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엘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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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은 스물셋의 나이로 대학교 4학년생이었다.
그녀는 서울 소재의 꽤나 좋은 대학에 입학했고, 꽤나 좋은 학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펙도 부족하지 않았다.
여러 기업에 이력서를 넣었고, 꽤나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서류전형 합격 여부가 발표되는 날 저녁 들뜬 마음에,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잠에 들었던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반긴 것은 익숙한 방안이 아니었다.
낯선 세계, 더즌 헬.
이곳에서 그녀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시작했다.
하루, 하루가 낯설고 생소했다.
매일밤 잠에 들 때 마다 빌었다.
이것이 꿈이기를.
돌아가고 싶다, 집으로.
아침에 눈을 뜰때는 간절히 애원했다.
내가 눈을 뜨는 곳이, 집이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신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하기로 마음먹었다.
생존력 검사를 참여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정해진 환경과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으며, 모든 과제를 훌륭히 수행해 왔으니까.
이번 역시 그럴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다시 빌고, 빌고, 또 빌었다.
탐앤스라는 외국인 남성은 꽤나 믿음직했다.
호쾌한 인상에, 내구력 생성 커리큘럼 역시 훌륭하게 완수했고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멋진 남성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모인 무리는 유적지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유적지의 긴 터널이 끝나고 밝은 광장이 드러났다.
그녀는 그곳에서 다시 신에게 빌었다.
이것이 꿈이었으면.
'나는, 나는 지금 긴, 긴 악몽을 꾸는 거야.'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고,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들이 광장에서 맞이한 광경은…….
정육점.
인간을 도축한 정육점.
소나 돼지의 고깃덩이를 갈고리에 매달 듯.
앞서간 두 무리의 슬레이어들이 갈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남자들은 정육점의 고깃덩이마냥 갈고리에 매달려 신음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한 구석에서 나체가 되어…….
낯선 생명체와 몸을 섞고 있었다.
난쟁이, 붉은 난쟁이었다.
인간과 다른 점이라곤 조금 더 긴 귀와 고양이 같은 갈라진 눈.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나체였다.
남자들은 산채로 도축당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강간당하고 있었다.
반항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반항의 기색이 보이면…….
팔, 다리가 잘려 나갔으니까.
탐앤스의 무리는 비명을 질러댔고,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놈의 아가리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뒤로 물러섰다.
'아냐, 아냐, 아냐. 이건 꿈이야. 꿈. 꿈. 꿈. 꿈. 꿈. 아냐, 아냐, 아냐.'
난쟁이들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돌아봤다.
남자들을 도축하고 있던 것들이, 여자들을 겁간하고 있던 것들이, 일제히 탐앤스의 무리를 응시했다.
탐앤스는 창을 겨눴고, 그를 중심으로 남자들은 각자의 무기를 빼어들었다.
실로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난쟁이들이 달려들고, 탐앤스와 남자들이 충돌했다.
그리고 무리에서 그녀를 제외한 유일한 여자인 제인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닥쳐, 닥쳐, 닥쳐, 시끄러워!'
소연은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어서, 기어서 뒤로 물러나면서도, 그녀의 눈은 광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
진한은 유적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이동하며 머릿속으로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메이첸이 유적을 돌아보고 나왔을 때, 그의 몸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이 유적은 지나치리만큼 깨끗했다.
메이첸이 유적을 돌아보고 온 것은 대략 삼십 여분.
유적의 끝을 보고 오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변환 유적인가.'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슬레이어가 입장할 경우, 전혀 다른 유형의 유적으로 변모하는 유적.
흔치 않은 형태의 유적이었다.
변환 유적은 꽤나 흔한 형태의 유적이었으나, 그 정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변환 유적의 끝에 있는 보상.
보상을 독점하기 위해 길드들은 변환 유적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비밀로 감췄다.
'조건을 만족하기 전엔 분명 적성검사용 유적지의 난이도였지.'
그렇다면 조건을 만족해 유적이 변환되어도 크게 높은 난이도의 레벨은 아닐 것이었다.
'운이 좋군.'
변환 유적의 제일 큰 장점은, 보상이 무조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 보상이 유적의 난이도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랜덤상자였다.
진한은 능력치를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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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9) 근력(11) 민첩(9) 내구력(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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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력은 문제되지 않았다.
체력과 근력도 나쁘지 않은 수준.
신규 슬레이어 치고는 꽤나 높은 수준의 능력치였다.
체력이 +4, 근력 +6, 민첩 +4, 내구력 +19.
총 33의 능력치가 추가되었다.
진한은 슬쩍 몸을 풀었다.
내구력 생성을 위해 체력과 근력 능력치를 단련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내구력 능력치를 올려 다행인 상황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이 어두운 터널의 끝을 알려왔다.
'공포의 심장은…….'
아마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공포의 심장 스킬은 대부분의 옵션이 제한된 상태였다.
이 유적지에서 공포의 지배에 당할 정도로 이성을 갖춘 존재가 나올리 만무했다.
빛이 보이는 출구에 가까워지자, 전투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을 적신 핏물과…….
"끕. 끕."
숨죽인 채 울고있는 한 여자.
진한은 무심하게 여자를 응시했다.
통로와 떨어진 거리는 불과 이십여 미터.
'인지 범위가 그리 길지 않군.'
전투 흔적으로 보았을 때, 광장에는 몬스터가 있으며 인지 범위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정도 거리면 충분히 인간의 채취를 따라 추적을 할 수 있는 거리였으니까.
진한은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눈을 감고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생존자는……."
"꺄아아……읍!"
갑작스런 진한의 등장에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진한은 서둘러 여자의 입을 막고 눈을 마주했다.
공포에 질린 상황이었으며, 한순간이나마 진한에게 공포를 느꼈다.
진한은 공포의 심장을 사용했다.
눈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변하며 빛을 발했다.
여자를 진정시키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간편했다.
"조용히."
여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진한을 응시했다.
"조용히, 알겠으면 고개를 끄덕여."
저 출구 너머에 있는 몬스터의 인지 범위가 길지는 않은 듯 했지만, 비명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될 지 몰랐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진한은 입을 막은 손을 천천히 뗐다.
"이름이?"
"기, 김소연."
"그래, 내 이름은……."
"진한, 진한…… 맞죠?"
김소연은 손을 뻗어 진한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하, 한국인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
"그래, 나도 반갑군. 생존자는 너뿐인가?"
"모, 모르겠어요. 다, 다 죽지는 않았을 거에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어?"
진한의 요구에 김소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전형적인 패닉상태였다.
원래라면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불가능 했을 것이다.
공포의 지배가 김소연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 설명을 요구하자 김소연의 눈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한은 다시 공포의 심장을 발동시켰다.
차츰 김소연의 눈동자가 안정을 되찾았고, 진한은 다시 요구했다.
"설명을 부탁하지."
진한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소연에게 말을 건냈다.
소연은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설명을 다 들은 진한은 몬스터를 특정할 수 있었다.
붉은 색 난쟁이에 남자는 갈고리에 매달아 도축하고, 여자는 겁간한다.
거기에 난이도가 낮은 유적지에 나올 몬스터는 하나밖에 없었다.
피난체의 난쟁이.
슬레이어들은 피난체라 부르는 몬스터였다.
후각이 거의 작용하지 않으며, 청각 또한 인간에 비하면 뒤떨어 졌다.
시각은 뛰어났지만 어두운 곳에선 거의 장님이나 마찬가지인 몬스터였다.
피난체는 주로 날붙이를 사용했다.
진한으로서는 쾌재였다.
인간형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더즌 헬 최고라 자부할 수 있었다.
'개체 수는 십 안팎이군.'
진한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나, 나가는 방향은 그쪽이 아니……."
김소연은 피난체의 난쟁이에게 가는 진한의 바지자락을 잡았다.
"나가지 않는다. 적성검사는 끝났어."
적성검사는 사고로 끝맺음 할 것이다.
"나가도 어떤 불이익도 당하지 않을 거다. 나가도 좋을 거다."
이 상황에서 살아남은 김소연은 적성검사의 통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공포에 몸을 맡기고 살아남는 것도 생존력의 일부였다.
오늘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이겨낸다면 그녀는 훌륭한 슬레이어가 될 수 있었다.
진한은 그대로 몸을 돌려 유적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광장의 입구가 가까워지자, 비명소리와 신음이 뒤섞여 들려왔다.
진한은 입구에 흥건히 고인 핏물을 밟지 않게 벽 가까이에 붙어 이동했다.
원형의 광장 안에 피난체의 난쟁이들은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반수 정도 되는 남자들은 완전히 해체되어 피난체의 난쟁이들의 아가리로 들어가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신음하며 갈고리에서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한켠에서는 피난체의 난쟁이들이 여자들을 강간하고 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채 죽은 여자들의 음부에서는 백탁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난체의 난쟁이들은 살아남은 여자들의 가랑이로 파고들어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도축하고 있는 난쟁이들이 넷, 여자들에게 붙은 난쟁이들이 다섯.
광장의 중앙에는 일곱 구의 피난체의 난쟁이 사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진한은 숨을 죽인 채 벽면을 따라, 여자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각과 후각이 썩 좋지 않은 놈들이었고, 식욕과 성욕에 충실한 놈들이었다.
소리를 크게 내거나 시야에 들지만 않으면 놈들은 하던 일에 열중할 것이다.
여자들은 망연히 천장을 보며 몸을 들썩였고, 몇몇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진한이 그들에게 거의 근접했을 무렵, 피난체의 난쟁이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키륵?"
놈은 허리를 놀리다 말고, 진한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진한은 망설이지 않고 놈에게 달려 들었다.
어떤 스킬도 쓸 수 없는 몸이었고, 능력치가 한참이나 뒤떨어 졌지만, 검의 궤적은 얼추 흉내낼 수 있었다.
진한의 검이 피난체의 난쟁이의 목에 박혀들었다.
"캬르륵!"
놈은 피거품을 물며 신음했다.
그 소리에 여자들에게 붙은 난쟁이 넷이 진한에게 달려들었다.
진한은 침착하게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피난체의 난쟁이 하나가 칼을 휘두르고, 다른 하나가 진한에게 달려들었다.
진한은 검을 휘둘러 피난체의 난쟁이의 칼을 흘려보냈다.
곧바로 걸음을 반보 뒤로 물러서며 피난체의 난쟁이를 피하고 검을 겨눴다.
진한의 동작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었다.
발 움직임은 간결하면서도 폭이 넓었고, 검은 막힘이 없었다.
진한의 검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종잡을 수 없이 움직였다.
사대 일의 싸움이었지만 진한은 피난체의 난쟁이들의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괜찮군.’
진한은 팔뚝에 칼을 보며 검을 휘둘렀다.
내구력 능력치를 최우선한 결과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피하지 못하는 공격은 빗겨내고, 맞아도 되는 공격은 맞아 주었다.
몇 번인가 진한의 검이 피난체의 난쟁이들의 숨통을 끊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진한의 검은 몬스터들의 피륙만을 할퀴며 지나갔다.
합을 맞춘 듯 위태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칼춤이 이어졌다.
진한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갔다.
‘아직인가.’
그럼에도 진한은 끝내 피난체의 난쟁이들의 숨통을 끊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듯.
위태위태한 생사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계속했다.
날붙이가 목덜미를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 남자들을 도축하던 난쟁이들 역시 진한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처럼 좋은 기회를…….’
진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넷만 해도, 능력치의 한계를 넘어선 전투였다.
비정상적인 내구력 능력치가 아니었다면 결코 시도하지 않았을 전투.
그럼에도 무리해서 전투를 발휘하는 것은…….
도축하던 피난체의 난쟁이 하나가 전투에 끼어들었다.
넷은 가능하지만 다섯은 무리다.
‘아쉽군.’
진한의 검이 예리한 궤적을 그리며, 피난체의 난쟁이의 목을 땄다.
그리고 그때…….
[학살자의 검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생성 알림음이 진한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바였다.
헌데 예상치 못한 알림음이 연달아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