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리턴 더즌헬 =========================================================================
*
더즌 헬의 대형 길드들에는 신규 슬레이어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커리큘럼이 별도로 존재했다.
능력치 창에 표시되어 있는 능력치는 총 다섯 개.
체력, 근력, 민첩, 마법력, 지력.
하지만 이것 외에도 조건이 부합했을 때 생기는 특수한 능력치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내구력이었다.
대형 길드들이 신규 슬레이어를 처음 받았을 때, 가장 먼저 생성시키는 것이 내구력이었다.
체력은 전투의 유지력을 향상시켜주지만, 내구력은 육체의 강도 그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
내구력 능력치가 있는 슬레이어와 없는 슬레이어의 육체 강도는 차이가 극심했다.
진한이 페어리문에 가입한 지 하루가 지났을 때, 페어리문은 신규 슬레이어 육성 커리큘럼을 시작했다.
내구력 스텟을 생기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몸의 끊임없는 혹사.
페어리문의 수련장에 신규 슬레이어들이 오와 열을 맞춰 페어리문의 교관이 시키는 데로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대부분의 길드들이 시행하고 있는 방법이었지만…….
‘비효율적이군.’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회귀 이전에 철거인이라는 칭호를 가진 슬레이어가 있었다.
그는 갑옷 하나 걸치지 않고도 뭇 슬레이어들의 공격을 버텨냈으며, 자신조차 그를 단칼에 베어내지 못했다.
철거인의 비정상적인 내구력 능력치에 대해선 많은 추측이 뒤따랐지만, 진한은 그가 내구력 능력치를 향상시킨 방법을 알고 있었다.
육체의 훼손과 회복의 반복.
학살자 길드의 방벽 철거인이 길드장인 진한에게 알려준 비밀이었다.
내구력의 근본을 이해했다면 쉬운 방법이었지만, 누구도 철거인처럼 체계적으로 수행하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철거인이 떠오르자, 갚아야 할 빚이 있음을 깨달았다.
철거인은 학살자 길드가 채 자리도 잡기 전에 갈가리 찢겨 몬스터의 먹이가 되었다.
길드간의 항쟁 때문이었다.
물론 항쟁에선 승리했으나…….
철거인을 잃었다.
지금은 배신 마을에서 얻어야 할 것들을 얻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꽤 높은 내구력 능력치가 필요했다.
‘방법은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군.’
교관이 수련의 휴식시간을 알려왔다.
신규 슬레이어들은 각자의 자리에 퍼질러 앉아 숨을 헐떡였다.
진한만이 그대로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육체의 훼손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뼈와 피부를 훼손시키는 것, 둘째는 근육을 훼손시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치유사가 치유할 수 있는 범위는 뼈와 피부까지 만이다. 근육이 완전히 잘린다면 적잖은 돈과 마법력이 필요했다. 물론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근육을 훼손시키는 것이었다.
페어리문 길드가 신규 슬레이어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해도, 상급 치유사를 신규 슬레이어에게 붙여줄 리는 만무했다.
진한은 길드 본부의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육체를 훼손시키는 것은 얼마든 할 수 있었지만, 굳이 눈에 띨 필요는 없었다.
더즌 헬에서는 누구도 믿으면 안 됐다.
하물며 이곳은 배신 마을이었으니, 쓸데없이 눈에 띨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회귀 이전 김태수와 술잔을 기울이던 중 그가 했던 말이 있었다.
김태수가 평생을 후회하고 죽기 직전까지도 잊지 못했던 단 하나의 사건.
그 사건의 시발점이 바로 길드내 마약 소탕이었다.
진한이 건물 지형을 대충 파악할 무렵 건물 뒤쪽에서 페어리문 길드의 길드원 몇몇이 잎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여, 신입인가?"
무리 중 하나가 진한을 보며 아는 채 했다.
"그렇습니다."
진한은 그들을 살폈다.
총 셋으로 입고 있는 장비로 클래스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검사, 마법사, 치유사.
전형적인 레이드 파티였다.
장비의 상태에 검을 맨 각도, 스태프를 착용한 위치를 살폈다.
진한이 내린 셋에 대한 평가는…….
'쓰레기들이군.'
엉망이었다.
장비는 손질되지 않아 광택을 잃었고, 검과 스태프는 유사시에 곧바로 뽑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방비했다.
자신이 저들과 동스탯을 소유했다면, 일검에 생명은 못가져가도 코는 베어갈 수 있었다.
더즌 헬에서 두 다리를 잃어도 두 팔은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두팔은 잃어도 코는 잃지 말아야 한다.
상태창의 존재는 그토록 중요했다.
체계적으로 스킬을 성장시키고 능력치를 성장시켜야 할 슬레이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부위였다.
회귀 이전엔 코나 양 팔만 잘라가는 악질적인 범죄도 성행했던 적이 있었다.
기본이 된 중견 슬레이어라면 당연히 방비하고 있어야 기본이었다.
"이리 와서 담배나 한 대 할래?"
검사는 잎담배를 내밀며 진한에게 손짓했다.
진한은 주위를 살폈다.
저들이 서있는 곳에서 한 발짝만 더 들어가면, 완전한 사각지대였다.
셋은 교묘하게 그 경계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약이군.'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냄새는 더즌 헬의 마약이었다.
몬스터에게 추출되는 마약의 종류로 지금처럼 담뱃잎에 적셔 피면 적당한 황홀감을 맛볼 수 있었다.
처음엔 부작용이 미약하지만 시일이 지날 수록 심각한 부작용이 생겨, 미래엔 대부분의 길드들에서 금지하는 약품이 되었다.
지금도 아이템 상태창에 마약으로 분류되기에 소수의 길드들은 금지시킨 약품이었다.
진한이 알기에는 그중에 페어리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빠를 수도 있겠어.'
진한은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진한이 다가올 수록 셋의 입가엔 비틀렸다.
검사는 품에서 잎담배를 꺼내 진한에게 내밀었다.
"아직 정신도 없고, 뭐가 뭔지 모르겠지?"
잎담배를 쥔 손을 살피니 굳은살은 커녕 변변한 상처 하나 없는 손이었다.
거칠거칠하지만 몬스터 사냥이나 유적탐사로 생긴 흔적은 없었다.
'역시……'
검사의 손이 진한의 확신을 더해주고 있었다.
진한은 잎담배로 손을 뻗었다.
잎담배가 진한에 손에 쥐어지려는 찰나…….
검사가 잎담배를 떨어트렸다.
"앞으로 잘 봐줄게, 선배님들한테 인사나 해봐."
"킥킥. 새끼, 또 시작했네."
그들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신고식의 일종이었다.
'썩 괜찮군.'
길드내 마약 소탕에 대한 실마리도 얻으면서, 내구력 스탯을 빠르게 증가시킬 방법을 찾아냈다.
진한은 땅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들며 손을 까딱거렸다.
"불이나 피워봐."
셋은 진한의 태도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씨발년이, 건방지게."
검사가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진한의 눈동자가 뱀의 눈처럼 갈라졌다.
스킬 공포의 심장이 발동되었다.
*
헤이시는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페어리문의 넓은 정원이 노을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으나, 헤이시가 보기에는 붉은 피를 뒤집어 쓴 것만 같았다.
해가 지면, 자신과 자신의 파티원들은 약속된 장소로 불려나갔다.
셋이 하는 일은 간단했다.
한 남자를 칼로 난도질하고, 마법으로 불태우고, 치료하는 것.
벌써 일주일 째 같은 생활의 반복이었다.
더즌 헬에서 살인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히 자신들은…….
그런데도 매일 밤이 악몽이었다.
처음부터 남자는 정상이 아니었다.
꺼림칙한 무언가가 있었다.
구타를 당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하며, 특히나 그 눈빛은…….
헤이시는 고개를 도리질치며 애써 남자의 눈빛을 잊으려 했다.
칼로 살갗을 도려낼 때, 남자는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 더.'
깊이, 더 깊이, 더 깊이.
살을 도려낼 때는 더 깊이, 뼈를 바스라트릴 때는 더 강하게.
뼈가 가루가 될 정도로.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었다.
'마약, 신규 슬레이어 살인. 두 개만 되어도, 김태수가 너희를 쫓을 이유가 충분하겠지. 날 죽여 봐. 너희가 알지 못하지만, 김태수는 찾아낼 만한 곳에 편지를 숨겨놨으니까.'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피를 흘릴 수 있고, 몸이 어느 정도가 될 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지 처음 확인했다.
도축, 그래 도축이었다.
자신들은 매일 밤 한 남자의 몸을 도축했다.
그 과정은 끔찍하고, 절망스러웠다.
특히나 제 살을 발라내고, 불태우는 데도 무심한 남자의 눈빛을 보자면…….
"악마, 악마야. 아아아아!"
그는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절규했다.
헤이시는 완전히 해가 저물자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은 죽어있었다.
진한은 페어리문 본부 내의 후미진 골목에 앉아 셋을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일이 쉽군.’
콧잔등을 누른 진한은 스킬창을 띄우고, 공포의 심장 상태창을 열어봤다.
--
[공포의 심장]
스킬 랭크 : ???
숙련도 : ???
스킬 설명
공포 군주의 권능.
공포의 지배(사용 가능)
(제한 된 능력입니다.)
(제한 된 능력입니다.)
…….
--
공포의 심장은 회귀 이전 공포 군주를 잡고 얻은 스킬이었다.
각 군주를 잡으면 마지막 일격을 날린 이에게는 십이군주의 권능이 영혼에 각인 된다.
지금은 대부분의 능력이 제한된 상태였지만, 당장은 공포의 지배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에게 일말의 공포라도 느낀다면, 자신은 상대를 지배할 수 있었다. 이것이 완전한 지배는 아니었지만, 공포로 상대를 옭아매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정도는 되었다.
삼인방에게는 이만해도 충분했다.
근 일주일간의 작업으로 얻은 내구력 능력치는 14였다.
더즌 헬에서 능력치의 고비는 십 단위로 끊어졌다.
스텟 3개를 올리는 것보다 9에서 스텟 하나를 올리는 것이 더 힘든 지경이고, 9와 10의 차이는 단순한 스텟 하나의 차이가 아니었다.
근 일주일간 얻은 내구력 능력치는 신규 슬레이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직 부족한데…….”
기억에 따르면, 배신 군주가 토벌되는 것은 더즌력 194년이었다.
어떻게든 그때까지는 힘을 키워놔야 했다.
진한은 머리 옆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누군가 다가와 진한의 손에 잎담배를 꽂아주었다.
퀭한 얼굴을 한 헤이시였다.
진한이 담배를 물자 헤이시는 양손으로 불을 붙여 주었다.
담배가 천천히 타들어갔다.
진한은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배신 마을에서 얻어야 할 것은 단 둘, 알아내야 할 것이 하나.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촉박했다.
담배가 채 다 타들어가지도 못했을 무렵, 진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이시를 비롯한 삼인방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오늘도 시작하지.”
진한은 헤이시에게 팔을 내밀었다.
*
신규 슬레이어들의 내구력 능력치가 5이상이 되자, 내구력 능력치 생성 커리큘럼은 끝을 맺었다.
커리큘럼은 바로 다음단계로 넘어갔다.
다음 단계는 적성검사.
적성검사 일정을 조정하지 위해 교관들이 회의실에 모여 회의를 갖고 있었다.
김태수는 이번 신규 슬레이어 적성검사의 총교관으로서, 짜여 진 일정을 점검했다.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김태수의 말에 회의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김태수의 맞은편에 앉은 교관 서류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간 우리가 너무 유약했다곤 생각 안하나?"
그의 입에 물린 담배는 반쯤 타들어가 재를 따닥따닥 떨구고 있었다.
김태수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왼쪽 눈이 화상으로 뭉게진 사내는 담뱃재를 툭툭 털고는, 다시 입에 물고 연기를 들이켰다.
사내는 '후-'하고 김태수의 얼굴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김태수는 매캐한 담배연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메이첸, 무례가 도를 넘는군."
싸한 살기가 김태수를 중심으로 회의실 전 방향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