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프롤로그 =========================================================================
나체의 여인과 사내의 조각상이 진열된 거대한 궁전 안 두 남녀가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올라탄 채로 남자의 가슴에 손을 집고 있었다.
매혹적인 은빛 머리칼에 고혹적인 자태를 한 여자는 야릇한 눈빛으로 남자를 내려다 봤다.
하지만 상황은 남녀 간의 쾌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자는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뜯긴 채로, 멀쩡한 손엔 검을 놓지 않았다.
"제법 잘 버텼네?"
여자의 입이 열리자, 색정적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남자의 얼굴엔 어떤 감정도 나타나있지 않았다.
"반응이 너무 없네? 자존심 상해."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이마부터 천천히 쓸어내리며 입술을 매만졌다.
둘의 얼굴은 서서히 가까워지고, 두 남녀의 입술이 마주하려는 순간.
서걱-!
남자의 검이 여자의 뒷목을 내려쳤다.
뜨끈한 피가 남자의 가슴으로 타고 흘렀다.
한 순간 고깃덩이로 전락한 여자였으나, 그마저도 매혹적이었다.
허나 남자의 눈은 무심했다.
남자는 검을 놓고 여자의 시체를 내동댕이쳤다.
"씨발."
남자, 진한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더즌 헬에 슬레이어로 끌려온 지 수십 년을 싸워왔다.
방금 그 색정적인 자태의 여인은 쾌락의 군주 사피르나.
그녀가 이끄는 쾌락마들에 의해 슬레이어들은 쾌락에 빠진 채 죽어갔다.
간신히 그녀의 거처인 쾌락궁에 도달했을 때, 남은 이들은 고작 오십여 명.
후퇴는 없었다.
한번 닫힌 게이트는 생존자가 없어지기 전까지 다시 열리지 않으니까.
오십 인의 슬레이어들과 그녀의 경합은 처참했다.
결과는 지금과 같았다.
슬레이어들은 모조리 쾌락에 홀려 죽었고, 자신만이 이 꼴로 살아남았다.
진한은 고개를 돌려 사피르나의 시체를 바라봤다.
"개 같은 년."
역시나 시체는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사피르나에게 한 쪽 팔을 뜯기고, 이어서 다리를 뜯겼다.
그녀는 희망고문을 하듯 몇 번이고 죽어주며 자신을 농락했다.
"이만하면 잘 한 거야, 진한."
진한의 머리맡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진한은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사피르나는 진한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끝을 통해 아찔한 쾌락의 열기가 진한의 몸을 타고 흘렀다.
"하아……. 쾌락에 몸을 맡겨. 우리…… 하자. 너라면 재밌을 거 같아."
사피르나는 진한의 귓가에 숨결을 불어 넣고, 속삭였다.
진한은 전신을 찌르르 울리는 열락의 감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따위 더러운 최후를 맞으려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단 셋이었다.
단 셋이면…….
이 지옥을 끝낼 수 있었다.
피가 흐르고, 일말의 감각이 돌아왔다.
"씨……발년아."
진한은 곧바로 검날을 사피르나에게 휘둘렀다.
세피르나의 얼굴에 흉한 검상이 남았다.
진한은 입가에 고인 피를 세피르나의 면상에 퉤 뱉으며 웃었다.
그 곱상한 얼굴의 살갗이 쩌억 벌려지니, 제법 볼만했다.
"면상 한번 더럽다, 개년아."
마지막은 그래도 좋은 기억 하나 가져갈 수 있었다.
이만하면 썩 좋은 죽음 아닌가.
진한은 검으로 제 목을 그었다.
시뻘건 핏물이 사피르나의 얼굴을 적셨다.
더즌 헬의 칼날 사냥꾼 진한은 웃으며 숨을 거뒀다.
사피르나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진한을 내려 봤다.
인간주제에 꽤나 뛰어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생을 종마로 삼는 은총을 내려주려 했건만…….
이리 죽다니.
사피르나는 성난 눈으로 진한의 육신을 짓밟았다.
"개애새끼-! 감히 내 얼굴에!"
몸뚱아리야 몇 번이고 으스러져도 상관없다지만, 얼굴은 아니었다.
진한은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놨다.
사피르나는 진한의 시체에 침을 뱉으며 시체를 발로 뭉게고 찢어 놨다.
그때 진한의 몸뚱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피르나는 빛을 보며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물러섰다.
그녀에겐 너무도 익숙한 빛이었다.
"카이센……! 이 개 같은!"
그 말을 끝으로, 온 세상이 정지했다.
진한의 시체를 중심으로…….
시간이 역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