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수라기(獸羅記) 57번째 올림 창작야설
11 장 탈(脫)
(1)
"으으.."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신음성, 가늘은 음색을 보아 여인의
것으로 보이는 희미한 소리가 떨리듯 꿈틀거리는 유백색의 웅크린 동체에서 새어나왔다. 진
득하게 느껴지는 고통의 울림이 담겨있는 침음을 흘리는 사람, 유가형은 침상위에서 전신의
진이 다 빠져나간 듯 미미하게 교구를 꿈틀거릴뿐 발가벗은 싱그러운 여체는 흥건히 젖은
몸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물속의 해초가 하늘 거리는 모양으로 침상위에 어지러히 흩어진 검은 머릿결은 반짝이는
윤기가 체액에 젖어 헝클어져 있어 얼마 되지 않은 그 무엇이 무척이나 격렬했음을 단적으
로 보여주고 있었다.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다리를 가슴쪽으로 끌어당겨 웅크린 자세를 취
한 유가형은 아래에서 번져나가는 극심한 통증에 다리를 오무리지 못하고 양쪽의 다리를 채
포개지 않아 소중한 그녀의 비소를 훤히 드러내었다. 일그러진 여체의 아랫도리의 속살이
기묘한 형태로 회음에 취하여 움찔거리고 거대한 사내의 흉기가 드나드는 동안 벌어진 질의
근육은 미처 그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탁한 황백색의
액체가 점점히 흘러내렸다. 사내, 아환이 토해넣은 정액은 유가형의 비처 깊숙한 곳에서 조
금씩 흘러나와서 붉게 충혈된 유가형의 음열을 지나서 짖이겨진 일부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섞여 뽀얀 둔부에 붉고 흰 선을 그리며 침상에 차츰 차츰 고여갔다.
한쪽, 창가에서 양팔의 팔짱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는 엄청난 체구의 아환은 시선을 푸른
하늘로 돌려 허공의 한점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 초점에 아무 것도 없는 걸로 보아 아환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깊은 생각을 하는 중으로 보였다.
미미하게 움직이는 가슴의 근육이 아니라면 고정되어 있는 동상으로 보일만큼 구리빛 근육
으로 뒤덮인 벗은 상반신을 점심 무렵의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탄탄히 자리잡은 복근으
로 내려오면 검은 실타래 같은 머릿결이 보였다. 흰 또다른 여체가 아환이 서있는 그 아래
부근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아환의 하체에 파묻고는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인,
악서령의 고개가 전후진을 반복하면서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굵은 남근이 나타났다 이내
악서령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채 입에 다 들어가기엔 너무나 크고 굵었지만 할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입을 벌려 사내를 머금고 있는 악서령은 정성을 다하여 아환의 아래에서 입과
혀를 놀리고 있었다.
일다경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아환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쪽 손을 턱에
잠시 갖다대고는 골몰히 그 어떤 것을 생각하던 아환은 입을 열었다.
"남궁비와 석영의 호법을 서라."
멈칫, 악서령의 동작이 정지했다. 악서령은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벗어놓은 옷가
지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칠흑의 머리카락이 사르르 악서령의 어깨를 덮어 허리어림까지 내
려온 상태에서 한들거렸다. 한걸음 한걸음 작은 발이 움직이면서 탄력있는 둔부를 씰룩였다.
참을 수 없는 매혹을 자아내는 악서령의 교태에 불끈 욕정이 솟아오르지만 지금은 그럴 시
기가 아니었다. 악서령은 하나 하나 의복을 걸치고는 발소리를 죽여 객실문을 열고 방을 나
섰다.
악서령이 객실을 나간지 거의 한시진이 가까워졌다.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시간이 흘렀
지만 그때가지도 객실안의 정경은 변함이 없었다. 악서령이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꿈틀거
림이 멎고 잠에 빠져든 유가형이나 창가에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아환이나 그 위치, 그
자세를 풀지 않고 시진을 보내었다.
번쩍! 시퍼런 불빛이 옅은 음영이 깔린 객실안에 번뜩였다. 아환은 눈을 뜨고서 발을 침상
쪽으로 향하였다. 아직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 그대로 인지라 가운데 아래에 달려 있
는 덜렁거리는 양물이 아환의 발걸음에 따라 이리 저리 부딪혔다. 침상위에 걸터 앉은 아환
은 손을 뻗어 유가형의 나신으로 가져갔다. 유가형의 매끈한 등쪽에 아환은 장심을 붙이고
는 진기를 운용하였다. 무상심결, 그 어떠한 내가진기와도 조화를 이루는 내공심결로 진기를
일주천한후 서서히 유가형의 경맥으로 진기를 불어넣었다.
"으음.."
나직한 신음과 함께 하얀 육체가 꿈틀였다. 정신을 회복하나 보았다. 아환은 장심을 떼지
않고 계속 진기를 주입시켰다. 창대한 진기의 흐름이 느릿 느릿 유가형의 경락을 흐르며 혼
란상태의 유가형의 육체에 어느 정도 활기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르자
마침내 유가형은 눈을 떴다.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이성의 가닥이 유가형의 뇌리속에 자리잡고 반개한 유가형의
눈에 하얀 침상의 이불보가 눈에 들어왔다.
'..으음..여기가 어디..'"아흑!"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서 조금씩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유가형의 머리를
일시간에 마비시키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엄청난 아픔에 작은 입을 열어 짧은 비명을 토해내
었다. 순식간에 눈에 눈물이 핑돌 정도로 심한 통증이 비처에서 번져나갔다. 산산히 몸의 한
부분이 부서져 나간 것 같은 느낌에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면서 다리를 끌어올렸다. 그러
자 다리가 움직이며 마찰을 일으키고 비열의 부어오른 속살과 파열된 질구 부위의 쓰라림에
유가형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악!"
"일어났군."
무심한 사내의 굵은 저음이 고통에 진저리를 치고 있는 유가형의 귓가로 파고 들었다. 반
사적으로 치켜 올려 고개를 돌리자 맨 처음 유가형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붉은 힘줄이 불룩
불룩 솟아 오른 아환의 양물이었다. 그 와중에도 못볼 것을 본 마냥 질끈 눈을 감아 시선을
외면하였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아환의 음성에 유가형은 가까스로 눈길을 들어올려 그 음
성이 나온 진원을 찾았다.
"뭘 새삼스럽게.."
"이 나쁜..악마 같은.."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앙이 되어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부르르 떨면서 원독이 가득찬 눈을
아환을 향해 돌렸다.
"악마? 후후후.."
"당장 그 웃음을 멈춰요! 어찌 그대가..그대가.."
"내가 어째서? 이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던가?"
"닥쳐욧! 어떻게 그런 말을..내게 이런 짓을.."
"좋은 몸을 가졌더군. 과연 난화성녀야. 큿큿큿"
"그 입 닥치지 못해요!"
"아주 좋았어. 그 야들야들한 몸뚱이하며, 매끈한 살결하며, 조여대는 거시기하며, 어디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걸.."
"이잌!"
휘잇!
짝!
치밀어 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유가형의 손이 하얀 선을 그리면서 아환의 뺨으로 날아가
강렬한 타격음을 내었다. 공력이 들어가 있지는 않아도 노기에 앞뒤 가릴 것 없이 휘두른
것이라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아환의 고개가 조금 옆으로 돌아가고 곧 그 볼위로 붉은 손자
국이 일어났다. 외공 역시 내공 못지 않게 갖추고 있는 아환인지라 탄탄한 살갗을 갖고 있
어 부어오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국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오히려 때린 유가형이 흠칫 하는 모습이었다. 갑작스럽게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뺨을 올려
붙였지만 아환의 목이 돌아가고 손이 가 닿았던 자리에 붉은 기운이 솟자 유가형은 내심 당
황하였다. 그러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전신을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허나 내친 걸음, 여
기서 약세를 보이고 싶지 않은 묘한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 파렴치한 인간! 무림의 협객으로서 부끄..헙!"
계속 공세를 나가려는 유가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직시하는 아환의 눈초리가 자
신의 동공 깊은 곳을 산산히 헤집듯이 파고 들자 헛바람을 들이키며 말을 멈추었다.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냉정한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금전까지 느물거리던 아
환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을 강간할 때의 그 싸늘한 기도가 아환의 몸에서 뭉클 뭉클 솟
아났다. 그러면서 그 싸늘한 기세에 더하여 아환의 주위로 번져나가는 무형의 위엄. 지금 아
환은 황제의를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마음을 정심하게 하고 주변에 복종을 강요하는 가히
절대의 기도가 아환의 전신에서 은연중에 배어나왔다.
체격만 해도 칠척, 앉아 있어도 고개를 들어야 보일 정도로 거대한 체구에 무형의 기도가
뿜어져 나와 채 정돈이 되어 있지 않은 유가형의 심기를 압박하였다. 천적을 만난 미물처럼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에 유가형은 무의식적으로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밧줄이 자
신의 몸을 칭칭 동여맨 것처럼 꼼짝할 수 없는 지경에 접어들은 유가형의 눈빛에 두려움이
묻어났다.
공포! 또 강제로 다리를 벌려야 하는가? 저 아래에 달려 있는 무지막지한 살덩이가 여린
속살을 갈기갈기 짓이기며 나의 영혼을 조각조각 내려는가? 헤어날 수 없는 아득함이 유가
형을 더더욱 압박하였다.
이런 배경에는 유가형의 성장과정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비록 무림의 여인이 세속의 예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은 일반 무림여걸의 일이지 어려서부터 의가의 가문에서 태
어났고 그 의가가 유림의 명가에서 파생된 후예라면 그 입장자체가 틀렸다. 어려서 명가의
후예로서 무(武)보다는 예를 중시하고 그 체질인 내미지상에 걸맞은 순종의 미덕을 강요받
았다. 여인으로서 정조를 가르침받았고 몸을 허락한 상대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라는 어쩌면
고루할 정도의 경직된 가치관을 부여받았다. 유가형은 남궁비, 천하의 절세기재이며 준미한
명문의 후손과 혼담이 이루어지고 그 날을 손꼽아 설레이며 기다렸는데 뜻밖의 일로 순결을
잃고는 그 본질적인 사고 방식 자체가 흔들렸다. 게다가 그토록 기다렸던 정혼자는 남자가
아니고..
유가형의 혼란스러움은 맹목적으로 그 기댈 곳을 찾아들게 하였고 당장 그녀의 지침목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아환 밖에 없었다. 허나, 그 사내는 자신의 의동생과 뜨거운 관계 중이
었고 분노와 당혹이 혼재된 상태에서 더해지는 믿었던 사람의 폭력이 유가형의 이성을 온통
헝클어 버렸다.
"유. 가. 형!"
지금이라도 저 사내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사과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보듬
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이라면 좋겠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저 냉정한 사내는 왜 저리도 견디기 힘든 눈빛을 내게 보내는가?
"유. 가. 형!"
미처 유가형이 아환의 말을 듣지 못하여 반응이 없자 아환은 또다시 유가형의 이름을 또박
또박 한자 한자 내뱉듯이 말했다. 그제서야 번뜩 정신을 차린 유가형의 선연한 붉은 입술이
벌려질 듯 하다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내 것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아. 그 누구라도 나의 것을 빼앗을 수 없어."
"..."
두툼하고 굳은 살이 잔뜩 박혀있는 손이 보드라운 유가형의 목을 감아쥐었다. 그리고 유가
형의 눈앞으로 바짝 다가오는 커다란 사내의 얼굴.
"너! 유가형은 나의 소유야. 넌 내 것이다."
쿵!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돌이 유가형의 마음에 떨어졌다. 유가형의 마음은 그만큼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였다. 아득한 절망이 그녀를 휘감았지만 현재의 그녀는 그 어두움을
헤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이율배반적으로 고개를 쳐드는 묘한 감정..안도감인가? 아니면..
* * * * *
계속 시간이 흘러 미시 무렵, 아환과 제갈수란은 객점을 나섰다. 오시가 조금 넘어 제갈수
란이 객점으로 돌아왔고 아환에게 태산의 동행을 요구하자 아환은 순순히 수긍을 하고는 제
갈수란을 따라 나섰다. 간단한 옷가지와 상점에 들려서 몇가지 생각한 준비물을 산 후 아환
은 곧장 제갈수란에게 길을 떠나자고 하였고 제갈수란은 동의를 하였다.
아무래도 지리를 잘 모르는 지라 제갈수란과 같이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였고 제갈수
란이 과거에 한 자신의 말인 '사화 모두가 당신의 여인이 될 것이라는 말' 기묘하게 돌려
말했기에 자연스럽게 둘은 발걸음을 태산으로 돌렸다.
출발 전, 유가형은 어두운 안색으로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고는 이 곳, 선라현에 있는
성의전의 분타라 할 수 있는 의방으로 가서 요양을 한다 했다. 아직 상세를 완전히 회복하
지 못한 남궁비와 석영이 같이 그 곳으로 가서 치유를 한다고 하였고 악서령은 사화지연에
참가하므로 돌보지 못해 맡긴 홍홍과 청청을 데리고 화산으로 돌아간다면서 성의전의 분타
로 발을 돌렸다.
제갈수란은 그동안 제갈세가와 여러 정파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몇곳에 파발을 띄워 현황
을 간략히 설명을 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런 후 마필을 구매하여 객점에 돌아와서 다시
한번 아환에게 종용을 하였고 마침내 아환과 함께 장보도에 그려져 있는 장소로 길을 떠났
다.
익숙한 솜시로 말을 모는 제갈수란에 비하여 아환은 영 말을 타는 것이 어색하여 안장에
거의 몸을 뉘이고는 진기로 신형을 가볍게 하여 제갈수란의 말에 의하여 끌려가는 형태를
보였다. 그러면서 둘은 계속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서둘러야 겠어요. 흑천의 인물들은 벌써 상부에까지 이를 보고하였을 거예요. 만약 그 보물
이 유명사신의 마공이나 기타 사악한 이물이라면, 그래서 그 마물들이 흑천의 손아귀에 들
어간다면 무림은 피바람에 휩싸일 것이예요. 어서 우리도 행동을 빨리하여 그들을 막아야해
요."
"그렇군. 듣고보니 그들이 그 것을 취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겠군. 빨리 태산으
로 갑시다."
"흑천도 쉽지는 않을 거예요. 유명사신 혁사락의 무예의 원류가 그 서찰에 나와 있는 것처
럼 유령신(幽靈神) 모간이라면 간단히 유물을 취하지는 못할 거예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유령신에 대하여 모르시나요?"
"유령신이 누구요?"
"무림에 대한 지식이 별로 많지 않군요. 유령신은 약 이백년전 그 당시 무림을 진동시킨 절
세의 고수예요. 비록 그 위명은 고금육천에 올라있지 않다 하더라도 상당한 위명을 날린 고
수입니다. 그는 마공외에 또 한방면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게 바로 기관진학이죠."
"그렇다면.."
"맞아요. 유령신이 자신의 동부를 만들면서 쉽게 다른 이들이 침범하는 것을 용이할 리 없
겠죠. 그러자면 기관지학의 대가가 동원되어야 하고 따라서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잖소?"
"저도 나름대로는 준비를 하였어요. 동악인 태산은 산동성, 황보세가가 그 패권을 쥐고 있어
요. 황보세가에 도움을 청하여 흑천의 움직임을 방해하면 되요."
"황보세가? 지금 황보세가라 하였소?"
"예. 무슨 문제가 있나요?"
"황보세가는 믿을 수 있는 곳이오?"
"그건..솔직히 황보세가가 범상치 않은 동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예요. 무언가를 감추
고 있을 지도.."
"혹 황보세가가 흑천에 포섭되어 있을 가능성은 없소?"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요.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 쉽게 마각을 드러내지는 못할 거예
요. 그 문제는 이번의 요청을 황보가가 어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죠."
"흠.."
"해가 지기 전에 빨리 이 산을 넘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노숙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말을 잘 타지 못하여 미안하오."
"할 수 없죠.이랴!"
대화가 끊긴채 한참을 달려 산을 막 넘어서려 할때에는 이미 해가 산을 넘어가 어두운 기
운이 슬금슬금 대지를 잠식하고 있을때였다.
"이런..해가 지는 군."
"조금 속도를 빨리 할께요. 잘 붙어있어요.이럇!"
박차를 가하여 속도를 높여서 달려나갔지만 제갈수란의 마음과는 달리 순식간에 깜깜한 암
흑이 산을 뒤덮었다. 관도를 따라 말을 달렸지만 산길을 어찌할 수 없는 짙은 어둠에 둘은
행마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마음은 급하였지만 별다른 도리 없이 하룻밤을 노숙을 정한
아환과 제갈수란은 서둘러 몸을 뉘일만한 장소를 찾았다. 구름에 가린 달빛이 은은하게 밤
을 비추어 둘의 시야를 가리지는 못하여 곧 그들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내었고 아환은 숲으
로 들어가서 땔감을 구해와서 조그맣게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육포 몇조각과 만두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손을 씻은 후 모닥불에 서로를 마주보면서 둘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탁 탁 타오르는 나뭇가지 건너 불빛에 그윽하게 보이는 천고의 절색인
제갈수란의 청순하면서도 교태로운 용모가 아환에게 은근한 욕정을 불러 일으켰다. 살짝 고
개를 숙이고 시선을 아래로 깔아 모닥불을 쳐다보는 제갈수란의 소녀 같은 귀여운 아름다움
이 마음을 뒤흔드는 것을 느끼고는 아환은 입을 열었다.
"고금육천이 뭐요?"
"아! 고금육천이요? 아까 낮에 제가 그 말을 꺼내었죠? 고금육천이라 함은 원시무림부터 지
금까지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오른 절대라 할 수 있는 여섯의 신인을 말함이예요.
고금육천을 알고 있는 이들도 강호에는 그리 많지 않아요. 좀 이름 있는 문파의 장로급이나
그것을 입에 담지.."
고금육천(古今六天)
원시무림이 시작된 후 현 원의 토곤테무르까지 기천년의 시간 동안 전설로 알려진 수 많은
기인들 중 최강이라 평가 받는 육인의 절대 초인들. 북위 태화 19년(서기 495년)에 설립된
소림에 삼십여년후 선종을 전파하러온 천축의 보리달마의 출현시점으로 전이천과 후삼천으
로 나누어 진다.
전이천(前二天)
무조(武祖)
그 명호대로 무림에 무예를 가장 처음 창시한 초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조가 창조한 무
예들이 수많은 갈래로 뻗어져 이후의 무림을 만들었다 전해졌다. 허나 그 무예가 어떠한 것
인지 그 원류는 누구에게 이어졌는지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천마(天魔) 방각
마예의 원조. 각종 이술의 창시자로서 타고난 천재성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패도적인
무예로 무림을 일통한 첫번째의 인물. 수많은 사마공이 그의 손에서 창출되었고 워낙 호승
심이 강하고 용맹한 기세로 인하여 전신(戰神)이라고도 불리운 지고무상한 초인이다.
- 달마(達魔, 達摩)
보리달마라 불리기도 하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 평함을 받는 선승으로서 소림의 사찰에
선종을 전하면서 천축의 무예를 전하여 현 무림의 무예의 근원을 이루었다 칭하여지는 고
승. 그에 의해 창시된 소림칠십이종절예는 현 무림의 최고 무예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후삼천(後三天)
건곤무적(乾坤無敵)
'하늘과 땅 사이에 적이 없다'라는 광오한 말을 들을 정도로 초강의 무예로 당시 최상이라
는 오대문파의 수장을 차례로 굴복시키며 그 무위를 천하에 떨친 인물. 고금육천 중 그 누
구보다도 무림에 알려져 있지 않아 그 이름 자체가 생소한 이들도 있으나 외가계열의 무예
의 한계를 넘어 또다른 경지를 개척한 초인.
귀곡자(鬼谷子)
단지 이 귀곡자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고매한 학식을 지닌 현자(賢者)들 사이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제갈세가의 후예라 알려져 있다.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늙은 노인의 모습으로
도(道)를 이루어 천기를 읽는다 한다. 무예를 익혔는지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하늘을
뒤덮을 능력을 갖고 있다 한다.
장삼풍(張三豊, 혹은 장삼봉)
일반 서민들이 흔히 잘못 알고 있는 무당의 창시자가 아닌 무당의 도관을 집대성한 인물.
소림의 출신이라는 설과 송나라 조광윤의 진전을 이어받았다는 설이 있는 초고수. 송나라
말기의 인물로 가장 최근의 초인이었다. 현 신주오존인 정허의 사조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는 우화등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아요."
간략하지만 여러 정황을 깃들인 제갈수란의 설명이 끝났다. 자기가 아는 한 최고의 노력을
기울여 아환에게 최대한의 지식을 전달하려 애쓴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멍하니 잦아들어가
는 모닥불빛 건너로 오물거리며 말을 내뱉는 제갈수란을 멍하니 쳐다보던 아환은 제갈수란
의 말이 끝나고 그녀 역시 아환을 빤히 쳐다보자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 정신이 들었는지 헛
기침을 하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험험.."
[ 창작] 수라기(獸羅記) 58번째 올림 창작야설
(2)
은색의 편린들이 수없이 어두운 야산에 내려 앉아 사그러드는 조그마한 모닥불의 기운외엔
여타 광원이 없는 공간에 희미한 반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고즈넉한 정경에 걸맞은 수풀 사
이에서 들려오는 각종 산짐승들과 풀벌레의 울음소리는 한 여름의 산중의 운치를 더하여 주
었고 찌는 듯한 한낮의 더위가 서늘한 산바람에 식어갔다.
"......이예요. 이 정도가 현 무림의 정세지요. 상공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 부분이 많겠지만
요즈음 준동하고 있는 세력들은 아마 그리 잘 모르셨을 거예요."
꽤 긴 시간을 제갈수란은 자신이 아는 바를 상세히 설명을 하였다. 혜지가 번뜩이는 눈으
로 한참을 설명하는 그녀의 말에 의하면 현 강호의 정세는 난마처럼 얽히고 섥힌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형세였다. 얼마 전에 장궁과 강문직 등이 입에 언급한 흑천이라는 세력과 또 그
에 버금가는 세력, 아직 표면화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제갈수란의 말을 들어보면 암암 중에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거대한 힘이 있다고 하였다. 장보도를 사이에 두고 대치를
하였을 때 장궁등과는 달리 제갈수란의 목에 칼을 댄 백리석이 그 힘의 일원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이는 제 추측이지만 그 둘중 한 세력은 원의 황실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져요. 당금 황실의
기운이 급속도로 몰락하고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있지요. 민심은 이미 황제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 이민족이라는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원에는 이 중원을 주도할 만한 정신적인 구
심점이 없어요. 몽고의 철목진이 기병을 앞세워 원을 일으켰다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한 원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힘이 그 보이지 않은 세력이라고 여기어 져
요. 제 생각은 흑천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혹시 그 흑천과 또다른 세력의 수뇌에 대하여는 알고 있소?"
"정확히는 모르지요. 워낙 신비에 가려진 세력들이고 또 매우 은밀한 행동을 취하고 있어
쉽사리 무림 제파의 정보망에 걸려들지 않고 있어요. 단지 그 규모나 그들의 활동영역등으
로 보아 범상치 않은 고인이라고 생각되지요."
"범상치 않은 고인이라 함은..?"
"칠왕이나 오존이 그 세력을 이끌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요."
"칠왕이나 오존이라..흐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무림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되는 거죠."
"그 힘들이 강호를 위협한다는 증거가 있소?"
"아직 그런 징후는 뚜렷이 찾을 수가 없어요. 허나 여태 무림에 은밀하게 행동을 한 여러
문파치고 그 성격이 온전한 곳이 드물었어요. 게다가 장궁이나 백리석의 행동등을 보면 어
딘지 모르게 석연찮은 부분이 많아요."
"천궁등의 세력도 안개속에 가려져 있지 않소?"
"그렇지요. 허나 대다수 무림인들이 천궁에 대한 인식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원로급
의 고인들은 천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어요."
"그건 또 무슨 이유요?"
"공교롭게도 천궁이 등장하는 시점은 무림에 크나큰 평지풍파가 일어난 시기와 일치합니다.
비록 그들의 무공이 정순하고 드러나있는 행보가 정도를 걸었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하
는 의문은 여전히 남거든요."
"천궁의 출신 중 검후 같은 인물은 그렇지 않잖소? 검후는 강호의 분란이 없음에도 무림에
등장하였잖소?"
"확실히 검후의 등장은 무림에 있어서 의외였어요. 그리고 그 어느 천궁의 문인들보다 많은
활동을 보였구요. 그래서 섣불리 천궁에 대한 평을 늦추고 있지요. 더욱이 검후는..아니예
요."
미심쩍게 말을 맺는 모양이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는 것이 역력하였지만 계속 캐묻고 싶지
않아 아환도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아환이 말을 그침에 자연스럽게 제갈수란도 입
을 다물게 되었고 둘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자리를 잡았다. 야밤에 외진 곳에서 들끓는 피
를 가진 두 남녀가 한 곳에 같이 있으면 일어날 법한 애사(愛事)는 분위기가 그렇지 않은지
발생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잦아들어 가는 불씨만 쳐다보고 있었
다.
"상공."
아까와 같이 제갈수란은 아환을 상공이라 호칭하였다. 상공이라 함은 아녀자가 자신의 지
아비나 지아비가 될 정혼의 관계에 있는 사내에게 붙이는 호칭이었다. 제갈수란이 아환을
상공이라 부르는 것은 처음 아환과 대면하였을때에 사화가 모두 아환과 연을 맺을 것이라는
천기를 따라 그리 부르는 가 싶었다. 호칭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아환이기에 제갈수란의
호칭에 특별한 반응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
대답을 하지는 않고 아환은 눈짓으로 제갈수란의 입을 쳐다보고는 묵시적인 응답을 하였
다.
"세 언니를 다 취하셨나요?"
"..."
약간 눈빛이 변하였지만 아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긍정의 표시를 보였다.
"그렇셨군요. 그리 되었으리라 짐작은 하였지만..이제 저만 남았네요."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아환을 쳐다보는 제갈수란이었다. 아직 잔재로 남아있는 불
씨가 비추어져서인지 양쪽 뺨이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아환과 마주치 두 눈빛에는 어느새
일렁이는 열기가 전해져왔다. 아환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노골적인 유혹이었다. 끈적
끈적한 매혹의 그물이 아환을 칭칭 동여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 여인, 제갈수란이
원하는 것은 이 자리에서 나와 정사를 갖는 것인가?
사뿐히 제갈수란의 교영이 상하로 길어졌다. 미소를 짓던 얼굴이 위로 올라갔다. 제갈수란
은 얼굴에 웃음을 거두지 않은채 일어서서 두어발 내딛었다. 그런 후 자리에 살짝 적당히
살집이 오른 엉덩이를 내려 붙였다. 바로 아환의 옆, 손을 뻗으면 쉽게 어깨를 감쌀 수 있는
위치 였다. 칠척에 다다른 아환의 거대한 몸체에 붙은 오척이 조금 넘은 제갈수란의 모습은
대조를 이루었지만 야생의 동물외엔 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야심한 적막이 부드러이
아환과 제갈수란을 감싸 안았다.
아환은 수명의 여인들과 관계를 가졌고 꽤 많은 횟수의 성행위를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처
럼 여인이 나서서 노골적인 추파를 던져오 경험은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현 정파무림에
서 가장 아름답다는 사화 중의 한명인 제갈수란이 아닌가?
아환은 몸의 각도를 조금 틀어 제갈수란을 똑바로 직시하였다. 코앞에 다가와 있는 제갈수
란의 지혜가 담뿍 담겨진 깊은 눈망울이 아환의 약간의 당혹이 담긴 시선을 빨아당겼다. 오
똑 솟은 매끈한 콧날과 그 밑의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겹쳐진 살점의 새빨간 도발이 아환의
욕정을 끌어올렸다. 불끈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감에 아환은 큼지막한 손을 들어 제갈수란의
뒷머리를 가볍게 쥐고는 안으로 당겼다.
"음.."
나직한 숨소리가 마주대어있는 제갈수란의 입을 지나서 아환의 입술로 전달되었다. 달짝지
근한 숨결이 보드라운 여인의 입을 통하여 아환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
았지만 서로간의 설육이 뒹굴면서 양쪽의 입속을 유영하였다. 한쪽의 혀가 다른 쪽을 감았
다 싶으면 어느새 상황은 반전이 되어 휘감기기를 수차례, 지그시 내려 감어진 두 사람의
눈가가 파르르 떨림을 보였다.
"으음.."
가쁜 숨과 함께 약한 신음성이 여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살짝 찌푸린 제갈수란의 고운
아미가 고통인지 그와 다른 어떤 감흥인지 모를 기묘하게 일그러진채 안으로 슬쩍 모였다.
거치른 사내의 한 손이 여인의 가슴부위를 옷위로 움켜쥐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쥐었다 폈
다를 반복함에 따라 그에 맞추어 제갈수란의 신음성과 청순한 얼굴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보였다. 때로는 고통에 못이기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곧 입을 살짝 벌
리고는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귓가에 와닿은 아환의 거친 숨소리가 제갈수란의 욕망을 부
채질하였다.
검붉은 아환의 혀놀림이 제갈수란의 귓바퀴를 어루만지다 싶더니 귀의 골을 따라 서서히
이동을 함에 따라 제갈수란은 몸을 움찔거렸다. 간지러우면서도 그 정체를 알수 없는 기이
한 감각이 스물스물 전신에 번져나갔다. 소름이 돋는 것일까? 온몸의 털이 하나하나 가닥가
닥 곤두서는 느낌은 아환의 혀가 제갈수란의 귓속을 파고 들 때 그 절정에 달하였다. 몸에
힘이 쭈욱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신이 빠르게 내쉬는 숨결조차 인지가 되지 않았다.
늘어뜨린 양손에 축축하게 땀이 고였다. 쉴새 없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혼란스러운 감각은
아환의 다른 한 손이 움직이면서 제갈수란의 옷고름을 풀어 내리는 것을 감지할 여력이 없
었다.
한손으로 제갈수란을 감싸 안은채 입으로는 제갈수란의 얼굴 곳곳을 자극하면서 다른 한
손을 이용하여 아환은 제갈수란의 옷을 벗기었다. 옷고름이 풀어 헤쳐지고 연한 분홍빛을
띄는 내고가 그 수줍은 빛깔을 드러내었다. 불룩 돌출되어 있는 탄력있는 젖가슴이 수려한
장식이 되어 있는 내고를 통하여 그 윤곽을 은근히 보여주었다. 잘 여물어져 있는 스무살의
여체, 그 첨단의 상징인 유방이 한꺼풀 벗겨진 옷가지를 통하여 그 모양새를 나타내었다.
"하아..하아.."
열정어린 입김은 그러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듯 바쁘게 토해내어지고 아환의 손놀림은 더
욱 속도가 붙었다. 쉴새 없이 제갈수란의 목덜미와 귓가, 눈주위를 맴도는 아환의 설육과는
별개로 아환의 손길은 제갈수란의 상의를 완전히 벗기어 내고 아래로 떨어뜨린 다음 내고의
끈을 끌러 여체에게서 작은 조각을 끄집어내었다.
툭..
아환의 손에 잠시 머물던 연분홍의 내고가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날려진 후 그 속에 감추어
졌던 내밀한 속살이 은색의 달빛에 부끄러이 고개를 내밀었다.
유백색의 두 설봉. 마치 눈이 내린 설원에 솟아있는 두 봉우리인 마냥 유백색의 두 융기가
적나라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었다. 조금 작다 싶지만 그러기에 제갈수란과 더 어울리는 소
담스러운 두 유방이 달빛에 환하게 반사되었다. 작은 살덩이이기에 그 위에 매달려 있는 짙
은 자주빛의 유실 둘은 아환이 만났던 그 어느 여인보다 조금 컸지만 연한 색깔의 작은 젖
가슴에 대조를 이루어 강한 매력을 자아내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은 맨살이 외부에 노출된 제갈수란의 여린 피부를 자극하여
미미하게 진동을 만들었고 한 여름이었지만 까닭을 알수 없는 추위에 제갈수란은 슬그머니
손을 올려 훤하게 드러난 두 융기를 감싸안았다.
아환은 제갈수란의 유방에서 손을 떼고는 양팔로 제갈수란을 껴안았다. 커다란 아환의 체
구에 파묻히듯이 제갈수란의 작은 동체가 잠겨들어가고 그 상태로 아환은 몸을 앞으로 기울
여 제갈수란을 덮어갔다.
"으음.."
묵중한 남자의 체중이 제갈수란의 갸녀린 교구에 실어졌다. 등에 작은 자갈과 여러 잡초들
의 배기는 듯한 감촉도 지금 이순간의 제갈수란에게는 감지되지 않았다. 오로지 사내의 땀
내음이 베인 체취와 맞닿은 사내의 무게가 제갈수란의 온 신경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제갈수란의 두 팔이 아환의 목을 감쌌다. 오들오들 떨고 있
는 여체의 진동이 가느다란 팔을 통하여 아환의 목덜미로 전해져 왔다.
아환의 손이 아래로 보내어진다 싶더니 제갈수란의 경장 하의 허리춤에 머물렀다. 손가락
을 몇번 꼬물거렸다 싶은데 이내 세류요를 조이고 있던 팽팽한 요대가 끌러지고 아환의 손
에 걸린 바짓자락은 느릿하게 제갈수란의 발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두 세공한 조각 같
은 뽀얀 피부의 매끄러운 다리가 모습을 보이고 한점 티끌 없이 길게 뻗어 내려간 교태를
자랑하였다. 그 두 다리가 만나고 갈라지는 곳, 작은 천조각하나가 여체의 몸에 유일하게 걸
쳐져 환한 월광에 남김없이 노출되는 여인의 마지막을 가리고 있었다.
보드랍고 탄력있는 제갈수란의 복부가 아환의 손끝에 만져졌다. 거칠한 굳은 살이 자뜩 배
겨있는 아환의 손 마디마디에 곱디 고운 비단결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근육으로 뭉쳐진 자
신의 몸과는 다른 뼈마디가 없고 단련된 근육하나 없어 보이는 솜털같이 포근한 여인의 맨
몸이 전달하는 감각은 맹렬한 아랫도리의 팽창을 일으켰고 아환은 잔뜩 성이나 있는 육봉이
바지를 뚫고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툼한 남자의 손이 조그마한, 최후로 남아 있는 천조가리로 침입을 하였다. 슬쩍 손가락을
밀어 넣어 틈을 만들고는 조금씩 조금씩 손을 집어넣었다. 한치 한치 손가락이 고의 속을
침범함에 따라 접해 있는 여체의 두 팔에 힘이 점점 가해지고 발가벗은 여체는 힘껏 자신의
몸을 아환에게 밀어붙였다. 안타까운 신음성일까? 무엇을 잔뜩 갈구하는 교성이 도톰히 물
기오른 빨간 입술을 벌리고 더운 숨결과 함께 흘러나왔다.
사내의 손이 천천히 진행을 하는 동안 느껴져야 할 것, 까칠 까칠한 감촉을 만나지 못한채
계속 나아가다가 급격히 떨어지는 단애를 만났다. 언제부터인지 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갈라진 틈이 손끝에 감지되었다. 오밀조밀하게 주름잡힌 여린 속살이 느껴졌다.
툭..
굵은 손바닥과 손목을 두께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환의 손을 죄고 있던
압력이 순간 사라졌다. 그러는 가운데 계속 움직이는 아환의 손놀림이 미끄러져 내리는 작
은 천조각이 살짝 벌어진 가랑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체격에 걸맞게 사내의 손은 무척이나
커서 여인의 비처를 다 덮은 상태에서 손가락의 근육을 움직였다.
사내가 옷을 벗기 위하여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키자 그제서야 은빛 월광이 적나라하게 드러
난 여체의 곳곳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러자 완전히 그 모양을 나타내는 여인, 사화 중의 하
나 제갈수란의 비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꿈틀임을 보이며 부끄러운 속살을 남김없
이 노출하였다. 신기하게도 제갈수란의 비처는 맨둥맨둥한 맨살이었다. 전혀 털오라기가 없
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눈에 잘 뜨이지 않을 정도의 솜털만이 보송보송하게 나있어 아예 무
모(無毛)인 어린 여자아이의 그곳을 보듯 갈리진 구릉의 윤곽을 감춤없이 보여주었다.
멈칫..
막 상의를 벗어 뒤로 던지는 동작을 취하던 아환의 행동이 일순간에 정지되었다. 부릅뜨여
진 그의 눈에 반들반들한 여체의 음부가 새겨졌다. 그러면서 그의 이성을 지배하던 욕정이
거짓말처럼 사그러들었다. 아환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다름아닌 그의 모친인 진청청의 비
처, 그것도 여러 사내의 양물이 출입하는 능욕의 현장에서 음수들의 체액으로 흥건히 젖어
있던 진청청의 아랫도리였다.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그 상황, 떠올리기 싫지만 잊어서는 안
될 그 당시의 기억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발가벗은 몸을 아환의 눈앞에 숨김없이 드러
낸 제갈수란과 겹쳐지면서 아환은 하던 동작을 채 잇지 못하고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
었다. 그런 아환의 안면은 씰룩거리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차가운 이성이 되돌아왔다. 거세게 치밀어오르던 욕망의 기운과 진청청의 치욕적인 모습이
되살아나면서 솟구쳐 오르던 분노를 삭이고 아환은 상의를 다시 집어들었다. 순간적인 일이
라 미처 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제갈수란은 아직 얼굴을 가린채 아리따운 나체 상
태로 누워있었다. 크게 숨을 내쉬고 아래에 흩어진 옷가지를 잡아 제갈수란의 나신을 가려
주려던 아환은 문득 기이한 느낌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낯설었다. 이곳이 아환이 와본적이 없던 곳이라 익숙하지 않은 풍경과 지세를 보여줌은 당
연하지만 그와는 성격이 다른 어색함이 감지되었다.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닌 그인지라 외진
지형따위는 그에게 낯설음을 가져다 줄 까닭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환은 지금 무엇인가가
맞지 않음을 알고는 그것이 무엇인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얼마 있지 않아 아환은 그가 알
고 있던 야산과는 다른 그 무엇을 알아챘다.
침묵. 이상하게도 묘한 침묵이 아환과 제갈수란을 휩싸고 있던 것이었다. 얼마전까지 제갈
수란의 몸위에서 가쁘게 숨울 내쉴때까지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냉철한 이성이 돌아오자 그
의 예민한 감각에 어색한 상황이 가져오는 낯설음이 전달되었던 것이었다. 아환이 제갈수란
과 붙어있기 전만해도 그는 풀벌레 소리와 여러 짐승들의 울부짖음을 들었었다. 허나 지금
은 먼곳에서 아스라히 들려오는 짐승들의 소리는 들려오지만 근방에서는 그 어떠한 자연적
인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이는 곧 그 풀벌레나 기타 야생의 동물들이 경계심을 갖는 그
어떠한 것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휘리릿..휘릿..
아환이 막 옷가지를 제갈수란의 몸에 덮어줄 때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달이 있
다고 해도 어두움에 덮혀 있는 곳에서 육안으로 관측하기 어려운 물체가 날아들었다.
"조심하시오!"
아환이 제갈수란을 안고는 바닥을 뒹굴었다. 소리나 경기를 짐작할 때 범상치 않은 암기나
화살 같았다. 그러면서 옷가지로 가렸다고는 하나 아직 옷을 입지 않은 상태라 쪼개놓은 박
같은 탐스러운 여인의 둔부가 작은 흙이 조금 묻은 채 환히 드러났다. 잔뜩 긴장된 상태에
서 다음 동작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옷가지가 자신의 몸을 뒤덮더니 아환이 자신의 몸을 끌
어안고 뒹굴자 영문을 몰라 막 무어라 말을 하려던 제갈수란은 조금전까지 자신이 누워있던
곳에 작렬하는 기성을 듣고는 가볍게 안색이 변했다.
"누구신가요?"
침착한 음성으로 제갈수란이 바닥에 박힌 화살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음을 던
쳤다. 바닥에 박힌 화살을 그 깃만 남긴채 깊숙히 땅에 박혔다. 기물로 쏘아 낸 화살인듯 싶
었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으나 곧 침착을 되찾고는 아환의 몸에 등을 기댄채 옷가지로 맨
몸을 가린채로 제갈수란을 눈을 반짝였다. 숲속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제갈수란은 다
시금 목소리를 높여 질문을 하였다.
"어느 분께서 소녀를 뵙고 싶으신가요?"
눈을 예의 수풀을 주시하면서 재빨리 윗도리를 걸치는 제갈수란은 비록 한꺼풀의 옷가지지
만 몸이 어느 정도 가려졌다 싶은지 살짝 무릎을 굽혀 바닥에 놓여있는 자신의 짐보퉁이를
잡으려 하였다. 그 짐에는 아마 제갈세가의 이름을 천하에 울리게 한 비도가 있으리라.
"핫핫핫! 과연 천하의 가녀답게 미인이시구료. 이렇듯 아리따운 분을 이런 한적한 곳에서 오
붓하게 뵙게 되니 이는 아마 소생이 삼생의 공덕을 쌓은 덕분이 아니겠소. 핫핫하!"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아환과 제갈수란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던 곳에서 몇몇의 인영이
사뿐히 몸을 날려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결같이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는 마찬가지로 검은
색의 복면을 하고 있었다. 오직 얼굴에 밖으로 보이는 것은 두 눈뿐. 하나같이 번쩍이는 안
광을 빛내고 있어 예사 고수들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정확한 인원의 수는 여덟.
"이런 외진 곳에 무슨 일로 이 많은 분들이 모이신거죠? 설마 소녀를 보기 위해 이렇듯 모
이신 것인가요?"
"하하! 어찌 그리 잘 아시오. 우리들은 평소에 무림을 진동하는 미명을 가진 제갈소저를 뵙
고 싶었는데 오늘 이런 기회가 되니 얼마나 좋은 일이오?"
"호오..그러신가요? 그렇다면 소녀도 여러분들의 영준한 풍모를 뵈는 영광을 주시겠어요?"
"물론 그러고 싶지만 우리들이 워낙 추한 모습인지라 이렇게 얼굴을 가릴수 밖에 없음을 양
해해주시오."
"사람의 외모가 어찌 옥석을 구분하는데 잣대가 되겠어요. 소녀는 여러 영웅들께서 그 기개
와 사내다움을 보여주시는 것에 큰 기쁨을 갖겠네요."
"그래도 제갈소저의 영롱한 봉목을 더럽히는 것 같아 소생들은 그 분부를 따르지 못하겠소
이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이제 저를 보았으니 목적은 다 이루신건가요? 그럼 이만 돌아가시겠
어요?"
말을 매끄럽게 이어가면서 제갈수란은 여유있게 말을 받아쳤다. 당연히 그들이 원하는 것
은 그게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잘 알리라.
"흐흐흐. 이렇게 좋은 곳에서 제갈소저를 뵈었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겠소. 지금부터 대화
를 시작해서 서로간에 우의를 다지고.."
"어이! 못난이들!"
능글 능글하면서 농을 지껄이는 사내들의 수작이 계속되려는 찰나 그 말을 중간에 아환이
끊었다.
"그냥 애초에 하려던 대로 하지. 괜히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시간을 보낼필요 있나? 악당은
악당다워야지. 자! 검이든지 칼이든지 뽑으라고. 그게 목적아냐? 못난이들!"
귀찮다는 듯 아환이 고개를 흔들면서 주절이자 여러 사내들의 눈에 금새 살광이 번뜩였다.
애초 그들의 목적은 여기 이 둘을 죽이는 것이리라. 그래서 화살을 쏘아 보내고 곧이어 등
장하면서도 조금의 여유를 잃지 않은 것이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여
겨졌다. 사내들의 손에는 작은 단궁이 들려져 있었다. 은은한 붉은 기운을 띄고 있는 것이
보물로 보였다.
복면의 사내들은 단궁을 품에 갈무리하면서 허리춤에서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크흣흣. 명을 재촉하는 구나. 주환!"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그야 다 아는 수가 있다."
"장궁이 말해주던가?"
"알 필요 없다."
"그렇다면..."
아환이 말을 막 내뱉으려다 중도에 끊자 복면사내들의 눈가에 의아함과 호기심이 일어났
다. 이 주환이라는 자가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는 것일까?
"그렇다면 뭐냐?"
"이 것!"
아환이 발밑에 놓여있는 자신의 패도의 손잡이 부분을 강하게 걷어찼다. 칼이 놓여진 일직
선상에 복면의 사내들이 있어 아환은 도를 걷어차면서 바로 그 뒤를 질주해 들어갔다.
"허엇!"
아환의 다음 말을 기다리다 갑자기 시커멓고 커다란 물체가 쏜살같이 날아오자 헛바람을
들이키고는 미처 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맨앞의 사내가 검을 가로로 휘둘러 도를 쳐내려
하였다. 채 방비가 된 상태가 아니었지만 정련된 동작을 보이는 것이 꽤 수련을 쌓은 무사
인듯 보였다.
깡..
"우웃.."
칼을 쳐내었지만 그 칼의 무게와 그 기세에 맨앞의 복면인이 신음을 떨치면서 몇걸음 뒤로
물러섰다. 보검으로 보이는 복면의 장검은 아환의 칼을 쳐내면서 별 훼손이 없었다.
빙글 빙글 회전을 하면서 튕겨나오는 거도가 아환의 손에 잡힌다 싶더니 아환의 손이 크게
가로로 휘둘러졌다. 이번에는 단지 무게나 경력뿐 아닌 내기를 주입시킨지라 도기를 일으키
면서 거도가 가로로 휘둘러졌다.
'건곤의 붕(崩)'
다행히 지금의 대치 상태는 아환이 포위가 된 형태가 아닌 아환과 여덟의 복면이 마주보는
상태라 아환은 팔성의 공력을 기울여 첫 초식부터 강공으로 나섰다. 아환의 도에 실린 거대
한 압력이 물밀듯이 복면의 사내들에게 밀려들어갔다.
여덟의 사내들은 처음에 선두의 사내가 아환의 도를 튕기면서 밀려났지만 곧 자세를 바로
잡고 공세를 취하려 하였었는데 아환의 선공이 이어지자 신중하게 공력을 일으켜서 짓쳐들
어오는 기세를 마주쳤다.
여덟의 사내가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똑 같은 초식. 검끝에서 은색의 실같이 가느다란 검
기가 이어진다 싶더니 층층히 겹을 이루어 하나의 벽을 이루어내었다. 비록 사화지연에서
남궁비가 보인 검막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둥그런 여덟의 검기로 이루어진 테두리는 하나
로 융합되는 듯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하나로 겹쳐져서 달빛에 반사되는 은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망사를 씌어 놓은 모양이 되었다.
카카카캉!
"우욱.."
"커억.."
"으음.."
[ 창작] 수라기(獸羅記) 59번째 올림 창작야설
(3)
"으음.."
나직한 신음을 발하며 수겹의 검막을 뚫지 못하고 아환은 뒤로 튕겨져 나갔다. 아환의 현
내공은 화경의 내공을 상회하는 수준, 그 팔성의 공력으로 도기를 전개하였고 운용방식 역
시 고절한 절예라 할 수 있는 건곤형의 응용된 일식이었다. 밀물처럼 쇄도해 들어가던 아환
의 칼에서 뿜어져 나간 도기(刀氣)는 팔괘의 방위를 철벽같이 방어하는 여덟 복면 사내의
검기의 막을 찢는 데는 성공하였고 여덟 사내 중 무공이 약한 두셋에게는 약간의 충격을 가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말하면 선공을 취하였음에도 그다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게
다가 사내들 역시 어느 정도 대비를 하였다 하더라도 전력을 다해 펼쳐진 것이 아닌지라 아
환의 의도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아환의 선제 공세가 전혀 효과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여덟의 복면을 한 사내
중 가운데의 우두머리격인 사내 좌측에 있던 복면인이 스르르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
환의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면 그냥 자리에 주저 앉는 것처럼 바닥에 신형을 가라앉힌 사
내는 이내 뒤로 벌렁 자빠져 쓰러졌다. 그러한 사내의 이마에 보랏빛을 선연히 빛내고 있는
손가락만한 작은 돌기하나가 보였다. 처음부터 있던 것처럼 사내의 이마부위에 튀어나온 금
속 물체, 다름아닌 제갈세가의 무영비도였다.
"칠제!"
"헛! 이게 무슨..무영비도!"
"일도탈명(一刀奪命) 파천황(破天荒)!"
갑자기 동료 중의 한명이 쓰러지자 다급한 음성으로 바닥에 누운 이를 불렀으나 어이가 없
다는 듯이 눈을 크게 부릅뜨고는 누워 허공을 쳐다 보는 그에게는 이미 생기가 없었다. 비
도가 이마를 뚫고 들어가서는 그 경력으로 인하여 뇌를 산산히 파괴한 모양이었다. 즉사였
다. 아환이 공격을 하면서 절정의 도기를 떨쳐내었고 그 태산 같은 압력이 담겨있는 건곤형
의 붕(崩)은 비록 완전히 그 검막을 무너뜨리지는 못하였으나 그 면밀한 방어태세에 상당한
균열을 발생시켰고 아환의 뒤에서 틈을 보던 제갈수란은 충돌시에 비도를 날렸다. 아환의
강력한 도기는 비도가 날아가는 기세를 숨겨주었고 아환이 물러서면서 뒤로 신형을 뒤집어
허공으로 솟구칠때에 들이닥친 비도는 개중 상대적으로 무예가 낮아 보이는 복면 사내 중의
한명을 노렸다.
"그 위명이 하늘을 찌를 듯한 하남성의 팔협을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한동안
활동이 뜸하시다 싶더니 흑천에 자리를 잡으셨네요. 이런 야산에까지 소녀를 보러 오신 분
이 하남팔협이시라니..아! 이제 칠협이 되신 것인가요?"
아환이 자세를 고쳐잡고 도를 치켜올려 대비를 하는 그 자리의 옆에 혜광을 빛내면서 내뻗
은 손을 거두어 들이는 아름다운 여인, 제갈수란이 있었다. 곧게 뻗은 두 옥기둥을 땅에 받
치고 꼿꼿히 서서 깊은 지혜가 일렁이는 눈으로 팔협이라 불리우는 사내들을 찬찬히 살피는
제갈수란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팔협이라 불리우는 사내들에게 말을 건네었다. 허나 말이 부
드러울뿐이지 그 속에 담긴 내용은 팔협을 격분시켰다.
"이 처죽일 계집!"
"감히 칠제를 해하다니..내 이 년을 당장.."
"곱게 대할려고 했더니 끝내 벌을 청하는군. 제갈수란! 결코 오늘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이
다."
여유가 있어 보이던 사내들의 눈빛이 금새 시퍼런 살광을 줄기 줄기 내뿜는 야차의 눈으로
변하였다. 처음에 위에서 명령을 하달받고 제갈수란과 주환이라는 사내를 처치하려 올때까
지만 해도 이번 임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비록 칠룡
에는 끼지 못하였지만 나름대로는 칠룡과 차이없는 무공을 지녔다 자부하는 하남팔협이 아
닌가. 하남성에 둥지를 틀고 있는 오악검파 중 하나인 숭산검파의 직전제자로서 차후 숭산
검파가 무림을 영도하는 위치에 올라서기 위한 그 초석으로서 칭송을 받던 팔협이었다. 한
때 오악검파 중 최고의 위치에 올라서서 화산파를 능가하는 위세를 보이던 숭산검파였다.
지금은 그 세력이 많이 쇠락하여 화산에 그 자리를 내어준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오파일방을
능가하는 문파로 설 기대를 가진 문파인 숭산검파의 최고 후지기수들이었다. 게다가 비밀리
에 모종의 인물로부터 기예를 전수받아 한층 그 무위가 높아져 자신만만하던 하남의 여덟
무사는 자신들이 합력을 해서 펼친 무공이 아환의 공세에 타격을 입자 일순 심기가 흔들렸
다. 그것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선두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형제들!"
짧은 부름과 함께 사내가 눈짓을 동료들에게 보내었다. 그러자 다른 복면인들은 그 눈빛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선두의 사내가 검을 아환에게 향한채
출수를 준비하고 다른 사내들은 좌우로 갈라져 아환과 제갈수란을 포위하려 하였다.
"상공! 조심하세요. 숭산검파의 팔괘검진이예요."
팔괘란 중국 상고시대 복희씨가 만들었다는 천지간의 변화상을 담고 있는 건, 태, 이, 진
손, 감, 간, 곤의 여덟 괘(卦)를 뜻함이다. 제갈수란은 숭산검파에 전수되어 내려오는 비전
절예 중 하나를 떠올리고 얼른 아환에게 주의를 주었다.
팟!
제갈수란의 전음이 아환에게 들어오기전 이미 아환이 땅을 박차고 한쪽으로 신형을 돌진했
다. 진세라는 것을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아환이지만 무공을 수련하면서 무이관주 상명
선이나 검후 조설하로부터 수차례 조심할 것을 당부받은 것 중 하나가 무인들이 이루는 진
(陣)이었다. 소림의 백팔나한대진이나 십팔나한진, 무당의 오행검진과 오오대오행진등은 차
치하고 각종 일반화되어있는 차륜진들도 그리 쉽게 상대할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숭산검파
의 비전이라 여기어지는 진세야 더 말할 나위없었다.
팔괘는 검후에게서 그 방위를 들은 것이 전부인 미천한 지식을 갖고 있는 아환이지만 그
방위위치를 향해 신형을 날리는 팔협을 보고 순간적으로 취약한 곳을 찾았다. 다름아닌 간
의 방위, 조금전에 죽은 칠제라는 인물이 담당하는 위치가 빌 것은 자명했다. 다른 이들이
그 허점을 메운다 해도 다른 곳보다는 용이하리라.
'건곤형의 쾌(快)'
아환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는 상대의 목부위 어림을 향해 거의 오척에 이르는 도신
을 가로로 뉘이고 빠르게 그었다.
츠츠츠..
칼에서 무형의 도기가 대기를 가르면서 손과 감의 방위를 선점하려 달리는 이들에게 쇄도
해 들어갔다. 아직 진을 이루지 못한 두 사내의 복면속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순식간에
자신들에게 짓쳐들어오는 쾌속한 기세가 엄청난 힘을 담고 있음을 짐작하고는 이를 악물고
진기를 끌어올려 검을 휘둘렀다. 아환의 쾌도를 신형을 움직여 피하는 것은 달려나가는 여
력이 강해 그리 할수 없었다.
다른 방향으로 전진하던 세 사내가 아환이 반대쪽의 동료를 덮쳐나가자 마음이 급해졌다.
선두의 사내 역시 아환의 빠른 공격에 당혹스러워하며 손과 감의 방위를 맡은 아우들을 지
원하려 나섰다. 그리 많은 격전을 겪지는 않았지만 이번처럼 진세를 펼치기 전 공격을 받는
일이 극히 드물었기에 나머지 네 다섯 사내는 진세를 꾸리는 것을 일단 포기하고 아환의 뒤
를 노렸다.
허나, 거기에는 아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칠룡과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라 평가받는 사화
중의 하나 제갈수란이 있었고 제갈수란은 빠르게 다섯번의 손을 떨쳐 비도를 쳐내었다.
캉. 캉. 캉. 캉. 캉..
차창..창..
"우욱.."
"커억.."
각기 다른 금속성이 터져나왔다. 제갈수란의 비도는 이번에는 일수탈명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였느나 다섯 사내의 돌진을 어느 정도나마 막기에는 충분하였다. 제갈세가의 무영비도
는 암기술에 가까운 절예인지라 은밀함과 정제됨이 필수지만 지금 상황이 그리하지 못하였
기에 급박히 쳐낸 다섯비도는 다섯명의 검에 튕겨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제갈수란이 다섯 사내의 행보를 막는 동안 아환의 검은 애초에 목표한 두 사내와 충돌하였
다. 그 이후 터져나온 두 신음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의 손에 쥐인 꽤 정련되어 있는 보검
이라 할 수 있는 청강검이었으나 무게의 차이가 상당하였고 아환의 묵현금으로 만들어진 견
고한 거도에 실린 경력과 속도는 검 하나를 잘라내고 그 검주에게 깊은 내상을 입혀 뒤로
물러서게 하였고 계속된 도기의 여파는 다른 한명의 검과 부딪히고는 그 여세로 팔을 잘라
버렸다.
"끄아아.."
"오제!"
"오형!"
"이런 쳐 죽일 놈이.."
"이 개 같은 년!"
팔꿈치 위로 잘려진 상처를 부여 잡고 비명을 지르는 오제라 불리운 사내가 입에 피거품을
물면서 신형을 휘청였다. 아환의 쾌도에 검이 부러진 사내는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선 후 풀
썩 자리에 주저 앉았다. 선홍빛의 핏덩이가 울컥 울컥 입에서 토해졌다. 상당한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환은 칼을 거두면서 크게 한발을 내딛고 신형을 빙글 돌리면서 팔을
잃은 오제란 사내를 항야 뒤차기로 발을 힘차게 내뻗었다.
'풍도건곤(風跳乾坤)'
무이관의 풍도십팔식중 풍영각이 아환의 건곤형과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초식으로 거듭났
다. 수많은 발의 그림자가 오제를 뒤덮는다 싶더니 연이은 격타음이 들렸다.
퍼퍼퍼퍼퍽..
사내의 머리가 터져나가 허공에 허연 뇌수와 핏줄기가 비산하였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
께 늑골이 부서지고 쇄골이 함몰되어 들어갔다. 아환의 족영은 연달아 다섯 번의 가격을 사
내의 상반신에 집중시켰다. 처음에 내려찍은 파각은 사내의 두개골을 부수었고 정수리가 박
살나면서 오제라 불리운 사내는 두 눈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칠공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 상
태에서 즉사를 하였다. 그 이후에 네번의 발차기는 확인사살이었다.
처참하게 부서져 나가는 다섯번째의 형제를 보는 나머지 사내들의 눈이 뒤집혔다. 극도의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그들의 분노의 불길에 제갈수란이 기름을 붓는다. 제갈수란은
다섯 사내에게 전력을 다해 비도를 쳐내어 뒤로 물러서게 한다음 다시한번 내상을 입어 주
저 앉은 사내에게 비도를 쳐내었고 예와 마찬가지로 비도는 바닥에 주저 앉은 사내의 이마
를 꿰뚫어 또 하나의 목숨을 거두었다.
미처 화가 폭발하기도 전에 또 하나의 형제가 유명을 달리하자 나머지 다섯 사내는 이성을
잃었다. 시뻘건 안색으로 일제히 검을 쳐들어 아환과 제갈수란에게 짓쳐들어오는 팔협의 나
머지 사내들. 그렇지만 생사가 걸려있는 싸움에서 흥분은 금물이었다. 들끓어 오르는 노기가
그들의 냉철한 이성을 스러지게 하고 앞뒤 가를 것 없이 달려오는 사내들의 기세는 거세고
강렬해 보였지만 전과 같은 치밀한 협공이 아니었다.
아환이 제갈수란의 앞으로 나섰다. 아환의 주위로 근접한 다섯 장검의 흉험한 검기를 향해
그의 칼이 둥그렇게 원을 수차례 그리며 마주쳤다.
'건곤의 화(化)'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이라 하였던가? 유유한 원을 그리는 아환의 도세에 다섯 검이 휘감
기고 거세게 밀려오는 경기가 아환의 도에 이끌려 방향을 이리 저리 바꾸었다. 그러면서 아
환은 강약을 조절하여 네 장검의 방향을 하나로 돌려 버렸다.
카캉..캉..
"끄으.."
"삼제!"
"형님!"
"이..이럴수가.."
아환의 이화접목의 수법으로 그 예봉이 뒤틀린 네 사내의 검은 삼제라 불리운 한 사내에게
집중이 되었고 삼제 자신의 칼은 어이없게도 허공으로 쳐 올라간 상태라 방비를 할수 없었
다. 그 결과 네 사내의 칼을 꼬치를 꿰듯 양쪽 옆구리와 목, 그리고 그 중 가장 공력이 높은
선두의 사내만이 간신히 갈무리를 한 장검만이 비스듬히 삼제란 사내의 귀밑으로 들어가 상
해를 입히지 않았을뿐 나머지 세 사내의 검은 사정없이 삼제의 몸을 파고 들었다.
"끄르르.."
피가래가 끓는 듯한 괴기한 소리가 삼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얗게 까뒤집어진 눈과 줄
기 줄기 배어나오는 핏줄기와 함께 격렬히 몸을 떨던 삼제란 사내가 곧 축 늘어졌다. 또 하
나가 죽은 것이었다.
"이..이..."
"같이 죽자! 이 마귀야!"
"이제, 사제, 육제! 멈춰!"
대형으로 보이는 사내의 만류에도 눈이 뒤집혀진 세 사내는 극렬한 분노에 사로 잡혀 아환
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심정은 동료들의 죽음에 덧붙여 자신들의 손에 형제가 목숨을 잃
었다는 자책감이 짓누르면서 더 이상의 냉정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결과는 당
연지사.
나란히 달려들던 세 사내가 아환의 쾌도에 동시에 세개의 목을 허공에 띄워 올리자 뒤따라
쫓아 들어온 우두머리의 사내가 망연자실하여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툭..툭..툭
풀썩..풀썩..
모든 자연의 물체가 그렇듯 허공에 더있는 물체는 땅에 떨어지는 법, 원독과 분기에 가득
한 튀어 나올 것 같은 두 눈을 각기 달고 있는 세 수급은 이내 바닥에서 떨어지면서 굴러
다니고 목을 잃은 시신들은 쇄도하던 그 여력으로 얼마간을 더 달려 나가더니 하나 둘 쓰러
졌다.
이제 장내에 서 있는 사람은 아환과 제갈수란 외에 오직 하나, 팔협의 대형이라는 복면 사
내였다. 검을 늘어뜨리고 멍하니 바닥에서 움직임을 멈춘 세 머리통을 응시하였다. 밤의 하
늘에서 내려 앉는 은빛 편린들은 이제 더 이상 밤의 낭만이나 흥취 같은 것을 보이지 않았
다. 거무스름한 빛깔로 보이는 피웅덩이가 곳곳에 흩어져 있고 바닥을 나뒹구는 동그란 물
체에 목이 없는 사람의 모습, 그리고 이마에 보라빛 돌기를 내비치고 쓰러진 인간들이 처참
한 상태는 이 곳이 유부 지옥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잔혹하였다.
덜덜덜..
대형의 온몸이 바람에 잔가지 떨 듯 무섭게 흔들렸다. 공포심? 분노? 황당함? 여러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전신에 팽배히 번져나가고 물결이 번지듯 차츰 그 진동의 폭이 커지는 가
싶더니 뚝. 사내의 떨림이 순간 멈추었다. 복면으로 뒤덮은 얼굴인지라 눈밖에 보이지 않은
모습이지만 사내의 눈가에 습기가 점점 번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우는 것일까?
"형제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 못난 우형을 잘 따라 주었네. 이인자의 문파에서 성
장하여 어떻게든 일인자로 올라서려 그토록 노력하였는데 이제 이 야산에서 우리 형제들 모
두가 뼈를 묻게 되는군. 인과응보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누구나 가진 욕망을 실
현하려 우린 찾아온 그 기회를 최대한 잡으려 했었지. 아우들, 내 그대들을 편히 대지로 돌
려 보내지 못함을 이해하게. 그리고 우리 잠시 후에 보세나."
나직한 음성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대형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까운 형제나 친구들에게
말을 건네듯이 사내는 평온한 기색으로 혼백이 떠난 아우들의 주검을 일일히 쳐다보고는 옅
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사내의 고개가 방향을 틀었다. 어느새 입가의 웃음은 사라지고 무
심한 시선이 이동을 하면서 아환에게, 제갈수란에게 돌려졌다. 아무 말 없이 사내가 하는 모
양을 지켜보던 제갈수란이 입을 연다.
"그만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동료의 시신도 수습을 하고..상부에도 보고를 해야하지 않을까
요?"
"제갈수란!"
"말씀하시죠."
"신경쓸일이 아니다."
"..."
"어차피 여기서 뼈를 묻기로 작정한 이상, 내 그냥 가지는 않으리라."
별 감정이 깃들지 않은 음색이 아환과 제갈수란의 귓가를 파고들고 뒤를 이어 대형이라는
사내의 눈빛이 점점 붉어졌다. 급기야는 핏빛으로 흰자위가 완전히 변하는 순간, 아환과 제
갈수란은 동시에 본능적인 위기감이 전신을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
사내는 엄청난 속도로 아환에게 쳐들어 왔다. 몇번 발을 땅에 디딘 것 같지도 않았는데 벌
써 사내의 신형은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그러면서 사내의 검은 일직선으로 아환을 찔러
왔다. 아환은 뒤로 몸을 빼 내면서 거도를 아래에서 위로 사선으로 쳐올렸다. 검은 칼이 대
기를 쪼개면서 일어난 도의 기세가 복면사내를 향해 마주쳐갔다. 공세로 방어를 취하는 아
환의 거도에 사내가 검을 회수하면서 휘두른 수 검이 작렬을 하였다.
캉. 캉. 캉. 캉.
"음.."
아환이 뒤로 주춤 주춤 물러섰다. 사내가 휘두른 경력을 이기지 못하여 아환은 물러서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이들 하남팔협과 부딪혔을 때 경험하였던 위력이 아니었다. 그보다 수
배의 위력이 강한 검력이 아환의 내부를 진탕시켰다. 부딪히기 전에는 아환이 충분한 내기
를 주입하지 않았어도 조금전의 싸움에서처럼 능히 복면사내를 물리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연달아 검을 쳐내는 사내의 공격이 완전히 아환의 예상을 뒤엎었다.
아환은 뒤로 신형을 빼내면서 도를 세워 안면부위와 상반신을 보호하면서 이후 계속될 공
세에 대비를 하려 하였다. 허나 뜻밖에 복면 대형의 행동은 아환의 예상을 벗어났다. 아환의
도에 자신의 검을 수차례 부딪혀 아환을 물러서게 한후 그 반동으로 복면사내는 제갈수란을
덮쳐들어가는 것이었다. 아환가 충돌하면서 가속이 붙어 순식간에 제갈수란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복면사내의 장검이 제갈수란의 목을 꿰뚫으려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갸날픈 작은 손에 들려 있는 무영비도를 미처 던지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제갈수란의
목을 급기야 복면사내의 검이 꿰뚫었다. 아니, 관통한 것처럼 보였다. 복면 사내의 장검은
제갈수란의 목을 통과하는 듯 싶더니 몸 전체가 스치듯 제갈수란의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러면서 복면 사내의 신형은 제갈수란이 서있던 바로 뒤에 내려 앉았고 금새라도 피가 솟구
칠 것 같은 제갈수란의 교영이 흐릿해지더니 종적을 감추었다.
'잔영(殘影)! 기환(奇幻)?'
퍽!
바닥에 주저 앉은 것처럼 보이던 사내의 몸이 순간 폭발을 하였다. 그러면서 사방 수장을
섬전같이 비산하는 피와 조각난 살점과 뼈조각이 뒤덮었다. 밤하늘이 온통 핏빛으로 변하였
다.
"폭신마공! 아앗! 악!"
다급한 교성과 함께 뾰족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비명은 바로 복면 사내의 좌측 어림에서
나왔고 그 쪽에서 흰 인형하나가 뒤로 튕겨나갔다. 애초에 이 복면인은 아환을 노린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제갈수란을 노린 것이었다. 아환에게 선공을 취하여 아환을 물러서게 한후
아환이 제갈수란의 공격하는 자신을 막지 못하도록 대비를 하는 일종의 계책이었고 그의 계
획은 성공하여 폭신마공으로 펼친 동귀어진의 공세는 제갈수란의 몸에 작렬하여 군데 군데
에 붉은 핏자국이 상의만 걸친 제갈수란의 전신에 피어올랐다. 퉁겨나간 제갈수란은 옷자락
이 하늘거리고 가랑이 끝을 간신히 가리고 있는 상의가 치켜 올라가 슬쩍 아무 수풀도 보이
지 않은 갈라진 틈을 언뜻 내비쳤다.
"으으.."
물러서던 제갈수란이 푹 주저 앉았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 심상치 않은 내상을 입은 것처
럼 보였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60번째 올림 창작야설
(4)
"으음.."
지긋이 눈을 감은채 바닥에 주저 앉은 제갈수란은 나직한 신음을 토해내었다. 눈가에 주름
살이 포개지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힘겹게 진기를 끌어올려 체내에 침투한 독기를 막아내고 있었다. 유일한 옷가
지인 상의가 펄럭거리며 들어 올려지고 살짝 벌어진 다리사이로 매끈한 비소가 엿보였다.
내밀한 연붉은 속살이 삐죽이며 고개를 내밀었다. 언뜻 보면 꽤 욕정을 불러 일으킬만한 자
세이기도 하였지만 제갈수란의 현 상태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주르르..
얇은 입술 사이로 한줄기 선혈이 줄지어 내렸다. 힘겹게 제갈수란이 몸을 움직여 가부좌를
틀었다. 여린 여체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무척 힘이 드는듯 고운 안색이 찌푸려지고 미약한
고통의 침음이 내뱉어졌다. 조금씩 조금씩 다리를 움직이고 상체를 세워 결국은 제갈수란은
결가부좌를 취할 수 있었다. 옥주가 크게 열려 그 사이의 음부가 아환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제갈수란이었다. 오밀조밀한 아래의 비열이 기묘한
형태를 취하며 환한 달빛에 뚜렷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렇게 제갈수란이 내공을 일으켜서 운기요상을 하려는 동안 아환은 멍하니 서서 제갈수란
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제갈수란의 특정부위를 뚫어지게 노려보듯 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아주 미세한 솜털외에 아무런 터럭도 보이지 않는 제갈수란의 비부
는 아환에게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가져다 주었다. 또렷이 되살아나는 과거의 기
억, 거친 음마들의 흉기가 출입하던 진청청의 비처와 처절하게 울부짖는 진청청의 비명등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 당시도 그랬다. 이렇게 달빛이 환하였다. 이런 자그마한 야산이었다. 바
닥에 깔려 있는 하남팔검의 시체와 피웅덩이, 그리고 뒹굴고 있는 잘려진 팔, 수급등이 처참
한 광경이 더하여져서 아환의 이성을 어지럽혔다.
그래서였을까? 아환의 기억속에 뚜렷이 새겨진 과거의 장면은 되풀이되어 살아나서 아환의
정서를 끊임없이 자극하였다. 그가 상운진을, 그리고 검후 조설하를 대할 때 애정이 없는 정
사를 하고 그녀들을 취한 것이 과거에 대한 보상일지도 몰랐다. 또한 그녀들의 체모를 다
없애버린 것도 무의식적으로 의지할 대상을 만들려 하였는지도 몰랐다. 그가 기억하는 유년
기의 여자는 오직 하나, 모친 진청청이었다. 자신을 낳아준 생모로서의 의미와 사내들에게
윤간을 당하는 여인으로서의 의미가 혼재된 존재였다. 아환은 여인들의 음모를 없앰으로서
일그러진 향수를 채우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욕망이 비참한 옛 기억에 현실을
대비시켰다. 그러나 그것과는 달리 외진 산속에서 또다른 무모의 여체를 접하는 것이 급격
히 그에게 십여년전의 분노를 일으켰다.
질끈.
아랫입술이 아환의 위아래 이빨에 깨물려져 일그러졌다. 칼을 잡은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
어가 도의 손잡이 부근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나왔다. 저 아래 깊은 곳에서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치열한 살기가 피어 올랐다. 어느새 눈자위는 핏발이 올라 붉게 물들었고 입가가 씰
룩였다. 급기야 잘근 물고 있던 아랫입술이 터져 붉은 액체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미지근하
면서도 비릿한 혈향이 아환의 입안에 맴돌고 그제서야 아환은 퍼뜩 이성의 끈을 다시금 되
잡을 수 있었다.
주섬 주섬 바닥에 떨어진 짐보따리에서 아환은 작은 옥병을 꺼내어 들고 마개를 열러 조그
마한 환약하나를 꺼내었다. 청아한 향기가 감돌았다. 과거 악서령을 취할 때 덤으로 얻은 화
산의 요상환약이었다. 악서령의 말로는 내상치유에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아환은 조심스레
제갈수란의 입에 환약을 가져가 복용을 시킨다음 제갈수란의 뒤로 돌아가서 아환은 자세를
잡고 손바닥을 제갈수란의 등에 갖다대었다. 서서히 아환은 무상심결을 끌어 올려 맞닿은
손과 경맥을 통하여 진기를 주입시켰다. 거대한 진기의 흐름이 유유히 제갈수란의 체내로
흘러들어갔다.
"왝!"
제갈수란이 시커먼 핏덩이를 토해내었다. 대략 두시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제갈수란
의 안색은 조금 혈색을 되찾았다. 체내에 투입된 폭신마공의 독기와 내상으로 인한 울혈의
상당 부분이 제거되었다. 거의 반시진 가량 제갈수란에게 진기를 주입하던 아환은 근처에
있는 작은 바위위에 주저 앉아 눈을 감은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때로는 눈가
가 꿈틀거리고 입매가 일그러지기도 하였다가 곧바로 무감정한 표정으로 되돌아 왔다. 움켜
쥔 커다란 주먹과 전박에 근육이 솟아 올랐다. 그러기를 얼마간 계속하다가 아환은 크게 숨
을 내쉬고 고개를 좌우로 절레 절레 흔들었다.
'이제 실행할때가 되었군. 예상이 맞는다면..'
뜻모를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환은 서서히 진기를 운용하여 재차 온몸의 감각을 일깨
웠다. 번뜩이는 신광이 어린 눈으로 아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감지되
었다. 그 무언가가 주변을 천천히 조여오는 기분이 들었다. 거무스름한 음영이 무성하게 우
거진 수풀속에서 미미하게 흔들거리는 것이 얼핏 보였다.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
다. 바람한점 없는 지금 괜히 나뭇가지가 출렁일리 없었다. 그 어떤 생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리라. 그것이 야생의 짐승일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사람일 것이다. 그것도 싸늘하게
냉각된 공기를 통해 전해져 오는 살기로 보아 결코 아환과 제갈수란에게 친근한 의도를 가
진 사람이 아닌 적일 것이다.
"후우"
마침 그때 크게 숨을 내쉬면서 제갈수란이 깨어났다. 반짝! 샛별 같은 광채가 일순 제갈수
란의 봉목에서 번뜩였다. 숨소리에 아환은 눈을 돌려 어느 정도 발그스레한 안색이 되돌아
온 제갈수란을 보았다. 당연히 내상이 완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간의 요양을 해야 아
마도 본신무공을 되찾을 것이다. 무림의 금기시되는 마공절예라 여기어지는 폭신마공이 그
리 만만할 리 없었다. 전신의 잠력을 일시간 끌어올려 몸을 산산히 폭발시키는 기공이 폭신
마공이었다. 그렇게 조각난 살점하나, 뼈하나, 핏방울 하나하나가 독성을 지닌 극악의 암기
로 변하는 것이 폭신마공이었다. 비록 제갈수란이 폭신마공을 깨닫고 다급히 방어를 했지만
그 영향권에서 미처 벗어나진 못하였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다지현봉 제갈수란의
무예수준은 훨씬 고강하였다. 혈장미 석영을 치료하느라 그 맥을 짚어본 아환은 제갈수란의
경지가 결코 석영의 아래가 아님을 파악할 수 있었다.
"괜찮은가?"
육체적인 접촉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환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평어가 흘러나왔다. 제갈수
란은 순간적인 눈가에 이채를 띄었지만 곧 순응을 하고 받아들였다.
"지독한 마공이예요. 폭신마공은..가까스로 내상을 다스리긴 했지만 며칠 요양을 해야할 듯
싶네요. 상공께서는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으셨나요? 아까 기혈이 흔들리신 것 같던데.."
"나는 이상없다."
"다행이네요."
"아니, 다행이 아니야."
아환이 중얼거리면서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갈수란 역시 아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
로 눈길을 돌리다가 혜지가 번뜩이는 아름다운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렇군요. 결코 다행이라 할 수 없죠."
휙.
아환의 손을 떠난 하얀 물체가 제갈수란에게 날아갔다. 제갈수란이 잡고 보니 다름아닌 옷
가지, 자신이 입고 있다가 아환의 손길에 벗겨진 하의와 내고였다. 재빠른 동작으로 아랫도
리를 작은 천으로 감싼 후 여인은 하의를 입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갈라진 상의 사이로
속살이 언뜻 언뜻 보이거나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단정하는 등의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어
둠속에 있는 그 무엇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지금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이리로 와."
아환의 손짓에 제갈수란이 다소곳이 아환의 옆으로 다가섰다. 아환은 제갈수란이 자신의
근처에 가까이 오자 갑작스럽게 확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강렬하게 입을 제갈수란의 조그맣
고 바알간 입술에 갖다대었다. 뜻밖의 아환의 행위에 제갈수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스
르르 눈을 내리 감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팔을 뻗어 아환의 목을 휘감았다. 신
장의 차이가 꽤 있지만 아환이 상체를 조금 숙였고 입술이 마주 대어있는 상태라 제갈수란
이 아환의 목을 끌어안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순간, 아환의 발이 힘차게 땅을 굴렀다.
팍!
쏜살같이 아환의 신형이 일직선으로 한쪽의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무영행(無影行), 그림자
조차 남지 않는다는 빠른 경신술이 아환의 발에서 전개되었다. 제갈수란에게 옷을 던져줄때
부터 아환은 전신의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충분히 내기를 순환시켜 내기를 충만케 한
다음 아환은 제갈수란이 다가오자 입술을 마주치고 바로 달려나간 것이었다. 입을 맞추는
뜻밖의 동작은 은밀히 주위를 조여오는 세력들로부터 작은 틈을 얻을 수 있었다.
"헛!"
"추격하라!"
헛숨 쉬는 소리와 잇따른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수풀 속에서 수십의 신형이 아환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고 서둘러 둘을 뒤따랐
다.
이들은 아환과 제갈수란의 주위를 둘러싸며 포위망을 좁히려다 아환이 순간적으로 제갈수
란의 입술을 빼앗자 당혹스러운 감정과 함께 찰나간 주춤하였다. 무슨 의미일까? 주변에 널
부러진 시신들의 잔해와 상부로부터 전달되온 명령에 의하면 저 주환이라는 작자는 범상치
않은 고수라 하였다. 능히 무림의 칠룡을 제압할만한 무위를 가지고 있다 하였다. 게다가 또
다른 한 사람은 사화 중의 다지현봉이 아닌가? 숫적 우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나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달받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급히 내려온 명령이기에 여유있는 숫자의 고
수들을 모으지 못하였기에 이 일을 맡은 흑천의 사당주는 서둘러 하남팔협을 선봉으로 급파
하였고 뒤이어 무리들과 달려온 것이었다.
하남팔협이 남긴 표식대로 추적을 하여 마침내 이곳에 다다른 사당주는 비릿한 혈향과 함
께 자기에 비하여 약간 밖에 손색이 없는 하남팔협, 자신이 속한 당의 향주 여덟이 누워있
는 것을 알아내고는 더더욱 신중을 기하였다. 그러다 예상외의 행동에 주춤거렸고 결국 조
그마한 허점을 보인 것이었다.
'제길! 저 년이 운공조식을 할 때 공격을 했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허나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서 전력을 다해 뒤를 쫓아라!"
아환과 제갈수란을 뒤쫓는 이들은 온힘을 다하여 몸을 날렸다. 선기를 빼앗긴터라 아환에
비하여 뒤로 쳐진 이들은 부지런히 발을 굴렀지만 아환과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차츰 차츰 멀어졌다. 가진 바 내공이나 경신술 모두 아환을 쫓는 이들은 아환에 비해 낫지
않았다. 아환이 제갈수란을 안고 있다하지만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갈수란 역시
재녀답게 아환이 신형을 뽑자 의도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진기를 운행하여 최대한 자신을 가
볍게 해서 아환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거의 화경에 근접한 무위를 가진 여걸다왔다.
숨가쁜 추격전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나뭇짐을 하느라 항산 어귀 상가진에서 수년동안
산을 탔던 아환이었다. 그에 반해 아환등을 쫓고 있는 자들은 자객이나 야전등을 별로 경험
하지 않은 무사들, 나름대로 도심지에 터를 잡고 위세를 떨친 이들이라 대부분 야산의 삶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이들이 아환을 따라잡지 못하는 또하나의 이유였다.
결국 아환이 산위로 달려 올라가다 내려가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종적을 놓치고 사당주는
품에서 작은 원통을 하나 꺼내어 위를 겨냥하며 원통 끝에 달리 줄을 당겨 신호를 쏘아 올
렸다.
펑..
허공에 작은 불꽃이 피어 올랐다.
"산개(散開)!"
아환등을 전력으로 쫓던 사당주는 수하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 사당주의 얼굴에는
아환을 놓쳤음에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아환이 향하던 방향에 누가 있는지 알기에 사당
주는 일단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절대고수! 정말 그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인물
이 아환이 달려가는 방향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자신들은 그 고수에게 아환의 처리를 맡기
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은 아환이 도망가지 않도록 주변을 감시하면 되었다. 나머지는 그 절
대고수가 처리하리라.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치면서 쾌속하게 달려나가는 아환은 뒤를 쫓는 이들의 이목을 따돌릴
찰나 그들이 갑자기 흩어지면서 넓게 주위를 포위하며 올라오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허
나,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기에는 아직 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느끼고 아환
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달렸다.
무성히 우거진 숲을 지나고 작은 시내를 건너며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 흔적을 지우려는 노
력도 하는 등 아환은 추적을 따돌리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기를 거진 시진
반가량이 흘러갔다. 품에 안겨 있는 제갈수란은 눈을 지긋이 감은채 은은히 전해오는 사내
의 체취에 취한 듯 갸녀린 육신을 아환에게 맡긴채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반짝!
아환의 눈이 빛났다. 정면에 보이는 우거진 수풀옆 작은 바위가 얽힌 곳이 눈에 들어오자
은신처를 찾았다 생각한 아환은 그 쪽으로 몸을 날렸다. 계속 몸을 움직이는 것이 결코 좋
은 것만은 아니었다. 발을 구르고 신형을 띄운다는 것은 그만큼 노출될 확률이 많았다. 나뭇
가지를 밞는 소리나 땅을 구를 때 발생하는 음향에 주의하여야만 했다. 생각컨대 이 야산은
상당부분 흑천의 인물들이 매복되어 있으리라. 아환은 서둘러 산을 벗어나기 보다는 몸을
숨길 곳을 찾은 후 상황을 보아가며 행동을 정하려 하였다.
아환이 숲 근처에 거의 도달할 무렵이었다.
피잇!
잘들리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일직선으로 쏘아져 들어
왔다.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다고는 해도 깊은 밤중이었다. 눈으로 사물을 분별하기 이전
에 전신의 신경이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본능적으로 험중한 기운을 느꼈을때 이미 그 물체
가 근거리에 도달한 것을 알아채고는 아환은 제갈수란을 안은 몸을 뒤틀면서 손에 쥐고 있
는 도를 도신을 세워 짓쳐들어오는 기물을 막아갔다.
펑!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음."
깔리는 신음. 아환의 입에서 묵직한 저음이 새어나왔다. 창졸간의 기습이라 내기를 충분하
게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도신에 주입된 내력은 물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진해
가던 아환의 신형이 뒤로 퉁겨졌다. 충격의 여파로 대여섯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가까스로
기세를 완화시킨 아환은 슬쩍 눈을 돌려 자신의 도를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점 하나가 찍혀
져 있었다. 내심 묵현금에 이 정도 흔적을 남길 상대와 그 기물체가 궁금한 아환은 긴장을
하고 눈을 돌려 물체가 날아온 방향을 응시하였다.
흠칫.
주춤 아환이 한걸음 뒷걸음질 쳤다. 물체가 날아온 곳, 유령과 같이 한 인영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요요로히 처음부터 그 곳에 있는 것처럼 태연하게 서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비추어지자 아환은 내심 크게 놀랐다. 틀림없이 앞에는 한 인간이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은 전혀 존재감이 없었다. 아환이 눈을 그쪽으로 돌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서있는 것
자체를 모를 정도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환은 꽤 수준이 있는 경지에 올라서 있다 생각
했다. 비록 경험이 그리 많치 않지만 검후도 아환의 경지를 인정하였다. 화경의 경지를 넘어
선 무공을 가진 아환이었다. 그런 아환이 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라니..
아환은 피가 싸늘히 식는 느낌을 받았다. 칼을 든 손에 촉촉하게 땀이 배어나왔다. 고수!
자신을 훌쩍 뛰어 넘는 고수다! 육척이 되지 않은 크지 않은 체구에 달빛에 반사된 그 인형
의 윤곽을 보아하니 여인같았다. 잘록한 허리선이나 가슴부위의 음영으로 보아 사내로 보이
지는 않았다. 그 인물 역시 검은 복면으로 전신을 다 가리고 있었다.
번쩍!
복면인의 눈이 뜨여졌다. 아환은 일순간 벽력섬광이 온몸을 관통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
면서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주춤 주춤 두어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정도면 인사는 되었겠지요."
그리 크지 않은 말소리가 들렸다. 가느다란 음색이 여인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무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무색의 음성이었다.
"흑천인가?"
범접할 수 없는 무형의 기세가 아환을 칭칭 동여매었다. 태산 같은 위엄이 아환을 짓눌렀
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아환은 정신을 추스려 그 여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
대답이 없다. 아환은 품에 안겨 있는 제갈수란을 내려놓았다. 제갈수란 역시 면전에 서 있
는 인형이 극강의 대단한 사람임을 깨닫고는 아환의 품에서 벗어나 진기를 끌어올렸다.
"뜻밖이군요. 쉽게 그 것을 쳐내다니..화경의 경지를 넘어섰군요."
일상의 대화처럼 쉽게 말이 뱉어졌지만 무음색의 기성은 아환과 제갈수란의 긴장감을 더더
욱 일깨웠다. 아환은 슬쩍 눈을 돌려 조금 전 날아온 물체가 퉁겨져 나간 방향을 바라 보았
다.
달빛에 미약하게 빛이 반사되는 조그마한 물체가 보였다. 동전이었다. 특이하거나 절세의
기물이 아닌 작은 동전 하나가 일그러진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동전이 자신
을 물러서게 한 것인가? 아환의 등뒤로 식은 땀이 배어나왔다. 이는 제갈수란도 마찬가지
였다. 그녀 역시 침중한 안색으로 찬찬히 앞에 서 있는 복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도
중 아환과 제갈수란은 현연히 빛나는 두 안광 속에 잠긴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아환과 제갈수란에게 전달되어 왔다.
'무..무엇이지? 이 기분은..비애인가?'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외진 곳에 아환과 제갈수란을 제거하기 위하여 등장한 절대의 고수
에게서 슬픔이 감지되다니..
"소녀 장안의 제갈세가의 수란이라 하옵니다. 선배님은 뉘신지요? 그 영명을 후배들에게 말
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한낱 미물도 각자 자기 이름이.."
"용건은 간단하지요. 말그대로 본녀는 두 후배님들의 목숨을 취하려 왔어요. 굳이 통성명을
하면서 시간을 늘일 이유가 없다 생각되요."
아주 작은 단서라도 얻기 위하여 제갈수란이 말을 붙이자 친근하다는 듯이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그 말을 끊어 버렸다. 목숨을 취하려 왔다는 말을 하면서도 아환과 제갈수란은 약간
의 살기도 느낄 수 없었고 그것이 아환과 제갈수란을 더 긴장하게 하였다. 저 복면 여인의
말은 추호도 거짓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아환과 제갈수란의 명줄을 끊는다
는 것인데 그렇다면 응당 보여야할 살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두 젋은 고수는 바싹 정신
을 차렸다. 순간적으로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
'진경! 진경의 경지!'
번갯불이 지나가듯 떠오르는 하나의 무공 경지, 진경이었다. 참된 경지, 현 무림에서도 칠
왕과 오존을 제외하면 그 경지에 올라 선 인물이 없다 단언할 정도의 지고무상한 경지가 진
경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 자리에 아환과 제갈수란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초고수가
둘 앞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아환의 칼을 쥔 손은 이미 땀이 홍건히 흘러 밑으로 뚝 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여태까지
진경의 고수를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그
와 가장 가깝다고 할 무예의 스승이자 성(性)의 상대자였다. 검후가 아환이 알고 있는 한 최
고의 무위를 가진 고수였다. 그러나 검후는 아환에게 있어서 위협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극
복해야할 존재였기에 공포감이라던지 두려움따위는 없었다. 허나, 자신들을 막고 있는 이 여
인은 그와는 달랐다. 당장이라도 자신들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곧 출수하려 하였다.
'일단..일단 부딪혀 본다.'
아랫입술이 질끈 물렸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줄이 툭 툭 불거져 나왔다. 조여오는 흑천
의 인물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전력 질주로 경신술을 펼쳐 진기를 상당 부분 소진한지라
십성의 진기를 끌어올리지는 못하였지만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탓!
아환의 발이 크게 땅을 박찼다. 그러면서 도를 뒤로 크게 돌려 전사로 힘을 가한 후 아환
은 순식간에 복면여인에게 다가갔다. 그 여세를 이어 도신을 회전시키면서 일직선으로 복면
여인의 목부위를 찔러갔다.
츠츠츠..
대기가 갈라지는 기음과 함께 강맹한 경기가 밀려들어오자 복면여인은 별 눈빛의 변화 없
이 하얀 손을 밖에서 안으로 감아들 듯 원을 그리다 천천히 앞으로 밀어내었다. 눈으로 보
이지는 않지만 거대한 잠경이 맹렬히 회전되어 들어오는 아환의 거도에 맞섰고 곧 귀를 찢
을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욱!"
외마디 비명과 함께 커다란 인형이 돌진하던 기세와 버금가는 속도로 뒤로 튕겨졌다. 그와
반대로 내기로 벽을 쌓아 공세를 막아낸 복면여인은 상체를 크게 움찔거렸을뿐 제자리를 지
켰다. 명백한 복면 여인의 우세였다.
비릿한 핏내음이 콧속으로 들어왔다. 땅에 착지한후 뒷걸음질치며 여력을 해소한 아환의
입가에는 한줄기 붉은 선이 그어졌다.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심중하지는 않았지만 단 한
수의 교환으로 명백히 우열이 가려졌다. 더군다나 전력을 다한 자신과는 달리 저 여인은 가
진 힘의 일부만 출수한 것처럼 보였다. 아환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강호출도후 최고의 고수
였다. 그것도 자신과 실력의 차가 월등히 나는 그런 경지에 있는 고수였다.
"봉황귀원! 헛! 설마.. 봉황성모! 선배도 흑천의 소속이신가요. 어찌..어떻게.."
창백해진 안색으로 어이없다는 투로, 당혹한 기색이 만연하여 제갈수란이 입을 열었다. 조
금전의 한수, 봉황지존수(鳳凰至尊手) 봉황곡의 절예라는 것을 무림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이
있는 제갈수란은 알아챌 수 있었다. 애초에 복면여인이 나타나면서 제갈수란의 자신의 알고
있는 바를 되새기면서 복면 여인과 일치할 만한 여고수를 찾았다.
일단 칠왕 중의 검후나 오존 중의 봉황성모, 요후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외에 보타신니
라던지 곤륜서왕모라던지 하는 수많은 기인들이 뇌리에 올라왔지만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
던 찰나 아환과 복면여인과의 격돌로 인하여 복면 여인의 출수로 그 무공 초식이 대한 지식
을 검색하여 드디어는 그 무공이 신비한 세력인 봉황곡의 비전절공인 봉황지존수 중의 봉황
귀일이라는 절대 방어초식임을 알아내고는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막 아환의 뒤를 좇아 아환을 공격하려 들어가려던 복면여인이 제갈수란의 말을 듣고 우뚝
발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예의 그 기이한 감정이 가득 담겨진 눈빛으로 제갈수란을 빤히 바
라보더니 손을 얼굴에 가져가 복면을 벗었다.
"...."
[ 창작] 수라기(獸羅記) 61번째 올림 창작야설
(5)
"아!"
낮은 탄성이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왔다. 고아한 학을 연상케하는 희고 우아한 선을 지닌
단정히 검은 윤기가 도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기품있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의 아름
다운 옥용이 아직 거무스름한 외지에서 환하게 드러났다. 서기(瑞氣)라 할 정도의 광채를 발
하는 하얀 얼굴엔 반듯한 이마에서 심유한 눈망울과 마늘종같이 오똑 솟았지만 부드러운 곡
선을 그리는 콧매와 촉촉히 이슬을 머금은 바알간 두 입술이 오밀조밀 제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그 밑에 섬세하게 뻗어내려간 목덜미의 선이 가히 천상의 선녀라 하여도 무
방할 절세의 미모를 창출해 내었다. 가히 사화와 버금간다 평할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다
이 여인만이 가진 독창적인 고귀한 기품이 은은히 퍼져나가고 있었고 왠지 모를 비애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공에 담겨 있음에 색다른 매혹을 자아내었다.
"맞군요. 봉황성모 선배님이 맞으시군요."
자신도 여자이고 세간에서 천하절색이라 칭함을 받지만 탈속한 선녀를 보는 듯한 기분에
잠겨 있던 제갈수란은 중얼거렸다. 거의 사십년전 강호를 뒤흔들었던 신주오존의 수좌라 여
기어지던 봉황성모, 그 당시 검후란 선배 고인이후 최고의 여협이었던 초절정 무림인이었다.
다른 사존과는 달리 세간에 일에 그리 많이 간여를 하지 않아 그 신비로움이 더더욱 증폭이
되어 있던 봉황성모였다.
"성모님도 흑천 소속이신가요? 아니, 선배님께서 흑천의 장문이신가요?"
봉황성모가 절레 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그 봉목에 슬픔이 가일층되었다.
"그렇다면 감히 누가 선배님 같은 분을..흑천의 장문이 누구인가요?"
만개한 꽃에 비유할 만한 여인, 봉황성모는 복면을 벗은 이후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미
미하게 고개를 흔들거나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어 그녀 스스로의 복잡하고 뒤헝클어진 심정
을 표현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갈수란의 말이 이어질수록 봉황성모의 눈빛만이
차츰 어둡게 변할 뿐 벙어리인양 여인은 도톰하게 자리잡은 매혹적인 입술을 벌리지 않았
다.
"중원에서 성모라 칭함을 받는 성모님께서 흑천 같은 암중의 세력에 몸을 담고 계시다니..그
동안의 위명에 커다란 오점이 남는 행위가 아닌가요? 신비의 봉황곡은 강호무림을 사마외도
의 무리들로부터 은연중에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나요? 지금같이 어지러운
세상, 이민족의 황실이 어지럽고 민심이 흉흉한 이 시기에 선배님 같은 분이 나서서 질서를
바로 잡아주셔야 되는 마당에 중원을 어지럽히는 검은 무리들과 같이 하다니..그러고도 어찌
봉황성모의 명호를 쓰실 수가 있나요?"
"...."
우아한 봉황성모의 아미가 곱게 찡그려지면서 봉황성모의 입가에 살짝 피가 보였다. 이를
악물다 보니 여린 입술이 터져 나갔나 보았다. 몹시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벗어든
복면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배어나왔다. 심각한 심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나는.."
퍼엉..
봉황성모가 떨리는 음성으로 무슨 말을 막 하려는 찰나 신호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
에 불꽃이 하나 피어 올랐다. 봉황성모는 그 쪽을 향해 잠시 눈을 고정시키더니 다시 눈길
을 아환과 제갈수란 쪽으로 돌렸다. 되돌려진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전의 심란한 모습이 사
라지고 거의 무표정할 정도로 냉랭히 얼굴을 굳히고는 눈을 들어 아환과 제갈수란을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쳐다 보았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할 시간이군요."
무심한 음성, 조금전의 떨리는 음성과 비감어린 눈빛은 간데 없고 냉정한 기운을 발하는
초절정고수로 탈바꿈한 봉황성모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하얀 소수에서 투명한 광채가
발산되었다. 상당한 진기를 끌어 올려 출수를 하려는지 점점 소수는 더욱 강렬한 빛을 내뿜
었다. 휘황찬란한 보석을 한낮에 들고 있는 것 이상으로 환히 빛나는 두 손은 서서히 봉황
성모의 가슴쪽으로 올라갔다.
"흑천의 성격을 대충 알 것 같네요."
금방이라도 손을 쓸것만 같은 봉황성모의 손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제갈수란은 봉황성모
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적어도 봉황성모를 부릴 정도라면 흑천의 꽤 수뇌급의 인물의 명령에 의하여야할 터, 이
곳 형산어림에 그 정도의 위치에 인물이 있다는 것이 하나예요. 그 동안 정보망에 수집된
흑천의 본거지가 강북이라 파악되었는데 이 곳 호남에 수뇌급이 존재한다 함은 철저히 세력
을 분산시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인원 하나하나가 점조직화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갖게 하지요.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신주오존 중의 일인인 봉황성모 선배
님 같은 분을 본의아니게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어떤 수단인지는 몰라도 능히 오존을 제어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요. 그것도 옳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고.."
하나 하나 제갈수란이 말을 뱉어내었다.
"흑천은 아무리 생각해도 백도무림과는 등을 돌리고 있는 듯 하네요. 않그런가요? 선배님."
"과연 다지현봉답군요."
봉긋이 솟은 가슴어림까지 광채를 발하는 두 손을 든채로 담담히 그 말을 받는 봉황성모였
다.
"이제 그만하면 저 소협이 어느 정도 상세를 회복한 것 같은데..더 이상의 시간은 필요없겠
죠?"
뜨끔..
아환과 제갈수란은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과연 생강은 늙을수록 맵
다더니 지금껏 제갈수란이 계속 봉황성모에게 말을 붙인 가장 중요한 이유를 이 봉황성모라
는 초고수는 진작부터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다 알고 계시니까 뭐 더 드릴 말씀은 없네요. 하나만 더 물어도 되요? 흑천의 주인은 신주
오존인가요?"
"..."
"대답하실리 없죠. 휴~."
"그는..그는..위선.."
무어라 말을 하려던 봉황성모가 말을 채 끝맺지 않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시나무 떨 듯
봉황성모의 전신이 세차게 떨렸다. 그러더니 하얗던 봉황성모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맴돌았
다. 홍조는 눈가에서 시작되더니 뺨에 번진 후 급기야는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열병을 앓
는 이 처럼 봉황성모의 얼굴에서 금새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바알간 색조가 번졌다.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무슨.."
"이.."
아환과 제갈수란은 순간적으로 변해버린 봉황성모의 모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막
입을 열려던 아환은 말을 하려다 말고 귓가에 들려오는 가느다란 음성에 문득 옆의 제갈수
란을 쳐다보았다.
'기회예요.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야해요. 무언지는 몰라도 봉황성모는 어떤 금제에 걸려있
는 것처럼 보여요. 그 금제가 막 발동을 하였고 그 증상으로 봉황성모가 저렇게 변한 것 같
아요. 서둘러요. 상공!'
정말 그랬다. 봉황성모는 몸을 진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쁜 숨을 내쉬며 눈을 꼭 감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휘황한 광채를 내뻗던 양손은 이미 빛을 잃고 하얀 피부빛만 발하고
있었으며 한손은 가슴에 다른 한손은 아랫배 어림에 위치한채 잔떨림을 보였다.
"후..우.."
봉황성모의 들떠 있는 듯한 숨소리에 아환과 제갈수란은 눈을 마주치더니 순간적으로 뒤로
튕기듯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는 각자 최대한의 진기를 끌어올려 전력으로 경신술을 전개하
였다. 무영행을 펼치는 아환과 제갈세가의 비전 경신술을 발휘하는 제갈수란은 순식간에 수
십여장을 벌려놓고 온 신경을 뒤에 집중시킨채 도주를 하였다.
휘리릭..휘릭..휘리..
아환과 제갈수란이 도주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봉황성모
의 뒤에서 아환과 제갈수란이 자리를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다섯 인형이 아환과 제갈수란
의 쪽으로 날아가듯이 달려갔다. 이 곳에 등장한 다른 여러 인물들처럼 검은 경장에 복면을
한 것으로 보아 이 다섯 역시 흑천의 인물로 보였다. 쾌속한 몸짓으로 아환과 제갈수란을
뒤쫓던 그들의 경신법은 아환이나 제갈수란 못지 않은 절예라 여겨졌다. 잔뜩 준비를 하고
있다가 나온 사람모양으로 그들은 아환, 제갈수란과의 수십여장의 간격을 좁히지도 벌리지
도 않은채 둘을 좇았다. 잠시후 그 뒤로 요요히 허공에 떠오르는 신형이 또하나, 붉게 물들
은 안색에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채 일그러져 있는 여인, 봉황성모였다.
전력으로 질주하던 아환은 슬쩍 뒤를 돌아다 보고는 경악한 표정을 보였다. 자신들과 수십
여장의 간격을 두고 쫓는 이들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우아한 봉황의 자태가 보였다. 아환이
나 제갈수란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보이는 신법과는 차원이 다른 무예를 봉황성모는 보
여주고 있었다. 느릿 느릿 떠올라 너울거리는 듯 보이지만 앞서 도주하고 있는 자신들과 그
녀, 봉황성모 사이의 공간은 접혀져 있는 것처럼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붉은 혈광을 곱디
고운 봉목에서 줄기 줄기 내뻗으며 아환등을 뒤쫓는 봉황. 가히 혈봉황이라 할 귀태(貴態)였
다.
아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가다가는 얼마 있지 않아 자신과 제갈수란은 저들의 손
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험한 꼴을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환은 제갈수란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가늘은 입술을 꼬옥 다문채 앞을 보며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제갈수란
의 반듯한 이마에 송글 송글 땀방울이 맺힌 것이 보였다. 채 회복이 되기 전에 신법을 발휘
한 때문인지 안색 역시 많이 창백해 보였다.
'건곤의 화(化), 진(進)'
양의심결을 운용하여 어렵게 어렵게 진기를 나누었다. 무영행을 펼치는 것을 계속한 채 아
환은 양손에 각각 화와 진의 기운을 응축시켰다. 아환의 얼굴에서 비오듯 땀이 줄지어 흐르
는 것을 보아 지금 그도 최대한의 내력을 짜아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아환의
등뒤 십여장의 거리에 까지 봉황성모의 기세가 느껴졌다.
'수란, 나중에 보자!'
거구를 제갈수란의 뒤에 붙이고 아환은 양손을 포개어 제갈수란의 등뒤에 갖다대었다. 화
결을 짚은 손은 제갈수란의 등에 직접 닿았고 그 손위에 진결의 손이 덮어졌다. 그러더니
아환은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내력을 터뜨려 신형을 제갈수란의 등에 밀착하다시피 가져간
후 온힘을 다해 두 손을 떨쳐 제갈수란을 앞으로 밀어내었다. 아환은 제갈수란을 살리고 싶
었다. 아마 그 이유는 아환이 제갈수란을 절실히 사모해서 그런 것은 아니리라. 집안이 멸문
된 후 아환에게 있어서 여인을 만나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였다. 제갈수란 역시 그러한
목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따위는 생각지 않았다. 아직 아환
의 뇌리 속에는 진청청의 잔영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제갈수란을 뒤로 밀수도 있었지만 아환의 잠재된 기억 속 진청청의
모습이 되풀이되서 제갈수란과 겹쳐지고 있었기에 아환은 제갈수란을 살리고 싶었던 것이
다.
아환이 뒤에서 밀어주는 강력한 추진력에 의하여 수배의 증폭된 속도로 제갈수란의 교영이
폭발적으로 쏘아져나갔다. 제갈수란은 자신의 몸을 휘어감은 무형의 기운이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밀어내자 곧 그 힘이 아환에게서 온 것임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돌린 눈
속에 아환이 양 입가에서 두 줄기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잡혔다. 제갈수란의 깊은 눈에 여
러 가지 혼재된 기이한 감정이 아로새겨졌다. 괴로움일까? 의아함일까? 복잡한 눈빛으로 두
발로는 계속 경신술을 펼치고 있지만 고개는 돌린채 아환을 계속해서 쳐다보는 제갈수란의
작은 신형이 점점 멀어져 갔다.
아환은 무리하게 끌어올린 진기로 인하여 아물려던 내상이 심중해졌다. 아환은 제갈수란을
밀어붙임과 동시에 그 반작용으로 여태까지 자신이 달려가던 방향과 반대로 몸을 돌렸다.
억지로 진기를 운용하여 역행한 것이라 기혈이 들끓어올라 다물어진 입을 헤집고 피가 흘러
나왔다. 낮게 침잠된 두 눈은 제갈수란의 뒷모습을 잠시간 보다가 획 돌려 바로 수장 뒤에
너울거리며 다가오는 환상 같은 봉황의 그림자와 부딪혀 갔다.
쿠오오..
거대한 도기가 공기를 가르는 기성과 함께 해일처럼 봉황성모를 덮쳐 들었다. 건곤형의 붕,
지난 격돌과 별 차이가 없는 무결이었다. 전번에 봉황성모가 어렵지 않게 파훼한 무공이지
만 아환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그리고 가장 뚜렷이 체득했다고 생각되는 건곤형의
응용 방식이기에 아환은 쾌속한 기세에 더불어 힘을 실은 것이었다.
펑..퍼엉!
굉음이 터져나왔다. 봉황성모는 아까와는 틀리게 경력을 흩트리는 대신에 경공(硬功)으로
부딪혔다. 두 섬섬옥수가 붉은 빛에서 일순 환한 백광이 어린다 싶더니 연달아 도세를 쳐대
었다.
"읍.."
장대한 아환의 거구가 뒤로 밀려났다. 일장 가까이 밀려나 휘청거리는 신형을 가다듬는 아
환의 앞에 수개의 발자국이 깊숙히 땅을 파헤친채 남겨져 있었다. 아환은 진탕되어 역류하
는 기혈을 억누르면서 발목어림까지 묻힌 자신의 발을 땅에서 빼내었다. 크게 내상을 입었
는지 아환의 입에서는 이제 핏줄기가 아닌 핏덩이가 뭉클 뭉클 배어나와 벗은 상체를 타고
바닥에 고였다.
조금전의 충돌로 아환이 낭패를 심하게 본것과는 달리 봉황성모는 반탄되어 오는 기운에
순응을 하며 서너자 교영을 물리더니 바닥에 내려섰다. 봉황성모 역시 전혀 충격을 받지 않
은 것은 아니었다. 붉게 물들었던 얼굴이 다소 창백해지며 검은 상의가 군데 군데 찢겨져
나갔다. 땅에 내려선 봉황성모의 얼굴이 차츰 제 빛깔을 회복해 갔다. 붉은 기운도, 조금 하
얗게 변하였던 안색이 곧 원래의 백옥 같은 투명한 빛깔을 드러내었다.
어느새 봉목에 담겨있던 기이한 열욕과 혼돈의 기운이 가라앉고 원래의 깊게 침잠된 투명
한 눈빛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방금의 격돌은 봉황성모 역시 충분한 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
였고 그로인하여 정돈되지 않은 이성으로 강공을 펼쳤기에 강렬한 충격이 발생하였고 이는
봉황성모에게 이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제길..좋지 않군..'
가닥 가닥 끊기는 진기를 어렵게 끌어올리며 봉황성모를 쳐다보던 아환은 첩첩산중이었다.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도 당할 자신이 조금도 있지 않은데 하물며 저렇게 냉정하게 본 모습
을 찾은 모양이니 앞으로는 더욱 난해하리라.
휘익..휘리릭..
그제서야 봉황성모를 뒤따라 오던 다섯 인형들이 장내를 거쳐 제갈수란이 향했던 쪽으로
계속하여 몸을 날렸다. 사전에 묵계가 있었는지 조금의 망설임도, 눈길도 주지 않고 그들은
아환과 봉황성모의 대치상태를 지나쳐 갔다.
"강하군요. 얼마 되지 않은 나이인데도 그 정도의 성취를 얻었다니.."
"성모야 말로 대단하오. 과연 오존의 수뇌, 정말 강하오."
"저 멀리 사라진 저 여자 후배는 잡기가 쉽지 않겠군요. 소협과 별 차이가 없는 무위를 지
니고 있는데다가 벌써 이렇게 거리가 벌어졌으니.."
흠칫.
속으로는 경악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채 하는 아환은 봉황성모의 말, 제갈수란이 자신과
별 차이가 없는 무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제갈수란은 본
신의 절예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소협의 정인인가요? 그래서 그녀를 살리기 위하여 그런 행동을 한건가요?"
"..."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왜 그러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차후에 무림을 영도할 만한 젊은 영웅을 스러지게 해야 한다는 것
이.."
"그러는 선배는 왜 흑천에 몸을 담은 거요?"
계속 진기를 다스리며 몸을 추스리는 아환의 질문에 봉황성모의 눈빛에 전과 같은 슬픈
기운이 묻어나왔다.
"글쎄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독백처럼 나직히 중얼거리는 봉황성모, 그 음색이 처연하게 느껴졌다. 봉황성모는 눈을 내
리 감은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아환에게 몸을 회복할 기회를
주는 것일까? 아환은 봉황성모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부지런히 진기를 순환시켜 기혈을 안정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에 출두하여 처음 당해보는 절망감이 스며들자 세차게 주먹을
꽉 쥐어 그것을 떨치려 하였다.
"선배.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럴까요? 준비는 되었나요?"
비무를 하는 사람들처럼 둘의 대화에 살기라던지 분노라던지 하는 감정이 사라졌다. 한쪽
은 죽이려는 자, 그리고 다른 한쪽은 살려는 자였다. 팽팽한 살기가 대기를 가를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흉험하게 느껴졌다.
"가겠소."
'건곤의 쾌(快)'
아환의 발이 태극의 방위를 밟으며 작은 원을 그리며 맴을 돌았다. 그러더니 그 태극의 크
기가 점점 커지면서 아환의 움직이는 속도도 급격히 빨라졌다. 아환은 도를 든 손으로는 쾌
자결을 운용하면서 다른 한손에는 진자결을 운용하여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아환의 보결에
그려지는 태극의 지름이 계속 펼쳐지며 급기야는 삼장여의 거리에 있는 봉황성모의 신형까
지 그 영향권안에 들어섰다.
투명한 눈빛으로 아환의 보결을 밟는 동작을 아무런 준비없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봉황
성모는 아환의 태극의 원이 자신을 휘어감으며 은근한 암경이 자신을 옥죄어 오자 그제서야
진기를 방출하여 짓눌러오는 압력에 대항하였다. 가볍게 생각하여 오성의 공력으로만 대항
하려던 봉황성모는 점점 중첩되면서 압박감이 강해지자 서서히 그에 맞추어 내공을 끌어올
렸다.
스읏..
찰나 일직선으로 시커먼 선이 섬전처럼 수평으로 자신의 가슴어림으로 쇄도해왔다. 극쾌의
빠름! 쾌도를 바라보는 봉황성모의 눈에 감탄이 잠시 실렸다. 왠만한 고수라 할지라도 이
쾌도를 쉽게 막지 못하리라. 더군다나 태극신보의 경력이 옥죄어 오는 동안은 더더욱 그리
할 것이다.
스르르..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봉황성모가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앞을 아환의 도가 스치며 지나갔
다. 신형을 완전히 도의 궤적에서 빼어냈음에도 도에 담긴 여력은 봉황성모의 내장을 가볍
게 흔들었다. 그러면서 살짝 그 도기가 미세하게 닿았는지 검은 경장의의 가슴부분이 조금
갈라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유백색이 살결이 조금 내비추어졌다.
일반적으로 강호에서 여인들의 중요부위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명망있는
이들은 혹시라도 그러한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상당히 수치스러워 하였고 심지어는 패악무
도한 색마로 오인받는 적도 있었다. 허나 조금 전 아환이 칼을 휘두르면서 봉황성모의 가슴
부위를 노렸고 그로 인하여 조금이나마 속살이 드러났음에도 아환과 봉황성모의 표정에는
수치심이나 당혹감등은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찾으라면 탄복이랄까?
아환은 칼이 한바퀴 원을 크게 그리며 지나가자 억지로 칼의 궤도를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상태에서 몸을 빙글 돌려 칼의 기세에 몸을 실었다. 그 속도가 거의 줄어들지 않은 상태에
서 아환의 칼끝이 다시금 봉황성모를 향하자 허리춤에 있던 진자결을 담은 다른 손이 도의
손잡이를 밀어쳤다. 그러자 노도와 같은 강력한 내기가 도신에 실리면서 일직선으로 검후
의 젖가슴쪽으로 뻗어갔다. 전신의 내력을 총 집중시켜서 발휘한 일합이었다.
엄청난 경력을 담고 자신에게 쇄도해 들어오는 거무튀튀한 거도를 응시하는 검후의 눈에
경탄의 감정이 담겼다. 연결동작으로 뻗어오는 이 도세를 막을 무인이 무림에는 그리 흔치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황성모의 두 손이 위로 올라간다 싶더니 환한 은빛을 내면서
아환의 도세를 마주쳐갔다. 은색 광채는 아환의 도와 닿았을 때 폭발적인 빛을 더하더니 도
신을 두손으로 잡았다. 양쪽 면에 각각 한손을 대고는 도의 전진을 막은 것이었다.
휘청.
파드드듯..
봉황성모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의 흑의가 세찬 바람을 맞은듯 거세게 휘날
렸다. 그러나 그뿐, 봉황성모는 더 이상의 물러섬이 없이 도신을 잡고 아환의 눈을 마주 보
았다. 봉황성모의 진경에 다다른 무위의 벽은 아환이 뚫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앞으로 진격
하려던 아환의 '건곤형의 진'의 내력이 채 발산되기도 전에 봉황성모의 힘에 눌려 고스란히
아환의 체내로 되돌아왔다. 그결과 진기가 흐르는 경락과 내장, 혈맥등 아환의 신체는 그 충
격이 역류하자 진탕되고 파괴되었다.
"크아악!"
털썩.
아환의 입에서 분수같이 붉은 피가 허공으로 터져나왔다. 새빨간 기혈과 내장 부스러기까
지 섞여 산산히 비산하였다. 아환은 반탄력에 도를 놓치고 무지하게 크고 세찬 둔기에 전신
을 강타당한 사람처럼 뒤로 튕겨져 이장 여를 날아간 후 땅으로 널부러졌다. 떨어진 후에도
몇바퀴를 뒹굴면서 바닥의 돌멩이와 나뭇가지에 군데 군데 살갗이 찢겨나갔다.
반탄 여력이 사라진 후에도 아환은 바닥에서 꿈틀거리면서 일어나지 못했다. 계속해서 입
으로 피가 줄지어 흘러내렸고 헝클어진 내기는 밖으로 뿜어나가지 못하고 아환의 경맥을 따
라 제어불가능하게 날뛰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가물가물한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지만 점점 머릿속에서 생각이 사라져갔다. 아환은 흙에 얼굴을 묻은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온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신경마디가 가닥 가닥 끊어져 극렬한 통증이 아환을 휘
감았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방어하려 하지만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소진되어 일
부나마 남아 있던 공력은 아환의 몸을 점점 훼손하고 있었다. 그러한 아환의 처참한 상태를
본 봉황성모는 손에 들고 있던 거도를 아환의 옆에 던졌다. 바닥에 꼿꼿이 꽂히는 칼.
그때 아환의 신체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외부에서는 보지 못할 변화였다. 단전과 기해를
비롯하여 전 혈도 곳곳에서 기이한 열류와 냉기가 솟아났다. 그 기운은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아환의 온몸을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그 둘과 또다른 사이한 기운이 음유하
게 내재되어 그 뒤를 따라 아환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음양신단의 약효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사한 기류였다.
아환의 몸에 채 융합되지 않고 상당부분 뭉쳐 있던 음양신단은 천고의 영약답게 아환의 현
상태가 매우 심중함에 반응을 하여 급격히 용해되기 시작하였고 뜨겁고 찬 음양의 성질을
갖는 기운이 아환의 경락을 따라 아환의 전신에 퍼져나갔다. 또하나, 음양신단에 눌려 있던
기운 역시 음양신단이 폭주함에 따라 속박에서 벗어나 아환의 신체 곳곳에 퍼져나갔다.
봉황성모는 아환이 튕겨져 나가 쓰러지고 바닥에서 꿈틀거렸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마쳤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쓰러져 있는 아환의 신체가 곳
곳에서 불룩 불룩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숨을 쉬듯 올라오던 근육질
의 남성의 육체가 급기야는 전신 곳곳에서 빠르게 휘돌아다니고 물이 끓어오르듯 아환의 몸
에서 일어났다.
'뭐지? 주화입마인가?"
봉황성모의 의구심은 곧 사라졌다. 아환의 몸이 떠오르듯 일어서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빳
빳히 굳은 시체마냥 아환의 몸이 쓰러진 그 상태에서 머리부터 땅에서 떨어져 바로 일어섰
다.
"헛!"
아환을 바라보던 봉황성모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나왔다. 헝클어진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었고 부릅뜨여진 두 눈에서는 혈광이 이글거렸다. 전신의 모든 혈맥은 터질 듯 불거져 나
와 있었고 아환의 몸에 가득차 있는 괴기운은 아환의 몸을 끊임없이 씰룩였다. 벌어진 입에
서 탁한 침이 흘러 아환의 가슴어림을 적셨다. 불타오르는 것처럼 혈광을 내뿜는 두 눈에는
이미 초점이 사라졌다.
봉황성모는 순간적으로 변화한 아환의 괴경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 역시 수없
이 무림을 질타한 무인으로서, 여걸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선 존재였다. 그런 봉황성모조차
지금 같은 광경은 처음 보았다. 무공을 대결하다가 내력을 주체할 수 없어 주화입마를 당하
는 경우는 무림에도 종종 있었다. 심마에 빠져든 이들도 있었다. 허나, 주화입마를 당한 것
처럼 보이는 상대가 저렇게 흉험한 기세를 뿜어내는 것은 본적도 들은적도 없었다. 처음 아
환을 접하였을때보다 오히려 더욱 강맹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어쩌면 자신과 별 차이가 없
을 정도로 극강의 힘이었다.
아환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앞에 꽂혀있는 칼을 잡았다. 아환은 그 칼을 뽑아들음과 동시에
앞으로 한발 내딛고는 빠르게 주먹을 뻗었다. 위맹한 경력이 아환의 정권에 담겨 봉황성모
의 얼굴로 날아갔다. 풍영섬, 무이관의 풍도십팔식이 아환의 손에서 펼쳐졌다. 섬전 같은 빠
름이 봉황성모의 고운 얼굴로 짓쳐오자 봉황성모는 장력을 일으켜 그 손에 맞섰다.
펑!
폭발음과 함께 아환의 신형이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났다. 휘청거리던 아환의 몸이 재차 봉
황성모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봉황성모 역시 뒤로 한걸음 물러선 후 돌진해 오는 아환의 공
세를 마주쳐 갔다.
펑..펑..펑..
연이은 폭발음이 터져나오고 아환의 신형이 실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갔다. 땅에 처박힌
아환의 몸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아까와 똑같이 뻣뻣히 일어섰다. 차이점은 더 빨라졌다는
것. 땅을 박찬 아환의 발이 보결을 밟는다. 이제 의식이라고는 없는 아환의 신형은 천궁의
천화선보의 방위를 따라 봉황성모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아환의 칼이 움직였다.
고오오..
대기가 뒤흔들리는 기괴한 음향이 번져나갔다. 아환의 칼은 느릿하게 아래에서 위로 들리
더니 하늘을 향해 도끝을 겨눈채 그대로 봉황성모에게 접근해 갔다. 서서히 도신이 아래로
내려오고 그 도가 그리는 궤적의 앞에 봉황성모가 서있었다.
웅장한 기운이 봉황성모에게 물밀듯이 밀려갔다. 봉황성모의 안색이 굳어졌다. 희디흰 빛을
내는 소수가 무형의 힘에 맞서 봉황의 날개짓을 펼쳤다. 원을 그리듯, 그러다 안으로 두 손
을 끌어당기고 앞으로 뻗어낸 봉황성모의 봉황지존수가 아환의 도에 충돌하였다.
펏..
미약한 기음이 그 충돌 지점에서 발생하였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62번째 올림 창작야설
(6)
핏..
집중하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파열음이 극강의 두 경력이 충돌한 접점
에서 새어나왔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하였던가? 너무나 강맹하였기에 오히려 그 부딪
힘은 조용하였다. 허나, 그 음향이 작음은 그 여파마저 축소시키지는 못하였다.
쩌쩌쩌적..
응축되었던 둘 사이의 공기가 터져나갔다. 강렬한 폭풍이 일어났다. 아환과 봉황성모가 반
탄력으로 뒤로 물러선 자리, 파문이 일어난 물결처럼 크게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모양으
로 땅이 움푹 들어가고 갈라졌다. 대략 오장여의 지름으로 가운데는 수자가량이 함몰되었고
원반의 형태로 둥그런 테두리가 겹겹이 그려진 채 바닥은 엄청나게 강력한 힘으로 짓누른
것처럼 변형되었다.
"크억!"
"으흠..."
충돌에 의한 여력은 비단 대기와 땅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손을 맞댄 아환과 봉황성모
의 내부도 크게 진탕시켰다. 일장 여를 뒤로 물러선 후 자세를 바로잡는 두 사람이었다. 봉
황성모의 검은 옷이 거센 폭풍에 마주선 갈대잎마냥 세차게 파닥거렸다. 그러면서 아까 아
환과의 충돌시에 찢겨졌던 옷자락이 그 진동으로 더욱 벌어졌다. 한쪽 젖가슴부위가 훤히
드러났다. 뽀얀 살결, 가슴의 융기가 보였다. 찢어진 옷가지 사이로 유실까지는 노출되지 않
았으나 그래도 소중한 여인의 비처였다. 이상한 것은 봉황성모가 내고를 입지 않았다는 점
이었다. 맨몸에 달랑 흑의 경장하나만 걸친 차림일까?
봉황성모는 속살이 드러났는데도 특별히 그것을 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혈이 흔들린
충격으로 인하여 본능적으로 가슴어림에 손을 가져가대었지만 노출된 부위는 가리지 않았
다. 일장 여의 거리를 뒤로 물러선 봉황성모는 자신을 뒤로 밀려나게 한 아환을 깊은 동공
으로 빤히 응시하였다. 지금 봉황성모의 눈에 어린 감정은 감탄과 놀라움, 그리고 당혹이었
다. 감탄과 놀라움은 아환이 저 지경이 되어서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것이었지만 당혹스러운
감정은 그와는 별개였다. 봉황성모는 지금 아환이 펼친 무공을 알고 있었고 그 무공은 사내
가 익혀서 무림에 출도한 적이 없던 무공이었다.
호천검!
처음에는 낯이 익은 무예였지만 뚜렷이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아환의 천화선보의 보법을
밟으며 짓쳐들어오자 그 무예가 천궁의 무예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도 천궁의 가장 상
위의 무예인 호천검이었다. 같이 신비사세라 불리우는 천궁이기에 봉황곡은 나름대로 천궁
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수집하였고 여러가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 수뇌격인 봉황곡주를
맡고 있는 봉황성모가 천궁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많이 알고 있음도 무리가 아니었다. 더군
다나 봉황성모, 자신은 그 무예를 익힌 여인과 대적한 경험도 있었다.
삼십여년전 한창 신주오존으로 위명을 날릴 때 봉황성모는 우연히 한 여검객과 손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사소한 일로 발생한 오해로 둘은 잠깐 비무를 하였었고 그 때 봉황성모는
이 호천검에 의하여 패배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 호승심이 강한 봉황성모가 아니었고 곧
그 일이 오해로 밝혀진 후 그 여검객이 무림칠왕의 으뜸인 검후 조설하라는 것을 알게된 후
봉황성모는 전대의 선배와 약간의 교분을 맺었었다. 그러나 검후가 그 후 은거를 하면서 연
락이 끊겼었는데 그 당시의 무예와는 조금 틀리지만 틀림없는 호천검을 다시 보게된 봉황성
모는 의아함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 봉황성모의 의구심을 아는지 모르는 지 뒤로 물러선 아환은 흐릿한 눈으로 봉황성모
를 쳐다보면서 다시금 도를 치켜들었다. 창백하게 변한 얼굴빛에 칠공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양 눈에서, 귓구멍에서, 코에서 그리고 입에서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극심한 압력으로 인
하여 혈관이 파열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까의 충돌로도 충분히 발산시키지 못한 음양신단
의 기운이 체내에는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아환의 입가가 씰룩였다. 전신의 근육이 경련을 하였고 신경세포 하나 하나가 고통을 호소
하였지만 이미 이지를 잃은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칼을 치켜든 아환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마주 선 적에게 도를 겨누었다. 아환의 울퉁불퉁한 상반신의 경락에서 불룩 불룩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나갈 곳을 찾지 못하는 기운들이 아환의 경락을 뚫고 나올듯이 곳곳에서 날
뛰고 있던 것이었다. 촛점을 잃은 눈은 이미 상대방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단지 적이라 느껴
지는 기운을 초자아가 감지하고는 도를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휘이익.
검은 빛의 선이 허공에 그어졌다. 아까보다는 현저히 그 위력이 떨어졌다. 아직 도기가 칼
끝에서 일렁거리며 봉황성모를 향해 밀려갔지만 그 속도나 위력은 이류무사의 그것을 벗어
나지 못한 평범한 일식이었다. 게다가 계속된 출혈로 인하여 아환의 안색은 구리빛의 안색
이 허옇게 변할 정도로 질려있었다.
봉황성모는 가볍게 상체를 젖혀 칼의 궤도를 비껴났다. 여전히 호천검의 무리를 따르고 있
는 초식이었다. 검후의 호천검은 섬세하면서도 장중하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지
만 이 사내의 호천검은 패기있고 위엄이 있으며 강맹한 것이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경의 안목을 가진 봉황성모가 그 둘을 혼동할 리 없었다.
'어떻게 호천검을 익힌 거지? 이 사람은 천궁과 무슨 관계일까? 검후의 제자인가? 그 분이
은거하신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의구심이 커져갔다. 고개를 살짝 흔들고 한걸음 움직이는 것으로 이미 봉황성모는 아환의
공세를 피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만큼 아환의 칼이 예기를 잃은 것이었다. 이제는 미약하게나
마 감지되던 도기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저 사내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변화는 아직 저 사내의 신체의 경력이 상당히 응축되어 있고 그것이 제어가 되지 않은 상태
에서 몸속을 헤집고 다님을 알 수 있었다.
아환의 몸상태는 극도로 안 좋은 상태였다. 기혈이 제멋대로 움직이다 아무 혈도 경맥에
가서 굳어가고 일부의 통제범위를 벗어난 기운들은 내상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런 처참한
상세임에도 아환의 칼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 소협은 검후선배와 어떤 관계지요?'
아환의 귓속으로 전음이 파고 들어왔다.
'...'
아무 대답없이 계속해 손을 놀려 칼을 휘두르는 아환이었다. 이지를 잃은 상태에서 귓가에
들려오는 전음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초식이고 내력이고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옮
기는 것도 가까스로 발을 떼었고 힘겹게 선을 그리는 칼은 삼척동자라도 피할 수 있을 정도
로 느렸다.
봉황성모의 눈에 안타까움이 읽혀졌다. 이 사내는 주화입마에 이은 심마로 인해 곧 몸과
마음이 산산히 파괴되어 폐인이 되리라. 어찌 이 상황을 넘겨서 살아난다 해도 살아도 산
것만 못한 그런 비참한 삶을 살리라. 그렇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 다름아닌 자신이라는
것이 봉황성모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봉황성모는 다른 이의 명을 받아서 살겁을 행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금제로 인하여
거의 십오년간을 그 악마 부자(父子)의 성노리개로 살아왔고 그 악마들은 그 수하들에게도
자신의 육체를 올라타게 하였다. 이미 여러 남자들을 아래로, 때로는 위로 받아들이며 더럽
혀질때로 더럽혀지고 타락한 성모. 스스로의 의지로 자결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레보다
못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 비참한 현실에 자포자기하였다. 그 악귀들의 손아귀에 중원무
림이 들어가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봉황성모가 아랫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아환이 급기야 칼을 바닥에 내려꼽고 무릎을 꿇었다. 이제 모든 기력이 소진된 모양이었다.
눈동자에 생기가 급격히 사라지고 있었다. 칠공에서 흘러내린 피는 아환의 전신을 붉게 물
들여 혈인이 되었다.
봉황성모의 입술이 모아진다 싶더니 크고 동그랗게 입이 열렸다.
' 아아아아...'
밖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한곳, 아환의 귀에 봉황성모의 맑은 천상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러자 아환의 몸이 크게 부르르 떨렸다. 꺼져가던 눈빛이 순간 반짝이며 되살아났다. 귓속으
로 들어온 기음이 아환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었다. 그 선음은 아환의 심마를 일순간에 깨뜨
리고 스러졌던 아환의 이성을 다시금 불러왔다.
봉황선음(鳳凰仙音).
불문의 사자후와 같이 파사(破邪)의 현오한 음공절예가 봉황성모에게서 펼쳐졌다. 이는 다
름아닌 봉황곡의 비전절예이자 장문비기이기도 하였다. 봉황곡은 강호를 어둠의 손에서 지
키고자 무림의 기인이 개파한 신비 세력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봉황곡의 무예는 상당부분
파사현정을 그 목적으로 하였고 모든 무공이 정심박대하였다. 그 중 이 봉황선음은 무림의
음공 중 손꼽히는 위력을 발휘하는 고절한 절예로 원로급 고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 아아아아..'
계속해서 귓속으로 봉황선음이 들어왔다. 청아하면서도 깊은 현기가 깃들어있는 봉황선음
은 아환의 이성을 자극할 뿐 아니라 전신에 침잠되어가는 잠력을 격발시켰다. 아환의 뇌리
속에 심화가 깨어지고 일순 투명한 상태의 이지가 돌아왔다. 게다가 잠재되어 있던 초자아
가 깨어나 아환의 공허한 머릿속을 채워갔다.
' 무상(無上)은 무상(無常)이요, 무상(無像)이라. 무상(無像)은 만상(萬像)이며 이는 곧 자연
이라. 자연은 순응이요 인간 역시 자연이라. 인간이 곧 자연이요 우주(宇宙)이니 만물을 포
함하는 존재요, 만물을 조화시키는 자연이다. 순리의 흐름은 자연의 원리요 근본이니 이는
만상의 법칙이라..............................무리(武理)는 곧 흐름이요 가장 으뜸된 이치는 곧 자연이니
이는 곧 무상을 말함이다.'
무상심결의 전구결이 아환의 정신을 가득 메웠다. 그러면서 아환의 이성은 초자아에 잠겨
들어가며 무아지경으로 접해들어갔다. 뒤틀렸던 아환의 기력이 다시 일어나고 아환의 온 몸
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아까 제아할 수 없었던 상태, 주화입마의 상황과는 전혀 달랐
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제어하지 않고 그냥 아환의 초자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그 힘이 원하는대로 온 전신을 개방할 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음양신단과 본연의 잠력들은 처음에는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 저리 날뛰었지만 곧 그 가야
할 방향을 잡았다. 아무런 거침이 없이 훤하게 열려진 아환의 경락들을 휘몰아 다녔다. 곳곳
에 흩어진 기운들이 수없이 충돌과 융합을 반복하더니 두 원류로 나뉘어져 아환의 전신을
돌아다녔다. 뜨거운 힘은 아래에서 위로 치밀어 올라가고 차가운 기운은 위에서 아래로 내
려오며 서로간에 부딪힘이 없이 아환의 경락에서 소주천을 반복하였다. 그러다 점차 기운들
은 강맹해지고 그러면서도 여유롭고 부드러워지면서 미세한 경맥까지 그 영향력을 넓혀갔
다.
팟...팟...팟..
아환의 몸에 굳어있던 작은 혈맥이 연이어 뚫리고 그 속에 내재되어 있던 작은 기력들이
거대한 두 원류에 흡수되면서 아환의 몸에서 대주천을 하였다. 차츰 차츰 그 속도를 빨리하
던 거력은 급기야는 완전히 전신을 감싸안으며 아환의 머리쪽으로 몰려갔다.
꽝!
온 세상이 터져나가는 듯한 벽력굉음이 그 두 원류가 충돌하면서 발생하였다. 백회혈에서
첫 충돌이 일어났고 계속해서 그 힘들은 전신혈맥에서 연달아 맞부딪혔다. 어떤 것이 터져
나가는 괴감이 아환의 온 신체에서 느껴졌지만 지금 아환을 지배하고 있는 초자아는 아환을
몰아경에서 지켜주었다.
봉황성모는 봉황선음을 그치고 눈을 동그랗게 뜬채 아환을 정시하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사태가 발생하였는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뜨여진 아환의 눈에서 생기가 돌고 이내 그 안광
이 깊게 가라앉으며 투명히 빛나는 것을 경이로운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이어 아환의 전신
근육이 춤을 추듯 물결치며 움직이는 것이 혈맥과 경락으로 어떤 경기가 운행됨을 파악하고
는 아환이 평온해질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상임을 알고 아환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휘잇!
바로 그때 봉황성모의 귓전에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아직 어두운 밤하늘의 공기를 가로 지
르며 허공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그 호각소리가 들리자 마자 순식간에 봉황성모의 안
색이 변하였다. 하얗게 질려가는 봉황성모의 얼굴은 그 호각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을
알기에 얼굴빛을 창백하게 하였다.
'조금만..조금만 더..'
움켜쥔 봉황성모의 손에 땀이 맺힌다. 섬세한 두 손아귀에는 어느새 홍건할 정도의 물기가
어렸다. 단적으로 지금 봉황성모가 얼마나 긴장하는 가를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일각 가량이 지나고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깨달은 봉황성모는 두 손을 가슴께로
들어올리더니 천천히 앞으로 밀어내었다.
고오오..
거센 손바람이 봉황성모의 손에서 일어났다. 삼장여의 공간을 격하고 쏘아져 가는 장력, 격
공장이었다. 화경의 경지에 인접해야만 발출할 수 있다하는 손바람이 삼장여의 거리를 지나
아환의 몸으로 날아갔다.
본능이었을까? 아환의 몸이 부스스 일어나더니 도신이 세워지고 그 도면으로 아환은 봉황
성모의 격공장을 맞아갔다.
펑!
폭발음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아환의 신형이 하늘로 떠 올랐다. 아직 눈빛이 몽롱한 상태
로 아환은 뒤로 튕겨나갔다.
"우웩!"
시커먼 핏덩이가 아환의 입에서 쏘듯 배어나왔다. 울혈, 죽은 피가 내뱉어졌다.
펑..펑..펑..
봉황성모가 그 뒤를 쫓으며 연달아 손을 교차하면서 장력을 쏟아내었다. 그 장력은 어김없
이 아환의 도와 장대한 아환의 몸을 두들겼으며 그 힘으로 인해 아환은 계속 뒤로 날아갔
다. 한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봉황성모가 공격을 하고 아환이 그 힘을 그대로 받는
형편인데도 쫓아가는 봉황성모의 안색이 헬쓱해지고 아환은 장력에 그리 큰 부상을 입은 것
처럼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일장을 격타당할때마다 수장씩 퉁겨나가는 아환이지만 얼
굴빛은 평온해 보였다.
이는 다름아닌 봉황성모의 절묘한 내력의 배합이라 할 수 있었다. 봉황성모는 호각소리가
들려오는 반대쪽으로 아환의 신형을 밀어내고 있던 것이었다. 탄공에 화자결을 접목하고 거
기에 진기를 이용하여 아환의 몸을 감싸고 있던 터라 아환은 별다른 상해를 입지 않았다.
단지 극심한 공력을 소모하는 봉황성모의 내력만 기하급수적으로 소진될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봉황성모가 내공을 써서 아환을 몰고 간 것은 한 단애였다. 깎아지른 단면
이 무척이나 가파르게 보이는 절벽끝이 아환이 날라가는 방향에 위치하였다.
봉황성모의 일장이 더 아환의 몸에 작렬하였다. 그러자 훨훨 날아가던 아환의 몸이 절벽끝
에서 불과 일장 여를 남기고 밑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아환의 눈이 강렬한 금광을 뿌려대
고 아환은 허공에서 몸을 뒤짚어 땅으로 착지를 하였다.
휘청..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할 정도의 미미한 혈색이 아환의 안면에 보였다. 그제서야 아
환의 눈에 초점이 되돌아 왔다. 아환은 흔들거리던 몸을 가다듬고 꼿꼿이 자리에 섰다. 정면
을 똑바로 쳐다보던 아환은 의혹어린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낯선 곳이었다. 얼마전까지 자신은 봉황성모와 격전을 벌인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
후에는 기억이 전혀 없었다. 눈앞에 봉황성모가 보이는 것은 틀림없지만 아까 대적하였던
숲속이 아닌 생소한 장소에 서있는 자신을 본 아환은 슬그머니 내공을 운행해보았다. 이 것
역시 의아했다. 봉황성모와 손속을 나누고 내력을 다 소모했다고 여겼는데 이 전신에 느껴
지는 활력은 무엇인가? 아무런 장애 없이 도도히 흘러가는 진기는 비록 자신의 내상이 심중
한 상태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한단계 진일보된 상태였다.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아환은 일단 눈앞에 서있는 적을 응대하기 위하여 도를
세워들었다. 상대는 봉황성모, 진경의 고수였다.
지금까지 아환을 여기 외진 곳으로 이끌고 온 봉황성모는 아환의 눈빛이 변하고 주변을 돌
아보며 내기를 운행하는 것을 찬찬히 바라보고 아환의 정신이 되돌아왔음을 알았다. 더 아
환과 말을 하고 싶지만 지금 그녀에게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소협은 검후선배와 어떤 관계지요?'
어리둥절한 아환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한 그의 귓가에 계속해서 들어오
는 전음.
'검후선배의 제자인가요?'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파악하지 못하였지만 아환은 그 음성에 적의가 없음을 깨닫고 고
개를 미미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랬군요. 이 곳 형산에는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어요. 혹시, 정말 혹시 소협이 살아나면 한
가지 저의 부탁을 들어주길 바래요.'
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채 파악하지 못하는 아환이지만 봉황성모의 음성에 간절함
이 묻어나고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에 가득담긴 애타는 심정이 느껴지자 고개를 끄덕였다.
'검후선배께서 재출도하셔샤 해요. 그 분만이..그 분만이 이 난세를 해결하실 수 있어요. 제
발 그 분께 강호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드려주세요. 제발..'
"..."
'하나 더, 다음에 혹 다음에 절 보게되면 그리고 저보다 고강한 절예를 터득할 수 있으면
절 죽여주세요.'
"무슨.."
"봉황선경기!"
펑..
"크억.."
"봉황탄!"
아환의 당혹한 음성으로 반문을 하려할 때 봉황성모가 재빨리 양수를 떨쳐내어 강력한 장
력으로 아환을 가격하고 허공에 떠오르게 한후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다 싶더니 검지로 동
그란 물체를 퉁겨냈다. 이제까지 아환을 밀어내는 그러한 격공장이 아닌 살수라 할 수 있는
강맹한 장력에 아환은 피를 토하며 물러서다 이어서 날아오는 물체에 좌측 복부를 가격당하
였다.
'암기.'
아랫배쪽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그만큼 피를 흘렸는데도 아직 나올 피가 있었던지
이제 어슴프레한 빛이 스며드는 야산의 허공에 붉은 안개가 서렸다. 미처 손쓸새도 없이 아
환은 일방적으로 봉황성모의 공세에 격중당해 튕겨지다 아득한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세우
려 하였는데 문득 발밑이 허전함을 느꼈다. 발에 닿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절벽끝에 놓
였던 아환은 결국 절벽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아악.."
굵은 사내의 비명이 여운을 남긴채 절벽 아래로 스며들어갔다.
'꼭, 반드시 살아나기를..'
아환이 단애로 떨어진 직후 옷자락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두 인형이 하늘에서 봉황성모의
뒤쪽으로 내려섰다. 초절한 경신법으로 땅에 내려선 인물들, 앞선 한명은 얼굴에 금혈빛의
주작이 그려진 묵광의 면구를 쓰고 있어 코밑부분만 드러나 있었고 다른 하나는 오십대 초
반으로 보이는 강인한 인상을 보이는 사내였다.
"열락원주(熱樂院主) 초예군이 주작왕저하를 뵈옵니다."
봉황성모는 둘중 앞에 내려선 인물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부복을 하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였다. 출렁이는 머릿결이 물결치며 봉황성모의 숙여진 어깨로 스미듯이 내려앉았다. 천
하의 봉황성모가 고개를 숙이는 인물. 주작왕이라 불려진 자는 혈광이 이글거리는 시선을
들어 금방 아환이 떨어져 내린 단애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길을 단
애에서 떼지 않고 주작왕은 입을 열었다.
"성모. 죽였소?"
"틀림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봉황경력에 봉황탄까지 확인으로 쏘아냈으니 결코 살아남지 못
할 것입니다."
"그렇지. 봉황탄에 맞았으니 살아남을 리 없겠지. 성모의 상태를 보아하니 들어온 보고보다
훨씬 고강한 놈인 것 같소. 그런데 저 놈은 어디 출신이지? 대체 어떤 문파에서 저 나이에
저토록 강한 놈을 키워낼 수 있을까? 성모, 저 놈의 무공의 연원을 아시오?"
"저도 처음 보는 무예인지라 무어라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흐음..처음 보고가 올라온 것도 그렇고.."
그때, 또 다른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장내에 공중제비를 하면서 다섯 인형이 동시에
착지를 하였다. 역시 검은 복면차림의 사람들, 얼마 전 제갈수란을 뒤쫓아 달려가던 다섯이
었다. 한명이 앞에 서고 나머지 넷을 뒤에 일렬로 선후 일제히 부복을 하였다.
"주작왕 저하를 뵈옵니다."
"어찌 되었는가?"
"죄를 청하옵니다. 속하들이 불민하여 저하의 분부를 이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벌을 내려주십
시오."
맨앞에 부복하여 있던 사내가 우두머리인가 보았다. 제갈수란을 잡지 못하였는 듯 싶었다.
응당 그녀를 추적하였고 격살이 목적이었다면 무언가 증표를 가져왔을터 그러지 못하고 죄
를 청하는 것이 실패를 하였음에 틀림없었다.
"경과를 보고하라."
주작왕 옆에 있던 강직한 인상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암혈원 휘하 속하들은 명을 받들어 제갈수란을 추적하였습니다. 처음에 상당한 거리가 있
었지만 곧 간격을 좁히려는 찰나 한 괴인이 나타나서 일을 방해하였습니다.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속하들을 막아섰는데 그 괴인의 무예가 괴이하고 일정의 경지에 올라 있어 결
국에는 제갈수란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속하들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괴인? 그 괴인의 인상이 어떠했는가?"
"야밤이고 복면을 한지라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괴인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머리카락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옵니다."
"머리카락이 없다? 그럼 중이란 말이냐?"
"미처 정리가 되기 전에 그 괴인이 도주를 하여서 속하들은 더 이상 알아낼 수 없었습니
다."
"도주? 어떤 경신법이더냐?"
"그게.."
"계속 하거라."
"그것이..그 괴인은 그냥 갑자기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꺼지듯 사라져 버려?"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틀림없이 그렇게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속하들이 전 신경을 집중하
여 추적하려 하였으나 전혀 감지하지 못해내고 이렇게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 네 놈들이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니 거짓을 아뢰는 게 아니더냐?"
"감히 어찌 속하들이 그런 가식을 보고 드리겠습니까?"
"그래도 이 놈들이!"
"마화원주."
"예. 저하."
"되었네. 그만하게."
"예. 저하."
"듣자하니 저들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 같네. 일단 여기의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마
화원주는 이 들과 함께 형산으로 가게."
"복명!"
무릎을 꿇고 손을 앞으로 모은다음 예를 취한 뒤의 다섯 사람에게 눈짓을 하였다.
"가자!"
허공으로 떠오르는 여섯 신형.
"성모, 그동안 잘 계시었소?"
"예. 저하!"
"어허. 아직 무릎을 꿇고 있구만. 어서 일어나시오."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봉황성모가 예를 취한 후 몸을 일으키자 주작왕이 봉황성모쪽으로 다가왔다. 봉황성모는
가까이 바로 옆까지 온 주작왕을 보았다. 그러자 그 면구 속에 번들거리는 욕정으로 빛나는
두 눈이 보였다.
움찔..
봉황성모의 전신이 작게 흔들렸다. 주작왕의 한손이 거침없이 찢겨진 봉황성모의 앞가슴쪽
에 닿았다. 피부에 밀착되는 검은 장갑을 착용한 손이 가볍게 봉황성모의 젖가슴을 주물러
대었다. 사내의 손이 자신의 수치스럽고 소중한 부위에 와닿았는데도 봉황성모의 반응은 별
다른 것이 없었다.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그 눈 깊은 곳에서는
치욕이 묻어나지만 그와는 이율배반적인 열기가 서서히 번져나가는 것이 착각일까?
"계집! 여전히 탱탱한 젖퉁일 가지고 있구나."
주작왕의 음색이 바뀌었다. 위엄과 정중한 예의가 담긴 태도와 음성이 아닌 시정잡배들 같
은 저속한 단어와 끈적한 색의 목소리로 변하였다. 주작왕의 검은 손이 봉황성모의 유방을
쥐었다 놨다 하더니 다른 한 손을 밑으로 보내 봉황성모의 두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크크크..젖었군. 과연..과연.."
봉황성모의 아래, 두다리가 갈라지는 부위의 바로 윗부분의 옷가지가 언제부터였는지는 몰
라도 홍건히 젖어 축축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젖어 있었다. 사내, 주작왕의 거친 손이 쓰다듬
듯 봉황성모의 아랫도리를 어루만졌다. 이런 일에 익숙한 사내의 손이 슬쩍 주위를 쓰다듬
다가 엄지와 검지로 소음순이 모이는 부분의 돌기를 약하게 쥐기도 하였다가 손가락으로 쓸
듯 자극을 가하였다. 그럴때마다 여체는 고개를 젖히고 입술을 벌리며 달뜬 숨결을 내뱉었
다.
"하아..하윽.."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 사내가 갑자기 봉황성모의 아래를 쓰다듬고 있는 손을 빠르게 낚아
채듯 손을 당겼다.
찌이잇.
날카롭게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봉황성모의 흑의의 일부분이 찢겨나갔다. 아래를
쓰다듬고 있던 손이니 찢겨나간 부위야 당연히 아래부위, 사타구니를 가리고 있던 쪽의 옷
이 동그랗게 뜯겨졌다. 그러자 완연히 노출되는 여체의 비소, 현 무림에서 가장 성스러운 여
인의 음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밀조밀하게 살의 주름이 잡혀져 있고 투명한 애액이 남실대고 있는 봉황성모의 비처, 적
당히 우거진 음모들은 짙은 자주빛으로 물들어 있는 봉황성모의 속살들을 보일 듯 말 듯 감
추고 있었다. 유백색의 뽀얀 살결을 테두리로 하고 중심에만 거무스름한 숲지가 놓여있는
듯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학."
봉황성모의 고개가 뒤로 크게 젖혀졌다. 사내의 손이 봉황성모의 아랫쪽으로 들어왔다. 슬
슬 털을 고르듯이 비소 위를 쓸다가 조금 손을 더 내려 봉황성모의 비처에 손바닥을 마주
대었다. 여체의 옥문이 뿜어내는 회음의 열기가 사내의 손을 통하여 전달이 되어왔다. 비처
를 덮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사내의 손가락 중 하나가 문득 자취를 감추었다.
"으음"
봉황성모의 아미가 곱게 안쪽으로 모아졌다. 무언가가 자신의 체내로 들어왔다. 주작왕은
중지를 봉황성모의 질 안으로 집어넣은 후 이리 저리 돌려 보았다.
"크흐흐..아이를 낳은 계집치고는 꽤 탄력이 좋단 말이야."
아이? 봉황성모가 낳은 아이? 어쨌든 아이란 말이 들리자 봉황성모의 가녀린 육체가 일시
에 경직이 되었다. 그러면서 주작왕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 서린 감정은 비애와 치욕스러
움. 자신을 금제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인 자신의 소생을 생각하자 전신이 싸늘히 식어갔다.
자신을 통제하는 그 아이란 바로 봉황성모를 이렇게 만든 악마들의 씨였다. 자신을 제압한
그 악마들은 몇가지 금제를 중복해서 설정하였다. 그로 인하여 봉황성모가 변심을 한 조그
마한 여지도 남겨놓지 않았다. 또 그 금제 중의 하나로 인하여 자신의 육체가 이토록 저주
스럽게 변하였다. 특정 사내들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끝없이 열락을 추구하도록 변질
되어버린 이 더러운 몸.
주작왕이라는 사내는 봉황성모의 몸이 딱딱히 굳자 괴소를 흘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린 후
손을 좀 더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두 손가락을 각각 하나씩의 구멍에 집어 넣었다.
"으윽.."
나직한 신음성이 바알간 입술을 헤집고 나왔다. 경직되었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사내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태로 바뀌어져 있었다. 도화빛의 안색은 청조하고 우아
한 인상이 봉황성모의 분위기를 묘하게 변화시켜 극도의 색기를 발산시켰다.
주작왕의 지금 엄지는 여체의 질 속, 그리고 중지는 배설의 공혈속에 잠겨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주작왕은 봉황성모의 항문을 좋아했다. 여체의 두 구멍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은채 손
가락을 움직이던 주작왕은 엄지와 중지를 마주대어 보았다.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두 손가
락이 맞닿은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을 비벼보았다.
"아아아..흐윽.."
봉황성모의 몸이 뒤로 활처럼 휘어졌다. 고개가 뒤로 크게 젖혀지면서 머릿결이 춤을 추듯
대기중에 흩날렸다. 사내가 미묘하게 손가락을 놀릴때마다 고통과 쾌감이 밀려 들어왔다. 한
참을 그렇게 봉황성모의 밑부분을 애무하던 사내가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어디 혓바닥 놀림은 좀 늘었나 볼까? 크크크."
수많은 경험으로 주작왕의 말뜻을 알 수 있는 봉황성모는 무릎을 꿇고 주작왕 앞으로 무릎
걸음으로 걸어갔다. 딱 얼굴의 높이가 주작왕의 아랫도리에 맞춘 봉황성모는 익숙한 손놀림
으로 사내의 바지를 벗겨내었다. 그러자 그 속에서 빳빳히 굳은 장대한 사내의 양물이 위용
을 드러내었다. 봉황성모는 열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잠시 그 육봉을 보더니 고운 손을 들어
가볍게 그 살막대기를 쓰다듬었다. 뒤이어 그 손을 쫓은 작은 입술이 검붉은 고깃덩이를 입
안에 머금었다.
"으음.."
사내의 입에서 탁한 신음이 배어나왔다. 강렬한 자극이 아래에서 전달되어 올라왔다. 단단
해진 귀두에 보드라운 살점이 와닿은 것이 느껴졌다. 그 살점은 귀두의 끝을 살살 핥아대다
가 뾰족히 세워 귀두 앞의 구멍을 파고들 듯 집중적인 공격을 하였다. 그러다 육봉의 뿌리
부위까지 타고 내려가며 살짝 입을 아물다 열었다 하면서 설육을 이용하여 사내의 아랫도리
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사내는 한손으로 봉황성모의 칠흑같이 검고 비단같이 윤기가 흐르는 머릿결을 움켜쥐고는
남근에서 퍼져나가는 쾌락을 즐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쾌감, 상대가
다름아닌 천하의 봉황성모라는 것.
주작왕은 봉황성모의 머릿채를 잡고 뒤로 당겼다. 봉황성모의 입이 주작왕의 검붉은 살덩
이에서 떨어졌다. 작은 실 같은 타액의 선이 봉황성모의 입과 발기된 남성을 잇고 있었다.
"그 자세로.."
봉황성모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서서 다리를 어깨 넓이의 약 두배가량 벌리
고 허리를 굽혔다. 양손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고 무릎을 꼿꼿이 폈다. 수치스러운 자세였지
만 항상 그래왔던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훤히 봉황성모의 비처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질펀한 애액이 흘러
한 두방울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주작왕은 발을 옮겨 봉황성모의 뒤로 다가선
다 싶더니, 푸욱! 일순간에 남근을 여체의 비소에 집어넣었다.
"흐읍"
주작왕이라 불리우는 작자는 바지만 벗은채, 그리고 봉황성모는 동그랗게 그 비소부위만
뜯겨나간 옷을 입고 교접을 하고 있었다. 주작왕의 양물이 봉황성모의 비소를 출입하면서
물기어린 기성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두 손으로 봉황성모의 양 둔부를 부여잡고는 연신 앞
으로 허리를 밀어붙이는 주작왕의 힘에 봉황성모의 가녀린 육체가 출렁였다.
얼마간을 그렇게 비처에 남근을 담그고 있던 주작왕은 여체의 애액이 잔뜩 묻어있는 양물
은 봉황성모의 몸에서 이탈시켰다. 그리고는 조금 위로 치켜들더니 다시금 여체의 몸에 함
몰시켜갔다.
"아악."
뾰족한 비명, 그것도 곧 열락의 쾌감으로 바뀌리라.
[ 창작] 수라기(獸羅記) 63번째 올림 창작야설
(7)
막 어둠을 걷어버리고 저 먼 동쪽에서 휘황환 광원이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비죽 비죽
솟은 봉우리들 사이로 살짝 고개만 내밀고 있었지만 그 정도도 충분하다는 듯이 호남성에
자리 잡은 형산의 한 작은 봉우리를 선명히 밝혀주었다.
단애, 그 수십장의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가파르게 둔각을 이루며 위태롭게 자리잡
았고 그 단애 위 한 여린 인형이 서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30대
초 중반의 여인, 검은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결이 매끄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을 상아빛 고운
어깨의 피부위로 늘어뜨리고 깊고 시원한 눈망울로 오똑한 콧날에 부서지는 새벽의 햇살을
쳐다보았다. 적당한 두께의 바알간 입술은 가볍게 다물어져 있음에 이 여인의 고고함을 색
다르게 표현하였다.
뭔가가 어색해 보인다 싶다. 이 외진 곳에 홀로 서 있음에도 여인은 머리칼이 늘어선 곳에
아무런 의복가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하늘거리는 머릿결을 칠흑의 비단인양 어깨와 가슴
부위를 감싸 내려뜨리고 여인은 그 외의 상반신을 그대로 드러낸채 곳곳히 서있었다. 깊어
보이는 눈빛으로 보아 실성한 여인은 아닌 듯 하였다.
봉황성모, 이 여인은 봉황성모였다. 간밤에 주작왕이라 불리우는 자에게 아랫도리를 개방한
그 신주오존의 수좌라 하는 봉황성모였다. 지난 밤, 주작왕은 봉황성모의 항문을 즐긴 후에
도 두어 차례 더 봉황성모의 하궁을 살덩이로 메꾸었었다. 질펀한 정액이 아래를 가득 메우
면서 끊임없이 열락의 교성을 터뜨렸던 간밤의 요부의 모습은 간데없고 지금 여기 서있는
봉황성모는 옷차림만을 제대로 갖추었다면 허리를 숙여 비처를 사내 앞에 벌린 그 여자와
동일인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느낌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와는 달리 아랫도리 훵하니 뚫어진 비처부위의 옷자락은 봉황성모의
짙은 자주빛의 속살을 환히 보여주었다. 그 곳에는 성행위로 인하여 붉게 충혈된 속살뿐만
아니라 탁한 유백색의 액체가 질척하게 묻고 또 흐르고 있어 격한 교접의 흔적을 여실히 보
여주었다. 점액질의 액체가 작은 구멍에서 새어나올 때 끈끈한 선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지
금 봉항성모의 아래에서 실같이 흘러나온 정액은 바닥에 이미 조금 고여있고 계속 가느다란
실을 늘어뜨린 것처엄 봉황성모의 음부에서 조금씩 배어나왔다. 그것을 처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망연자실하여 터오는 동을 쳐다보는 봉황성모의 심정은 과연 무엇일까?
"살아나서..반드시 다시 살아나서 이 모진 목숨을 끊어주기를.."
비릿한 정액의 느낌이 목구멍에서 맴을 도는 가운데 독백처럼 입술을 헤집고 새어나오고
끝을 맺지 못하고 말을 흐트러 뜨리는 봉황성모의 눈가에 습기가 보였다.
휘잉..
때마침 산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결에 마침 봉황성모의 가슴어림을 덮고 있던 검은 머릿
결이 출렁이며 뒤로 흐트러지면서 떠올랐다. 그러자 그대로 드러나는 봉황성모의 탐스러운
두 유방. 허나 단순히 그 두 살덩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살덩이 가운데 부분 진홍색의
그림이 보였다. 화려하게 두 젖가슴을 날개에 끼듯이 정교하세 그려져 있는 봉황의 형상이
었다. 봉황의 모습이지만 주작이라 할 수 없는 그림, 머리부분은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만
같은 새의 그것이었으나 기묘하게도 가슴어림부터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발가벗은
여체의 요기로운 육체를 가진, 그럼으로서 더욱 색감이 짙게 풍겨나오는 문신이었다. 여체의
곳곳이 실물처럼 세밀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 문신속의 여체가 또하나의 사람인양 보였다.
유방이나 아랫배, 그리고 비처와 음모까지 정밀하게 그려진 것이 결코 일반 여성이라면 스
스로의 의사로 받아들일 그럴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문신은 누군가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새겨졌다는 것인데..
"봉황은 이대로 진흙탕에 뒹굴어야 하는가?"
답답하였다. 진작 자신의 혼자의 몸이라면 자진을 했어도 수십번은 더했을 것이다. 허나 봉
황성모 하나가 아닌 봉황곡 전체가 그 진흙에 잠겨 있는 것을..게다가 지금은 어디 있는 지
도 모르는 혈육 하나가 봉황성모를 옭아매고 있었다.
"휴우.."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탄식이 배어나왔다. 이제 다시 또 다른 이에게 가야하는 입장, 또 다
른 남자의 앞에서 옷을 벗고 가랑이를 벌려야 하기에 나락의 저 끝에서 올라오는 듯한 한숨
이 흘러나왔다.
"청룡왕.."
자신의 배에 오른 여섯 남자 중의 하나. 어쩌면 봉황성모의 뱃속에서 나온 여식의 생부일
수도 있는 사내에게로 가기위하여 봉황성모는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중원이 술렁였다. 그동안 조용하였던 강호가 뒤흔들릴만한 큰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
다. 게다가 연이은 흉년과 원나라 황실의 내부가 권력다툼과 여러 문제로 인하여 혼란스러
워지자 각지에서 궁핍한 민초들이 들고 일어난 민란들이 창궐하였다.
무림에서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한 세력의 윤곽이 뚜렷해지자 그 세력, 흑천의 성격을 두고
갑론을박이 들끓었다. 한족의 부흥을 앞세워 반원을 기치로 암중에서 활약하던 흑천이라는
무시 못할 거대한 문파가 송(宋)의 조광윤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강호에 나서자 중원 전역의
문파에서는 흑천에 대하여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흑천이라는 방파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
하였다. 들려오는 풍문에 의하면 흑천은 칠왕이나 오존 중의 고인이 뜻을 세워 결성한 단체
라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안휘성의 운학문이나 감숙성의 철궁보등 일부 문파들
은 발빠르게 흑천을 지지하면서 흑천의 산하로 들어갔다.
그렇게 운중의 세력이었던 흑천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무림의 판도에 균열이 가자 비밀리에
사정과 오가를 비롯한 구패와 오파일방이 비밀리에 회동을 하면서 혹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하여 모종의 힘을 결집 중이라는 말까지 들리면서 무림은 서서히 팽팽한 상황으로 접어들
었다.
거기에 그동안 잠잠히 있던 천외의 세력들이 고개를 들려 하였다. 이미 천궁의 인물이 칠
룡 중의 하나인 곤륜제일룡 수가위와 동보를 하였음이 확인되었고 그와 함께 강호의 무인들
에게 영원한 공포로 남아 있는 전설, 마교가 활동을 개시하고 있음이 개방의 제자들의 정보
망에 잡혔다.
마교(魔敎).
흔히들 명교 혹은 십만마교라 칭하기도 하는 패공과 마예의 집합소. 한번씩 무림에 등장할
때마다 무림에는 엄청난 피의 바람이 몰아쳐 강호의 원로들은 마교라는 이름을 어쩌다 듣기
라도 하면 경직이 될 정도로 위험한 힘을 가진 세력이었다. 수많은 고수와 조직을 가진 어
쩌면 고금 무림에서 으뜸이라 평함을 받을 초강 문파인 마교. 토착의 세력에 서역에서 건너
온 배화교가 융합이 되어 탄생한 마교는 거의 천년에 육박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 소림과
버금가는 전통과 각종 무예를 보유하고 있었다. 현 교주는 천마황이라는 칠왕 중의 하나였
고 오십여년전 검후와의 비무후 패퇴하여 폐관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었다.
강남의 무림에서는 난데 없이 혜성처럼 등장한 한 청년고수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었다.
이름이 주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커다란 체구의 청년무인은 사화지연에 호화사로 선정
이 되어 칠룡 중 패왕권을 꺾고 남궁비와 견주어 손색이 없는 무위를 떨쳐 철혈거웅(鐵血巨
熊)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철혈거웅 주환은 사문이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사화 중 세명의
여인의 호화사로 선정이 됨에 따라 호사가들의 입에 묘한 풍설을 지어내게 하기도 한 장본
인이었다. 그외 여러 사람들이 무림에 뜨고 사라졌다. 실종이 된 몇몇이 칠룡 중의 고수이기
에 그 실종자를 찾는 일에 소속 문파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태산에서 일어난 거대한 산불도 이야깃꾼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태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
의 하나인 개려봉이라는 곳에서 난데 없는 크나큰 폭음과 함께 발생한 불은 산 하나를 홀랑
다 태울 정도로 거세게 일어나 산 하나를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일설에는 산불이 진화된 후
병장기를 휴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태산에 있었다고 하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타버린 수많은 동물들의 사체로 한동안 태산에는 고기구워지는 냄새가 진동
을 하였다 했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64번째 올림 창작야설
3 부 유희(遊戱)
1 장 사신(死神)
(1)
"크허억!"
"끄으.."
"으헉!"
"#$$%#@%"
쉴새 없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비명소리!
창! 카캉! 퍽! 츠잇..
날카로운 금속성에 피육이 짓이겨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것도 한 두명이 아닌 수십 수
백의 인간들이 고통과 광분에 젖어 내질러대기 때문에 가히 지옥의 한 귀퉁이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이 곳.
"공격하라! 저 야만인 놈들을 몰살시켜라!"
갈기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살집이 적당히 잘 올라있는 명마계보에 오름직한 말을 탄 육
척이 넘는 거한이 참마도를 휘두르며 고함을 쳤다. 혼잡한 전장을 쩌렁 쩌렁하게 울리며 퍼
져나가는 거한의 공격명령에 사기가 북돋아지는지 그 사내와 엇비슷한 복장을 갖춘 수십의
사내들이 손에 병장기를 꽉 움켜쥐고는 앞에 대적하고 있는 그들의 적을 향해 돌진해 들어
갔다.
"끄으.."
"아악! 어머니.."
"#%^*#"
"[email protected]$!$"
전장에서 들려오는 언어는 비단 한어만이 아니었다. 중원에서는 듣기 어려운 전혀 낯설은
말들이 한족의 사내들의 칼이 목을 가르고 창에 가슴이 꿰뚫리면서 터져나갔다.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한어가 반이 좀 안되었고 이민족의 언어가 한어보다 조금 더 들려왔다. 그럼에
도 참마도를 휘두르는 거한과 같은 편쪽의 사내들은 돌진해 나가던 기세가 주춤하였고 이
내 사람의 머릿수에 밀려 뒤로 주춤 주춤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흑룡대는 전열을 정비하라! 적들은 지쳤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적들은 섬멸하라!"
거한의 사내의 입에서 다시금 고함이 터져나왔다. 정말 지쳐보이는 것은 그들이 상대하는
이민족 전사들보다는 이쪽 사내들이었다. 인원으로는 세배를 훌쩍 뛰어넘는데다가 그들의
눈에 담겨있는 형형한 흉광은 칼을 나눠보기도 전에 기가 질리게 하였다. 게다가 이 곳은
그들, 이민족의 삶의 터전. 아무래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훈련이 잘된 병사들이고
조직적인 싸움에 익숙한다고 하더라도 일방백의 무예를 지닌 자들도 아닌 직접 칼로 골육을
베어야 하는 전투이기에 숫자 싸움에 밀릴 경우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참마도를 휘두르는 거무스름한 거한의 눈빛에 점차 절망감이 스며들었다. 그가 지금껏 벤
목숨이 수십이지만 적들은 그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현저하게 수
가 적어지는 아군.
그때였다.
"전군 공격!"
"우와아아!"
"와아아!"
동쪽에서 들려오는 함성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달려나오는 수십의 인영들..맨앞
에 서있는 칠척이 넘어보이는 구리빛 피부가 잘 그을린 사내가 철퇴를 흔들면서 전력으로
달려나왔다.
* * *
"아군의 피해상황은?"
"사망자 사십 육, 부상자 칠십 이명입니다. 장군님."
"사십 육? 사십 육이라..흐음..부상자는 어떤가?"
"대부분 중상이라 전력에 포함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어렵군. 어려워. 흐음.."
"..."
한 내실. 사방과 천정의 벽은 나무를 얽어서 만들고 진흙으로 틈을 막은 가건물 형태의 방
이었다. 내실 안에는 지금 두 명의 사내, 한명은 경갑주를 입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평상의
를 걸치고 있어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중 갑주의 사내가 앉아 있는 장년의 사내에게
보고를 드리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제 흑룡대의 인원이 총 몇이나 남았나?"
"스물 일곱입니다. 장군님."
"스물 일곱? 그것 밖에 안남았단 말인가? 물경 백오십을 넘나들던 그 많은 인원이?"
"연이은 전투에 계속 희생된 후 충원이 없는 관계로 병력을 지원하지 못하였습니다."
"끄으음.."
앓는 소리가 잘 정돈된 수염으로 가려진 입술을 헤집고 삐져나왔다.
쾅!
머리를 짚고는 안색을 어둡게 하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급기야는 앞의 탁자를 내려쳤
다.
"도대체 보내준다는 인원은 어떻게 된거야! 전령이 온지 두달이야, 두달! 그동안 매일 십여
명씩 죽어나가는데 언제 충원해준다는 거야!"
노기로 붉게 얼굴을 물들이며 장군이라는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흑룡대라함은 일반적인
병제를 나눈 후 각각의 병대에 붙인 일종의 별호인 모양이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는가?"
"장군님."
"도대체 우리 병사가 얼마나 남았냐는 말일세!"
"흑룡대 스물 일곱에 황갈대 일백 셋, 사령대 여든 아홉 그리고 본대 이백 열 하나 입니다.
본대에 제반 인원을 포함시켰습니다. 부상인원은 일백 서른 일곱입니다."
"...겨우 그 병력 밖에 남지 않았나? 천 삼백을 넘던 그 많은 병사들이 이제 오백 정도밖에
남지 않았단 말인가? 그 병사들가지고 이 곳을 지키란 말인가? 이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장군은 가슴어림까지 내려온 수염을 부르르 떨어대었다. 말그대로 노
기충천!
"진정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에 대한 말을 들었습니다. 장군님."
"말? 어떤 말? 인원이 보충된다던가? 그런 전령이 왔나?"
"그게 아닙니다. 저도 이번 전투에 참가를 하지 못했지만 흑룡대의 병사 중 하나가 이번 전
투에 지원을 나온 이에게 들었다 합니다."
"무슨 말을 들었다 하는가?"
"백호장 하나와 그에 따른 병대가 이쪽으로 배속된다 합니다."
"십호장? 겨우 십호장 하나? 아니, 그 정도 가지고 자네가 그런 말을 하는가? 정 백호?"
"그렇지만 그 병대는 일개 병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병사들이라 합니다."
"그래? 설마 장 익덕이 다시 살아나 지원을 온다고 하던가?"
다소 냉소적으로 장군이라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기껏 해야 조금 오래 살아남은 병사 하
나를 십호장에 올라 앉혀 이리로 보낸 것이겠지. 멍청이들. 지금 이 곳이 얼마나 위급한지
모른단 말인가?"
"익덕 장비 장군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와 버금가는 장수라 할 수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혹시 사신(死神)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사신? 죽음의 신? 사신이라..설마 복호장군 휘하의 사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부정의 말을 하면서도 간절한 느낌이 사이 사이에 담겨 나왔다. 그 설마를 진실로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일게다. 그런 그 장군의 절실한 심정이 하늘에 닿았을까?
"바로 그 입니다. 그 사신이라 불리우는 적 십호가 들어있는 부대가 이쪽에 합류한다고 합
니다."
"뭣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장군, 그의 안면은 경악과 놀라움에 기대와 열망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지난 번 감 천호을 만났을 때 그런 말을 전혀 들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감 천호가 사신을 다른 부대로 전출시킨다는 말인가? 복호가 그를 얼마나 아끼는데
그에 대한 칭찬과 감탄을 얼마나 해대었는데 이리로 올 수 있나?"
"그게 말입니다. 말씀드리기 송구하옵니다만 복호장군 감 천호장군님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닌 것으로 들었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보게. 도대체 뭔 일이 벌어졌나?"
"오늘 보고드릴 사항 중 하나였습니다. 다름아닌 복호장군께서 전사를 하셨다 합니다."
"전사? 어떻게 그가? 그렇게 용맹스럽고 그 휘하의 장수들이 건재한데 어찌 그가 죽음을 당
할 수 있지? 자세히 말해 보게."
"얼마 전 복호장군께서는 이 옆 운봉산 어귀의 나호족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고 병력을 이동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는지 나호족의 매복을 하고 있어 협곡에서 기습을 받고는 당
황한 상태에서 계속되는 공격에 그만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기습? 그렇다면 사신을 비롯 그 많은 용맹한 장졸들이 있는데도 그들을 못막았다고 하던
가?"
"그게 사신이 속해 있던 부대는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뒤이어 합류를 할 계획인지라 미처
복호장군과 행동을 같이 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렇게 되었구만. 그래, 그 병력의 피해는 얼마나 된다 하던가?"
"물경 오백에 가까운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합니다."
"뭐라! 오백이라고? 그렇게나 많은 병사들이 죽었단 말인가?"
"예. 장군님."
"그렇다면 큰일이 아닌가? 복호장군이라면 이 곳 운남을 지키는 큰 축 중의 하나가 아닌가?
이곳 남만국경 수비군에 큰 구멍이 뚫렸다는 말인데.."
"그래서 그 복호장군의 병력이 우리 부대에 합류를 하고 그만큼 경계 영역이 확대된다고 들
었습니다."
"그렇겠지. 그렇겠지."
"서쪽으로는 운봉산까지가 본 군역이 될 듯 싶습니다."
"으음."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운봉산에는 나호족이 있습니다."
"알고 있네."
장군의 대답이 침중해지자 정 백호장은 입을 다물고 장군의 앞에 반듯이 선채 이어질 장군
의 말을 기다렸다.
"나가보게."
좌수를 들어 이마를 짚는 장군, 무령장군 강 천호장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심중히 안색
이 굳어지는 것을 보다 정 백호는 강 천호장의 말에 군의 예를 취한 후 내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뒤로 장군의 나직한 독백이 들려왔다.
"나호족이라..사신, 그가 온단 말이지.그가.."
* * *
"아이구..아이구.."
"아욱. 이 씨팔, 살살 좀 해!"
"주둥이는 멀쩡한 가 보네, 정작 칼을 맞아야 할데는 안 맞고. 에그.."
"야이! 왕팔자식아! 네가 한번 이렇게 찍혀봐! 그나마 나니까 이 정도지. 너면 벌써 염라대
왕면전에서 줄서기하고 있을게다. 아구구.."
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 동료들이 조잡한 창약을 발라줄 때 느껴지는 아픔에 투덜거리
는 욕설등이 막사안을 가득 메웠다.
얼마 전에 벌어진 전투로 인하여 부상을 당한 병사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무령
장군 휘하 흑룡대라는 군 소속의 인물들은 그들이 거하던 막사로 돌아와 다친 부위를 돌보
고 있었다. 이 들은 부상자의 명단에 올라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전쟁에서 부상자라
함은 적어도 팔이나 다리 한짝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상세가 아니면 다시 본 소속 부대로
돌아와 차후에 대비하여야 하기에 그나마 경상이라 판단되는 자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간에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곤 하였다.
의원이라 해봤자 중상자들에게 매달려 있지 이런 일개 하급 병사의 창상이나 열상등에 신
경을 미칠 경황이 없기에 병졸들은 이렇게 나마 스스로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어이, 전칠은 어디 갔나? 안보이네."
"뒤졌어."
"전칠이 죽었다고? 그 까불대던 친구가? 이런..이런 빌어먹을 내돈 두냥은 어쩌고..이 개가
뜯어먹을 놈. 지옥에 쫓아가야 겠네."
아마 전칠이라는 동료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줬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전칠은 전사하였
고 그로 인하여 이 사내는 투덜거리는게 보였다. 허나, 자세히 보면 그 투덜거리는 사내의
눈 속에 담겨 있는 분노와 슬픔은 비단 그 전칠이란 동료가 돈을 안갚은 것때문만은 아니었
다.
"이봐, 장가야."
"왜?"
"이제 우리도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네. 이번에 우리 흑룡대도 거의 다 날라갔고. 곧 그 삭
두족 놈들이 들이닥칠텐데 그러면 끝나지 않겠어?"
"이 빌어먹을 자라자식! 꼭 그 혓바닥을 그렇게 놀려야지. 썅! 하긴 그말도 틀린 것은 아니
지. 인원도 없고. 있는 놈은 이런 비실비실한 놈들뿐이니 어디 배겨나겠어? 묘자리는 어디
잘 봐뒀냐?"
"씨팔, 무슨 돈이 있어서 그 돈이 있으면 춘월이년 궁둥이나 한번 더 두드리겠다."
"아직도 춘월이냐? 그 엉덩이만 펑퍼짐한게 뭐가 그리 좋다고.."
"네 놈이 계집의 참맛을 몰라서 그러는게야. 자고로 계집이란 엉덩이에 살집이 두툼하게 잡
혀야 맛이 있지."
"지랄 말고 어디 팔 한번 움직여봐라."
툭.
"악! 이 새끼가. 어디, 좀 낫네."
"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명의라 그렇단다."
"명의? 지랄하고 자빠졌네. 네까짓게 명의면 난 조자룡이다. 이 놈아!"
"이런..크핫핫하.."
"하하하.."
크게 둘은 박장대소를 하였다. 왠지 공허한 느낌. 이 둘뿐 아니라 훵하니 인원이 비어있는
막사안에서 생기를 잃은 눈으로 멍하니 앉아있거나 눈을 감고 자리에 누워있는 몇몇 병사들
에게서는 사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스물이 넘는 인원이 자리를 잡고 있는 이곳 막사는
평소에는 백여명이 북적거려 자리가 좁다고 아우성치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 남아 있는
병사는 스물 일곱, 사분지일이 채 되지 않는 숫자다.
"장가야. 그 십호장 정말 대단하지 않냐?"
"누구?"
"그 사신인가 뭔가하는 그 십호장 말야."
"아! 사신!"
장가라 불리운 사내는 사신이란 말에 감탄사를 발하며 사신이란 이름을 되풀이하였다.
"정말 대단했지. 정말.."
중얼거리며 장가는 얼마전 삭두족(削頭族)과의 전투를 머리에 떠올렸다.
불과 이틀전, 흑룡대는 영역의 수색을 명받고 주변을 탐색하면서 군영으로부터 약 사십리
정도까지의 거리에 정탐을 나섰다. 흑룡대 전 인원이 출동하는 대대적인 수색이니만큼 세밀
한 계획을 세우고 점진적으로 진격을 하여 삭두족의 경계를 지나 일부 삭두족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워낙 많은 인원이 이동하고 있던지라 이는 주변의 여러 소수 부족을 포함하여 고
대로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삭두족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 지역의 패자라 할 수 있는
삭두족은 그들 휘하의 소수부족들의 병력을 포함 대대적인 인원으로 흑룡대를 막아 섰다.
처음에는 대화를 통하여 원만히 진행하려 하다 자신들이 아닌 타 민족을 멸시하는 한족의
버릇이 나왔고 이는 곳 싸움으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흑룡대의 조직적인 대응에 이민족들의
많은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지만 숫적 불리함은 얼마 있지 않아 전세를 역전시켰으
며 흑룡대는 점차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용맹스러운 흑룡대 병사들도 죽여도 죽여도 계속
이어지는 삭두족의 전사들에게 질려 힘을 잃었고 급기야는 일방적인 열세가 되었다.
바람앞에 등불같이 위태로왔던 순간, 그들이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그 무시
무시한 철퇴를 휘두르면서 달려왔다. 그의 손에 쥐어쥔 철퇴는 흔히 볼 수 있는 철퇴가 아
니었다. 그 체격만큼 거대한 철퇴, 물경 다섯자 정도에 끝에 달려있는 쇳덩이는 작은 어린애
머리통만 하였다. 그 철퇴가 한번 휘둘려질때마다 삭두족의 전사하나가 쓰러졌다. 그것도 아
예 짓이겨지듯이 정수리 부분이 목으로 파묻혀 들어갈 정도로 깊숙히 함몰되었고 피와 뇌수
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빠르고 강력했다.
마치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하늘에서 그에게 내려준 일인 것처엄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철퇴를 휘둘렀고 그 철퇴에 걸리는 피육을 부숴버렸다.
사신이라 불리우는 그가 전장에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그를 알아보는 삭두족의 전
사들이 공포의 빛을 보이면서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도주를 하였다. 순식간에 적들의 대오가
무너지고 기세가 꺾였다. 사신은 맨앞에 서서 쇳덩이를 쉴새 없이 쳐내었다. 비명이 질퍽한
늪지를 뒤흔들었다. 알아들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 비명과 다급한 소리들은 그 이민족들이
그 사신이라 불리우는 자들에게 얼마나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게 전투가 끝나고 장내가 정리되었다. 그때까지 사신은 철퇴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휘두른 철퇴에 맞아 죽은 이들만 수십명이었다. 시신의 원형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으깨어진
시체는 거의다 그가 죽였다 생각하면 되었다.
사신이 나타나서 철퇴를 휘두르자 응원군에 힘이 솟은 흑룡대 병사들은 전열을 추스려 반
격을 하였고 가까스로 삭두족을 퇴치할 수 있었다. 그후 한숨을 돌리려 할 때 그들은 비로
소 사신이라는 작자의 공포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저렇게 사람을 죽인 자들의 눈을 보면 대개 광기로 번들거리는 것이 거의 전부
였다. 사람의 피와 기름이 묻은 칼을 보면서 희번득거리고 퇴색한 눈에 인광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사신이라 불리우는 자는 틀렸다. 혼탁한 눈빛이 아닌 거짓말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
는 조금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그러한 동공을 보여주었다. 그런 눈을 하고서 철퇴를 날
려 인육을 으깨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사신'이라는 이름이 가져다 주는 공포는 컸
다. 그 이름을 알고 있는 부족들이나 원주민들은 사신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전투를 포기한다고 하였다.
흑룡대 병사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사신이란 이름을 귀동냥으로 듣고 조소를 보내는 자
들이 그가 나타나 그 무지막지한 쇠몽둥이를 휘두르자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하고 심지어 몇
몇 병사들은 그가 벌인 참혹한 광경에 오줌을 지리거나 눈을 까뒤집고 기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사신'이었기에 그가 적이었으면 그만큼 두려운 존재인 반면 아군이라면 그보
다 더 든든한 장수는 없으리라.
"그는 소문대로 무시무시하겠지?"
"그럴게야. 들리는 소문엔 키가 십척이나 되고 허벅지 하나가 왠만한 장정 몸통만 한다고
하네. 에휴~ 그가 우리 상관으로 오면 어쩌지?"
"이런 빌어먹을 놈. 끔찍한 말은.."
"참 너, 왕가놈도 대단하다. 그 많은 싸움을 해도 아직 멀쩡한 걸 보면.."
"정가야. 그런 말 말아라. 거진 삼년을 조그마한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남은 네 놈에 어찌 비
하겠느냐? 거기다 어디서 줏어들은 병법하며..너 여기 오기전에 뭐했냐?"
"뭐 하기는..그냥 농사나 지었지. 그런 네 놈은 어디서 한 두수 배운 모양이던데.."
"쓸데 없는 소리! 그건 그렇고 당분간 잠잠하겠지? 오늘 저녁은 향춘루나 들러야 겠다."
스리 슬쩍 왕가란 자가 말을 바꾸었다. 일순 눈에 당황한 기색이 담겼다 싶더니 이내 스러
지고 자연스레 말을 바꾸는 왕가, 그를 보는 정가 역시 눈을 빛냈지만 곧 무덤덤하게 바뀌
더니 이후 저녁에 있을 계집 생각으로 잡념을 날려버렸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65번째 올림 창작야설
(2)
"후우.."
적무환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손에 들고 있는 다섯자 가량의 철퇴를 아래로 내렸다. 손잡
이에서부터 점점 굵어져서 끝에 이르면 작은 아이 머리통만한 쇠뭉치가 달려 있고 그 쇠뭉
치에는 울퉁불퉁한 돌기가 수없이 솟아나 있었다. 일견하기에 기가 질릴만한 무지막지한 병
기인 철퇴, 적무환은 그 철퇴를 땅에 슬쩍 내려놓은 다음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기마세.
두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린다음 무릎을 굽히고 양 손을 허리춤으로 붙이더니 천천히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한발을 내딛고는 허리를 굽혀 상체를 앞으로 숙여 두 손을 엇갈리게
앞으로 내뻗었다. 주먹도, 그렇다고 손을 편 형태도 아닌 손가락만 굽혀 마치 호랑이의 앞발
을 연상케 하는 동작을 취했다. 화타오금세 였다.
장대한 체구의 적무환의 전신은 오랜 시간 수련을 했는지 땀으로 번들거렸다. 알몸의 상체
에 금방이라도 물기가 뚝뚝 흘러내릴 정도인 것으로 보아 꽤 힘을 기울인 것으로 보였다.
그런 적무환의 벗은 몸에는 땀과 근육외에 여러 흔적들이 보였다. 수많은 상처들이 흡사 거
미줄처럼 적무환의 상체를 뒤덥고 있었다. 세세한 작은 생채기부터 깊숙히 패인 상흔들이
문양을 그려놓은 듯 잘 발달된 근육위에 덧칠되어 있었다. 그 중 옆구리의 동그란 모양의
상흔은 꽤 심하였는지 오래된 흔적이지만 아직 그 부위에 움푹 들어간 자국을 남기고 있었
다.
하늘로 비상하려는 창룡의 형을 마지막으로 적무환은 신형을 멈추며 숨을 가다듬었다. 옆
에 놓여진 수건으로 상반신과 얼굴에 흐르고 있는 땀을 닦아내리고는 천천히 지식과 조식을
반복하며 내기를 순환하여 외기와 조화시켰다. 완전히 자신의 몸의 상태를 되찾은 것이 일
년 남짓되었다.
이년 전 적무환이 단애에서 추락하였을 때 그 절벽 밑으로 다행히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
었기에 적무환은 살아날 수 있었다. 만약 그 밑이 그냥 일반 땅이었으면 피육으로 된 적무
환의 몸은 아무리 외공으로 단련되었고 화경을 넘는 몸이라 할지라도 피떡이 되었을 것이었
다. 허나 적당한 깊이의 강물은 적무환의 몸을 강렬한 충격을 주었지만 받아주었고 심신이
크게 진탕된 상태였지만 적무환은 죽지 않고 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그 하천은 그
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흐름으로 적무환을 하류로 흘러 보내주었고 천재일우로 적무환
의 몸이 강가에 걸쳐졌으며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음양신단과 그 원류를 알 수 없는 기운으
로 인하여 적무환은 오래되지 않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절망, 적무환이 그당시 정신을 차렸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산산히 부서진 육체는 끊임없
이 고통을 호소하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던 적무환은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조
금씩 진기를 끌어올렸다. 완전히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던 것이 도움이 되었을까? 묻혀진
기억속의 무상의 도에 대한 깨달음이 적무환의 육체를 미약하나마 회복시키려는 기미가 있
었다.
그렇게 삼일가량을 적무환은 강가에 널부러져 산송장과 다름없는 지경에 놓여있었다. 삼일
이 지나고서야 적무환은 전력을 기울여 몸을 일으킬 수 있었고 그리고는 적무환은 혹 모를
추적자들을 대비해서 외진, 몸을 은신할 만한 곳을 찾았다. 그 와중에도 손에서 놓지 않은
거도가 적무환의 지팡이 역할을 해주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몸으로 적무환은
가까스로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주저 앉았다. 벗은 상반신에는 적무환이 물에 휩쓸려 내려오
는 동안 긁힌 수많은 작은 생채기가 단단한 그의 몸위에 곳곳에 남아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적무환의 몸의 피육은 상했을 지 몰라도 뼈는 이상이 없었기에 가닥
가닥 끊어진 경맥을 추스르면서 적무환은 가부좌를 틀고 내기를 끌어올렸다. 극렬한 통증이
세포 마디 마디마다 뿜어져 나왔다. 게다가 계속되어진 피의 손실로 인하여 혼미해진 이성
의 끈이 자꾸 끊어질려고 하였다. 그 와중에 정신을 놓아버린다면 그 이후는 장담할 수 없
는 지경, 적무환은 이성의 한 가닥을 놓치 않은채 이를 악물고 진기를 순환시켰다.
여의치 않았다. 봉황성모와의 대전에서 위태하게 연결된 경락과 혈맥이 손상을 입어서 혈
에 산개되어진 진력이 모아지지 않았다. 거의 하루를 그렇게 적무환은 몸을 추스렸지만 차
도는 극히 미미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적무환이 힘겹게 일주천을 마치고 과다한 출혈로 어
지러운 정신을 바로 잡고 무언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하여 힘겹게 몸을 일으킬 때 적무환은
옆구리에 심한 아픔을 느꼈다.
'그렇지. 봉황성모가 쏘아낸 암기에 맞았지.'
적무환의 기억속에 '봉황탄'이라는 음성과 함께 빛살같이 날아와 자신의 복부에 틀어박힌
암기가 되살아 났다. 봉황탄에 격중되고 정신을 잃어 그 다음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
무환은 손을 뻗어 암기가 작렬한 부위로 손을 가져갔다. 단순히 상세를 보기위해 뻗은 그
손끝에 무언가 둥그런 물체가 닿았다. 물살에 휩쓸려 여기까지 떠내려 왔음에도 그 암기가
빠지지 않고 그대로 박혀있는 것이었다.
자조섞인 쓴웃음이 적무환의 얼굴에 그려졌다. 손을 움직여 적무환은 그 암기를 복부에서
빼내었다. 몸을 움직이기에 힘이 들었지만 적무환은 온힘을 다 기울여 깊숙히 박혀있는 물
체를 뽑아낼 수 있었다. 암기가 빠진 자리에 시커멓게 죽은 울혈이 뭉쳐져 있다가 열린 틈
으로 울컥 솟아나왔다. 적무환은 그 뚫린 구멍을 울혈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자 조각난 옷가
지로 틀어막았다.
둥그런 물체는 유백색을 띈 직경이 두치반 가량의 구(球)체였다. 물끄러미 그 구체를 바라
보던 적무환은 몸을 벽에 기대곤 눈을 감았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저 자리에 누워
잠들고 싶었다. 이후의 삶이나 미래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이대로 깊은 잠속에 빠져
들고 싶었다.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어떻게 될지라도 무작정 자고 싶었다. 조금 추스
렸다고는 하나 몸을 조금 움찔거릴지라도 찾아드는 엄청난 고통이 두렵기도 하였고 그 고통
이 사라졌다 할지라도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자신도 없었다.
절망!
심연의 나락 속으로 잠겨드는 적무환이었다. 끊임없는 절망감이 몸을 휘감았다. 그러면서
적무환의 이성이 차츰 흐트러졌다. 그 이성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붙잡기엔 너
무나 힘이 들었다. 자! 이제 그만 쉬자. 적무환의 뇌리가 세차게 소리쳤다.
그렇게 적무환이 스스로를 버티지 못하려할 때 그의 뇌리속에 어렴풋한 과거의 기억이 흩
어진 조각으로 뒤섞이며 되살아났다. 어렸을 때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적가의방에서 뛰
놀던 어린 시절의 꼬맹이의 개구진 동작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적무환은 빙그
레 웃음을 지었다. 철없이 장난치며 자라던 그 시절의 기억..
그러나 그 기억은 곧이어 모친 진청청의 자애스러운 자태를 되살렸고 이는 야산에서 진청
청의 능욕당하는 처참한 기억으로 전이되었다. 백옥 같은 나신을 활짝 벌린채 야수들의 정
액을 받으며 몸부침치던 당시의 광경이 혼미한 적무환의 이성에 뚜렷이 새기어지고 그 뒤를
이어 절벽에서 죽임을 당한채 부릅뜬 눈으로 떨어져 적무환과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이 적
무환의 머릿속에 가득할 때 형용할 수 없는 격렬한 분노가 치밀었다.
빠직.
작은 기음이 노기가 극에 다달은 적무환을 일순간 자극하였다. 적무환은 무의식적으로 그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자신의 손이었다. 그 손아귀에는 희
끄무레한 물체가 부수어진채 손에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암기였다. 봉황성모의 손에서 발출
되어 자신의 몸에 틀어박힌 암기가 부숴진채 손에 들려있었다. 적무환이 분노로 손에 힘이
들어갔을 때 깨뜨려진 모양이었다. 전신에 기력이 없었지만 분노에 약간의 힘이 모아졌나보
았다.
'응?'
적무환은 손에 들린 부스러기들을 털어버릴려다 동작을 멈추었다. 깨어진 암기속, 청아한
향기와 영롱한 빛을 발하는 조그마한 단환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적무환은 정신을 가다
듬고 힘겹게 손을 들어 부스러기들을 제거하였다. 그러자 그 속에서 자금(紫金)빛의 엄지 손
가락 마디만한 환이 하나 보였다.
'이게 무얼까?'
적무환은 의혹어린 눈으로 엄지와 검지로 환을 들어올렸다.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향긋한
내음이 콧속으로 들어왔다. 맡기만 하여도 청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계속해서 의구심이 일어났다. 환약에서 풍겨나오는 향기가 적무환의 머릿속을 맑게 해주었
고 적무환은 차츰 생각을 정리하였다.
'봉황성모가 이 암기를 내게 쏘아낸 것은 나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란 말인가? 왜 그녀는
살상의 암기가 아닌 이 환약을 발사하였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왜 그런 절벽에 서있었던거
지? 나는 봉황성모와 싸움을 벌였고 그리고 그 반탄력에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생각을 가다듬기엔 잘려나간 부분이 많았다.
'혹 봉황성모가 그런 것일까? 아니야. 그녀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살기는 보이지 않
았지만 충분히 나를 제압할 수 있었어. 정신을 잃었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며 적무환은 복잡한 머리속을 떨쳐버리려 하였다. 그러자 다시금 찾
아오는 고통.
"우욱.."
한줄기 피가 입가로 흘러내렸다. 적무환은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결
심한 듯 눈을 빛내었다.
'그래. 해보자.'
적무환은 손에 들고 있던 환약을 입에 털어넣었다. 순식간에 타액에 용해되어 식도로 환약
은 넘어갔다.
'그게 봉황선환(鳳凰仙丸)이었을 줄이야.'
적무환은 바닥에 내려놓은 철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개울가로 향했다. 조그마
한 개울에는 이미 몇몇 선객이 몸을 씻고 있었다.
"조장님. 이제 끝나셨습니까?"
"오늘도 하시네요.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을 하시다니..얼마나 더 강해지실려고 그러십니까?"
"허이구야. 저 근육 좀 봐. 구렁이가 수백마리 또아리친 거 같네.."
개울에 몸을 담그고 있던 사내들이 적무환을 보면서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그들의 눈속에
는 존경과 신뢰, 그리고 감탄이 가득했다. 이들은 다름아닌 적무환이 속한 부대에서 적무환
의 밑에 있는 병사들이었다. 새롭게 배속된 부대에서 적무환을 비롯한 한 무리의 부대가 한
지역을 맡았고 그들은 도착하여 작은 막사들을 여러 개 짓고는 각각의 분대로 흩어져 부여
받은 지역을 맡았다.
일종의 국경수비대라 할 수 있는 이 곳에 적무환이 온 것은 일년이 조금 넘었다. 봉황선환
(나중에 알게되었지만)을 복용하고 상세를 치료하느라 거의 육개월을 은신하며 지냈다. 형산
은 위험하여 적무환은 야밤에 이동을 거듭하여 운남으로 몸을 피했다. 운남은 형식상 중원
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외국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문명의 발달을 이루기에는
이 곳의 기후가 너무 습하고 더웠기에 중원의 사람들은 운남을 잘 찾지 않았다. 그러한 것
을 적무환도 알기에 적무환은 운남으로 행보를 결정하였고 운남에서도 가장 서쪽으로 발걸
음을 잡았다.
간신히 내기를 다스렸지만 아직 몸상태는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적무환은 우연히 일
단의 병사들과 마주치게 되었고 서슴없이 군에 투신하였다. 군에 몸을 담게된 이유는 군은
엄연히 강호와 구분되었고 상호간에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는 것과 처음 강호
에 출도하였을시 악철옹이 한 말이 기억이 나서 적무환은 군에 들어갔다.
그때 적무환을 받아들인 장수가 지금 적무환이 속한 부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적무환의
초췌한 몰골이지만 거구에 잘 발달된 근육을 보고 어떤 연유가 있어 이 장대한 사내가 도피
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해내었다. 그리고는 적무환에게 권유를 하였고 적무환 역시 당장 몸
을 피할 도피처가 생겼기에 합류를 하였다.
몸 상태가 차츰 차츰 나아지면서 적무환의 힘은 이 부대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타고난 힘에 언뜻 언뜻 무공이 깃들여 있는 것을 대부분의 병사들이 알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하여 병졸들은 안심을 하였다. 그들도 눈과 귀가 있어 강호인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
기에 무림인의 힘을 선망과 경외, 두려움의 시선으로 보던 참이었다. 그러한 무인이 자신들
과 합류를 한다는데 저어할 이유가 없었다.
적무환은 군의 소속으로 활동을 하면서 철저히 내공을 숨겼다. 그래도 적무환의 거대한 체
격과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만으로도 이 곳에서 사신(死神)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칠척
이 넘는 청동탑 같은 괴물이 휘두르는 철퇴는 가히 공포였다. 다른 이들이 간신히 들어올릴
만한 무게의 쇠몽둥이를 사신은 거리낌없이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것을 보고 토벌의 대상인
원주민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국경수비대의 원 임무는 중원의 외곽을 지키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는 것을 그 주 임무
로 하였다. 이 곳 남만이라 불리우는 운남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살았다. 불과 수십정도 밖에
되지 않은 소수부족에서 거의 만여명을 헤아리는 거대한 부족들까지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족들이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생활하였다. 일부는 작은 국가형태를 갖추어 원황실에 정
기적으로 공물을 보내면서 제후로서 위치를 다진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족생활을 하고 있
었다. 이런 곳이므로 발생할 분쟁이야 기껏 조그마한 투닥거림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원인은 운남성주였다.
현 운남성을 맡고 있는 성주는 출세지향적인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떡하면 중앙으
로 진출하기 위하여 공과를 세우기위해 계책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어느 부족이 반기를 들
었다는 식으로 하여 병력을 출동시켜 토벌을 하였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군병
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초창기에는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군사들은 부족을
침탈하여 수많은 인간을 파리잡듯 죽이고 여인들은 강간하였으며 보물을 노략질하였다. 허
나 그 것은 다 전공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었고 이는 원의 황실에 자화자찬식의 보고로 이어
졌다. 당연히 황실에서는 공을 치하하는 황명이 내려왔고 아울러 품계라던지 상금이라던지
하는 보상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이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군병들은 잘 훈련된 힘을 보여주었으나 원주민들은
이곳이 그들의 생활의 공간이었다. 원주민들이 반격이 시작되었다. 지리적인 잇점을 이용하
여 원주민들이 수세에서 맞서 싸우자는 쪽으로 돌아서자 그때부터 원의 병사들도 병력의 손
실이 급격히 늘어났다. 심지어 어느 부대는 야습으로 인하여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한 경
우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운남성주는 더 아래의 장수들을 닥달하였고 이런 상황이 지금까
지 이어온 것이었다.
적무환이 사신의 별칭을 얻은 것도 불과 구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적무환이 비록 몇
번 무림에서 격전을 벌였다고는 하나 전장은 그와 완전히 달랐다. 몇몇의 싸움이 아닌 집단
과 집단의 싸움이었다. 수십의 작은 전투에서 때로는 수천에 이르는 대병력이 나서서 싸움
을 벌이기도 하였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흘러나온 붉은 피가 웅덩이를 만들고 강을 이루었
다. 앞의 적들과 칼을 나누고 있는 순간에도 불쑥 옆에서 튀어나온 창이 옆구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멋모르고 스스로의 무위를 믿고 있던 적무환에게 이는 색다른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다. 빗
발치는 화살속에서 얼마전까지 옆에서 희희덕거리던 동료가 고슴도치가 되어버렸다. 술내기
를 하던 장가라 불리우던 사내는 목이 없어진채 막사 귀퉁이에서 발견되었다. 무인들이 발
하는 무형의 살기와는 전혀 다른 야수의 기운도 있었다.
급박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방출하며 적을 날릴 때 적무환은 탄식을 터뜨렸다. 아
무리 다짐을 해도 생명의 위협이 담긴 순간에는 본능적으로 진기가 일어 몸을 방어해내었
다. 이는 적무환의 명줄을 오래 지속시키는 역할도 있으나 스스로가 정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므로 어느 순간부터 적무환은 내공을 금제하고는 전투에 나섰다.
시작은 어려웠다. 독화살에 맞아 간신히 목숨을 건진 적도 있었고 세차게 날아온 돌멩이에
전신을 타작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적무환은 살아남았고 본인이 느끼기에 무언가가 강
해지고 단련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적무환의 이름은 사신이라 불리
웠다.
죽지않는 인간, 그러면서 죽음을 가져다 주는 인간. 적무환은 적을 죽일 때 맨처음에는 사
혈이나 급소를 찍어 죽였다.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하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곤을 들었다. 자
신의 신장만한 봉을 들고 전쟁에 나서서 봉을 휘둘렀다.
그렇게 적무환이 전장에 나섰고 결정적으로 사신이라 불리우는 계기가된 노완족의 토벌이
시작되었다. 이때에도 적무환은 예와 다름없이 봉을 들고 전투에 나섰다. 노완족은 이 근방
에서 손에 꼽히는 큰 부족이었다. 그만큼 용맹한 전사들이 무수히 포진되어 있었기에 이쪽
에서도 가능하면 이들을 건들지 않으려 했었고 원만한 관계로 지내오고 있었다.
사건은 뜻밖의 일이 발단이 되었다. 병사들 몇몇이 수색을 나섰다가 원주민 처자들 몇몇을
발견하고는 그 여자들을 붙잡아 윤간을 하였다. 그런 것쯤은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었기에
병사들도 간단히 생각하였고 여자들을 강간한 후 모두 칼을 휘둘러 죽였다. 그러나 그 죽인
여자들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중 하나가 급한 볼일을 위해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사건이 벌어졌고 살아남은 여자는 부족으로 돌아가 그 만행을 낱낱이 보고
하였다. 윤간당한후 죽은 여자중 한명이 족장의 딸임에야 그 문제는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이 일이 벌어진 후 노완족은 사신을 보내어 그 병사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부대장
이 듣지 않자 보복으로 병사들을 공격하였고 이는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양쪽의 병력의 손실이 발생하였다. 점차 노완족쪽으로 승세가 기울면서 아군의 피해가 늘어
났다.
적무환이 출전한 전투 도중에 양쪽에서 사상자들이 발생하였다. 아무래도 가려가면서 급소
를 찌르기가 쉽지 않아 적무환이 몇몇 처리하고 있지 않을 때 아군은 거의 전멸직전까지 다
달았고 옆의 동료가 하나 하나 스러지는 것에 적무환은 분노가 솟구쳤다. 그리고는 옆에 뒹
굴고 있는 철퇴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게 끝이었다.
적무환이 숨을 고르면서 주위를 둘러볼때에 전장에 서 있는 것은 자기와 아군 병사 열 둘
이 전부였다. 이백가량이 참전한 전투에서 거의 몰살이 되고 살아남은 것은 열셋, 허나 노완
족의 피해는 더하였다. 거의 삼백에 이르는 용사들이 마음 먹고 급습을 하였으나 공포에 질
려 도주한 오십여명을 제외하고는 이백 오십가량이 이 곳에 뼈를 묻은 것이었다. 거기에 적
무환 혼자 거진 백 오십을 처리하였으니 그 공포야 이루 말할 수가 없으리라.
그 이후 적무환은 십호장의 직위를 받으며 사신이라 불리워졌다.
"조장님. 본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뭔가?"
"운봉산 어귀의 나호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수색하라 합니다."
"나호족이?"
"예. 그렇습니다."
"흐음..알았다."
보고하러 들어온 병사를 내보내면서 적무환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보니 기억속에 아스라
히 운봉산이라는 지명이 귀에 익었다는 데에 미치고 유명사신 혁사락이 죽어가면서 한 말
중 운봉산 가봉이라는 말이 되살아났다.
'운봉산 가봉이라..운봉산..무슨 뜻일까?'
장궁과 강문직에게도 돌린 혁사락의 서찰을 찬찬히 되새겨 보았다. 혁사락은 그 서찰에 자
신의 가문을 몰살한 흉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말이
떠올랐고 적무환이 몸을 추스리고 운남으로 빠져나올때에 태산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는 말
을 듣고는 그 '복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혁사락은 보물을 얻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는다
서찰에 적어 놓았다. 그러면서 남겨진 장보도를 적무환에게 주면서 전음으로 '운남 운봉산
가봉'을 전했다. 그렇다면 그 보물이라는 것이 운봉산에 있다는 것일까? 태산에 일어난 화
재로 인하여 흑천의 세력을 비롯한 많은 무림인 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비로소 그것이
혁사락의 복수라는 것을 알았다. 미리 덫을 지어 놓고 장보도를 적무환에게 전달한 것이었
다. 적무환이 흑천에 그 장보도를 빼앗길 것을 확신한 것인지..
'나중에 알게 되겠지.'
사신 적무환을 조장으로 하여 수색대가 조직되었다. 적무환을 포함하여 열 아홉의 병사들
이 군장을 갖추고는 군영을 떠났다. 원주민이자 아군에 협력하는 길잡이 하나를 앞세우며
스물의 인원이 운봉산 어귀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 중에는 사신의 부대에 배속되면 어쩌나
하며 투덜거리는 왕가와 정가가 포함되어 있음이 어떤 인연을 의미함일까?
[ 창작] 수라기(獸羅記) 66번째 올림 창작야설
(3)
"조장님. 여기부터가 나호족의 주 영역이라고 합니다."
참마도를 꽉 움켜쥔 20대 중반 가량의 병사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적무환을 쳐다
보았다. 다른 한명의 병사와 함께 맨 앞의 전초 역할로 길잡이를 맡은 원주민과 조심스레
한발 한발을 움직이다 옆의 원주민의 말을 듣고 자신들의 조장인 적무환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전 나호족이 국경수비대를
공격하여 복호장군을 위시로한 많은 군사들을 몰살시켰고 그 위세가 이 근방에서 으뜸이라
여기어지는 부족의 영역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경계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선두 정지."
"선두 정지."
적무환의 명에 그 옆의 사내가 복창을 하였다. 그러자 일제히 행군을 멈추고 병사들은 병
기를 곧추세워 주변을 경계하였다. 혹 모를 기습에 대비를 하는 것이었다.
"전초 본진 합류."
"전초 본진 합류!"
이십여장 앞쯤에 서있던 전초 둘과 원주민은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발을 옮겨 적무환과
다른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가등!"
"예! 조장님."
"근처에 시내나 개울이 있는지 물어봐라."
가등이라 불리운 병사는 원주민에게 무어라 말을 하였고 원주민은 손짓 발짓을 하면서 그
말에 대답을 하였다. 이민족이고 소수부족이라 하더라도 피부색만 좀 다를 뿐 중원인과 별
차이가 없는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곳 운남에는 많은 부족들이 각자의 영역을 정하고
거주하고 있었다. 걔중에는 확연히 그 용모가 중원인들과 구별되는 부족들도 있었으나 지금
이 길잡이처럼 의복을 엇비슷하게 갖춰 놓으면 잘 알아보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다만 언어
에 있어서 차이가 많아 때로는 통역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가등 역시 그렇게 통역의 역
할을 맡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민족의 말을 알아 듣기 보다는 어찌 어찌하여 이
원주민과 의사소통이 되기 때문에 그에게 원주민과의 통역을 맡긴 것이었다.
"좌측으로 3리 가량 가면 시냇가가 있다고 합니다."
"일단 그 쪽으로 이동하자."
운남의 기후는 겨울은 온난하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여름은 서늘하여 일년 내내 따뜻한 봄
과 같은 기후였다. 게다가 여름을 중심으로 하여 우기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여름이 갓
지난 지금 역시 우기에 접어들은 형편이었다. 아무리 여름이 서늘한 기후라 하더라도 그것
은 다른 계절에 비하면 상대적인 것이지 수년 간을 이 곳에서 지내온 병사들이라 할지라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적무환 역시 땀에 젖어 위에 걸친 윗도리가 몸에 착 달라 붙어 있었다. 보통 경갑주를 입
고 군사 행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의 무위를 알고 있는 윗 장수들이 적무환이 갑주
를 입는 것을 꺼려하는 것을 알기에 묵인하고 있었다. 적무환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하나
같이 가죽으로 덧댄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 후덥한 더위에 비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고 그 사정을 알기에 잠시라도 몸을 닦기 위하여 시냇가로 병사들을 이동시켰다.
"어! 시원하다."
"제길..정말 운남의 날씨는..염병.."
"자자..그만하고 교대해야지. 자네들만 시원하면 되겠는가? 동료들도 생각해야지."
반은 혹 모를 기습에 대비하여 갑주를 걸친채 경계를 서고 있고 다른 반은 갑주를 벗고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병사가 그렇게 말을 하자 아쉬운 표
정을 지으며 병사들은 하나 둘 밖에 나와서 갑주를 다시 입기 시작하였고 무장이 완전히 갖
추어진 것을 보고는 그동안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갑주를 벗고 물에 뛰어 들었다.
"가등!"
"예!"
"길잡이와 함께 이리로 오게."
가등과 길잡이는 앞조에 있어 수욕아닌 수욕을 마치고 경계를 서고 있던 참이었다. 적무환
의 부름을 받고는 서둘러 적무환의 앞으로 달려 왔다. 적무환은 가볍게 물을 떠서 세면을
한 정도로 더위를 삭였다. 내기를 일으키면 한 겨울에도 홑옷을 입고 한 여름에도 갑주를
입어도 문제가 없지만 지금 적무환은 스스로 그 내기를 금제한 상태라 땀을 흘리는 것은 마
찬가지였다.
"가등."
"예! 조장님."
"저 친구 이름이 뭔가?"
"호라친입니다."
"호라친? 흐음, 가등, 저 친구에게 나호족에 대하여 물어보게."
가등이 무어라 호라친에게 말을 건네었다. 길잡이 호라친은 가등의 말을 경청을 하더니 짧
게 대답을 하였다.
"뭐라 그러나?"
"어떤 것이 알고 싶으신지 여쭤보라 합니다."
"그냥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하라 하게. 참, 왕간! 왕간, 어디있나?"
적무환은 가등의 말에 대답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병사를 불렀다. 그러자 물 속에 있
던 병사가 허둥지둥 물에서 빠져 나와 옷을 껴입고는 적무환에게 달려 왔다.
"부르셨습니까? 조장님!"
"여기서 야영을 한다. 준비하도록."
"예. 조장님."
왕간이라는 사내가 예를 취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적무환은 가등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등은 그 동안 호라친에게 적무환의 말을 전하였고 호라친은 가등에게 손짓 발짓에 표정을
최대한 동원하여 열심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적무환은 호라친의 표정이 분노에서 두려
움으로 그리고 기대감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는 얼굴을 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호라친의 말이 끝나고 가등이 적무환에게 돌아섰다.
"그래, 뭐라던가?"
"그게..워낙 많아서 잘 정리가 되질 않습니다."
"대충 들은바를 얘기 해보게."
"예. 호라친이 말하기를 나호족은 불과 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 근처에서는 소수 부족으로
극히 허약한 종족이었다 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것이 십년 전쯤부터 나호족이 외부 부족과
전쟁을 시작하였고 계속 전쟁에서 이기고 노예를 만들어 지금의 대부족이 되었다 합니다."
"십년 전까지 소수 부족이었다고? 자세히 좀 말해보게. 가등."
호라친에게서 전해들은 가등의 말은 이러했다. 나호족은 정말 그 위세가 형편 없어 주변의
다른 종족들에게 소위 밥줄이라 할 정도였다 했다. 나호족과 인접한 여러 부족들은 수시로
나호족의 마을을 침탈하여 보물과 식량을 빼앗고 여인들을 데려와서 자신들의 노예로 삼았
었는데 십년 전쯤 나호족에 신인이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나호족은 그 신인을 나호족이 섬기는 여신의 환생으로 여기고 그 신인을 받들어 모셨다고
하였다. 신인은 그런 나호족을 불쌍히 여기어 신력을 나누어 주었고 그 신력을 받은 나호족
의 젊은 전사들은 용맹하게 되어 주변의 부족의 침략을 막아내었다 했다. 그러다 나호족의
힘이 더 이상 만만치 않게 되자 한 부족이 나호족을 전력을 다하여 공격을 하였었는데 결과
는 어이없이 일방적인 나호족의 승리였다. 거기에 힘을 얻는 나호족은 주변의 부족들의 침
입에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나호족은 '힘'이라는 것을 소유하게 되자 이
번에는 반대로 인접한 부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용맹한 나호족의 전사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신력을 지니고 있어 하나 둘 다른 부족들을 굴복시켰고 급기야는 이 곳 운봉산 일대
의 모든 부족들을 굴복시키고는 지배하고 있다고 하였다. 호라친은 그 말을 하면서 주먹을
부르르 쥐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 와중에 자신의 부족이 나호족에게 멸망을 당했고 살아
남은 몇몇 부족의 사람들은 나호족의 노예가 되거나 다른 부족의 노예로 들어갔다 했다. 자
신은 그나마 운이 좋아 이렇게 밥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말을 할때에는 안
도감으로 표정이 완화되었다.
가등이 호라친에게서 들은 말을 거의 적무환에게 전달하였고 적무환은 묵묵히 그 말을 들
었다. 그의 머릿속은 호라친에게서 전해 들은 '신인'이라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신인? 신인이라..신인이 신력을 나호족에게 주었다고 했겠다. 신인..신선? 아닐테고 그렇다
면 혹시..'
"가등! 호라친에게 그 신인에 대하여 물어보게."
가등이 또 호라친에게 질문을 하였고 호라친을 대답을 하였다.
"호라친도 자세히는 모르겠답니다. 그도 소문으로 들은 거랍니다."
"그 소문이 어떤 것인데?"
"신인은 손에서 천둥이 치고 일격에 호랑이를 때려잡는다 한답니다."
이 곳의 호랑이는 만주나 장백산 인근의 대호와는 체격의 차이가 있는 호랑이지만 그래도
맹수의 왕이라 평가를 받는 짐승이었다. 그런 호랑이를 일격에 때려잡는다하면 범인들에게
는 대단히 두려운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신인은 여인이랍니다."
"여인?"
"예. 나호족은 신인을 나호족이 섬기는 신의 딸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래? 여인..여인이라."
적무환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병사들은 수욕을 마치고는 야영할 준비를 끝내었
다. 미리 준비한 건량등을 식기에 담아서 가등이 적무환에게 가져왔다.
"조장님! 저녁입니다."
"음, 그래."
간단히 고기말린 것과 소채 몇가지지만 적무환은 조금씩 입에 넣고는 씹기 시작하였다. 언
제부터인지 적무환은 음식을 먹을 때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먹는 습관이 생겼다. 많은 양을
섭취하지는 않았지만 이로 잘게 씹어서 거의 걸쭉해질때까지 만들어 삼켰다. 이는 작은 양
으로 최대한의 영양을 섭취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이를 적무환은 다른 일부의 노회한 병
사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자연스레 배웠다.
그렇게 식사를 하던 적무환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가등."
"예! 조장님."
"준비하게."
나직한 말, 적무환의 옆에 앉아 적무환과 비슷한 모양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그 말을 들은
가등의 얼굴에 순식간에 긴장의 빛이 가득 번져나갔다. 이 말은 일종의 은어로서 전투준비
를 하는 것을 의미하였기에 가등은 심각한 기색으로 조용히 발을 병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옮겼고 그 말을 그대로 병사들에게 전하였다. 병사들은 태연히 몸을 일으켜 자신이 벗어놓
은 갑주와 병기들이 있는 곳으로 신형을 이동시키다 일제히 갑주를 몸에 걸치고 병기를 세
워 들었다. 그리고는 대형을 갖추워 적무환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가등, 호라친에게 숲을 향해 나오라고 하게."
가등이 호라친에게 적무환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email protected]^$%@#"
호라친이 우거진 숲을 향해 무어라 외쳤다. 적무환의 말을 그대로 떠들어대는 호라친이었
다. 호라친의 음성이 숲속을 진동하였다. 이제 어둠이 막 내려 앉으려 하는 어스름한 시간이
었지만 사물을 분간하기엔 충분한 빛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의 움직임도 숲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주변이 고요해졌다. 벌레들의 울음소리나 짐승들의 울부짖음도
먼곳에서 아스라히 들려오는 것이지 주위에서는 적막이 감돌았다.
"창 하나 주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적무환은 가등이 전달한 창을 하나 집어들고는 앞에서 삼분지 일지점
을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는 위로 치켜든다 싶더니 앞으로 쳐내었다.
쉬익..
파공음과 함께 창이 공간을 순간적으로 갈랐다.
푸웃..
"큿."
어딘가에 창이 작렬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지는 듯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틀림없는 사
람의 음성이었다. 적무환이 쳐낸 창이 숲속에 은신한 누군가에게 적중한 모양이었다. 헛숨을
들이키는 신음이 숲속에서 나왔다. 푸스스 숲이 흔들렸다. 이어서 수풀 속에서 몇몇 음영이
움직인다 싶더니 하나 둘 몸을 세우는 것이 보였다.
적무환과 다른 병사들은 병장기를 힘껏 거미쥔채 안력을 그 쪽으로 집중시켰다. 시야에 대
략 십여명의 사람의 모습을 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들은 곧 수풀을 헤치고 숲 밖으로 걸어
나와 적무환등과 수장의 거리를 두고는 멈춰섰다. 열셋, 숲속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인원의 숫자였다. 아직 완전히 어두어지지 않아 그들의 행색을 살필 수 있었다. 여인
으로 보이는 셋과 건장한 젊은 사내로 보이는 열명이었다. 그 사내 중 한명은 어깨를 축 늘
어뜨리고 피를 흘리고 있었고 다른 쪽 손으로 적무환이 쳐낸 창을 쥐고 있었다.
적무환의 눈짓에 가등이 호라친에게 말을 하였고 호라친의 입이 열렸다.
"%^(%^&%"
"...."
대답이 없었다. 재차 호라친의 말이 이어졌다.
"@#^$%#*%"
"감히 이 곳이 어디라고 들어 왔는가?"
뜻밖에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서툴지만 틀림없는 한어로 되돌아 왔다. 가운데 서 있는 여인,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까? 허리춤에 검집으로 보이는 기다란 막대를 매달고 꼿꼿히 서서 병
사들을 내려다 보듯 말을 하는 여인에게서는 익숙해 보이는 위엄이 묻어났다.
'검?'
적무환은 입을 연 여인을 바라보다 문득 여인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검집을 보고는 의구심
이 생겼다. 적무환은 눈을 돌려 여인 옆에 서있는 다른 여인들과 사내들의 행색을 세밀히
관찰하였다. 마찬가지였다. 그들 상당수가 검으로 보이는 병기를 허리춤에 혹은 손에 들고
적무환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劍). 다른 병기의 태생과는 차이가 있는 원래부터 살상을 목적으로 생겨난 병기가 검이
다. 만병지왕이니 만일검이니 하는 말 자체가 그 검의 수련이나 쓰임새 등을 단적으로 말해
주었다. 그러한 병기가 이 외진 운남의 한 귀퉁이의 이민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검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운남의 지형이나 기후 등
의 자연 조건은 검보다 다른 병장기를 사용하는 것에 유리하였다. 항상 손질을 해야하고 그
사용법이 다른 무기에 비해 까다로운 검을 쓸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가지!
'무공을 익힌 것인가?'
그런 적무환의 생각은 여인이 추궁하듯 재차 물어보자 깨뜨려졌다.
"감히 본 공주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인가?"
노기가 은은히 섞여 있었다. 강압적인 말투가 당연한듯 스스로를 공주라 칭한 여인은 병사
들은 노려보았다. 그 옆에 좌우로 서있던 사내들의 눈에서도 분노가 섞인 빛이 새어나왔다.
적무환은 빤히 그 여인을 쳐다 보았다. 조금 어색하긴 해도 복색은 중원의 복색이었다. 공주
라 한 여인은 경장이라기 보다는 궁장에 가까운 화려한 비단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여인은
이 근방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원주민 여성과는 차이가 있는 용모였다. 운남에 사는 대부분
의 이민족은 코가 낮고 얼굴이 동그랗고 피부가 짙은 갈색을 보여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허
나 이 여인은 머리색은 칠흑같이 검지만 오똑한 콧날이며 중원의 여인들보다 오히려 더 흰
피부결을 가지고 있었다. 절세미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디가도 꽤 미인이라 평함
을 받을만한 미색이었다. 그런 그녀와는 달리 주변의 두 여인은 이 공주의 시비인듯 평상
원주민의 옷차림에 평범한 얼굴이었다.
적무환이 가등에게 눈짓을 하였다.
"우리는 원 제국의 병사들이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금번 이 운봉산 지역을 순찰하려
한다. 너희들은 나호족인가?"
"원 황제? 여기는 원의 영토가 아니다. 이 곳은 우리 땅이다."
"뭣이? 황실의 명을 거역할 셈이냐?"
"우리에겐 황제란 없다. 이 지역은 우리 나호국의 영지다."
"나호국? 나호족이 아닌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본국의 국왕께서는 얼마 전 나라를 세워 국왕위에 오르셨다."
"뭐라고? 나라를 세웠다고? 그러면.."
"가등!"
적무환은 가등과 공주의 설전을 중지시키곤 공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공주는 원과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요?"
"못할 것도 없지."
"알겠소. 그럼 그렇게 보고하리다. 전원 회군 준비."
"어딜 간다는 것인가?"
"운봉산이 그대들의 영지라니 여기서 떠나야 하지 않겠소."
"그럴 필요 없다. 너희들은 한발짝도 이 곳에서 나갈 수 없다. 너희들은 우리의 포로다."
"우리와 대적하겠다는 건가?"
적무환의 목소리가 조금 서늘해졌다. 허나 기세가 오른 공주는 그 것을 느끼지 못하고 계
속해서 적무환등을 몰아붙였다.
"대적? 건방진 중원놈들. 네 놈들은 본국으로 끌려가서 충실한 노예가 될 것이다."
"노예라..자신이 있는가?"
"아직 네놈들의 처지를 잘 모르는 가 본데 여기 이 용사들은 나호국의 최정예 백인 용사들
중 열명이다. 당연히 자신이 있지."
쭈욱 살펴보니 하나같이 태양혈이 불룩 솟아 오른 것이 꽤 무예를 익힌 것으로 보이는 자
들이었다. 일견해도 강호에서 이류급은 평가받을 만한 사내들 열명이 형형히 눈빛을 빛내며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호호호..사신(死神)이라는 허명에 우리가 겁을 먹을 것으로 아느냐? 그 따위 이름이야 다른
부족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될지 몰라도 본국의 용사들에겐 코웃음꺼리 밖에 되지 않는다.
정 의심이 된다면 힘을 보여주지. #$^#, #$^%#$&"
나호국의 공주는 옆에 서 있는 사내에게 눈짓을 하였고 나호국의 용사 중 하나가 몇걸음
앞에 나와 섰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서 적무환을 가리키고는 손가락 끝을 까닥였다. 나오라
는 의미, 아주 얕잡아 보는 듯한 자세였다. 초반에 선기를 제압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왕간."
적무환이 알고 있기에 지금 자신을 제외한 열아홉의 인물 중 길잡이를 빼면 열여덟. 그 중
무예를 좀 했다 싶은 병사는 가등과 왕간, 그리고 왕간과 친한 정자후라는 세명이었다. 나머
지 열다섯 중 제법 군생활을 하여서 연륜이 쌓인 병사들이 열둘 나머지 셋은 신참이나 다름
없는 어린 병사였다. 수색의 중한 임무라 가능한한 경험이 있는 병사를 데리고 나오려 했지
만 아직 편제가 완전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데려온 신병이었다. 신병들은 잔뜩 긴장된 기
색이 역력히 보였다. 그 신병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초전이 중요했다.
왕간은 적무환의 명이 떨어지자 예를 취하곤 자신의 병기인 도를 빼어들었다. 폭이 네치가
조금 넘고 길이는 석자 정도의 살짝 굽어진 형태의 흔히 볼 수 있는 도였다. 비스듬히 도를
세우곤 왕간은 한걸음 한걸음 발을 떼어 나호족의 전사가 서 있는 곳에 다가가더니 마주 섰
다. 사선으로 도를 세우고는 도끝을 안쪽으로 하여 얼굴 어림까지 들어올렸다. 살짝 몸을 비
틀어 어깨가 적을 대면할 수 있는 기수식을 취하였다.
"자후!"
"예. 조장님."
정가라 불리웠던 사내가 적무환 가까이 달려왔다. 적무환은 부대가 통합되고 재편될 때 스
스로 나서서 몇몇 추가 병사를 뽑았다. 그 중 왕간과 정자후 이 둘이 포함되었다. 적무환 자
신의 무예 경지가 일정 수준 이상이었기에 일반 무인들이 무형중에 발산하는 기도만 감지하
더라도 대략의 무예수준을 판단할 수 있었다. 적무환이 느끼기에는 왕간이나 정자후 이 둘
은 강호에 당장 나서더라도 궁경 중 중기(重氣)의 단계를 넘어선, 최소한 무이관주 였던 상
명선의 무위는 가졌다 판단하였다. 이십대의 나이에 결코 낮다고만 할 수 없는 경지였다. 무
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였고 그와는 별개로 실력과 경륜이 있는 병사들이 필요했기에
적무환은 백부장에게 둘을 포함한 몇몇을 요구하였고 관철시켰다.
왕간과 정자후는 과거 무림에서 쓰디쓴 상처를 입고 방황끝에 군에 투신한 젊은 영재들로
서 사문의 기린아로 촉망받던 예날을 뒤로 한채 스스로를 숨기고 운남, 이 외곽에 와서 생
활하고 있던 중이었다. 가능하면 튀지 않게 군영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가진 능력덕분에 아
직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적무환이 처음에 자신둘을 호명하였고 바로 앞에서 적
무환을 마주쳤을 때 자신들을 요구한 '사신'이라는 인물이 뿜어내는 기세에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당혹감은 곧 호기심과 의아함으로 전이되었고 그들은 적무환의 부대에 합류
하였을 때 적무환의 기존 병사들이 적무환에게 두려움과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는 슬
쩍 물어보았을 때 나온 대답이 그들을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조장과 있으면 살 수 있네.'
나호족의 전사가 가벼이 검을 들어 올리고는 한발 내딛으면서 검을 뻗쳤다. 초식이라기 보
다는 탐색의 의미로 빠르게 찔러내는 일검이었다. 왕간은 사선으로 들고 있던 칼을 비틀어
슬쩍 검을 쳐내고는 그 여력을 되살려 몸을 한바퀴 빙글 돌리며 도를 수평으로 가슴어림께
휘둘렀다. 검을 퉁긴 나호족의 전사는 이미 그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칼의 궤적의 밑
으로 몸을 숙이면서 검을 그어 왕간의 장딴지쪽을 베어갔다.
"$&^"
"허업!"
탐색전이 벌어지나 싶더니 금새 흉흉한 금속광이 허공에 흩날렸다. 급히 칼을 거둬들이는
왕간은 한발로 땅을 박차면서 허공으로 떠올라 검을 피하면서 공중에 떠 있는 채 아랫쪽으
로 도를 세차례 내리 찍어 적의 머리를 노렸다. 왕간의 사문 절기인 창응삼뇌격(蒼鷹三雷擊)
이었다. 거센 칼바람과 함께 도의 기세가 휘몰아치자 나호족 전사는 검을 바닥에 대고는 철
판교의 수법으로 몸을 뒤집어 위치를 바꾸고는 쇄도해 들어오는 도를 일일히 쳐 내었다.
왕간을 검에 실려 있는 적의 내기가 만만치 않음에 튕겨지는 힘에 거역하지 않고 위로 솟
구쳐 올라 일장 여를 후퇴한 다음 바닥으로 내려섰다.
"자후! 혹 어떤 무예인지 아는가?"
흠칫 정자후는 몸을 움찔 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왕간이 펼치는 무공은 선풍이십사도입니다. 왕간은 선풍뇌도의 무예를 이었습니다."
"나호족은?"
"처음에는 삼재검법을, 그리고 왕간의 선풍도를 막은 수법은 아직.."
"그래? 계속 보면서 말해주게."
적무환이 나호족과 왕간이 어떤 무공을 펼치고 있는가 알아보는 사이에도 왕간과 나호족의
전사는 연신 병장기를 부딪히고 있었다. 왕간이 도를 휘둘러 도풍을 일으켜 짓쳐들어가면
나호족의 전사는 검풍으로 일일이 해소를 해나갔다. 그러면서 틈이 보이면 그 새로 검을 밀
어 넣었고 왕간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재빨리 도를 거두어 검을 쳐내었다. 일진일퇴의 공
방전, 누구하나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초영휘류!"
나호족 전사의 검이 회전을 일으키며 뿌연 검 그림자를 남기면서 환영을 일으키고 그 환영
이 왕간의 사방위를 핍박하자 깜짝 놀란 정자후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무언가?"
"저 나호족의 전사의 무공은 진천성화검인 듯 싶습니다."
"진천성화검?"
"예.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 문파가 성의전에 귀속이 되어 사라졌지만 한때 명성을 날렸던
의검문(醫劍門)이라는 문파의 절예였습니다."
"의검문? 성의전에 귀속이 되었다고?"
"예. 조장님. 삼십여년 전입니다."
"성의전, 성의전이라.."
성의전은 다름아닌 난화성녀 유가형의 사문이었다. 적무환이 잠시 골몰하게 생각을 하면서
장내에서 눈을 떼고 있을 때 왕간과 나호족의 전사의 대결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둘 중
누구 하나 우위를 잡지 못하고 기력을 소모하였다. 이장이 채 안되는 거리를 두고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 왕간과 나호족의 전사는 매서운 눈빛만 날리고 있었다.
"왕간! 돌아오라."
왕간이 적무환의 말에 경계를 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다른 병사들이 진형을 갖추
고 있는 곳까지 다달은 다음에야 긴장을 풀었다. 나호족의 전사 역시 주춤 주춤 뒷걸음 하
더니 공주란 여인과 다른 전사들이 서 있는 곳까지 물러선 후 숨을 고르는 것이 보였다.
적무환은 왕간이 자세를 잡자 앞으로 몇발자국 나섰다. 칠척이 넘는 엄청나게 장대한 체격
을 가진 적무환이 앞에 나서자 강렬한 위압감이 나호족 인원들에게 전달되었다. 공주를 비
롯하여 나호족의 전사들의 안색이 가볍게 변하였다. 예상보다 강한 왕간의 무위에 놀랐고
말로만 듣던 자를 이렇게 가깝게 보게되니 그 이름에 걸맞는 위용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기세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이 들 중 나호족이 자랑하는 최고의 전
사가 섞여있기 때문이었다.
"나를 아는가?"
적무환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사신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겁을 먹을 것이라 생각했나?"
공주의 옆에 서 있는 나호족 사내가 역시 서투른 한어로 입을 열었다. 사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 적무환에게 가벼운 놀람을 주었다. 이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
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부대내에 첩자가 있거나 혹은 부대의 일거수 일투족이 지속적
으로 감시를 받고 있다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이쪽 원주민 부족들이면 누구나 가질 '사신'의
공포따위는 무시할 정도라는 느낌이 은연중에 배어나왔다.
적무환은 안력을 돋구워 나호족의 전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과연 강하다는 이름을 들을 만
했다. 저 정도라면 무림의 후지기수 그 누구에게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을 정도
였다. 칠룡이나 사화를 제외하면 저들을 맞상대할 자가 흔치 않으리라. 적무환은 속으로 생
각했다.
"생각을 바꿨다."
"무슨 말인가?"
뜬금없는 적무환의 말에 나호족의 공주가 반문을 하였다.
"너희들은 대원의 포로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
갑작스러운 항복의 권유에 공주를 비롯한 나호족 전사들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실리
더니 곧 실소로 번지다가 대소가 터져나왔다.
"킬킬킬.."
"홋홋홋.."
"크하하하하.."
적무환은 나호족의 사람들이 웃던 말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빤히 그들을 쳐다볼 뿐 일
체의 움직임도 없었다. 얼마를 웃던 나호족 인물들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러더니 나호
족 최고의 전사로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건방진 놈! 어디 네 놈들의 무공도 그 손만큼이나 광오한지 보겠다. !#%$"
그 전사의 명과 함께 나호족의 전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어들고는 달려들어왔다. 흉흉한 검
빛이 나호족 전사들의 검끝에서 뻗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원의 병사들도 제각각의 병기를
거세게 움켜쥐고는 함성과 함께 마주 달려나왔다.
난전이 벌어졌다. 나호족의 전사들은 미약하나마 검기를 흩뿌리며 용맹스러운 기세로 병사
들을 공격하였다. 원의 병사들은 가등과 왕간, 정자후를 축으로 하여 노회한 병사들이 진형
을 갖추어 쏘아들어오는 나호족의 전사들에게 맞섰다.
순간,
적무환은 땅을 박차며 돌진하였다. 그 앞으로 달려나오던 나호족의 전사의 검세를 비스듬
히 철퇴로 쳐 올려 방향을 흩더니 계속 빠르게 달려나갔다. 그 적무환이 달려나가는 방향의
끝, 깜짝 놀라 안색이 하얗게 변하고 있는 나호족의 공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보검으로
보이는 날이 잘 서려있는 검을 곧추 잡고 있는 나호족의 공주는 갑자기 적무환이 자신쪽으
로 달려오자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급히 두 시비가 검을 빼어들고는 공주의 앞을 막아
섰고 나호족 최고의 전사라는 자 역시 대경실색하여 신형을 뒤집어 적무환의 배후로 검을
찔러갔다.
캉!
적무환이 철퇴를 뒤로 하여 검을 막아내었다. 검에 실린 역도를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여
튕겨 나간 적무환은 어느새 공주 바로 앞까지 도달하였다. 두 시비로 보이는 여자들이 휘두
른 검을 철퇴로 쳐 내고는 적무환은 공주를 노렸다. 경황중에 내지른 공주의 검을 겨드랑이
밑으로 흘려버리고는 나호국의 공주의 손목을 겨드랑이에 끼었다. 그리고는 신형을 돌려 공
주의 뒤로 돌아가서는 발을 가볍게 내질러 공주의 무릎을 뒤쪽에서 걷어찼다.
"꺄악!"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 앉다 시피한 공주의 갸녀린 목이 적무환의 손에 쥐어줬다. 적무환
은 공주의 손을 한 손에 휘어 잡고 입을 열었다.
"멈춰라!"
[ 창작] 수라기(獸羅記) 67번째 올림 창작야설
늦었습니다. 꾸벅^^; (--)(__)
(4)
"@%[email protected]#"
나호족 최고의 전사라던 사내가 무어라 알아듣기 어려운 함성을 터뜨리면서 적무환에게 쇄
도해 들어왔다. 잘 정련된 청강장검을 단단히 거머쥔채 일직선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나호족
의 전사의 두 눈에선 눈빛으로 사람을 살해할 정도의 살광이 줄기줄기 뻗쳐 나왔다. 어이없
이 순간적으로 허를 찔러 공주가 적장의 손에 사로잡힌 것에 대한 당혹감과 분노등이 혼재
되어 앞뒤 가릴 것 없이 십성의 내력을 검에 주입하여 순식간에 적무환에게 달려왔다.
스으.
대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나호족의 전사의 검이 적무환의 목을 노리고 쏘아져 들어왔
다. 파르스르한 검신에 무형의 검기가 응축이 되어 전광석화같이 그어졌다. 흉흉한 위세가
검끝에 배어져 나왔다. 허나, 나호족 전사의 바람과는 달리 그 검이 휘둘러지는 궤도에 놓여
있는 것은 적무환의 목이 아니었다.
"커헙!"
검신이 궤적이 급속히 뒤틀리며 나호족의 사내는 거의 수직으로 방향을 틀어 위로 검을 들
어올렸다. 적무환이 어느새인지 그 검이 오는 방향에 나호족의 공주를 갖다대고 있었던 것
이었다. 애초에 노린바와 달리 검이 향하는 곳에 적의 수괴가 아닌 자신의 상전이 창백히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급히 검의 흐름을 꺾었다. 일반적으로 무공의 출.퇴를 거
듭한다는 것은 왠만한 무예의 경지에 올라서기까지는 극히 난해한게 일반 통념이었고 나호
족 사내도 이에 벗어나지 않았다. 다급한 신음성과 함께 검을 치켜 올렸다. 게다가 그 검의
흐름과는 거의 수직에 가깝게 궤도를 틀었음에 검에 주입된 내력이 상당부분 역류하여 시전
자의 내부를 뒤흔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크아아.."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괴성이 나호족 전사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황급히 진기를 거두면서
검초를 강제로 흩트린 것이 나호족 전사를 진탕시켰다. 억지로 몸을 틀어 돌린 나호족 사내
의 입에서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분사되었다. 허공에 선홍빛의 피보라가 일었다. 나호족
전사는 휘청이면서 신형을 가누지 못하고 달려오던 여력을 주체할 수 없어 상체가 굽혀진채
나호족 공주의 몸에 기대듯 부딪혀 왔다.
퍽!
"끄어억."
나호족 전사가 공주와 채 부딪히기도 전에 나호족 공주의 옆에서 적무환의 발이 솟아 올라
왔다. 발끝을 세워 쳐 올린 적무환의 발에 나호족 전사의 아랫배 쪽이 걸렸다. 나호족 전사
의 뱃속을 꿰뚫듯이 적무환의 발은 깊히 그 사내의 뱃속으로 파고 들었고 진기가 역류하여
크게 내장이 뒤흔들린 나호족의 전사는 적무환의 발길질에 정신이 아득해짐과 동시에 허리
를 앞으로 꺾으며 뒤로 퉁겨나갔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적무환의 발바닥이 지면을 거세게
찍어 누르며 거구를 땅에서 들어올렸다.
손아귀에 여인의 목을 움켜잡은채 허공으로 떠올랐다 싶은 적무환이 아래로 내려왔고 습지
를 박찬 발의 반동으로 들어올려진 다른 쪽 발이 크게 선을 그리면서 발뒤꿈치부터 밑으로
번개같이 떨어졌다. 그 수직선의 끝부분에 걸려 있는 것은 웅크린채 뒤로 물러선 나호족 전
사의 머리!
퍼걱!
잘 익은 박이 터져나가는 음향과 함께 허옇고 붉은 액체가 비산하였다. 내려찍은 적무환의
발은 한뼘 가량 지면에 박혀 있었고 바로 그 앞에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머리를 잃어버린
이민족 전사가 엎어져 있었다. 주검에서 터져 나온 핏덩이가 땅을 축축히 적시고 한 손에는
의식을 잃은 여인의 목을 쥔채 굳건히 서서 장내를 노려보는 적무환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
서 금방 뛰쳐나온 마왕의 현신을 보는 듯 했다.
"@#$%@^#"
"@^&$*"
주춤 주춤 공포감이 담긴 눈으로 나호족의 전사들이 뒤로 엉거주춤하게 물러섰다. 능히 일
당백의 전사라 칭함을 받던 그들이지만 지금 적무환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지기에
휘감긴 그들의 작태는 전사들로서의 기개가 거의 사라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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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떨리는 음색으로 무어라 입을 열었다. 아마도 동
료들을 독려하여 다시금 적무환에게 덤빌 것을 종용하는 듯 했다. 채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
지만 나호족의 전사들은 손에 들고 있던 병장기를 꽉 움켜쥐었다. 차츰 공포감이 사라지는
기색이 보였다.
"공주..인질...사내놈은 결투하자."
떠듬 떠듬 서툰 한어로 우두머리가 적무환에게 검을 겨누었다. 애초에 중원인들을 얕잡아
보던 선입관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호족의 전사는 예상을 훨씬 뛰어 넘어 이들이 엄
청나게 강한 것에 대하여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지난 번 원의 군병들을 칠때에 참전한 그
로서는 쉽사리 목을 잃어버리는 허약한 중원인을 생각했었는데 이 자를 비롯하여 이 몇 명
의 병사들은 전혀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된 접전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어쩌면 나호
족의 정예라 할 수 있는 자신들 모두 여기에서 뼈를 묻어야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공주가 저 자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나호족의 공주는 단순히
부족의 공주뿐만이 아닌 자신과 가정을 꾸리기로 약정이 된 여인이었다. 부족내의 장로 중
한명이 자신의 아버지였고 본인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 관례,
결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공주를 순순히 저들의 손아귀에 넘겨준다면 그 다음은 무슨
일을 당할지 뻔히 알기에..
적무환은 빤히 자신에게 검을 겨눈 사내를 쳐다 보았다. 처음에는 분노로 인하여 검끝이
미미하게 떨리다가 차츰 안정이 되가고 그 끝에서 정제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적무환은
잡고 있던 공주를 가등에게 넘기고 나호족의 전사와 마주섰다. 육중한 철퇴가 비스듬히 아
래로 향한 채 불 같은 안광을 내뿜고 있는 상대의 눈을 마주 보았다.
"크앗!"
기합소리와 함께 사내가 돌진해 들어왔다. 사선으로 검을 틀어잡고 쾌속하게 적무환의 지
근거리까지 순식간에 다가온 사내는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검을 그었다. 초식이라기 보다
는 기세!
캉!
금속성이 터져나왔다. 빠른 일검을 단순히 철퇴를 들어올리는 동작으로 쳐내고 적무환은
연이어 철퇴를 사내쪽으로 밀어내었다. 나호족의 사내도 검이 철퇴에 퉁겨져 오르자 철퇴를
피해 몸을 띄어 허공에서 한바퀴 공중제비를 돌더니 다시금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 긋는
다. 검이 어지러이 휘날린다 싶더니 수개의 잔영이 적무환과 사내 사이에서 흩뿌려지면서
적무환을 덮쳐 내려왔다.
챙..캉..캉..
뒤로 두어발짝 물러서는 적무환은 육중한 쇠붙이를 정제된 형(形)으로 쳐내어 검의 그림자
를 하나 하나 지워나갔다. 그런 후 가볍게 정면으로 철퇴를 밀어 넣었다. 나호족의 전사는
절초를 적무환이 쉽게 해소하자 침중히 안색을 굳히고 빠르지 않게 찔러오는 철퇴를 착지하
면서 발로 걷어찼다.
적무환은 철퇴를 거두어 들이면서 크게 한발짝 내딛은후 일권을 내질러 나호족 사내의 정
강이 부분을 공격하였다. 급히 발을 회수하면서 전사는 검으로 적무환의 팔목어림을 노리면
서 검을 사선으로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사내의 눈앞에서 거친 기세의 정권이 사라졌
다. 그와 동시에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막는다 싶더니 위로 쳐들어 아직 방비를 채하지 못
한 나호족 전사의 가슴팍에 강렬한 격타음이 터져나왔다.
퍽!
"꾸엑.."
일권을 순간적으로 거두어 들이면서 동시에 적무환은 검의 궤도를 뒤따라 사내의 몸가까이
에 접근한 다음 그 여세로 팔꿈치를 돌려서 사내의 가슴을 후려쳤다. 일격을 당한 나호족의
전사가 피무지개를 허공에 뿌리면서 하늘을 날듯이 이장여를 퉁겨져 바닥에 뒹굴었다. 몇바
퀴를 구르더니 나호족 전사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그 동작마저 사라졌다. 앞가슴에 움
푹 패인 자국이 역력히 보였다. 적무환에게 가격당한 부위의 천조각은 터져 나가 맨살을 그
대로 노출시켰는데 그 속살은 새까맣게 변색이 된채 어른 주먹하나만큼 함몰되어 있었다.
나호족의 다른 전사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적무환에게 검을 휘둘렀다. 일순간에 적무환의
주위는 수많은 칼빛이 번뜩이고 왕간과 정자후가 각자의 무기를 빼어들고 마주쳐나갔다.
달빛이 희미하게 지상을 내려쬐는 어둠속, 인영들이 빠른 속도로 행군을 하고 있었다. 거의
뛰다시피 신형을 움직이는 자들에게서 찰캉..찰캉 하는 금속성이 수시로 새어나왔다. 그러기
를 거의 한 시진 이상, 어둠속의 그림자들은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 멀리 불빛이 보이자 그
제서야 선두쪽의 사내의 구령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기를 멈추었다.
"전군 정지. 사주경계."
가등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적무환등과 함께 정찰을 나섰
던 병사들이 숨을 고르면서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은채 고된 다리에서 힘을 빼었다.
"쉬게 하라."
"전군 휴식."
적무환의 명령을 복창하여 명을 전달하는 가등, 하지만 그 자신을 휴식을 취하지 않고 잔
뜩 긴장한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추격병력을 대비하고 있었다.
"가등, 괜찮아. 쉬게."
적무환의 권유가 있자 그제서야 가등의 전신에거 팽팽하던 신경이 느슨해졌다.
"금방 오지는 않을게야. 내가 한 말도 있고.."
가등은 적무환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을 하자 허리 어림의 병기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왕간. 부상병이 있나 봐주게."
"경상자 세명이 있습니다만 큰 부상은 아닙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적무환, 그도 몸을 나무등걸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였다.
그런 적무환을 바라보는 왕간의 입가가 씰룩였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지만 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나호족의 잔여 사내들과 공주의 두 시비가 칼을 빼어들고 전장에 뛰어들었고 그에 마주해
왕간등이 부딪혀갔다. 가등은 공주를 잡고 있는지라 전투에 끼어들 상황이 아니었다. 막 서
로의 병장기가 섞이기 일보직전에 터져나온 지축을 뒤흔드는 고함.
"갈!"
피아를 막론하고 귀에서 머릿속까지 멍하게 비워버린 적무환의 고함소리에 원의 병사들과
나호족의 전사들 모두는 동작을 멈추고 엉거주춤하게 칼을 든채 적무환을 쳐다보았다. 적무
환은 손짓으로 가등을 불렀고 의식을 잃어 가등의 어깨에 늘어져 걸쳐있는 공주를 데리고
적무환에게 다가온 가등은 공주를 적무환에게 넘겨주었다.
적무환은 바닥에 공주를 내려놓고는 호라친을 시켜서 자신의 말을 나호족의 전사들에게 전
하고 순순히 공주를 비롯하여 나호족의 사람들을 장내에 남긴채 경계자세로 자리를 물러섰
다.
"청(請)."
그러한 왕간의 마음을 아는지 살짝 다물어진 적무환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정자후."
"예. 조장님."
"언제가 될 것 같나?"
"글쎄요. 아마 내일 저녁쯤 이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왕간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보다는 더더욱 호기심을 부채질하는 뜬금없는 대화에 왕간의 속
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다시 입을 다물고 있는 적무환이 무어라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아 슬며시 정자후에게 다가
갔다.
"이보게, 자후"
"왜?"
"도대체 무슨 말인가?"
"뭐가?"
적무환과 마찬가지로 편안한 자세로 몸을 쉬게하는 정자후를 보자 몸이 더 달아올랐다.
"그게 말일세. 도대체 내일 뭐가 온다는 말인가?"
"신(神)."
"신? 무슨 신?"
"나호족의 신."
"나호족의 신? 아니, 정말 나호족의 신이 있는가?"
정자후는 눈을 뜨고 왕간을 빤히 쳐다보았다. 평소에 좀 아둔한 친구라 생각을 했지만..
"그 여신인, 아니 여무림인을 말하는 것을 모르나?"
"여신인? 아! 그렇군. 그렇지. 음.."
정자후가 다시 눈을 감았다. 왕간을 서둘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을 풀려 재차 정자
후에게 질문을 하려했지만 가등의 입이 열리자 입맛을 다시고 주섬 주섬 군장을 다시 꾸렸
다.
"전군 정렬."
동이 틀 무렵 군영에 귀대한 정찰병들은 조장인 적무환이 상급자에게 업무를 보고하려 들
어가고 나머지 병사들은 각자 배정된 막사로 들어갔다. 정자후 뒤를 쫄래 쫄래 따라가는 왕
간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 담겨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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