한계군.’
진한이 보기에 싸움판 위에 선 놈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놈이 싸움판 위에서 내려가려 하자, 객석 쪽에서 한 슬레이어가 쌍욕을 지껄였다.
놈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남자를 보고는 싸움판에 남아 다음 도전자를 맞이했다.
객석 쪽에서 쌍욕을 지껄인 남자는 아무래도 놈의 ‘주인’인 듯 했다.
진한은 혀를 쯔쯧, 차며 다음 도전자가 올라가기를 기다렸다.
다음 도전자는 밋밋한 하얀색 가면을 쓴…….
“토끼님! 응원해줘!”
엘리스였다.
진한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한은 클래스를 정하지 않았지만, 엘리스는 마법 계열 노말 클래스로 전직한 상태였다.
길드에서는 세부 적성도 알아보지 않고 클래스를 정하는 엘리스를 만류했지만 엘리스의 고집은 완고했다.
진한이 시킨 것도 아니었고, 그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엘리스 자의로 클래스를 정하고, 전직해버렸다.
‘여기는 이상한 나라니까…….’
전직을 한 후 그녀는, 진한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진한은 싸움판에 올라선 엘리스를 응시했다.
‘어느 정도인지 볼까.’
회귀 이전의 엘리스는 천재였다.
미친년이라 문제였지, 정상적인 슬레이어였다면 어떤 길드에서나 탐낼만한 인재였다.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엘리스의 상대는 곧바로 엘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상대는 근접 계열의 클래스, 엘리스는 마법 계열의 클래스였다.
숙련된 전투 마법사가 아닌 이상 근접 계열에게 거리를 주는 행위는 해선 안 된다.
헌데 엘리스의 반응이 너무 늦어 버렸다.
곧 있으면 상대의 검이 엘리스의 배를 쑤시고 들어올 것이다.
그럼에도 진한의 표정은 무심했다.
‘차라리 잘 됐군.’
귀찮던 차였다.
길드를 나설 때 엘리스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엘리스의 뱃가죽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으려 했다.
빛이 번쩍이고, 상대가 뒤로 훨훨 튕겨 나갔다.
“저런 미친.”
진한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영창이 빠른 마법사는 많다.
마법 스킬 영창은 운동과 같이, 습관이 되고 익숙해지면 더 능숙해지고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엘리스는 신규 슬레이어였다.
그런 그녀의 영창 속도는 메이첸 급이었다.
“……. 미치고도 살아남았던 이유가 있었군.”
엘리스는 천재였다.
“토끼님! 나 이겼어! 이겼어!”
엘리스가 진한을 보며 방방 뛰자, 투기장의 관객들의 시선이 진한에게 집중되었다가 진한의 가면을 보고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가면 속 진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리스는 그 뒤로 세 번의 전투에서 이기고, 재미없다는 이유로 싸움판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파이팅 금액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며 진한에게 달라붙었다.
그 뒤의 싸움판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하수 싸움이 재밌다지만, 진한 정도 되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함께 신청했는데.’
진한은 팔에 달라붙어 볼을 부비는 엘리스를 떼어내며 경기수를 짐작해봤다.
못해도 열 경기는 넘었다.
그럼에도 엘리스는 애진즉에 출전하고, 진한은 아직까지 대기중이었다.
지루함과 짜증에 인내심이 슬슬 바닥나려는 찰나, 싸움판에서 사회자가 진한을 호명했다.
“……승을 한 슬레이어! 그리고 거기에 도전하는 이번 상대는…….”
진한은 싸움판 위로 올라섰다.
관객들의 시선이 진한에게 쏠리고,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토끼맨-!”
사회자의 우렁찬 외침이 싸움판 구석구석에 전해졌다.
“와하하, 토끼 새끼냐 저거!”
“몇 초냐!” “일분은 넘기냐?”
잠시의 정적 후 관객들이 박장대소했다.
“이런 씨발.”
진한은 이를 뿌득 갈았다.
엘리스에게 참가 신청서를 내고 오라고 시켰더니, 가명을 고쳐 놨다.
맞은편에 선 거구의 사내가 진한을 보며 낄낄거렸다.
“밤에는 일찍 끝나도, 지금은 좀 버텨보라고? 토끼 새끼야.”
놈은 왼손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엄지를 끼웠다.
“크기도 한 요만하냐?
그 말 한마디가 진한의 인내심을 박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