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엘리스 =========================================================================
미친년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마녀 엘리스는 미친년 중에서 최고로 미친년이었다.
회귀 이전에 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더즌 헬에서의 행보는 대단했다.
제 기분대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살인광.
더즌 헬에 그런 종류의 미친놈들은 많았지만 엘리스는 남달랐다.
바로 재능 있는 미친놈이라는 점이.
그녀를 잡는 데 애먹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정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마법 난사.
슬레이어들은 그녀가 스페셜 혹은 유니크 클레스로 전직한 슬레이어라고 짐작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남의 상태창을 훔쳐볼 수 있는 클레스인 디텍터가 확인해본 결과 그녀는 마법 계열 노말 클래스였다.
그때서야 슬레이어들은 그녀 클래스의 약점을 분석해 토벌대를 꾸렸고 그녀를 토벌할 수 있었다.
‘죽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전 생의 그녀의 행보를 봤을 때 그녀의 존재는 실이 되면 실이 됐지 득이 될 수 없었다.
“토끼야, 토끼야. 나를 데려가줘. 내가 엘리스야…….”
진한은 옥좌를 흘끗 돌아봤다.
싸구려 철검이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그도 아니면…….
진한은 오른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살포시 움켜쥐었다.
이대로 힘을 준다면…….
약간의 수고는 있겠지만 손쉽게 그녀를 죽일 수 있었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라.’
진한은 결심이 서고 그녀의 뒷목을 세게 쥐었다.
아니, 쥐려고 했다.
건너편 복도 너머에 보이는 실루엣만 아니었다면, 기필코 죽였을 것이다.
진한은 인상을 찌푸리고 실루엣을 응시했다.
한쪽 눈이 화상으로 얼룩진 사내.
총교관 메이첸이 굳은 표정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
메이첸은 세 번째 방까지 지나오면서 몬스터의 사체를 살폈다.
셀리나가 자신을 노리고 판 함정이라면 빠져나갈 구실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도 중요한 시점이었다.
몬스터의 시체들을 살펴본 결과 메이첸은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신규 슬레이어가 아니다.’
검흔이 말해주고 있었다.
한 두 번 휘둘러본 솜씨가 아니었다.
일검, 일검이 급소를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몬스터들의 몸에는 검상이 많이 남았다.
이정도 실력자라면 이런 몬스터들은 일검에 죽일 수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말이 되지 않았다.
자신조차 몇 보지 못했을 정도로 깔끔한 검흔이었건만, 몬스터를 처리하는 방식은 지저분했다.
대부분 다리에 한번, 팔에 한번 마지막으로 목에 한번.
상대가 저항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만들어 놓고 숨통을 끊어 놨다.
‘미친놈인가.’
가끔 그런 놈들이 있었다.
살육을 즐기는 놈들.
더즌 헬에서는 그리 드물지 않은 경우였다.
메이첸은 추측하기를 그만두고, 앞으로 어두운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의 벽돌이 바뀌는 걸 보니 끝이 멀지 않았다.
어차피 길은 하나이니 놈을 곧 만날 수 있으리라.
얼마간 걸었을까.
메이첸은 김소연과 다정하게 얼싸안고 있는 진한을 볼 수 있었다.
‘미친놈이 맞군.’
진한은 메이첸을 응시하면서도 엘리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메이첸은 어떤 장비도 갖추고 오지 않았다.
처음 적성검사 유적지에 안내할 때의 장비 그대로였다.
‘탐사대는 아닌 거 같은데.’
탐사대였다면 최소한 횃불이라도 혹은 통신용 아이템이라도 들고 와야 했다.
하지만 단촐 한 메이첸의 복장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탐사대였다면 긴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페어리문의 입장에서 자신은 유능한 신규 슬레이어이며 귀중한 재원이 될 테니까.
물론 그만큼 귀찮은 일도 생기겠지만, 변환 유적지의 끝에 있는 보상은 그런 것들을 감내할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첸의 이런 행동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진한은 엘리스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여차하면 방패로 삼아야겠군.’
메이첸은 숙련된 전투 마법사였다.
능력치로 보나, 스킬 숙련도로 보나 메이첸을 상대하기는 요원했으나, 한 번의 기회만 잡는다면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기대해 볼만했다.
인간을 방패로 삼는다는 것은 꽤나 거북한 일이었지만, 그 방패가 엘리스라면 말이 조금 달랐다.
그녀는 훗날 사람들을 학살할 미치광이가 될 것이니까.
“이런……. 내가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건가?”
메이첸은 넉살좋게 웃으며 말을 건냈다.
‘스무 걸음, 열아홉, 열여덟…….’
진한은 메이첸과 자신의 거리를 쟀다.
거리를 통해 상대가 적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있었다.
검수들끼리 가장 애매한 거리는 네 걸음.
그보다 멀면 안심해도 좋았고, 그보다 가까우면 경계해야 했다.
하지만 네 걸음은 가장 애매한 거리였다.
안심할 수도 없고, 경계할 수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상대를 해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상대를 일격에 끝낼 자신이 없다면 애매한 거리를 두고 경계심을 주지 않으며 기회를 노릴 것이었다.
거리는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을 보여줬다.
‘놈은 중견 혹은 상위 슬레이어. 나는 신규 슬레이어이니…….’
진한은 거리를 재는 것을 그만 뒀다.
놈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자신을 해할 수 있었다.
이럴 때 어설프게 경계하는 것은 안하느니만 못한 행동이었다.
“그리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진한은 웃는 낯으로 엘리스를 옆으로 치웠다.
엘리스가 칭얼대며 다시 팔에 매달렸고, 진한은 웃는 낯으로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몬스터들이 대단하던데. 혼자 처리한 건가?”
진한은 말없이 메이첸의 눈을 응시했다.
적의는 없는 듯 했다.
메이첸이 자신을 적대할 이유는 없었다.
변환 유적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모를까.
변환 유적지에서 알고 있었다면 한낱 적성 검사 유적지로 쓰지는 않을 것이었다.
랜덤 박스는 때로는 잭팟이 터질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아직은 변환 유적지에 대해서 널리 알려질 때가 아니었다.
변환 유적지에 알고 있는 슬레이어가 정보를 푸는 것은 좀 더 훗날이었다.
탐사대였다면 자신들을 뒤로하고 마지막 방을 살펴봤을 것이다.
메이첸의 시선이 진한의 어깨 너머로 옮겨졌다.
“나이트군.”
진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살펴봐도 되지?”
진한은 말없이 메이첸에게 길을 비켜줬다.
진한은 자신을 지나쳐 나이트의 잔해로 다가가는 메이첸을 응시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메이첸은 이곳에 온 이후로 줄곧 무언가를 살피는 듯, 특히 자신을 주시했다.
‘뭔가가 있군.’
진한은 메이첸이 나이트의 잔해를 어떤 방식으로 살피는 지 바라봤다.
갑옷의 색을 보고, 상흔을 보고…….
슬레이어로서 몬스터를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노련한 수사관이 살해 현장을 조사하듯.
“음.”
메이첸은 나이트의 상흔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지나온 현장으로 추측컨대, 신규 슬레이어로 위장한 타 길드의 간자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이트를 잡은 상흔으로 보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단순히 전투 센스가 뛰어난 놈인가.’
살피면 살필수록 확실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메이첸은 진한이 타 길드의 간자라는 데에 무게를 두고 현장을 맞춰봤고, 단순히 전투 센스가 뛰어난 신규 슬레이어라는 데에 무기를 두고도 현장을 맞춰봤다.
하지만 어느쪽이 이렇다 할 정도로 맞아떨어지는 상황은 아니었다.
처음엔 타 길드의 간자라는 쪽에 무게를 뒀었지만, 그랬다면 이런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메이첸은 생각하기를 그만 뒀다.
이런 식으로 머리를 굴리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너……. 뭐냐.”
메이첸은 진한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메이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날카로운 살기가 주변을 장악했다.
엘리스는 진한의 팔에 고개를 파묻고 바들바들 떨었다.
“신규 슬레이어, 진한.”
“웃기는 소리. 지구에서 인간 백정짓이라도 하다 오셨나? 몬스터들 써는 솜씨가 일품이던데.”
“틀린 말도 아니지. 제법 썰었으니까.”
진한은 빙글빙글 웃으며 메이첸을 응시했다.
이제 알았다.
놈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탐사대를 꾸리지 않고 홀로 유적지에 들어선 것도 그렇고, 탐사가 목적이 아님에도 이것저것 살피는 모양새도 그러했다.
결정적으로 진한은 회귀 이전에 놈에게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다른 길드에서 온 간자 놈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신규 슬레이어라고 믿기는 힘든데?”
진한은 메이첸의 추론에 피식 웃었다.
나름 영리한 놈인가 싶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는 모양새 하며, 태도도 그러했다.
놈과 자신의 전력차이는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놈은 그것을 전혀 이용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놈은 어떤 상황에 쫓기고 있었고,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이상 섣불리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저런 놈은 머리로 판단하지 않는다.
바로 감.
감에 따라 움직이는 부류였다.
메이첸은 진한의 미소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죽고 싶어?”
메이첸이 내뿜는 살기가 한층 더 거세졌다.
하지만 진한에게 있어서는 우스울 뿐이었다.
겁에 질린 개가 더 크게 짖듯, 상황에 쫓기고 있는 놈은 여유가 없었다.
“메이첸 총교관님.”
“……?”
메이첸은 진한의 정중한 존대에 인상을 찌푸렸다.
“총교관님.”
진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메이첸을 호칭했다.
좀 전보다 더 진중하게, 정중하게.
“무슨…….”
뜬금없는 진한의 행태에 메이첸이 당황하며 말을 하려는 순간.
“총교관.”
진한이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좀 전과는 달리 싸늘한, 핏기마저 가시게 하는 냉엄한 어조였다.
“신규 슬레이어들이 죽었다, 총교관. 왜냐?”
메이첸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진한을 바라봤다.
정중한 스승을 대하듯 호칭하던 놈이, 이제는 아랫사람을 꾸짖듯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진한의 태도에 메이첸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곳이 적성검사 유적지가 아니기 때문이지. 아닌가?”
“이 빌어먹을 새끼……. 그건 내 잘못이…….”
진한은 놈의 반응을 보며 다시 확신했다.
놈은 상황에 쫓기고 있다고.
본래라면 크게 책임을 질 사안이 아니었다.
적성검사는 길드의 재원을 뽑는 중요한 행사였지만, 총교관 정도 되는 슬레이어를 단번에 팽할 정도로 신규 슬레이어들의 가치가 높지는 않았으니까.
“책임이 없다 말할 생각인가? 총교관. 페어리문 길드의 적성검사 방식을 바꾼 게 누구지? 총교관은 왜 바뀌었지?”
“너 이 새끼! 누가 보냈어!”
메이첸의 양 손아귀에 각각 다른 속성을 띈 마법이 넘실거렸다.
자신의 주도하에 적성검사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은 길드 내의 중진들을 제외하고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김태수마저도 직전에서야 알았으니. 헌데 진한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경이로운 속도의 더블 캐스팅이었으나, 진한은 주저하지 않았다.
놈은 자신을 죽일 수 없었다.
“그 성격 유약한 김태수가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을 테지? 그럼 누구지?”
진한은 엘리스를 옆으로 밀어두며 메이첸에게 다가섰다.
“바로……. 총교관 아닌가.”
진한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어려 있었다.
“책임을 묻겠지. 하지만 너무 과민반응 하는군. 길드 내에 정적이 있어? 그렇지? 내가 맞춰볼까?”
메이첸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눈앞에 저 남자는 위험하다.
무엇이 위험한지는 몰랐으나, 자신의 행동은 너무 경솔했다.
섣불리 살기를 드러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겉으로만 차가운 김태수가 너를 쳐내려 하지는 않겠지. 그렇지? 그렇다고 다른 중진들은 감히 너를 반할 수 없고.”
실제로 회귀 이전의 김태수는 배신 군주 토벌 때 일어난 ‘사건’ 전까지도 메이첸을 친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남을까…….”
진한의 한쪽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하지만 그를 마주하는 메이첸에겐 끔찍한 미소였다.
“아아, 그렇지.”
진한은 손뼉을 치며 메이첸과 눈을 마주했다.
“셀리나, 페어리문의 여신 셀리나가 있군. 그렇지? 넌 그녀에게 미움을 샀어. 맞지?”
메이첸은 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았다.
진한의 정체에 대한 혼란과, 페어리문 길드 내에서 결코 알려져선 안 되는 사실이 알려졌다는 생각.
그로인해 그는 진한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