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리턴 더즌헬 =========================================================================
진한은 나른한 감각에 몸을 맡겼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인가, 과연 죽는 것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진한의 머리를 맴돌았다.
[……님, ……한님.]
안락함에 온전히 몸을 맡긴 진한의 귓가로 낯익은 듯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한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떠질리 없는 눈이 떠지자, 진한의 눈앞에 보인 것은 하얀 수정구슬이었다.
"이건……?"
자신이 처음 더즌 헬에 왔을 때 보았던 '시작의 방'이었다.
[진한님. 정신이 드시나요?]
"대체 이게 무슨……."
진한은 현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주위를 둘러봤다.
쾌락의 군주 사피르나 토벌대를 꾸리고.
슬레이어들을 희생하며 쾌락궁에 도달했다.
50인의 슬레이어들은 사피르나의 친위대에 당하고, 자신은 사피르나와 결전을 치렀다.
한 팔과 한 다리를 뜯기고…….
불명예스런 죽음을 피해 자결했을 진데.
[당황스럽겠지만, 소개드리겠습니다. 여기는 더즌 헬, 앞으로 당신들은 슬레이어로서 더즌 헬의 십이군주를 물리쳐야 합니다.]
수정구슬은 진환의 당황이, 낯선 장소에 대한 두려움이라 판단했는지 설명을 이어갔다.
[슬레이어들은 클레스를 정할 수 있으며, 스킬 습득은 물론 스테이터스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진한은 얼빠진 수정구슬을 응시했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시작의 방이었으며, 눈앞의 수정구슬은 오직 시작의 방에만 있는 안내자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빨리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편이 생존에 좋을 테니까요.]
자신이 시간 회귀라도 했다는 것인가.
혹시 주마등을 특이하게 겪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쾌락군주의 농간으로 환상을 보고 있는 것 일수도 있었다.
"환상인가?"
진한은 가슴팍을 풀어 헤쳤다.
그의 가슴팍에는 불꽃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카이센의 증표'로 영혼에 각인되는 문신이었다.
상태이상 스킬에 면역력을 주며, 만약 증표가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이상이 걸렸을 때는 붉게 빛나며 슬레이어에게 경고를 주는 문신이었다.
자신이 세피르나의 매혹에 당하지 않았던 것도 '카이센의 증표' 덕분이었다.
카이센의 증표는 시꺼멓게 가슴팍에 자리하고 있었다.
붉게 빛나지 않는 것을 보아 정신계 마법에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시간 회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 회귀가 아니면 이 상황을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우선 더즌 헬의 슬레이어가 되신 것을 축하드리며, 간단한 메뉴얼 사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진한은 수정구슬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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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진한
성향 : 중립
직업 : 없음
타이틀 : 카이센의 슬레이어
능력치 :
체력(5)근력(5)민첩(5)마법력(5)지력(5)
스킬
공포의 심장
(Unlock)
(Unlock)
(Unlock)
(Unlock)
(Un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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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른 상태창에 진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수십 년간 쌓아온 스텟들은 물론 그 많던 타이틀까지 하나를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스테이터스는 완전히 처음 시작하던 때와 같았고, 숙련도 S등급까지 올려뒀던 스킬들은 모두 허공에 증발했다.
남은 것은 잠금 스킬 다섯과 공포의 심장뿐이었다.
[우연인가요? 방금처럼 코를 터치하시면, 상태창이 나옵니다. 잘 숙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진한은 혼란스러운 정신에 머리를 싸맸다.
정말 시간회귀가 맞다는 말인가.
"지금, 지금이 더즌력 몇 년이지?"
[……. 이상한 슬레이어군요. 더즌력을 알다니. 지금은 더즌력 192년입니다.]
진한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즌력 192년.
쾌락군주의 토벌대가 나섰던 것은 더즌력 231년이었으니, 무려 40년의 시간이 붕 떠버렸다.
"하, 하하."
시간회귀가 확실했다.
[본격적으로 직업과 스킬 및 더즌 헬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수정구슬은 처음 진한이 시작의 방에 왔을 때와 토씨하나 틀리지 않는 설명을 내뱉었다.
진한은 설명을 듣지 않고, 현 상황을 정리했다.
자신은 시간 회귀를 했고, 그 시간은 무려 40년이었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무치는 후회를 되돌릴 수 있었다.
진한의 머릿속으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졌다.
[……입니다. 진한님? 듣고 계신가요?]
수정구슬의 말에 진한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아아, 그래."
[당신은 참 독특한 슬레이어군요. 이제 시작하실 마을을 정해주시면 됩니다. 마을은 총 12개로 죽음, 고통, 배신, 거짓, 불행, 질투, 기만, 절망, 욕망, 쾌락, 파괴, 나태가 있습니다.
처음으로는 죽음마을을 추천합니다만, 다른 곳으로 가신다 해도……. 말리진 않습니다.]
수정구슬은 말을 불길하게 끌었다.
총 12개의 마을, 각 마을의 근처에는 십이군주의 영역으로 가는 게이트가 있었다.
들어가는 것은 자유지만, 나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시체가 되거나, 군주를 처치하거나.
열두 마을 중 가장 안전한 선택은 죽음마을이었다.
각 마을의 이름에는 그 뜻이 있었다.
고통의 마을에선 고통이 극대화되고, 배신 마을에선 슬레이어들끼리의 배신이 일상화 되어 있었다. 이런 걸 마을의 특성이라고 불렀는데, 죽음 마을의 특성은 죽은 자가 몬스터로 되살아나는 것뿐이었다.
처음 시작하기에는 죽음마을이 가장 이상적이었고, 나태마을은 절대 선택해선 안 되는 마을이었다.
"나는……."
진한은 머릿속으로 지난날을 회상했다.
기억 속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을 정하니, 시작할 마을이 정해졌다.
"배신 마을로 가지."
[배신 마을입니까?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배신 마을이 확실합니까?]
수정구슬의 물음에도 진한의 선택은 꺾이지 않았다.
"그래, 배신 마을."
[알겠습니다. 슬레이어 진한, 배신 마을로 이동합니다.]
눈부신 빛과 함께, 진한의 시야가 점멸했다.
*
배신 마을에 한 무리의 신규 슬레이어들이 도착했다.
그 수는 대략 이백여 명으로 배신 마을의 기존 슬레이어들은 신규 슬레이어들을 맞이하기 위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크고 작은 길드들이 신규 슬레이어들을 영입하기 위해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백여 명의 신규 슬레이어들은 채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몇몇 길드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우선 갑작스레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던 차에, 길잡이가 되어줄 이들이 나타나니 당연한 결과였다.
남은 오십 중 반은 각자 갈 길로 흩어지고, 반은 광장에 남아 있었다.
광장에 남은 이들 사이에 낀 진한은 주변을 살폈다.
'말로만 들었는데.'
아무리 바뀐 환경에 불안하다지만, 이처럼 쉽게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현상이었다.
당장 과거 자신이 시작했던 죽음 마을만 해도 각 길드들은 신규 슬레이어들을 맞이하고, 기초 지식을 알려주기만 했지 영입은 시일이 더 지난 후에 했다.
이것은 바로 배신 마을은 몇 가지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간략하게 믿음, 불신, 배신.
잘 믿게 되거나, 믿지 못하게 되거나, 상대를 배신하거나.
길드들을 따라간 이들은 믿음 특성에 홀린 이들이었고, 광장에 남은 이들은 불신 특성에 남은 이들이었다.
과거 진한은 배신 마을에 들른 적이 없었다.
이미 그가 성장하기 전에 배신 마을의 배신 군주는 소탕된 상황이었고, 배신 마을을 거쳐갈 필요가 없었다.
사전 정보가 부족함에도 이곳을 정한 이유는……
"안녕하세요?"
그때 한 여자가 광장에 남은 이들에게 말을 걸어 왔다.
금발이 탐스러운 백인이었다.
"제 이름은 셀리나, 길드 페어리문을 이끌고 있습니다."
셀리나는 광장에 남은 이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꾸벅 인사했다.
광장에 남은 이들은 셀리나를 응시했다.
"배신 마을에서 지내기 위한 간단한 상식을 좀 알려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진한은 광장에 남은 이들을 훑었다.
다른 길드들이 접근했을 때는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며 적대시 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셀리나가 접근하자 적대시 했던 반응이 사라지고, 오히려 셀리나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까지 내비쳤다.
셀리나는 진한이 이전 생에 만나지 못했던 슬레이어였다.
"저는 결코 여러분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제 얘기를 듣고 싶은 분들은 저를 따라 와주세요."
셀리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이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길을 나섰다.
광장에 남은 이들은 어물쩡거리다 이내 셀리나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태수, 네 말이 틀리지 않았기를 빌지.'
그 무리엔 진한 역시 끼어있었다.
*
셀리나가 신규 슬레이어들을 이끌고 간 곳은 페어리문의 길드 본부였다.
길드 본부가 밀집된 곳을 길드촌이라 불렀는데, 페어리문의 길드 본부는 길드촌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거대했다.
이십여명의 신규 슬레이어들은 페어리문의 길드 본부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셀리나는 길드 앞마당에 신규 슬레이어들을 모아 놨다.
"다시 소개드릴게요. 제 이름은 셀리나, 페어리문을 이끌고 있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페어리문은 배신 마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길드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셀리나는 한 남자를 옆에 불러 세웠다.
"김태수다. 페어리문의 부길드장을 맡고 있지."
차가운 인상의 남자는 길이가 각각 다른 검 두 자루를 허리춤에 차고,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김태수, 시간 회귀 이전에 자신과 길드를 창설했던 슬레이어였다.
그는 쾌락군주 이전의 군주 토벌전에서 전사했다.
진한은 그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다.
만약 그가 있었다면, 쾌락군주 토벌전이 그토록 허망하게 끝나지는 않았으리라.
"자, 이제 이 더즌 헬에 대해서 설명 드릴게요. 물론 시작의 방에서 수정구슬이 하는 말을 들으셨겠지만, 그들은 너무 불친절하죠."
셀리나는 신규 슬레이어들에게 더즌 헬에 대해, 배신 마을에 대해 설명했다.
더즌 헬에는 열두 개의 시작 마을이 있고, 열두 개의 군주 게이트가 있었다.
군주 게이트는 십이군주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통로이다.
입장하게 되면 게이트는 사라지고 절대 열리지 않는다.
게이트가 열리는 경우는 단 두 가지, 하나는 군주를 잡았을 때, 다른 하나는 입장자들이 모두 죽었을 때.
셀리나는 더즌 헬에서 슬레이어가 최우선해야 하는 목표를 설명했다.
슬레이어가 최우선해야 하는 목표는 바로…….
‘십이군주 퇴치.’
수정구슬이 언급했다시피 더즌 헬의 슬레이어들은 십이군주를 목표로 싸워야 했다.
게이트 바깥의 몬스터들은 단지 십이군주를 잡기 위해 거치는 단계일 뿐이었다.
개인의 슬레이어가 얼마나 세건, 어떤 몬스터를 잡았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더즌 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이군주를 상대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이었다.
십이군주를 상대할 만큼 강해지기 위해선 세 가지 요소가 중요했다.
아이템과 스킬과 능력치.
이 셋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적성에 맞는 클래스.’
클래스는 총 세 단계로 분류되어 있었다.
노말, 스페셜, 유니크.
하지만 적성에 맞는 클래스가 아니라면, 유니크 클래스를 가지고도 노말 클래스보다 뒤처지기도 한다.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신중을 요하는 일이었다.
“……로 나뉩니다. 저희 페어리문 길드에 속하시게 되면, 클래스 적성 검사는 물론 능력치를 올리기 위한 방법과 레이드 및 유적탐사에 많은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가입을 원하시는 분들은 좌측에 준비된 서류를 작성해주세요.”
셀리나의 설명이 끝나자 신규 슬레이어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진한은 망설임 없이 좌측으로 가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애초에 광장에 남아있었던 것도 페어리문 길드와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회귀 이전 태수의 말이 맞다하면 배신마을에서 페어리문만큼 안전한 길드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