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수라기(獸羅記) 50번째 올림 창작야설
10 장 조(兆)
(1)
"사혈장(死血掌)...."
앓는 신음처럼 붉은 입술을 헤집고 새어 나오는 한 무공명칭.
오른쪽 발을 반보가량 내밀고 검을 세워 앞에 한채 그 끝을 황보두균의 미간에 겨누던 벌
거벗은 여체, 악서령의 입에서 경악과 당혹스러움이 담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혈장.
혹은 사혈독장이라 알려져 있는 무림의 금기시된 마공. 사혈장은 초식을 가진 장법이라기
보다는 사혈기(死血氣)라는 기이한 기운을 내뿜는 기공이라하는 쪽이 어울리는 마예였다. 인
혈(人血)에 전신을 담그고 인독(人毒)을 받아들여 역혈의 운기를 하여 익히는 방법이 독랄
하고 수련경지에 따라 그 육장이 도검불침화되며 사혈독기가 뿌려짐으로 그 살상력이 강하
기에 수차례 이 무예가 나타날때마다 무림에서는 피바람이 몰아쳐 정사무림을 막론하고 금
기로 정한 무서운 마공이었다. 그런 마공이 지금 황보두균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어찌 사혈장을..황보세가에서 어떻게 그런 마공을 익힐 수 있죠?"
잔뜩 가라앉은 음성으로 나지막이 황보두균에게 질문을 하는 악서령, 그녀의 두눈에는 아
직 놀란 기색이 사라져 있지 않았다. 악서령이 지금껏 듣고 배우고 알기에는 저 무공은 무
림에 나타나서는 안되는 무공이었다. 더군다나 정파의 일세라 할 수 있는 오대세가 중 황보
세가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사혈기가 완전히 체내를 휘감아 핏빛의 광채를 뿌려대는 황보두균이 눈에서 잔혹한 혈살광
을 흘리며 그 말에 대답을 하였다.
"크흐흐..네 깟 계집이 그걸 알아서 무얼 하겠느냐? 사혈장을 알고 있으니 그 무서움도 알고
있겠지? 크크크..걱정마라. 네년을 단숨에 죽이지는 않을 테니..두고 두고 귀여워해주마. 크캇
캇캇!"
마공때문인지 목소리가 거칠고 탁하게 변한 황보두균이 눈을 번뜩이며 발가벗은 악서령을
노려보며 괴소를 흘려대었다. 긴장감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악서령의 나신은 팽
팽하게 일어서 있었다. 검은 윤기를 내는 머릿결이 가슴과 상체 일부분을 가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하얀 몸 그대로 적나라하게 중인들 앞에 드러낸 악서령의 전신은 근육줄기 한올 한
올이 경직되어 있었다. 앞선 몇몇의 황보세가의 무사들을 베는 도중에 솟구쳐 오른 핏방울
들이 악서령의 나신에 점점히 묻어 일부는 선을 그리며 악서령의 몸의 곡선을 따라 흘러 내
렸다. 적과 백의 조화, 하이얀 맨몸에 기하학적으로 새겨진 붉은 점과 선들이 생사가 걸린
싸움에서 미묘한 조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광경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환의 눈은 황보두균이나 악서령이 아닌 다른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황보세가의 남아 있는 무인들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얼굴에 혼란과 경악이
뒤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황보두균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 담겨있는 당혹스러움과 불안
한 마음이 아환의 눈에 들어왔다.
'황보세가에서 저 사혈장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군. 저 무리들의 대장격인 사
내외에는 다른 이들은 사혈장이 황보세가에 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인데..흐음..저 사내도
사혈장을 익히고 있었군.'
과연 그 사내 역시 황보두균과 같은 화후는 보이지는 않았지만 양손이 붉게 물들은 상태에
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황보두균과 악서령의 접전이 벌어지면 한수 거들 예정인지
살광을 빛내면서 황보세가와 악서령의 대치상황을 긴장된 자세로 대비하였다.
'무림사화는 거저 얻어진 이름은 아니군. 지난번 목영근과 싸웠을때도 알았지만 한수 위야.
남궁비보다는 경지가 낮다고 하지만 가히 무림의 손꼽히는 후지기수라 평을 들을만해.'
악서령의 절제된 동작이나 자세, 그리고 검결을 짚어나가는 품이 예사가 아님에 감탄을 하
는 아환이었다. 화산이 고심해서 키워낸 후지기수인 악서령은 생각외로 대단하였다. 처음 손
을 써서 악서령을 제압했을때만해도 그녀가 예사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즈음은 알고 있었다.
단지 경험부족으로 아환에게 어이없게 제압을 당하고 몸을 빼앗기자 자포자기한 상태와 차
후에 밝혀질 아환의 특유한 성질 때문에 쉽사리 아환에게 길들여진 것이지 악서령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환에게 성의 노리개로서 각종 수치와 괴롭힘을 당한 것
이 오히려 그녀에게 있어 산만한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그때보다 월등히
고강한 검예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매끄럽고 날씬한 교족이 부드러이 호선을 그으며 측보를 밟아나갔다. 땅에 끌리듯 흙투성
이의 맨발을 한보 한보 내딛으며 악서령은 검을 눕혀 눈 바로 아래와 수평이 되게 한 자세
를 취하면서 살짝 무릎을 굽혀 검의 손잡이를 뒤로 빼내어 검끝으로 황보두균을 겨누었다.
비스듬히 옆으로 선 자세, 가뭇한 수풀은 보일 듯 말 듯 하고 젖가슴은 옆에서 그 탄력있는
돌출된 유방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러한 악서령의 진중하면서도 예기가 흐르는 자세에서 풍겨나오는 상반되는 성적인 매력
이 장내의 남자들의 욕정을 부추김시켰다. 황보두균은 살광과 욕망이 뒤엉킨 눈을 반짝이며
끌어모았던 진기를 양손으로 보내어 사혈기가 집중된 두 장을 내밀어 악서령을 공격해 들어
갔다.
"크앗!"
세차게 땅을 박차고는 위로 솟구쳐 오른 황보두균은 허공에서 발을 위로 한채 양손을 번갈
아 쳐내며 악서령에게 짓쳐들어갔다. 시뻘건 혈광이 달빛에 반사되어 괴기스럽기까지한 황
보두균의 모습은 유부에서 막 뛰쳐나온 마물처럼 보였다.
"매화산휘(梅花散輝)"
영롱한 옥음과 함께 악서령은 그 뻗어오는 혈장을 검으로 베어갔다. 삼검을 휘두르고는 뒤
로 한걸음씩 물러나면서 날씬한 교구를 회전시키며 계속하여 검을 그어대었다. 그러자 순식
간에 허공에 수십송이의 매화검기가 춤을 추었다. 칠절매화검의 한초식, 환검계열의 초식으
로 수많은 환영을 그려내며 황보두균의 사혈장에 맞섰다.
캉!..캉..캉..
연이어 터져나오는 금속성. 놀랍게도 황보두균은 사혈장을 운용한 두 손을 흉흉한 검세사
이에 집어넣은채 일수 일수를 검과 검기에 부딪혔지만 인육(人肉)으로 만들어진 육장(肉掌)
이 아닌듯 쇳소리를 내면서 검을 맨손으로 쳐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피가 배어나오지
않음에 악서령은 대경실색을 하며 잇달아 검을 연달아 휘두르고는 희디흰 몸을 뒤짚어 사혈
장의 권세에서 벗어났다.
두번의 뒤로 물구나무서듯 회전을 하며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 잡은 악서령, 그녀의 가랭이
사이로 희끄무레한 액체가 배어나와 매끈한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얼마전 아환과의 정
사때에 아환이 악서령의 체내 깊숙히 토해넣은 정액들이 악서령의 비처에서 새어나온 것이
었다.
"크크크..아랫도리에서 물을 줄줄 흘리는군. 저 놈이 정액이겠지. 천하의 천향매화이자 화산
의 영애가 정액받이나 하고 있다니..강호의 다른 놈팽이들이 본다면 줄을 서겠군."
짙은 혈광을 뿌리는 황보두균의 입에서 나온 탁한 조소가 악서령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
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치스러운 감정으로 인하여 하얗게 얼굴빛이 탈색되었다. 눈가가
파르르 가늘게 떨리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랫도리 비부에서는 무언가
가 계속하여 흘러내리는 느낌..악서령의 감정은 분노로 전이되고 떨리는 동공은 이내 살광을
뿌리며 황보두균에게 고정되었다.
휘청..
악서령이 다시금 자세를 고쳐잡고 황보두균을 짓쳐들어가려 하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
끼며 악서령은 신형을 비틀거렸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에 힘이 빠졌다. 진기를 끌
어 올리려고 해도 내기의 순환이 원할하지 않아 그것도 잘되지 않았다.
"크크크..사혈장의 이름을 알면 그 무서움도 알텐데.."
'중독..중독이 된것인가?'
황보두균의 괴소가 귓가에 들어오자 현 자신의 몸상태가 어떤지 악서령은 깨달았다. 사혈
독에 중독된 것이리라. 운기를 해보자 진기가 가닥가닥 끊어지고 잘 이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황보두균과 손을 나눌 때 황보두균의 장에서 풍겨나오는 역한 혈향을 맡았다 싶었는데
그게 독기운일 줄이야. 절망감이 찾아들어왔다.
악서령은 어지러움이 점점 심해지자 손에 들고 있던 청하검을 바닥에 내리꼽고는 간신히
발가벗은 나신을 지탱하였다. 거칠어진 호흡으로 가쁘게 숨을 내쉬며 흔들리는 동공으로 황
보두균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뼈를 묻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무서워하던 죽음이
라는 느낌이 생소하게 찾아왔다. 아환에게 사로잡혀 능욕을 당하고 갖은 치욕을 당하면서도
목숨을 끊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넘겨왔던 악서령은 사(死)라는 글자가 현실화됨에 급격히
전신이 떨려왔다.
짧은 순간 여태까지의 기억, 뇌리에 남아있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순식간에 주마
등처럼 악서령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화산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찬사
와 환대를 받으며 성장했던 천향매화였다. 타고난 절세의 미모와 뛰어난 재질로 인하여 촉
망받던 자신이 아환의 마수에 걸려 몸을 망치고 그에게 길들여지고 한밤중에 야산에서 발가
벗고 생사를 가르는 전투를 벌였다. 악서령의 기억에서 가장 선명하고 뚜렷이 부각되는 것
은 기이하게도 불과 보름남짓한 아환과의 관계였다. 고통과 쾌락이 혼재된 시간들..
악서령은 고개를 돌려 아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무언가 그 눈빛에
서 찾기를 바랬지만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자 악서령은 절망의 나락으로 전신이 빠져들어가
는 기분이 들었다.
"살고 싶어요."
악서령의 입에서 한마디 짧은, 그러나 너무나도 절절한 음성이 나직히 새어 나왔다. 귀를
기울려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음성이었지만 여기 모인 무인들 중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순간, 아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싶더니 어느새 아환의 장대한 신형이 오장여의 거리를 단
숨에 좁히고 악서령의 뒤에 나타났다. 그리곤 이어지는 검은 그림자가 황보세가의 무사들을
덮쳤다.
'건곤의 쾌(快)'
단순히 칼을 빠르게 휘두르는 동작, 허나 그 빠름은 이 자리에 있는 황보세가의 인물들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황보두균을 무시하고 아환은 그 뒤에 멍하니 서있는 황보세
가의 정예들에게 패도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
"...커.."
두명의 무사가 미처 감지하기도 전에 수급둘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 상태에서 돌진하던 여
력으로 아환은 한발을 땅에 딛고 몸을 회전시키면서 돌려차기로 또다른 한 사내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억..
마치 수박이 터져 나가듯 산산히 부서지는 머리통. 허연 뇌수와 핏덩이가 튀어 올랐다. 아
환의 쇄각(碎脚)은 사내의 머리를 단지 쳐낸 것이 아닌 뚫고 나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
로 서있던 사내의 머리부분을 훑고 지나갔다. 입윗부분이 아예 날아가버린채 서있던 무사를
뒤로 하고 아환은 발을 갈무리하면서 내딛고 도를 수직으로 내리찍어 다른 한명의 사내, 무
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이미 도신이 사내의 머리윗부분에 닿아있었다.
콰아앗..
동작은 베는 것이나 그 결과는 칼로 베어진 모습이 아니었다. 쇠몽둥이로 커다란 얼음을
부수듯 위에서 내리찍힌 다섯자 정도의 쇳덩이는 머리를 으깨다시피 짓누르며 반으로 쪼개
었고 그 칼은 여력을 잃지 않고 그대로 사내의 전신을 거칠게 반으로 갈라놓았다.
연환동작으로 아환이 튀어나와 두명을 베고 한명을 걷어찬다음 또다른 하나를 반으로 쪼개
놓을때까지 걸린 시간을 불과 한 호흡 남짓, 그 사이에 네명의 사내가 그 형태조차 보존되
지 않은 상태로 죽음을 당했다. 아까 악서령과 교접을 하던 중이라 덜렁거리는 양물을 흔들
면서 아환이 칼을 갈무리하고 구리빛의 근육체를 장내의 중간에 세웠을 때 공터의 사람들은
그제서야 완전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악...악마!.."
"허억.."
푸르스름한 안광이 아환의 눈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귀광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를 괴
기스러운 빛을 내는 아환의 눈이 와 닿자 황보세가의 남은 인물들은 공포에 질려 후들 후들
떨리는 다리로 주춤 주춤 뒷걸음질쳤다.
쿵.
얼굴이 부서져 나간 사내가 그때까지도 서있다가 앞으로 고꾸러졌다. 그러면서 그 머리가
있었던 부위라 짐작되는 부위에서 뭉클 뭉클 말그대로 샘이 솟아 나오듯 쏟아져 나오는 피
의 작은 시내가 아까 칼에 목이 잘린 두 사내의 피와 어울려 작은 웅덩이라 할 정도로 바닥
에 고였다.
"무..무슨 짓이냐? 이..야차 같은 놈!"
"어차피 오늘은 둘 중 하나는 살아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텐데.."]
"이..이...크앗!"
핏발이 선 눈으로 아환을 노려보던 황보두균의 입에서 짐승을 울부짖음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더불어 전신에 퍼져있던 핏빛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사혈장을 극성으로 끌어올
리는 모양이었다.
황보두균이 막 아환을 덮치려할 때 아환은 또다시 신형을 날려 창백하게 질려 부들거리는
황보두균을 제외한 남은 둘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그러면서 빠른 일권. 우두머리격인 사내가
아환이 자신들을 덮쳐오자 헬쓱하게 질린 얼굴로 미약한 성취의 사혈장을 급히 내뻗었다.
비릿하게 퍼져나가는 혈향(血香)..그러나 아환은 이미 악서령을 보고 호흡을 멈춘 상태였다.
아환은 천왕권의 초식으로 전개되는 사혈장을 상체를 숙여 피하면서 그 자세 그대로 몸을
뒤짚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아환의 두 발이 내려찍기의 형태를 취하면서 사내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사내는 서둘러 두 팔을 위로 쳐들어 십자로 교차하여 아환의 파각(破脚)을
막았다.
우지직..
"크어억!"
아환의 파각은 대장의 막은 두 팔을 부러뜨리며 그 여세를 잃지 않고 대장의 머리 윗부분
을 움푹 함몰시켰다. 파괴된 두골의 틈새로 선홍빛의 핏덩이와 허이연 뇌수가 흘러나와 분
홍빛의 액체로 혼합되어 까뒤짚어진 눈가를 타고 흘러 내렸다.
"아아악!"
남은 한 사내가 더 이상은 그 공포에서 참지 못하겠는지 비명을 계속해 지르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하였다. 도주였다. 그의 뇌리에는 이제 아무 생각도 없고
오로지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휘이잇!
도망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인지 아환의 손에서 그 커다란 검은 칼이 마치 창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아갔다.
"컥!"
달려가던 사내의 등에 정확히 격중된 패도는 길쭉한 구멍을 남기고는 사내의 몸을 뚫고 지
나갔다. 그 속도와 무게감으로 인하여 한참을 날라가던 사내가 마침내 바닥에 뒹굴고 이윽
고 그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장내에 살아 남아 있는 것은 황보두균과 아환, 그리고 다리를
벌리고 풀썩 주저 앉아 비처를 속속들이 내보이는 악서령, 중상을 입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황보세가의 두 사내뿐이었다.
짧은 시간에 황보세가의 정예 아홉을 처참하게 잃은 황보두균의 심정은 분노로 터질 것만
같았다. 하찮은 쥐새끼 한마리를 잡으려다 쥐에게 물린 꼴이 되버리자 황보두균은 살심이
극에 달하였다.
"허! 이제 말할 입이 하나 남았네."
이죽거리는 음성이 들려 왔다. 핏발서린 눈으로 아환을 노려보던 황보두균은 급기야 팽배
해 있던 사혈기를 양 장심에 집중시키고는 전력을 다해 아환에게 발출했다.
"크아아!! 죽어라! 이 악마 같은 놈!"
'건곤의 화(化)'
내심 중얼거리며 아환은 쇄도해 들어오는 황보두균의 경기를 양 손을 뻗어 두 손을 앞으로
뻗은 황보두균의 안쪽에서 부드러히 휘감아 갔다. 황보두균은 아환의 팔이 자신의 양 팔을
감자 사혈기로 단단해진 두 팔로 아환의 양손을 파쇄하려 마주 쥐려하였다. 그러나 아환의
두 손은 황보두균의 양 팔꿈치를 잡고는 힘을 가해 팔의 관절을 틀어 사혈장이 발출된 황보
두균의 양 장심을 황보두균의 가슴으로 돌려 버렸다.
퍼어엉!
가죽북이 터져 나가는 듯한 기성이 들리면서 실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가는 황보두균, 그
의 가슴부근의 옷이 산산히 찢겨져 나가고 그 맨살위에 선명히 손바닥 자국이 남겨졌다. 동
시에 아환은 황보두균의 신형을 뒤쫓아 따라가더니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는 황보두균의
가슴을 그대로 발로 밟았다.
꽈직!
"커어어.."
튀어나올듯 부릅뜬 눈. 황보두균은 가까스로 손을 쳐들고 상체를 일으키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면서 아환을 노려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다.
"화...황보....형..."
풀썩.
땅에 머리가 떨어졌다. 원한이 깊은지 눈꼬리가 찢어질 정도로 눈을 한껏 뜬채 황보두균은
생명의 끈을 놓았다.
아환은 황보두균의 가슴을 밟고 있던 발을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남근을 덜렁거
리며 주저 앉아 의식을 잃고 있는 악서령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자리에 앉아 장심을 악서령
의 등뒤에 대었다.
"으으.."
나직한 신음을 흘리면서 악서령이 눈을 떴다. 동이 틀려면 얼마 남지 않았는지 검푸른 기
운이 맴돌고 있는 산중이었다. 차가운 새벽녘의 한기가 맨살의 피부에 와닿았다. 오싹한 기
분이 들면서 악서령은 무의식적으로 상체를 일으키고 두 팔을 감싸 안다가 자신이 아무 것
도 걸치지 않았음을 알고 흠칫 했지만 이내 차분히 어제의 일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녀의 기억은 아환에게 말을 하지 이전,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머릿속에 전혀 떠오
르지 않았다. 악서령은 사혈독에 생각이 미치자 급히 체내의 진기를 끌어 올려 보았다. 그러
자 아무런 이상 없이 순환되는 내기, 오히려 어제보다 더 충만한 느낌이 들고 단전과 기해
에서 용솟음치는 강렬한 기운에 악서령은 가볍게 놀랐다. 독기가 치유되고 게다가 내기마저
보다 정순해졌다.
악서려은 찬찬히 눈을 돌려 주변을 살펴 보았다. 먼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벌거 벗은 아환이 눈에 띄었고 다른 쪽을 쳐다보자 나뒹굴고 있는 시체들이 보
였다. 어제 황보세가의 무사들이었다. 잔혹한 살상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현장, 악서령
은 이내 고개를 돌려 그것을 외면하고 다시금 아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환은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며 누워있었다. 악서령이 몸을 일으
키려고 손을 옆으로 짚자 차디찬 금속성이 손에 만져졌다. 무심코 돌린 눈에 그녀의 보검인
청하검이 들어왔다. 악서령은 자신도 모르게 그 청하검을 쥐었다. 그리고 위로 치켜 들고는
청하검을 훑어 보았다. 어제 벤 사람들의 피와 노르스름한 기름기가 엉켜붙어 있었다. 검을
손에 쥔채 악서령은 몸을 살포시 일으켜서 아환에게 다가갔다.
악서령은 아환에게 다가간 그 자세에서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모습 그대로 잠시 서있다가
천천히 손을 밑으로 내렸다. 그리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녀의 검집을 집어든다음 청하검
을 검집에 밀어넣고는 한 구석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런 후에 아환의 허벅지 옆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더니 머릿결을 한쪽으로 정돈을 하고는 얼굴을 아래쪽으로 가져갔다.
살며시 벌린 붉은 입술이 사내의 남근을 한입 베어물 듯 입안으로 끌어당겼다. 악서령은
무릎을 꿇은 그 자세를 잃지 않고 한손으로 아환의 양물 아랫쪽의 고환을 감싸고 있는 주머
니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정성껏 혀와 입을 놀려 아환의 양물을 애무하는데 온힘을 기울였
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51번째 올림 창작야설
(2)
스읏..
"커억!"
무엇인가가 예리한 물체가 어딘가를 파고 드는 듯한 기성이 들리더니 이어지는 사람의 비
명소리가 형산의 한 봉우리 선라봉을 잔잔히 흔들었다.
석자가 채 되지 않는 푸른 검신이 영롱한 빛을 희미한 새벽의 미광(微光)에 반사시켰다. 틀
림없이 병기, 그것도 검은 인명을 살상하기 위하여 개발되고 발전된 터, 지금 희디흰 아름다
운 손에 들린 검, 청하(靑霞)라 명명된 검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간밤에 황보세가와의 접전에서 악서령이 휘두른 첫 검초에 두 명의 중상자가 생겼다. 그
둘의 중상을 입은 자는 재빠른 황보세가의 다른 이들에게 응급처치를 받고 한쪽 구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있었다. 그리곤 밤이 지나고 황보세가의 정예들은 황보두균을 비롯, 중
상을 입은 둘을 제외하고는 전원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창백히 질린 안색을 한 무사 한명이 누워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고 하였
다. 저 앞에 무심히 자신을 향해 검을 늘어 뜨리고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자. 그러나 그의 눈
가에 들어오는 모습은 나찰이요, 사신의 모습이었다.
"악...악소저. 제발..제발 살려주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제발..제발..커어.."
크게 부릅뜨여진 두 눈, 부들 부들 떨면서 검을 쥔 여인 악서령을 움켜잡으며 손을 뻗던
사내가 급기야 눈을 뜬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츠으읏..
사내의 목에서 검을 빼낸 악서령은 주변의 천 조가리를 들더니 검신을 가볍게 한번 닦은
후 어느새 단정히 갖추어 입은 하얀 백라의를 날리면서 아환에게 다시 돌아왔다.
"마지막 남은 입을 없앴어요."
".."
고개를 끄덕이던 아환,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이 일순 반짝였다. 황보두균이 쓰
러져 있던 자리에 황보두균의 시체가 보이질 않았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황보두균의
것이라 짐작되는 옷가지와 몇가지 소지품들..그리고 새빨간 핏물이 황보두균을 대신해 고여
있었다. 그와 함께 사혈장을 익혔던 황보세가의 정예중의 대장 격인 사내역시 두 손이 사라
지고 점차 그 부위부터 녹아내리는 처참한 모습이 아환의 눈에 들어왔다.
"사혈독기 때문입니다. 사혈공을 익힌 자들은 죽은 후 저런 꼴이 된다고 하더군요."
"사혈공? 사혈장 말고 또 다른 계열의 무공이 있나? 설명 좀 해봐."
"예. 사혈공은..."
악서령은 자신이 아는 바를 아환에게 충실하게 설명을 하였으며 아환은 묵묵히 듣고 있었
다. 세밀한 부분까지 악서령은 최대한 자신의 지식을 짜내어서 아환의 의문을 충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 사혈공은 크게 장법과 검공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허나 무엇보다도 사혈공
이 무림의 사람들에게 금기시된 이유가 몽고의 무예라는 것에 있습니다."
"몽고의 무예?"
"예. 현 원나라에 의하여 송이 멸망하기전이지요. 백이십여년전 세외에서 무서운 무공을 사
용하는 이들이 강호에 나타났습니다. 흑천사(黑天師)와 그의 좌우 쌍위인 사혈마군(死血魔
君), 음양귀(陰陽鬼)라 하던 자들이지요. 스스로를 몽고 출신이라 말하던 이 세 괴인들은 각
파를 돌아다니면서 비무를 청했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암담했습니다. 오파를 비롯하여 내노
라하는 세가들과 기타 여러 강대한 문파들이 이들의 손에 부지기수로 봉문을 당했으니까요.
이들은 중원을 평한다면서 은거한 기인들까지 찾아다니면서 거의 삼년에 걸친 비무행을 했
지요. 그동안 패배를 몰랐고 마침내 전 중원이 이들의 손에 굴복을 할 지경이었지요. 그러다
아직까지 무림의 불가사의로 꼽히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흑천사와 사혈마군이 주
검으로 발견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장소가 온통 파헤쳐지
고 난장판이 된것으로 보아 초절한 무위를 지닌 이들이 격투를 벌인 것으로 짐작되기만 할
뿐..여하튼 그들의 무림행은 멈추었고 한동안이나마 무림은 평안을 되찾았지요."
"그럼 음양귀는?"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 오랫동안 그의 자취가 발견되지 않아 사람들은
그 역시 죽지 않았나 여기었지만 그의 기공이 워낙 특이하고 무서워서.."
"기공(寄功)?"
"예. 앞서 말씀드린 사혈공은 사혈마군의 독문 무공이었습니다. 그리고 흑천사는 기검(氣劍)
이라는 놀라운 무예를 선보였지요. 일종의 강기로 펼쳐내는 심검(心劍)입니다. 누구도 이 흑
천사를 못막았다 합니다. 그리고 음양귀는 그의 괴 신체에 걸맞는 무공을 익혀 오히려 앞선
둘보다 무예 수준을 떨어지지만 그 공포스러운 악명이 더 높은 인물입니다.
음양귀는 음양혼원신(陰陽混原身)이라는 어찌 보면 천형이라 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지고 태
어났습니다. 한 몸에 남녀의 성기가 혼재되어 있었던 거지요. 그리하여 태어나면서 기형으로
인한 괴물로 취급받던 그가 어떤 기연으로 인하여 성(性)을 마음대로 조정을 할 수가 있게
되고 그로 인하여 음양계열의 무예를 대성하여 일가를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각종
사술과 이술에 능하여 그를 보았던 자들은 모두 그가 어떤 모습인지 형용하는 것에 각각 틀
리게 묘사를 합니다. 이런 연유로 그에 대한 공포심은 오히려 다른 두 인물보다 더 심한 편
이지요. 아직까지 그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니까요. 물론 백년이 넘는 시간
이 흘러 인세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짐작정도만.."
"그래? 흐음..음양귀라.."
"이상입니다."
"그럼 흑천사와 사혈마군은?"
"예?"
"흑천사와 사혈마군의 출신과정은?"
"아! 그들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왜?"
"그것은 저도 잘.."
"기이한 일이군. 오히려 가장 비밀스러워야 할 인물의 출신은 그토록 자세히 알려져 있고,
오히려 그보다 훨씬 이름을 날릴만한 인물들의 과거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니..흐음.."
"그것은 아마 살아남은 음양귀의 공포가 커서 중원의 각 문파에서 그를 알아 보려고 한 것
이 아닐까요?"
"과연 그럴까?...."
아환은 말을 흐릿하게 맺더니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거의 차한잔 마실시간이 흘러서야
아환은 생각을 정리하고 시체들과 잔해들을 한곳에 모은 후 뒷처리를 마치고 대략 반시진이
흐른 후 악서령과 함께 산을 내려갔다.
객잔은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부산하였다. 남궁비를 비롯하여 사화, 그리고 어
제 사화지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여러 탁자에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조반을 들고 있었
다. 개중에는 남궁비와 악서령을 제외한 나머지 삼화가 함께 한 탁자에 연신 눈길을 보내면
서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자들도 꽤 있었다.
차르르르..
객점의 주렴이 걷히고 악서령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들어섰다. 어느새 옷을 갈아 입었
는지 연한 주황색 비단 궁장을 갖추어 입고 주렴을 걷었다. 뒤이어 따라 들어오는 아환, 중
인들은 주렴 소리에 눈을 돌리다 악서령을 발견하고 수군거리며 악서령에게 시선을 고정시
켰다. 그러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아환에게도 시선을 주면서 악서령과 아환의 관계
를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어서오시오. 주형. 악소저. 아침 산책을 다녀 오시는 중이시오? 조반을 같이 하자고 연락을
드렸는데 객실에 계시지 않는다 하기에.."
"예. 잠시 산책을 다녀왔어요."
악서령이 짧게 남궁비의 말을 받고는 한쪽의 탁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궁비와 유가형등
의 자리가 충분한데도 다른 자리로 몸을 돌리자 제갈수란이 합석을 청하였다.
"악언니, 이리로 오셔서 같이 앉으시지요? 주소협도 이쪽으로 오세요."
"그러지요."
아환이 대답을 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가서 빈자리에 앉자 뒤를 이어 악서령도 당연한 듯 따
라와서 아환의 옆자리에 사뿐히 둔부를 붙였다. 그 모습을 남궁비등을 포함, 객잔안의 여러
인물들이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았다.
간단히 몇가지 음식을 주문한 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대화가 이어졌다.
"편히 쉬셨습니까? 악소저. 그런데 어제 오늘 사이에 기도가 많이 변한듯 싶습니다. 어떤 기
연이라도 얻으셨는지요."
"그래요, 언니. 정말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보여요. 좋은 일이 있었어요?"
아닌게 아니라 악서령에게서 풍겨나오는 기도가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다소 불안정한
모습에 지쳐보이는 악서령의 신태가 아침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눈이 고정되고 잘 가라앉
아 있었으며 전신에서 풍기던 화사한 밝은 기도가 은연한 기세로 변화되었고 동작하나하나
가 잘 절제되어 있음이 역력히 드러났다. 게다가 그 아름다운 교구에서는 미약하나마 무형
지기마저 감지되는 실정이니 어찌 후지기수 중 제일이라 칭함받는 이들이 모를 수 있으랴?
기실 악서령은 어젯밤의 일을 겪은 후 심신상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아환의 진기와 음양
신단의 호력으로 인하여 내기의 증진도 이루어 졌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인 심마로 인하여
. 끊임없이 흔들리고 안정되어 있지 않던 마음이 하나로 결정이 되었다. 그로 인하여 악서령
은 한단계 무위를 진일보시킬 수 있어 이제는 화경의 단계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경지에 올
라설 수 있었다. 이는 당장 이 자리에 있는 남궁비와 검을 나누더라도 능히 밀리지 않을 정
도였다.
"별다른 것은 없었어요. 단지 내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했을뿐.."
"위치? 그게 무슨 말이예요, 언니?"
"말그대로야."
제갈수란이 악서령의 말에 그 총명한 머리로도 이해가 잘되지 않는 듯이 재차 질문을 해대
었지만 악서령은 더 이상의 말을 하고 싶지 않은지 짧게 말을 맺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모습에 제갈수란을 비롯 세인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악서령의 태도에 강한 궁금증이 생겨
났다.
평소 여인들이 모이면 세세한 일상사까지 수다로 풀어 놓던 사이들이었다. 악서령 역시 사
화들이 모이면 재잘거리며 시시콜콜한 것가지 다 털어놓고 웃음꽃을 피우곤 하였었는데 갑
자기 변한 악서령의 모습이 제갈수란과 유가형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궁형, 그런데 수형이 보이지 않는 군요."
"아! 수형은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어제 저녁에 천궁의 귀인과 함께 형산파로 들어갔지요.
듣자하니 근래에 이 곳에 유명사신이 나타나서 그것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형산파에
서 오파에 서신을 보내어 협조를 요청하였고 무당과 곤륜에서 나섰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황보형도 보이지 않는 군요. 세가로 돌아갔나..."
"..."
어제 유명사신을 만난 적이 있는 아환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남궁비의 말을 들었다. 시선
도 돌리지 않고 전혀 얼굴에 표정이 나타나 있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옆에 앉아 있던 제갈
수란의 눈가에 이채가 맴돌았다.
아환의 아무런 대답의 없음에 장내에 일순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그때 음식이 나왔고 이
미 식사를 마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아환과 악서령은 젓가락을 들고 음식에 가져갔다. 그런
아환과 악서령을 중인들은 아무런 말 없이 지켜보기만 하였다.
얼마간의 식사시간이 흐른뒤 사람들은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면서 환담을 다시 시작하였
다.
"주형, 그런데 주형은 어디 출신이시오?"
"그냥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서 특별히 어디라 말씀드릴 것은 없소."
"유년기에 고생을 많이 하시었군요."
"고생이라.."
말끝을 흐리는 아환, 남궁비는 급히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주형은 형산에 와 보신적이 있소?"
"이번이 처음이오."
"그럼 오신 김에 형산을 한번 둘러 보지 않겠소? 여러 청년 영웅들과의 친교도 나눌 겸 형
산에 한번 오릅시다."
아환이 남궁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고 깊어보이는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열망이
랄까? 여하튼 아환에게 이상할 정도의 간절한 감정이 전달되었다. 내심 기이한 느낌이 들었
지만 아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미세하게 남궁비의 안색이 희색을 띄었다. 내놓고 반가운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상당히 반색한다는 느낌이었다. 남궁비외에 아환의 말을 듣고 얼굴색과 눈
빛을 변화시킨 것은 유가형과 제갈수란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기대감이랄까? 아니면..
식사를 마친후 중인들은 각자의 객실에 들어가서 가볍게 짐을 정리한 후 모여서 산을 향했
다. 일행은 아환을 비롯하여 남궁비와 사화, 그리고 뒤따라 몇몇의 군웅들이 딴청을 피우며
아환등을 좇았다.
중인들은 어제 올랐던 선라봉쪽으로 일단 행보를 정했다. 어차피 가벼운 산행을 하기로 마
음을 먹은 만큼 굳이 험한 산세를 고를 필요는 없었고 또 대부분의 산들이 그렇듯이 봉우리
들이 서로 이어지듯 되어 있어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선라봉으로 발걸음을 옮겼
다.
모두 한가닥은 한다하는 무림인들인지라 산을 오르는 것은 그리 큰 불편이 없었다. 약간의
진기를 운용하는 경신술만으로도 산길을 걷는 것은 무난했기에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
는 등산을 군중들은 즐겼다.
산을 오르면서 사화를 비롯한 여인들, 사화와 또 군웅중의 여인 셋이 더 합류하여 재잘거
리면서 밝은 교성을 발했다. 주로 말을 하는 것은 새로 합류한 여인, 명문가의 후예들이었으
며 유가형과 악서령, 석영은 가볍게 대답을 할뿐 그들과 적극적으로 말을 나누는 것은 제갈
수란밖에 없었다.
사내들 역시 여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환과 남궁비 둘이 나란히 걷고 있다가 어느새 그
들의 뒤를 좇은 사내들이 합류하여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그들은 평소 흠모하던 남궁
비와 동행한다는 것에 흥분이 되는지 상기된 얼굴로 열띤 음성을 토해내었다. 그때마다 남
궁비는 가볍게 대꾸를 하거나 고개를 끄덕여 응대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아환에게도 몇 차
례 질문과 대화가 들어왔으나 아환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에게 신경을 끄고서 남궁비
에게 집중적으로 말을 붙이는 형편이었다.
대화라봐야 별 것 없었다. 여자들은 산세의 기경에 탄성을 터뜨리면서 서로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소소한 일상사에 대하여 교소를 터뜨리면서 수다를 해대었다. 그러면서 은근한 자
기의 학식과 무공등에 대한 자랑이나 자기 배경에 대한 우월감등이 대화속에 배어나왔다.
이는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자기 자랑이나 무용담, 그리고 무림의 정세에 대하여
의견을 피력하는 등 소위 말하는 잘난체하기에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 중 지금은 몰락하여 간간히 명맥만 이어가는 백리세가의 백홍검 백리석이라는 자는 거
의 노골적으로 자신의 세가와 과거 백리세가가 무림의 일파로서 융성할 때를 지속적으로 설
파해대는데 아환은 질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남궁비는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일일히 그의
말을 다 받아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걸음을 걷다가 불쑥 아환이 남궁비에게 말을 건네었다.
"남궁형. 축융봉은 어디요?"
"아, 축융봉은 저쪽 길로 가면 되지요, 지금 오르고 있는 선라봉과 이웃해서 자리를 잡고 있
습니다. 왜 그쪽으로 가시겠습니까?"
"형산제일봉이라 들어서 한번 갔으면 좋겠소만.."
"그럼 그러지요. 축융봉으로 가십시다."
다른 이들에게는 짧게 대답하던 남궁비가 안면에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아환의 제의에 곧
바로 응하였다. 무림제일의 기남아, 웃음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여인들의 가슴을 저리게 할만
큼 빼어난 용모를 가진 남궁비답게 그를 힐끔거리면서 보던 사화를 제외한 다른 여인들이
일순 멍하니 남궁비를 쳐다보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들과 같이 있던 사화 등은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그들 역시 남궁비의 군계일학적인 용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단,
기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제갈수란을 빼놓고는..
사내들은 지금껏 자신들과의 대화에는 건성에 가까운 대답만 하던 남궁비가 아환의 말에
반색을 하는 것을 보고는 눈에 불이 났다. 질투, 사내들의 이기적인 질시가 눈에 역력히 보
였다. 그러나 남궁비는 그런 사내들의 반응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아환과 발을 나란히 하
여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선라봉의 중턱 즈음에 일행들이 도달하자 어느덧 시간은 점심때, 사람들은 주섬주섬 짐을
끌러 가져온 육포와 기타 몇가지 음식을 꺼내었고 여인들은 한쪽에 모여 사내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환이나 남궁비가 솔선해서 자리를 마련하자 다른 이들도 마지 못해 일
을 도왔다. 그들 생각에는 아환이 어제 강한 무위를 보여주었다고는 하나 배경을 밝히지 못
할 정도로 비천한 출신이라 생각했기에 아환이 당연히 자리를 마련하겠거니 생각하는 이들
도 상당수 였다.
빙둘러 앉아 음식을 먹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남궁비를 중심으로 그의 왼쪽에 아환이 오른
쪽에 유가형이 앉았다. 악서령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환의 왼쪽에 앉
아 조용히 음식을 들었다. 또 그옆에는 석영이 유가형 옆에는 제갈수란이 앉는 형태였다. 아
환은 육포를 뜯어 입에 가져가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채 묵묵히 씹어 삼켰다.
악서령과 석영은 그냥 무표정하게 젓가락을 깨작거리며 음식을 들었고 유가형은 얼굴에 약
간의 수심이 담긴채 그냥 물잔만 홀짝였다. 그런 분위기가 무거웠을까? 아환과 남궁비를 따
라온 사내들 중 하나가 낭랑히 소리를 높여 시 한수를 읊는다.
山中問答 왜 산에 사느냐 묻길래
問余何事棲碧山 왜 산에 사느냐 묻길래
笑而不答心自閒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 아니했지.
桃花流水杳然去 복사꽃잎 아득히 물에 떠 가는 곳
別有天地非人間 여기는 별천지라 인간 세상 아니라네.
이백의 시 한수. 당송시대의 풍류 대문호인 이태백의 시를 멋들어지게 흩뿌렸다. 군웅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몰려 그의 우쭐거림을 부추겼다.
"허어..자연의 아름다움에 저도 모르게 미천한 학식을 보였군요."
말은 그렇게 해도 사람들의 자신에게 향하는 관심이 뿌듯한지 얼굴에 자부심이 그득했다.
아닌게 아니라 사화를 제외한 나머지 세 여인들이 몽롱한 눈을 해 가지고 이들을 바라보았
다.
"너무 멋져요. 장공자님."
"강소성의 운학일룡이 풍류가 으뜸이라던데 그 말이 맞군요."
"장공자님은 무공만큼이나 그 학식이 깊으신 것 같아요."
강소성에서 제법 이름난 문파인 상운보라는 곳의 소보주인 운학일룡 장궁이라는 사내가 그
렇게 여인들과 말로서 유희를 즐기며 히히덕거리자 백리세가의 사내와 다른 남자들이 합세
를 하여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싯구를 인용하는 등 여인들의 눈에 잘 보이려 노력을 하였
다.
그때였다.
퍼엉..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닌지라 그렇게 큰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검고 하얀 연
기를 뿌려대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일제히 중인들이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저긴 축융봉 쪽인데.."
"무슨 일이지? 저건 무림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신호탄같아 보이는 군."
"형산파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형산파의 세력권 안인데?"
의아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할때에 갑자기 긴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서 병장기 소리 일단의 무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얼마되지 않아 가까워졌다.
중인들은 서둘러 자리를 정비하고 저마다의 병장기쪽에 손을 갖다대고는 소리가 들려온쪽
을 지긋이 지켜보았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52번째 올림 창작야설
(3)
타타탁..탁...타탁..
무엇, 사람의 발소리라 짐작되는 발소리가 여러 차례 들려왔다. 점점 그 소리가 가까워 지
는 것으로 보아 이 쪽을 향해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아환 등의 중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
고 언제라도 출수할 준비를 완료한 상태에서 곧 들이닥칠 상황을 기다렸다. 짓쳐오는 이들
의 속도가 매우 빠른지라 범상치 않은 자들임을 깨달은 사람들은 예리하게 눈을 빛내었다.
츄츠츠츳...
숲이 갈라지며 수명의 푸른 인영들이 튀어 나왔다. 저마다 형형히 빛나는 안광에 예리하게
날이 선 장검을 든 채로 숲속으로부터 나온 청의의 인물들은 장내에 무리지어 있는 아환등
이 있음을 알고는 경신술을 멈추었다. 그리곤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은채 검을 세워 경계를
하였다.
" 형산의 곽사량이요. 어디서 오신 분들이시오?"
신중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비굴해보이지도 않은 당당한 기개가 엿보이
는 청의의 무리들 중 삼십대로 보이는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와 검을 쥔손을 뒤집어 포권의
예를 취하였다.
" 소생은 하남의 남궁비오. 동도들과 형산을 둘러 보고 있었소."
은연중에 일행들의 영도자로 여기어지는 남궁비가 손을 들어 포권의 예를 취하면서 곽사량
의 질문에 답을 하였다. 그러자 깜짝 놀라는 곽사량,
" 만검창룡 남궁비, 남궁소협이셨군요. 곽모의 결례를 용서하시오."
" 별말씀을..형산의 용검(勇劍)을 뵙게 되어 소생이 오히려 영광입니다."
" 그런데..아! 그렇지요. 사화지연..사화지연이 이번에 형산에서 있었지요. 사화지연의 일로
형산에 오신 것입니까?그렇다면 무림사화와 다른 영웅들이시겠군요."
몇번의 포권을 거듭하는 곽사량.
" 예. 저희 일행은 그렇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남궁비, 아무래도 타 문파의 일이라 대놓고 당신들은 왜 이렇게 급박하게
이쪽으로 달려왔냐고 묻기가 곤란해서 은근슬쩍 물음을 던졌다.
" 저희는 마두 하나를 쫓고 있었습니다. 몰래 형산에 침입을 하여 장문인과 여러 형산의 문
도를 상해하고는 도주한 악랄한 마두입니다. 혹시 괴인영을 보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심각하게 인상이 굳어지며 곽사량이 남궁비의 말에 대답을 하였다.
" 못보았습니다. 장문인께서는 큰 부상을 입으셨습니까?"
" 가볍지는 않습니다만..죄송합니다. 더 이상 말씀을 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차후에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문파의 일을 계속 행해야겠습니다. 영웅들께 결례에 다시한번 거
듭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곽사량과 청의의 사내들은 예를 가볍게 취하더니 이내 다른 쪽으로 달려가 이내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일행들은 형산의 문도들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눈을 계속 돌리다가 곧
그들이 보이지 않자 시선을 떼었다.
" 유명사신이 왔다던데 그 악랄한 마두가 형산에 침입을 했단 말인가?"
운학일룡이라 불리우는 장씨성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유명사신이 왔었다는 것을 알
고 접한 아환과 사화, 남궁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안색이 무겁게 변하였다.
" 듣자하니 그 마두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긴다던데.."
사화와 같이 있던 여인들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유명사신에 대하여 들은 바를 뱉어
내었다. 같이 있는 여인 둘 역시 마찬가지. 그것을 본 제갈수란이 그들을 진정시키고는 슬쩍
아환을 보는듯 마는듯 독백을 한다.
" 유명사신이라..흐음..그가 형산에는 무슨 일로.."
아환은 제갈수란의 눈길을 무시했다. 그러고는 남궁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건네었다.
" 남궁형. 축융봉이 흉흉한 것 같소이다."
" 그러게 말이오. 허. 이를 어쩐다.."
" 다른 곳으로 가십시다."
" 예. 그게 좋겠습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누구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여인들은 더더욱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어했다. 일행은 대충 자리를 정돈하고는 짐을 챙켜 가던 길의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얼마 길을 걷다 방향을 틀어 축융봉이 아닌 다른 쪽의 길로 발을 들여 놓고는 느긋
하게 걸음을 늦추어 새로운 경치를 바라보며 아까 뜻밖의 상황으로 중단된 산행을 즐기면서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한동안을 노닥거리면서 산을 오르던 일행들은 해가 뉘엇 뉘엇 지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
하자 서둘러 하룻밤 노숙을 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행을 일몰전에 마치고 산을
내려와 숙소에서 묵기로 하였지만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 시간을 놓쳐서 미처 하산준비를 하
기도 전에 해가 저물자 밤의 운치라든지 오악의 야경등을 말하면서 밤을 산에서 지내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하였었다. 무림인들이어서 산속의 짐승이나 기타 돌발상황에 대처할 능력
은 충분하였기에 노숙에 그리 큰 부담은 갖지 않았다. 단지 여인들이 화장이나 기타 옷매무
새 등으로 칭얼거렸지만 사화들 중 누구도 거부를 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그러하기로 의견
이 모아졌다.
그러한 일행들의 눈앞에 마땅한 장소가 나타났다. 그리 폭이 크지 않은 시냇가가 흐르는
비교적 다른 곳보다는 평탄한 지형이 눈에 띄었다. 사내들은 나서서 바닥의 자갈과 박힌 돌
등을 제거하여 평평하게 만든다음 준비해간 모포 등으로 약식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계절
상 여름이라지만 산중의 밤의 온도는 높지 않고 오히려 서늘한 기운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
나 일행 모두가 내공을 익힌 무인들이었기에 별 어려움이 없이 하루를 묵을 준비를 마쳤다.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육포와 여러 간단한 요깃거리로 배를 채운 중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환은 혼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왼쪽의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남
궁비와 사화가 같이 산보할 것을 제의했으나 아환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장대한 몸을 날려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남궁비와 사화를 제외한 사내들 넷과 여인들 셋도 끼리끼리 흩
어져 발걸음을 옮겼다.
숲속으로 들어간 아환은 걸음을 바삐 걸으면서 전신의 감각을 곤두세워 주변을 경계하였
다. 혹 누군가가 자신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예리하게 시선을 빛내면
서 산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그리고는 산중의 우거진 수풀속, 여간해서는 외부에서 찾
기 힘든 장소를 물색한다음 그곳에 가부좌를 틀고는 운공을 하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어 조식과 지식을 반복하며 내기를 운용하였다. 무상심결의 구결에
따라 끌어올린 진기를 온몸의 혈도와 경맥으로 밀어내어 순환을 시켰다. 그러면서 점점 아
환은 무아지경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수련에 힘쓰지 못하였던지라 아환은 운기조식을 하면
서 진기를 다스렸다. 그의 주위에 무형의 기운이 모여들었다. 이내 그 무형의 기운들은 중첩
이 되면서 유형화되다가 어느 순간 둥그런 고리 형태를 만들었다. 새하얀 빛을 내는 다섯개
의 고리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오기조원...
그로부터 시진 가량이 지났다. 그때까지 아환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부좌를 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 고리가 점점 그 모양과 색채를 선명하게 형성하는 순간 그 기환(氣環)들은
스며들 듯 아환의 체내로 사라졌고 크게 숨을 토해내며 아환이 눈을 떴다.
번쩍!
날이 이미 저물어 컴컴한 산중에 번갯불이 번쩍였다. 길지 않은 시간, 운공을 행한 아환은
자리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진기의 일주천덕분에 가뿐해진 몸과 상쾌한 기분을 느낀 아환
은 화타오금세를 풀면서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태극을 그리면서 그의 밟이 일정한 방위를 밟고 체조를 하듯 유연하게 그의 거구가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하나하나의 형(形)과 식(式)을 그려내었다. 용맹한 호랑이가, 웅장한
곰이, 우아한 학의 날개짓이 그의 몸에서 펼쳐졌다.
아환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신비로운 용(龍)의 승천을 마지막으로 화타오금세를 마무리
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들어 축융봉쪽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간간히 솟아 오르던 화전(火箭)도 더 이상 허
공에 그 빛의 선을 그리지 않았다. 허나 언뜻 언뜻 희미한 불빛들이 축융봉의 근처에서 보
이는 것으로 보아 아직 상황이 종료된 것같지는 않았다.
' 유명사신이 잡히지는 않은 것 같군.'
술한잔 받은 것외엔 별다른 관련이 없었기에 아환은 그쪽에서 신경을 끄고 발을 들어 왔던
길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어려서부터 산에서 많이 생활한 그이기에 이깟 어둠이나 험한
산세는 전혀 문제가 될게 없었다.
내려오는 아환의 귓가에 희미하게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신음성 같기도 하고 무언
가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이 감지되자 아환은 발을 멈추고 신경을 그쪽으로 집중시켰다. 여
러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남자의 소리도 여자의 소리도 들려왔다. 아환은 기척을 죽이고
신형을 날려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곳에는 세명의 사람이 뒤엉켜 있었다. 두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 특이한 것은 여인은
완전히 옷을 다 벗고 있어 적나라한 그 흰 나신을 드러내고 있었고 사내들은 하의만 벗고
있는 상태였다. 한 사내는 여인의 앞쪽에 또다른 사내는 여인의 뒤에서 열심히 엎드려있는
여인의 뒤를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밤하늘에 떠있는 달은 짙은 구름에 가려져 그 빛을 충분히 뿌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 미
광(微光)으로도 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아환에게 세 사람의 모습을 구별하기엔 충분하였다.
그리 타인의 성관계를 즐겨보는 취미가 있는 아환은 아니지만 그의 눈에 이채로운 것이 띄
어 아환은 경신술을 발휘하여 근처의 나무위로 올라가 방금 전 그의 신경을 자극한 것을 자
세히 살펴보았다.
언뜻 보아서는 무슨 문양 같은 것이 여인의 등에 새기어져 있었다. 거의 등을 뒤덮을정도
로 커다란 무늬가 색색으로 채색이 되어 여인의 하이얀 나신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환이 안
력을 돋구워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 문양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어이없게도 그것의 정체는 문신, 그것도 다름아닌 남성의 성기모양을 묘사해낸 문신이었다.
그 문신이 여인의 등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아환의 흥미를 자아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문신은 무림에 그리 흔하지도 그렇다고 금기로 정해지지 않은 것이 보통이었다.
특정 문파는 문도들에게 문신을 강요하고 그것으로 하나됨의 결속을 다지기도 하였다. 그외
에도 흑도나 녹림의 인물들이 타인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하여 눈에 잘띄는 곳에 문신을 새
기기도 하였고 죄를 지은자들은 이마나 어깨 등에 화인(火印)을 찍히기도 하였지만 명문가
의 여식이 문신을 신체에 새기는 것은 거의 찾기 힘들었다. 하물며 남자의 성기모양이야..
' 저 여자는 선우세가의 선우지라 하였는데..흐음..지금은 비록 그 세력이 상당부분 쇄퇴하였
다 하더라도 능히 안휘성에서 꽤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들었다. 그런 여인이..'
갸날픈 교수를 뻗어 여인은 앞에 있는 사내의 양물밑의 고환을 감싸고 있는 살덩이를 쓰다
듬었다. 입에는 여전히 사내의 양물이 물린채 앞뒤로 반은 자의적으로 또 반은 뒤에서 부딪
혀오는 다른 사내의 힘에 못이겨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비스듬히 바위에 걸터앉아 선우
지의 봉사를 즐기고 있는 사내는 다름아닌 운학일룡 장씨 성의 사내였다.
장궁은 강소성의 그리 크지 않은 문파인 운학문의 소보주라 소개를 받았었다. 가전무예를
익혔다고 하였고 준수한 외모이지만 오만해 보이는 태도로 아환은 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또 한사내, 뒤에서 열심히 하체를 선우지에 부딪혀가는 사내는 점창파의
속가제자로 역시 안휘성에 있는 작은 문파출신이라 말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사내 둘이
오히려 자신보다 거대한 세력을 가진, 그리고 그 영향력이 비할바 되지 않는 선우가의 여식
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 향주님, 과연 높은 분들께서 즐길만한 계집인데요. 이 탱글탱글한 살결하며 조여주는 맛이
란..요년이 그 따위 짓만 하지 않았어도 우리에게 차례가 돌아오기 힘들었을텐데..우리로서는
잘되었지만요. 크흐흐.."
뒤에 서 있던 점창의 속가제자, 강문직이라는 사내가 괴소를 흘리며 장궁에게 말을 건네었
다. 그러자 장궁,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며 눈에서 강렬한 빛을 내며 주위를 살펴보곤 강문직
에게 서둘러 말을 했다.
" 부향주, 말조심하게. 혹시 누가 들으면 어찌하는가? 아직 본파는 무림에 드러나서는 안되
네. 작은 실수하나가 대사를 그르칠 수 있네. 항시 그렇듯 자네는 입을 조심해야 할 것이
야."
" 향주님, 속하 향주님께 죄를 청합니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 그만 속하가 방심을 했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강문직은 급히 선우지의 몸에서 양물을 빼내고는 그자리에 부복하여 장궁에게 죄를 청하였
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이 방금전 장궁을 말한마디에 그가 얼마나 긴장을 하며 놀랐는지를
알수 있게 하였다.
" 되었네. 앞으로는 주의하게."
장궁은 선우지의 머릿채를 움켜잡더니 거칠게 뒤로 당겨 선우지의 고개를 쳐들었다. 들린
얼굴, 무림사화만큼은 되지 못해도 꽤 아름다운 미안이 안력을 돋군 아환의 시야에 들어왔
다. 타액이 입가를 흘러내리며 가느다란 물줄기를 보이고 있었다. 눈가가 희미하게나마 반짝
이는 것으로 보아 물기가 맺혀있는 모양이었다.
" 크큿. 선우지. 이런 날이 올줄은 몰랐겠지. 그 도도하던 선우가의 영양이 이렇게 바뀔 줄
은 누가 알았을까? 그러게 순순히 본파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고 본인
의 정실이 되어 차후 무림을 한손에 휘어잡을 본파에 속할 수 있었을텐데..멍청한 네 년의
아비와 선우가의 원로라 하는 자들 덕이라 생각해라."
이죽거리는 장궁의 말이 선우지의 귓가에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송두리째 뽑힐 듯이 아팠
지만 그보다는 장궁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이, 자신의 처지가 더 가슴을 찢어 발겼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선우지는 아랫 입술만 꼭 깨물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가서 강공자의 뒷 마무리나 해줘라."
장궁이 선우지의 머릿채를 잡은 손을 뒤로 팽개치듯이 선우지를 밀어대었다.
휘청..
선우지의 교구가 사내의 힘을 이기지 못하여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는
선우지는 발가벗은 나신을 바로 세워 몸을 돌려 뒤쪽에 서 있는 강문직에게로 다가갔다. 몸
을 돌리자 적나라한 선우지의 하이얀 동체가 나무위에 있는 아환에게 낱낱히 보여졌다.
등과 마찬가지로 앞부분을 장식한 여러 문신들..단지 차이라 하면 사내와 여인이 교접하는
모양의 그림이 그나마 정교하면서도 세밀하게 새겨져있다는 것뿐 선우지의 가슴에서 아랫배
까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또 그러한 선우지의 오른쪽 젖가슴에는 선명하게 화인이 하나
찍혀있었다. 창(娼)..
선우지는 걸음을 떼어 강문직에게 다가가더니 무릎을 꿇고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강문
직의 남근을 입에 담았다. 그러더니 머리를 흔들면서, 입술을 오므리고는 강문직의 양물을
빨아대는 것이었다. 그런 선우지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는 아랫도리를 흔들어대는 강문직.
아환은 잠시 눈을 감고는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하였다. 그의 뇌리에는 조금전 장궁과 강
문직이 했던 말이 수차례 되새김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 아환은 눈을 뜨고는 슬그머니
나뭇가지에서 몸을 일으켜 살짝 신형을 날려 세 사람이 얽혀있는 회음의 공간에서 몸을 빼
내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벗어나자 아환은 경신술 무영행을 발휘하여 일행들이 처음에 모여있던
장소로 신형을 날렸다. 거의 기억자로 꺾이는 방향으로 방향을 정하였다. 과연 무림의 일절
로 꼽히는 절기답게 무영행은 길지 않은 시간에 아환을 중인들이 모여있던 곳에 가져다 주
었다.
아환의 장대한 체구가 시커멓게 한쪽의 음영을 그리면서 중인들 앞에 나타나자 작은 모닥
불을 피워놓고는 담소를 나누던 남궁비를 비롯 사화가 반색을 하며 아환을 맞아주었다.
" 주형. 어디갔다 오시는 길이시오? 꽤 오랜 시간동안 보이시질 않길래 혹 산을 내려가신
것은 아닌가 생각했소."
" 그냥 산세가 좋아 잠시 사색에 잠겼었소."
" 호오..그래, 산의 야경은 마음껏 즐기셨소?"
" 그랬소."
말을 하면서 아환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장내에는 남궁비와 사화, 그리고 사내 둘, 여인
둘이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까의 장궁, 강문직, 선우지였다. 남궁비가 아환
에게 다가와 모닥불의 한쪽으로 아환을 인도하였다.
모닥불위에는 기다란 나뭇가지에 꿰인 고깃덩어리가 지글지글 기름을 흘리면서 익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언뜻 보아도 꽤 큼직한 고깃덩어리였다.
" 조금 전 백리 소협에 잡아온 맷돼지입니다. 육포보다는 이런 산중에는 사냥을 하여 먹는
것이 어울린다고 하나 잡아 오셨지요."
멧돼지 치고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마 새끼를 잡아온 것이리라. 아환은 별기색없이 한쪽에
주저 앉아 물끄러미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고기가 다익고 백리석은 품에서 예리한 비수를 하나 꺼내어 고기를 잘라내어 사화에게, 인
들에게, 그리고 남궁비에게 고기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아환은 본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양
을 베어낸 다음 먹기 시작하였다.
" 허, 이런. 백리형. 주형께 없소이다. 그 비수 좀 잠시 빌려주시겠소?"
" 이 멧돼지를 드실 분을 이미 다 받았소이다."
명백한 거절, 백리석은 별로 주환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노골적인 적대감이 은연중에
아환에게 전달되었다. 그러한 백리석을 보는 남궁비의 얼굴이 난처하게 변하였다. 또 한명,
악서령의 눈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눈가에 살기가 맴돌았다.
" 되었소. 별로 배가 고프지 않군요. 남궁형이나 드시오."
아환은 내심 유치한 행태를 취하는 백리석을 한방 먹여주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분쟁을 하
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불꽃만 쳐다보던 아환의 눈앞에 내밀어지는 호리병하나.
아환이 눈을 들어 그 손의 임자를 보았다. 남궁비였다.
" 한잔하시오."
" 고맙소."
잘 밀봉되어 있던 병마개를 열자 향긋한 주향이 풍겨나왔다. 강렬한 향으로 보아 꽤 독하
지만 귀한 술로 보였다. 아환은 병을 기울여 한모금 술을 입에 머금었다. 알싸한 주향이 혀
끝에서 감돌다가 스르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아환은 한모금 더 입에 대더니 남궁비에게
병을 건네었다.
남궁비는 병을 받고는 자신도 한모금 마시더니 옆의 유가형에게 병을 건네었다. 유가형은
손에 들어온 술병을 마시지 않고는 옆으로 인계하였고 여인들은 다 술을 마시지 않고 그저
옆으로 병을 돌렸다. 백리석과 다른 한 사내가 한 모금씩 마시고 고기를 먹고 있을 때 부시
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세명의 사람들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장궁 등이었다.
그들도 합류하여 재차 술이 돌고 멧돼지 고기를 비수로 베어내어 각자의 몫으로 돌려 어느
정도 배를 채운후 일상의 담소가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하나 둘 불가에서 일어나 자리에 들었다. 이제 남아있는 사람은 아
환과 남궁비, 유가형과 악서령만 남았다.
" 소저들도 이만 자리에 드시지요."
" 두분 소저들도 쉬시오."
남궁비와 아환의 말이 비슷하게 나왔다. 그러자 유가형은 복잡한 시선으로 남궁비와 아환
을 잠시 응시하더니 나직히 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악서령은 아환의 말에 가뿐히 교구를 일
으키고는 미리 준비해둔 자리에 가서 등에 작은 바위를 기댄다음 눈을 감았다.
" 주형, 산책을 하시지 않으시겠소?"
이미 대충 잡아도 자시를 넘은 시간, 난데 없는 산책이란 말에 아환은 남궁비를 빤히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눈에 담겨있는 기이한 간절함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엉덩이를
자리에서 떼었다.
남궁비가 발을 떼었다. 아환은 그의 뒤를 아무 말 없이 따랐다. 훌쩍 큰 신장을 가진 두사
람은 일행들이 쉬고 있는 장소에 흐르는 시냇물을 거슬러 위로 천천히 올라 갔다. 한참을
올라가자 폭이 좁아지고 넓어지기를 반복하더니 급기야는 작은 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남궁비는 근처를 둘러 보더니 한쪽으로 걸음을 옮겨 적당한 크기의 평평한 바위위에 걸터
앉았다. 아환도 남궁비를 따라 그 옆에 약간의 사이를 띄고 옆에 자리하였다. 남궁비는 품에
서 아까 그 술병과 비슷한 크기의 호리병을 꺼내더니 아환에게 다시금 내밀었다. 한모금 마
신후 남궁비에게 다시 한모금 들이킨 후 아환에게..몇차례의 술병이 아환과 남궁비를 왕복하
였다.
" 좋은 술이군."
" 백일취(百日醉)라 불리우는 술이오."
아환이 한마디 툭 내뱉자 남궁비가 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또 몇차례..
백일취는 꽤 독한 술이었다. 술이라면 어려서부터 마셔왔고 늘 즐겨왔던 아환이지만 은근
히 취기가 오를 정도였다. 일반인이라면 벌써 고꾸라지기를 수차례했을 것이다. 내공을 써서
주기를 날려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러면 술을 마시는 의미가 없기에 서서히 신경을 잠식하여
긴장을 이완시키는 주기를 은은히 즐기면서 아환은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오르는 것은 남
궁비도 마찬가지, 아환은 알지 못하지만 본래 남궁비는 다른 이들과 술을 대작을 할 때 항
상 내공으로 주기를 몰아내며 취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
런 그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술을 마심에 내기를 전혀 운기하지 않는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술을 들이키던 남궁비,
" 주형은..딸꾹..자유인이오..?,..딸꾹.."
취기에 못이겨 딸꾹질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 자유인?"
" 그렇소. 끄으..자유인 말이오."
" 무슨 뜻이오?"
" 자유로운..끅.. 새처럼 세상을 훨훨..딸꾹..날아다니는 사람이냔 말이오..?"
" 자유인이라..글쎄..자유인이라..남궁형은 그렇지 않소."
" 절대로..절대로 난 자유인이 아니오. 으음..아니, 자유인이 될 수 없소..꾸음.."
" 될 수 없다..라..왜 그렇소?"
" 그러기엔..그러기엔 너무 무겁고..정말 무겁고 무섭소."
" 뭐가 그리 무겁고 무서운게요?"
" 내가, 바로 내가 남궁비라는 것이..딸꾹..그렇소."
취기가 올라 평소보다 반응속도가 느리지만 아환은 남궁비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천하의 남궁비가, 만검창룡이 무슨 연유로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 나는 남궁형을 말을..으흠..잘 이해하지 못하겠소."
아환도 적당히 취기가 올랐다. 늘 그렇듯 술자리에서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법, 언뜻 자
신이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해다는 남궁비에게 반감이 일어나 어투가 굳어졌다. 그것을 눈치
를 챘는지, 못하였는지 남궁비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왜..내가..끅..남궁비의 삶을 살아가야하는지..끄..왜 검을 잡아야하는지..헙..모르겠소."
"..."
" 주형,"
" 예."
" 주형이 부럽소."
" 남궁비, 호강에 겨워 몸살이 났군. 오대세가 중의 으뜸이라 평함받는 남궁가에서 적자로
태어나 갖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것이며 훌륭한 가문의 고절
한 절예로 타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네 놈이 그 따위 말을 한단 말이냐? 네놈은 굶어 봤느
냐?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민초들이 이 중원땅에는 부지기수다. 그런데 뭐 어쩌고 어
째? 남궁비의 삶이 어떻다고..?"
어느새 싸늘히 식은 아환의 얼굴빛에 냉랭해진 아환의 강렬한 안광이 남궁비의 눈에 작열
했다. 아환 역시 태생은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먹고 살만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유년기에는 겪지 못하였다. 허나 하루 아침에 일가가 몰락하고 부모님이 세상을
뜨자 혈혈단신에 혹시 모를 생명의 위협까지 겪으며 중운을 떠돌다 간신히 정착을 하고 지
금의 이 위치까지 온 과거가 있다. 그러면서 아환은 자신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처절한 삶
을 사는 사람들은 많이 보아왔다. 돈이 없어 자식을 팔고, 아내를 팔았으며, 식량이 없어 어
린 자식들이 굶어 죽은 주검을 묻는 것을 질리도록 겪어왔다.
천연을 만나서 비왕의 무예를 전수받고 기보를 얻어 신체를 보하였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
였다면 자신 역시 어디 한 외진 곳에서 굶어 죽어나 혹은 산적이나 다른 여타의 인간들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 형편이었다. 그런 자신의 앞에서 남궁비의 삶이 싫다고 말하다니..
정색을 하고 화살처럼 내뱉어 남궁비의 가슴을 후벼내던 아환의 말에 어느 정도 취기가 사
라진 듯 남궁비의 눈빛이 흐릿했던 취기를 헤치고 다시금 그 빛을 찾았다. 그러면서 남궁비
는 아환의 분노에 크게 당황하였다.
" 주형. 내 말뜻은 그게 아니오. 난 단지..아니, 주형의 말이 맞는 것 같소. 맞는게 아니라 정
확할 것이오. 내가 분수를 모르고 그런 실언을 하였소. 사죄드리오. 허허..호강에 겨워 그런
것이오. 호강에 겨워.."
"..."
왠지 비감이 서린 남궁비의 말에 아환은 더 계속하려던 말을 일단 접고는 남궁비를 물끄러
미 응시하였다. 그런 아환의 시야에 남궁비의 눈가에 맺힌 작은 이슬이 살짝 보였다.
' 응? 눈물?'
" 그런데 말이오. 주형. 왜 나는..왜 나는 남궁비로 살아야 하는 것이오?"
" 무슨 말이오. 그럼 남궁형은 남궁형이 아니란 말이오?"
" 내가 남궁비라..그렇지, 난 남궁비가 맞소. 어쩔 수 없는 남궁비란 말이오..그러기에.."
살짝 이슬방울이 남궁비의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기이한 감정, 아환은 문득 저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설레 고개를 저었다.
" 세가..주형도 알다시피 남궁세가는 명문세가요. 수많은 군웅들이 남궁세가를 우러러 보고
있고 그 후광을 입은 나를 부러워 하고 있소. 하지만 말이오. 난 그들이 부럽소. 자유로운
그들이 부럽단 말이오."
" 진정 그들이 자유롭다 생각하오?"
" 무슨.."
" 정말 자유로운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 여기시오?"
" 그것은..그건 아니지만.."
" 내가 알기론 말이오. 그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없소. 아니, 완벽히 자유롭지 못
하기에 인간이라 말한다 생각하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 그렇겠지요. 그렇겠지요.."
" 무슨 일이오?"
뜬금없는 말, 남궁비는 고개를 돌려 아환을 보았다. 그 어떤 것이라도 아환의 얼굴에서 읽
고 싶었으나 남궁비는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며 다시금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 세칭 명문의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전혀 맞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자
신이 원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을 파괴시킴에도 그 일을 행해야 되지요. 단지 세가의 이익
을 위해, 명예를 위해 그 방향으로 자신을 밀어넣어야지요."
"..."
" 때로는 세가가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그것에 반기를 들었을때엔.."
" 흐음.."
쓸쓸한 어투로 말을 하다가 남궁비는 말을 끊고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아환을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천하제일의 기남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둘다 술
기운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지만 아직 여파가 남아 있어 불그스레하게 서로의 얼굴을 물들이
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타가 공인하는 제일의 미남인 남궁비의 준수한 용모가 더욱 매력
있어 보였다.
아환은 쓸데 없는 잡념을 떨치고자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후두두..후두둑..퐁,,퐁,.
나뭇잎에, 나뭇가지에, 바닥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면서 폭포앞의 작은 소(沼)에
물방울이 튀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까부터 하늘이 흐리다 싶더니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몇방울 내리던 빗방울은 이내 줄기가 되어 거센 물소리를 내면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꽂혔
다.
쏴아아...
" 이런..비가..남궁형, 어서 일어나시오."
" 흐리더니만..어서 비를 피할 데를 찾읍시다."
둘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는 일단 숲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여름비라 그리 차갑지는 않아
도 오랜 기간을 비를 맞아 좋을게 없었다. 아환과 남궁비는 발을 박차고 수장씩 신형을 날
리면서 계속해서 주위를 살펴 비를 피할 곳을 찾았다. 수식경이 지난 후 두 사람은 마침내
몸을 쉬일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안광을 번뜩이던 아환이 찾은 동굴이었다.
둘은 시선을 맞추고는 신형을 날려 동굴속으로 들어가 소나기를 피하였다.
(4)
스으읏..
뿌연 수증기가 동굴속을 메워갔다. 두 사람, 아환과 남궁비는 내기를 이용하여 젖은 옷을
말리고 있었다. 몸에 바싹 달라 붙어 있는 옷가지에 둘의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
환이야 옅은 옷가지 하나만 걸치고 있어서 바로 근육으로 뒤덮인 아환의 상체를 여실히 드
러내고 있었지만 남궁비는 옷이 몸에 달라 붙어 있어도 상체는 평평해 보였다. 아마 속에
무언가를 껴 입은 모양이었다.
아무 말 없이 진기를 돋우어 열을 발산시키는 두 사람. 그들의 능력으로서는 어렵지 않아
곧 바싹 마른 의복을 걸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옷이 다 마르자 두 사람은 그 자리에 풀
썩 주저 앉아 중단되었던 아까의 말을 계속 이어갔다.
" 주형."
" 왜 그러시오. 남궁형"
" 내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겠소. 내가 잘 아는 어떤 소녀의 이야기오."
"...."
" 한 소녀가 있었소. 스스로는 범인이라 생각했지만 세상이 그렇게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은
그런 소녀였소. 흐음..어느 무더운 여름날, 그 소녀는 꽤 알려진, 그리고 훌륭한 집안에서 첫
째로 태어났소. 그런데 그것까지는 괜찮았소. 여느 집안과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허나 소녀
는 결코 가져서는 안될 신체를 가지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소.
가문의 원로들은 그 소녀가 태어나자 실망을 했지만 그 실망은 이내 안타까움으로 변하였
소. 만약 그 소녀가 사내라면, 그래서 그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 사내는 훌륭하고 위
대하게 그 문파아래서 성장했을 것이고 그것은 곧 가문이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것이 될 테
니 말이오. 그리하여 그 가문의 원로들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소. 어이없게도 그 고민은
이 소녀의 성(性)을 논하는 것이었소.
그 결과 가문은 이 소녀에게 일단 여성이 아닌 남성을 강요하였으며 아직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소녀는 사내아이로 결정이 되었소. 그때부터 이 소녀, 아니 이제 소년이
되었지만 여하튼 그는 사내 옷을 입고 사내처럼 행하는 것을 교육받았소. 하늘이 내린 신체,
아니지, 아니지..저주받은 그 신체는 그러한 가르침에 너무나도 빠르게 그리고 익숙하게 적
응을 했소. 그러한 과정 중에 가문은 이 소녀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소. 수많은 돈이
이 소녀를 가르치는데 쓰여졌소. 또 가문은 이 소녀를 위하여 상당수의 무고한 인명을 희생
시켰소. 단지 이 소녀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소녀에게
젖을 물리던 유모가 죽고 기저귀를 갈아주던 시비가 목을 잃었소.
글을 가르치던 스승이 괴질로 죽었고 어려서 그와 같이 지내던 이웃 가문의 또래가 모습을
감추었소. 그뿐아니라 그 가문까지 어느날 멸문지화를 당했소. 웃기지 않소? 아무 것도 아닌
사실 하나에 그 많은 사람이 죽고, 그 생명을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서슴없이 행한 가문이
어찌 우습지 않겠소?
그런 것고 모른채 소녀는 하루하루 성장을 하였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소.
그러던 중 그녀의 사내동생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소. 그러자 소녀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들었소. 여태까지 자기에게 쏟아졌던 사랑이-적어도 소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을 사랑이
라 여기었소.-이제 송두리째 날아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곧 그것은 기우라는 것을 깨닫
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소. 천혜의 신체라 불리우는 소녀와는 달리 소년은 너무도,
너무나도 평범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었소. 게다가 가문의 원로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갓태어난 어린 아이가 버티기엔 불가능할 정도의 수많은 개정대법을 펼치고 각종
이물을 아이에게 먹였소. 소녀가 그것을 무난히 지탱했기에 과욕을 부린 것이지요. 그 결과
는 생각보다 훨씬 비참했소. 갓태어난 아기가 그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병이 들은
것이었소. 그것도 심각할 정도로.
소녀는 그것을 안타까워 하였지만 속마음으로는 안도했었소. 오만했기에, 모든 것을 자기본
위로 생각했기에.. 또 그런 나이잖소. 이제 다섯이 넘은 애가 무얼 알겠소? 그렇게 또다시
가문은 소녀를 중심으로 움직였소.
소녀는 하루 하루를 세가의 사람들의 기대를 훨씬 웃도는 인물로 성장을 하였소. 계속해서
쏟아지는 찬사와 부러움의 시선이 소녀로 하여금 더더욱 분발을 하게 만들었고 소녀는 열살
을 갓넘어서 이미 강호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소.
그렇게 커가던 중 어느날 소녀는 여인이라면 누구나 나타나는 신체적인 특징을 맞게 되었
소. 그 특징이 나타나기 전만 해도 그것에 대하여 전혀 고민을 하지 않던 소녀는 겁이 나기
시작했고 소녀는 그것을 감추려고 하였소. 그러다 가문의 어른에게 그것을 들키고야 말았소.
그 가문의 어른은 심한 꾸지람을 소녀에게 하였고 바로 시비 하나를 붙여주었소. 그 시비를
본 순간 소녀는 경악했소. 얼마전까지 멀쩡했던 명랑한 성격을 가진 귀여운 아이였소. 소녀
보다 한두살 많은 여자 아이였는데 시비라고 들어온 순간 그녀를 본 소녀는 창백히 질려 아
무 말도 하지 못했소. 그 시비는 혀가 짤리고 귀의 고막이 터져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몸
이 되었던 것이오.
소녀는 가문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소. 도망치고 싶었소. 허나 그러기엔 소녀는 너무나 겁이
많았고 무모한 결정보다는 여러 가지 계산을 하였소. 그 결과 소녀는 자신을 숨기는 방법을
터득하였고 그대로 행하였소. 가문의 사람들은 소녀가 매진하자 매우 기뻐하였소. 그것은 또
다른 무게로 소녀를 짓눌러 왔소.
어느새 소녀는 나이를 스물을 넘기게 되었소. 그러자 그 소녀, 아니지..청년을 선망하는 수
많은 명문가에서 혼담이 쇄도했소. 꽃다운 여식들, 그들의 부모와 가문에서 그 청년에게 매
파를 보낸 것이지요. 이 청년과의 혼사는 곧 그들의 위치를 한단계 높일 수 있기에 가문의
일이 방해될 정도로 많은 청혼이 들어왔었소.
그러나 그 소녀가 본래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문에서는 혼담을 결정할 수 없었소. 차일
피일 미루기만 하다 강호에 기이한 소문, 즉 그 소녀가 남자가 아니라는 말들이 떠돌았소.
그러자 가문의 사람들은 놀라서 황급히 여러 일을 행하기 시작하였소. 소녀의 신체를 사내
같이 만들고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었소. 원래 소녀는 어려서 무예를 단련했기에 제법 발달
된 몸을 가지고 있었고 옷가지로 몸은 어느 정도 가릴 수 있었으나 손마디와 다른 곳은 어
찌할 수 없었소. 따라서 가문에서는 어찌하면 이 소녀를 남자답게 보이게 할 수 있을까를
숙고하다 한가지 묘안을 짜내게 되었소. 바로 소녀에게 목젖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소.
소녀는 기이한 구슬을 삼키고 기공으로 그것을 목부위로 유도한다음 내기로 그것을 고정시
켜 마치 사내처럼 목젖을 가지게 되었소. 또 무림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혼사상대로 정하
고는 혼담을 추진하기로 하였소. 그 여인이 속한 문파는 당연히 좋은 조건에 절세기남아로
평가받는 사내를 맞이할 수 있게됨에 선뜻 혼사에 응하였고 그 사실은 중원에 금새 널리 알
려지게 되었소. 하지만 여자와 여자의 결합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소? 할 수 없이 가문
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혼례를 미루어 갔소. 그쪽에서는 빠른 일처리를 바랬지만 그러
기엔 상대하는 가문의 힘이 너무나 컸소.
소녀의 나이가 스물을 훨씬 넘고 이제는 그러한 삶에 익숙해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
소. 주위에는 온통 구역질나는 권력과 부귀영화를 탐하는 삼류 인생들 밖에 없었소. 그런 소
녀는 마침내 한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소. 여지껏 자신을 조롱하던 운명과 가문에 통쾌한 복
수를 하자고..더 시간을 끌면 소녀의 가문은 그녀와의 정혼을 맺은 여인을 그냥 두지 않고
제거할 것이며 또다른 혼담을 찾으며 시간을 끌 것이오. 이는 비단 소녀뿐만 아니라 또다른
무고한 인명을 해하는 일이기에 그러기전에 소녀는 스스로 자신을 정리하고 마감하려 했소.
그 소녀는 마지막 남은 세상의 미련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운명의 끌림때문인지 그와 친분
이 있던 몇몇의 얼굴이나 보려고 한 곳으로 갔소. 거기서 그녀는 정말 그녀가 꿈꾸던 자유
로운 사람을 보았소.
그 사람은 그녀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왔고 제한을 받지 않는 인물이
었소. 강했고 또 여유로왔소. 비록 남자같이 치장을 하고 다녀도 여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꾸
는 꿈을 소녀 역시 갖고 있었고 그 이상의 사내가 그 곳에 온 것이었소.
주형..."
"......"
한참 동안을 주절거리면서 한 소녀의 이야기를 토해내던 남궁비가 눈물이 그렁그렁이는 눈
을 들어 아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 소녀의 이야기라 말은 하여도 어찌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랴?
아환은 멍해져서 할 말을 잃었다. 무림제일의 기남아, 천상의 미남자, 차후의 무림계의 절
대자라 평가를 받는 만검창룡 남궁비가 여자? 말도 안되는 얘기다. 길거리의 아무나 잡고서
그렇게 말을 하다가는 미친 놈 소리를 들을 것이었다. 허나, 그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이 현실
이었고, 바로 눈앞에 닿아 있었다.
" 그..그러니까..남궁형이.."
" 주형.."
"...."
다시금 말을 잃었다.
" 주형. 부탁이 하나 있소."
" 남궁...어찌 말해야 할지..그래, 말하시오."
" 그냥 편한데로 부르시오. 내가 주형에게 부탁할 것은..나에게 주형의 그 자유를 나누어 주
시오."
" 자유?"
" 그렇소. 그 광활한 자유를 내게도 나누어 주시오."
" 잠깐만 기다리시오..후~우.."
아환은 남궁비의 말을 막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난데 없이 산보를 하자고 하고는 술에 취해 주절거리더니 급기야는 자신이 여자라고? 허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하지 못하는 아환의 망설이는 모습을 보더니 남궁비는 입술을 꼬옥 깨물
고는 손을 들어 장갑을 벗었다. 항시 끼고 있던 두툼한 검은 장갑이 손에서 나오자 그 부피
만큼의 손이 나오질 않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우윳빛의 살갖이 희미한 빛속에 어스름하게 드
러났다.
양쪽의 손에서 장갑을 벗고는 손을 머리로 가져가서는 질끈 동여매져 있던 영웅건을 풀러
헤치자 검은 윤기가 흐르는 비단결 같은 머릿채가 스르르 남궁비의 어깨를 덮으며 흘러내렸
다. 그런 후 남궁비는 목젖부위에 손을 가져가더니 몇번 기묘하게 손을 놀린후 입을 벌려
작은 구슬하나를 뱉어내었다. 그러자 평평해지는 목선, 고운 선이 그대로 이어지는 곧은 선
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아환의 시선을 의식하였는지 남궁비는 옷고름에 가져가던
손을 잠시 멈칫하다가 입술을 꼬옥 깨물고는 옷고름을 풀어 상의르 벗었다. 미끄러지는 옷
가지에 둥그런 어깨의 선이 또렷이 보였다. 상의를 벗어젖히자 그 속에 있는 회색빛의 갑의
가 보였다. 보물(寶物)인지 그 서린 기운이 남다를 갑의의 이음새를 연이어 끄르는 남궁비,
그리고는 그 갑의가 떨어져 나가고 튀어나오는 두개의 살덩이..
일반 남자의 한손에 충분히 잡힐 듯 크지 않은 가슴이 미미하게 떨리면서 그 끝의 유실을
파르르 진동시켰다. 유백색의, 햇빛을 전혀 받지 못하였는지 얼굴빛보다 훨씬 새하얀 색을
보이는 소담스러운 유방. 그리고 연한 분홍빛의 유듀.
그 유두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남궁비는 손을 가져가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아환을 정
시하던 시선은 아래로 향해 있었고 마치 아환의 분부만을 기다리는 새색시모냥 잔떨림을 보
이며 남궁비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 남..."
아환이 입을 열다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 그 자유를 저에게 나누어 주시는 조건으로 나에게 그 어떤 것을 요구하여도 다 드리겠어
요. 원한다면..원하신다면 나의 육체와 영혼이라도.."
얼마전까지도 그리 굵지는 않았지만 흔한 일반 남성의 저음의 음색이 가늘고 높은 고음으
로 변하였다. 아까 목젖을 제거하면서 그 음성을 바꾸는 외술도 같이 해제된 모양이었다.
남궁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허리춤의 바지끈으로 가져갔다. 이내 스르르
흘러내리는 백색의 하의.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자로 곧게 뻗어 내려간 하얀
옥기둥. 그리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적당한 굵기의 여체의 다리의 곡선이 땅에서 위로 매끄
럽게 이어지고 그 위에 두 옥주(玉柱)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백색의 고의. 사내가 입는 것이
아닌 규중의 여인들이 착용하는 얄궂은 비단 고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이 이 남궁비
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였을까?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가렸던 손을 열고는 밑으로 내려 고의의 끈을 푸르자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조그마한 천조각, 그리고 그 뒤에서 살며시 그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여인의 비림과
속살이 그대로 아환의 눈속으로 샅샅히 들어왔다.
남궁비는 그 자세 그대로 자리에 조심스레 주저 앉았다. 그러면서 얼굴에 손을 가져가 몇
차례 얼굴을 쓰다듬자 얼굴의 선이 미미하게 변하였다. 각이 있어 보이던 턱의 선이 좁혀지
고 크고 두툼하던 입술이 작고 도톰하게 바뀌었다.
잠시 후 아환의 앞에 완성된 모습의 사람은 사화에 능히 견줄만한 아름다운 외모를 빛내는
성숙한 한 여성이었다. 머릿결이 부드러이 가슴과 어깨를 뒤덮은 가운데 고개를 숙여 길다
란 하얀 목선을 어둠 속에 드러낸 밤의 여신이었다.
" 남궁형.."
" 오늘은 제 나이 스물 다섯이 되는 날입니다. 제발 부탁드리건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저를
'비아'라고 불러 주세요."
" 남...비아."
"..."
아환이 두툼한 손을 뻗쳐 남궁비의 턱을 가볍게 받쳐들고는 위로 올렸다. 반짝이는 두 눈
에 아롱지어져 맺혀있는 물기가 보였다. 금새라도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이 한껏 물기를 머
금은 고운 봉목이 아환의 동공에 아로 맺혔다.
아환은 엄지와 검지로 남궁비의 턱을 살짝 잡고는 자신의 얼굴을 남궁비의 얼굴로 가져가
서 그 도톰한 입술에 살짝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53번째 올림 창작야설
(5)
솨아아아...
우르르릉..꽝!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졌다. 간혹 뇌기가 하늘에서 떨어져 일순간 주위를 환하게 밝히곤
하는 이 곳은 중원 오악 중의 하나인 형산, 그 수많은 봉우리들 중 하나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굴이었다. 그리 깊지도 그렇다고 넓지도 않은 서넛이 몸을 뉘이면 동굴안의 공간을 메울
정도..
아환은 입가에 닿아있는 부드러운 감촉에서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떼었다. 두툼한 입술에
가려져 있던 적당한 크기의 도톰이 솟은 선홍빛의 입술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었다. 입꼬리 부분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양이 잔뜩 긴장을 하고 있음을 역력하게 보
여주었다.
그 바로 위 곧은 하얀 길, 인중을 지나면 오똑 솟은 코가 보였다. 날카롭다 할 정도로 앞으
로 뻗어있는 콧날밑에서는 가쁘게 바람이 불어 나오고 있었다. 여름이라서 그런가? 상당한
열기를 뿜어내는 숨결이 느껴졌다.
눈가에 주름살이 맺힐 정도로 두눈을 꼭 감은 채 남궁비는 쪼그려 앉은 그 상태로 가늘게
잔떨림을 보이면서 앞으로 다가올 아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하이얀 태고의 여체는 생전 처음 경험할 사내의 손길이 닿을 순간이지만 머릿 속이 텅비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은채 왜 그리 추운지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러한 여심이 사내에게 전달되었을까? 입술을 뗀후 아무런 후속 동작을 보이지 않은 아환
이 마침내 천천히 신형을 움직여서 남궁비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고 정신이 아득하다 할지
라도 어찌 근거리의 사람이 바짝 가까이 오는 것을 못 느끼랴? 남궁비는 더더욱 눈을 질끈
감으며 앞으로 자신의 육체에 와닿을 남정네를 기다렸다.
스읏..
여인이지만 태생과 성장과정에서 잘 발달된 근육이 잡혀 있는 남궁비의 어깨에 거칠거칠한
사내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뜨거웠다. 마치 불에 달구어진 인두가 여리고 여린 속살을 지져
대듯 강렬한 촉감이 아환의 손길이 닿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움찔..
더욱 몸을 움추리고 무의식적으로 교구가 뒤로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 하였다. 허나, 아
환의 손에 어깨를 잡힌지라 단지 백색의 나신만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소중한 부
위를 가리고 있던 양손을 바싹 끌어당겨서 떨리는 손끝으로 젖가슴과 치부를 가리는 남궁비
의 모습은 난데없이 비를 맞아 길을 잃은 어린 새를 연상케 했다.
스슷..
그런 남궁비에게 무언가가 자신의 어깨에 내려 앉는 감각이 들었다. 연신 몸을 움찔거리는
남궁비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이 옷가지, 방금 자신이 벗어 놓은 옷가지라는 것을 알았을
때엔 아환은 자신의 나체에서 손을 떼고는 저만치 물러서 동굴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왜..지요?"
나직하면서도 끊임없이 흔들리는 남궁비의 음성이 아환의 귓가에 들어왔다. 어깨를 감싼
옷을 자신도 모르게 끌어당기면서 긴장감과 의혹서린 목소리로 남궁비는 아환에게 물었다.
그러면서도 그 음성에는 실망감과 안도감이 순간적으로 교차하는 것을 남궁비와 아환은 동
시에 감지해내었다.
"..."
아환에게서 아무런 답이 없자 남궁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왜..? 혹,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요?"
아환의 고개가 겨우 알아챌 정도로 살짝 좌우로 움직였다.
"그렇다면..왜?"
"남궁형..아니, 비아. 이렇게 해서 어쩌자는 거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에게 자유를 나누어 달라고.."
"이렇게 하면 남궁비, 네게 자유가 전하여지나?"
"그것은.."
"자유? 그게 남이 나누어 준다고 해서 나누어 지는 것일까?"
"..."
"남궁비."
"....예?"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단순한 일탈일 뿐이다."
"....일탈?"
"네게 짓눌려진 무게가, 그 짐이 너무나 커서 순간적으로 표출된 일상의 파탈일뿐 다른 의
미가 없다 생각한다."
"..."
"네가 지금 나와 교미를 한다고 하여 정말 네가 자유로워질까?"
아환은 다른 말을 쓸수도 있는데 일부러 교미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골랐다.
"..."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네 스스로의 의지로 행한 일이라 여기고 얼마 간의 해방감은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허나, 그로인하여 또다른 구속을 받을 지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홀가분할 것 같았어요. 비록 새로운 사슬로 내가 묶을지라도 얼마 간은 눌려있던 것을 벗
을 수 있다 생각했었어요."
"새롭게 너를 묶을 사슬이 지금껏 네가 지어왔던 짐보다 더 크다고 해도 말인가?"
"그것은..."
"말장난이다."
"....?"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환을 빤히 쳐다보는 남궁비. 그 시선을 따갑게 느끼면서도 아환은
남궁비의 심연히 빛나는 봉목을 직시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자유란 그런 것이 아니다."
"..."
"자유란 의지다. 마음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줄 수도, 그렇다고 뺏을 수도 없는 것이다.
볼려하면 볼 수도, 보지 않으려하면 그 존재하는 것 조차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자유란 것이
다. 누구가 가지고 있지만 또 그 어느 누구도 완전히 가지지 못하는 것도 자유라는 것이다."
"...."
계속되는 아환의 말에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남궁비가 스르르 고개를 숙인다.
"남궁비."
"예?"
고개를 숙인채 기어들어가는 듯한 소리로 아환에게 대답을 하는 남궁비. 어제까지만해도
보이던 그 당당하던 제왕지기는 온데간데 없고 나약한 여인하나만이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
이고 쪼그려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자유란 네 스스로의 몫이다."
"..."
아환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인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남궁비를 보고는 슬쩍 몸을 일
으켰다. 빗줄기는 전혀 줄지 앟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내려붓듯이 빗물을 아래로 퍼붓고 있
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뇌성이 다시금 들리면서 가끔 산중의 풍경을 은빛으로 빛나게 하였
다.
잠시 뒤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의복을 다시 갖추어 입는 모양이었다. 얼
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환의 옆에 하얀 옷자락이 나란히 섰다. 아환은 느릿하게 고개를 남
궁비쪽으로 돌렸다. 그런 아환의 동공에 긴머리결을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며 표표
히 서있는 남궁비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남궁비가 옷을 벗었을때부터 팽창되어 있던 아랫도리는 지금 이 순간 그 극을 달렸
다. 기실 아환으로서도 남궁비가 옷을 벗었을 때 욕정이 불같이 일어났었고 남궁비를 취하
고 싶었다. 그 고귀한 여체를 마음껏 유린하고 싶었다. 허나, 왠지 모를 감정에 아환은 아래
에서 솟구쳐 오르는 욕망을 내리 누르고 남궁비에게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왜지?"
당연히 원래의 의관을 갖추리라 여기었던 아환은 남궁비가 아직 역용을 하지 않고 여인을
느낄 수 있는 상태로 아환의 옆에 다가가자 의아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한 아환을 남궁비는
몸을 돌려 아환의 정면을 보고 서더니 몸을 굽힌다.
"..."
지금 남궁비는 아환에게 예를 올리고 있었다. 정성껏 무릎을 굽히더니 아환에게 여인들이
사내에게 하는 큰절을 하였다. 한참을 바닥에 몸을 붙이고 있던 남궁비는 서서히 몸을 세운
후 아환을 바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 예는 제가 여인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남자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스스로의 다짐으로 한 남자에게 귀속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궁비는 아환의 앞에 똑바로 서서 멍하니 서 있는 아환을 한동안 쳐다 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갑의와 목젖의 역할을 한 구슬 등을 짚어들었다. 상의를 끌
르더니 갑의를 착용하고 입에 구슬을 물고는 운기를 하였다. 그런 후 얼굴에 손을 가져가서
몇번 매만지니 처음의 남궁비, 그 위용의 만검창룡의 모습을 되찾았다.
"주형, 뭘 그리 빤히 보시오?"
영웅건으로 뒤로 늘어뜨려 있는 머릿결을 묶으며 남궁비가 아환에게 말을 건네었다. 말투
나 음색이 어제의 남궁비 그대로였다. 허나, 아직 잠시전의 열정이 스러지지 않았는지 발간
홍조가 은은히 남궁비의 옥용을 물들였다.
"과연.."
"과연..? 뭐요?"
"천하제일 기남아요. 남궁형은.."
"핫핫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남궁비, 그런 그의 눈가에 살짝 맺혀있는 물기는..
며칠 간을 계속될 것 같이 쏟아지던 빗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쳐있었고 흐린 밤하늘이
지만 간혹 별빛이 구름사이를 뚫고 산중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환과 남궁비는 시간이 오래 지체된 관계로 경신술을 발휘하며 일행이 자리를 잡은 곳으
로
바쁘게 발을 놀렸다. 한참을 달리던 중 아환의 귓가에 남궁비의 나즈막한, 그러면서도 진중
한 음성이 들려왔다.
"주형."
"왜 그러시오? 남궁형."
"오대세가를 조심하시오."
"..무슨 말이오?"
"오대세가, 아니 가면을 쓰고 있는 무리들을 항시 경계하시오."
"그게.."
아환이 의아한 기색으로 재차 질문을 던지며 아환은 남궁비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면서 남
궁비의 얼굴이 상당히 굳어있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질문은 하지 않으며 남궁비와 보조를
맞추며 일행들에게 바삐 달려갔다.
일행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산중의 시내는 약한 빗줄기에도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는 만큼
빗줄기가 거세자 중인들은 급히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한 모양이었다.
아환과 남궁비가 다시 마을로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사람들을 찾아야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두런 두런 말소리와 함께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아환과 남궁비는 긴
장의 끈을 늦추지 않은채 시선을 예의 빛내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응시했다. 가벼운 발놀
림이 경신술을 익힌 무림인들로 보였다.
한순간, 흐릿한 별빛에 반사된 선두에선 인물이 드디어 숲속의 나무를 헤치고 아환과 남궁
비의 눈에 들어올 때 아환과 남궁비는 긴장을 풀었다.
"남궁형, 어디 계셨었소? 한참을 찾았잖소."
"두분이 같이 계시는 구료. 어느 쪽에 계셨던 거요? 보아하니 별로 비를 맞은 것 같지는 않
은데.."
아까 헤어진 일행들이었다. 사화를 비롯한 남아 있던 이들이 아환과 남궁비가 자리를 떠난
상태에서 비가 와서 자리를 피한 후 비가 그치자 둘을 찾으려 했던 모양이었다.
"허허..죄송하게 되었소이다. 갑자기 비를 만나서.."
남궁비가 너털 웃으면서 사과를 한후 중인들은 자리를 다시 고쳐 앉고는 이런 저런 말을
나누며 수마를 잠시 잊은채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내용이라 해봤자 산세나 빗줄기가 세다
는 둥 일상적인 이야기들 뿐..
두런 두런 말을 나누던 이들이 하나 둘 쉴 요량으로 자리를 떴다. 아까까지 내린 비로 인
하여 바닥이 진창이라 조심 조심 자리를 골라잡은 사람들은 슬그머니 눈을 감고는 휴식을
취하였다. 아환 역시 이들의 대화가 따분한지라 한 구석으로 나 앉아서 눈을 붙이고 천천히
진기를 순환시키는 중이었다. 운기조식과는 다른 경맥의 수련이라 할까? 그 원류를 알지 못
하는 무상심결은 고절한 심공이어서 아환이 가부좌를 취하지 않은 상태라도 운공이 가능하
였지만 굳이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는 않아 아환은 양의심공으로 얼마 간의 감각을 열어둔채
명상에 접어들었다.
반짝!
아환의 눈이 뜨여졌다. 아환은 슬쩍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자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남
궁비와 유가형을 비롯한 사화의 몸이 움찔하거나 눈이 열리는 것이 아환에게 감지되었다.
아마 아환이 느낀 것을 이들 역시 알아내었다. 한참 후 사내들 중 하나도 눈치를 채고는 다
른 이들에게 경고성을 전달하였다.
창...투둑..챙챙..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나뭇가지 밟는 발자국 소리가 사람들의 귓전을 두드렸다. 그러면서
간간히 들려 오는 비명이 고요한 적막을 스러뜨리며 아환등에게 전달되어 왔다. 그 소리가
점점 커지고 선명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 쪽 근처로 향하는 지 중인들은 더욱 또렷이 여러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가봅시다!"
백리세가의 소가주라는 백리석이 검을 움켜쥐고는 벌떡 일어서서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소
리쳤다. 그러자 운학일룡 장궁과 강문직등이 안광을 빛내면서 백리석의 행동에 동조를 취하
였다. 남궁비는 묵시적으로 중인들의 우두머리 격이 되어 있어 백리석과 장궁등의 시선에
바닥에 엉덩이를 더 붙이고 앉아 있기 곤란하였다.
"혹시 사마외도의 행패면 어쩝니까? 백도의 무사라면 당연히 정의를 수호하여야 하는 법!
어서 저쪽으로 가십시다."
백리석이 영웅심에 도취되어 목청을 높여도 아환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싸우
건 말건 특별히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았고 쓸데 없이 타인들의 분쟁에 휘말리는 것도 귀찮
았다. 백리석의 얼굴에 쓰여져있는 영웅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허나 남궁비과 유가형, 제갈
수란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는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거구를 일으켰다.
아환이 일어나자 자연스레 악서령과 석영이 교구를 일으켰고 이내 중인들은 병장기가 부딪
히는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중인들이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설수록 점점 소리가 잦아들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수없이
많은 금속성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었지만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는지 이제는 어쩌다 한번
씩 챙챙 거릴 뿐 아까 같은 격렬한 파열음은 들리지 않았다.
"끄어..."
일행들이 수풀을 헤치고 소리의 근원지에 몸을 나타냈을 때 목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괴성
이 들리고는 장내의 전투가 마무리 되었다. 중인들은 격전지였던 이 곳에서 풍겨오는 비릿
한 피냄새를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시체..시체들..
어림잡아 스물은 됨직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 쓰러져 있었다. 죽은 이들이야 이미 지각이
없어 별다른 느낌이 없겠지만 눈을 돌려 그 주검들을 보던 남궁비등은 하나같이 안색을 급
변시켰다.
처참하였다.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이었다. 어느 하나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시신이 없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이들을 비롯하여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이들도 있었고 무거운
흉기로 짓눌린듯 머리가 으깨져 있는 이들도 보였다. 그러한 시신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청
색이라 짐작되는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들은 형산파의 제자들이리라. 양패구상을 하
였는지 일견해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꾸웩.."
"우웁.."
급기야 선우지를 비롯한 여인 두어명이 구역질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코끝을 찌르는 짙
은 혈향에 남자들도 속이 울렁거릴텐데 평소 곱게 자란 명문가의 여식들은 약한 비위로 더
이상 참지 못하였다. 그나마 사화는 얼굴빛만 창백히 변하였을뿐 장내를 세심히 살피는 것
이 달랐다. 유가형은 의가의 후예고 석영은 수차례 전투를 하여서 그렇다고 해도 악서령과
제갈수란의 변화는 의외였으나 미처 다른 이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였다.
"저기, 저기 살아 있는 사람이 있소."
남궁비의 입에서 낭랑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중인들은 남궁비의 손끝이 향하는 방향을 보
고는 비로소 한 핏덩이가 고여있는 핏물과 진흙탕에서 미미하게 꿈틀이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다른 시체에 비해 유난히 붉은 피를 뒤짚어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쪽
팔이 잘려져 있고 온몸이 병기로 인하여 갈갈이 찢거진 그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지만 홍건
히 피바다 속에 누워있는 그에게 접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아환이 성큼 한발 앞으로 나섰다. 아환의 눈에 그의 몸을 감고 있는 쇠사슬이 들어왔
기 때문이었다. 아환은 그 순간 이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고깃덩어리가 유명사신 혁
사락이라는 것을 알고는 무심결에 한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다 멈칫, 아환은 발을 멈추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하다가 몇발짝 떼어 꿈틀거
리는 핏덩이 근처로 다가갔다. 남궁비를 비롯한 일행들은 그런 그를 누구도 잡지 않고는 아
환이 하는 모양을 긴장된 시선으로 쳐다 보았다.
아환은 바닥에서 간신히 진동을 하는 반주검, 혁사락의 등이라 짐작되는 부위에 장심을 갖
다대었다. 기분나쁜 끈적한 액체의 감촉이 전해져왔지만 개의치 않고 아환은 혁사략의 몸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원래 타인의 진기를 불어넣는 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각자 내
공의 성질이 다르고 그 크기가 틀리다. 경맥의 강약이 틀리고 혈도의 위치 역시 반드시 사
람마다 일치하지는 않았다. 허나 아환이 익히고 있는 무상심결은 그러한 한계를 초월할 정
도의 원류(原類)라 할 수 있는 정심한 진기이기에 얼마의 시간도 되지 않아 중인들은 혁사
락의 몸이 조금씩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혁사락은 눈을 희미하게 뜨고 자신에게 진기를 불어 넣어준 인물이 누구인지 보려 안력을
집중시켰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간신히 진기가 이어졌다. 핏물로 눈이 가려져 있어 얼른
사물이 식별이 되지 않았지만 혁사략은 몇번 눈을 깜빡거린 후 마침내 아환의 얼굴을 식별
할 수 있었다.
"자...네..였.군.."
"예. 선배."
"..왜..나..를"
말을 알아듣기는 힘들어도 그 뜻은 혁사락의 눈빛으로 몸짓으로 충분히 아환에게 전달되었
다.
"술 한잔 값입니다."
아환은 자신이 말을 한 후 순간 혁사락이 웃었다 생각했다. 입꼬리가 살짝 흔들려 보이는
것이 꼭 웃음같아 보였다. 아환은 장심의 진기를 더욱 돋구었다.
"우욱.."
한덩이 핏뭉치를 토해낸 혁사락은 눈을 돌려 주위를 한번 스윽 둘러 보더니 희미하게 나마
눈에 광채를 뿌린 후 힘겹게 손을 들었다. 그러다 그 쪽 손이 없는 것을 보자 피식 웃음을
짓더니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품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런 후 꺼내어진 혁사락
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고풍스러운 두루마리 하나.
"이...이..이것.."
간신히 아환의 손에 전달되어 진 것은 보기에도 귀하게 보이는 은은한 서기가 피어 오르는
비단 양피 두루마리였다.
"이게 무슨.."
막 말을 하려는 아환의 귀에 힘겹게 가닥가닥 끊어져서 들려오는 전음성.
'운남성..운봉산..구봉에..'
그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쥐어짜듯 전신의 힘을 다 쏟아 아환에게 전음을 보낸후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는지 혁사략은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기..검(氣劍)..형산..나조."
혁사락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한많은 삶, 풍요로운 집안의 태생이었던 혁사락은 재물이 화를
불러와 믿었던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멸문을 당하고 그 원란을 갚기 위하여 절치부
심, 금지된 마공을 익혔으나 결국 자연으로 그 육체를 회귀시키고는 스러져 버린 비운의 인
물이었다.
멍하니 혁사락에게서 전해 받은 두루마리를 쥐고 있는 아환과 일행들은 순간적으로 벌어진
뜻밖의 상황에 일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곧, 정신을 가다듬은 그들의 눈이 가지각색으
로 빛났다.
혁사락이 아환에게 전하여준 두루마리는 틀림없는 강호의 기보로 추정되었다. 풍운에 혁사
락이 기연을 얻어 마공절예를 얻었다 했다. 그렇다면 저 두루마리는 그 기연과 관계되어 있
는 것이리라 짐작한 중인들의 눈은 호기심과 탐욕으로 불타올랐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자리이니 만큼 서로의 눈치를 보아 가며 아환의 손에 들려 있는 두루마리를 힐끗거
렸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요. 금방 형산파의 고수들이 들이닥칠 거예요."
그러한 사람들의 주위를 환기시킨 것은 다름 아닌 제갈수란이었다. 타고난 재녀답게 순간
적인 임기응변이 뛰어나 빨리 생각을 정리하고는 중인들에게 외쳤다. 그러자 일행들의 눈이
마주치고 바삐 곧 신형을 날려 생명을 잃은 인체의 잔해가 널부러진 이 곳에서 하나 둘 떠
나갔다. 일행 중 누군가 스치면서 나뭇가지에 손을 갖다대었다. 그 순간 소리없이 나뭇가지
에 새겨지는 기이한 문양과 숫자 육(六).
사람들은 전력을 다하여 경신술을 발휘하였다. 비교적 무공이 떨어지는 여인들도 사안의
중요성을 깨달은 듯 젖먹던 힘까지 다 발휘하여 산을 내려갔다.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인
관계로 얼마 되지 않아 중인들은 선라객잔이 위치한 마을의 어귀까지 다달을 수 있었다. 맨
뒤에서 뒤의 기척과 추적하는 존재들을 감지하려는 남궁비는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예의 경
계를 늦추지 않았다. 뒤를 따르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행인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들 기척을 죽인 후 조용히 선라객잔
앞으로 다가섰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54번째 올림 창작야설
(6)
어스름한 어둠이 걷히고 한여름이라 밤이 길지 않아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동이 터올 무렵
선라현의 객잔, 선라객전 뒤편에 마련되어 있는 별채에서는 대략 열명 정도의 인원이 모여
서 둥근 제법 잘 만들어진 원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런 중인들의 앞, 원탁의 한 가운데에는 찻잔을 담아 놓은 다기(茶器)들과 함께 놓여진 고풍
스러운 장식품들이 보였다.
아환, 남궁비등의 일행들은 조금 전 산을 내려와서 사화지연에 참석하기 위하여 제갈수란
과 악서령, 석영등이 묵었던 객실에 다시금 모여 있었다. 지금 이 방은 사화 중의 하나인 제
갈수란의 객실과 연결된 곳으로 사람들은 혁사락의 죽음을 목격한 장소에서 급히 몸을 빼내
어 마을로 내려온 것이었다. 그 후 일행은 제갈수란의 제안으로 차후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
하여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이제부터 어찌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하기로 하죠.'
아무래도 제갈수란이 모임을 제의한 것이니만큼 제갈수란이 나서서 중이들에게 문제제기를
하였다. 천진한 듯한 얼굴이지만 '녊?눈에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한 지혜가 넘
실대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미인들은 그 외모로 인하여 머리가 나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쉬우나 제갈수란은 사화에 끼인 타 재녀들과 마찬가지로 통속적인 관념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일단 빨리 이 곳 선라현을 뜨는 것이 급선무요."
백리석이 다소 상기된 안색으로 다급히 말을 꺼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명사신 혁사락이
라는 인물은 무림에 갑자기 등장하여 수없는 살명을 뿌려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천고의
기연을 얻어 고강한 마공을 터득했다고 보는 무림인들이 많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호남성의 한 유생의 후손이라 했다. 그러다 기물을 얻어 마공을 익힌 후 살행을 했다고 강
호인들은 풍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 혁사락의 품에서 나온 두루마리라면 마공비서(魔功秘書)
이거나 아니면 그 무예가 숨겨진 비밀의 장소를 나타내는 장보도일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여기 모인 중인들은 기연을 얻기 위하여 흥분된 상태였다.
"이 형산을 벗어나는 것만이 우선은 아닌 것 같소."
이 곳까지 오는 동안 줄곧 얼굴을 굳히고 있던 장궁이 신중한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
하였다.
"현재 이 곳, 형산은 형산파의 권역이오. 그리고 그들은 조금전까지만 해도 혁사락과 계속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혁사락을 추적하고 있었소. 어쩌면 우리들이 혁사락이 죽은 곳에서
머물렀던 것을 지금쯤은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이럴때 섣불리 행동을 하는 것은 타초
경사의 우를 범하는 것일 수도 있소. 게다가 여기에는 형산뿐만 아니라 무당과 곤륜의 고수
들도 초빙되어 와 있소. 내 의견은 잠시나마 이 곳에 머무르며 예의 상황을 주시한후 그 이
후에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낫다고 사료되오."
"장형의 말이 맞소. 아무리 형산이라고 해도 우리들 역시 그리 만만치 않은 명가의 후손들
이오."
힐끗 곁눈질로 아환을 한번 살피고는 말을 계속 이어가는 강문직, 적극적으로 장궁의 말에
동조를 하였다.
"이 곳이 형산이고 형산파의 위세가 쟁쟁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것이
오. 일정 시간 지켜본 후 행보를 하는 것이 옳다고 보오."
"하지만 기물을 얻었을때에는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혹시라도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간다
고 하면 우리는 중원의 무인들에게 표적이 될꺼요."
"그것은 우리들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질 않겠소? 설마 백리형이 밖으로 그 기밀을 누설
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강형! 나를 어찌 보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이오."
백리석이 이죽거리는 듯한 강문직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음성이 격하여졌다.
"진정들하시고..남궁소협의 의견을 어떠신지요?"
제갈수란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슬쩍 말을 돌리고는 남궁비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러자 백리석과 강문직, 장궁의 행동이 일순 멈춰지고 그들은 남궁비에게 눈을 돌렸다. 아
무래도 이 곳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은 다름아닌 남궁비, 만검창룡이었다.
"글쎄요. 소생이 뭐라 해야 할지..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소유주에게 물어보아야 하지 않
겠소?"
남궁비가 제갈수란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더니, 현현히 신광이 빛나는 눈을 들어 그 초점
의 끝을 아환에게 살며시 돌렸다. 그러자 일제히 중인들의 시선이 아환에게 향해졌다. 아환
은 자신에게 모든 이들의 눈길이 모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환에게서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하자 성질이 급한 백리석은 재차 되물었
다.
"주형, 어쩌실 꺼요. 어서 빨리 이 곳 형산을 떠야 하지 않겠소?"
"주형, 아니오. 경솔한 행동은 천고의 누를 범하기 쉽소. 차분히 정리를 한다음 앞으로의 일
을 결정합시다."
백리석과 장궁, 강문직은 아환에게 자신의 의견을 거듭 주장하였다.
"웃기는군."
그때 들려오는 나직한 소리, 아리따운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맑고 청아한 음성이었지만
그 속에서 풍겨져 나오는 색깔은 조소(嘲笑)였다.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지는 백리석과 장궁
등은 험한 빛을 눈에서 내뿜으며 말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소유자는 아무 말도 없는데 나서서 배놔라 감놔라 하는 이유가 뭐지? 마치 그 두루마리
가 자기 것처럼 말하는데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지?"
예의 그 싸늘하면서도 냉소적인 음성, 모인 일행들의 눈이 한 곳, 석영에게로 모여졌다. 거
침없는 말투와 자신의 의사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한 석영의 면모가 확연히 드
러났다.
"...."
"...."
중인들이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혈장미 석영의 입만 주시하고 있을 때 석영의 말
이 이어졌다.
"여기있는 그 누구도 주소협의 품속에 있는 기물을 달라고 할 권리는 없어. 강호의 관례상
보물은 소유하는 자의 것이지. 더군다나 혁사락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건네주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그렇다면 석소저는 그 두루마리를 포기하겠다는 거요?"
"포기? 언제 그게 내 것이었나? 그것도 아니면 강제로 주소협에게서 뺏자는 말인가? 아! 사
양하겠어. 괜히 연도 닿지 않는 물건 때문에 목숨을 잃고 싶지는 않거든.."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일에도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당연하지. 내가 왜.. 혹시 당신들 주소협에게서 기물을 빼앗을려는 것인가?"
상황이 점점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탐욕의 빛을 잃지 않는 백리석과 장궁, 강문직 등이
사화를 제외한 주위의 다른 이들과 합세를 하여 주소협에게서 보물을 강탈하려는 모양이었
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이 두루마리인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환이 장내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흐르자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
내었다. 검게 말라 붙어있는 핏자국이 아직 두루마리 표면을 군데 군데 덮고 있어 중인들에
게 아까 그 피웅덩이와 그 속에 담겨있는 수 많은 시체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렇소. 당신은 그 두루마리를 어찌할 거요?"
강문직이 한발 앞으로 나와서 아환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손을 검을 찬 허리춤에 가 있어
언제라도 출수를 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한 자세로 긴장된 음성으로 아환의 다음말을 요
구하였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이 두루마리인가?"
"..."
정곡을 찔렸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은 결국 명문 정파라 불리우는 후지
기수들이었고 자칫 유명사신의 유물을 얻었다고 소문이 나기라도 한다면 작게는 개인의 참
변을 불러올 수 있지만 크게는 사문의 멸문까지 일어날 수 있었다. 과거 무림의 역사에 비
추어 볼 때 기진이보를 얻은 후 그 소문을 막지 못하여 탐욕스러운 수많은 무림인에게 협공
을 받아 멸문, 몰락한 명문대파들이 부지기수였다. 자칫하면 그 기물은 얻지 못함보다 훨씬
좋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천하의 살마 유명사신의 유물들이 다른 사마외도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
여 그리 하는 것이요."
"장형의 말이 옳소. 또다른 마두가 강호에 출몰한다면 또 피바람이 불터, 백도의 무사로 그
것을 어찌 그냥 지켜볼 수 있겠소."
모인 사람들 중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이는 없었다. 백도의 무사라고? 저 탐욕에 이글
거리는 눈빛이 이들의 목적이 무엇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허나 그들의 마음을 잃지 못
하는 사람도 있었는지 '툭' 탁자위에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소."
아환이 별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짧게 내뱉는다.
흠칫, 중인들은 놀라서 아환을 쳐다 보았다. 그들의 눈에 어린 복잡한 감정, 어이없음과 당
황, 당혹, 기쁨, 희열, 의혹 등 복합적인 감정들이 조합된 눈빛으로 아환을 쳐다보던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탁자위에 내던져진 두루마리로 향해졌다.
"제갈소저, 두루마리를 펼치시오."
거구의 아환을 올려다보는 작은 키의 제갈수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아주 일순간의 일
이라 눈빛을 마주친 아환외에는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는 흔들림. 제갈수란은 아무 말 없
이 손을 뻗어 두루마리를 잡아갔다.
"멈추시오."
다급한 음성, 장궁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자 자신도 모르게 제갈수란의 동
작을 제지하였다.
"무슨 일인가요. 장소협?"
"그게..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오."
"이렇게 하다니요?"
"많은 이목이 있는 곳에서 공개를 한다는 것은 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 생각한다는 말이
오."
"그렇다면 장소협의 의견은 어떤 것인가요?"
"아까도 말했듯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그게 저 두루마리를 보고 보지 않고와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건..."
"소생 강모는 장형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오. 섣불리 두루마리를 열기 보다는 예의 상황을
주시하는 것이 합당하다 사려되오."
"참내..아! 물건의 소유주가 펼치자는 데 왠 잡소리? 란매, 빨리 펼쳐."
"잠깐! 석소저, 말씀이 너무 심하지 않소?"
"또 뭐야? 왜 그대가 끼어드는 것이지?"
백리석이 가만히 있다가 장궁을 편들고 나섰다. 아까와는 태도를 돌변하여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장궁의 쪽에 섰다. 그 말을 듣고는 석영의 고운 봉목이 가볍게 찌푸려지고 눈가에
노기가 맴돌았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계속되는 평어투의 말에 사내들은 자존심에 손상을 입었지만 상대는 무림사화 중의 일인이
자 제일 고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는 여걸로 남궁비에 못지 않는 무위를 지니고 있다는 혈장
미, 쉽사리 분노를 표출할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언행에 주의를 해달라는 말입니다."
"풋!"
실소를 터뜨리는 혈장미, 눈도 돌리지 않고 제갈수란에게 말을 건네었다.
"란매, 빨리 두루마리를 열지?"
"에잇! 보자보자 하니 정말 너무 하는 군. 사화면 다야! 어디 나랑 한번 싸워봐!"
날카로운 음성이 장내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금속성.
챙!
시퍼런 예기를 흩뿌리는 두자 반 가량의 얇은 검신을 가진 보검이 뽑혀져 현현한 금속광채
를 공간에 채우고 있었다.
"나, 갈염청은 더 이상 네년들 사화의 잘난척 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오늘 그 콧대를 꺾어주
마. 혈장미! 검을 뽑아라."
"오호! 그으래.."
슈릉..
석영의 연검이 석영의 허리춤에서 휘청거리듯 그 검신이 흔들리며 은회색의 예광을 뿜어내
었다. 가벼운 손짓에, 이어진 운기로 인하여 검에 주입된 진기는 검을 세웠다.
쮸웅..
자연스레 두 여걸은 탁자에서 발걸음을 옮겨 안실의 한쪽 옆으로 움직였다. 다행인지는 몰
라도 객실의 별채는 꽤 규모가 있어 원탁을 벗어나도 상당한 규모의 공간이 있었다.
"받아랏!"
비단이 찢어지듯한 교성을 내뱉으면서 갈염청이라 말하던 여인이 검을 내질러 석영을 찔러
왔다. 검에 담겨 있는 흉흉한 살기가 순식간에 석영을 짓쳐들어갔다.
"어림없다! 회류형(回流形)"
석영의 연검이 호선을 그으며 갈염청의 직선으로 뻗어오는 보검의 측면을 비스듬히 눌러서
돌려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섬전세(閃電勢)!"
미처 검을 거두지 못한 갈염청의 목을 향해 곧장 찔러가는 석영의 검, 그 빠르기는 감히
범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였다. 이에 갈염청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가고 눈을 질끈
감아 앞으로 찾아올 죽음을 기다릴 때 차가운 금속성이 들려왔다.
차앙..
어느새 빼어들었는지 운학일룡 장궁이 회색빛이 감도는 검을 세워 갈염청의 목앞을 막고
있었고 그 검신에 석영의 검이 멈추어져 있었다. 검의 폭이라 해봤자 불과 세치가 채 되지
않는 두께, 그 것으로 석영의 검을 세운 것이었다.
"이런 살초까지 쓰는 것은 과하지 않소. 석소저."
"누가 먼저 살초를 펼쳤는데 그런 말을 하지?"
"왜 나셨어요. 그깟 초식 나도 막을 수 있어요. 어서 비켜요. 장공자. 내 오늘 저 혈장미 석
영의 허실을 낱낱이 파헤칠 테니까.."
갈염청은 조금전 자신이 지옥의 문턱에서 되돌아 온것도 모르는지 표독스러운 안광을 빛내
면서 앞을 가로막은 장궁을 밀쳐내려 하였다. 그러자 장궁이 난감한 기색으로 남궁비를 쳐
다보면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남궁형. 소생이 석소저의 검에 눌려 움직이지 못하겠으니 남궁형이 갈소저를 좀 맡아 주시
구려."
"알았소."
갈염청이 신형을 날려 계속 석영을 공격하려 하자 남궁비가 살짝 손을 뻗쳐 갈염청의 공세
를 비껴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가볍게 갈염청의 앞을 가로막고는 태극권으로 전면의 방위
를 점거하여 갈염청의 진로를 막았다.
"안정을 되찾으시오. 갈소저."
"안정이라니..이렇게 모욕을 받고 어찌 안정을 찾으라 말씀하시는 거죠?"
갈염청이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로 석영을 노려보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일단 갈염청을
막았으나 남궁비는 어떻게 이 곤경을 버텨야 하나 하는 눈빛을 담고 고개를 돌려 장궁을 쳐
다 보았다. 그 순간 남궁비는 석영의 검을 막고 있는 한 손외에 뒤쪽으로 돌려진 장궁의 손
에 기이한 쇠붙이로된 원통형의 물체를 보고는 다급히 소리쳤다.
"광폭사정(狂爆死釘), 위험하오! 석소저!"
퍼펑..
급박한 남궁비의 소리가 갈염청에 대한 조소를 띄고 있던 석영의 귀에 들리기도 전에 장궁
의 손에 들려 있던 원통형의 괴물체는 순식간에 장궁의 앞으로 향한다 싶더니 산산히 터져
나가면서 수십, 수백 줄기의 검은빛을 앞으로 쏘아내었다.
"허엇!"
순간적으로 일으킨 검막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암기를 막기에는 부족하였다. 더군다나 그
광폭사정은 무림에서도 보물이자 마물로 취급받는 이물임에야..
"으윽.."
대부분이 검막에 퉁겨나갔지만 몇몇의 쇠못이 석영의 탄탄하지만 가녀린 교구를 꿰뚫고 들
어 갔다. 헛바람 새듯한 신음을 흘리면서 주춤 주춤 몇걸음 물러나던 석영이 팔과 다리 가
슴과 배부위에서 붉은 피를 쏟으면서 무너지듯 쓰러졌다.
퍼펑..
연이은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이번에는 남궁비의 등쪽에서 터져나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틀면서 검을 뒤로 세차게 휘둘러대는 남궁비, 충분한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라
그 역시 수발의 쇠못이 자신의 몸에 틀어박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단지 그 남궁비의
상체에 작렬했던 쇠못들은 무엇인가에 가로막혀 옷을 채 뚫지 못하고 뒤로 퉁겨져 나갔다.
"크윽.."
쾌속히 앞으로 신형을 날리며 검을 떨쳐낸 남궁비지만 근거리에서 터져나온 광폭사정은 남
궁비의 검의 방어를 뚫고 팔과 다리 몇군데에 꽂혔다. 그러자 남궁비의 화려한 비단 백의는
금새 붉게 물들여졌다. 고통이 만만치 않아 짙은 검미를 찌푸리며 신음성을 뱉더니 그 상태
로 뒤로 물러서 검을 들고 전면을 방비를 하였다. 허나 곧 그의 다리는 후들거리며 떨기 시
작하였다.
"독! 독을 묻혔군.."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진기가 유통되는 혈맥에 장애를 느끼자 가까스로 내기로 독기운이
확산되는 것을 막은후 씹어뱉듯 한자한자 내뱉었다. 그러면서 검봉을 갈염청의 목젖을 향한
방향으로 잡고 금방이라도 출수하려는 품을 잡았다.
"이게 무슨..헛! 설마 당신들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깜짝 놀라서 일어나며 외치던 유가형이 미처 말을 끝내지 못하고 헛바
람을 들이켰다. 어느새 유가형의 옆으로 다가 왔는지 강문직이 검을 빼어들고는 유가형의
등뒤에 갖다대었다. 비단 유가형뿐이 아니었다. 백리석 역시 언제 뽑았는지 검을 제갈수란의
목부위에 가져다 대었다. 창촐간에 벌어진 일이라 유가형이나 제갈수란이나 미처 방어를 하
지 못하고 그들보다 무공이 아래인 둘에게 제압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악서령은 아환이 사전에 주지를 준 관계로 원탁에서 뒤로 물러서서 비스듬히 검을
세워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선우지와 또다른 여인, 진주 언가보의 여식이라 소개한 언가기
와 대치를 한 형태였다. 아환은 두루마리를 제갈수란에게 넘기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라
악서령에게 전음으로 알렸고 악서령은 광폭사정이 터지자 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뒤
로 신형을 날려 자신에게 다가오던 두 여인과 대치국면을 이루었다.
마지막 한 사내, 백리석과 동행하던 백리세가의 인물이라고 말했던 이는 아환의 손에 목을
틀어 잡혀 있었다. 목이 기역자로 뒤로 꺾였고 혀가 입밖으로 길게 빠져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즉사를 한 모양이었다. 그의 손에 비침이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환에게 암습
을 하려다 제압을 당한 것으로 보였다.
거의 한자 가깝게 차이가 나는 아환이 백리세가의 인물의 목을 잡고 허공에 들고 있는 모
습은 전장의 전신(戰神)을 연상하게 했다. 시퍼런 안광을 흩뿌리면서 아환은 주위를 둘러 보
았다. 석영은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그런 그녀의 얼굴이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으
로 보아 독기가 상당부분 침투한 상태로 추측되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게다가 광폭사정이라니..어찌 백도의 무인들이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요? 어서 검을 치우고 뒤로 물러 서세요. 남궁소협과 석영의 상세가 좋지 않아
요. 빨리 치료를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흐흐흐..유가형, 우리가 장난으로 이러는 줄 아나?"
"그게 무슨 말이죠?"
"저 기보를 너희들 칠룡과 사화들이 순순히 차지하게 할 꺼라고 보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저 기보는 우리 흑천이.."
"강문직! 말조심하라."
"헛! 죄송합니다. 속하의 죄를 용서하십시오. 이년 때문에..이 죽일 계집이 감히 나를 우롱
해?"
강문직은 유가형의 의혹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다가 장궁이 싸늘하게 외치는 것을 보고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장궁에게 사죄를 하고는 그 분노의 화살을 유가형에게 돌렸다.
"흑천? 흑천이라 어떤 단체죠?"
"더 이상 알려 하지 마라. 어차피 네 년놈들은 여기서 죽을테지만.."
강문직이 유가형의 물음에 잔혹한 음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검을 그대로 유가형의 등으로
밀어넣으려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너희들은 다 한 패거리인가?"
뒤로 물러서서 백리세가의 인물의 목을 틀어잡고 있던 아환이 입을 열었다. 제갈수란의 목
에 검을 대고 있는 백리석이 왠지 눈을 굴리며 장내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 꺼
림직하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저 백리가는 우리와 상관없는 놈이다. 앗! 저놈이!"
장궁이 아환의 말에 순순히 대답을 하면서 제갈수란쪽을 보다가 다급한 음성을 토해내었
다. 어느새 제갈수란의 손에서 백리석이 두루마리를 빼앗아 들고 품에 넣을려고 하는 것이
장궁의 눈에 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는 안된다! 이 놈!"
장궁이 한 걸음 내딛으며 일직선으로 검을 찔러 백리석의 손을 겨냥하였다. 그러자 막 품
에 손을 집어넣으려는 백리석은 흠칫하며 두루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올리고는 몸을
회전시켜 장궁의 검을 다른 손에 들려 있는 검으로 쳐내었다.
첫 공세가 막히자 장궁은 쇄도하던 그 기세로 연달아 수검을 쳐내어 백리석을 공격하였다.
주로 검이 향하는 곳은 백리석이 두루마리를 잡고 있는 손에 집중되었다. 백리석은 흉흉한
기세가 짓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뒤로 몸을 틀어 검을 피해내었다. 그러면서도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손은 뒤로 하여 검의 영향권을 벗어났다.
창창창..
계속되는 금속성, 백리석과 장궁의 검이 수십차례 부딪히며 날카로운 금속성을 안실에 퍼
져나가게 하였다.
백리석은 몇차례 손을 나누어 보니 장궁이란 자의 무공이 자신보다 한 수 위인 것을 깨달
았다. 백리석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다가는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을 알고는 전면
을 향해 검을 휘둘러 장궁의 진로를 일단 막은후 재빨리 땅을 박차 창문쪽으로 신형을 날렸
다.
퍽!
"우욱.."
막 창문을 뚫고 나가려는 백리석의 몸에 커다란 물체가 부딪혀왔다. 검을 들어 그 날아오
는 물체를 베었지만 베어진 상태로 날라온 그 물체는 백리석과 충돌하여 백리석을 뒤로 물
러서게 하였다. 꽤 무게와 부피가 나가는 물체에 실려진 경력이 상당하여 백리석은 뜻한 바
도주를 하지 못하고 신형을 뒤집어 한쪽 옆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검을 세워 연이어 다가
올 공격을 대비하였다.
백리석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어이가 없는 표정, 무언가 말할 듯 입을 살짝 연 상태로
석상같이 굳은 백리석의 얼굴 부위에 낯설은 것이 보였다. 보랏빛의 어른의 엄지 손가락만
한 막대가 백리석의 이마에 붙어있는 것이었다. 흡사 어떤 장신구가 백리석의 이마에 달려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비도! 제갈세가의 무영비도!"
신음처럼 장궁의 입가에서 하나의 무공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장궁이 눈길이 향하는 곳,
갸녀린 손을 살짝 굽혀 백리석을 가리키는 제갈수란이 보였다. 제갈세가의 비전절기 무영비
도가 제갈수란의 손에서 펼쳐져서 백리석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었다. 백리석이 다급하게 나
갈려고 해서 그랬는지 미처 제갈수란에게 위해를 주지 않고, 도망치려다 아환과 장궁에게
제지를 당하였고 결국은 제갈수란의 무영비도가 날았다.
"검을 치워요."
제갈수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장궁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백리석에게 다
가가 두루마리를 회수하려고 손을 뻗으려고 할 때 그런 그녀의 손보다 빠른 것이 있었다.
다름아닌 아환의 거도였다.
아환이 칼을 뻗어 두루마리에 갖다대었나 싶더니 마치 자석에 붙은 쇠붙이인양 두루마리가
칼에 달라 붙어 아환의 손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환은 칼에서 두루마리를 떼고는 두루마리
의 끈을 잘라 버리고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휘릭..툭..
두루마리가 아래로 쭉 펴지더니 무언가가 그 속에서 툭 떨어졌다. 아환은 손을 그 두루마
리에서 떨어진 것, 유지에 쌓인 것을 향해 뻗어 그 것을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그 유지를 펼
쳤다.
"멈춰라!"
다급한 장궁의 제지를 무시하고 아환은 그 유지속의 잘 접어진 서신 같은 것을 들더니 펼
쳐 그 내용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 아환의 동작이 너무나 태연해서 그런지 누구하나 아환
이 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아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아환은 두장가량의 빽빽히 글이 써있는 서신을 읽더니 휙 장궁에게 그 서신을 던졌
다. 장궁이 잔뜩 손에 내기를 끌어올려서 서신을 받았다. 그러나 장궁의 예상과는 달리 그
서신에는 아무런 경력이 들어있지 않았으며 장궁은 자신의 내공에 오히려 중심을 잃고는 휘
청거렸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누구하나 웃지 않았다.
장궁은 자세를 잡고 얼른 서신을 펼쳐 그 속의 내용을 확인하였다. 그러더니 얼굴이 확 구
겨졌다.
"이 쳐죽일 놈! 이깟 푸념이 적인 글 말고 그 손에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넘겨라!"
"이 것 말인가?"
아환이 두루마리를 빙글 뒤집었다. 뒤집힌 두루마리가 중인들의 시선에 들어오고 모든 이
의 눈길이 두루마리에 집중되었다. 두루마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산수화 한폭이었다. 그것
도 꽤 수준급의 명인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었다. 허나, 일반 산수화와 틀린 점이 금
새 중인들의 눈에 들어왔다. 음산함이었다. 두루마리 속의 그림은 왠지 모를 음산함과 괴기
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그 외에는 다른 아무런 글씨나 문양등은 없었다.
사람들은 안력을 돋구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비로소 이 산이 어떤 산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태산! 저 산은 태산이예요."
제갈수란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주위의 사람들도 동조를 하였다. 그림 속의 산
수화는 태산의 한 봉우리를 그리고 있었다. 중인들이 그 봉우리가 태산의 어느 봉우리일까
곰곰히 생각하며 안력을 더욱 돋구어 자세히 그림을 살피려고 하는 순간 두루마리에서 불길
이 확 솟아 올랐다. 아환이 삼매진화를 일으켜서 두루마리를 태워버린 것이었다.
"이..이런.."
"헛..."
"아니.."
절세의 기보라 할 수 있는 장보도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잿더미로 화해 사라져 버리자 모인
사람들은 아환이 삼매진화를 일으켰다는 놀라운 무위보다 천고의 기물이 세상에서 없어졌다
는 것이 더욱 경악스럽고 황당하여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환을 노려 보았다.
"다들 잘 보았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오.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머리나쁜 자신을 탓하시오."
"이..이 천하에 빌어먹을 새끼!"
"이제 더 볼일은 없는 것 같은데 이만 가주시겠소?"
막 흥분과 분노에 떨면서 아환에게 공세를 취하려던 장궁과 강문직은 덤덤한 아환의 말에
순간적으로 노기가 솟구쳤으나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냉정히 상태를 분석해 보았
다. 남궁비와 석영이 쓰러져 있고 유가형은 언가기의 검에 제압을 당해있다. 허나 저쪽에는
아직 제갈수란과 악서령이 건재하고 그 무공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아환이 있다. 사생결단을
낼려면 낼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피해가 너무 크리라 여기어지고 또 뜻한 바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해 내었다.
장궁은 강문직과 언가기, 그리고 일행들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일제히 몸을 날려 창문을 부
수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부록 황보지약편 창작야설
황보지약편
"아! 따분해.."
이제 열넷, 열다섯 가량되었을까? 아리따운 한 소녀가 크게 기지개를 펼치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초롱 초롱 별을 박아 놓은 듯한 눈동자에 희디흰 피부, 오똑한 콧날하며 고운 목선
등이 막 피어 오르려는 꽃봉오리를 연상케 하였다.
소녀, 황보지약이라 이름이 붙은 이 소녀는 현 산동성의 패자인 황보세가의 금지옥엽이었
다. 황보세가주 무적권왕 황보극이 뒤늦게 본 영애이고 가문의 무예가 양(陽)공이라 그런지
여아가 귀한지라 황보극은 이 황보지약을 애지중지하면서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게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황보지약은 그러한 황보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학문과
무예등 여러 방면에 소질을 보여 차후 하나의 여걸을 등장을 기대하게 하였다.
황보세가는 불과 오십년전까지만 해도 꽤 이름있는 가문이었으나 산동성의 패자라 할 악가
(岳家)에 비하여 그리 위세를 떨칠 힘이 없었다. 당시 산동성의 패자는 산동의 맹호(猛虎)라
불리우는 악가였고 그때까지만 해도 칠가(七家)라 불리웠던 이름난 세가들 중 남궁가와 더
불어 쌍벽을 이룰 정도 였다. 물론 황보세가는 그 시기에 칠가에 끼지도 못할 정도로 여타
세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위세가 미미했다.
허나, 악가의 당대 가주 창군(槍君) 악산이 무림칠왕 중의 천마황과의 결전에서 패사한 후
급격히 그 가세가 기울고 거기에 악가가 송나라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이 원의 첩보
에 밝혀진 이후 황권에 의하여 탄압을 받자 순식간에 세도가 무너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
고 황보세가 이래 최고의 기재라 평함을 받는 황보극의 조부이자 황보지약의 증조부인 쌍권
독보(雙拳獨步) 황보척이 천왕권을 완성한 후 악가에 도전, 마침내 악가의 몰락을 이끌어내
었다.
그 시절 황보극은 갓 태어난 상태였고 그것도 황보세가의 서자의 신분이었지만 황보극의
모친이 정실인 악가의 여식을 쫓아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내실을 차지한 관계로 장손자리
를 잇게 되었다. 원래 황보극의 아버지 황보일량은 심약한 사람이었고 재질이 뛰어나지 않
았으나 여색을 좋아하였고 황보척의 강압으로 악가의 여식인 악평과 정략결혼을 맺은 이후
에도 수많은 여자들을 건드렸다.
황보세가가 악가의 위세에 눌려 있을 때 황보척은 사정하다시피 하여 악가의 직계 영애를
자신의 며느리로 맞이하여 초반에는 잘해 주었으나 악가의 가세가 기울고 악평에게서 후손
을 보지 못하자 점점 등한시 하더니 끝내 악가가 몰락을 하자 악평을 내쳤다.
단지 내친 정도가 아니고 갖은 누명을 씌워 모함을 한 후 명예를 땅에 떨어지게 한 후 수
하들을 시켜 악평을 윤간하고 악평이 간음을 하였다 하여 가문에서 축출을 한 후 매음굴에
악평을 팔아버렸다. 그 후 악평은 수많은 사내들을 받아들인후 화류병으로 인하여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였다 한다.
황보일량은 악평이 쫓겨나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악평은 그에게 항상 커다란 존재였다. 그
배경이 너무나 컸고 그 성품이 단아하여 범인이 범접기 힘들어 황보일량은 매일 매일을 악
평앞에서 기가 죽어 지냈다. 악평이 후사를 보지 못한 이유 역시 거기에 있었다. 황보일량은
악평을 쫓아내기전 자신에게 갖은 애교를 부리던 몰락한 무가의 여식 하나를 얻었고 그녀에
게서 황보극을 얻었다. 그 후 악평이 가문에서 쫓겨나자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악평을 괴롭
힌 것이 황보일량이었다.
처음 악평을 윤간하도록 지시한 것은 황보척이었으나 황보일량은 그 윤간의 장면을 관음하
면서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그토록 도도하고 반듯하던 악평이 사내들의 밑에 깔려서 비명
을 지르고 위아래로 정액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본 후 황보일량은 수차례 세가의 무사들을 시
켜서 악평을 괴롭혔다. 아예 따로 거처를 하나 만들어 악평을 그 곳에 감금하고 수하들로
하여금 그녀를 정애받이로, 성의 노리개로 삼게 하였다.
악평은 하루에도 수십차례 입으로, 비소로, 항문으로 사내를 받아들였다. 하루 종일 그녀의
방안에는 밤꽃냄새가 사라질 순간이 없었으며 언제나 질척한 회음의 물기가 홍건히 악평의
침구를 적셨다. 처음에는 악평의 위엄에 조심스러워 했던 황보가의 하수인들도 시간이 흐르
자 당연스레 악평을 소유하고 그녀의 몸에 정을 토해내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임신을 하고 입덧과 배가 불러오는 등 임신 증상을 보이자 이때다 싶어
황보세가는 그녀에게 간음하였다 하여 악평에게 죄를 물어 세가에서 쫓아내었다.
그러한 것을 보고 자란 황보극의 가치관에 있어서 여인이란 존재는 그리 그에게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여자란 남자가 필요할 때 깔개가 되어주는 하찮은 '것' 이
었다. 비록 허울이 명문이고 백도라는 명분을 내걸었기에 드러나지 않게 하였을뿐이지 황보
극 역시 황보척이나 황보일량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버지 황보일량과 마찬가지로 황보극도 수명의 처첩을 두었다. 장남 황보경균과 황보두균
은 그 중 둘째 부인의 몸에서 태어났고 황보지약은 넷째 여인에게서 태어났다. 정실은 자손
을 보지 못하였고 그 외 몇몇 여인들에게서 자식이 더 있으나 재질이 탐탁지 못해 황보세가
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황보극은 황보지약이 열두살 되던 해에 은근히 혼처를 물색하였다. 혼처의 첫째 조건은 얼
마나 그 세력이 강하나 였다. 그런 황보세가의 노력에 명망있는 수 곳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그 중 가장 명문이고 위세를 떨치는 남궁세가의 차남, 병서생 남궁호성이 황보극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남궁세가가 어떤 곳인가? 말그대로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왠만한 오대문
파와 버금간다는 힘을 가진 남궁세가! 황보극은 갖은 노력끝에 혼사를 결정하고 황보지약을
남궁세가에 보내기로 하였다.
유난히 화창한 봄날, 황보지약은 예와 마찬가지로 시비들을 거느리고 나들이에 나섰다. 햇
살이 좋아 근처의 산세나 구경하자 마음을 먹고는 이름없는 근방의 작은 봉우리를 올랐다.
봄의 볕은 처녀들의 방심을 들뜨게 하는 효과가 컸다.
황보지약은 산에 피어 있는 이름모를 들꽃들을 구경하면서 여기 저기를 돌아다녔다. 때로
는 나비를 쫓기도 하였고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다. 울긋 불긋 산
경을 물들인 각종 들꽃들이 한껏 이제 막 피어오르는 소녀의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시녀들
역시 황보지약의 또래 서로서로 어울려 즐겁게 봄날의 여유를 만끽하면서 춘경을 노닐었다.
그때 황보지약의 눈에 지게 하나가 들어 왔다. 무심코 지나칠려다 황보지약은 나뭇짐을 쌓
아놓은 지게 옆에 놓인 희끄무레한 옷가지들을 보았다. 호기심이 발동한 황보지약은 근 처
로 다가가 살펴 보았다. 사내의 바지와 여인네의 저고리가 보였다.
'왠 옷이지?'
옷만 있고 사람은 없는게 신기하여 황보지약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옷가지의 임자를 찾
았다. 주위는 이제 막 새싹이 돋고 나뭇잎이 피어나는 숲속이었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그러던 중 황보지약의 눈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음성같기도 하고 비명소리같기
도 한 것이 사람의 음성이 틀림없었다. 이채를 띄고 황보지약은 발뒤꿈치를 들고 그 신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조심 조심 걸음을 옮겨 숲속으로 들어갔다.
점점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황보지약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면서 그 쪽으로 다가갔다. 마침
내 그 소리가 들려오는 근원지에 도달하였을 때 황보지약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이구..나죽네..아이구.."
"으흥..이 여편네야..음..아.."
얽혀 있는 두 동체가 동공에 맺혔다. 알몸의 두 남녀, 둘다 서민인지 밭일등에 그을려 구리
빛 두 나체가 뒤엉켜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깔고 눌러 있는 자세였다. 아직 서늘한 날씨인
데도 벌거 벗은 두 남녀는 추운 기색도 없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게 황보지약은 신기했
다. 그녀 역시 귀동냥으로 들어온게 있어 저것이 남녀의 정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크게 눈을 뜨고 미동조차 하지 않은채 황보지약은 정사장면을
지켜보았다.
죽겠다 죽겠다하구 비명을 질러대는 여인은 말과는 틀리게 사내의 등을 꽉 부여 안고 자신
의 몸을 더 밀착시키고 있으며 눈살을 찌푸리고 연신 달뜬 숨을 뱉어내는 것이 결코 죽을
지경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사내의 허리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빠르게 움직임에 따라 여
인의 눈이 허옇게 뜨여지며 거품을 내고 교성을 질러댈 때 그 들려오는 신음성은 묘하게 황
보지약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였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사내와 여인의 접합부분에 와닿자 황보지약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 쉬었다.
'헛'
시커면 살덩이가 검붉은 여인의 속살에 감싸인 채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
다. 처음보는 남자의 양물이 황보지약의 뇌리를 텅비게 만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사내의 물
건임에도 지금 황보지약에게는 거대한 몽둥이 같이 느껴졌다. 그 몽둥이가 자세히 보니 여
인의 비처속을 들락 날락 하는 것이었다. 들어갈때에는 여인의 비처의 주름진 속살에 묻혀
속살을 끌고 비처로 함몰되는 가 싶더니 빼어낼때엔 여인의 진한 빛깔의 음순들이 그에 끌
려서 빠져나왔다.
거무스름한 털들이 뒤엉켜 시커멓게 보이는 곳에 봄의 햇빛에 반사되어 물기가 번들거리는
남자와 여자의 비부가 황보지약의 머리에 혼란스럽게 새겨졌다.
"어때 좋아? 헉..헉.."
"아이구..아학..너무 좋아!..더..더! 나죽네.."
사내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여인의 말도 황보지약에게는 낯설었다.
'저렇게..저것이 저렇게 좋은가?'
발그스름하게 황보지약의 얼굴이 홍조를 띄었다.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느끼고는 황보지약
은 얼른 손을 들어 뺨을 가렸다. 그리고 옆을 살짝 돌아보았다. 똑같았다. 시녀들 역시 붉게
상기된 얼굴로 뚫어지게 얽힌 남녀의 정사를 보고 있었다. 입술이 가볍게 벌어지고 그 사이
로 뜨거운 숨결이 배어 나왔다. 어느 계집은 손이 이미 비처를 더듬고 있었으며 가슴을 쓰
다듬는 시비도 있었다. 아무래도 하층 계급인지라 성에 대하여 조숙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
었다.
그 모습을 보던 황보지약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비처 부근으로 가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
히 놀랐다. 엄연히 자신은 이 시비들의 까마득한 상전, 어려서부터 배운바 조신한 자세를 취
하여야 했기에 황보지약은 서둘러 계집들에게 눈치를 준후 조심조심 숲을 벗어났다. 시비들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하였지만 주인이 되돌아가는지라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면서도 황보
지약의 뒤를 따랐고 숲속은 달뜬 남녀의 신음성만이 진동을 하였다.
길지 않은 해가 서산으로 저물고 세가의 건물들이 어둠에 묻히자 여기 저기에서 불빛이 켜
지고 그 불빛은 이내 세가의 곳곳을 밝혔다.
황보지약은 산을 내려와 세가에 들어가 일찍 저녁을 먹고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산행
후라 약간의 땀과 먼지등으로 몸이 개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채에 마련되어 있는 욕
실로 와서 황보지약은 복잡하게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옷가지를 하나 하나 벗어내린 다
음 발가벗은 상태로 따뜻한 물이 담겨진 욕조통으로 몸을 담그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은은한 온기가 자신의 몸을 덥히기를 기다리던 황보지약은 어느 정도 몸
의 긴장이 이완되자 천천히 자신의 몸을 씻기 시작하였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부드럽
게 매만지면서 손길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더니 막 봉긋하게 솟은, 아직은 작은 젖가슴
에 손길이 와닿았다. 천천히 젖가슴을 씻어 내렸다. 작은 돌기가 물속에서 연한 분홍빛을 발
하였다. 작은 바가지에 물을 퍼담아 소녀의 나신에 끼얹던 황보지약은 문득 낯의 광경이 머
리에 떠올랐다.
남녀가 뒹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갈색으로 땀에 의하여 반짝이던 사내의 근
육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갖다 대고 있는 것처럼 세밀하게 기억이 났다. 황보지약의 한
손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아..."
나직한 탄식 비슷한 신음. 황보지약은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눈가가 가볍게 찡그리면서 바
알간 입술이 살포시 벌려졌다. 그 벌어진 입술에서 더운 숨이 배어나왔다. 황보지약은 손을
비처에 갖다댄 상태에서 살짝 속살, 음순을 잡아 보았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시비들을 부르지 않길 잘했어.'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권위있는 주인의 모습에 흠집이 가는 것, 황보지약은
곧 생각을 지우고는 여유롭게 자신의 몸을 쓰다듬었다. 초보라 그런지 더 이상의 진도를 나
가지는 못하였고 황보지약은 젖가슴과 비부근처만 쓰다듬었다. 그러다 어떻게 했는지 손가
락이 우연히 더 밑으로 내려가 항문근처에 닿았다.
"아읏.."
황보지약은 진저리를 쳤다. 비처를 만질때보다 오히려 더 큰 짜릿함이 회음, 비처와 항문의
사이에서 번져나갔다. 황보지약은 조심 조심 다시 한번 손을 갖다대었다. 아까 만큼은 덜했
지만 묘한 감흥이 일었다. 가녀린 손가락이 국화꽃 주위를 어루만졌다. 평소에는 더러운 곳
이라 여기었던 부위가 이런 느낌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평소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황보지약은 측간에서 용변을 보고 그 부위를 닦았지만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허나
오늘 싱숭생숭한 상태에서 언뜻 닿은 감촉은 마치 뇌전이 그녀를 꿰뚫은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손가락 장난을 한 후 황보지약은 일어나 붉은 몸을 수건에 닦고는 욕실에서
나왔다. 오늘부로 황보지약만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 후에도 황보지약은 밤마다 자위를 즐겼다. 부드러운 천으로 특정 부위를 쓰다듬고 손가
락으로 성감을 자극하였다. 무언가 미진하였지만 더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도 나갈수도 없었
다. 열여섯이 되던해 황보극은 남궁세가와의 정략결혼을 위해 황보지약의 팔꿈치에 수궁사
를 찍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처녀막이 파괴되었다고 수궁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본디
사내의 양기가 처녀의 몸에 침입하여야지만 지워지는 수궁사이기에 남성의 양물이 아닌 다
른 것으로 즐길 수도 있었다. 허나 처녀혈의 중요성도 수차례 황보지약의 모친이나 선생들
을 통해 가르쳤기에 황보지약은 자위를 즐기면서 더 강도를 높이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황보지약의 한계를 깨뜨린 것은 다름아닌 황보세가의 두 기둥, 황보경균과 황보두
균이었다. 황보지약은 많은 남자를 만나지는 않았어도 황보세가의 형제들이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충분히 알 나이가 되었고 남궁세가와 혼사가 맺어 졌다 하나 아직 구체화되지 않
은 상태에서 산동성에 그 이상의 남성미를 발하는 사내들이 없었기에 황보지약의 호기심이
담긴 눈길은 자연스레 형제들에게 돌아갔다.
열아홉이 되고는 황보지약이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상태가 되었다. 산동에서 손꼽히는 미
인으로 평함을 받는 그녀에게 크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황보지약은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었다. 주위에서 황보지약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였고 스
스로 저 자신이 생각해도 나만한 미모도 없겠다 하고 자만하고 있을 때 그녀의 귀에 무림사
화라는 호칭이 들어왔다. 백도무림에 아름다운 네 여자를 일컬어 무림사화라 한다고 들려왔
다. 그러나 그 사화에 자신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았다. 속으로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도
그 여자들은 주변의 배경으로 그런 이름을 얻었겠거니 하고 자위를 하였다. 내가 강호에 알
려지지 않아서 그렇겠거니 생각을 하였다. 허나, 우연히 사화가 황보세가에 들린 그날 황보
지약은 여태까지 지켜왔던 자부심이 산산히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난화성녀의 고아하면서도 성스러움, 천향매화의 세속을 벗어나는 듯한 화사하면서도 우아
한 아름다움에 혈장미의 고혹적인 매력, 제갈수란의 청순하면서도 시원한 천진함까지 자신
이 하나도 그녀들에게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황보지약의 안색은 하얗게 질
려 뒤도 안돌아 보고 자신의 방에서 사화가 세가를 나설때까지 벗어나지 않았다.
그 후 황보지약의 성정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강호의 일에 나섰으며 심성이 독해졌다. 간
혹 잔인한 일면을 보이기도 하였고 무공의 수련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런 황보지약과 황보형제들이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황보
세가주 황보극이 세가의 일로 본가를 비운 사이 황보지약은 황보형제들과 술을 마시다 취기
를 느꼈다. 술이 그리 독하지는 않았지만 사내다운 사내 둘, 그것도 자신의 오빠들과 마시다
보니 긴장이 풀어져 과음을 하게 된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하필 거기에서 화제가
무림의 후지기수로 바뀌고 당시 칠룡이던 황보경균과 둘째 황보두균은 술기운에 사화들을
입에 마르게 칭송을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황보경균은 제갈세가에 계속 혼담을 청한 상태라 혼담이 오고가는 다른 사화에 비
하여 입가애 오르는 빈도수가 월등하였다. 게다가 아름다움은 천향매화가 제일이라 둘이 입
을 모아 말할 때 황보지약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들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제가 있는데 다른 여자를 그리 칭찬하실
수 있나요? 그녀들이 그렇게 예쁜가요? 그럼 저는 어때요."
도발적으로 일어나 가슴을 내밀면서 황보지약이 술기운에 발그스레한 얼굴에 매혹적인 미
소를 지으며 황보형제들을 지긋이 내려보자 얼큰한 취가가 오른 두 형제들이 농을 지껄였
다.
"겉만 봐선 아나? 속을 봐야지.."
"속이요? 흥! 저는 뭐 허탕인줄 아세요?"
잡아뜯듯이 앞섬을 풀어 헤치고 탱탱한 두 젖가슴을 내밀었다. 황망간의 일이라 미처 제지
를 못하고 당황하는 형제들 앞에 하얀 두 살덩이가 고개를 들이밀자 황보형제들의 눈이 점
차 붉게 물들여졌다. 사화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황보지약은 절세의 미녀라 칭함을
받는지라 그 속살의 매력은 사내의 눈길이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몽롱하게 두 형
제가 자신의 유방을 쳐다보면서 넋을 잃자 기가 오른 황보지약은 치마까지 훌렁 벗어 던졌
다.
"그년들의 이곳은 저보다 낫나요?"
살짝 벌어진 다리사이로 드러나는 여인의 비소. 가뭇한 윤기나는 음모사이로 살짝 살짝 내
비치는 연붉은 속살의 유혹이 황보형제들에게 직격되었다. 하얀 두 기둥이 곧게 아래로 뻗
어 있고 그 사이에 태고의 신비가 흐른다.
황보지약은 두 형제가 정신을 잃고 자신의 비처를 바라보자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취기인지 성적 흥분인지 황보지약의 하얀 나신이 붉게 물들어 요염하게 빛나자 황
보형제들은 불끈 하체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잔뜩 성날대로 성이난 아랫도리가 금새라도
바지를 뚫고 나올 듯 했다. 황보극의 피를 이어서 그런지 주색에 능한 황보경균과 황보두균
도 황보지약 정도의 미녀와는 거의 경험을 하지 못하였는지라 양물을 바싹 세우며 멍하니
침을 흘린 상태로 황보지약을 동공에 담았다.
"어때요? 제가 더 낫죠?"
가슴이 황보형제의 앞에서 흔들거렸다. 황보지약이 팔을 탁자에 짚고는 가슴을 쑤욱 내밀
어 황보형제 눈 가까이까지 밀어붙인 까닭이었다. 홀린 듯이 황보형제들은 눈앞의 가슴으로
두툼한 손을 뻗었다.
"아흠.."
자그마한 붉은 입술이 살포시 열렸다. 새어나오는 더운 숨결이 황보형제에게 전달되는 듯
했다. 슬쩍 매만지던 거친 사내의 손들이 점점 그 힘을 더해갔다. 젖가슴이 일그러졌다. 사
내들은 한참을 유방을 주물럭대었다. 그러다가 황보경균이 획 황보지약을 끌어 당겨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사내의 두터운 입술이 황보지약의 유방을 덮었다. 입으로 덮기에는 너무나
큰 가슴이었지만 황보경균은 입속에 다 집어넣을 듯이 유방을 빨아대었다. 그러다 혀를 내
밀어 유방 주위를 핥다가 다시금 빨고 이빨로 그 위에 파르르 떨고 있는 유실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손은 어느새 밑으로 내려가서 황보지약의 탐스러운 둔부를 꽉 움켜쥐고는 커다란
손을 쥐었다 폈다 하였다.
황보두균은 어느새 옷을 다 벗고는 옆에 서서 양물을 흔들고 있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
알로 엉켜있는 두 사람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손으로 양물을 잡고는 앞뒤로 움직였다. 워
낙 덩치가 있는 황보세가의 인물들이라 그런지 물건의 크기도 상당하였다.
와장창..쨍그렁...창..
탁자위의 술병이며 안주접시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위를 덮는 하얀 식탁보, 아니
황보지약의 발가벗은 나신이 보였다. 풀어헤쳐진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며 열기를 발산하는
고운 봉목, 오똑솟은 콧날 밑에서는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오고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하
얀 치아 사이로 끊임없이 달뜬 기운이 배어나왔다. 우아한 목덜미의 곡선에서 어깨선을 따
라 내려오면 탱글탱글하게 솟아오른 두 젖가슴이 황보형제의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여기 저
기 보이는 붉은 치흔 밑으로는 기름진 배가 군살 없이 쭉 매끈히 이어지고 둘로 갈라지는
부위에 이르러서 나타나는 여인의 신비로운 비처에는 다듬어진 풀들사이에 오돌도돌 하게
솟은 속살들이 수줍은 고개를 내밀면서 질척한 회음의 액을 울컥울컥 뱉어내고 있었다.
두눈이 벌개진 황보형제들은 나신의 몸으로 황보지약에게 달려 들어 여기 저기를 탐하였
다. 황보경균은 아래를, 황보두균은 위를 맡았다. 전신을 두 형제에게 맡긴 채 황보지약은
오로지 쾌감에 몸을 떨뿐 다른 행동을 취할 겨를이 없었다. 전혀 경험이 없었지만 황보두균
이 밀어붙인 하체가 얼굴에 와 닿았고 숨을 쉬느라 벌어진 입술로 사내의 육봉을 침입을 할
때까지만 해도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본능인지 아니면 천성의 색기에 지배를 받
는지 황보지약은 벌린 입을 가득 메운 황보두균의 살덩이를 입으로 빨아대었다.
역겨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다고 해야하는 것이 정답일
게다. 황보지약은 크지 않은 작은 입을 최대한 벌린후 머금어 황보두균의 양물을 빨아당겼
다. 그리고는 혀를 놀려 샅샅히 그 양물을 핥았고 살짝 살짝 이를 깨물어 남근을 물어댔다.
황보두균은 온몸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쾌감을 느꼈고 황보지약의 입이 원래 남근을 받아들
이는 구멍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세게 허리를 흔들었다.
"웁..으..흐웁.."
"헉..으으음.."
"흐룹..쩝..흡.."
각기 틀린 신음성이 뒤엉킨 세 동체의 입을 헤집고 흘러나왔다. 황보경균은 황보지약의 비
처에 입을 대고는 강하게 빨아 한방울의 애액도 남기지 않겠다는듯이 까칠한 수염이 나있는
입술을 황보지약의 아랫도리에 강렬히 갖다대었다.
한참을 그렇게 황보지약의 아래에 있던 황보경균은 몸을 일으키더니 크게 위아래로 흔들리
는 남근, 커질대로 커진 양물을 황보지약의 비처 부근으로 가져갔다. 울컥 비액을 토해내는
황보지약의 비처에서 수차례 살덩이를 뒤흔들던 황보경균, 마침내 그 목적지를 찾은 듯 황
보경균은 양물을 황보지약의 몸으로 밀어 넣었다.
"아악!"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순간 작은 공간을 뒤덮었다. 황보경균의 양물은 황
보지약의 아랫구멍 중의 아래, 항문을 꿰고는 깊숙하게 황보지약의 발가벗은 나신에 파고
들은 것이었다. 황보경균의 육봉이 아무리 애액으로 젖어 미끌거린다고 할지라도 그 길이며
굵기가 첫경험을 맞는 황보지약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들었다.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는 황
보지약은 뒤에서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에 부르르 나신을 떨었다.
황보경균은 삽입한 남근을 뺄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상태에서 앞뒤로 움직였다. 굵은 살덩
이가 황보지약의 몸을 파고 들어갈때에는 국화무늬의 근육의 살결이 안쪽으로 함몰되었고
황보경균이 빼낼때에는 아쉬운듯 그 양물을 살들이 잡고는 놔주질 않았다. 엄청나게 강한
힘으로 황보지약의 항문의 괄약근이 검붉은 흉기를 목조르자 힘겹게 그 출입구를 왕복하는
황보경균, 그의 검미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위를 맡은 황보두균은 더 이상 황보지약의 혀와 입술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급기야는 깊
게 황보지약의 목젖을 뚫을 정도로 남근을 밀어넣고는 그 정액을 황보지약의 입속으로 쏟아
붓기 시작하였다.
"으음.."
부르르 떨리며 황보두균의 몸이 진동을 하였다. 그러면서 움찔 움찔 그의 몸이 떨렸다. 계
속되는 토정이 황보지약의 식도를 통하여 황보지약의 위속으로 들어갔다. 미처 황보지약이
그 맛을 느낄 틈도 없이 비릿한 그 느낌을 거부할 새도 없이 황보두균의 정액은 황보지약의
체내로 스며들어갔다.
황보두균이 그렇게 사정을 하면서 몸을 떨고 있을 때 황보경균 역시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
였다. 계속 조여대는 황보지약의 항문은 황보경균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인내를 감당치 못
하게 하였다. 황보지약 역시 낯설은 이물질의 침입에 배설의 욕구를 느꼈으나 그것은 본능
적인 것, 이내 순응하면서 황보경균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다가 황보경균의 사정이 임박해지
자 그 간의 고통은 어느새인가 뇌리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탐스러운 둔부를 황보경균의 하복
부에 갖다대면서 조금이라도 더 쾌락을 얻기 위하여 몸부림쳤다.
한순간의 격정이 끝난 후 세 남매는 엄청난 큰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황보경균, 황보두균, 황보지약은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곧 벗어났고 그 이후 이러한 셋의
관계는 황보지약의 정혼자 병서생 남궁호성이 죽고 황보극의 눈에 발각될때까지 계속되었
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55번째 올림 창작야설
(7)
난장판,
그 말외엔 마땅히 형용할 말이 없었다. 마치 수기의 기마가 휩쓸고 간 것처럼 선라객잔 별
채의 안실은 온통 부서지고 헝클어졌다. 게다가 객실의 창은 장궁 등이 신형을 날리며 산산
히 부수어 창틀에는 잔해 몇 조각만 남아있었고 그 뚫린 구멍으로 인하여 이제 막 떠오른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더군다나 안실에 남아 있는 사람의 몰골도 그리 썩 좋은 편은 되지
못했다. 백리세가의 인물이라던 사람은 한쪽에 목이 꺾이고 허리가 반이상 베어진채 선홍의
빛을 띠는 피와 검붉고 푸른 창자들은 바닥에 쏟아놓은채 처참한 몰골을 보여주었다. 백리
석은 이마에 비도가 꽂힌채 원독어린 두눈을 부릅뜬채 뒤로 자빠져 식어가는 육신만 남아있
었다.
"유소저, 저들을 그대로 놔둘꺼요?"
굵은 저음, 적당한 크기의 음성이 멍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유가형의 의식을 일
깨웠다. 백리석이 도주하는 것을 백리세가의 무사의 주검을 던져 막고 두루마리를 들어올려
중인들에게 공개한 다음 삼매진화로 태워 버린 일련의 과정을 태연히 전개한 사람답지 않은
침착한 음성이었다.
"더 이상 독이 퍼지지 않게 서둘러 조치를 취해야 할 것으로 보이오만.."
"예? 예."
화들짝 놀라서 일어난 유가형은 이내 주위를 둘러보고는 남궁비와 석영을 바라본 후 황급
히 교구를 옮겼다. 일견해도 그리 간단치 않은 상태를 보이는 남궁비와 석영이었다. 둘다 가
까스로 자리에 주저 앉아 가부좌를 틀고는 내공을 일으켜서 독기의 확산을 막고는 있지만
낙관할 수는 없는 상세, 서둘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기에 무림에서 뛰
어난 명의로 칭함받는 유가형은 남궁비와 석영에게 다가가서는 찬찬히 그들의 부상 정도를
파악하였다.
그나마 상반신에 광폭사정의 상처를 입지 않은 남궁비보다는 석영의 상세가 심각했다. 쇠
못이 파고들어간 자리는 이미 검게 변색이 되어 차츰 차츰 그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상처
에서 새어나오는 피 역시 짙은 검은색을 보이며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어 독기가 활발히 진
행을 하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석영이 비록 내가의 고수라 할지라도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미처 방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음에 중한 상처를 입었다. 그녀보다 남궁비는 상반신을 가리
고 있던 보의로 인하여 일단 심장이나 기타 장기와 떨어진 부위에 광폭사정이 격중되었고
재빨리 반응을 하였기에 독의 확산을 막기는 하였지만 남궁비 역시 신속한 치료가 필요하였
다.
유가형은 품에서 작은 옥병 여러 개를 꺼낸 다음 마개를 열고 환약 몇알을 꺼내어서 석영
과 남궁비에게 복용을 시켰다. 그런 후 유가형은 곧게 뻗은 옥지로 석영과 남궁비의 혈도
몇군데 씩을 점한 다음 아환을 돌아보았다.
"도와주세요. 깨끗한 곳으로 옮겨야 겠어요. 그리고 따뜻한 물을 준비해주세요."
유가형은 석영을 안아들은 후 재빠른 동작으로 옆방쪽으로 향했다. 아환은 남궁비를 안고
힐끗 제갈수란과 악서령을 바라본후 유가형의 뒤를 따라 옆방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빛으로 아환과 유가형의 뒷모습을 쫓던 악서령에게 제갈
수란의 음성이 들려왔다.
"령 언니, 잠시만요."
제갈수란은 악서령을 뒤로 하고 별채의 문을 열고 마당쪽으로 나갔다. 진작부터 마당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었다. 별채가 객점과 조금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객점의
주인과 점소이, 그리고 다른 객실에 묵고 있던 객들은 별채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큰 소리가
나자 호기심을 갖고 마당에서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제갈수란은 마당에 나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안실로 들어왔다. 그런 후 신속하게 흐트
러져 있는 기물들을 정리하였다. 악서령도 한 몫을 거들자 곧 별채의 내실이 어느 정도 정
돈되었다. 아직 바닥에는 핏자국과 백리세가의 인물에게서 흘러나온 고여있는 작은 피의 웅
덩이가 남아있었고 창은 부서진 그대로였지만 그외의 다른 곳은 마무리가 되었다.
"소저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요?"
별채 문밖에서 몇 명의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렸다. 본능적으로 검집에 손을 가져가는 악서
령과는 달리 침착하게 말문을 여는 제갈수란.
"어서 들어오세요."
드르륵..
내실의 문을 열고 객점의 점소이와 서너명의 장한이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자 마자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그것은 천향매화의 아름다움에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기 때문이
었다. 숱한 무림의 영웅들에게서 천하제일이란 미모를 칭송받는 악서령이었다. 하물며 작은
고을에서 생활하던 일반 서민들이야 그 천외의 아름다움을 어찌 접할 수 있으랴?
"빨리 저 시체들을 처리하세요."
제갈수란의 다그치는 음성이 들어온 후에야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내실을 둘러보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두구의 시체를 보았다. 그 중 한구는 처참한 모양이었지만 이들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을뿐 곧 등에 맨 자루를 꺼내어 시체들을 그 속에 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힐끗
힐끗 악서령에게 곁눈질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남성의 본능이리라.
제갈수란은 품에서 작은 은자 덩이를 꺼내어 점소이에게 던져 주었다.
"알아서 처리를 해주세요."
객점의 점소이가 연신 허리를 굽히며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는 준비해온 다른 청소도구등을
이용하여 내실의 바닥과 기타 정리되지 못한 나머지 혼란스러움을 손보았다.
"언니, 다른 방으로 가죠."
제갈수란과 악서령은 별채의 다른 객실에 들어섰다. 제갈수란이 사전에 통째로 빌린 곳이
라 여유있는 객실 중의 한 곳으로 들어간 제갈수란과 악서령은 긴장을 풀고 객실안에 마련
된 자리에 앉았다.
"참 긴 하루였어요. 언니."
"그래, 란매. 참 길기도 했지."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쉬려고 하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객실의 문이 드륵 열렸다.
그런 후 들어오는 이는 다름아닌 아환이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남궁소협과 영언니는 무사한가요?"
"지금 유소저가 치료 중이오."
"그런데..아! 예."
왜 그 곳에서 왔냐고 물어볼려다가 치료를 위하여 석영의 옷을 벗겨야 하고 그러면 석영의
속살이 드러나야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제갈수란은 탄성을 지르며 입을 다물었다.
얼마 동안 어색한 침묵이 객실을 휘감았다. 아환은 침상에 올라 옷을 입은채 드러누웠고
곧 눈을 감았다. 자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나 무얼 하는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은 악
서령과 제갈수란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아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랬죠?"
한참만에 제갈수란의 입이 열리고 아환을 향해 질문이 나왔다.
"....."
정말 잠은 자는 것인지 아무런 대답이 없는 아환을 향해 제갈수란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왜 장보도를 없애버렸죠?"
"그냥."
"그냥? 그냥이라고요? 주소협은 그 장보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아나요?"
"아니, 모르오. 그대는 아오?"
"알지는 못하지만..그래도 보물같아 보였어요. 아마 제 추측이 맞다면 그 장보도는 전대의
기인이 특정한 한 장소를 말하려 만든 것으로 보여요. 만약 그렇다면 거의 모든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 기물인데 왜 그 장보도를 사람들에게 공개를 하고 태워버린거죠? 혹
시 그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있나요?"
"없소."
"그렇다면 왜 그 장보도를 없앤거죠? 이번에도 그냥인가요?"
"..."
"주소협, 그대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군요. 주소협, 당신은 그 보물들이 탐나지 않은
가요?"
"아니, 갖고 싶소."
"그렇다면 장보도를 끝까지 사수해야 하지 않은가요?"
"제갈소저."
"예?"
"그렇다면 그 장보도를 갖기 위해, 아니 그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남궁형과 석소저, 유소저
의 목숨을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오?"
"그것은..그건 아니지만 그 보물들이 악의 무리들에게 들어가 강호에 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세요?"
"누가 악의 무리요?"
"아직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제 생각에는 그들, 장궁일행등이 어떤 떳떳치 못한 단체에 소속
이 되어있고 그 단체는 아! 흑천이라고 했지요. 흑천은 어떤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봐요. 정파의 세력들로 알려 있던 운학문이나 선우세가 등이 인물이 그 단체에 속해있으니..
물론 그 한 두명이 흑천 소속이라고 해서 선우세가 등의 명문백도 세력 전체가 흑천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더군다나 광폭사정까지 갖고 있을 정도면..휴.."
"혹시 흑천에 대해서 알고 있소?"
"예. 저희 제갈세가가 그 흑천이라는 곳에 대하여 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요. 강남 무림의
몇몇 문파가 흑천에 귀속되어 있다는 정보가 있지만 확인되지도 않았고..여하튼 제갈세가는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지만 이렇게 맞부딪히리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했어요."
"흐음..그러면 내가 실수한 것인가?"
"아마 그럴꺼예요.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어서 수습할 방안을 모색해야죠."
"그래, 어쩌면 좋겠소."
"가능한한 빨리 우리들도 세력을 규합해서 태산으로 가야지요. 그래서 흑천이 어떤 것인지
는 모르지만 혹 얻을지도 모를 기물을 손에 넣는 것을 막아야지요."
"그렇구료."
"어서 빨리 일어나서 행동을 취해야지요. 주소협."
"그러면 유소저와 남궁형, 석소저는 어찌하오?"
"그것은 그리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괜찮으리라 봅니다. 그들 모두다 정파 무림의 대들보이
자 내노라하는 고수들이니 난관을 극복하는데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 사료됩니다."
"제갈소저."
아직 채 눈을 뜨지 않은 채 있던 아환이 한참을 제갈수란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곧 행동을
취할 것 같이 하다가 여전히 눈을 감은채 제갈수란을 불렀다.
"예?"
"그런데 난 강호에 그리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들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들의 삶
이오.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겠소?"
"....무슨?"
"말 그대로요. 난 그다지 내키지 않는구려. 흑천이 강호를 위협하던 아니면 흑천이 궤멸되고
또다른 세력이 나타나서 무림을 휘어잡던 난 그리 관여하고 싶지 않단 말이오."
"그렇다면 주소협은 흑천이, 아니 악의 추종자들이 중원을 유린하는 것을 묵시하겠단 말인
가요?"
"글쎄.."
"주소협!"
"..."
"이런..어찌 이럴 수가..."
부르르 떨면서 분노에 찬 눈빛으로 아환을 한참 쏘아보던 제갈수란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후..어쩔 수 없지요. 사람은 각자 제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법. 소인배에게 무림을
논할 수 없지요. 본녀는 그 나약하고 현실포기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볼수도 있겠죠."
점점 격앙되던 제갈수란의 어조는 차츰 가라앉다가 비웃음이 섞인 어투로 말을 맺고는 찬
바람이 불 정도로 냉랭한 태도로 획 돌아서고는 거세게 문을 열어 젖히고는 별채의 밖으로
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그 후로 흘렀다. 여전히 말이 없던 악서령과 아환 두 사람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심한 악서령의 얼굴이나 눈을 감고 있는 아환의 표정에서는 읽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이리 와."
"예."
수면에 빠져있는 듯 했던 아환의 입이 열리고 악서령을 부르자 나직한 응답과 함께 악서령
이 침상옆으로 다가왔다. 다소곳이 서서 아환의 다음 분부를 기다리는 악서령, 마치 당연한
것인 마냥 일련의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그윽한 체향, 악서령만의 고유한 체취가 아환의 콧
속을 간지럽혔다. 불끈 일어나는 성욕, 아환의 말이 이어졌다.
"아래만 벗어."
"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천향매화 악서령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 끈을 끌러 하의를 밑으
로 내렸다. 스르르 바지가 흘러 악서령의 발목으로 내려왔다. 그러면서 드러나는 희디희 옥
주, 어디하나 군살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마르지도 않은 곧은 두 우윳빛의 흰 살결이 보였
다. 아래에서 위까지 곧게 뻗어있는 두 다리가 만나는 곳에는 피부빛과 비슷한 상아색의 고
의가 무르익은 여인의 비처를 부끄러이 숨기고 있었다. 그 고의의 옆으로 섬섬옥수가 다가
간다 싶더니 이내 밑으로 바지와 마찬가지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천조각..
경장을 입고 있던 악서령이 하의만 벗은 모습은 기이한 매력을 자아내었다. 산을 올라가서
하루를 묵고 비를 맞았지만 단정한 용태를 잃지 않은 악서령의 차림이었다. 오물이나 구김
이 없이 산에 올라갔을때 그대로였다. 막 활동을 하려는 여무사의 복식이었고 상반신만 놓
고 본다면 단지 아름다운 여협이라 볼 수 있었지만 하의를 끌러내림으로 인하여 매혹적인
하반신을 샅샅히 드러내고 그 하복부, 여인의 비처가 자리한 곳에는 아담한 수풀과 보일 듯
말듯한 속살, 그리고 화인(火印) 용(用)..익숙지 않은 부조화의 음욕을 자아내었다.
거칠고 커다란 사내의 손길이 서서히 다가들었다. 슬쩍 허리 부위를 매만지다가 짙은 구리
빛의 남정네의 손은 탐스러운 악서령의 둔부를 감싸 쥐었다. 그러면서 굵은 손가락을 미묘
하게 움직이며 악서령의 엉덩이를 주물러대었다. 그러한 아환의 손길에 몸을 맡긴채 악서령
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악서령의 여린 육체는 거친 사내의 느낌을 미미하게 떨면서 받아들
였다.
사내의 손길이 슬쩍 조금 밑으로 내려갔다. 아환의 손가락끝에 악서령의 깊은 곳의 속살이
와닿았다. 일반 여인들이 그렇듯 약간의 습기가 느껴졌지만 아직 사내를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여인의 비소는 메말라 있었다. 아환은 슬슬 악서령의 비처를 쓰다듬었다. 거칠 거칠
한 사내의 두툼한 손가락이, 굳은살이 잔뜩 박혀있는 손바닥이 섬밀(纖密)하고 까끌까끌한
음모와 마찰을 일으켰다. 익숙한 느낌때문일까? 아환의 미묘한 손의 놀림에 차츰 여인의 음
부에서 물기가 배어나오기 시작하였다. 살짝 음핵을 쥐었다 놓고 왠만한 사내의 양물 굵기
만한 두꺼운 손가락이 은밀한 여인의 공혈을 어루만지다 살짝 들어서곤 하였다. 그때마다
움찔거리는 여인, 점점 사내의 손길이 집요하고 거세짐에 그 진동의 폭은 더욱 커져만 갔다.
반짝.
악서령의 눈이 뜨여졌다. 갑자기 아래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악서령은 곱디 고운 봉목으로
살짝 아래로 눈을 향해 아환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까이 다가온
아환의 손가락이었다. 아환은 악서령의 아래를 희롱하던 손을 떼고는 그 상태 그대로 손을
들어올려 악서령의 가슴부위 높이에 손을 갖다 올렸다.
살짝 악서령의 허리가 굽혀졌다 싶더니 악서령은 입을 살포시 벌리고는 혀를 내밀어 아환
의 커다란 손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바알간 혓바닥이 단고를 핥아 먹듯 아환의 손가락을
휘감고는 그 손에 악서령의 타액을 묻혔다.
비릿한 냄새가 악서령의 입으로부터 느껴졌다. 하룻밤을 밖에서 지새우면서 전혀 용변을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악서령은 아환의 손길에서 약간의 지린내와 함께 익숙한 자신의
비처의 육향을 맡았다. 어찌 보면 역겨울 수도 있지만 악서령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이 아
환의 손길에 묻어있는 자신의 체액을 타액으로 교체하였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선홍빛의 설육이 물기에 번들거려 욕정을 불러 일으켰다.
"올라와."
아환의 곁으로 바싹 붙어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악서령은 숙련된 동작으로 사내의
허리춤에 손을 대고는 바지를 아래로 벗겨 내렸다. 추호의 망설임이 없이 허리의 끈을 풀고
재빠르게 사내의 하의를 밑으로 하자 튀어오르는 장대한 남성. 일반 여인의 팔뚝 굵기만한
사내의 실체가 솟아 올라 악서령의 눈앞에 빳빳이 서 있다. 거무스름한 양물에 그 위의 버
섯처럼 부풀어 오른 귀두, 살짝 휘어진 모양에 시퍼런 핏줄이 불룩 불룩 튀어나와 공포스럽
기까지 하였지만 악서령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 양물에 작은 입을 갖다대었다.
그녀의 작은 입으로는 충분히 아환의 양물을 입에 머금기가 힘들었지만 악서령은 빨간 혀
를 내밀어 아환의 양물을 정성껏 애무하였다. 강하게 빨아당기다가 요도에 혀를 살짝 밀어
넣고 조금 힘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다간 입을 최대한 벌려 아환의 양물을 빨아당기고 입술
을 오무려 남근의 위에서 뿌리까지 훝어내리기를 반복하였다. 팽창할대로 팽창된 아환의 양
물은 금새 악서령의 입에서 나온 액체로 인하여 홍건히 젖었다. 악서령은 거기에 그치지 않
고 아환의 뿌리 밑에 고환을 감싸고 있는 늘어진 살주머니까지 입술을 갖다대었다. 이로 잘
근 깨물고 입속으로 끌어당겨 혀로 희롱하기를 수차례, 마침내 악서령은 아환의 아래에서
입을 떼고 교구를 일으켜 아환의 위로 올라탔다. 언제부터인지 악서령의 아랫도리에는 습기
가 가득하여 질척은 열락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능숙한 솜씨로 아환의 양물을 한손으로 잡고 그 위에 자신의 육체를 실어가는 악서령의 눈
가에는 어느새 붉은 기운이 번져있었다. 회음의 열기가 악서령의 가녀린 육체를 감쌌다. 악
서령은 양물의 끝을 비처의 한 곳에 맞추고는 그대로 허리를 내려 그 위에 주저 앉았다.
"하악.."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크게 요동을 쳤다. 매번 경험하는 것이지만 아환의 양물
은 너무나 커서 처음 아환의 물건을 자신의 몸에 담을때에는 아래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신
이 반쪽이 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반 사내의 남근으로 처녀를 꿰뚫는 것만으로도 고통
스러울터인데 악서령은 그보다 훨씬 굵고 거대한 아환의 육봉에 처녀를 잃었다. 허나, 천혜
의 육체를 소유한 악서령의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몰라도 이내 악서령은 그 물건에 적응을
하였으며 서글픈 육체의 쾌락을 배웠다.
크게 벌어지며 악서령의 속살은 아환의 양물을 세차게 조이면서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환
의 남근이 반이 좀 넘게 악서령의 몸에 잠겨있었을 때 악서령은 자궁의 입구에 아환의 살덩
이가 밀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고통스러웠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찾아드는 사고를 아득하게 만드는 기이한 감정, 바로 쾌감이었다.
"아흐윽.."
입술을 꼬옥 깨물고 눈을 질끈 감은채 허리를 더욱 내려 악서령은 아환의 남근의 끝까지
자신의 몸에 집어넣었다. 자궁구를 강제로 열고 아환의 육봉이 악서령의 깊은 곳까지 단숨
에 치고 들어갔다. 악서령의 조각같이 고운 옥수가 침상의 이불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이불
을 쥐어짜듯 틀어잡은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그러면서 악서령은 허리를 다시금 들어올
렸다.
아환의 양물에 달라 붙은 모양 악서령의 속살이 그녀의 몸밖으로 딸려나왔다. 아랫도리를
꽉 채운 사내의 실체의 이탈이 아쉬운지 진한 분홍빛의 아랫 입술이 아환의 남근에 붙은채
길게 늘어졌다. 그러다 다시 허리를 내려 앉는 악서령의 동작에 남성과 함께 그녀의 몸안으
로 밀려 들어가는 비처의 주름잡힌 내밀한 음순들..
"하아..하아.."
느릿 느릿 악서령의 허리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무릎의 관절만을 이용하여 사내의 실체를
아랫도리로 고정시킨후 미끌거리는 마찰로 사내의 욕정을 부채질하였다. 상의는 주름이나
구김하나 없이 단정히 입은 채 크게 머리를 흔들면서 위아래로 둔부를 오르내리는 천향매화
의 고혹적인 자태가 아환의 동공에 고스란히 비추어졌다.
눈을 감은채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환은 아래에서 그 위용을 드러내었다 감추었
다하는 사내의 흉기위에서 움직이는 악서령의 다른 것은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빽빽히 압
박해오는 여인의 비처의 감촉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악서령의 허리가 점점 빨리 움직였다.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악서령의 비소에서 나오는 물
기의 양은 점점 많아져 축축히 사내의 터럭들을 적실 정도가 되었을 때 아환의 눈이 반짝
뜨여졌다.
아환은 누운 자세로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눈을 반짝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막
문 앞으로 가까이 오던 나직한 기척이 바로 문앞에서 뚝 멈추고는 곧이어 그 문밖 사람의
숨소리조차 잦아들어 갔다.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려다 기성이 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걸음을
멈추고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악서령은 열락에 빠져들어 밖의 인기척은커녕 아환
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는 허리의 움직임만 계속하였다. 이 것 또한 꽤 운동이 되는지 송글
송글 악서령의 콧등에 맺힌 땀방울이 코끝에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급기야는 아래로 똑 떨어
졌다.
"음.."
굵은 저음의 신음성이 아환의 입을 헤집고 새어나왔다. 토정을 한 것이었다. 아환의 양물에
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정액은 악서령의 자궁을 가득 채울듯이 여체 깊숙한 곳으로 쏟아들
어갔다. 그와 동시에 부르르 떨면서 악서령의 동작이 일순간에 멈췄다.
"후.."
헛바람이 새는듯 나직한 숨을 내쉬고는 악서령은 몸을 늘어뜨렸다. 그런 후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아환의 체내의 정액이 마저 쏘아질 수 있게 하였다. 몇번의 운동으로 아환의 정액을
토해내게 한 후 악서령은 음열이 가득한 교구를 찬찬히 들어 올렸다. 한발 한발 힘겹게 침
상에서 다리를 떼어 밑으로 하고는 재차 무릎을 꿇고 아환의 양물에 고개를 가져간 후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악서령은 아환의 양물에 막 닿았던 입을 떼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항상 관계 후 아환의
양물을 혀로 닦던 관행이 있던지라 당연한 순서로 악서령은 아환의 육봉을 닦으려 하였지만
이번에는 아환의 제지가 있었다. 일어서는 악서령은 미미하게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균
형을 잡고는 아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 악서령의 가랑이 사이에서 뿌연 액체가 조금
고개를 내밀었다. 워낙 토해놓은 양이 많은지라 악서령의 깊은 곳에 쏟아부었던 아환의 체
액이 아래로 흘러내려 비처의 구멍에 그 중 일부가 내려온 것이리라.
"문밖의 손님이 기다린다. 맞이해야지."
움찔, 악서령의 교구가 떨렸다. 진력을 소진하여 떨리는 것과는 다른 성격의 진동이었다.
허나 악서령은 뒤로 몸을 돌리더니 탱탱한 엉덩이를 씰룩이면서 한걸음 한걸음 문쪽으로 걸
어갔다. 상의의 아래쪽이 바로 다리가 갈라지는 틈에 걸친지라 악서령의 움직일때마다 언뜻
언뜻 비소가 보였다. 거기에서 조금씩 새어나오기 시작한 희뿌연 액체가 줄기를 이루면서
다리를 타고 내려와 어느새 무릎언저리까지 내려왔다.
드르륵..
악서령의 손에 의하여 객실의 문이 열리고 악서령은 그 앞에 선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형언니."
[ 창작] 수라기(獸羅記) 56번째 올림 창작야설
(8)
"........형..언니.."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목소리로 떨리며 나오는 몇음절의 말. 그러한 악서령의 동공에 비
추어진 인물은 다름아닌 난화성녀 유가형이었다. 우윳빛 뽀얀 살결이 지금 이 순간에는 밀
납처럼 새하얗게 질린 채 멍한 시선으로 악서령을 향하는 유가형은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
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그마한 입술 부위가 씰룩이며 우아한 학의 고운 눈매를 닮은
눈가가 잔떨림을 보였다. 상당한 충격을 당해 보이는 유가형의 그런 모습에 오히려 악서령
이 당혹스러워했다. 하의는 완전히 벗은 채 곧은 백옥 같은 두 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탁한
액체가 악서령의 발바닥 부근까지 흘러내려 조금씩 고이고 있었다.
성녀라 일컫는 유가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녀간의 일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단순히 남녀의 생리적인 이해는 그 누구보다 탁월하다 할 수 있는 유가형이었지만 연이은
정신적 충격에 그녀는 잠시나마 심리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그런 관계로 인하여 엉거주춤한
자세로 유가형과 마주한 악서령과 함께 둘은 문을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천하에 짝을 찾기 어려운 두 여인. 한명은 사화중의 그 아름다움이 으뜸이라 천하제일의 화
려한 미모라 일컬어지는 천향매화요, 다른 하나는 그 고결함과 성스러운 매력이 무림일절이
라 평가받는 난화성녀이다. 똑같이 단정한 차림의 흰 백의경장을 입고 있었고, 차이라면 하
나는 전신을 의복으로 감싼 상태인 반면 다른 하나는 아랫도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채 여인
의 치부까지 완전히 노출한 모습이었다. 거기다가 방금 전의 열락으로 인한 회음의 체액이
어느새 꽤 흘러내려 발밑을 적시고 있었다.
"객실 안으로 모셔라."
난기류는 악서령과 마찬가지로 바지를 벗은 채 침상에 누워 양물을 늘어뜨리고 있는 자세
로 고개만 돌리고 있는 아환에 의하여 깨어졌다. 아환은 환한 아침 빛살이 닫힌 창문에 부
딪혀서 투영되는 희미한 잔광을 흩뿌리는 가운데 창을 등지고 있어 얼굴에 얼마 간의 음영
이 깃들인채 유가형을 쳐다 보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언니."
소매깃을 살짝 잡은 채 악서령이 유가형을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 센 힘은 아니었으나 유
가형의 저항이 없어 악서령은 어렵지 않게 유가형을 객실안으로 끌어당긴 후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런 후 악서령은 유가형의 소매를 잡은 손을 놓고는 슬쩍 방 한 귀퉁이로 물러났
다. 아무래도 유가형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탓일까? 악서령은 세공한 듯 고운 교수를 들어
비처를 슬그머니 가렸다. 그러면서 혹 아환의 명령이 있을까 싶어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낯설은 침묵이 작은 공간을 맴돌았다. 거의 일다경이 넘을 시간동안 아환과 유가형은 서로
를 빤히 쳐다본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자세를 풀지 않았다. 거기다 악서령 역시 입술을
약하게 오물거리며 다물고 있어 침묵은 한참을 더 갈 것 같았다. 침상위에서 누워 무심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환의 눈에 비추어지는 유가형의 꼭 움켜쥔 섬섬옥수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손이 쥐었다 폈다를 지속적으로 반복하였다. 유가형은 의식하지 못하
지만 규칙적으로 가녀린 손가락이 파고들 듯 손바닥에 자국을 남겼다가 풀기를 반복하는 것
이 커다란 심적 충격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작고 도톰한 선홍빛의 입술이 열렸다.
"주소협. 당신은..당신은 알고 계셨지요."
입술끝이 부르르 떨리면서 유가형의 희디흰 치아가 살짝 보였다.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노
력하는 기미가 역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성이 은연히 떨리는 것은 유가형
도 어찌할 수 없었다. 아환을 노려보면서 한자 한자 흔들리면서도 또렷이 말을 내뱉는 유가
형의 물음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 알고 있다는 듯이..그렇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유가형의 물음에 아환은 살짝 고개만 까닥였다. 귀찮아 그랬다기 보다는 마치 자신의 아랫
사람이나 가까운 관계의 대상에게 보이는 동작을 보였다. 그러한 아환의 동작은 평소라면
그 앞에 있는 사람에게 능히 거부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격앙된 유가형에게는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왜? 왜...왜 소녀에게 그것을 숨긴 거죠?"
예의 그 차가운 시선이 와 닿자 이유모를 분노가 유가형의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부
들 부들 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솟구쳤다. 냉정함을 잃지 않던, 항상 침착하고 여유있던 유
가형의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격정이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이.."
고운 눈매가 일그러지고 급기야 막 노기를 표출하려던 유가형을 가로막는 아환의 음성.
"그것 때문인가?"
"..무슨...무슨 뜻이죠?"
상체가 비스듬히 앞으로 나아갈려는 동작으로 어정쩡하게 멈춘 자세 그대로 혼란스러워 되
묻는 유가형은 조금 전 아환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 가슴속에 가득 차올
라있던 화기가 일순 주춤하고 파랗게 빛나던 눈빛이 멈칫거렸다. 유가형의 동공에 상체를
침상에서 일으키고 있는 아환이 반사되어졌다.
아환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서 몸을 세우고는 느릿 느릿 걸어나왔다. 덜렁거리는 양물이
이제 다시 기운을 차렸는지 어느 순간부터 빳빳이 기립을 한 상태였다. 외설스러울수도 있
는 그런 차림이었다. 하체를 그대로 개방한 옷차림으로 정숙한 숙녀의 면전으로 성기를 흔
들면서 한걸음 한걸음 아환은 유가형의 앞으로 다가갔다.
숨이 막히는 느낌이 이럴까? 이게 공포인가? 유가형은 칠척에 이르는 거대한 사내가 빛을
등지고 한발 한발 가까워짐에 따라 원인모를 추위를 느꼈다. 주춤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의
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유가형은 아환이 한발 가까이오면 한발 뒤로 물러섰다. 무표정한 사
내의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조금씩 다가오자 방금 전의 기세등등한 자세는 어디론가 사라지
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계속 뒷걸음질쳤다.
툭..
유가형의 등에 무언가 와닿았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유가형의 눈에 연한 회색빛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벽이었다. 어느새 유가형은 벽까지 물러서서 벽을 등진 상태가 되어 있
었다. 흠칫하면서 유가형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흐읏.."
앞쪽이 어두웠다. 그 어두운 한 가운데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두 화광이 유가형의 여린
눈속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유가형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환이 채 한뼘이 되지 않은 거리
에 얼굴을 마주대고 있었다. 화염을 줄기 줄기 내뻗을 것처럼 강렬한 아환의 안광이 유가형
의 동공을 뚫고서 심장 한가운데까지 박혔다.
"무..무슨...이게 무슨 무..무례한.."
오들거리며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면서 유가형은 아환을 마주쳐다 보았다. 금방이
라도 무너져 버릴것 같은 다리는 끊임없이 후들거렸지만 한 가닥의 오기인지 유가형은 간신
히 몸을 버텨 벽을 등지고 아환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유가형은 눈을 내리
깔 수 밖에 없었다.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저 활활 타오르는 두 눈은 당장이라도 자
신을 산산히 태워버릴것만 같았다. 억지로, 억지로 몸을 세우고는 있지만 이미 유가형은 스
스로를 제어하기 힘든 상태였다.
"남궁비가 남자가 아니란 것 때문에 그런가?"
싸늘한 음성, 여린 자신의 몸을 꽁꽁 얼려버릴 것 같은 냉랭한 음성이었다. 조금의 감정도
실려있지 않은 차가운 말투에 오싹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유가형은 주저앉고 싶은 마음
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아환의 말에 대답을 하려 입을 막 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아환의
말에 유가형은 입은 열었지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내가 남궁비를 알고 있었다 생각하나? 나도 남궁비를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설사 내가
남궁비가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왜 네게 말을 해야지? 오히려 너
와 남궁비는 정혼한 관계가 아니었나?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어야지, 왜 그것을 내게
따지는 거지?"
"그것은.."
머리속에서는 끊임없이 수만가지 생각이 떠오르지만 무얼 말해야 할지 모르는 유가형이 채
말을 하지 못할 때 아환의 말이 계속되어졌다.
"단지 그것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것인가? 단지 내가 남궁비가 여자라는 것을 숨긴 것 때
문에 그렇게 화가 났나? 아니지, 그것때문이 아닐걸. 네가 진정 견디기 힘든 것은 다른 게
아닐까?"
"그게..그게 무슨 말...이죠?"
손아래 사람에게 말을 하듯 하대를 하면서 '너'라는 표현을 쓰는데도 유가형은 그것에 반
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아니, 그것을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흔들리는 눈빛을 힘겹게 들어올려 아환을 쳐다보는 유가형의 코 앞에 얼굴을 갖다대고 숨
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아환의 말이 계속 되어졌다.
"악서령을 질투하나? 내가 악서령과 관계를 맺는 것이 싫은가? 네 의동생과 침상위에서 쾌
락을 내지르는 것이 화가 나나?"
"무..무슨.."
"왜 솔직하지 못하지? 자존심인가? 무섭나?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렵나?"
"닥쳐요. 이 무..웁!"
차가운 음색에 거센 반감이 일어나고 그로 인한 분노를 쏘아붙이려는 유가형의 작은 입술
은 더 이상 음절을 내뱉지 못하였다. 거칠고 커다란 사내의 입이 유가형의 입을 강하게 덮
어버렸다. 동그랗게 뜨여진 유가형의 눈은 바로 앞의 아환의 얼굴이 일순 흐려진다 싶더니
갑자기 앞이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남자의 살갗의 감각을 느끼는 순간 뇌릿속이 텅비어버렸
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전신의 맥이 순간적으로 풀려버렸다. 현재 자신이 무얼하는 것인
지 어떤 상태인지 인지가 되지 않은 유가형의 정신을 되돌아오게 한 것은 뜨거운 숨결에 이
어진 끈적이는 살덩이가 자신의 입술을 열고 들어올때였다.
아환의 혀가 빚어놓은 듯이 아름답고 토실한 유가형의 입술을 헤집고 들어오자 퍼뜩 정신
이 돌아온 유가형은 손을 들어 아환을 거세게 밀어내었다. 본능적으로 공력이 일어나고 진
기가 방출되어 아환의 가슴에 쌍장을 내지른 꼴이 되어버렸다.
펑!
"웃.."
얼마 진기를 싣지 못하여 별다른 충격을 주지는 못하였지만 아환을 뒤로 밀어내는데 성공
한 유가형은 가쁜 숨을 내쉬으며 교수를 들어 입술을 닦아내었다. 세차게 문지르듯 수차례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고 유가형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아환에게 적대감을 표출하였다.
"이..이런 파렴치한..어찌 이렇게 비열한 짓을 할 수 있지요? 당..당신이.."
휘익...쫘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격타음이 들렸다.
"악!"
유가형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거침없이 날아온 손길에 무방비 상태에서 그대로 뺨을 얻어
맞은 유가형의 얼굴에는 금새 붉은 손자국이 일어났다. 하얗게 머릿속이 비어갔다. 유가형은
지금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등을 벽에 기댄채 비틀거리는
유가형의 눈앞에 커다란 손이 보였다 싶더니 연이어 들려오는 파열음.
찌이익...취잇..
"꺄악!"
출렁..
하얀 비단 천이 객실의 허공에서 길게 두줄기의 불규칙한 호선을 그렸다. 아환의 양손, 찢
어진 천조각이 길게 너울거렸다. 아환은 우가형의 앞섬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좌우로 세차게
벌려 유가형의 상의를 찢어버린 것이었다. 그 뒤에 드러나는 하이얀 여인의 속살이 보이고
그 가운데 볼록 솟아오른 살덩이 두개가 흔들거렸다. 백설이 내린 모양 탐스러운 백옥의 두
젖가슴이 숨김없이 그 고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빼꼼 고개를 내미는 연분홍의 유실이 그 위
에서 부끄러운듯이 매달려있었다.
촤아악..
아환의 손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유가형의 가까이 손을 가져대었다 싶더니 또다
시 하얀 천 조각이 유가형의 교구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기를 몇차례 재빠른 동작으로 몇
번 손이 왔다갔다 하자 그때마다 하얀 색채가 폭을 넓혀갔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유백색
의 속살이 차츰 차츰 고개를 내밀었다. 유가형은 조금 전 뺨을 얻어맞은 충격과 갑작스러운
아환의 행동에 어쩔 줄 모르고 비명만 질러대었다.
"끼악..어엇!"
급기야 자리에 두팔로 가슴을 가리면서 주저앉아 버리는 유가형, 짙은 아환의 그림자가 길
게 바닥에 앉은 유가형의 몸위로 드리워졌다. 막 머리를 치켜들고 독기어린 눈으로 아환에
게 항의를 하려고 하는 유가형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름아닌 거대한 사내의 실체였다. 잔
뜩 성이나 벌떡 일어서 있는 검붉은 아환의 육봉과 그 밑에 달려있는 음낭까지 바로 지근거
리에서 덜렁였다. 그러자 못볼 것을 보았다는 듯 얼굴이 붉어지면서 재빨리 유가형은 머리
를 숙였다.
"이..무슨..이 무슨..이 파렴치한! 당장 나가요!"
찢어지는 고음으로 노기에 가득차 외치는 유가형의 몸이 부들 부들 떨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전신을 휘감았다. 이 사내, 주환이라고 한 사내를 처음 보았을 때 악서령과 같이 왔
었을 당시 유가형은 별다른 감정도 관심도 없는 상태였다. 그녀에게는 천하제일의 기남아라
불리우는 만검창룡이 있었고 얼마 있지 않아 혼례를 치르고 일상적인 여인의 삶을 기대하였
었다. 그러나 당철의에 의하여 중독이 되고 원치 않은 관계를 이 사내와 맺었다. 그때부터
유가형의 내심은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제 더 이상 떳떳하지 못
한 육신으로 남궁비에게 갈 수 없었다. 그러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사화지연에 참가하였다.
거기에서 유가형은 주환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어느 정도 파악했다. 아니, 지금의 상황에 비
추어보면 알았다고 성급한 사고를 내린 것이리라.
아환이라는 사내는 여타 다른 무림의 후지기수와 틀렸다. 그들에게서 보지 못한 정형화된
모습이 아닌 거칠지만 무언가 특이한 느낌을 받았다. 침잠된 눈빛에 은연 중 마음이 흔들리
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명사신이 명을 달리 할 때 그를 품에 안은 모습에 저린 가슴을 달래
었다. 또 기보를 얻어 이 곳 객잔에 와서도 침착하고 냉정한, 그러면서도 정제된 그의 태도
가 싫지 않았다.
허나, 남궁비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를 진맥하고 의아함을 느껴 상체를 열어 마침내 자신
에게 달려 있는 것과 같은 두 젖가슴을 확이하였을 때 극도의 혼란이 유가형에게 찾아왔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일, 남궁비가 사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유가형에게 걷잡을 수
없는 당혹감을 가져다 주었다. 허둥지둥 광폭사정을 제거하고 해독약을 복용시켜서 어느 정
도 상세를 안정시켰다 싶어 객실을 나서 아환과 제갈수란, 그리고 악서령을 찾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한껏 열락에 물들은 여인의 교성이었다. 곧 그 신음성이 괘락에
젖은 여인, 다름아닌 악서령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 유가형의 심중에 거센 파란이 일어났
다.
유가형이 아환과 악서령의 관계를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둘이 같이 나타났을
때 화산의 목영근이 아닌 사내라는 것에 놀랐고 곧 어떤 관계이든 아환과 연을 맺고 있을거
라는 생각은 하였었다. 그러다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이후에는 내심 아환과 악서령의 관계
를 세밀히 신경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관계라니..전혀 예상을 못하지는 않았지
만 아랫도리를 발가 벗고 객실의 문을 연 악서령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 파랑이 일어났다.
중첩된 심중의 혼란이 분노로 바뀌어 아환에게, 악서령에게 돌아섰고 유가형은 화를 폭발시
킨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유가형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였었다. 정말 유가형은
악서령을 질투하는 것인가?
아환의 커다란 손이 유가형의 갸름한 얼굴로 다가온다 싶더니 비단결 같은 머릿채를 거칠
게 움켜잡았다. 그리곤 곧바로 위로 치켜올렸다. 미릿가죽이 벗겨질듯한 극심한 고통이 머리
끝에서 전신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며 유가형은 비명을 질렀다.
"아악!"
바둥거리며 허공에 두발이 떠오르고 양팔로 아환의 손을 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유가형의
모습은 거친 사내의 힘에 바둥거리는 여염집 여인들과 다름없었다. 무공이 고강하고 뛰어난
오성을 지니고 있던 그녀, 유가형도 상식을 벗어난 아환의 행위에 대항하지 못하고 지금까
지 일방적인 끌려다님을 계속하였다. 거의 다 찢어 발겨진 옷가지는 천조각 몇 개가 그녀의
몸에 걸쳐있는 정도외엔 의복이라 할 수 없었다. 탐스러운 두 유방이 탱글거리는 것은 당연
하였고 하의 역시 발목근처에 걸려있는 하얀 천쪼가리외에는 지금 유가형의 몸에 남아있는
것은 비처를 가리 작은 고의, 간신히 비처를 가리고 있는 상아빛의 비단조각뿐이었다.
그 작은 천조차 유가형의 몸에 남아있는 것을 용납치 않은 듯이 아환의 손이 잠시 움직이
자 툭, 끈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비소를 가리고 있던 마지막 보루까지 유가형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악!"
가뭇한 음영이 수줍은 모습을 적나라히 나타내었다. 곧게 아래로 쭈욱 뻗은 우윳빛의 광채
를 내는 두 옥주가 매끈하게 시선을 자극하였다. 그 분기점, 여태까지 아환이 겪었던 그 어
느 여자 보다도 울창한 수풀이 아환의 코앞에서 흩날렸다. 유가형의 신체적인 특징인지 그
녀는 매우 우거진 밀림을 비처에 가지고 있었다. 고의를 입을때에도 가지런히 음모를 정돈
하여 작은 천조각에 간신히 집어넣은 상태였는데 그 가림이 떨어져나가자 물결치듯이 흘러
내리는 유가형의 깊숙한 치모는 왕성한 사내의 음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아윽! 이 나쁜..당장 이 손을 놓아요! 악!"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려 아환의 팔을 잡고 버둥대던 유가형이 비명을 계속 질러대면서
아환에게 거세게 항의를 하였다. 그러다 발을 들어 아환을 걷어차려 발길질을 하였다. 발이
들어 올려짐에 따라 비소의 틈이 갈라져 그 붉은 속살이 언뜻 보였지만 다급한 마음에 그것
을 가릴 여유가 유가형에게는 없었다. 그런 유가형의 예상과는 달리 아환은 유가형이 발을
들어올리자 다른 한 팔로 그 유가형의 발을 막고는 그대로 발목언저리를 움켜잡은 후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몸을 유가형에게 밀어붙여 벽에 유가형의 사이에 두고 바싹 붙었다.
유가형은 머리를 아환에게 잡힌 채 벽에 등을 기댄채 힘에 눌려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아환
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는 유가형의 양손을 강하게 쥐면서 유가
형의 벽과 등사이로 돌렸다. 그런 와중에 잠시 벽에서 떨어진 유가형의 발가벗은 몸을 다시
금 벽으로 밀어붙였다.
"끼앗! 악! 그만! 아흑!"
연달아 유가형의 입에서 신음과 비명이 터져나왔지만 그런 유가형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팔이 뒤로 꺾이고 한쪽 다리가 위로 들어올려진 상태에서 여인
의 비처가 일그러져 그 속이 낱낱히 노출되고 무거운 사내의 체중으로 짓눌려 벽에 짓눌려
진 유가형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쪽 다리 역시 바닥에서 떨어져 있어 유가형
은 아환의 힘에 의해 벽에 달라붙어 있는 형태라 할까?
아환의 크나큰 한 손은 유가형의 두 팔목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교묘히 손가
락의 위치가 유가형의 완맥의 경락위에 놓여있어 유가형은 내공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내
가무공만 익힌 유가형은 내공이 제압당하자 무공을 익히지 않은 다른 여염집 처자와 별다름
없었다. 오히려 더 미약한 몸부림만 행할뿐 아환의 힘에 항거할 여력이 없었다. 잇달은 정신
적 충격에, 연이은 물리적인 힘에 채 방비를 못하고 완전히 제압을 당한 유가형의 심리상태
는 혼란의 극을 달렸다.
찢어질 듯 벌려진 다리 사이, 가랭이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거의 일자로 위아래로 벌어진
두 다리. 비처가 남김없이 보여지는 것에 의한 수치감보다는 현재 온 몸을 강타한 통증이
더 힘들었다.
"아흑..제발..아악!..이..웁."
그나마 고통을 호소하는 입마저도 두터운 사내의 입술에 점령되었다. 강렬한 사내의 체취
가 느껴졌다. 아환은 유가형의 선홍빛 아름답게 빛나는 촉촉한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마주 붙
인채 거칠게 빨아당겼다. 단물이 새어나오는 그 어떤 것을 빨아먹듯 아환은 거칠게 흡입을
하였다. 그러면서 혀를 내밀어 유가형의 치아를 벌리고 유가형의 설육을 희롱하였다. 그런
와중에 남은 한 손 역시 쉬고만 있지 않았다.
탱탱히 솟아 아환의 몸에 짓눌려져 있는 유가형의 두 유방을 연신 주물럭거리며 일그러뜨
리고 선명한 손자국을 그 위에 새겨놓다가는 다리를 쓰다듬고 슬쩍 비처에 손을 갖다대었
다. 그럴때마다 유가형의 가녀린 여체가 아환의 품아래서 퍼뜩였다. 경련을 일으키듯이 꿈틀
대는 유가형의 여리고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은 아환의 욕정을 더더욱 부채질하였다. 점점
아환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러면서 때로는 약하게 아래부위를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강하
게 음모를 쥐어뜯듯 잡고는 이내 힘을 풀어 손가락으로 음핵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비명과
신음이 아환의 입을 통하여 그대로 아환에게 전달되지만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았다.
본능일까? 아니면 아환의 손놀림이 방중기법으로 움직인 탓일까? 아환의 애무아닌 애무가
지속적으로 유가형의 발가벗은 몸을 만져대고 민감한 여인의 여러 부위를 자극하자 봉긋한
여인의 가슴이 단단해지고 그 위의 유실이 오똑 일어섰다. 은은한 붉은 기운이 선연히 여체
를 휩싸안았다. 그리고 여인의 비소 역시 물기가 배어나와 끈끈한 애액으로 인하여 길게 자
란 섬모들이 뒤엉키고 촉촉하 젖어들었다. 아환의 굵은 손마디에 미끌거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어느 정도 되었다 생각한 것일까? 아환은 미묘하게 허리를 틀어 양물의 위치를 움직였다.
익숙한 행위라서 그런지 곧 빳빳히 고개를 세운 검붉은 살몽둥이끝에 부드러운, 그러면서
습기가 맺혀있는 감촉이 닿았다. 아환은 손을 내려 그 흉기가 찾아들어갈 구멍을 확인하고
는 허리를 위로 쳐 올렸다.
아환의 양물이 자신의 비처에 와닿고 진입을 시도할때까지 유가형은 숨을 제대로 쉴수 없
고 위아래에서 찾아드는 고통과 그와 이률배반적인 기이한 감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
다. 그러던 중 무언가 딱딱한 물체가 자신의 음부언저리를 찌르고 급기야는 좁은 자신의 아
랫 동굴을 헤집고 들어올 때 무서운 고통이 엄습함에 진저리를 쳤다.
거센 몸부림이 유가형의 가녀린 나체에서 전달되었으나 그것은 미약한 저항일뿐 아환의 양
물이 유가형의 질구를 뚫고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송이버섯 모양인양 굵은 사내
의 실체의 끝부분이 유가형의 비소를 크고 둥글게 벌리면서 유가형의 몸으로 침입해 들어갔
다.
유가형의 눈자위가 하얗게 변했다. 과거의 경험때에는 음약에 취하여 이성을 잃은채 이 사
내와 교미를 하였으나 지금은 그때와 다른 상황, 또 충분하게 준비가 되지 않은 옥문으로
굵디 굵은 육봉이 밀고 들어오자 말그대로 자신의 몸을 쪼개는 듯한 엄청난 아픔에 유가형
의 몸이 덜덜 떨리면서 세차게 요동을 쳤다. 허나 그러한 유가형의 고통은 아환의 안중에
없는듯 아환의 남근은 진군을 계속하였다.
반쯤 아환의 발기된 성기가 유가형의 몸 깊숙히 들어가자 강렬히 몸부림치던 유가형의 몸
이 일순 축 늘어졌다. 극심한 고통에 실신을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환은 진입을 멈추지
않고 계속 허리를 밀어 거의 끝까지 자신의 양물을 유가형의 체내로 집어 넣었다.
아환이 허리를 좀 뒤로 빼내자 유가형의 몸이 딸려왔다. 아환의 양물이 유가형의 작은 동
굴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유가형의 몸이 통째로 아환에게 끌려왔다. 아환은 손을 유가형의
비소에 갖다대고는 허리를 뒤로 당겨 남근을 유가형의 몸에서 빼내었다. 유가형의 동굴속의
속살이 그러한 남근에 딸려 밖으로 일부가 삐져나왔다. 그렇게 드러난 아환의 육봉에 붉은
액체가 묻어있는 것이 보였다. 무리한 크기의 남성으로 인하여 질구가 일부 파열된 모양이
었다.
아환은 어느 정도 남근을 빼내었다 싶더니 재차 허리를 튕기듯 앞으로 밀어붙여 유가형 속
으로 남성을 다시 집어넣었다. 이끌려나왔던 유가형의 속살이 아환의 양물을 따라 유가형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빼어내고 다시 들어가고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아환의 남근은 점점 유가
형의 몸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얼굴을 유가형에게서 떼어내고 아환은 유가형의 양팔을 잡은
손을 놓고는 양쪽 허벅지를 각각 한 손으로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다 아래로 내려꽂
듯이 내리자 드디어 아환의 뿌리까지 유가형의 체내로 완전히 함몰되어 들어갔다.
"아아아악!"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서 휘몰아치는 고통에 유가형은 실신상태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유
가형을 맞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강렬한 통증이었다. 뇌리가 새하얗게 탈색이 되고 온 몽
의 신경세포 하나 하나가 아픔을 호소하였다. 유가형은 머리를 흔들면서 비명을 질러대었다.
가늘은 두 팔이 허공에서 존재하지 않은 그 무엇을 움켜잡으려다 아환의 목을 휘감고는 아
환의 등을 긁어대었다. 빨간 손톱자국이 금새 구리빛 아환의 피부에 새겨졌다. 단련된 피부
인지라 피는 나지 않았지만 수십줄기의 붉은 선이 아환의 등에 그어졌다.
아환은 유가형의 양 허벅지를 잡은 손을 빙글 돌려 유가형의 자세를 바꾸었다. 후배위의
모양을 취했다 싶더니 아환은 재차 유가형의 양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그 팔을 잡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팔을 잡은 손으로 유가형의 발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러자 마치 쭉 뻗은
개구리의 양팔과 양다리를 위로 들어올린 모양이 되었다. 결합된 상태 그대로 돌린 것이라
아환의 양물이 유가형의 비좁은 구멍속에서 회전을 하였다. 유가형의 속살이 뒤틀리면서 또
다른 고통을 유가형에게 전달하였다. 여린 질속의 살들이 빽빽히 아환의 양물과 붙어있다가
아환의 육봉에 끌려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끄어어.."
교성이나 열락에 젖은 신음이 아닌 극도의 격통에 의한 처절한 비명이 유가형의 붉은 입술
을 헤집고 새어나왔다. 아환이 허리를 뒤로 빼어 내면서 그 아픔은 순간 덜해졌지만 다시금
뒤에 작렬하는 강한 충격에 연신 절규를 토해내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뒤로 꺾인 모습으로 아환에게 잡혀있고 바닥과 수평인채 두 젖가슴이
아래로 향하여 허공에 출렁거리고 공중에 떠있는 상태에서 아환의 실체와 결합되어 있는 곡
예를 하는 모양이었다. 팔이 빠질 것 같은 아픔, 다리가 꺾여 부러질 것 같은 아픔에 비처가
파열되는 아픔이 혼재되어 산산히 전신이 부숴지는 끔찍한 통증이 유가형을 사로잡았다.
"으윽..윽.."
더 이상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 것인지 아환의 허리가 튕겨질때마다 나직한 신음이 유가형
에게서 흘러나왔다. 아환의 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리는 늘어진 유가형. 이미 빛을 잃은
채 희미하게 앞을 보는 유가형의 면전에 악서령의 모습이 보였다.
창백한 안색으로 망연자실한 자세로 넋을 잃고 두 사람을 쳐다보는 악서령은 지금 벌어진
사태에 멍하니 서있었다. 처음 유가형이 객실에 들어섰을 때 수치와 당황스러움에 어찌할지
몰랐던 그녀에게 남궁비가 여자라는 것, 그리고 아환의 강제적으로 유가형을 취하는 상황이
길들여질대로 길들여진 그녀에게도 충격으로 찾아들었다. 그러면서 악서령의 뇌리에 아환에
게 익숙해지는 과정이 떠올랐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절망과 고통의 시간들이 되살
아나자 부들 부들 몸이 떨렸다. 그러면서 아래에 새겨진 화인 '용'의 자욱이 욱씬거리는 느
낌이 들었다.
악서령의 눈과 아환의 눈이 마주쳤다. 잔인한 미소가 아환의 입에 지어졌다 막 생각을 할
찰나 아환의 입이 열렸다.
"벗어!"
또 한명의 여인이 속살을 드러낸다. 천고의 아름다움에 그 짝을 찾기 힘든 절세의 미녀가
황홀한 나신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단정한 머릿채를 풀지 않은 상태에서 갸름한 목선을
따라 백옥의 살결이 환하게 방안을 비추고 알맞은 두 젖가슴이 미미한 흔들림을 보였다. 매
끈하게 내려온 허리와 배의 선을 따라 내려가면..붉은 낙인, 용(用) 자가 소담스러운 음모위
에 부조화의 매력을 자아내었다. 그 밑의 여인의 신비와 곧게 내려 뻗은 두 옥기둥은 두말
할 나위 없으리라.
유가형의 눈이 악서령의 아랫배에 새겨져있는 화인에서 잠시 크게 뜨여지고 빛을 낸다 싶
더니 이내 빛을 잃고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거의 짓이겨진 아랫도리에서는 더 이상 감각
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가끔 온 몸을 태워버릴 것 같은 통증이 살아난 감각에서 찾아
들다가 스러지곤 하였다.
아환의 턱짓에 의하여 악서령이 유가형에게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리고는 교구를 낮추어
허공에 매달려있는 유가형의 밑으로 들어간다 싶더니 얼굴을 유가형의 아래로 향한 두 유방
에 가져갔다. 혀를 내밀어 유가형의 유실을 입에 무는 악서령.
아직 아환은 토정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