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 수라기(獸羅記) 40번째 올림 창작야설
9 장 우(友), 살(殺) 二
(1)
형산, 호남성에 위치한 중원 오악(五嶽) 중의 하나.
다른 산에 비하여 산세의 매력은 적으나 많은 명산 고찰들이 자리 잡아 종교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형산을 찾는다. 구릉과 산지가 넓어 호남성의 삼분지이가량을 차지할 정도였
다.
또하나 형산이 유명하게 된 까닭은 이 곳에 자리잡은 하나의 문파, 형산파 혹은 형산검파
라 불리우는 무림의 세력이었다.
형산파(衡山派)
형산 연화봉에 자리잡은 무림 문파. 검을 주로 사용하는 무공들로 알려져 있다. 철저한 실
전의 무예를 추구하는 문파의 기풍 때문에 타 문파로 부터는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제
자들의 무공하나하나가 유수한 강호의 방파와 대등하거나 우위에 있는터라 대놓고 비난을
하지는 못하였다. 현 장문을 맡고 있는 철혈검 나조락 의 무위는 비무로 하면 오파의 장로
보다 떨어지고 실전의 결투로 하면 장문 급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산의 무수한 봉우리 중의 하나, 선라봉(仙羅峰). 그리 산세가 험하거나 장관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한 맛을 내는 산세와 토양이 비옥하여 기화이초들이 많이 자라는 사람들이 곧잘 찾
는 봉우리였다.
선라봉의 끄트머리 한줄기에 있는 제법 번성한 도읍인 선라현의 어귀에 하나의 마차가 들
어서고 있었다. 크기나 장식에 있어 다른 마차와는 다를 것이 없지만 특이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다름아닌 마부석에 앉아있는 두 사내 중 한 사내, 딱벌어진 어깨에 언뜻 보기에도
거한인 듯 체격이 엄청나게 커보였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 굳게 다문 두툼한 입술이 그
의 강한 의지를 일면 보여주었다. 아환이었다. 항상 등뒤에 매던 칼은 마차의 지붕 위에 올
려놓고 묶어 고정을 시키고 마부석에 앉은 채로 형산까지 여행을 한 것이었다. 마차는커녕
말 조차 제대로 타본 적이 없는 아환으로서는 형산까지 여정의 방법을 마차를 빌어 가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특별히 생각나지 않았다. 사화 중 그 아름다움이 으뜸이라는 천향매화를
얼굴을 드러내고 활보하기엔 불편함이 많아 부득불 아환은 마차를 빌었다. 돈이야 서가장주
에게서 받은 전표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장사를 떠난지 삼일째 되던 날 아환 일행은 형산 어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선라봉에서 이
번의 사화지연을 갖는다 했다. 그리고 사화가 모이는 곳은 다름 아닌 선라현의 한 객잔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이번 사화지연을 주관하는 이는 만검창룡 남궁비였다.
사화지연을 사화가 아닌 다른 사람이 주관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림사화
들이 순수하게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일상적인 만남을 가진 것이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무림사화를 흠모하는 후지기수들이 그들을 추종하여 사화의 모임에 따라 나선 것
이 사화지연이라는 명칭이 붙고 마치 크나큰 무림의 행사처럼 굳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사
화를 초청하여 사화지연을 주관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위세와 함께 사화의 관심을 끌고자 사
화에게 청을 넣어 허락을 받아 사화지연을 개최하였다. 주관자들은 무예뿐만 아니라 집안
자체도 명문이 아니면 사화의 승낙을 받기가 어려워 여태까지의 주관자들은 오대세가나 칠
룡을 비롯한 내노라하는 자들이 많아 부러움과 질시를 많이 받았다. 그런 관계로 인하여 이
번의 사화지연을 만검창룡 남궁비가 주관한다고 하였을 때 세간의 사람들은 칠룡 중의 으뜸
이라는 남궁비의 명성에 걸맞는 사화지연이 준비되리라 예상하고 더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악소저, 객점의 이름이 무어라 했소?"
"선라주점이옵니다."
옥구슬이 흘러가는 듯한 영롱한 음성이 마차안에서 흘러나왔다.
아환은 여정을 떠나면서 악서령에게 충분한 주의를 주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호칭이나 서
로간에 대하는 관계를 확실히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자칫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 경우 타인들의 의심을 받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아환이 목표로 하는 것에 접
근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아환은 남궁비가 이번 사화지연을 개최한다는 말을 이 곳까지 오는 동안 밤에 같이 생활한
악서령에게서 들었다. 아환이야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남궁비를 논할 때 악서령의 평은 그
야말고 극찬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품과 무예, 그리고 평소 술은 즐겨하나 여색에 빠지지 않
는 다는 점등. 악서령은 남궁비를 상당히 높게 평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아환과의
밤의 행위시 전신에 붉은 선을 예전보다 더 많이 새기게 되었지만..
아환은 여태 만났던 무림의 후지기수라 해봤자 대표적인 것이 목영근이었다. 자신보다 무
예 수준도 낮고 예에 치우친 듯한 태도 등이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아환은 그 목영
근의 당당함이랄까 공정함에 좋은 느낌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황보지약이나 악강 등의 인
물들은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악강이야 첫 출도에서 단지 사명감에 불타 오르다 원수
의 딸을 구해주고 그녀의 손에 바로 저세상으로 가버린 멍청한 인물. 이에 반해 황보지약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 정파 무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미망인으로 남겨져서 처
녀성을 유지한 채로 다른 이들과 변형된 성관계를 가지고 자신의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해준
원수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베어 버린 여인. 아환의 황보지약의 심기에 대하여 일부는 긍
정적, 다른 한쪽으로서는 부정적의 시각이 공존하는 입장이었다. 적어도 백척간두의 칼위에
서 밥을 먹고 살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할 때에는 더 할 수 없이 독해져야 하는 게 강호인이 마음 먹어야 할 중요한 요소였다.
물론 상당수의 무인들이 명예라는 것에 목숨을 걸고 치욕을 받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것은
최소한 자신이 살고 난 이후였다. 타인에게 목숨을 구걸받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좋아하는 것은 보통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자들이었다. 문파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였으며, 가문에서 거리가 있는 방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파라는 것은
대단한 보호막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아닌 한 다른 이가 피해를 입었을 때 그 보호막이 깨
지는 것을 원치 않아 자결을 강요하고 때로는 문도의 손으로 치욕을 입었다 생각되는 인물
을 처단하였다. 그 결과 문파의 명예는 지켰을지 몰라도 사람의 목숨은 잃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죽은 사람은 득 보다 실이 많았다.
아환은 또 거기에서 악서령의 경우를 되짚어 보았다. 이 여자는 치욕을 당하고 앞으로 계
속되어질 폭행과 모욕을 알면서도 자살을 택하지 않고 살아 남아 아직까지 자신에게 시달림
을 받고 있다. 만약 자신이라면 어찌 하였을까?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다. 끝까지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도 원치 않았고, 매일 매일을 수치와 분노를 감내하면서 삶을 이
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악서령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밤마다 괴롭힘을 당
하면서 까지 다리를 벌리고 입술에 육봉을 물어가며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것일까?
마차를 타고 오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시 생각을 하였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때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사님, 선라현에 다 왔습니다요."
"음?..아! 선라현에 왔소? 그럼 선라주점이라는 곳을 찾아야 하는데..."
"저기 앞에 있습니다요. 그리로 갈깝쇼?"
"그래 주시오."
마차가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가다가 마침내 주점 앞에서 멈추었다.
선라주점(仙羅酒店)
검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쓰여진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중원의 주점이 그러하듯
주점이란 보통 식당과 찻집, 그리고 여관을 겸하기에 건물이 보통 꽤 규모가 있었다. 이 선
라주점은 이 곳 선라봉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대표적인 명소로 알려져 있는 만큼 그 규모나
주변 경관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훌륭한 외관을 보였다.
"악소저, 도착했소. 선라주점입니다."
"그래요? 도착했군요. 자! 내리자."
차분한 음성과 함께 마차의 문이 스륵 열렸다. 그러면서 한 발이 발판을 내딛으며 훌쩍 뛰
어 내린다. 어른의 발 치고는 너무 작은 아이의 발 이었다. 그 발을 이어 또 하나의 작은 발
이 바닥에 내려섰다.
"어서 옵쇼."
점소이의 발빠르게 객점에서 재빨리 튀어나와 마차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였다.
그런 점소이와 부딪힐 뻔 한 마차안에서 나온 첫번째의 인형을 뒤이은 작은 인형이 꾸짖는
다.
"청청. 행동을 조심해. 사부님께서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넌 항상 덜렁덜렁해서 사부님이
늘 걱정하시잖니?"
"피이! 홍홍. 너나 신경 써. 사부님께서는 이런 내 모습이 보기 좋다 그러시던데?"
"너! 청청. 이 언니의 말에 대드는 거니?"
"언니는 누가 언니?"
"그만하거라."
사람의 마음을, 그것도 남자의 마음을 청아하게 만드는 음성이 마차에서 조용히 울려나오
더니 분홍빛의 비단 신발이 발판을 내딛고는 바닥에 내려섰다. 그러면서 주위에 은은하게
주위를 감싸면서 퍼져나가는 상쾌한 향기..
이제 저녁 시간이 가까워 지는 터라 객점의 주변에는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고 게다가 사화
지연이 여기에서 벌어진다는 말이 무림에 떠돈지 꽤 되는 지라 여기저기 병기를 맨 무림의
후지기수들이 객점의 주위에서 눈에 띄었다. 그 중의 하나가 우연히 기이한 향이 콧속에 들
어오자 잠시 그 향에 취하다가 눈에 악서령의 모습을 보게 되고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
다.
"이 향기는 천향...천향매화다! 천향매화가 도착하였다."
"오오! 천향매화 악소저시다."
"어디..어디..천향매화가 어디 계시는가?"
"아! 저 우아한 자태라..침어낙안(沈魚落雁)이요, 폐월수화(廢月隨花), 빙기옥골이라는 형용어
로도 어찌 저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으리요.."
악서령은 면사를 쓰고 전신을 분홍빛이 감도는 라의 로 감싸고 나타나 타인들이 악서령의
얼굴 조차 볼 수 없는 데도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라도 바라 본 이들은 한결같이 찬사를 내
뱉었다. 무림사화 중 아름다움으로 으뜸인 천향매화 이니 그 면사를 벗지 않아도 그 아름다
움을 칭송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이들이었다.
가볍게 목례를 주변에게 보내고는 악서령은 아환이 앞을 서고 홍홍과 청청이 양 옆에서 악
서령의 손을 잡은 채로 선라주점에 발을 들여 놓았다. 점소이의 표정이 가관이다. 침을 옆으
로 질질 흘리며 눈은 몽롱한 채로 악서령의 내렸던 마차 앞에서 이미 악서령이 주점안으로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시선을 악서령이 처음 발을 딛었던 곳에 고정시킨채 움직일 줄 몰랐
다. 결국은 악서령의 뒤를 쫓아 들어가는 다른 남정네들에게 치이어 넘어져서야 간신히 정
신을 차렸지만..
객점안.
역시 밖과 다를 바 없었다. 천향매화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리자 마자 대부분의 자리에
앉은 사내들이 의자를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일제히 눈길이 객점의 문에 고정되
었다.
차르르..
주렴이 걷혔다. 그러면서 객점안을 들어오는 칠척의 거한. 가히 정문이 가득찰 정도로 장대
한 사내가 들어오자 일순 천향매화를 기대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악소저. 드시지요."
"예. 너희들도 들자꾸나."
"예. 사부님."
아환이 주렴을 잡은 상태에서 밖을 보고 얘기를 하자 영롱한 음성과 함께 하얀 피부에 하
얀 면사로 눈 밑을 가린 악서령의 아리따운 옥용이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야..천향매화다.."
"천향매화..가히 천상의 아름다움이로다.."
"천향매화 악서령. 역시 무림제일미로구나. 어찌 저리.."
각양각색의 찬사가 문밖과 마찬가지로 객점 안에서도 쏟아져 내렸다. 등에 칼을 매었건 매
지 않았건 사내라면 거의 대부분이 일어서서 천향매화의 고운 자태를 조금이나마 더 보고자
고개를 빼어들었다. 그에 반하여 객점 안의 여인들은 나이를 불구하고 하나 같이 동경과 질
시로 눈을 번득이며 앉은 자세로 들어온 천향매화를 노려보았다.
악서령은 선라주점의 안에 들어서서 눈을 이리 저리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그러다 이층의
창가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는 눈을 멈추곤 그리 쳐다보다 얼굴이 환해지고
웃음을 지었다. 객점안의 다른 이들이 그러한 악서령의 미안에서 웃음이 지어질 때 눈주위
밖에는 볼 수 없었지만 그린 듯 봉목이 곱게 휘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말그대로 질질 쌀 정
도의 표정으로 천향매화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주 소협. 저리 가시지요."
"예. 소저."
등에 여섯 자에 이르는 검은 칼을 칼집도 없는 채 등에 메고 태양혈이 부리부리하게 솟은
구리빛의 피부를 가진 거대한 체격의 사내를 바라보는 객점의 다른 이들의 표정이 고울 리
없었다. 그들의 이상이자 꿈이라 할 수 있는 천향매화를 안내하는 영광을 가진 저 외가의
무사는 누구란 말인가? 천향매화의 말을 듣자하니 저 놈은 천향매화와 일행인 듯 한데 어찌
화산의 금지옥엽이며 절세의 내가 무예를 가진 천향매화가 저런 쓰잘데 없는 외공의 삼류와
같이 동행한 것일까? 사내들의 눈에 칼이 달려 있다면 이미 수만번의 난도질을 당했을 아환
이었다.
악서령과 아환, 그리고 청청과 홍홍이 객점의 이층으로 올라섰다. 악서령은 아까 눈이 마주
쳤던 곳으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더니 창가의 좋은 자리에 다가섰다. 이미 거기에는 한
사람이 앉아 소채와 차를 들고 있었다. 여인이었다. 한 이십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그리 용
모나 다른 것에서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처자였다. 검이나 칼 등의 병
기를 들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도 아닌 듯 했다. 허나, 이어진 악서령의 말에 객점
안이 놀라고 술렁였다.
"유언니! 언제 오셨어요? 선라현에는 언제 도착하신거예요?"
악서령이 태연하게 그 여자의 앞에서 자리를 잡으며 여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유언니. 악서령에게서 유언니라는 칭호를 받을 이야 적지 않겠지만 이 곳 사화지연이 예정
된 선라현에서 유언니 라는 불림을 악서령에게 받을 여자는 오직 하나.
이 앞의 여인은 난화성녀 유가형이었다.
"난화성녀다!"
"설마..난화성녀..저런 외모를 가진.."
"난화성녀일까? 다른 유씨 성을 가진 친분이 있는 여자인가?"
"유소저는 사화중의 하나인데 어찌 저 정도 밖에.."
악서령이 등장했을때와는 전혀 상반된 반응들. 그도 그럴 것이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
습은 도저히 무림사화라는 칭호를 받을 수 없는 그저 그런 용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인
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두 여자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잘 있었어! 령매. 오느라 힘들었지. 난 어제 늦게 도착했어. 오늘 낮에는 업무를 좀 보느라
고..여기에 들어온 것은 얼마 안돼. 그래. 령매는 지금 도착한거야?"
"예. 언니두 잘있었죠? 전 지금 막 도착했어요. 그런데 영이나 란매는 오지 않았나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아. 곧 오겠지. 그런데 이 분은.."
여인이 악서령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더니 옆에선 거한이 신경이 쓰이는지 말끝을 흐린다.
"아! 예. 저는 주환이라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악소저를 모실 영광을 입은 지라..두분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다른 자리에 가 있겠습니다."
아환이 정중하게 말을 맺고는 몸을 돌려 옆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한 아환의 모습을 빛
나는 눈길로 바라보는 여인, 유가형. 무슨 뜻인지 의미가 담겨진 시선으로 아환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눈을 돌려 악서령을 쳐다 보았다.
"목 공자는 오지 않으셨네?"
"예. 중간에 일이 있어서.."
중간에 목영근은 옆의 사내에게 두들겨 맞고 자신은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매질을 당하
고 밤마다 다리를 벌리며 사내의 물건을 머금고 체액을 받아들이며 아랫배에는 화인까지 찍
혔지만 이 모든 과정을 '일'이라는 짧은 말로 끝내었다.
"그렇구나. 간만에 목 공자도 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이 귀여운 쌍둥이들은 누구니?"
악서령이 그제서야 아직 옆에 서 있는 쌍둥이, 홍홍과 청청에 눈길을 돌리고는 말을 한다.
"인사드려라. 난화성녀 유가형 여협이시다. 이 사부가 언니로 모시고 있는 분이시다."
"홍홍이 난화성녀 유 여협님께 인사 올려요."
"청청이 난화성녀 유 여협님께 인사 올려요."
귀여운 음성으로 예를 올리는 두 어린 쌍둥이 계집아이들. 홍홍은 붉은 옷, 청청은 푸른 옷
을 입었기에 더욱 쌍둥이가 특이한 귀여움을 자아내었다.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이리 앉으렴."
유가형이 좌우에 홍홍과 청청을 하나씩 앉혔다.
"아유. 아주 귀여운 아이들이로구나. 령매. 언제 제자를 둔거야?"
"지난 번 장사에 갔을 때 객점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자질이 쓸만한 것 같아 화산으로 데려
갈려구여. 아참! 언니가 이 애들을 한번 진맥해주시겠어요?"
정말 악서령이 홍홍과 청청을 보고 대화를 나누고는 이 아이들이 범상치 않은 집안의 여식
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맥? 왜?"
"그 동안 이 애들이 떠돌아 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래서 많이 허약해진 것 같아
요. 의원에 한번 데리고 갈까 하다가 시간이 되지 않아 못 가고 있었는데 마침 언니를 뵈니
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네요."
"그랬구나. 하긴 요즘 세상이 어지러우니.. 그래. 한번 맥을 봐주어야 겠네."
이삼일을 제대로 먹고 입었지만 여전히 앙상히 마른 나뭇가지 같이 가늘고 거친 팔목을 유
가형이 고운 손으로 잡았다. 안스러운 마음을 가지고는 유가형은 신경을 집중하여 홍홍의
맥을 짚어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손을 대어 보던 유가형이 손을 떼고는 홍홍을 유심히 쳐
다보더니 청청의 손을 잡고는 진맥을 하여 보았다. 이번에는 아까 처럼 오래 잡고 있지 않
고 얼마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래. 아하.."
"왜 무슨 이상한 거라도 있어요? 유언니?"
"령매. 걱정할 것 없어. 이 두 아이는 영양이 좀 결핍되었을 뿐이지 건강해. 앞으로 잘 먹이
면 그 것은 해결될 거고..으흠. 난 깜짝 놀랐어. 이 애들을 진맥하다 정말 엄청나게 놀랐어."
"왜요? 무엇때문에요? 혹시..뭐 안 좋은 거라도.."
"그건 아니고 그게 있잖아.."
"언니. 그 얼굴의 가면 좀 벗고 말할 수 없어요? 도통 표정의 변화가 없으니 목석하고 말하
는 것 같잖아요. 그건 그렇고 그런데요?"
"아! 그래. 내 깜박했네. 잠시만.."
유가형이 손을 얼굴에 가져가더니 턱선과 귀뒤를 매만졌다. 그러더니 손끝에 무언가를 걸
어 얼굴의 인피면구를 벗겨내렸다. 곧이어 드러난 유가형의 얼굴.
주변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이 탁자에 전신의 신경을 곧추세우며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
는 듯이 귀를 기울이다가 유가형이 얼굴의 면구를 벗는다는 말을 듣고는 일제히 고개를 돌
려 유가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오오오.."
"으휴..."
"과연...과연.."
유가형의 얼굴은 사화 중의 하나로써 조금의 손색도 없는 그러한 아름다운 옥용이었다. 고
운 피부색하며 그린 듯 선이 이어진 눈썹이며 깊은 봉목이며 오똑 솟은 코와 붉은 빛을 반
짝이는 입술..얼굴선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완만하였기에 악서령의 화사함보다는 여유롭고
편안함을 보여주었다. 일견해서 악서령 보다는 그 아름다움이 앞서지는 않지만 유가형은 내
미지상이라 이미 세상에 알려진 여인. 내미지상이라 함은 말그대로 내적인 아름다움이 외적
인 아름다움을 능가한다고 하여 여인 중의 여인이라 평을 받는다. 성품이 온화하고 차분하
여 지고 지극한 성심을 갖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 상을 타고 난 사람의 용모는 보면 볼수록
아름다움이 배가가 되는 것이 내미지상을 뛰어난 미안으로 정한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객잔의 다른 군중들이 유가형의 미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아환, 역시 경탄과 놀람 그
리고 그와는 별개의 감정, 소유욕을 느꼈다. 유가형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너는 면사를 벗지 않는 것이 좋겠다. 네가 면사를 벗으면 아마 난리가 날꺼야. 그리고 아까
하던 말인데 이 아이들은 천성적인 재질을 타고 났어. 나도.."
문득 말을 이어나갈려다 유가형은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주위의 이목이 신경쓰이는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악서령에게 말을 잇는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아무래도 여기서는 안되겠다."
"예, 언니. 그러세요. 참! 그런데 남궁 공자는 아직이신가요?"
악서령도 그러한 유가형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유가형이 혼자 앉아
있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유가형의 정혼자인 남궁비가 보이지 않음에 의아함을 느껴 유
가형에게 질문을 하였다.
"아직..그는 아직.."
미적 미적 대답을 하는 유가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악서령은 유가형의 안색이 어두워지
자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지라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정말 날씨 더워지네요. 여기는 남쪽이라 더 더운 것 같아요. 이제 여름이네요."
"그래. 덥지."
쓸쓸한 기색을 애써 감추는 유가형. 아환은 옆에서 이들의 말을 듣다 보니 무슨 문제가 있
음을 짐작하였다.
'남궁비와 유가형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가? 일반적인 남녀관계인가? 아니면..다른..'
저녁에 악서령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을터 일단 궁금증은 접고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신경은 옆 자리의 두 여자에게 집중시켰다.
일상적인 대화의 수준이 계속 이어졌다. 아리따운 두 여자의 재잘거림에 객점 안의 사람들
이 모두가 이 들을 지켜 보며 황홀한 듯 몽롱한 표정으로 천상선녀의 화음을 듣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대화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들은 토시 하나라도 놓칠까봐 유가형과
악서령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차르르..
객점 정문의 주렴이 걷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두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
과 음성에 정신을 몰두하고 있어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나 이어서 들리는 쇳소리가 이상
하게 세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크르르..철커덕..크르..처럭..
귓속을 후펴 파는 듯한 탁하고 거칠은 소리에 하나 둘씩 눈을 돌리는 중인. 그 중 무림인
이라 여겨지는 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돌린 상태에서 몸이 굳어졌다. 눈을 돌려 들어선 인
영을 본 사람들의 얼굴, 그 얼굴에 떠 오른 것은 다름아닌 공포, 그것도 극심한 공포심이었
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41번째 올림 창작야설
(2)
시체일까?
허옇다 못해 푸르딩딩한 기운이 도는 피부를 가진 아주 심하게 비쩍 마른 보통 키의 한 사
람이 객점의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회칠을 한 듯 이질적인 하얀 피부에 머
리를 풀어헤쳐 앞의 얼굴을 가렸다. 그 앞으로 내린 머리카락들 사이로 시퍼런 귀광이 파르
스름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은 회색의 장포를 걸친 괴인은 전신을 회색광이 도는 쇠사
슬로 칭칭 감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아까의 쇳소리는 아마 이 괴인의 몸에 둘러진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며 혹은 땅에 끌리며 일으키는 소리였다.
중인들은 처음에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괴이하다 느꼈고 이내 그의 귀안(鬼眼)을 보고
서는 일체의 동작이 없이 그 상태에서 숨을 죽였다. 객점 내의 앉아 있는 강호의 밥을 먹고
산다는 사람들은 문에 막 들어선 사람의 모습에서 바로 한 공포스러운 이름을 떠올릴 수 있
었다.
"으헛! 유명삭(幽冥索)..."
"웃! 유명사신(幽冥死神) 혁사락.."
"어찌 저 전대의 마두가..헉"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소리들..그 중 맨마지막 마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이가 안색이 창백
해진 채로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자에게 꽂히는 귀광(鬼光), 시퍼런 귀화가 일
렁이는 눈이 검회색빛의 머리카락을 뚫고 이글거렸다. 유명사신의 목덜미나 손의 피부색에
버금갈정도로 창백하게 질리는 마두란 말을 꺼내었던 사내. 유명사신은 시선을 돌리고는 느
릿 느릿 발걸음을 옮겨 객잔안으로 들어섰다.
크르르..철커덕..철럭...
쇠사슬이 부딪히며 괴음을 토해내었다. 유명사신이 한걸음 한걸음 뗄 때 마다 마찰음이 객
잔 안에 울려 퍼졌다. 유명사신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몸을 향하더니 계단을 오르
기 사작하였다.
이층에서 유가형과 악서령을 훔쳐 보다 괴인의 행보에 예의 주시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길을 돌려 자신의 탁자만 쳐다 보며 고개를 들지 않고 젓가락만 놀리며 음식을 먹었다.
무슨 맛인지 모르지만 이 희대의 살성이라 불리우는 유명사신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크르륵..철커덕...
유명사신이 이층의 한 창가의 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위치로 따지자면 아환 등
이 있는 자리하고는 정반대의 대치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는 유명사신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
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점소이가 질린 얼굴로 유명사신 쪽의 자리로 다가갔다.
"저.."
유명사신의 고개가 돌아가고 예의 귀광이 뻗쳤다.
"헙!"
"소채, 화주."
짧은 말. 점소이는 창백한 얼굴로 일순 유명사신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접수가 되지 않다
간신히 그 말 뜻을 알아듣고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는 뛰다시피 뒤로 물러섰다.
"예?,.예. 알겠습니다. 옙!"
우당탕탕...
뛰듯 계단을 내려가서 사라지는 점소이.
숨막힐 듯한 공기가 무겁게 객점에 내려앉았다. 그 중에서도 이층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웠다. 누구하나 소리를 내지 못했으며 자리
에서 일어나거나 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질식할 심정이겠지만 자신의 목숨보다는 소
중할 터 중인들은 애써 유명사신에게서 신경을 떼는 척하였다.
아환은 유명사신이 누구며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였다. 힐끗 악서령을 쳐다 보았다. 악서령
이라고 별 수 없었다. 면사로 얼굴의 태반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 남은 부분만으로도 악서령
이 심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환의 시선이 마주치자 악서령은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말하기 힘든 것인지 말할 자리
가 아닌지 악서령이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고는 아환은 시선을 회수하며 잠시 눈길을 유가
형에게 주었다. 그런 아환의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
'유명사신 혁사락은 삼년 동안에 일으킨 혈사로 그 살명이 무림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혁사
락이 무림에서 그의 무공을 펄친 적은 다섯번 이지만 매번 그 자리가 피에 젖어 그의 이름
이 공포로 자리매김 되었어요. 일설에 그는 그 혈사를 일으키는 원인이 복수라고 하는데 정
확한 것은 알려지진 않았어요. 저 몸에 휘감긴 쇠사슬이 그의 독문병기인 유명삭입니다.'
전음성. 아환은 그 소리를 듣고 그 내용보다는 소리가 들려온 방식에 내색은 안했지만 소
스라치게 놀랐다. 전음! 전음이라니. 화경의 고수들이 내공에 음파를 실어 원하고자 하는 상
대에게 음성을 전달하는 상승절예인 전음이다. 아환 역시 전음을 하는 요령은 대충 조설하
에게서 들었으나 한번도 실행해 본적이 없었고, 강호에 나와서 아직 전음을 쓰는 이를 본적
이 없던 아환에게 드디어 화경이라 짐작되는 고수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환이 살짝 고개를 꺾어 유가형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
신의 앞에 있는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잔 마신 후 다시금 빈잔을 채웠다. 쥐죽은
듯 고요한 객잔에 어쩌다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침 넘어가는 소리 외엔 일절 다
른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점소이가 슬그머니 음식을 들고 와서 혁사락의 자리에 음식을 내려놓더니 쏜살같이 물러섰
다. 유명사신은 별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빈잔에 술을 따랐다. 입으로 향하던 술잔은 한
반쯤 그 내용물을 비우더니 아래로 내려가 탁자 위에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한잔의 술을 마신 후 혁사락은 재차 술을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묵묵히 창밖만 쳐다 보고
있었다. 그런 혁사락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이층의 사람들이 하나 둘 조심스럽게 일어선다. 발
끝을 들어 올리고 행여 혁사락의 눈치를 거스릴까 살그머니 계단을 내려가 계산대에 은자를
던져 놓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어느새 일층의 사람들은 얼굴이 울상이 된 주인만 남겨 놓
은 채 한 무리도 남김 없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악서령도 마찬가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안절부절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유가형은 사뭇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옆의 두 쌍둥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
개만 갸우뚱했다. 그래도 분위기가 무거운지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보게. 청년."
쇠가 'J히는 듯한 탁한 음성이 나지막이 객점 안에 들려 왔다. 저 밑 유부에서 들려 오는
듯 착 가라앉은 칙칙한 음색. 객점안이 음울한 기운으로 덮이는 듯 했다. 그 소리에 객점내
의 몇 안되는 사람들, 아환의 일행과 객점의 점소이, 주인의 몸이 일순 움찔 떨렸다.
아환이 문득 고개를 돌려 시선을 좌우로 훑었다. 주위를 둘러 보자 객점 안에는 자신들뿐
다른 무리들은 이미 다 나가버리고 텅 빈 탁자들과 의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아환은 고개를
돌려 유명사신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있는 검은 회색 머릿결 사이로 빛나
는 두 푸르스름한 안광이 눈에 들어왔다.
"소생을 부르셨습니까?"
"이리 와서 나랑 술 한잔 하지 않겠나?"
나즈막하고 칙칙한 음성이지만 그 음성에 담겨 있는 의미는 틀림없는 자리를 청함이었다.
아환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몸을 틀어 유명사신쪽으로 다가가 입을 열
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앉게."
아환이 자리에 앉자 유명사신은 자신의 잔, 반잔 정도 남아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잔을 아환에게 내밀었다. 아환이 그 잔을 받자 유명사신은 술병을 잡아 아환이 잡고 있는
잔을 가득 채웠다. 아환은 그때 혁사락의 손을 볼 수 있었다. 회칠은 한 것마냥 기분나쁜 희
디흰 피부의 손, 자세히 보니 거미줄 같은 상처가 수없이 손에 새겨져 있었다. 그 손 역시
유명삭에 휘감겨 손등을 휘감고 있었다.
"한잔하게."
아환은 손을 들어 잔을 입에다 가져다 대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잔을 내밀었다.
혁사략이 손을 펴서 아환이 내민 잔을 받았다. 그 손바닥, 하얀 피부는 다른 곳과 똑같으나
차이점이 있었다. 유명삭이 혁사락의 손바닥을 뚫고 나와 있었던 것이다. 아환은 순간적으로
움찔하였지만 묵묵히 두 손으로 혁사락의 잔을 채웠다.
예와 같이 반잔을 마시고는 탁자에 잔을 내려 놓는 혁사락, 그러더니 손을 비스듬히 옆으
로, 유가형과 악서령이 있는 쪽으로 내뻗었다.
취리리릭..
기괴한 음향과 함께 혁사락의 장심에서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는 회색빛 사슬. 여인들이
자신쪽으로 날아오는 쇠사슬에 일순 얼굴이 창백해질 때 유명삭은 아환의 자리쯤에서 갑자
기 밑으로 방향을 틀더니 아환의 앉아 있던 자리의 탁자쪽으로 그 끝이 움직이고는 아환이
좀전까지 잡고 있었던 술잔을 휘감고는 다시금 혁사락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자네 잔일세."
"감사합니다. 신기한 능력이시군요."
"신기? 크큭큭.."
아마 목청이 파열되어 그런지 혁사락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거칠고 탁했다. 혁사락은
괴소를 흘리며 아환을 쳐다 보다 잔에 손을 가져가더니 입에 나머지를 털어 넣었다. 아환이
다시 그 잔을 채워주었다.
아환은 혁사락이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향하자 자신도 그를 따라서 그의 시선이 향
하는 곳으로 눈을 가져갔다. 별다는 것은 없었다. 단지 아까는 오지 않던 비가 어느새 그리
세지 않은 굵기로 내릴뿐..호남성의 기후가 원래 온난다습한지라 우기엔 비가 종종 내렸다.
아환은 혁사락의 얼굴쯤이라 생각되는 부분에서 보이던 귀광이 사라짐에 혁사락이 눈을 감
고 있음을 알았다. 어떤 상념에 빠져 있는 것일까? 이 희대의 대마두라 평함받는 이가? 잔
인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파리 목숨 보다 가볍게 끊었다 평가 받는 이 앞의 사내가 감상에
젖은 것일까?
"참 술이 그립네."
밑도 끝도 없는 말. 지금 술을 마시고 있으면서 술이 그립다니..
"자네 술을 잘하는가?"
"예."
"그럴 것 같았네. 덩치하며..전신 곳곳에 배어 있는 수련의 흔적하며..많은 일을 하였나?"
"아직 부족합니다."
"부족이라..이렇게 비가 오는 시간이면 다른 이들 처럼 난 술을 원없이 마셔 보고 취했으면
좋겠네."
"그러시면 되지 않습니까?"
"크큭.."
번쩍!
새파란 광채가 섬전처럼 아환의 눈에 작열했다. 혁사락이 눈을 떠 예의 그 귀광을 쏟아내
었다. 아환은 일순 정(精)이 흔들렸으나 곧 자세를 잡고 그 귀광을 정면으로 응시하였다.
"큭큭..그런데 말일세. 그게 안된다는게 문제지."
"왜 안된다는 것입니까?"
"그러기엔 내 손에 묻힌 피가 너무 진하네. 철철 흘러 내릴 정도로 넘치고 넘쳐. 내가 누군
지 알겠지? 보아하니 아까 저 처자가 내 얘기를 하는 듯 하더니만.."
"예. 선배."
"그렇겠지. 혈사(血事)를 다섯 번이나 일으킨 대마왕 같은 존재로 말했겠지."
"..."
"그런 짓을 내가 한 것을..."
철컥..커르르르..
혁사락이 유명삭을 부딪히며 술잔을 들고는 입에 갖다 대고 반을 입에 부어 넣었다.
"내가 왜 이리 말이 많은지 모르겠네. 감상에 빠진 것인가? 요즈음 부쩍 비가 오면 전신에
통증이 심해져 술을 찾게 된다네. 취하지도 못하면서 왜 술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디 편찮으십니까?"
"크크큭..자네는 내 손을 못 보았나? 이렇게 손뿐만 아니라 전신 곳곳에 유명삭이 심어져 있
는 데 그럼 아프지 않겠는가? 이건 저주일세. 조금 전 신기한 능력이라고 했나? 이건 신기
한 것이 아니고 비참한 것일세."
비관적이다 못해 염세적인 느낌마저 주는 혁사락의 비감어린 어조가 특유의 칙칙한 음색에
어울려 암울한 느낌을 아환에게 전해 주었다. 아환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은채 혁사락이 말
하고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다 술이 떨어지면 다시 채워주는 것을 반복하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술잔만 탁자에 닿는 소리, 쇠사슬이 철커덕 거리는 소리 사람들
이 숨쉬는 소리가 그나마 객잔 안의 정적을 균열시키고 있었다. 아환 역시 술잔을 들고 차
분히 한잔 한잔 마셨다. 거마(巨魔)라 여기어지는 혁사락의 앞이라서 그런지 몇 잔의 독한
화주가 들어 갔지만 전혀 취하는 기미가 없었다. 그에 반해 혁사락은 몇잔 마시지 않았음에
도 불구하고 아까의 말과는 틀리게 미세하게 상체를 휘청이는 것으로 보아 꽤 취기가 올라
온 듯 했다.
창 밖의 비가 그 굵기를 더해가 이젠 제법 비다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계절 자체가 여름
의 초입이다 보니 다소 후덥했는데 비로 인하여 시원한 느낌이 들게 했다.
차르르르..
주렴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에잇, 염병할. 왠 비야."
목소리는 영롱하고 아리따운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은 투박한 사내들이나 할 그런 의미의 말
이 조용한 객점안에 울려 퍼졌다. 부조화의 조화라 할까? 거친 말과 곱디 고운 음성의 어울
림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이 말은 뱉은 여인이 그러한 말투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상스러운 어투가 객점 안을 울리자 이층에 앉아 있던 두 여인, 유가형과 악서령의 눈가에
반가운 기색이 떠 올랐다. 유가형과 악서령, 두 여인은 자연스레 그 음성이 들려온 곳, 객점
의 문으로 눈을 돌렸다. 붉은 옷, 붉다 못해 핏빛으로 보이는 홍의를 입은 한 여인이 문앞에
서서 우산을 탁탁 털며 접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단순히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엔 좀 모자른 부분이 있다. 양쪽으로 살짝 치켜 올
라간 도발적인 느낌을 주는 눈매와 연한 붉은 빛을 띄는 피부색, 콧날은 반듯히 서있었고
입술은 마치 금방이라도 피를 흘릴 듯 붉디 붉었다. 적당한 길이의 목선에 어깨의 선이 퍼
져 있었고 의복에 가려 있어 그 모양을 알 수는 없지만 가슴은 봉긋 튀어나와 결코 처지거
나 퍼진 모양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혈장미, 세칭 무림사화 중 독서시라 불리우는 석영이 나타난 것이었다. 무림제일염(武林第
一艶)답게 육감적인 아름다움에 있어 다른 사화를 압도하는 자태가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석영은 객점 안을 보다 일층에 사람이 없자 눈길을 돌려 이층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유가형과 악서령의 모습이 보이자 환하게 얼굴에 웃음을 짓고는 성큼 성큼 계단쪽으로 걸어
가 계단을 올랐다.
차르르르..
객점의 주렴이 또 한번 걷혔다. 그러더니 한 사람이 들어왔다. 주렴이 걷히는 소리만 날뿐
이 사람이 발걸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들어선 사람은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
였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을 지닌 제법 준수한 외모를 가진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별다른 병기를 가지지 않았지만 눈에서 예리한 신광이 줄기줄기 뻗어나오고 있었으며 어떤
보법을 체계적으로 습관화 할 때까지 익혔는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객점 안에 들어서더니
예의 발걸음으로 석영의 뒤를 따랐다. 특이한 점은 왼손에 검은 윤기가 나는 장갑을 끼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면 띄었다.
"언제 왔어? 유언니. 서령아, 잘 있었냐?"
석영이 성큼 성큼 두 여인쪽으로 다가가더니 악서령의 옆에 털썩 주저 않는다.
"어서 오너라. 고생했지?"
"얘는 머스마 같은 말투는 아직 그대로구나. 그래 잘있었어?"
유가형과 악서령이 반갑게 맞이한다.
"제길..말도 마! 왠 같지도 않은 것들이 깝죽대기는.."
석영이 고개를 도리질하다 이층을 막 올라오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빽 지른다.
"빨랑 빨랑 좀 못오나? 에구. 남자새끼가 저리 동작이 굼떠서는..쯧쯧쯧.."
석영의 입에서 자신을 모욕하는 말이 나왔음에도 연한 미소를 얼굴에 짓는 사내, 두 여자
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한다.
"사천의 당철의가 두분 여협을 뵙습니다."
"유가형이 천수독룡 당소협을 뵈어요."
"악서령이 당소협께 인사드려요."
사천의 당철의, 천수독룡 당철의를 의미함이다. 사천 당가의 적자로서 차기의 당가를 이끌
어갈 무림의 대표적인 후지기수이자 칠룡 중의 하나인 남자무인이었다.
당철의가 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에 그냥 멀뚱하게 서있자 석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
적인 어조로 툭 내뱉는다.
"인사를 했으면 앉아야 할꺼 아냐? 어구, 저것도 불알달린 사내라고.."
말이 막 나온다. 유가형과 악서령은 그러한 석영의 말에 곱게 눈살이 찡그려졌지만 원래
그런 성격이라 여기는지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철의는 별다른 거리낌이
없는지 슬쩍 아까 아환이 앉아 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언제 왔어? 남궁 공자는? 얘들은 또 누구야? 객점에 왜 이리 사람이 없어?"
"하나 하나 천천히 물어라. 원 성질하고는..우리도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래? 근데 유언니는 혼자 온거야? 남궁비는?"
유가형의 얼굴에 다시금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악서령이 혈장미 석영의 옆구리를 슬쩍 찌
른다.
"얘는.."
"아니 왜? 그 작자는 왜 그리 언니를 기다리게 만드는 거야? 지가 그리 잘났어? 참내! 아니
유언니가 혼담을 받아 주었으면 감사히 인사를 드리고 넙죽 받아야지, 벌써 몇 년째야? 왜
그리 뜸을 들이냐고? 혼담을 청해 정혼을 해놓고 그리 차일피일 미루면 어쩌겠다는 거야?
주변에서 오냐 오냐 한다고 너무 하는 거 아냐? 언니, 그거 파혼하고 내가 다른 남자 소개
시켜줄까?"
"얘가 얘가 정말..영아! 너 조용히 해. 입다물란 말이야."
악서령이 듣다듣다 못하겠는지 황급히 손을 들어 석영의 입을 틀어 막았다.
"왜 이래. 할말은 해야 할 것 아냐?"
유가형이 손을 들어 자신의 입에 바로 세웠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 유가형이 손을 들어 반
대쪽을 검지로 가리켰다. 막 말을 내뱉을려다 유가형의 손짓에 말을 멈추고는 유가형의 손
길을 따라 눈길을 돌리던 석영, 그 손끝이 향하는 곳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 남자가 앉은 자리의 특성상 그런지 석영의 시선과 일직선으로 아환과 유명사신
이 앉아 있어 석영은 아환의 커다란 덩치에 가린 혁사락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냥
한 사람이 더 앉아 있구나 하는 느낌 밖에 갖지 못했다.
"젠장, 더럽게 크네. 덩치도 크고 칼도 되게 크네."
또 거친 말. 그도 그럴 것이 강호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장대한 체격을 지닌 아환이
었다. 거기다가 그 체격에 걸맞아 보이는 검은 색의 큰 칼이 흔히 길가다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아환은 석영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고소를 지었지만 응대할 생
각도 없고 해서 그냥 앉아 있었고 유명사신 혁사락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창밖을
바라 보는 자세 그대로 술잔만 느긋하게 기울이고 있었다. 오히려 몸이 달은 것은 석영을
제외한 두 여자들. 악서령이 손가락으로 자꾸 그 쪽을 가리키며 눈으로 주의를 주자 그제서
야 석영이 몸을 일으켜 아환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혁사략을 보았다.
처음에는 누군가 하고 쳐다보던 석영의 연한 붉은 홍조가 돌고 있는 안색이 일순 하얘졌
다. 그제서야 누군가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이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
다. 그 변화된 얼굴에 떠오른 것은 다른 무인들과 같은 공포심이 아니라 분노였다. 아미가
좁혀지고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아랫 입술을 꼭 깨물고는 허리춤을 슬쩍 매만져 보곤 석
영은 자리를 박차고 객점을 가로질러 아환과 혁사락이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끼이이..
잔뜩 발에 공력을 불어 넣은 채 이층의 목재로 된 바닥을 힘주어 밟으며 한발 한발 반대쪽
으로 움직였다. 악서령이 깜짝 놀라 황급히 팔로 석영을 잡을려고 하였지만 그런 그녀의 손
을 잡는 다른 손, 유가형이 있었다. 악서령이 불안한 눈빛으로 유가형을 쳐다 보았다. 그러
자 유가형은 턱으로 슬며시 한쪽을 가리켰다. 어느새 당철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석영의 뒤
를 쫓고 있었다.
아환은 뒤에서 험한 기세가 전해져 옴을 느꼈다. 강렬한 기도,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펼치
는 무형의 기운이 공간을 격하고 아환의 등에 따갑게 와닿았다. 살기와 분노가 범벅이 되어
팽팽한 공기가 객잔 이층에 가득찼다. 아환은 혁사락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저 기세를 느꼈
을텐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이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음에 의아했다.
'알아서 하겠지. 적어도 그 목표가 내가 아닌 이상 굳이 나설 필요가 없겠지.'
아환이 내심 결정을 내리고 있을 때 싸늘하게 들려오는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당신이 유명사신 혁사락이 맞나요?"
그제서야 혁사락이 창밖에서 눈을 거두어 석영을 바라 보았다. 도드러진 가슴을 앞으로 향
한 도발적인 절세의 미녀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귀광 어린 눈으로 석영의 눈을 쳐다
보았다.
석영은 시퍼런 귀광이 눈에 들어오자 흠칫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긴장감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석영은 그러한 두려움을 지우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는 혁사락을 향해 쏘아 붙였다.
"당신이 현성문(玄星門)을 멸문한 바로 그 혁사락이냐고 물었어요?"
"그대는 누군가?"
"본녀는 석영이라고 해요. 당신 손에 무참히 꺾인 현성문의 금지옥엽인 현미미의 의언니기
도 하지요.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꽃다운 나이에 당신의 잔인한 손속에 스러진 한 여린 처
자를 기억하나요?"
"..."
답이 없이 퍼런 안광만 석영의 눈에 들어왔다.
창! 휘리리릭..쭝.
석영의 허리춤에서 그녀의 병기, 연검을 뽑아 들었다. 일견해도 범상치 않은 예기가 흘러내
리는 보검이다. 연검의 특성상 휘청거리던 검신이 석영이 주입한 내공으로 인하여 곧게 뻗
지어 일자로 곧게 섰다.
"피는 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는게 무림의 철칙! 그동안 당신이 벌인 살행의 응보를 본녀
가 하겠어요. 여기서 본녀가 당신의 잔혹한 마수에 쓰러진다 하더라도 결코 당신의 그 업보
를 벗어나지는 못할 거예요."
혁사락이 자리에 낮은 자세에서 유명삭에 되덮인 손으로 탁자를 짚고 느릿하게 일어섰다.
일촉즉발의 험한 공기가 휘몰아치는 이곳, 사화지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형산의 한 봉우리
밑 객잔이었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42번째 올림 창작야설
(3)
혈장미 석영은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 여지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강한 두려움이 자신을 휩싸고 있었다. 앉아 있을 때에는
몰랐었는데 일어나서 저 괴이한 귀광을 뿌려대는 저 마왕의 마기는 이전에 겪어온 그 어떤
마인들보다 음울하고 극강하게만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앞에 거
대한 절벽이 버티고 서있는 기분이었다.
다혈질의 성격에 걸맞게 석영은 유명사신을 보자 마자 복수심에 검을 빼들고 쳐들어 갔지
만 느긋한 혁사락의 반응에 오히려 긴장을 하는 것은 석영, 그녀였다. 인간같지 않은 피부색
하며 짙은 검회색의 머리결 사이로 줄기 줄기 내비치는 귀기스러운 안광에다 회색빛의 유명
삭이 꿈틀거리며 혁사락의 전신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꽤 실전을 겪었다고 자부하는 석
영 조차도 쉽게 받아 넘길 수 없는 이질적인 공포심을 자아 내었다.
석영은 떨리는 마음을 추스리고 검을 곧추세웠다. 핏빛의 붉은 경장의가 그녀의 몸에 착
달라 붙어 육감적인 자극을 주지만 객점의 그 누구도 지금의 석영을 보고는 욕정을 떠올리
지 않았다. 곧 끊어질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객점안을 맴돌았다. 석영의 검이 점차 빛을 발하
고 있었다. 처음에는 은은히 빛이 보이는 다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은색의 광채가 검신 전
체를 뒤덮더니 휘황한 광채를 뿌려대며 석영의 손에 들려 있었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의 빛을 이제 받겠어요."
석영의 말투는 차분하고 여태까지와 다르게 말투가 험하지 않고 오히려 공손해지고 경어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그 말에 실린 기운은 살기(殺氣), 그것도 일반인 같으면 오금을 저리게
할 정도로 극도의 살기였다. 전후(戰后)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짙은 투기가 석영의
전신에서 배어나왔다.
"무슨 피의 빛이지?"
감정이 실리지 않아 어색하다는 기분이 드는 음성이 들려 왔다. 그 누구도 입을 벌리는 사
람이 없었으니 혁사락의 입에서 나온 말일게다. 거센 살기와 투기가 자신에게 엄습하는데도
담담히 말을 하는 혁사락.
"당신이 학살한 그 수많은 원혼들을 부정하는 것인가요? 살인을 즐기는 당신 같은 대마두의
손속에 스러져간 그 목숨들의 혼령이 두렵지 않은 가요?"
"누가 살인을 즐긴다고 하던가?"
"그럼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끔찍한 혈사를 한 이유가 따로 있단 말인가요?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인명들을 잔인하게 죽여야 할 이유가 있나요?"
스스로가 그 상황에 감정이입을 시키는지 격정에 사로잡혀 피를 토하듯 부르짖는 석영, 위
로 치켜 올라간 눈매가 부르르 떨린다.
"그대는 무림인인가?"
"그래요. 정도를 걷는 다 자부하고 있어요."
뜬금 없이 물어오는 무인이라는 질문에 팽팽한 실이 일순 느슨해지듯 했다.
"그대는 한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가?"
"없진 않아요. 하지만 당신과 달라요. 본녀는 무림에 해를 끼치는 패악무도한 인물들에게만
손을 썼어요. 존재해봤자 아무 쓸모가 없는 그런 인면수심의 마두들만 처리했어요."
"누가 그들을 쓸모 없는 존재라 규정하던가?"
"그것은.."
잠시 말을 끊다가 계속 이어갔다.
"일반 무림인들의 평이지요. 보편적인 상식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악(惡)이라 여기어 지는
인물들은 무림에 해가 되는 자들이니까요."
"일반 무림인이 아닌 정파라 칭하는 무리들의 평이고 기준이겠지. 그것은 그렇다 치고, 그대
는 그들외에 그들의 부하나 가솔들에게 손을 쓴적은 없었나?"
"있었죠. 복수를 하려고 찾아온 마두의 수하들등에게 살수를 펼친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
은 내 목을 노렸고 난 정당하게 그들에게서 나를 보호하려고 한 것이예요."
손을 쓰지않고 논쟁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평소에 들어오던 혁사락의 악명과 많이 달라 의
아했지만 그의 의도를 모르는 지라 석영이 검을 세운채 혁사락의 질문에 일일히 대답하며
논쟁을 벌여 나갔다.
아환은 혁사락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유가형이나 악가령을 위시한 다른 이들은 석영과 마
찬가지로 귀에 따갑게 들어왔던 유명사신의 살명에 맞지 않는 이 논쟁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만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가형은 아리따운 눈빛을 빛내며 혁사락의 입이라 추정되는 부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들에게 손을 썼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아니란 말인가요?"
"크큭..내가 마공을 익혔고 이런 기괴한 몰골을 했다고 해서 살인을 즐기고 피에 광분하는
괴물처럼 보이나? 그런 것인가? 누가 그렇게 정의를 한 거지? 너는 나의 과거를 아는가?
내가 왜 혈사를 벌였는지 짐작이나 하나?"
"...."
혁사락의 안광의 빛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면서 무심하게 느껴졌던 혁사락의 음색이 서서
히 색을 띄어가기 시작하였다. 강한 분노의 색채를 띄며 혁사락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는 내 원수를 죽였다. 나를, 내 가족을, 내 가문을 멸망시킨 흉수를 뼈를 깎고 살을 발라
내며 수없이 피를 흘리며 그나마 내가 익힐 기회가 있던 무공을 익혀 원한을 갚아 나갔다.
처음에는 원수만 갚으면 되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었다. 인면수심의 위선자들은 어느새 내
게서 빼앗아간 기물들로 강호에서 기반을 다졌지. 백도라는 허울을 뒤집어 쓰고서는 성인군
자입네 하고 행세하는 자들, 그들을 심판한게 잘못이란 말인가?"
"그건.."
"네가 방금 여기서 검을 빼어 들었다. 나와 싸움을 원하는 것이겠지?"
"그래요."
석영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왠지 자신이 옳다 생각하던 것이 흔들리는 기분, 가치관 자체
가 혼란스러워졌다. 상대는 무림에서 공적으로 낙인되다 시피하는 마두였다. 그런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음울한 혁사락의 말투에서 무언가 모를 자
신을 끄는 힘을 느꼈다.
"너는 여기서 나와 싸움을 할 작정인가? 이 객잔에서? 너는 검을 휘두르며 초식이, 검기가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나를 맞출 자신이 있나? 공력을 운용하면서 다른 기물을 파괴하지 않
고 나를 공격할 수 있나? 이 객잔은 무림인이 아닌 일반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물건이 부숴
진다고 하면 보상을 하면 그만이라 말할 건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그냥 객점에 피해를 주
고 정의를 수호하였다 자화자찬할 생각인가?"
"...."
할말이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않은 석영은 안
색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세워진 검끝이 떨리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린다는
증거였다.
"왜 말이 없는가?"
"그런데 왜 미매는 강간을 한 후 죽인건가요?"
"무슨 말이지? 누가 강간을 하였다는 것이지?"
"당신이 하지 않았으면 누가 그런 천인공노한 짓을 한 것인가요?"
"나는 모르는 일이다."
"거짓말 말아요! 이 패악무도한 마두!"
"감히.."
그순간,
치잇!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렸다.
캉!
무언가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이 소리가 난 곳으로 급히 눈을 돌렸다. 그러자 그 곳에는 검은 장갑에 뾰족한 못
모양의 암기를 들고 서 있는 당철의가 눈에 신광을 흘리며 서있었다.
"석 소저, 이런 마두의 말따위는 들을 가치 조차 없습니다. 유소저, 악소저, 우리 모두 합공
해서 이 살마를 처치하여 강호의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줍시다."
신중히 전력을 다해 펼친 암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뒤로 한걸음 물러난 후 주위를 돌아보며
공격에 참여할 것을 부르짖는 당철의. 탈혼정(奪魂釘)이라는 당가의 비전 암기를 몸에 두른
유명삭으로 막아낸 혁사락의 푸르스름한 귀광에 맞설 자신이 없는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다.
석영의 그린 듯 곱게 치켜뜨여진 눈이 가운데로 일그러졌다. 아마 당철의의 암습이 못마땅
한 모양이었다. 막 무어라 말을 할 찰나,
키리릭..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크억!"
유명사신 혁사락이 우수를 치켜들고 서있는 모습이 중인의 눈에 들어왔다. 하얀 피부 색의
장심 가운데가 붉게 물들고 있고 그런 그 손바닥의 한가운데에서 유명삭이 뻗어 나와 당철
의와 이어져 있었다. 그 끝은 당철의의 당철의의 검은 장갑을 낀 쪽 어깨를 꿰뚫고 밖으로
다섯치가량 삐져나와 있었다. 유명삭의 끝은 화살촉과 유사하고 갈고리 같은 구조로 되어있
어 들어가기는 쉬우나 빼기는 어려운 그런 형태를 갖고 있었다.
"멈춰요."
석영이 연검을 휘둘러 당철의와 혁사락을 연결하고 있는 유명삭을 칼로 베어나갔다.
창!
"끄억!"
보검으로 보이는 석영의 검은 유명삭을 베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그 여파로 인하여 유
명삭의 끝이 당철의의 어깨를 헤짚으며 다시금 어깨에 박혀버렸다. 당철의는 순간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이럴수가?"
왠만한 병기를 무우자르듯 자르는 비연검(飛燕劍)이었다. 게다가 내공을 주입시킨 자신의
검이 저런 쇠사슬을 자르지 못하고 튕겨나옴에 경악성을 흘리는 석영이었다.
당철의의 눈에 원독이 서렸다. 언제 자신이 이런 낭패를 보았던가? 천하의 칠룡 중의 하나
라 자부하던 당철의는 평소 사모하던 석영의 앞에서 수치를 당하자 이를 바드득 갈면서 부
상을 입지 않은 손을 뒤로 슬며시 가져가 작은 주머니를 끄르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
다. 혁사락이 검을 펼쳐낸 석영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당철의는 그 손을 재빨리 빼어내어
손에 들어있는 것을 혁사락에게 뿌렸다.
츠츠츠..
기분나쁜 황색의 분말이 허공에 확 퍼졌다. 저녁 시간이라 불을 켜 놓은 객잔 안이 일순
황색의 빛깔로 덮어진다 싶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뻗어나가는 황색 가루를 쳐다 보던
당철의. 혁사락이 고개가 획 돌려지며 안광이 빛나면서 양손을 뒤흔드는 것을 보고 얼굴이
하얘졌다.
"안..안돼!"
"피해!"
혁사락의 전신에서 유명삭이 회전을 하며 거센 바람을 일으켜 황색의 분말을 뒤로 밀어내
었다. 아환은 급히 바닥으로 몸을 굴러 황색 가루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지만 검을 들고 멍하
니 서있던 석영은 일순 동작이 늦어 황급히 신형을 날렸으나 일부의 황색분말에 호흡을 노
출시키고 말았다.
"으읏.."
그런 그녀와 함께 나뒹구는 당철의.
키리릭..
"꺼어.."
쿵..
혁사락이 움직임에 따라 회전하는 유명삭이 당철의의 어깨를 온통 긁으며 빠져 나왔다. 당
철의는 눈을 허옇게 까뒤짚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그의 어깨에서는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른 사람이 손쓸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유가형과 악서령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영매."
"영아!"
빠르게 달리다 시피 다가오는 두 여인.
"독이 남아 있을지 몰라! 조심해."
"예, 언니."
유가형은 석영의 곁으로 가까이 가서 다급히 석영의 상세를 살폈다. 벌써 독기운이 퍼지는
지 연한 홍조를 띄고 있던 석영의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했다. 유가형은 급히 교수를 뻗쳐
석영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석영의 맥을 짚던 유가형의 안색
이 침중히 변했다. 그러더니 품에 손을 넣더니 작은 옥병을 꺼내곤 그속에서 밀납에 쌓인
환약을 하나 빼어내어 깨드렸다. 유가형은 석영의 턱주위의 혈도를 짚어 석영의 입을 벌리
게 하고는 환약을 입에 넣었다. 넣자 마자 타액과 섞이며 녹아내리는 환약은 유가형이 석영
의 턱과 목주위의 몇몇 혈도를 짚자 끄르륵 소리를 내면서 석영의 식도로 넘어갔다.
"언니, 영아의 상세가 어때요? 약을 먹었으니 이제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 영매가 들이마신 황색 가루는 아마 당가의 쇄심절독(碎心切毒)같아. 일단 응
급처치는 했지만 빨리 해약을 복용해야돼. 그렇지 않으면 어려워."
악서령의 다급한 물음에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유가형이 대답하였다.
"쇄심절독이요? 그것은 극독이잖아요? 당가에서도 금기로 되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 중독된 자의 이지를 파괴시킨다고 해서 당가에서 조차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절독이지. 어째서 당소협이 이 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공기 중에 뿌려진 것은 이
독의 특성상 얼마 안 있어 소멸되겠지만 석영이 들이마신 것은 어쩌지?"
"언니의 의술로도 힘든 거예요?"
"우리 성의전도 천하의 모든 독극물을 해독할 수는 없어. 그 중의 하나가 이 쇄심절독이지.
이를 어쩌나? 이 독은 해독약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악서령의 드러나 있는 눈주위가 창백해졌다.
"그럼 영아는 어쩌죠? 영아는..영아는..흐흑.."
악서령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하다가 급기야 눈물을 흘려 내었다.
"일단 당소협을 깨워야 겠어. 당소협이 이 독을 사용하였으니까 그 독의 해독방법도 알지
몰라."
"흑..흑.."
유가형이 몸을 일으켜 바삐 당철의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어깨의 상처 부위의 혈을 짚어 지
혈을 하였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창백해진 안색을 하고 있는 당철의. 당철의의 몸을 세
운후 뒤로 돌아가서 당철의의 등에 장심을 갖다대고는 진기를 주입시켰다.
진기를 이용한 기의 순환이 이루어졌다. 생각보다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가형은 상세가
별로 심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당철의가 의아했지만 내상이 깊어
그런 것이라 판단하고 계속해서 내공을 주입시켰다.
대략 일다경의 시간이 흐르자 당철의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으음.."
당철의가 눈을 떴다. 내기로 상세를 치료하였는지라 혈색이 밝게 돌아온 당철의는 눈을 뜨
고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자신의 등에 닿아 있는 이물의 감촉에 고개를 뒤로 돌린 당철의
는 내기를 많이 소모하였는지 창백한 안색으로 뒤에 정좌한 유가형을 볼수 있었다.
"아니, 유소저. 으윽!"
몸을 일으키다가 어깨의 통증에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당철의는 어깨를 부여잡고 한쪽 무
릎을 꿇은채 자리에 다시 주저 앉았다.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던 당철의가 유가형에게 질문
을 던진다.
"이게 어찌..그 마두는 어디 갔습니까?"
"유명사신은 떠났어요. 그보다 당소협."
"예?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쇄심절독이 당소협의 손에 있는 거죠? 쇄심절독은 당가에서 금지한 독이 아니던가
요?"
"그게.."
유가형의 물음에 당철의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하였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띄엄띄엄
나왔다.
"말씀하세요. 그 독 때문에 지금 영매의 상세가 심각해요. 해독약은 갖고 있나요?"
"예? 석 소저가요?"
급히 눈을 돌려 주변을 살피던 당철의의 눈에 객잔 바닥에 누워있는 석영의 모습이 들어왔
다. 어깨를 부여잡고 다급히 석영에게 달려간 당철의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어찌 된 거요? 왜 석 소저가 여기에 누워있는 겁니까?"
당철의가 다급하게 유가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소협이 시전한 독이 유명사신의 경기에 휘말려 퉁겨나고 거기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영매가 그 독을 들이 마셔 중독이 된 거지요. 말해주세요. 쇄심절독의 해약을 갖고 있나요?"
"...없습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당철의가 비통에 찬 음성으로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유가형의 부드
럽기만 하던 미안이 굳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해약도 없는 독을, 그것도 여러 사람이 있는데서 쓸 생각을 한
것인가요? 당가에서 금기로 한 쇄심절독이잖아요. 그러면 그 독의 독성이 얼마나 극심하고
무서운지 당소협도 충분히 알 것 아닌가요?"
"..."
유가형이 당철의를 지나치며 석영의 옆에 살포시 앉아 다시금 석영의 손을 들고는 맥을 살
펴 보았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어서 당가로 연락을 취하세요. 빨리 영매를 안정시킨다음 당가에 가서 치료법을 의논해야
겠어요. 그리고 당가의 원로들에게 소협의 용독에 관하여 여쭈어 볼것이예요."
당철의를 등을 진 상태에서 유가형은 차갑게 말을 흘리며 석영의 상세를 자세히 살펴 보았
다. 아직 울고 있는 악서령은 한쪽의 의자에 앉아 조금 멍한 눈빛으로 유가형과 당철의의
대화를 쳐다 보고만 있었다.
당철의의 얼굴이 점점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자괴감과 부끄러움, 걱정, 불안감 등 각종 감
정이 교차되는 당철의. 차츰 차츰 그 혼돈된 감정들은 하나의 감정으로 전이되었다. 살기.
당철의의 눈에서 슬며시 살기가 피어올랐다.
'여기에 있는 자들의 입만 막으면 내가 한 일은 영원히 묻혀지리라. 삼화를 죽인 범인은 유
명사신 혁사락으로 덮어씌우면 된다. 그렇지 않고 만약 내가 쇄심절독을 사용한 것이 당가
에 보고된다면 나는 끝장이다. 나의 미래는 영영 없을 것이다. 장손의 위치를 배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평생 당가에 묻혀 살거나 무공을 폐지 당할 지도 모른다.'
당철의의 머릿 속에 엄하고 사리가 분명한 조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철의는 입술을 꼭
깨물며 품으로 손을 가져가 살그머니 무엇인가를 꺼낸다.
"유소저, 당가에 쇄심절독을 보고할 것 입니까?"
"물론이지요. 그보다 앞서 석영의 상세가 위급하니 어서 마차를 수배하세요.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여야 겠어요."
석영의 손을 잡고 진기를 부어 놓고 있던 유가형이 뒤도 돌아 보자 않고 당철의의 말에 응
답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린 유가형의 눈속에 살기로 번뜩이는
당철의의 눈이 들어오고 순간 눈앞이 손그림자로 덮였다.
퍽!
"아악.."
당철의가 손에 내기를 끌어올려 철사장으로 유가형의 등을 후려쳤다. 미처 방비가 되지 않
은 상태에서 일장을 가격당한 유가형이 입에서 분수가 퍼지듯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러
졌다.
"당소협! 이게 무슨.."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악서령이 눈에 초점을 잡고 다급하게 자리에 일어서며 항의를 하려
고 할 때 당철의가 다친 손에 들려 있는 것을 옮겨 잡고는 악서령에게 획 뿌려대었다.
"아앗! 이게 무슨...으으음.."
막 항의를 하려다 스르르 눈을 감으며 악서령은 자리에 무너졌다. 당철의가 뿌린 미혼약을
들이마셔서 순식간에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당철의는 악서령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유가형
이 엎어져 쓰러진 곳으로 다가갔다.
퍼억!
"크윽.."
당철의는 유가형의 평소의 무위가 높음에 신중을 기하려는지 유가형의 근처에서 발을 날려
유가형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유가형은 좀 전에 당철의를 진기로서 치료하고 계속되는 석영
의 상세를 살피며 내공을 소모하였는 상태에서 당철의의 내공이 실린 일수를 얻어 맞아 심
한 내상을 입었다. 그러면서 쓰러진 상태에서 가까스로 내기를 모아 반격을 준비하려 한 유
가형은 뒤이은 옆구리에 오는 충격에 모았던 내공이 샅샅이 흩어지고 호흡도 제대로 할 수
없게 고통이 찾아오자 비병을 질렀다.
유가형은 그 자리에서 옆구리를 움켜쥐고는 데굴데굴 굴러 석영의 옆을 넘어 몸을 간신히
세워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당철의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악랄한 짓인가요? 당소협. 어찌 그대가 이럴 수가 있지요? 그토록 그대가 사모
하는 영매가 쓰러져 있는데 빨리 상세를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설마 살인멸구를 하겠다는
것인가요?"
"유가형. 이제 알겠나? 내가 쇄심절독을 쓴 것을 당가나 다른 곳에서 알게 된다면 그야말로
나의 앞날은 암흑 속에 빠지는 것이지. 쇄심절독의 해약? 그런 거 없어. 미모가 아깝지만 혈
장미 저 계집은 어쩔 수 없지. 그대신 천향매화와 난화성녀가 있잖아. 천향매화야 단순한 미
약을 마신거지만 쌀이 익어 밥이 되면 지가 별 수 있겠어? 이거야 말로 꿩대신 닭이 아니고
꿩대신 봉황이 아니겠어? 게다가 이름난 두 미녀를 내 품에 품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이기도
하고..크하하하.."
당철의가 앙천대소를 터뜨리는 것을 보는 유가형의 심정은 참담해졌다. 칠룡의 일인이자
오대세가의 장손으로 촉망되는 정파의 후지기수인 당철의의 본심을 알게 되자 심장이 내려
앉는 충격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치욕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고도 그대가 정녕 세가의 후손이란 말인가요? 아까도 거짓이었군요. 어쩐지 깨어날때
가 되어도 깨지 않더라니만..애초부터 쇄심절독을 쓸때부터 계획하였군요. 당철의! 결코 그
대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을 것이요. 그대가 나와 령매의 몸은 빼앗을지 몰라도 마음까지는
빼앗지 못할터, 우리 둘을 죽이지 않으면 그대의 만행이 만천하에 알려지고 그대는 강호에
서 발붙이지 못할 것이예요."
유가형의 입에서 원독이 서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곱디 고운 두 눈에 여태 한번도 유가형
에게서 나타나지 않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이런..이런..내미지상이라더니..남자에게 지극히 순종한다던 전설은 다 거짓인가? 크하하..유
가형, 걱정말아라. 네가 모르는 쇄심절독의 묘용을 하나 더 말해주지. 쇄심절독을 아주 약하
게 시전하면 중독된 사람은 이지를 잃어버리고 인형처럼 타인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라. 내 너희들을 두고 두고 귀여워 해줄 테니까? 안되지, 안돼. 혀를 깨물
면 되나? 천상의 열락이 금새 찾아올텐데.."
유가형이 다급히 혀를 깨물어 자결을 하려고 하자 재빨리 손을 놀려 유가형의 아혈을 짚었
다. 그러곤 당철의는 품에서 분홍의 옥병을 꺼내더니 그 속에서 분홍색을 띈 손톱만한 환약
을 꺼내었다. 유가형의 턱을 잡더니 알약을 목 깊이 던져 놓았다. 유가형의 목에 들어간 환
약은 곧 침과 섞여 유가형의 목젖으로 흘러 들어갔다.
유가형의 눈빛이 다급하게 변하였다. 당철의는 그런 유가형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보더
니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유가형의 얼굴을 매만졌다. 당철의의 손이 얼굴에 와닿자 움찔거
리는 유가형이건만 그 손길을 피하지 못하고 분노로 몸을 떨 뿐이었다.
점차 유가형의 얼굴이 붉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아마 복용한 약효가 발휘되는 모양이었다.
유가형은 전신에서 미미한 열기가 피어오름을 느꼈다. 어디에서 처음 시작되는 지는 몰라도
그 열기는 점차 강렬해지고 몸이 더워지며 정신이 몽롱해지게 하였다. 유가형의 빛나던 눈
이 그 빛을 잃어가고 눈주위가 붉게 변하는 것을 보던 당철의의 입가의 웃음이 더더욱 짙어
졌다.
"그만하지."
"헉!..크악!"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나즈막한 음성에 깜짝 놀라 다급히 몸을 튕기며 돌아서려던 당철
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환이 어느새인가 일어나서 당철의의 등뒤에서 칼을 들고
서있었다. 바닥에는 하나의 팔이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아환이 칼을 휘둘러 그나마 성한 당
철영의 다른 팔을 몸에서 떼어낸 것이다. 아환은 독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지만 일어나지 않
고 누워있는 채로 당철의가 하는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가 막 당철의가 본
격적인 행위로 나설려고 하자 기척을 죽이고 일어나 당철의의 뒤로 접근한 것이었다.
피가 터져 나오며 바닥은 금새 홍건히 피가 고였다. 뒤로 물러선 당철의의 입에서도 핏줄
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네 놈은 누구냐?"
"그것은 알 필요 없어."
"잠깐!"
"왜?"
"협상을 하자.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여자? 돈?"
"필요 없어."
아환이 객점의 바닥을 박차고는 당철의에게 쇄도를 하여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그 칼의
그리는 궤도에 들어 있는 것은 당철의의 목. 위를 뒤덮으며 검은 그림자가 자신에게 다가오
자 당철의의 눈빛이 검어졌다.
츠카각..
아환의 칼이 당철의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자 허공에 당철의의 목이 떠올랐다. 이내 땅에
떨어진 당철의의 수급이 눈을 부릅뜬 채 객점의 피로 질퍽한 바닥에 뒹굴며 굴러 다녔다.
아환은 칼을 갈무리하고는 눈을 돌려 삼화를 쳐다 보았다. 유가형은 이제 약효에 완전히
지배당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져 있었고, 달짝지근한 숨결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눈은
몽롱하게 초점을 상실하여 열기가 출렁이고 있었고 입술은 촉촉한 물기가 어려 색정에 사로
잡힌 여인의 교태를 자아내고 있었다.
'후후..원래 계획에는 없던 것이지만 당철의가 나를 도와주는구나. 고맙군.'
악서령은 미혼약에 취하여 쓰러진채 있었으며 석영은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였다. 아환은
세 여자를 한데 모아 들어 올리고는 객점의 뒷편으로 서둘러 발을 옮겼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43번째 올림 창작야설
(4)
노르스름한 호롱불이 자욱한 어둠에 뒤덮인 작은 공간을 어스름하게 비추며 밝히고 있었
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 그 안에 자리 잡은 옷장과 침상, 그리고 탁자와 의자 두어개를 보
면 사람이 잠을 자고 생활을 하는 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침상 위 한 희끄무레한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희미한 불빛에 반사되어
연노랑의 색을 반사시키며 근근히 붉은 빛이 어우러지는 기이한 느낌을 전해 주는 물체. 검
은 빛을 내는 얽힌 실타래 같은 뭉치가 자그마한 움직임에 따라 수시로 모양이 바뀌어 지고
그 물체에서 뻗어나간 가느다란 흰 줄기가 침상의 이불보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유가형은 침상 위에 엎어진 상태에서 그 아름다운 육체를 미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끊임
없이 배어나오는 달뜬 숨결이 침상과 묻은 얼굴의 틈새로 새어나왔다. 희뿌연 여체는 곳곳
에 붉은 기운이 떠올라 달아오른 몸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살의
등이 보이고 탐스러운 둔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어느새 누가 걸친 의복을 벗겨내었
지 싶다.
그렇게 침상위에서 꿈틀이는 여체의 옆, 한 남자 아환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몸에 걸친
옷쪼가리를 다 치우고 유가형이 누워 있는 침상의 곁에 서 있었다. 튼실하게 보이는 칠척의
장신에 걸맞는 탄탄한 근육으로 장식된 짙은 구리빛의 남자의 몸이 호롱불에 조각상을 세워
놓은 듯 강건한 남성미를 보여 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나신의 여체를 앞에 놓은 남자라면
당연히 보일 강랄한 욕정이 그의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차려 놓
은 밥상을 마다할 아환이 아니었다. 음약이라는 것은 대부분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것을 제
외하고는 그냥 내버려두어도 자연스레 그 약효가 소멸되는 흥분제였고 그걸 모르는 아환도
아니었지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런 행운이 찾아 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환은 유가형의 상세가 범상치 않은 내상을 입고 있다고 해서 유가형의 상세를 돌보
며 기회를 흘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환은 세 여인을 객점의 후원으로 데리고 오며 주변을 나름대로 세밀히 살폈다. 사화가
모이는 선라객점은 당연히 강호 세인들의 주목을 끌 것이 분명했고 자칫 하다가는 음마(淫
魔)로 몰리거나 강호의 공적이 될 수도 있는 일이어서 아환은 신경을 집중하여 여인들을 옮
기면서도 밖의 동향을 파악했다. 다행히 밤 늦은 시간에 접어 들었고 혁사락의 살명이 크나
큰 관계로 무인들의 대부분이 객점에서 떨어진 곳에서 객점을 주시하는지 객점 부근에 인기
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혁사락이 다행히 독을 튕겨낸 후 바람처럼 창밖을 통해 사라진 것도
밖의 사람들이 아직 유명사신이 이 곳에 있으리라는 추측을 하고 선라객잔으로 들어오지 않
게 된 원인 중의 하나였다.
아환은 일단 악서령이 중독된 미혼약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것을 당철의의 입을 통해 들었
고 석영의 상세야 유가형이 응급으로 처치를 하였기 때문에 당장 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는 두 여자는 옆방에 옮겨 놓고는 유가형을 침상위에 데려가서 옷을 벗겨 놓았다. 거의 찢
듯이 유가형의 옷을 벗길 때에도 유가형은 약효의 기운때문인지 달뜬 숨을 뱉으며 고혹적인
여체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환의 검붉은 살덩이는 이미 충분한 준비가 끝났는지 그 거대한 위용을 세운 채 유가형의
얼굴 가까이 그 육봉을 들이 댄 상태로 서 있었다. 아환은 침상위로 올라가서 유가형의 여
체를 돌아 눕혔다. 그러자 드러나는 매혹의 나신. 과연 무림사화 중의 하나이며 내미지상의
여인다웠다. 바닷속의 해초처럼 침상위에 퍼진 유가형의 머릿결이 어지러히 흩어져 그 검은
윤기를 빛내고 있었고 그 검은 빛 사이에 하이얀 얼굴이 자리잡고 있었다. 살포시 감은 눈
매가 파르르 떨리면서 때로는 조금 열릴까 하다 곱게 가운데로 모아져 찌푸려지고 동그러이
오똑 솟은 코끝은 계속해서 가쁜 숨을 쏟아내었다. 연한 분홍색의 보드라운 입술사이로 빨
간 설육이 삐져나와 입술에 계속해서 물기를 적시고 있었으며 발그스레하게 홍조가 피어오
른 두 뺨의 빛깔이 곱다.
볼록 솟아오른 가슴은 그 모양을 잃지 않아 숨을 들이 내쉴때마다 봉우리가 움직였고 매끈
한 살결의 선이 급격히 젖가슴에서 내려와 옴폭 파인 배꼽을 지나 약간 도톰한 아랫배까지
이어져 여체의 곡선의 아름다움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밑에 숨어있는 우거진 태
초의 밀림이란..
거칠고 커다란 사내의 두 손이 여체의 봉긋한 두 설봉을 강렬하게 움켜잡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져 오며 형태가 이리저리 이그러지는 유방. 그 위에 매달린 유실이 손가락의 틈
새로 삐져나와 부끄러운 붉은 고개를 내밀었다. 그 끝에 와닿은 사내의 숨가쁜 입김에 여체
가 움찔거렸다. 아환은 유가형의 유실을 두툼한 입속에 넣고 이리저리 혀로 굴려보았다. 그
때마다 여체의 곡선이 휘어졌다.
"하아...아흠.."
침상의 이불을 움켜잡고 있던 가늘은 팔이 언제부터인가 사내의 등을 감싸안고 있었다. 워
낙 커다한 체구여서 그런지 여인의 팔로 다 안지 못할 정도인 것이 안타까운듯 여체의 교수
는 사내의 등을 쥐어짜듯이 강하게 움켜잡으며 전신을 남자에게 붙여갔다.
아환은 한손을 유가형의 유방을 움켜잡은 채로 다른 한 손을 밑으로 내려 유가형의 비처를
쓰다듬어 보았다. 홍건하였다. 약효가 충분히 체내에 돌고 있는지라 유가형의 비처는 이미
홍수가 난듯 질펀하게 젖어있었다. 사내의 손길이 닿자 열락의 기운에 몽롱한 정신에서도
여체가 움찔거렸다. 처녀지에 거센 남자의 손길이 닿은지라 본능적으로 방어할려는지 굳어
지려는 여체가 음약의 기운을 못이겨 다시금 몸을 열어 젖히고 사내의 손길에 전신을 맡겼
다.
이미 상당한 욕정을 느낀 아환은 더 이상의 전희를 생략하고 빳빳하게 일어선 자신의 남근
을 유가형의 비처에 맞추었다. 터질듯이 단단해진 욕정의 배출구를 찾던 아환의 남근이 유
가형의 비처의 부근에서 몇번 움직이다가 마침내 제 위치를 파고 들었다.
"꺄아..아흑.."
세찬 단번의 허리로 밀어붙임에 아환은 처녀막이 터지는 기분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였지만
좁은 동굴이 아환의 양물을 휘감으며 저항을 했다. 아무리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유가형
의 비처라 할지라도 첫경험이었고 게다가 아환의 남근은 보통의 사내보다 훨씬 그 크기가
컷던지라 유가형은 전신이 쪼개어지는 고통에 일순 정신을 차렸다.
"아악..허억..당철...악! 당신은..흐윽.."
침침한 호롱불하에 하체에서 전해져 오는 강렬한 작열감을 느끼며 잠시 정신이 돌아온 유
가형은 상황을 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극심한 아픔이 밀려오자 당철의와의 정황을 가까
스로 생각하고 말을 하다 자신의 위에 올라탄 사내가 당철의가 아님에 순간적으로 놀라다
재차 정신을 마비시키는 약효에 다시금 이성의 끈을 놓쳐버렸다.
아환이 남근을 밀어 넣을 때 여체는 몸을 튕기듯 일으켜 아환을 부여잡고 고통과 열락에
의하여 비명을 질러 대었고 아환의 몸이 빠져나갈때는 비부의 속살이 딸려나가며 아쉬움을
뱉어내었다. 유가형은 손톱을 세우며 아환의 몸이 자신을 출입할때마다 아환의 등에 진한
손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하악...아악..하아..하아.."
아환의 허리가 맹렬히 유가형을 찍어 눌렀다. 아예 침상에 유가형의 여체를 파묻어 버리려
는지 아환의 허리의 운동이 거세졌다. 그때마다 여체는 온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아픔과 함
께 겪어보지 못하였던 쾌락에 몸은 떨리고 뒤틀리며 사내의 육체에 반응을 하였고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인 이성대신 감각적인 흥분만이 유가형의 온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환은 지금의 성관계가 단지 유가형과의 인연의 끈을 만들기 위한 전초전임을 알고 있었
기에 애무등의 과정을 생략한채 오로지 허리의 놀림으로 자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한 정사를
하고 있었다. 아직 태반 이상이 용해되지 않은 음양신단의 영험한 약효로 인하여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갖고 있는 그이기에 단순 삽입행위만이지만 그 시간도 결코 짧지는 않았다.
"아하..아하...아으.."
아환의 무릎이 침상의 이불을 거칠게 구기면서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에 어울려 허리의 움
직임도 강도를 더해가며 여체에게 아환의 육체의 일부를 뿌리 끝까지 밀어 넣으려는 행동을
보였다.
사내의 검붉은 흉기가 그 위용을 드러내었다가는 여체 속으로 파고 들기를 반복하였다. 침
상의 이불은 둘의 땀과 유가형의 앵혈과 애액으로 인하여 질퍽하게 젖어 둘의 몸에 감겨 붙
어 있었다.
"아흐..아...아아...끄으..윽.."
기묘한 소리를 내며 몸을 활처럼 뒤로 젖히던 여체가 갑자기 축 늘어져 버렸다. 혼절한 것
이었다. 심한 내상을 입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데다 약효로 인하여 원기를 급히 끌어 올려
사내와 교접을 한 결과 유가형은 탈진을 하여 급기야는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린 것이었다.
아환은 그때까지도 맹렬히 여체에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다가 여체의 반응이 없자 눈을 유가
형의 얼굴에 맞추었다. 그러자 반쯤 뜨여진 눈에 검은 동공이 보이지 않고 혀연 자위만 보
임에 유가형의 현 상세를 파악했다. 그래도 허리의 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아환은 정신을 잃은 유가형을 계속해서 공략하고 자신의 남근을 출입시켰다. 과연 내미지
상의 여인답게 정신을 잃었는데도 본능적으로 여체의 비부, 질근육은 계속해서 조임을 반복
하여 남근에게 극도의 쾌감을 안겨 주었다.
마침내.
"음.."
굵은 신음성과 함께 아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진동하듯 떨면서 아환은 허리의 놀림을
느슨하게 하고 여운을 즐겼다. 얼마 있지 않아 여체에게서 결합되어 있던 자신의 일부를 이
탈시킨 아환은 유가형의 비부를 흘깃 보았다.
붉은 선혈로 온통 뒤범벅이 되어 있는 유가형의 비처. 양쪽 끝이 찢어져 열상을 입은 듯
아직도 방울 방울 피가 새어 나왔다. 거기에 아환이 토해낸 탁한 유백색의 체액이 어우러져
추상적인 모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동그렇게 아직 모양을 유지한채 벌름거리며 원형으로 되
돌아가려는 비처의 입술들..
씨익..만족스로운 웃음을 지으며 아환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옆에 놓여 있는
다른 천으로 자신의 남근을 쓱쓱 닦고는 침상 밑으로 내려왔다. 힐끗 유가형을 한번 더 쳐
다 보더니 아환은 발을 옮겨 방을 나섰다.
아환은 옆방에 들어서자 침상위에 누워있는 두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석영과 악서령이었다.
둘은 각각 다른 이유로 누워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다. 석영은 쇄심절독
에 중독된 상태이고 악서령은 미혼약에 취한 상태였다.
아환은 가까이 다가가서 두 여자를 살펴 보았다. 제일 먼저 아환의 뇌리 속에 떠오르는 생
각은 '예쁘다는 것'이었다. 악서령이 비록 면사를 쓰고 있다하지만 수차례의 자신과의 정사
를 통하여 그 전신 구석 구석을 알고 있었고 또 천향매화라 불리우며 사화 중 그 미모가 으
뜸이라는 평을 받는 만큼 면사로 눈 아래 부분이 가려진다 하여도 화려한 느낌이 전해져 왔
다. 그에 반해 석영은 눈꼬리가 다소 위로 올라갔지만 그게 오히려 도발적인 매혹을 뿜어
대는 악서령과는 다른 매력을 흘러 내고 있었다. 비록 쇄심절독에 중독이 되어 창백하게 안
색이 변해져 있지만 다른 꽃들과는 달리 노르스름한 피부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잠시 두 여인의 미모에 멍해있던 아환은 정신을 추스르고 기억을 되살리며 자신의 약지를
입안에 가져갔다.
'네가 복용한 음양신단은 천고의 명약으로 천하의 극음 극양의 기물들을 모아 제조한 것이
라 하였다. 차후 네가 이 음양신단을 완전히 용해한다면 그 약효의 끝이 어딘지 알 수가 없
구나.' 비왕 사부의 말이었다.
'당신의 체내에는 음양이기가 휘돌고 있어요. 당신이 만약 분심의 계열의 기공을 익힌다면
음양의 이기로 인하여 당신은 내공에 있어서는 대성을 할 수 있을지 몰라요.'
검후 조설하가 아환의 체내에 흐르는 진기를 짚어 보고는 했던 말이었다.
아환은 체내에 아직 용해되지 않은 음양신단의 일부를 가지고 있었고, 또 양의심공이라는
분심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기공도 가지고 있었다. 아환은 체내의 진기를 운용하여 아직
체내에서 녹지 않고 있는 음양신단의 약정(藥精)을 강제로 떼어내었다. 극히 일부를 떼어낸
후 아환은 진기로 그 것을 조심조심 운용하여 손끝에 모아넣었다.
아환은 한 손으로는 석영의 입을 벌리고 다른 한손은 이로 물어 뜯어 피를 내게 한후 석영
의 입에 그 흘려낸 피를 가져다 대었다. 일반 피는 붉을 진대 지금 아환의 손끝에 맺혀 있
는 피는 은은한 금광(金光)이 섞여있는 핏색을 띄고 있었다.
아환은 혈금색의 피를 석영의 입에 떨어뜨렸다. 두어방울의 피가 떨어진후 아환의 핏색은
다시 붉게 변하였다. 아환은 그제서야 손을 떼었다. 그러더니 석영의 몸을 일으켜 세우곤 상
의를 위로 올린 후 그 허리부근에 있는 명문혈에 장심을 가져다 댄 후 진기를 운용하였다.
무상심결의 회자결을 운용하여 진기를 주입한 후 자신이 금방 주입한 피에서 생성되어지는
음양의 기운을 감지하였다. 얼마간의 진기가 주입되고 석영의 경락에 들어가 그 길을 타고
돌더니 이내 그 기운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환은 체내의 음양이기를 일으켜서 그 기운과 융화를 시킨후 석영의 체내를 순환시켰다.
그런후 쇄심절독이라 추정되는 독기운을 찾아나섰다. 명색이 의가의 후손이며 각성을 하여
인간과 무예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지라 어렵지 않게 이질적인 기운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독기운은 그 이름에 걸맞게 석영의 뇌호혈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유가형이 복용시킨
영약에 밀려 갇혀 있는 듯 보였지만 점차 그 기운을 극히 조금이나마 번지게 하고 있는 중
이었다.
아환은 진기를 뇌호혈에 밀어 넣은 다음 그 기운으로 석영의 혈도에 잠복해 있는 독기운을
감싸고는 천천히 경맥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시전자나 시술자
둘다 위험하기에 약간씩 약간씩 그 기운을 이동시켰다. 그렇게 진기를 쏟아 붓고 있는 아환
의 이마에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하나 둘 맺히고는 방울지어 흘러내렸다. 전신에서도 땀이
배어나와 구리빛의 육체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아환은 그 기운을 겨우 석영의 코근처로 밀어놓고는 음양의 이기를 충돌시켰다. 순간적으
로 음양의 기운이 충돌하자 기화(氣火)가 일어나 독기운을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그러면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석영의 콧속에서 피어올라 대기속으로 사라졌다.
"휴~"
아환이 손을 거두고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제 체내의 독기운은 제거한 상태. 얼마 있지
않아 석영은 정상으로 돌아오리라 그전에 아환은 해야할 일이 있었다.
아환은 진기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황제의를 일으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런후 아환은
제령심안의 구결을 읊으며 체내의 기운을 순환시켰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아환은 손
을 뻗어 석영의 뇌호혈을 가볍게 쳤다. 그리곤 석영을 돌려 놓아 자신을 바라보는 위치로
놓았다.
"으..음.."
석영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손끝이 움찔거리며 몸이 미세하게 진동을 하였다. 아환이
그러한 석영의 팔의 맥을 잡은 후 슬쩍 진기를 불어 넣자 어렵게 석영의 눈이 뜨여졌다. 제
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의 검은 동자가 아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은 자의로 반은
타으로 인하여 깨어진 석영의 이성이 초점을 잃고는 흔들렸다.
그순간,
아환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변하였다. 예전에 동굴속에서 누나라고 불리운 여인의 정신을
장악할 때보다 훨씬 강렬한 붉은 빛이 석영의 눈동자에 그대로 내리 꽂혔다. 그러자 석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며 석영의 몸이 극렬하게 진동을 하였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석
영의 몸이 다시 평온하여진다. 그런 석영의 눈은 아환의 눈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아환의
혈광이 번뜩이는 눈과 유사한 연한 핏빛의 광채를 뿌리며 아환의 눈과 마주쳐 있었다.
"나는 너의 주인이다."
저 아득한 유부에서 흘러 나오는 듯 낮게 가라앉은 아환의 음성이 석영의 뇌리속을 파고
들어갔다. 부르르 전신의 몸을 떨던 석영,
"당신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일정한 음색으로 아환의 말에 대답을 한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주관한다. 네 희, 노, 애, 락, 오, 욕, 비 의 칠정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주인이다."
"당신은 저의 절대적인 주인이십니다."
아환이 말을 하면 석영이 따라 하기를 몇차례, 아환은 계속해서 자신이 석영의 주관자임을
주입시켰고 석영은 그 말에 앵무새처럼 대답을 하였다.
'과연 당철의의 말이 맞았군. 쇄심절독은 그 약효로 인하여 극히 적은 양이 투입될 경우 이
지를 잃는 다는 말이 정말이었군..'
얼마간 그렇게 말을 주고 받더니 아환은 전신이 땀으로 홍건히 젖은 채 제령심안을 거두었
다. 그러자 무너지듯 그 자리에 엎어지는 혈장미 석영. 아환은 석영의 옷을 매만져 처음과
같이 입혀 놓고는 두 여자를 양 옆에 끼고 방을 나서 옆 방, 유가형이 누워있는 방으로 다
시금 이동하였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44번째 올림 창작야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짧은 생각에 의한 경솔한 행동으로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하신 듯 합니다. 다들 수라기
를 어여삐 봐주셔서 따뜻한 애정을 보내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다시금 드리고 보다 수라기의 구성에 힘쓰겠습니다.
(5)
"흐으음.."
들릴 듯 말 듯한 아주 조그마한 신음성이 적막을 헤치며 객실 안을 조용히 울렸다. 캄캄한
어두움이 점령하고 있어 사물의 윤곽 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공간 안에서 여인의 것이라 추
정되는 신음성이 울려 퍼졌다.
번쩍!
순간적으로 암흑을 걷어내는 두개의 강렬한 빛. 나란히 붙어 있는 두 빛이 순간적으로 객
실을 밝혔다가 이내 스러졌다. 그 공간의 안, 네 사람이 보였다. 한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
자. 남자 하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세 여자는 모두 침상에 누워 있었다. 신음성은 그 침상
위에 누워있는 여자 중의 하나로부터 새어나왔고 강렬한 신광은 사내에게서 뻗어 나왔다.
아환은 귓가에 신음성이 들리자 마침 내기의 전신 소주천을 마치고 눈을 떴다. 화경에 올
라 있는 절정의 내력을 가지고 있는 고수답게 두 눈에서 뻗쳐나가는 안광도 예사롭지 않았
다. 신광은 방안을 일시적으로 비추며 세 여인의 모습을 잠시나마 보여 주었다.
말그대로 하나의 옷가지도 걸치지 않고 교접의 흔적이 적나라한 채 널부러져 있는 유가형.
두 다리사이의 비처는 피에 범벅이 된채 침상보를 더럽히고 있었고 이제 출혈은 더 이상 없
는 듯 피가 음모와 비처 여기저기에 엉겨붙어 다소 처참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다른 두 여자는 의복을 갖추어 입은 채 누워 있어 상대적으로 단아한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색다르게 뽐내고 있었다.
아환은 두 여자를 데리고 와서 침상에 눕혀 놓고는 진기를 이용하여 유가형의 상세를 어느
정도 어루만져 주었다. 아환이 익힌 무상심결 자체가 무공의 원리의 극에 다다른지라 다른
무공과 융화하는데 무리가 없어 아환은 유가형의 체내에 진기를 불어 넣어 내상의 치유를
도왔다.
당철의의 목을 베고 세 여자를 데리고 온지도 두시진 가량의 시간이 흘러 얼마 있지 않으
면 동이 틀 시각이 다가왔다. 해가 뜨고 아침이 찾아 오면 필히 이 곳도 사람들이 찾아 올
터 아환은 서둘러 일의 마무리를 져야 했다. 그러던 중에 유가형이 깨어날려고 하는 것이다.
아환은 호롱불의 불을 켰다. 그러자 희미한 불빛이 은은히 퍼져 객실 안의 구석 구석까지
미약하나마 윤곽을 보여 주게 하였다.
아환은 유가형쪽을 바라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화사람은 악서령보다 덜하고 도발적
인 매력은 석영에 못미치지만 계속 접할수록 그 아름다움이 배가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
마 내미지상의 특성이리라. 성녀(聖女)라는 호칭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유가형의 평소 풍겨
나오는 분위기 보다는 유가형이 강호를 행보하면서 수많은 환자들의 병을 치료하고 없는 자
들에게 동정을 베풀어 얻은 별호이니 만큼 유가형의 얼굴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다른 두 여
자에 비해 특이한 미모는 없었다. 단지 익숙한 아름다움이 전신에 배어 있다고 할까?
눈주위가 파르르 살며시 떨림을 보였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위로 올라가는 눈꺼풀. 그 안에
보이는 까만 눈동자와 조화를 이루는 하얀 자위가 살짝 드러났다. 얼굴이 천장을 향해 있는
지라 눈을 뜬 유가형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설은 객점의 천장이었다. 얼른 상황이 인식되지
않은 유가형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자 한쪽은 벽, 다른 한쪽
에는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것이 느껴지고 순간 어제 저녁의 일이 생각이 떠올랐다.
유가형은 얼굴색이 획 변한 채로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아윽!"
찢어지는 날카로운 비명이 짧게 터져 나왔다. 아예 아래가 헤집어 발겨진 극렬한 아픔이
밑에서부터 올라와 전신을 휘감았다. 몸이 웅크려지고 갸녀린 두 손이 비소를 가리며 머리
가 크게 도리질 쳐졌다.
"아악..아..아흑..하아하아.."
몸이 움직이면서 욱씬거리는 작열감이 증폭되었고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새로는 가쁜 숨과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이 배어나왔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인 유가형의 두 눈에 자신의 유방
이 보였다. 맨살의 젖가슴. 여기저기 붉고 푸른 자국이 남아 있는 속살과 그 끝에 매달려 수
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유실이 보였다. 그 주위에 남아 있는 치흔..
재녀로 손꼽히는 유가형이 아닌 일반 여염집 여자라 할지라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으리라. 유가형의 아래에 엉켜 붙은 핏자국과 비처에서 울려퍼지는 아픔, 전
신의 자국 등은 유가형에게 자신이 순결을 상실하였음을 증명하여 주었다.
또르르르..
고운 봉목에 물방울이 맺힌다 싶더니 이내 눈가를 타고 주르르 흘러 내렸다. 상실의 슬픔
일까? 아련한 슬픔이 동공에 맺혀 있다. 그러한 그녀에게 느껴지는 낯설은 느낌. 다른 사람
이 기척이, 기도가 느껴졌다. 희미한 불빛과 그렁그렁한 눈물로 춧점이 잡히지 않은 그녀의
눈으로 정확한 사물의 윤곽을 구별할 수 없지만 유가형은 그 존재가 당철의라 생각하는 지
당철의의 이름을 불렀다.
"당..당철의..당소협인가요?"
"..."
그 사람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이제..이제는 만족한 가요? 그렇게 해서 나를, 우리를 취하여서 만족한가요?"
유가형의 음성이 고조되어 갔다. 절절한 슬픔과 분노가 배어 있는 음색이 현 유가형의 심
정을 말해 주었다.
"정말..정말..흐흑.."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유가형. 그런 그녀의 귓속으로 들려오는 별
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는 무심한 목소리..
"당철의는 죽었소."
화들짝!
유가형이 눈물이 맺혀 있는 눈을 급히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대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손을 들어 눈주위에 달려 있는 물방울을 닦아 내고는 다시금 그 쪽, 말을 한 사람을 쳐다
보았다. 이불을 뒤짚어쓰듯 발가벗겨진 여체를 가렸다.
"당신은..그.."
갑작스러운 여러 사건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아환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더듬거리는 유
가형의 귓가에 아환의 말이 들려 왔다.
"주환입니다. 상태는 좀 어떠하신지요?"
"주환..주소협이셨군요. 당철의는.."
"죽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도 비열한 행동을 하는 지라 제가 베었습니다."
"주소협께서요? 그럼.."
"예. 제가 했습니다."
"그러면..그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누가 자신을 취하였는지, 누가 삼화를 여기에 데려온 것인지
물어 보고 싶지만 어찌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말할 수 있으랴? 유가형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안색을 붉힌 채로 말끝을 흐렸다.
아환은 눈치가 없는지 그러한 유가형의 의도를 모르는 듯 반문을 하였다.
"예?"
"저..그것이..누가 우리를.."
"아!"
그제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는 듯 아환은 탄성을 터뜨리면 말을 덧붙였다.
"제가 여러 여협들을 이 곳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그리고 또..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그럼 주 소협이신가요?"
아환이 눈을 들어 유가형의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한다.
"예. 상태가 너무 급박한 듯 해서.."
"아아.."
유가형이 탄식을 터뜨렸다. 살며시 감겨지는 두 눈. 당철의가 아님에 안도의 뜻일까? 아니
면 다른 사내와 정혼을 한 입장에서 순결을 잃게 되어 비애에 젖어 흘리는 탄성일까? 그러
한 유가형의 심정을 모르는 지 아환의 말이 그녀의 속마음을 긁었다.
"강호의 여협들은 세속의 예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어 벌
어진 일입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제 입은 무겁습니다.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유가형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 뜨여졌다. 그 속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답답함과 분노, 그
리고 복잡한 여려 감정이 섞여 있어 혼란스러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그렇다고 진실이 묻혀질까요?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그
렇다고..흐흑.."
따지는 듯한 어투로 아환을 향해 말을 쏘아대던 유가형이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답답하리라. 현실이 현실같지 않고 꿈이기만을 바랄 것이리라. 아니, 어제의 시간이라는 것
이 유가형의 삶에서 사라지기를 바랄 것이리라. 유가형의 울음이 점점 그 강도를 더해 갔다.
서러운 마음이 그 울음에 녹아서 흘렀다.
오히려 머쓱해진 것은 아환이었다. 아환은 처음부터 유가형이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유
가형의 내심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칫하여 얽매이거나 주(主)를 유가
형이 쥐는 것은 아환 자신에게 있어 차후에 불리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환은 담담히 이
상황을 넘어가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유소저. 소생은..소생은.."
"흑흑...흐으윽.."
아환은 입을 다물고 유가형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침잠된 두 눈은 그러면서도 유가형의
몸짓하나, 자그마한 움직임 하나를 세세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무언가 노리는 게 있는지
눈이 반짝이는 아환.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유가형의 울음이 잦아졌다.
"유소저."
".."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리며 아환을 쳐다보는 유가형. 슬픔과 또다른 무엇이 혼재된 눈빛이
아환의 눈에 아로 맺혔다.
"소생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소생은 어떻게 해야 할지..감히 제가.."
아환을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유가형을 바라보는 것마저도 송구스러운 듯이
유가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머리를 내려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러한 모습을 보
는 유가형의 심정은 혼란스럽게 변하였다. 어쩔 것인가? 이 사람을 탓할 것도 아니었다.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나? 모든 것이 당철의가 행한 비열한 짓으로 인하여 벌어진 일이었
다. 그렇지만..그렇지만..
"주소협."
"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답을 하는 아환의 모습이 유가형의 동공에 맺혔다. 유가형에게 그러
한 아환의 모습은 참 순수하게 다가왔다. 진실되게도 느껴졌다. 이미 엎질러진 물, 유가형에
게 아환의 그러한 모습이 더없이 살갑게 여겨질 수 없었다. 게다가 유가형의 평소 모습으로
는 이런 몸으로 남궁비의 정혼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유가형은 아
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아환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령매하고는 어떠한 관계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과연 재녀는 재녀.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상황을 고려하여 말을 이어가려는 모습이 하나하
나 묻어 나왔다.
"악소저 말입니까?"
"예. 악서령, 령매 말이예요."
"저와 악소저는 이미 깊은 사이입니다."
말은 맞다. 시비와 주인사이지만 성(性)의 노리개로서, 이후의 미래에 있어서 자신에게 긍
정적인 역할을 할 대상으로서 악서령은 아환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 대답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아환에게서 그 대답을 듣게 된 유가형의 심장은 크나큰 돌이 떨
어지는 것처럼 내려 앉았다. 하얀 얼굴이 희미한 불빛 아래서 더더욱 창백하게 변하였다.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전신에 오한이 찾아왔다.
"그러면..그러면..흑.."
여심은 정녕 알기 힘든 것일까? 얼마 전까지 유가형은 사내라고는 오직 하나, 자신의 정혼
자인 남궁비외에 다른 남정네는 생각지도 못하였었다. 다른 사람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리라
고도 생각지 못하였고, 아니 그러한 가능성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여
기었었다. 허나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진 것을..순종하는 여인의 미덕을 최우선으로 교
육받은 유가형에게 있어서 자신의 몸을 가져간 사내는 절대적인 의미 였다. 그런 남자가 다
른 여자가 있다고 한다. 자신이 아닌, 그것도 세인이 평하는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을 바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아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자신이
거절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는 결국 꺾여진 꽃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
지 접어들게 하였다.
"나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어찌해야 좋을지..."
아환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유가형은 갑자기 이 사내가 새록새록 다가옴을 느꼈다. 순수한
사내같았다. 정말 악서령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것 같아 악서령이 부러웠다. 그러나 자신이
의매로 여기는 사람의 정인을 뱃을 수는 없는 일. 유가형의 눈에 맺힌 눈물이 그 크기를 더
해가고 어깨의 들썩임이 커졌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아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숱한 생각을 했지만 아환은 태연한
척 그러면서도 유가형의 눈빛에 부담스러운척 눈길을 외면하면서 방을 나섰다. 그런 아환의
등뒤로 발가벗은 몸을 가린채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는 유가형을 뒤로 하고는
아환은 후원의 마당쪽 정원으로 나갔다.
유가형은 얼마간 울다가 그치고는 찬찬히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객실안의
익숙지 않은 정경이 눈에 들어 왔다. 악서령의 모습이 보이고 석영이 보였다. 그제서야 석영
이 쇄심절독에 중독되었고 악서령이 미혼약을 들이킨 어제의 정황이 기억속에 되살아 났다.
유가형은 급히 손을 뻗어 석영의 맥을 짚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맥을 짚은 두 손가락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발가 벗은 나체를 가린 천을 움켜 잡은 손을 그대로 두고 다른 손으로 석
영을 진맥하던 유가형의 아미가 가운데로 모이는듯 살폿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을 반짝뜨고
는 석영의 감긴 눈을 열고 그 눈자위를 들여다 보았다.
"어떻게..어떻게..독기운이 체내에서 감지되지가 않는 단 말인가? 그리고 이 체내를 휘감아
돌고 있는 이 기이한 음양의 기운은 무엇일까? 영매는 음양계열의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으
로 알고 있는데..혹시..?"
자신이 기억을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기운이 뇌호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혼절을 했다고 하지만 그 시각은 불과 두세시진 남짓한 시간, 아직 해가 뜨
지 않은 시각임을 볼 때 누군가가 석영의 상세를 치유하였음을 알아채었다.
"누굴까? 누가 강호의 일절인 당가의 독을 이다지도 깨끗하게 해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주 소협? 그가 했을까? 그가 영매에게 영악을 복용시켰다면 왜 그는 자신과 연분이 있는
악서령을 먼저 치유하지 않은 것일까?"
유가형은 아환이 나간 방문쪽을 쳐다 보며 상념에 잠겼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내, 단
지 악서령과 어떤 관계가 있을 거라 추측하고 있었지만 그 사내와 관계를 갖게 될 줄은 생
각지도 못하였었다. 그와 몇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었는데..
유가형은 아직 자신이 발가 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옷가지를 챙겨입으려 몸을 일으켰
다.
"아흑.."
그순간 수없이 많은 바늘로 하체를 찔러대는 작열감에 비명을 흘리며 손으로 아래를 감싸
쥐었다. 조심조심 손을 떼고 비처를 살펴 보았다. 처참하였다. 핏덩이가 살갖과 음모에 엉겨
붙어 있었고 거기에 사내의 체액으로 보이는 희끄무레한 것들이 말라서 누르스름한 자국을
만들었다. 의예에 있어 강호의 일절로 손꼽히는 그녀인지라 그 것이 단순히 처녀혈이 아닌
파열상을 입은 결과임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상세를 치유해야겠지만 일단 자신의 몸을 씻는 것이 더 급했다. 온몸에 남아 있는 욕망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그렇다고 지난 밤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만 될 것 같았다. 일어서지 못하고 거의 기다시피하여 유가형은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한걸음 한걸음 떼어내는 것이 어찌 이리 힘든지..다리가 교차할때마다 비소가 마찰되어 극심
한 아픔이 찾아 오자 할 수 없이 다리를 벌려 엉기적 거리는 걸음으로 유가형은 욕실에 들
어갔다.
간신히 욕실의 한구석에 주저 앉은 유가형은 이미 물이 식어 차디찬 물 밖에 남아 있지 않
았지만 힘겹게 물을 세분(洗盆)에 받아 몸을 닦아내기 시작하였다. 얼굴을 씻고 몸을 씻고
팔 다리를 씻어 내렸다. 갸녀린 손으로 처음에는 살며시 피부의 오물을 제거하고 몸에 말라
붙어 있는 각종 피와 체액을 닦아내었다. 비처에 차가운 물기가 닿자 쓰라린 아픔이 다시금
전해져 왔다. 눈물이 덩그러히 맺힐 정도로 아팠다. 어렵게 어렵게 씻은 다음 음부를 자세히
살폈다. 아랫부위의 입술가가 위 아래로 얼마간 찢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온통 멍이
들었는지 원래의 음순의 색보다 진한 붉은 반점이 여기 저기 새겨진 것을 보았다.
급기야 유가형의 눈물에서 눈물이 한방울 똑 떨어지더니 이내 줄기를 만들어 뺨위를 타고
턱에 고였다. 유가형의 아름다운 육체를 닦던 교수에 힘이 들어갔다. 피부를 벗겨낼 듯이 거
세게 몸을 닦았다. 발간 손자국을 온몸 곳곳에 남기며 유가형은 초점잃은 눈을 욕실의 한쪽
벽에 고정시키며 그 고혹적인 몸을 세차게 문질러 대었다. 턱에서 한방울 한방울의 물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환은 객실을 나와서 후원의 마당을 거닐다 이제 푸르스름한 대기의 빛깔을 보고는 머지
않아 아침이 올것임에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하나 있음을 깨닫고 급히 발을 객점 안으로
옮겼다. 동이 트고 아침이 찾아오면 곧 이 객잔은 여러 사람으로 분주해 지리라. 그렇다면
이층에 남아 있는 당철의의 시신과 핏자국 등으로 인하여 불편한 일이 발생할 수 있기에 아
환은 서둘러 그 것을 정리하려 객점으로 들어갔다.
객점에 올라가 이층에 올라간 아환은 흠칫 놀라며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한 자리, 이층의
중앙의 한 자리에 한 사람이 계단 쪽에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머리의 모양, 그리고 머
리에 장식한 장신구와 체격으로 보아 젊은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마시는
지 손이 주기적으로 얼굴 부근에 다가가곤 다시 내려갔다.
아환은 일순 다음 행동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자리에 서서 그 여자를 쳐다 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객실의 전경이 차츰 들어 왔다.
깨끗했다.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제 저녁의 혁사락이 나타나기 전의 객실
그대로 였다. 바닥에 홍건했던 핏자국은 흔적조차 없었으며 당철의의 수급과 그의 주검은
종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잘 정돈되어 있는 객점의 탁자와 의자와 각종 집기들이 오히려 아
환에게 있어 이질감을 자아내었다.
그때 그 여자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꽤 오래의 시간
이 지난 듯이 느껴지는 여인의 작은 동작.
"안녕하세요. 전 제갈수란이라고 해요."
[ 창작] 수라기(獸羅記) 45번째 올림 창작야설
(6)
현기가 서려있는 두개의 영롱한 보석이 아환을 쳐다 보고 있었다. 눈아래부분은 악서령과
마찬가지로 면사로 가려져 있어 그 윤곽 정도 밖에 보이지 않으나 그린 듯 가늘고 선명한
눈썹과 아름다운 봉목만으로도 능히 절세라 할 수 있는 매혹을 자아내었다.
스스로를 제갈수란이라 말한 여인은 청초해 보이면서도 밝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눈주위가
살짝 접혀 웃음을 짓고 있다. 다른 삼화와는 또다른 미모. 제갈수란은 연남빛 궁장을 입고서
그 깊은 눈으로 아환을 쳐다 보며 앉아 있었다.
아환이 선 자세 그대로 멍하니 있자 제갈수란의 눈이 더더욱 접혀졌다. 아마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듯 제갈수란은 고와보이는 두 눈으로 무언의 미소를 보냈다.
"공자의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아환은 황급히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주환이라 하오."
"주공자셨군요. 만나뵈어서 기쁘네요. 이리로 앉으시겠어요?"
제갈수란이 일어서서 자신의 앞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뭐에 홀린 것처럼 아환은 눈을 제
갈수란에게서 떼지 못한 채 발을 옮겨서 제갈수란의 앞자리에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아환
이 자리에 앉자 제갈수란 역시 그 자리에 도톰한 둔부를 얹었다. 워낙 아환의 체격이 큰지
라 앉아있을때에 제갈수란과 거의 눈높이를 같이 하였었는데 자리에 앉자 제갈수란은 아환
을 쳐다볼 때 고개를 쳐들어야만 했다.
"정말 장대한 체격이시군요. 군살도 없고. 혹시 외가계열의 무공을 익히셨나요?"
아환은 체구가 매우 컸고 몸에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양쪽 관자놀이 부위가 불룩 솟
아있어 누가 봐도 외가 무예의 고수라 생각되는 그런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굳이 자신이
내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없기에 아환은 그 말에 긍정을 하였다.
"그렇소."
"내공은 전혀 익히지 않으셨나요?"
"그걸 대답해야 하오?"
"아! 아니예요. 다만 궁금해서..주 공자."
"소생은 공자가 아니오."
"그런가요? 그 호칭이 싫다고 하시니 소협이라 불러도 괜찮겠죠?"
"그러시오."
"좋아요. 주소협. 소협이 천수독룡 당철의를 베었나요?"
아환의 눈속에 제갈수란의 눈빛이 예리하게 파고 들었다. 그 눈빛에 아환은 자신의 속마음
을 샅샅히 파헤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깊고 맑은 눈빛은 아환의 모든 것을 알고 아환에게
진실을 말할 것을 강요하는 듯 했다.
'이 여인은 도대체...'
아환은 그 눈속으로 몸을 집어 넣을 듯이 잠시 마주보고 있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소. 내가 했소."
"그렇군요."
"알고 있지 않았소?"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소."
"느낌? 느낌이라..호호호.."
아환의 말을 반복하다가는 돌연 고개를 쳐들고 크게 교소를 터뜨렸다. 꺄르르 웃는 웃음이
무척이나 밝고 상큼한 기분을 아환에게 가져다 주었다. 제갈수란의 이름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분위기였지만 제갈수란이 보였던 행동과는 잘 어울렸다.
"그건 그렇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언니들과는 좋은 시간을 가지셨나요?"
흠칫,
아환은 제갈수란의 질문에 일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좋은 시간이라니..이 여자는
내가 유가형과 관계를 가진 것을 안단 말인가?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제갈수란이 이
장내의 소란을 정리하였다면 주변도 틀림없이 살펴 보았을 것이다. 후원의 객실도 물론 왔
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석영의 심지를 제압한 것도
보았을까? 유가형의 대화도 들었을까?
아환은 제갈수란을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무심한 듯 하지만 이글거리는 안광이 그 눈속에
서 일렁였다. 제갈수란은 그러한 아환의 눈빛을 예의 그 현유한 봉목으로 부드럽게 받아 넘
기며 말을 이어 갔다.
"어머! 뭘 그렇게 쳐다 보시나요? 아! 걱정마세요. 저는 남녀간의 일을 숨어서 지켜보는 취
미는 없어요."
"다 알고 있군."
"예. 제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객잔 밖에 몇몇의 사람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했지
요. 사람들에게서 유명사신의 말을 듣고는 많이 놀랬어요. 한참을 밖에서 기다리다가 객점
안에서 더 이상 소란이 없자 들어와 본거죠. 그리곤 목이 없는 주검을 하나 보았구요. 그 다
음은 말씀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소저가 객점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은거요?"
"예. 너무 어지럽혀져 있더군요. 소녀가 세가의 사람들을 시켜서 객점을 정리 하였어요."
아환은 겉으로는 평온하였지만 속으로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이런..이런..또 이와 같은 실수를..'
아환은 세 여자를 챙기면서 크게 두가지 실수를 행하였음을 알았다. 하나는 이 곳이 사화
지연이 벌어지는 곳이니 만큼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을텐데 당철의와 어지럽혀진 장내
를 그대로 방치한 것과 주변의 경게를 소홀히 한점을 알고는 아직 스스로의 경혐의 부족을
탓하였다. 그래도 이 여자가 그의 실수를 바로 처리하여 일의 확산을 막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고맙소. 소저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뭘요. 다 저의 할일인데요."
"소저의 할일? 무슨 뜻이요?"
"소녀는 일찍이 천문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어요. 그래서 약간이나마 천기를 읽을 수 있지요.
그런데 어느 날인지 소녀의 눈에 기이한 천기가 읽혔어요."
"그게 무엇이요?"
"무림사화라 평함을 받는 여인들의 운명이 기이하게 한 사내와 얽혀있다는 것을 보았지요.
저는 처음에 제가 잘못 보았는 줄 알았어요. 그럴리가 없었거든요. 사화가 한남자와 연을 맺
는 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수차례 반복되어 점을 쳐봐도 결과는 매번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고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였지요. 무림사화가 칠룡에 속한 남자들과 연문
이 있지만 실지 정혼을 한 사람은 한명, 난화성녀 유언니 뿐이었지요. 만검창룡 남궁비 정도
면 충분히 그럴 능력도 있고 또 그리 될지도 몰랐으니까요. 저도 남궁소협을 많이 생각하고
있었지요."
"..."
"허나 거기에 정말 뜻하지 않은 변수 하나를 최근에 알기 전까지 그와 같은 일이 실현될 듯
했는데 그 돌발상황이 그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말해 주었지요."
"그 돌발상황이란 것이 무어요? 그리고 왜 그것을 나에게 이렇게 설명을 해주는 거요?"
"결국은 하나로 귀일되는 것이니까요. 유언니는 소협이 취하였고 따라서 남궁비에게 갈 수
없게 되었지요. 유명사신이나 당소협이 손을 나누었는데 화산의 목소협이 모습을 모습을 드
러내지 않았다는 것은 그 누가 목소협을 대신하여 악언니를 모시고 온 것이라 여기어지는데
여기에 보이는 사람은 주소협 당신이지요. 그렇다면 악언니와 당신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지요. 또 당철의, 당소협이 죽었어요. 나중에 유언니에게서 인과관계를 들어야
정확히 알겠지만 아직 이 곳에 강한 독으로 추정되는 독물의 흔적이 남아 있고 당소협이 그
독을 시전한 것으로 보아지는데 석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대
충 추리하게 되네요. 만약 그 것이 당소협의 손에 해를 입은 것이라면 석언니의 성격상 당
문과 사이가 별로 좋지않아 질 것이고 또 은원을 분명히 하는 석언니인만큼 어떠한 형태로
든 당신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하겠죠. 이렇게 되면 당신은 삼화를 취하게 되는 것이네요. 제
말이 틀렸나요?"
또박또박 한자한자 말을 뱉어내는 자태가 아름답지만 그보다 순간적인 경황 파악에 뛰어나
다는 것이 아환으로 하여금 더 경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거기다가 어느새 아환을 당신이라
호칭하고 있었다.
"과연..지혜로서는 으뜸이라 말하더니만.."
"과찬이예요. 그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 말에 잘못된 것이 있나요?"
"없소. 석소저는 당철의의 쇄심절독에 중독이 되어 정신을 잃은 거요."
"쇄심절독이라 하셨나요? 지금."
"그렇소. 나는 잘 모르지만 유소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만큼 틀림없을 거요."
현기증이 나는지 교수를 들어 이마에 가져다 대는 제갈수란, 그 밝은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만큼 쇄심절독이 뜻하는 바가 크고 심각하였다. 눈을 내리깔고 잠깐의 시간을 그렇게 있
던 제갈수란은 이내 머리를 쳐들고 원래의 발랄한 분위기를 회복하면서 아환을 쳐다보며 싱
긋 웃음을 짓는다.
"..."
"이제 소녀도 당신에게 가야하는 것인가요?"
"그게 무슨 말이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무림사화가 한 남자와 얽혀있는 운명이라고.."
"그건 말도 안되오. 소저와는 오늘 처음 보았잖소. 이전까지 일면식도 없는 남녀가 어찌 그
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소?"
"그러니까 남녀의 관계지요. 변화무쌍한 것이 남녀관계예요. 호호호..경험도 없는 제가 아는
척 했네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될 수가 있겠소?"
"그것은 나중에 가봐야 알죠. 오! 이제 해가 떠 오르려 하네요. 새로운 아침이네요. 물론 이
아침이 정말 새로운 언니들이 따로 있겠지만.."
막 해가 뜨고 있었다. 이제 아침이 찾아오리라. 얼마 있지 않아 사람들이 이 객잔으로 찾아
오고 이 곳은 또 금방 번접해질 것이다.
"내일이예요."
"무어가 내일이라는 말이요?"
"여기에 제가 왜 왔는지 모르진 않으시겠죠?"
"그야 사화지연 때문에..아! 그렇군. 사화지연이 내일이군."
"예. 내일이 사화지연이지요. 제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아 이상하지만 지금 현 무림에서 사
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지요. 사화의 배경도 무시 못하지만 게다가 칠룡과 알게
모르게 연관이 지어져 있다는 것은 사화와 칠룡의 관계로 인하여 무림의 판도가 기울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허나.."
"허나 뭐요?"
"당신이 모든 것을 통째로 뒤흔들어 버렸어요. 사화를 몽땅 가져가고 게다가 칠룡의 하나인
당철의를 베었으니 사화지연과 함께 당신의 이름이 사해를 진동할 꺼에요."
"제갈소저와 난 아무 관계도 아니잖소? 또 운이 좋아 당철의를 기습하여 벨 수 있었을 뿐이
오."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아직 충분히 당신을 알지 못하지만 절정에 다다른 무위를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또하나, 왜 우리가 아무런 관계가 아니죠? 어쩌면 저의 부
군이 되실지도 모르는데.."
"허! 어이가 없군."
"깊이 생각지 마세요. 아! 저기 언니들이 나오시네요. 여기예요."
아환이 무의식적으로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막 이층으
로 올라오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유가형, 악서령, 석영 세 여인이었다. 악서령이야 단순
히 미혼약에 당한 것이어서 정신을 차리고 유가형이 주는 환약을 하나 복용한 후 운기를 하
니 씻은 듯이 모든 독기가 사라졌으나 다른 두 여인은 아직 여독과 내상의 여파때문인지 창
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은 두말할 나위없는 유가형이었다.
정신적, 육체적인 충격으로 인하여 아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어색한 걸음을 떼어 놓고
있었다. 의가의 여인인지라 자신의 체내의 상처와 그 대처법을 잘 알기에 치료를 하고 내기
를 순환시켜 내상과 기혈, 경락을 원활하게 시켰지만 외상의 통증은 그와 별개로 유가형의
등에 식은땀을 흘러내리게 하였다. 지금도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한걸음씩 내딛는 중이었다.
그에 비해 석영은 다소 창백하지만 아환이 독성을 음양이기로 소멸시킨지라 체내의 독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쇄심절독에 당한 후 바로 상세를 치유하지 않아 약간의 독기운에
뇌의 혈맥이 침범을 입었고 그 상태에서 아환의 제령심안에 심령이 제압당하여 머리가 혼란
스러웠다. 일정시간이 지난 후에는 쇄심절독으로 인한 상처는 치유되겠지만 아환의 제령심
안의 기억은 석영이 죽지 않는 한 그녀의 뇌리를 지배할 것이었다.
악서령과 석영은 유가형을 사이에 두고 악서령이 부축하여 어렵게 어렵게 제갈수란과 아환
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오더니 인사를 하였다.
"주소협, 구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소협이 아니었으면 소녀, 어이 없는 일을 당할 지도 몰랐
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먼저 악서령이 예를 취하며 주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면사를 벗은 맨 얼굴을 드러
낸 악서령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객잔 안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별말씀을..그나저나 옥체는 별 이상이 없으신지요?"
"예. 염려 덕분에.."
"유가형이 주소협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에 비해 유가형은 얼굴이 굳은 채로 아환에게 살짝 목례로 짧은 인사를 하고는 제갈수란
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야, 란매."
"예, 언니. 벌써 반년이 흘렀네요. 언니는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요."
"아하..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헝크러진 삶이거늘.."
제갈수란의 일상적인 인사에 유가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제갈수란의 말이 꼭 남자를 알
아서 여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었다. 자학하는 심정으로 탄식을 터뜨리는 유가
형의 모습에 제갈수란이 되려 당황스러웠다. 결코 그런 의도가 아닌 말이었는데..
"어머! 란매. 이게 얼마만이야..잘 지냈어? 더 예뻐졌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악서령이 나서서 예의 그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두 여자 사이에서 제
갈수란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예. 악언니는 정말 너무 아름다우세요."
서로간에 아름다움을 치켜 올리는 것이 사화의 기본적인 인사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자리
를 잡고 앉아 한동안 서로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재잘거리던 경국지색의 미녀들은 아환
이 옆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환을 외면한 채 대화를 나누었다. 그 중 유가형은 마음
이 불편한지 별로 말을 하지 않다가 어쩌다 한마디씩 하고 주로 악서령과 제갈수란 둘이 말
을 주고 받았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악서령이 문득 생각이 난듯 유가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참, 언니. 영아는 언제 정신을 제대로 차린 다고 하였어요?"
"글쎄..아마 한 두 시진 안에 정신을 차릴 게야. 휴..저 모양이니.."
유가형이 악서령의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다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서 안스러운 눈빛으로
멍하니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을 하고서 먼곳을 응시하는 석영을 쳐다 보았다. 그러자 악서
령과 제갈수란도 같은 뜻을 담고 석영을 안스럽게 응시하였다.
"그래도 다행이예요. 꽤 무서운 독이라고 들었는데 두시진 정도면 정신을 차린다고 하니까
요. 게다가 몸안의 독성은 다 없어졌다면서요? 유언니."
"응. 정신을 차리고 운기를 하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한 일주야간 요상을 하면 예와 다
름없을 정도로 건강을 되찾을거야."
"정말 큰일날 뻔 했어요. 그래도 유언니가 계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어휴.."
악서령이 생각만해도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 조차
화사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천향매화.
"내가 한 일은 별로 없어. 나도 그것에 관해 주소협께 말씀을 드릴려고 하는 참인데..주소
협?"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석영이 정신을 잃은 동안 어떤 영약을 복용시키셨어요?"
"영약이요? 아! 예."
과연 난화성녀 유가형이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떤 귀한 영약인데 그 무서운 쇄..음..그 독을 해독할 수 있었던 거죠?"
쇄심절독이라는 악명을 입에 올림으로서 그 여파가 적지 않다 생각하는 유가형이 말을 슬
쩍 돌렸다.
"제가 아는 어떤 고인꼐서 혹시 모를 위급한 상황에 사용하라 주신 환단입니다. 음양환이라
고 말씀하시던데..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고인께서 당신을 만났다는 말씀을 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고인에 대한 설명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셨군요. 영매는 기연을 얻었네. 그 음양환이라는 이름의 영약은 몇번 들어보았지만 아
마 영매가 복용한 환약은 고절한 의가의 고인이 제조한 것이라 생각되는 군요. 그러한 영약
을 아낌없이 남을 위해 쓰시다니..소녀 유가형이 주소협께 깊은 감사를 드려요."
"별말씀을..다 석영소저와 연이 닿은 영약이었나 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석소저가 쾌유될
수 있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유가형은 아환의 마음씀씀이가 훌륭하다 여기고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상당 부분 풀어졌
다. 한쪽의 제갈수란은 '음양환'이라는 말이 나왔을때부터 눈이 반짝이더니 둘이 서로 칭찬
과 사양을 반복하자 슬쩍 말을 끼어 들었다.
"혹시 그 음양환을 또 갖고 계세요?"
"아니요. 제갈소저. 고인께서 하나만 주셨소. 그 귀한 영약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
잖소?"
"그건 그렇죠. 흐음.."
또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곰곰히 생각에 빠지는 제갈수란..
곧이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객점 안에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아마 아침식
사를 하기 위하여, 또는 어제의 유명사신과 무림사화등의 모습을 보기위하여 중인들이 객점
으로 찾아오는듯 싶었다. 그 중에는 어제 도망갔던 객점의 주인과 점소이들이 끼어 있는 것
이 보여 얼마 있지 않아 이 객점은 어제와 마찬가지의 왁자지껄한 모습을 되찾았다.
(7)
암흑이 내려 앉았다. 낮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많은 구름이 끼어 있어 밤이 되자 그나마 빛
을 보이던 별들과 달이 구름에 가려 유난히 어두운 밤이 찾아 왔다. 왁자지쩔하던 거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대부분의 집들이 잠자리에 들었는지 불빛마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퇴색한 빛을 내는 작은 등잔불이 어스름하게 작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탁한 그을음이
피어 오르는 것으로 보아 그리 질이 좋지 않은 기름을 쓰는 것 같았다. 사물의 윤곽을 구별
하기엔 어렵지 않은 밝기는 가지고 있었다.
일반 가정의 내실 같지는 않아 보이는 방, 침상이나 탁자, 그리고 옷장 하나가 달랑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류급의 객점 안의 방인 듯 싶었다. 침상은 나무로 되어 있는 무늬하나, 장식
품하나 없는 말그대로 잠을 자기 위한 장소였다.
아환은 침상위에서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있지만 잠을 자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한 팔을 머리뒤로 돌려 머리를 받치고 있었으며 다른 한 손은 침상위
의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벌거벗은 상체가 이불의 밖에 나와 있어 그의 탄탄한 가슴을
흐릿한 불빛 속에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런데 하나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다. 다름아닌 아환이 덮고 있는 이불이 불룩 솟아 있다
는 것이었다. 아환이 무릎을 세운다 하더라도 그런 정도로 솟을 수는 없을 터 무언가가 그
속에 들어 있음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리 크지 않은 움직임이지만 그 이불 뭉치는 끊임없
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아 있는 어떤 동물 등의 생물체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
다. 그 꿈틀거림은 아환의 하반신, 그 중에서도 낭심부위에서 집중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아환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고 있었다. 어떨 때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가 때로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그러다가 평온한 안색을 취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한 아환의 변화는 이불
뭉치가 움직일때마다 같이 바뀌고 있었다.
그러는 중,
똑똑..
아주 미약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끼이익..
아환의 말에 문이 살며시 열리고 한 사람이 그 문을 열고 들어 왔다. 하얀 천을 두른 여인,
면사로 가려진 얼굴의 윗부분에 보이는 고혹적인 눈매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악서령은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 닫은 후 아환의 부근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아환의
침상을 보고는 발을 그 자리에 멈추었다. 이불 속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깨달은 악서령은
발을 멈추고는 아환의 얼굴을 슬며시 보았다.
"벗어."
악서령은 다시 한번 눈길을 침상의 이불로 가져가더니 몸을 두른 천을 놓았다. 그러자 스
르르 하얀 천이 몸의 선을 따라 흘러 내렸다. 목까지 가리고 있던 하얀 천이 내려 오면서
가느다란 목의 선을, 그리고 유연한 어깨의 선을 타고 흐르다가 봉긋한 가슴에서 잠시 멈추
는가 싶더니 매끈한 배를 순식간에 지나 두덩부위를 드러내고는 이내 소담스러운 수풀이 덮
인 비처를 지나 발밑에 깔렸다.
'용(用)'
선명한 붉은 낙인이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그 모양을 확연히 보여 주었다. 그 아래의 비림
은 그 양은 많지 않아 붉은 속살은 은은히 보여주고 있었다. 한발은 들어 올려 바닥의 천에
서 몸을 빼내면서 언뜻 내비치는 일그러진 음순의 모습. 두 발을 빼어 내고는 걸음을 옮겨
아환의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 출렁이는 젖가슴, 모양을 잃지 않은 풍만한 유방이 한발 한발
뗄때마다 그 매혹적인 여체의 미를 보여 주었다.
아환의 앞에 서서 면사를 떼어내고는 다소곳이 서서 아환의 명령을 기다리는 악서령. 아환
의 눈에 희미한 열정이 보였다. 그 눈에 천향매화의 나신이 비추어졌다. 아환은 머리를 받치
고 있던 손을 뻗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한발 더 아환에게 다가서는 악서령의 모습을
보고는 아환은 손을 악서령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리곤 가볍게 악서령의 솟아오른 젖가슴
을 움켜쥐었다.
곱게 찡그려지는 악서령의 아미가 아환에게 가학적인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아환은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더해갔다. 허연 살덩이가 아환의 손에서 그 모양이 변형되고 있었다. 아환의
커다란 손에 쥐어진 악서령의 보드라운 살덩이가 손가락의 틈으로 삐져 나오고 붉게 그 손
자국을 가슴에 남기고 있었다.
"하아.."
달뜬 숨이 배어 나왔다. 눈을 반쯤 감은 악서령의 눈에 비쳐 나오는 미묘한 열기. 익숙한
고통이었고 그 고통을 쾌락으로 변하는 방법을 아는 모양인 듯 아환의 손아귀에 가슴이 잡
혀 어느 정도의 통증을 느낄 텐데도 악서령의 고운 미안에서는 아픔의 기색보다는 흥분의
기미가 보였다.
아환이 침상의 이불 속에 들어 있던 손을 빼어내며 이불을 걷었다. 천천히 이불이 젖혀지
며 그 속의 광경이 그리 밝지 않은 호롱불 아래 서서히 드러났다. 희끄무레한 물체가 그 속
에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 매끄러운 곡선이 둥그런 모양을 지으며 위로 솟아 있었고 그
끝에 있는 검은 실타래 같은 뭉치, 사람의 머릿결이었다.
악서령이 문득 침상의 이불이 젖혀지는 것을 보고는 슬쩍 그 쪽으로 눈을 돌리다가 눈을
크게 뜨고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맞은 모양이었다. 악서
령의 눈에 피어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사그라 들었다.
악서령의 눈에 들어온 모습, 아환의 하반신에 붙어 있던 여인은 다름 아닌 석영, 혈장미 였
다. 그 도도하고 곳곳하던 석영이 지금 자신의 육체를 취한 남자, 아환의 양물을 입에 물고
는 열심히 빨고 있던 것이었다. 기교는 전혀 모르는 지라 입술을 다물고 빨아댕기며 위아래
로 단순한 왕복을 할뿐 더 이상의 방법은 모르는 듯 했다. 악서령은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다른 창녀를 불렀거니 생각을 하였다.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일개 매춘부와 같은,
아니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하여야 할 자신이기에 하층계급이라 생각했던 창부를 보게 되었을
때 극도의 창피함을 느낄거라 생각했었다. 허나, 그 이불 속의 여인이 다름아닌 혈장미 석영
이라는 것을 알았을때에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두려움이 찾아왔다.
자신과 같이 무림사화에 속해 있는 혈장미 석영이 자신 못지 않은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였
을 때 동질감과 함께 스스로에게 안위 하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허나 이와 반대의 심정은
아환에 대한 공포였다. 천향매화도 모자라 혈장미까지 성노리개로 만드는 아환의 능력이 악
서령은 무서웠다. 평소에 남자를 보기를 흔한 동물을 보는 것처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석영
이 남자의 양물을 입에 물고 창녀처럼 행동하다니..그렇게 석영을 변하게한 아환이 두려웠
다.
"이리 가까이 와!"
아환이 그런 악서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악서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악서령이 주춤
거리자 아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보던 악서령은 황급히 아환의 곁에 다가가더
니 교수를 뻗어 석영이 잡고 있던 양물을 빼앗듯이 손에 쥐었다.
휘이익! 짜악!
"아흑.."
어느샌가 아환의 손에 가느다란 나무 회초리가 쥐어져 있었고 그 회초리가 조금 전 악서령
의 등에 작열했기에 소리가 났다. 금방 붉은 줄이 악서령의 등에 그어졌다. 피는 배어나지
않았지만 곧 새어나와 흐를 듯이 선명한 붉은 선이 악서령의 하얀 살결에 남겨졌다.
악서령은 석영을 밀어제치며 입을 아환의 남근에 가져가더니 그 끝을 입속에 집어 넣고는
한입 크게 빨아 당겼다. 아환의 눈주변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아환의 눈이 다시금 반쯤 감겼
다. 그러면서 아환의 손은 재차 휘둘려졌다.
휘잇..짝!
아환의 양물을 물고 있던 입이 강하게 조여졌다. 입에 담겨 있는 양물로 인하여 비명을 지
를 수 없지만 그 입모양에 의한 자극이 상당히 강렬하였는지라 아환은 강한 쾌감이 밀려 옴
을 느끼고는 가벼운 숨을 입으로 내뿜었다.
"석영. 이리 와!"
아환의 명령에 석영이 아환의 곁으로 다가갔다. 움직일듯 말 듯 흔들리는 젖가슴, 무공광이
라는 석영의 별명에 맞는 듯 전신에 상당히 근육이 발달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유방은 다른
삼화들보다는 크지 않았으나 그 탄력은 다른 여인들이 쫓지 못할만큼 압권이었다.
아환은 석영의 젖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고통에 석영의 아미가 곱게 찡그려졌
다.
"너는 이 고통도 쾌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환의 목소리가 기이한 울림을 보이며 석영의 귓가를 파고 들었다. 악서령은 아환의 양물
을 빨고 있느라 정신이 없는지라 미처 그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였으나 석영은 그 음성
이 귀에 들어오자 마자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고통에 일그러지던 눈살이 펴지고 점차 그 눈
에 열기가 피어 올랐다. 그리고는 오히려 유방을 아환의 손에 가까이 밀어 붙이며 적극적인
몸짓으로 그 손의 움직임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아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잔인한 미소, 쾌락과 가학이 뒤섞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악서령에게 나에게 하던 것처럼 해봐."
석영은 아환의 말이 끝나자 마자 눈을 빛내더니 몸을 일으켜서 악서령의 뒤로 몸을 가져갔
다. 그러더니 그 고운 손으로 악서령의 풍만한 둔부를 살짝 쥐고는 상체를 아래로 굽혔다.
그 석영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간 곳은 악서령의 둔부사이의 틈. 붉은 선의 자국이 아직 남
아 있는 악서령의 둔부 사이의 갈라진 틈에 얼굴을 가져간 석영이 혀를 내밀고는 악서령의
비처의 입술로 혀끝을 가져가더니 살짝 핥아 올렸다.
"우웁.."
아환의 양물을 물고 있는지라 새어나오는 신음을 흘리는 악서령, 그러면서 강하게 입을 조
이고는 아환의 살덩이를 물었다. 석영의 혀놀림이 시작되었다. 혀끝이 악서령의 비처의 곳곳
을 헤치며 악서령의 비부를 빨아 당겨 하얀 치아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때마다 몸을 뒤트
는 악서령, 그리고 그 움직임과 더불어 입의 모양이 기묘하게 변하였고 아환의 성감을 자극
하였다.
아환이 손을 뻗어 악서령의 머리채를 움켜잡고는 위로 치켜 올렸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육봉이 보였고 악서령의 입에서 길게 뻗어진 실 같은 물줄기가 아환의 육봉과 악서령의 붉
은 입술을 잇고 있었다.
"네 년도 석영의 비처를 똑같이 해라."
악서령은 몸을 돌려 드러 누워서 석영의 밑으로 들어가더니 석영의 비처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아무래도 악서령이 경험상으로는 앞섰다. 곧 석영의 음부를 살짝 손가락으로 매만
지다가 입을 벌리고는 당하게 석영의 음핵부위를 빨아대었다. 이미 강제된 쾌락으로 인하여
물기가 홍건한 석영의 비처가 악서령의 입술놀림에 더 큰 자극을 받아 애액을 토해내었다.
휘이잇..촥!
회초리가 석영의 등에 내리 꽂혔다. 하얀 살결에 빨간 금이 그어졌다. 전신을 아득하게 하
던 고통이 일순간 쾌감으로 변하였고 석영의 입의 움직임이, 손의 놀림이 빨라졌다. 손가락
으로 악서령의 비처의 음순을 잡아 당겼다가 살짝 꼬집고 입술로는 계속해서 악서령의 소담
스러운 수풀을 헤치며 더운 숨을 뿜어 대었다.
휫..차악..휘잇..짝..
아환의 손이 휘둘릴때마다 석영의 꿈틀거림은 더해가고 비처의 습기는 더욱 짙어졌다. 제
령심안에 의하여 아환이 주는 고통과 가학이 석영에게서는 지극한 열락으로 느껴졌기에 석
영은 회초리가 등에 작열하여 피멍을 새기고 있음에도 눈과 입, 전신에서 강렬한 열기를 발
산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아환은 매질을 하다가는 장대한 몸을 세워 석영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러
더니 빳빳이 선 자신의 양물의 끝을 석영의 비처에 맞추고는 단번에 밀어넣었다.
"아학..악..!"
첫경험, 그것도 일반 사내들보다 훨씬 큰 체격에 장대한 육봉에 몸을 꿰뚫린 석영은 일순
갸녀린 자신의 몸이 쪼개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래를 가득 메워 무언가가 자신을
부술듯이 밀고 들어 왔다. 악서령의 음핵을 물고 있던 입술이 순간 강하게 다물어지고 그
치아사이에 끼어 있던 악서령의 음핵에 거센 아픔과 함께 극도의 쾌락이 몰려왔다.
"아흑..아아...하악.."
"으웁...우후..아윽.."
이미 홍건히 젖어 사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서인지 악서령이나 유가형때보다는 훨
씬 용이하게 삽입이 이루어졌다. 부지불식간의 일이라 석영은 그 통증이 순식간에 전신을
관통하면서도 비부가 약간 찢어졌다는 느낌은 받지 못하였다. 그만큼 아환의 남근은 위용이
대단하였다.
아환의 육봉이 다시금 밖으로 빠져나왔다가 석영의 작은 교구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금
방 붉은 빛이 도는 액체가 석영의 비처에서 배어나왔다. 질펀한 습기에 희석이 되었지만 그
것이 처녀혈이라는 것은 분명하였다. 그 피에는 비열이 찢겨지며 새어나온 선혈도 섞여 있
었다.
아환의 허리가 석영의 도톰하고 풍만한 엉덩이에 부딪히면서 여체가 출렁였다. 석영의 몸
은 아환의 체중보다 훨씬 가벼웠기에 아환의 전신이 주는 묵중함에 석영의 몸이 튕겨지듯
움직였다. 어느새 석영은 악서령의 비처에서 입을 떼고 침상에 얼굴을 묻고는 아래에서 번
져오는 거센 쾌감과 비교할 수 없는 아픔에 신음을 흘려 대었다.
휘이...쫘아악..
아환이 손을 휘둘러 또 하나의 붉은 줄을 석영의 등에 새겼다. 그 순간 몸이 움찔대며 경
직하는 여체, 남근을 물고 있던 비순들이 강렬히 조여져 아환은 남근에 전해지는 압박감을
즐겼다.
촥..촤악..짜..악..
허리를 계속하여 앞뒤로 움직이면서 회초리를 계속하여 휘둘러 석영의 등을 온통 핏금으로
장식하는 아환, 그의 눈에 잔혹한 열기는 점점 그 농도가 짙어지고 움직임은 더더욱 빨라졌
다.
침상의 이불에 파묻힌 석영의 얼굴은 세차게 좌우로 도리질치며 혼미한 상태에서 잦아드는
통증과 열락에 몸부림쳤다. 등에 가득 새겨진 피멍도 아랫도리가 조금 파열되어 찾아오는
욱씬거림도 온통 혼재된 기이한 감각에 석영은 헤매이다가 급기야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혼절을 하였다.
"끄으.."
몇번을 더 진퇴운동을 하다가 석영이 정신을 잃은 것을 안 아환이 석영의 비처에서 양물을
빼어 내었다. 그러자 희붉은 애액의 실이 육봉의 끝, 귀두에서 비처까지 길게 연결하여 조금
전의 정황을 말해주었다.
그 밑, 점점히 붉은 액체로 더럽혀진 악서령은 지금까지의 관계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
었다. 한 손은 자신의 비열로 다른 한손은 젖가슴을 쓰다듬으며 혼자서 자위를 즐기며 쾌락
에 젖어 있다가 석영이 무너지며 자신의 얼굴 부위에 아랫도리를 밀어대자 피와 체액으로
인하여 고운 얼굴이 뒤범벅이 되버렸다.
아환은 석영의 다리를 잡고는 한쪽으로 석영의 교구를 치운다음 악서령의 머릿채를 붙잡고
일으키고는 뒤로 돌려세웠다. 그러자 악서령은 순순히 그 탐스러운 둔부를 아환의 눈 가까
이 밀어대며 곧이어 찾아올 충격을 기대하였다.
아환은 석영의 피와 애액으로 질척한 검붉은 살덩이를 단번에 악서령의 비처에 끝까지 집
어 넣었다. 이미 상당한 관계를 가진 악서령인지라 무리없이 아환의 장대한 육봉을 체내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뻑뻑하게 조이는 감촉이 남근을 통해 아환에게 전달되어 왔다.
"으윽..하아하아.."
악서령의 입에서 달뜬 숨이 배어 나왔다. 아환은 악서령의 둔부를 한손으로 잡고 허리를
맹렬히 돌진시켰다. 풍만한 젖가슴이 출렁였고 허연 엉덩이가 부들거렸다. 악서령의 아랫도
리는 석영의 피로 인하여 붉게 물들었고 홍건한 물기에 뒤섞였다.
출몰을 반복하던 육봉이 스르르 악서령의 비처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한동안의 열락에
빠져있다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는 악서령의 눈에 아환의 양물이 조금 위로 올라가 자신의
다른 구멍에 맞추어지는 것을 보고는 아름다운 봉목이 공포로 물들었다.
"꺄아악...아악..."
아환의 남근이 너무나 비좁은 악서령의 항문을 헤집고 그 일부가 들어갔다. 평소에 만지는
것조차도 금기시되고 불결하게 느껴졌던 곳에 아환의 거친 양물이 치고 들어오자 수치감과
고통,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기괴한 느낌에 악서령은 연신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아환은
동작을 멈추지 않고 악서령의 몸속에 자신의 실체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안ㄷ...아악..끄으.."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성이 악물은 악서령의 작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이불을 움
켜잡고 있는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항문은 파열되어 금방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환의 육봉이 두 구멍을 드나들면서 물기에 젖었다 하더라도 전혀 물기가 없던 생살을 찢
으며 들어가니 그 아픔이 오죽할까? 허나, 고통에 길들여진 슬픈 여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통증이 이성을 혼미하게 하는 쾌감으로 전환됨에 치를 떨었다.
아환의 물건이 악서령의 항문을 뚫으면서 그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아환의 손에 들려 있
던 예의 그 나무회초리가 다시금 춤을 추었다.
휘릿..쫘앗..차악..짝..
몸을 뒤틀면서 회초리의 고통에 벗어날려는 악서령의 매혹적인 교구가 아환의 흥분을 증폭
시켰다. 움찔거릴때마다 조여오는 감촉, 아환은 손으로 악서령의 둔부를 고정시키고는 거세
세 허리를 밀어 붙였다.
석영의 몸에 들어갔다가, 또 악서령의 비처로 삽입되어지고 급기야는 악서령의 항문마저
꿰뚫은 사내의 양물은 극도로 팽팽해지다가 마침내 그 정을 악서령의 내장 깊숙한 곳에 쏟
아 내었다.
"음.."
나직한 탄식과 함께 여운을 즐기는 아환의 허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얼굴을 침상에 묻고
전신에 기운이 빠져 있는 악서령의 화사한 육체가 아환의 몸이 자신에게서 이탈되자 그대로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그런 악서령의 뒤의 공혈은 조금전까지의 일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아직 원 모양을 찾지 못하고 둥그러이 벌어진채 피와 희끄무레한 정액을 울컥 울컥 토해
내었다.
아환은 방안에 가득한 기분좋은 천향매화의 육향을 맡으며 손을 뻗어 악서령의 머릿채를
움켜 잡더니 그 얼굴에 각종 피와 애액, 그리고 악서령의 직장에 있던 배설물로 지저분해진
남근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스르르 입을 벌리며 악서령은 그런 아환의 양물을 입에 물고는
혀와 입술로 깨끗이 그 양물을 닦아내었다. 비릿한 느낌과 자신의 배설물의 역겨운 냄새에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아내고는 뒤처리를 하고 그 오물들을 식도로 넘
겼다.
아환은 침상위에 느긋이 누워 있었다. 그 옆, 욕실에서 몸을 씻고 나왔는지 아까의 욕망의
찌꺼기를 닦아낸 악서령이 물수건으로 아환의 전신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러한 악서령의
등은 아까의 매로 인하여 그물처럼 얽힌 핏빛의 선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쪽 옆에는 석영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아까 자세 그대로 엎어져 있었고, 아환은 노곤함과 함께 배설
후의 여유를 즐겼다.
"사화지연은 어떻게 열리지?"
아환의 물음. 악서령은 아환의 몸을 다 닦은 후 석영의 몸을 닦다가 아환의 물음이 들려오
자 공손하게 그 질문에 대답을 하였다.
"사화지연은 특별히 그 형식은 없습니다. 주최자 임의의 형식으로 벌어지는 것이 관례지요,
이번은 남궁비와 유가형이 주관을 하니 그 둘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다만 하나, 굳어진
관례가 있는데 호화사(護花士)라는 것이지요.?"
"호화사?"
"예. 사화가 각기 한명의 남자 무인들을 선출하여 그 무예를 모인 군중 앞에서 시전하여 흥
을 돋구는 것이지요."
"호화사라..그럼 계집 너는 목영근을 호화사로 정했었나 보군."
"예."
"더 말해봐."
"일반적으로 호화사는 사화와 친분이 있는 남자 후지기수들이 맡고 있어요. 유가형은 남궁
비, 석영은 당철의, 그리고 제갈수란은 그때그때 호화사를 바꾸었었고, 저는 목영근을 선택
했었지요. 대부분 정혼자나 혼담이 오고가는 이들을 선택하였고 그 호화사들은 묻 군중들의
부러움을 샀지요."
악서령은 아환의 명에 따라 다른 사람을 호칭할 때 공자나, 언니, 소협등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 호오..그렇단 말이지.."
아환의 입에 뜻모를 웃음이 피어 올랐다.
"내일 오시경에 시작한다고 했지..악서령, 네 년은 나를 호화사로 지칭하라. 알았지?"
"예."
"흐음..호화사라.."
아환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고 그 속에서 기이한 빛이 새어나왔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46번째 올림 미지정
늦었습니다..꾸벅~
(8)
형산을 이루고 있는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인 선라봉의 초입,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
다. 때는 여름에 접어든지라 한낮에 내려쬐는 빛살의 열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보다 모인
군중들의 눈에 담겨 있는 열망이 훨씬 컸다. 사람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모여서 옆사람
과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한곳을 직시하며 기대가 서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군중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 거대한 원형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탁자의 주변에는 일
견해도 십여개를 웃도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위에는 온갖 산해진미와 각종 차와 술병
들이 가지런히 놓였고 수저와 호화스러운 접시가 의자 앞마다 정돈되어 곧 있을 연회를 예
비하는 듯 보였다..
점심무렵의 시간을 약간 지나쳤지만 군호들의 모습에서는 허기나 기타 식욕등이 보이질 않
았고 번뜩이는 시선마다 다른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십
의 장정과 여인들이 달라 붙어 자리를 꾸미고 요리를 하면서 몇시진 후에 있을 연회 준비에
전력을 기울여서 드디어 잔치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일반 서민이라면 시선이 거대한 대탁위의 음식, 요리나 호화스러운 집기에도 머물음직 하
지만 이 곳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은 이 화려하게 차려진 탁자위가 아닌 그
주변 의자였다. 각 의자마다 한 사람씩 단정히 앉아 있었고 군웅들은 선망과 질시, 그리고
욕망등이 뒤엉킨 눈빛으로 그 사람들을 쳐다 보고 있었다
"강호의 정의를 구현하는데 앞장서시는 무림의 군웅 앞에 소생 남궁비, 다섯번째 사화지연
이 형산에서 열림을 선언합니다. 사마외도가 창궐하는 어지러운 무림에 불철주야 중원 각지
에서 영웅들의 심혈을 기울인 노력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연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서는 초라한 음식이나마 즐기시고 서로간에 친목을 다지며 무림에 악의 무리들
이 발붙일 수 없게 심혈을 기울여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와아..!!"
"와!!.."
"우와아.."
"소생이 먼저 잔을 청하겠습니다."
"건배!"
"건배!"
"건배...."
상석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포권의 예를 주위에 하면서 사화지연의
개최를 알렸다. 그 사람, 하늘에서 내려온 천상의 미공자라 할까? 미남의 대명사격인 송옥이
나 반안도 저처럼 잘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정히 묶은 짙은 검은 머리를 영웅건으로
질끈 동여매고 머리를 뒤로 넘겼다. 원래 하얀 색으로 보이나 무예수련으로 인하여 태양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색의 남자. 계란형의 얼굴에 짙은 검미가 빛을 발하는 양쪽 눈위에 곧게
뻗어 있고 오똑하게 솟아 있는 콧날과 굳게 다물어진 두툼한 입술이 장부의 기개를 보여 주
었다.
목선을 타고 내려오다 볼록 튀어 나온 목젖이 보이고 그리 벌어지지 않았지만 단단해 보이
는 어깨, 하얀 백삼으로 가려진 체격은 볼 수 없었다. 또한 손에는 희디힌 장갑을 끼고 있어
크고 두툼한 손을 갖고 있었고 남궁비의 얼굴외에 다른 곳의 살갖은 외부에 나타나 있지 않
았다. 보통 사내보다 조금 큰 키, 거의 육척에 다다를 만큼의 신장을 한 칠룡 중의 으뜸이요
무림 후지기수 중의 선두라 평함을 받는 제왕지기의 소유자 만검창룡 남궁비, 그였다.
군중들은 남궁비가 일어서서 사화지연을 선포하자 함성으로 그 선언에 답을 하였다. 그들
에게 있어서 사화지연은 젊은 후지기수를 만나고 촉망받는 무림의 기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자리였기에 무림에 몸을 담은 젊은 남녀들은 하나같이 이 사화지연에 참가하기를 갈망
하였다. 그러나 칠룡의 출신 세력 중 칠룡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사화지연의 고고함을 강조
하면서 참가 자격을 제한하여 논란이 일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무림의 내노라하는 명문의 자
제나 이름 꽤나 날리는 후지기수 들만이 사화지연에 참가할 수 있었기에 이 사화지연에 오
지 못하는 이들은 이 사화지연을 갈망과 질투어린 눈길로 보곤 했다.
사람들은 남궁비의 짧고도 명확한 인삿말이 끝나자 주변에 놓여 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
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말을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시선을 줄곧 중앙의 탁자
에 던져 사화지연의 흐름을 파악하려 하였다.
남궁비가 자리에 앉자 그 탁자에 앉아 있는 이 들도 서로서로 잔을 들고는 건배를 하면서
음식을 들었다. 남궁비가 제일 윗쪽에 그 양쪽에는 유가형과 악서령이, 또 그 옆에는 제갈수
란과 석영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남궁공자. 그 동안 별고 없으셨어요? 선라현에 그 훤앙한 기태가 보이지 않아 소녀 걱정했
습니다."
"제갈 소저의 염려 덕분에 소생은 별 문제 없습니다. 다만.."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현 중원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 걱정이 됩니다. 민심이 흉흉하고 각지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국경 주변의 외세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지요. 어찌 될
려는지.."
"그렇지요. 남경의 곽자흥을 비롯하여 여러 반군 세력이 중원의 곳곳에서 원의 실정에 반기
를 들고 있지요. 어려운 세상입니다. 어찌될련지요..더군다나 낙양은.."
"자자! 그런 말씀은 그만 접고 오늘은 즐거운 날이지 않습니까? 사화지연 입니다. 기분 좋게
먹고 마십시다."
제갈수란과 남궁비의 대화가 점점 무게가 있는 쪽으로 기울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주위의
한 건장한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잔을 들고 건배를 청하였다. 그러자 제갈수란과 남궁
비도 같이 잔을 들고는 건배를 하였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가만히 앉아 있는 세 사람, 유가형과 악서령, 석영은 다소 안색이 변한
채 말없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홀짝이고 있었다. 유가형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는데
이는 아랫도리에서 전해오는 통증이 원인이겠지만 그보다는 심적인 고통이 더 심하였다. 정
혼자 옆에 앉아 뭇 사람들과 연회를 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순결을 잃어 이제 깨끗지 못한
몸이기에 남궁비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를 숙인채 맛도 느낄 수 없는 찻물만 입속
에 담을 뿐이었다. 이에 반해 석영과 악서령은 비처와 항문에서 전해져 오는 심한 고통에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는 악서령이 더욱 심했다. 작은 손가락하나 들어
가기에도 버거운 곳에 거대한 아환의 양물을 가득 담고 허리를 흔들어 대어 그 곳이 온통
찢어 발겨져 걸음을 옮기거나 자리에 앉아 움직일때면 아예 극심한 아픔에 아래가 감각이
없을 정도 였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창백하게 질린 채 의자에 앉아 있지만 악서령의 속마
음은 빨리 이 자리가 파하고 들어가서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객잔에 들어
가서도 쉴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석영은 비처의 작은 열상이 그리 아픈 정도는 아니었고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이유로 안색
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 역시 뜻밖의 위치에서 퍼져 가는 아픔이 있었다. 허나
이 아픔이 아환의 제령심안으로 인하여 쾌락으로 변질되어 있는 가운데 그 기이한 감정을
참느라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마음을 다스리지만 절대적인 존재로 인하여 느껴지는 열락은
그녀의 매력적인 얼굴을 붉은 기운이 감돌게 만들어 더더욱 고혹적인 석영의 미모를 돋보이
게 만들었고 주변의 젊은 후지기수들은 그런 그녀의 매력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까의 그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남궁비의 무언의 호응을 얻은 듯 자리에 일어선채 계속해
서 말을 이어갔다.
"사화지연을 축복하시려 참석해주신 여러 군호제위께 제가 감히 잔을 올립니다. 모든 분들
께서는 잔을 들어 제 오회의 사화지연을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와!"
"사화지연!! 영원하라!"
"우아아아!!"
그러자 군웅들은 저마다 잔을 들고 건장한 사내의 선창에 맞추어 술을 들이키고 호기있게
함성을 질러대었다.
"소생 황보두균은 오늘 이렇게 많은 여러분들 앞에서 건배를 청함을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습니다."
부리부리한 호목을 지닌 황보두균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청년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이 환성
을 지르고는 박수를 쳤다. 육척을 훨씬 넘어 남궁비보다 더 큰 체구를 가진 황보두균은 둥
그런 원탁에 남궁비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있는지라 곧장 정면에 보이는 남궁비를 향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남궁비에게 잔을 권하였다.
"헛헛헛! 그동안 못 본 사이에 남궁형은 신태가 더욱 헌앙해진듯 하오이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소제가 보기엔 황보형의 천왕권이 훨씬 무서워진듯 합니다만..얼마 전
잔혈사마를 훈계를 하셨다지요?"
"핫핫! 그 부끄러운 일이 남궁형의 귓전을 더럽히지는 않았는지 걱정됩니다. 어찌 남궁형의
그 고절한 제왕검에 빗댈수 있겠습니까?"
크게 대소를 터뜨리며 서로간에 칭찬을 해대고 있는 두사람, 그러나 그런 입의 놀림과는
달리 둘의 눈은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남궁비는 무심하지만 별다른 감정이 없는 눈으로
입만 웃고 있었고 황보두균 역시 눈은 차가운 안광이 번뜩이지만 겉으로는 영웅의 기개를
떨치려는 듯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오가(五家) 세싸움의 한 단면일까? 팽팽한 긴장감이
커다란 원탁을 맴돌고 있었다.
"남궁형, 소제의 잔을 한잔 받으시오."
잠자코 앉아서 간단히 요기를 하던 한 젊은 청라장삼의 청년이 남궁비에게 잔을 건네었다.
아마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려는지 밝은 음성으로 둘 사이를 갈랐다.
"허! 이거 소제가 먼저 수형께 드려야 하는데..감사하오이다. 그동안 곤륜제일룡께서 통 세간
에 그 위용을 보이지 않아 소제는 수형이 고심막측한 절예를 터득하시느라 폐관하신줄 알았
습니다."
곤륜제일룡 수가위, 현 칠룡 중 소림의 우성과 화산의 목영근과 더불어 구파 출신의 후지
기수. 곤륜 특유의 절묘하고 뛰어난 검예를 일절로 꼽는 곤륜의 속가제자는 준수한 외모를
지닌 다소 호리호리하게 보이는 체격을 지녔다. 속가라 할지라도 곤륜의 미래라 칭하며 곤
륜의 본산에서 수련을 닦는지라 평소에는 거의 강호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하였다.
"무슨 말씀을요, 소제는 곤륜에서 잡일만 하느라 바뻐서 미처 밖에 나서지 못한 것이지요.
일신의 재주가 미천한데 어찌 영웅들과 어깨를 견주겠습니까?"
"겸양을 말씀을..수형의 청수신검이 중원에 나올때면 사마외도들이 쥐구멍을 찾기 바쁘고 무
수한 소저들이 수형을 뵈려고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오늘 이처럼 수형이 강호에
그 준수한 신태를 드러내었으니 무림이 시끄럽겠소이다. 핫핫하!"
"하하..남궁형이야 말로 소제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소이다. 무림사화 중의 난화를 맞이하실
몸이 어찌 그런 말씀을..소제는 남궁형이 부럽소이다."
"그런가요? 핫핫하.."
둘이 그렇게 즐겁게 환담을 나누고 있을 때 이를 듣고 있는 유가형의 마음은 편치 못하였
다. 이미 몸은 아환에게 더럽혀진 상태..어찌 남궁비와의 관계가 화제에 오를 때 심기가 편
할 수 있으랴?
칠룡을 비롯한 남자 후지기수들이 왁자지껄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여인들은 그와
달랐다. 사화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밖의 다른 여인들, 무림의 후지기수 중 내노라하는 세도
를 지녔거나 얼굴이 반반하고 제법 무예를 익힌 여걸들은 남궁비를 비롯한 칠룡의 모습을
슬쩍 슬쩍 훔쳐 보며 얼굴이 붉어지거나 사화를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는
등 다채로운 반응을 보였다.
총 원탁에 앉아 있는 인물은 여덟, 다섯자리 정도가 공석으로 비어있었다. 칠룡 중의 셋과
무림사화 그리고 또다른 한명의 여인, 악서령과 같이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어 그 정확한
용모는 볼 수 없으나 백라의를 입은 채 현현한 광채를 빛내며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
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분산됨이 보였다. 처음에는 젊은 남자들이 사화에만 시선
을 집중하다가 그들과 같이 있는 또 한명의 여인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어떤 여인
이길래 무림의 후지기수 중의 최고라는 저들과 한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까?
그제서야 중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듯 그 옆에 앉아 있는 수가위가 깜빡 했다는 표정
으로 입을 열었다.
"허! 이거 소제가 큰 실례를 범했소이다. 이런..이런..소제가 여러분께 소개를 드린다는 것을
미처 잊었습니다. 양해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은 천우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상
상조차 하지 못했던 분을 뵙게 되다니..이 곳에 모인 영웅께서는 그야말로 행운이라 생각됩
니다. 참! 은소저, 소생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여인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수가위의 말을 받았다.
"은소저, 이 분은 칠룡 중의 일인인 만검창룡 남궁비, 이 분은 패왕권 황보두균, 이 소저는
난화성녀...."
기이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를 여인에게 먼저 소개하는 것이 관례라 할지라도 상대
는 다름아닌 칠룡, 무림의 최고라 칭함받는 사내들이었다. 게다가 사화 역시 무림의 으뜸이
라 칭함을 받는 여걸들이 아닌가? 깜빡했다 할지라도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가위가 아님을
이 곳에 모인 자들은 하나같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가위가 이런 소개순서
를 가지는 것에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군웅들은 수가위의 말에 남자는 포권을, 사화
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칠룡과 사화를 앉아 있는 여인에게 먼저 소개를 한 후 마침내 수가위가 입을 열었
다.
"감히 제가 소개를 드리는 이 분은 천궁에서 오신 분입니다."
"은아려라 합니다."
천궁!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인들의 안색이 일순 획 변하였다.
천궁(天宮)
신비사세의 으뜸이자 무림을 행보하는 이들에게 있어 전설적인 지역이며 세력으로 신선들
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 평가받는 곳. 한번 출현할때마다 강호가 경천동지한다고 일컬어지는
절대의 비세.
누가 무어라 한 사람도 없는데 순식간에 군중들을 뒤덮은 것은 거대한 침묵이었다. 누구하
나 입을 열지 못하고 경악한 기색으로 수가위가 소개한 여인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이는
비단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찬가지였다. 그 중 한명 만이 기이한 안광을 반짝이며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다름아닌 아환이었다.
'천궁? 천궁이라..천궁..전대 태상후가 설하였지..천궁이라..'
검후의 말로 자신이 천궁의 전대 태상후라 했었다. 그리고 그 밖에...
곧 중인들의 안색이 회복되고 차차 정신을 차리면서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처
음에는 나즈막하다가 이내 그 음파가 커지며 동요가 번져나갔다.
"천궁..그 신비의 세력이..?"
"천궁!"
"신비사세의 출현이다!"
"와!..."
그 이름이 가지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이 곳에 모인 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
다. 또한 천궁의 인물이 강호에 출현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풍파도 개중 몇몇은 짐작하고 있
었다. 놀란 기색은 칠룡과 사화도 마찬가지, 그 중 수가위를 제외한 남궁비와 황보두균, 그
리고 사화 중의 유가형, 악서령과 제갈수란은 눈을 크게 뜨고 천궁의 여인을 쳐다 보았다.
그들에게도 천궁이란 신비세력의 명호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중
원의 대표적인 후지기수라 평함을 받는 이들이라 곧 평정을 되찾았지만 내심 끊임없는 소용
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은소저, 소생 황보두균이 다시금 소저께 인사 드립니다. 전설로만 들었던 천궁의 귀인을 이
리 뵙게 되어 불초 소생의 영광입니다."
"별말씀을.."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채 허둥대며 인사를 하는 황보두균과는 달리 짧게 응대를 하는 은아
려라 하는 여인, 도도한 듯 하나 그 도도함이 오히려 은아려의 배경과 조화를 이루어 특이
한 매력을 자아내었다.
다른 한쪽에 앉아 있는 제갈수란은 눈을 빛내며 시선을 은아려에게 고정시킨채 가볍게 입
술을 물면서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다르게 유가형은 천궁이라는 이름에는
놀랐지만 이내 곧 남궁비에게 눈길을 돌려 복잡한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내었다.
"고귀하신 분께서 이 연회에 참석해 주심에 소생 남궁비는 깊으 감사를 드립니다. 과연 신
화적인 명성만큼 고절한 경지에 도달하신 듯 보입니다."
"그런가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의미를 가진 말로 대답을 하는 은아려, 조금의 변화도 없이 짧게
짧게 말을 끊었다. 상대가 칠룡과 사화라는 최고의 무림 후지기수임에도 조금의 거리낌이
없었고 이는 그 대답을 듣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충분히 오만할 수 있는, 넘치도록 도
도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었다.
칠룡이 인사를 하는 것과는 달리 처음에 목례를 보낸 것 이외에는 별다른 추가 인사를 하
지 않은 사화를 잠시 쳐다 보던 은아려는 이내 눈길을 거두고 담담히 남궁비와 황보두균을
훑어 보았다. 남궁비를 보고는 이채로운 안광을 빛내더니 곧 눈을 돌렸다.
주위의 많은 군웅들도 하나 같이 나서서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원탁에 둘러 앉아 있는 거
물들의 이름에 압도 당하여 수군거리며 서로간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 나서서 은
아려에게 인사를 건넨다면 자신도 나설 모양인지 힐끔 힐끔 주위만 신경쓰며 은아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지,
"계속 진행하시지요."
"예. 그러지요."
남궁비가 응대를 한 후 중인들을 바라보며 진기를 돋구어 말을 한다.
"오늘 사화지연에 귀인이 오셔서 이 자리를 빛내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여러 영웅께서는 더욱 즐겁게 연회를 즐겨주십시오."
"와!..."
"와.."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퍼지고 일시 중단되었던 술잔이 다시금 돌기 시작하였다. 웅성거림은
더욱 커지고 사람들의 목청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사람들의 전 신경은 오직 한 곳
에 집중되어 있음은 불문가지이리라..
""그런데 팽형과 당형, 화산의 목형이 보이질 않는 구료. 남궁형, 혹시 아시오?"
"글쎄요, 팽형은 얼마 전에 동생의 일 때문에 강서성에 간다고 하여 이번 사화지연에는 참
여하지 못한다는 기별이 왔긴 하오만 당형이나 목영근 형은 왜 참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
료."
남궁비가 말을 하면서 슬쩍 눈길을 악서령과 석영에게 보내었다. 목영근이야 자타가 공인
하는 천향매화와 관련이 있는 이요 지금까지 항상 같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라 악서령을
바라보는 것이고 혈장미는 당철의와 혼담이 오고 가고 수차례 같이 행보를 하는 것이 강호
에서는 잘 알려진 것이기에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가져 두 여인을 바라
보았다.
"목사형은 급한 일로 화산으로 돌아갔어요."
"잘 모르겠어요. 어디 있겠죠."
두 여자가 짧게 대답을 하고는 입을 다물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물어 보는 것
도 무엇하고 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는 둘은 더 이상 그에 관하여 언급을 하지 않았다.
몇순배의 술잔이 돌고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갈 즈음 군웅들 사이에서 소
리가 터져나왔다.
"호화사! 호화사를 선출하시오!"
"호화사, 호화사를 뽑읍시다. 올 호화사는 누구요?"
"우와! 남궁비!! 남궁비!."
"황보두균! 패왕권!"
칠룡과 사화, 그리고 천궁의 은아려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나름대로는 한가닥하는 무예를
가지고 있고 또 촉각을 원탁에 고정시킨지라 악서령과 석영의 말을 듣지 못할 까닭이 없었
다. 의아함은 사라지고 이어 떠오른 것은 호화사에 선출되는 젊은 후지기수였다. 그 중 제법
이름이 알려지고 한다 하는 이들은 목영근, 팽무, 당철의가 자리에 보이지 않음에 혹시 호화
사에 선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긴장한 채 원탁을 바라 보며 호화사를 목청 껏 소리
쳤다.
그러한 군중 들의 바람이 와 닿았는지 남궁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군웅들에게 일일히 포권
의 예를 취하였다.
"여러분의 열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어느 정도 분위기도 흥겨워 졌고 이제 호화사를 사화
께 청하려 합니다. 군웅들께서는 잠시 진정하시고 사화소저들께서 선정하는 호화사를 지켜
보아 주십시오."
남궁비가 침착하고도 분위기를 가라앉지 않게 예의 그 낭랑한 음성으로 선포를 하며 눈길
을 유가형에게 돌렸다.
허나, 중인들의 반응과는 달리 그 시선을 받은 유가형은 결코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쿵!
내심 큰 돌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호화사!, 말그대로 꽃을 수호하는 사람이다. 이는 화,
즉 자신을 지키는 다시 말하면 자신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유가형의 생각은 그랬
다. 그런 유가형이 어찌 호화사란 말에 안정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일, 아환과의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유가형은 호화사란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남궁비를 지목하고
남궁비 역시 호화사로 이 연회를 자신과 함께 즐길 것이지만 이미 순결을 잃은 유가형으로
서 태연히 그리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남궁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속이는 짓이기에..
머뭇거리는 유가형에게 주위의 시선이 무거운 압박을 가져왔다. 열리지 않는 입, 입술이 경
련을 일으켰다. 그렇지만..그렇지만..
"전..."
유가형의 입을 가까스로 떼었다. 그러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군웅들의 주의가 한꺼번에
자신에게 모아짐을 느끼고는 한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한사람을 쳐다 보았다. 아주 짧
은 순간 그를 쳐다 보다 다시 눈을 돌려 남궁비와 눈을 마주치다 눈을 내리 깔았다.
"소녀는..소녀는 호화사로..호화사로...호화사를..."
사람들의 긴장된 눈길이 강하게 와닿았다. 그를 전신으로 느끼며 유가형은 아랫입술을 질
끈 깨물었다.
"소녀는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겠습니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47번째 올림 창작야설
(9)
"소녀는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겠습니다."
쿵..
무언가 모를 기묘한 감정에 중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낯설음이라 할
까? 어색함이랄까? 당연히 벌어져야 할 일이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흐름에 당황한 군중들
은 일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군웅들은 멍하니 유가형을 쳐다 보고 있었고 고개를 곳곳이 세우고 또박 또박 말하던 유가
형의 머리는 어느새 조금씩 숙여져 이제 그 눈길을 아래로 하고는 땅바닥만 쳐다 보고 있었
다. 사람들의 시선의 무게가 무거운지 하이얀 얼굴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해져 있었다. 기실
누구보다 당황하고 놀라운 것은 남궁비였을텐데 오히려 그는 얼굴색이 한번 변했을뿐 그리
크게 놀란 기색이 아니었더. 허나, 은유한 그의 눈빛은 강한 섬광을 지속적으로 뿌려내며 유
가형을 빤히 바라 보고 있었다. 오히려 옆의 황보두균이나 수가위가 훨씬 경악하고 있었다.
곧 사람들이 정신이 돌아오고 예의 그 웅성거림이 들려 왔다.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는다니..?"
"남궁공자와 무슨 일이 있나?"
"그럼 남궁소협은 어찌 되는 거지?"
"난화성녀가 왜..?"
사람들은 이런 저런 상황을 만들어 내며 입방아를 찧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말의 흐름이
점점 비약적으로 변해가는 듯 싶자 얼른 제갈 수란이 나서서 그 허리를 끊었다.
"유언니는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는다 했어요. 그럼 다음에는 제가 호화사를 선정하지요. 전
호화사로 만검창룡 남궁소협을 선정하겠어요. 남궁소협, 제 호화사를 맡아 주시겠어요?"
"기꺼이.."
빙긋 웃으며 그 심유한 지혜가 가득한 눈으로 남궁비를 바라보며 제갈수란은 호화사를 청
했다. 그리고 남궁비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뒤를 이었다.
"호화사! 남궁비! 남궁비!"
"남궁비! 우와!"
그제서야 다른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지 군웅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환호
성을 지르며 계속해서 악서령과 석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악서령과 석영은 나름대로 혼
담이 오고가던 사람이 있었다. 화산의 목영근이나 당문의 당철의가 그들이었다. 허나 이 자
리에 보이지 않음에 사람들은 무언가 이어질 또다른 어긋남을 기대하는지 환호를 차차 가라
앉히고 사화 중의 천향매화와 혈장미의 입을 빤히 응시하였다.
사람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향함을 느끼자 두 여인이 별 고민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소녀 석영은 주환 소협을 호화사로 선정합니다."
"소녀 악서령은 주환 소협을 호화사로 선정합니다."
마치 한명이 말하듯 동시에 터져나온 말..자신의 이름만 틀렸지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은 문장이 사화 중의 두 여인의 아름다운 입에서 새어나왔다. 사전에 서로 입을 맞춘 것
처럼 한 목소리로 내뱉어진 말. 허나 사람들은 그 둘의 동시에 말한 것보다는 '주환'이라는
이름에 깜짝 놀랐다.
"주환? 주환이 누구지?"
"그런 사람도 있었나?"
"신진 고수인가?"
"세가의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주환이라는 자가 누구시오?"
두 여자를 빤히 응시하던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서로간에 정보를 교환하며 수군거렸다. 그
도 그럴 것이 사화가 무림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고 사화 중의 한명과 어떠한 관계를 가진
다는 것은 무림의 판세를 바꿀 수도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실제로 난화성녀와 남
궁세가의 정혼이나 혈장미와 당철의의 혼담등에 여타 제반 강호의 문파들은 촉각을 곤두세
우고 있었다. 남궁비와 난화성녀의 혼례로 인한 두 세력, 결코 만만하다고 할 수 없는 두 문
파의 결속은 힘의 균형을 자연스레 한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음이 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조금 다른 의미로 사천당가는 혈장미 석영과의 혼담을 주선한 것이 혈장미 석영의 배
경인 천외삼기의 후광을 얻기 위함이 강했다. 정파의 세력이라고는 하지만 그 태생의 한계,
즉 용독과 암기라는 외도쪽의 기공으로 명성을 얻은 사천 당가는 타 문파에 알게 모르게 배
척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천외삼기라는 전대의 거성을 끌어들여 보다 양지로 진출
하려는 계획이 있음을 많은 무림 세인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막을 명분
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비해 악서령이야 같은 화산 내의 관계라 별다른 말이 없었지
만...
중인들의 놀람은 계속 되어지고 주환이란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의혹이 점차 증폭이 되어
갔다. 그 중 성질이 급한 몇몇은 여인들에게 주환이 누구냐고 뒤에서 외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천향매화와 혈장미의 별빛같이 빛나는 눈동자가 한 곳을 향하였다. 그 눈이 가리키
는 방향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 끝엔 거대한 체구의 사내, 아환이 예의 그 시
커먼 묵도를 등에 메고 무심한 얼굴로 장내를 쳐다 보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처음 아환이 이 곳에 서서 사화지연을 쳐다 볼 때 왠 덩치만 큰 그냥 이
름모를 외가무사가 사화의 명성을 흠모하여 구경이나 하려 온자 인줄만 알았다. 허나 세인
들의 시선이 아환에게 모이자 반신반의 하면서 아환을 쳐다 보았다.
비단 주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남궁비를 비롯, 패왕권이나 곤륜제일룡 그리고 천궁의 여
인까지 형형히 안광을 빛내며 아환을 쳐다 보았다. 그들의 눈에 담겨진 내용은 가지각색이
었다. 의아함, 호기심, 어이없음, 질투, 당혹함, 흥미, 부러움 등등..
"내가 주환이오."
두툼한 입술이 열리고 구리빛으로 잘 그을려진 피부를 가진 장대한 거한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빤히 아환을 쳐다 보았다. 어찌 이런 외가무사 나
부랭이가 호화사가 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어색한 장내를 정리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갈수란이었다.
"주소협. 이리 나오세요. 이쪽 원탁으로 앉으시지요."
제갈수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를 들어 자리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자리는 비어
있는 자리이며 자신의 옆자리이기도 하였다. 제갈수란의 말이 끝나고 아환이 성큼성큼 큰
보폭을 옮겨 모임의 중심쪽으로 나아갔다. 바다가 갈라지듯 좌우로 물러서는 중인들..자신도
모를 위압감에 길을 터주고 넓은 주환의 등을 각양각색의 의미가 담긴 눈으로 응시하였다.
몇걸음 되지 않아 원탁에 도착한 아환은 손을 들어 포권의 예를 원탁의 다른 사람들에게
취했다.
"주환이라 하오."
워낙 큰 체구인지라 금새 앞이 꽉 막혀 있는 느낌이 들은 것은 원탁에 앉아 이쓴 사람들의
공통의 생각이었다. 아환의 예에 여인들은 가벼운 목례를 그리고 남자들은 마주 포권을 해
보였다.
"남궁비라 하오."
"곤륜의 수가위오."
단지 하나. 패왕권 황보두균은 아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할뿐 아환의 포권에 마주
답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아환의 출현으로 인하여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선라봉의 중턱에 모인
자들은 물령 오십을 넘어 꽤 무리지어 보였지만 누구하나 아환을 전에 알고 있던 이가 없었
기에 수군거리며 의견을 나누고 아환의 정체를 파악하려 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소란이 점
점 확대되고 웅성거림이 커지자 연회의 주최자인 남궁비가 나섰다.
"주형은 어디 출신이시오?"
"특별히 어디 출신이라 할 것도 없소. 어려서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다 보니.."
"사문(師門)이 어디시오?"
"꼭 밝혀야 하오?"
"그건 아니지만..허험.."
"그럼 말하지 않겠소."
아환의 거절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남궁비, 그보다 주변의 인물들이 더 놀라움을 보였다. 감
히 칠룡의 수좌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다니..개중 몇몇 칠룡의 이름에 질시와 시기를 하는
자들은 통쾌함이 엿보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의 안색에 떠오른 것은 노기(怒氣)였다.
"어디서 별 개뼉다귀 같은게 굴러와서는.."
굵은 음성, 이죽거리는 어투가 아환의 귓가에 들려왔다. 아환이 굳이 눈을 돌리지 않아도
그가 황보두균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칠룡과 사화를 비롯 무림의 명성을 날리는 후지기
수가 참여하는 자리에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이 호화사로 나타남에 심사가 튀틀린 모양새가
역력하였다.
아환의 그 말을 귓가로 흘려 듣고는 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의 앉은 자리는 제갈
수란과 황보두균의 가운데 즈음 사이에 빈 의자를 각각 하나씩 둔 자리였다. 정면으로 보이
는 상대는 천궁의 은아려라는 여인.
황보두균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붉어지며 막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고 할 때 남궁비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악소저, 석소저, 두분 소저들께서는 주형을 호화사로 선정하셨소이다. 그렇다면 두 분께서
는 주형을 보증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보증합니다."
"...예."
석영의 당돌한, 확신에 차있는 대답과는 달리 악서령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이미 석영의 뇌리 속에는 아환이라는 존재의 절대감이 확연히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지만
악서령은 아환에 대한 감정은 공포와 복종일 뿐이었다. 그외에는 아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게 전무하다시피 한 악서령이었다.
"그렇게 두분 소저가 보증하시는 주형께서는 호화사로 선정됨에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사
화지연의 호화사는 소생 남궁비와 주환, 주형 두분이 맡겠소이다."
여태까지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몇번 되지 않은 사화지연이지만 두 여인이
한명을 동시에 호화사로 정한 적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한 유가형이 호화사를 선정하지
않은 것도 기이한 일이었고 제갈수란이 남궁비를 호화사로 정한 것도 뜻밖의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전혀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주환이라는 인물자체가 중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
가 왔다.
"소생은 그 호화사를 인정할 수 없소이다."
붉 같은 음성이 들려 왔다. 황보두균이었다.
"소생은 이번 사화지연의 호화사를 인정 못하오이다."
"무슨 뜻이오? 황보형?"
"말 그대로요."
"황보형은 소생 남궁비를 부정하는 것이요?"
"그것이 아닌 것은 남궁형도 잘 알지 않소?"
"그렇다면 황보형은 사화지연의 관례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지금까지 사화지연의 관례는 사화가 선정하고 보증하는 자가 호화사로 정해짐에 누구 하나
불평을 하지 않았었다. 대부분 칠룡의 인물이 선정되었지만 혼담이 없는 제갈수란이 두어번
다른 인물을 호화사로 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갈수란이 선정한 호화사도 나름대로 혁혁
한 명성을 날리는 인물이었기에 사람들은 사화가 선정한 호화사에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았
었다. 그런데 이번 황보두균이 그런 관례에 제동을 건 것이었다.
"관례? 어디서 굴러 먹다온지도 모르는 것한테 무슨 관례요?"
"황보형, 말씀이 지나치시오."
"하나도 지나치지 않소."
보다 못한 수가위가 황보두균을 말려도 황보두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지 노골적인
적대감을 아환에게 보내고 있을 뿐. 그 바탕에는 자신 보다 못한 인물이 호화사로 선정된
것에 대한 불만과 남궁비에 대한 견제심이 작용을 한 것이리라.
"남궁형. 소생이 뭐 하나 물어 봐도 되겠소?"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던 아환이 남궁비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씀하시오. 주형."
"오늘 연회가 칠룡지연이오?"
짧은 질문. 그러나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그 의미는 지금 이
자리는 사화가 주체적인 자리이고 사화를 위한 자리이니 호화사로 끼지 못한 놈은 알아서
기라는 뜻이었다.
"물론 아니오. 그것 참.."
남궁비도 어이가 없어 그 준미한 얼굴로 아환을 빤히 쳐다 보며 할말을 잃었다. 그때였다.
"이 개뼉다귀 같은 놈! 감히 네 놈이 칠룡을 능멸하려 드느냐?"
시뻘개진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황보두균이 아환을 노려보며 외쳤다. 두 주먹을 불
끈 쥔채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황보두균, 시퍼런 안광이 줄기줄기 눈에
서 뻗어 나왔다.
"황보형! 무슨 짓이오. 즐거워야 할 연회에 어서 노기를 가라 앉히고 자리에 앉으시오."
남궁비가 황보두균을 향해 준엄한 말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였다. 그런대도 막무가내, 황
보두균은 아환을 향해 분노를 폭발시켰다.
"네 이놈! 네가 사내라면 이리 나와 나와 한번 손을 나눠 보자! 네 오늘 네놈의 실력이 어
디 그 혓바닥처럼 대단한지 한번 보리라."
아환이 눈을 돌려 황보두균을 정시하다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사이의 거리는 불과 반장여거리..황보두균의 체격도 무시 못할 거한인데 아환의 앞에 서
니 반뼘 정도가 작아 위축되어 보였다.
"뭐 어쩌자는 거요?"
"이 놈! 이 놈이.."
위압적인 아환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눌렸다 싶은지 황보두균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채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거센 기운을 코로 뿜어 대었다.
"에잇!"
휘잉..
바람을 세차게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황보두균의 주먹이 아환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건곤(乾坤)의 화(化)'
아환이 슬쩍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손바닥으로 주먹의 등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황보두균은
빗나간 주먹에 오히려 경력이 가해지면서 급격히 중심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신
형을 기울였다.
"으읏.."
이젠 분노에 수치감까지 더해졌다. 황보두균은 급기야 두 손에 진기를 운용하며 크게 한걸
음 땅을 딛고 주먹을 내질렀다.
쾅!
진각(振脚)! 땅이 울림과 함께 세차고 빠르게 정권이 뻗어왔다. 천왕출현의 초식, 황보세가
의 독문절학인 천왕권의 일초였다.
어느 새 아환도 원탁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자세를 잡고 황보두균의 주먹을 맞이 하였다.
아환은 천왕권의 일초를 흘리듯 가볍게 몸을 뒤로 빼내어 피하였다. 이어지는 천왕개산,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정권을 질렀다. 그리고는 양쪽으로 두팔을 찢어 내듯 쳐나갔다.
아환 역시 경시하지 못하고 보결을 밟으며 옆으로 돌아 나갔다. 그러면서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 양팔의 가운데로 쭉 뻗어 내었다. 풍영섬! 풍도십팔식의 제일초. 빠르게 내지르는
주먹이었다.
"으헛!"
아환이 피하나 싶더니 그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주먹에 황보두균은 헛바람을 들이 쉬며 뒤
로 물러서서 천황봉폐의 수법으로 양팔을 교차시켜 방어를 하였다. 사이에 들어온 육권이나
권각을 부러뜨리는 중수법. 아환은 유유히 팔을 빼내고는 별다른 초식이 아닌 뒤돌려차기로
발을 쭉 뒤로 내뻗었다.
퍽!
"우욱.."
양팔을 교차시키며 방어를 하던 차라 미처 두 팔을 제어하지 못하였고 또 그 팔에 시선이
가린지라 황보두균이 그 기세를 느꼈을때에는 이미 발의 날이 가슴어림부근이었다. 아환이
내공을 주입하지 않은 순수한 근력으로만 쳐낸 발차기 였지만 방어태세가 갖추어 지지 않은
황보두균인지라 입은 충격이 대단하여 몇걸음 뒤로 물러나 신음을 흘렸다.
원래 발차기는 발끝이나 옆날 등의 접점을 최소화하여 충격을 집중시키는게 일반적이지만
아환은 날을 세우다 발을 틀어 발바닥으로 황보두균의 가슴을 쳤다. 그 결과 황보두균의 흉
부에 발자국이 하나 남았다. 어제 저녁에 내린 비로 인하여 땅이 아직 젖은 상태라 그 자국
은 아주 뚜렷하였다.
뒤로 주춤 밀려난 황보두균은 가슴을 부여 잡으며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하였다. 그리 심한
내상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문득 시선이 맞은 자국으로 향한 황보두균의 눈에서 불똥
이 튀었다. 치욕! 바로 그것이었다.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남궁비를 비롯 사화나 천궁의 여자나 다른 이들은 전혀 이 싸움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숨소리 조차 죽여가며 둘의 대결을 지켜 보았다. 그 둘을 바라 보는
의미야 제각각이겠지만 어쨌든 세인들은 황보두균이 뒤로 물러나 자세를 다시 잡을때까지
일련의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 보았다.
대부분의 중원 무인들이 그러하듯 이들 역시 밥보다 싸움구경을 좋아하는 것이 보편적인지
라 집중을 하여 대결을 지켜 보았다. 그들 중에는 둘의 무공의 대결외에 주환의 정체와 칠
룡에 속한 황보두균의 무위를 견식한다는 기대감이 상당했었다. 그러나 몇합의 손속이 나누
어지고 황보두균이 뒤로 물러서자 이곳 저곳에서 놀람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칠룡의 하나를 뒤로 물러서게 하다니..."
"새로운 신진 고수의 출현이다!"
"황보두균이 무릎을 꿇는가?"
군웅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황보두균의 가슴을 후벼 파내었다. 조금전까지 자
신을 칭송하며 어찌하면 지신에게 말을 한마디 더 붙일까 하던 중인들이었다. 그런 인간들
이 자신이 조금 약세를 보였다 하여 저런 말을 지껄이다니..분노는 이내 그 방향을 틀어 아
환에게 향했다.
"네..놈! 과연 한가닥하는 수가 있었구나. 더 이상 손에 사정을 두지 않겠다."
황보두균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황보두균 역시 그 이름을 거저 얻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
이 여실히 드러났다. 마음을 가다듬고 내기를 서서히 끌어 올렸다. 꽉 움켜쥐었던 두 주먹이
약간 느슨히 풀리는 가 싶더니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는 가슴어림으로 손을 끌어 올렸다.
"천황출현!"
세차게 한마디 외치면서 크게 일보를 내딛고 정권을 쭉 뻗었다. 조금전과 똑 같은 초식, 그
러나 전혀 달랐다. 그속에 내포된 경력이 틀렸고 기세가 틀렸다. 일보를 내듣는다 싶더니 어
느새 일장여의 거리를 좁히고 황보두균의 커다란 권영이 아환에게 밀려왔다.
아환의 발이 기이한 방위를 밟으며 태극의 문양을 그리듯 몸이 둥글게 회전을 하였다. 태
극신보, 비왕으로부터 구결만 전해들은 상태에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 보결을 깨우친 아환
의 신형이 유유하게 권영을 흩뜨리며 원을 그렸다.
"터엇!"
황보두균은 정권을 회수함과 동시에 앞의 진각을 떨친 발을 축으로 순간적으로 천왕각을
떨쳐내었다. 천왕철각! 내기를 다리 전체에 집중시켜 마치 쇠몽둥이 같이 만들어 적을 공격
하는 수법. 아환은 거센 기세에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두 손을 교차하여 황보두균을 퉁겨내
었다.
"천왕패!"
튕겨 올라간 발의 탄력으로 황보두균이 중심을 잡고 있던 발을 치켜 들며 크게 회전을 그
리며 파각으로 아환의 머리 부분을 내려 찍었다. 아환은 슬쩍 몸을 틀어 뒤꿈치를 피하고는
빠른 보법을 이용하여 황보두균의 옆으로 돌아간 후 팔꿈치로 황보두균의 가슴부위를 연달
아 쳐대었다.
팍..팍..팍..팍..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는 황보두균, 두 손을 가슴에 대어 손바닥으로 연이은 아환의 팔꿈치
공격을 막았으나 그 경력에 대항하지 못하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 순식간에 십여합의 손을
나눈 상태, 상황은 명백히 아환의 우세였다.
"노오옴!"
황보두균이 이를 악물고 다시금 자세를 바로 해서 짓쳐들어갈려고 하는 순간 그를 뒤에서
잡는 손길이 있었다.
"황보형, 진정하시오."
[ 창작] 수라기(獸羅記) 48번째 올림 창작야설
(10)
원탁의 한 자리, 장대한 체격의 사내가 원독이 가득한 시선을 한곳으로 하여 자신보다 조
금 체구가 더 큰 사내를 노려 보고 있었다. 꽉 다물어진 입술이 씰룩이고 원탁위에 올려져
있는 두 주먹이 불끈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방이라도 노기가 폭발할 지경의
황보두균은 태연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아환의 행태가 이가 갈렸다.
남궁비와 수가위, 그리고 다른 이들의 제지로 인하여 접전은 일단락 되었다. 천궁의 귀인과
여러 영웅들이 모여 연회를 즐기는 자리이므로 분투를 자제해 달라는 말에 오히려 그 들앞
에서 수치를 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더더욱 들끓는지라 뿌리치고 아환에게 달려들고 싶었지
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섣불리 행동을 할 수도 없어 수긍을 하고 가슴팍에 발자국을 새긴 채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 앉았다.
그러한 황보두균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는 듯 남궁비가 일어나서 호기롭게 건배를 외쳤다.
"자! 오늘은 즐거운 날입니다. 모두들 잔을 들고 사화지연을 건배합시다."
"와..건배!"
"건배!"
중인들은 자신의 탁자에 놓인 잔을 일제히 집어들고 남궁비의 선창에 맞추어 잔을 들어 건
배를 외쳤다. 그러한 사람들의 눈가나 기타 얼굴 표정에는 조금 전의 결투가 싱겁게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인물에 대한 호기심등과 사화를 비롯한 여인들의 미모에 대한
감탄 및 욕정등이 뒤엉킨 가지각색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 원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새로 조정이 되었다. 남궁비와 악서령
사이에 아환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석영은 악서령의 옆에 있다가 자리를 바꾸어 유
가형과 제갈수란의 사이에 앉고 제갈수란의 옆에 은아려가 그리고 한자리를 건너서 수가위
가 앉고 또 사이에 자리를 두고 황보두균이 앉았다. 그리고 다시 그 방향으로 몇 개의 의자
를 지나 악서령이 다시금 위치하고..
태양혈이 불룩 솟은 외가의 무사를 경시하던 대부분 군중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아환과
남궁비가 자리한 상석쪽을 바라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근육질의 몸에 태양혈, 그리고 굳은
살이 잔뜩 배겨있는 손등으로 하찮은 외공을 익힌 그야말로 삼류 나부랭이 무사인줄만 알았
던 아환이 황보두균에 우세를 보이자 중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칠룡이라면 거의 화
경에 근접한 무위를 지닌 자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외가로 화경에 올랐다는
말인가?
무림 역사상 외공을 극성으로 수련하여 절정에 오른 고수가 흔치 않았기에 아환의 출현은
이 곳 선라봉에 모인 제반 무인들에게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주형, 한잔 받으시오."
남궁비가 옆에서 백색의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아환에게 술을 권하였다. 그러자 아환이 잔
을 들어 남궁비가 따르는 술을 묵묵히 받았다. 남궁비는 아환의 잔이 차자 술병을 내려 놓
고는 자신의 잔을 들어 아환을 향하고는 단숨에 털어 넣었다.
"주형, 혹시 주형은 소림의 제자시오?"
아환이 눈을 남궁비의 눈에 맞추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눈빛이 아환의 동공에 새겨졌다.
"아니오."
"그럼 무당이시오?"
"아니오만, 왜 그리 생각하시오?"
"주형의 무예가 극강의 외가계열 같기도 하고 유유히 흐르는 기세가 무당의 태극권같기도
하고..아까 태극 방위를 밟은 보법은 소제도 처음 보는 것이라 사뭇 주형의 사문이 궁금합니
다. 또 주형 같은 젋은 고수를 길러낼 능력이 있는 강호의 세력이 그리 많지도 않아 더욱
호기심이 생기는 군요. 혹 사승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미안하오."
"아! 괜찮습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당신이 만검창룡이구료. 과연 과연.."
남궁비가 친근하게 말을 붙이며 접근을 하였다. 아무런 사심이 보이지 않아 아환으로서도
그리 거부할 게 없어 아환 역시 순순히 말을 받아 주었다. 그러면서 아환은 남궁비를 나름
대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정말 말그대로 명실상부한 후지기수의 최고봉이라는 세간의 평가
가 이해가 갔다. 어디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절제된 자세라든지 전신에 흐르는 신기에 깊고
가라앉아 있는 안광, 그리고 제왕지기의 소유자 답게 타인의 자연스레 압도하는 위엄등, 칠
룡중의 수장이라 평함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과연 무엇이지요?"
"아니오. 남궁형을 보니 칠룡의 수좌 라는 세간의 말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소."
"핫핫하. 그런 과찬의 말씀을..그렇다면 주형께서는 저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으셔야 할텐
데요. 아니 그렇습니까?"
"..."
대꾸를 하지 않고 아환은 술잔을 잡았다. 어느새 아환의 술잔이 비어 있는 것을 본 남궁비
또 잔을 다시 채운다. 그리곤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아환에게 술을 권하였다.
"기분 좋은 날입니다. 주형을 뵙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아환이 남궁비를 빤히 쳐다 보았다. 잘생긴 얼굴이었다. 남자답게 잘생겼다기 보다는 아름
다운 여인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목에 돌출된 것만 없었어도 여
자라 칭할 정도의 미모로 생각되었다. 허나 큰키와 단단히 잡힌 육체는 그를 무림의 호남아
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환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 보자 남궁비는 당황을 하였다. 자신의 아환을 만나서 반가움
을 표시하는데 이 사내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한 눈으로 속속들이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런 남궁비의 눈가에 보일락 말락한 붉은 기운이 살짝 생겼다. 게다가 방금
의 접전으로 인하여서인지 아환의 체향이 맡아졌다.
'혹시..이 사내가..이 사내가..'
"남궁형은 참 잘생겼구려."
밑도 끝도 없는 아환의 말에 남궁비는 멍해졌다. 한참을 자신을 직시하더니 갑자기 잘생겼
다니. 물론 미남이라던지 잘생겼다던지 임풍옥수, 반안, 송옥 등의 찬사를 들은 적이 어디
한두번이 아니라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아환의 입에서 불쑥 튀어 나온 칭찬에 남궁비는
할말을 잃었다.
"예..? 예.."
그리고는 아환은 술병을 들더니 입으로 가져가 술을 들이켰다. 아환의 말의 진의를 파악하
려고 잠시 고민하던 남궁비는 곧 머리를 가볍게 흔들더니 앞의 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
다. 빈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잔이 남궁비의 입에 닿았다.
아환이 술병을 들더니 남궁비의 잔을 채워 주었다.
움찔.
남궁비가 아환이 따르는 술줄기에 잔을 들은 장갑을 낀 손을 미미하게 떨었다. 금방 평정
을 회복하고는 남궁비는 입으로 술을 가져갔다. 단숨에 한잔을 들이키고는 탁자에 잔을 내
려 놓았다. 평소에 술을 즐겨한다는 말대로 상당한 주당인지 거침없이 술을 마셨다. 아환 역
시 좋아하는 술이었다. 그러면서 서로가 잔을 비우면 따르고 마시고 하며 금새 몇병의 술을
비웠다.
그런 남궁비와 아환을 힐끔 힐끔 쳐다보는 대부분의 사람들 중에 불안한 눈빛으로 그 쪽을
바라보는 그린 듯한 아름다운 눈 한쌍이 있었다. 유가형, 난화성녀는 무언가 걱정스럽다는
뜻을 눈에 가득 담고 남궁비를 쳐다 보았다.
'저런..남궁공자가 저렇게 술을 마신 적이 없었는데..무슨 일이지? 평소처럼 진기를 운용하지
도 않고 술을 들다니..저러다가 취할지도 모르겠는걸?'
유가형이 알기에 남궁비는 세간에 알려진 그런 주당이 아니었다. 비록 그렇게 가깝게 지내
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혼한 관계라 유가형은 남궁비와 몇차례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항상 여럿이 모인 자리, 사화지연 같은 후지기수들과 함께 하는 자리여서 남궁비가 호탕하
게 술을 마시는 것을 수차례 보았다. 그때마다 남궁비는 남들이 모르게 마시는 족족 내공으
로 주기를 날려 버렸고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리를 파하였다. 그런 남궁비가 지금은
일체의 내기를 쓰지 않은 상태로 술을 마시면서 눈가에 미세하게나마 취기가 보이는 것이었
다. 아환은 그러한 남궁비의 모습에 호감이 생겨 잔을 들어 한잔 한잔 술을 따르고 또 따라
주었다.
그때였다.
"호화사의 무위를 보여주시오."
"호화사는 무전(武展)을 하시오."
"와!..와! 호화사!"
누군가 불쑥 한마디를 내던지자 군중들이 합세하여 한목소리로 호화사의 무예를 보기를 희
망하며 호화사를 외쳐 대었다. 관례대로 사화지연의 호화사는 자신의 절기를 사람들앞에서
시전하여 흥을 돋구는 순서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호화사는 사화가 지정하는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지만 여태까지 전례가 고절한 무위를 지닌 칠룡이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명가의
후예였기에 호화사가 펼치는 무공은 한결같이 절예가 아닌 것이 없었다. 칠룡의 수좌라 평
가받는 남궁비야 말할 것도 없고 주환도 조금 전 황보두균에 비해 우월한 경지를 보였으니
중인들의 기대는 상당하였다.
계속되는 군중들의 요구 뿐만 아니라 사화나 천궁의 귀인, 그리고 같은 칠룡들도 기대에
찬 눈빛을 빛내기에 남궁비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다시금 일
어나는 환호성.
"와! 남궁비!"
"만검창룡이다!"
"제왕검을 보여주시오."
기실 남궁세가의 검예는 창궁비연검과 만상검으로 대표된다. 남궁비가 익힌 무공도 그 것
이었다. 허나, 천왕신맥이라는 제왕지기를 타고 태어난 남궁비는 자연스레 무예를 펼칠 때
타인을 압도하는 제왕지기를 발산하면서 무예 자체가 무거운 위엄을 뿌리기에 남궁비의 검
술을 제왕검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남궁비는 신형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원탁을 벗어나 몇발자국 걸어 중인들의 앞으로 나아갔
다. 그러자 물살이 갈라지듯 좌우로 사람들이 길을 터주었고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군웅들
로 둘러싸인 오장여의 공간이 금새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에 선 남궁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
의 몸에서 뭉클 뭉클 솟아나는 기세, 제왕지기였다. 군왕이 현신하였는 것처럼 남궁비의 호
리호리한 신형에서 강한 패기가 솟아오르자 수십의 사람들이 그의 기도에 압도되어 저도 모
르게 뒷걸음을 쳤다.
남궁비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수수한 백광을 뿌리는 고아한 검집에서 자신의 병기
인 설룡검(雪龍劍)을 빼어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일반 크기의 중검, 평소 그의 성품을 대변
하는지 순백의 검신에 별다른 장식이 없는 그렇지만 고결한 기품을 보이는 보검이었다.
남궁비가 가볍게 우수로 손잡이를 쥐고 좌수로 검신에 손가락 두개를 갖다댄 상태에서 검
을 자신의 눈높이와 수평으로 맞추더니 심호흡을 하였다.
검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느릿느릿 크게 휘둘러져 검의 끝이 앞의 전방을 가릴 때 즈음
검의 끝이 부르르 떨리는 가 싶더니 검의 움직임이 급격히 빨라졌다. 차츰차츰 속도를 내는
설룡검이 남궁비의 전신에 백색의 잔영을 남기면서 섬전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주만상"
낭랑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환상일까? 남궁비의 검이 움직임에 따라 계속되어 남겨진 잔상이 그 수가 계속 늘어나고
겹쳐지고 또 겹쳐져서 마침내 온 주위가 남궁비의 뚜렷한 검의 형상들로 뒤덮였다 싶었을
때 일순 검형의 잔영은 사라지고 뿌연 은백색의 빛을 내는 투명한 막이 남궁비를 감싸고 있
는듯이 나타났다.
"검막!"
중인들 중의 누구 하나의 입에서 신음처럼 한 어휘가 새어나왔다. 그 말을 듣지 않아도 그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아는 사람들과 처음 보는 기현상에 눈을 부릅뜬 사람들, 그리고 내심
칠룡을 경시하던 기타 다른 영웅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을 때 남궁비의 저신을 휘감았던
빛을 내는 은백의 무형의 막은 마치 신기루인 것처럼 스러져 사라지고 그 가운데 검을 갈무
리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남궁비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검막! 검막이라니.."
"남궁비! 남궁비! 우와와와!!"
"만검창룡, 과연 무림 제일이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정신이 돌아왔는지 환호성을 지르며 금방의 남궁비의 검예에 대한 탄성
을 터뜨리며 소리를 외쳤다.
검막(劍幕).
말그대로 검기가 중첩이 되어 하나의 장벽을 이룬 것 처럼 보이는 것을 말함으로 환검이나
산검계열의 검공의 극치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검에 어느 정도 깨달음이 있고 정순한
내기가 뒷받침이 되면 수련을 통하여 검에서 무형의 기운이 뻗쳐진다고 한다. 그것을 세칭
검기라 칭하였다. 그러한 검기를 계속 일정하게 중첩을 시켜서 마침내 검기의 경력이 물셀
틈 없이 한 공간을 감싸게 되면 검기의 막이 이루어 지는데 이것을 검막이라고 한다. 강기
나 검강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여기어 지지만 일반적으로 환검에서 검강에 이르기 전의 단계
라 알려져 있다.
군중들의 환호소리가 계속되었다. 그들이 호화사를 외치고 호화사의 무예를 보려고 목이
빠져라 기다렸지만 예상보다 훨씬 고도의 절예를 눈에 접하게 됨에 군웅들의 마음은 한없
이 들떠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으로 연회에서 무예를 시전하는 것은 단지 눈요기감
으로 화려하거나 기이한 절공을 펼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사화지연에서 남궁비가
펼친 무예는 그야말고 진신절학이요, 그보다 무예가 낮은 이들에게는 안목을 틔여줄수 있는
상승의 무공이었다.
남궁비가 원탁의 자리에 돌아와 앉자 그런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각각이었다. 칠룡
중의 황보두균과 수가위는 심각한 얼굴로 안색이 변한채 남궁비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
고 사화 중 유가형은 복잡한 시선으로, 석영과 악서령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고 제갈수란은
눈을 빛내면서 남궁비를 빤히 쳐다 보고 있었다. 예외하면 천궁의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남
궁비의 무예 시전이 끝나고 자리에 앉자 별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시선을 내리 깐채 찻물
만 들이키고 있었다.
아환 역시 별 감정이 실리지 않은 시선으로 남궁비를 한번 쳐다본 후 그냥 술잔을 들어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다른 한 손 원탁 밑에 들어가 있는 손에는 불끈 힘이 들어갔다. 호승심일
까? 비록 사전에 무술수련을 할때에 검후에게 검의 경지에 관하여 들었기는 하지만 처음보
는 검막에 무심결에 손바닥에 땀이 배이는 것을 느꼈다.
'검막이라..검막..'
"또다른 호화사는 무전을 하시오!"
"무전을 하시오!"
"무전! 무전!"
군웅들의 요구가 드세졌다. 또 어떤 절학이 나올까? 중인들은 방금 전의 검막의 잔상에 사
로잡혀서 흥분된 상태에서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검막이 나왔으니 혹시 저 주환이라는 자
의 등에 매달린 도에서 어떤 절학이 나올까?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아환을 쳐다보는 사람들. 아환은 천천히 원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보통 중간크기의 사람보다 머리하나는 클것 같은 거한이 원탁에서 일어나서 아까 남궁비가
검막을 만들었던 공간으로 걸어나가자 장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환은 중앙에 서자 다리를 어깨 보다 조금 넓을 정도로 벌리고는 크게 한걸음 내딛었다.
"터!"
* * *
어두움이 깊어졌다.
산에는 밤이 일찍 찾아오는 법, 검푸른 허공에 떠 있는 연한 금빛이 섞인 반월이 그 광휘
를 선라봉의 곳곳에 내비추고 있었다. 초여름이 지났지만 아직 산중의 밤 공기는 쌀쌀한 감
이 약간 느껴졌다.
한들 한들 나즉한 바람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을 흔들고 우거진 수풀의 초목들은 미풍에 몸
을 맡겨 흐느적 거리듯 춤을 추었다.
하늘에는 구름한점 보이지 않은 맑은 밤인지라 달빛이 유난히 밝아 보였고 수많은 은하의
별들이 제각각 한점의 빛을 보태주어 깜깜한 밤이지만 사물을 구별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
다. 그런 선라봉의 중턱 어림 희끄무레한 물체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룬, 산중에는 어울리지 않은 색채였다.
하늘거리듯 검은 색이 출렁였다. 반드르 윤기가 나는 검은 빛을 내는 것은 다름아닌 사람
의 머리였다. 그것도 그 길이나 모양을 보아하니 여인의 머릿채인듯 싶다.
"남궁비라.."
그 물체의 앞, 아환이 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남궁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
낮의 사화지연에 관한 것을 생각하는가 보았다. 아환은 넓직한 바위에 걸터 앉아 편안한 자
세로 검푸른 밤하늘에 반짝이는 여러 별들을 바라 보며 곰곰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 손
은 뒤를 짚어 몸을 지탱하고 다른 한손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인체의 머릿결 사이로 손
을 갖다대고 있었다.
고운 피부, 잘록한 허리나 거기에서 급격히 퍼진 둔부의 곡선등을 볼 때 여인인듯 싶은 앞
의 사람은 아환의 아랫도리 근처에 얼굴을 묻고 머리를 부드러이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환은 그 여체의 머릿결을 쓰다듬듯 하면서 가볍게 쥔 상태라 여인은 반은 자의로 반은 타
의로 아환의 하체에서 머릿결을 출렁이고 있었다.
[ 창작] 수라기(獸羅記) 49번째 올림 창작야설
(11)
"하아..하아.."
달뜬 교성이 고즈넉한 한 밤의 산중속에 은은히 퍼져 나갔다. 허연 동체, 잘록한 허리선에
매끄러운 피부, 그리고 급격히 퍼져나가는 탐스러운 둔부의 선을 가진 여체가 움직이고 있
었다.
욕정이 담겨있지만 어찌 보면 침잠되어 있는 눈빛으로 아환은 앞에서 출렁이고 있는 두개
의 소담스러운 살덩이, 유방을 응시하며 아래의 육봉에서 번져나가는 마찰에 의한 쾌감을
즐기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고 긴 머릿결이 달빛에 반사되어 윤기를 뿌려대고 어깨를, 가슴을 가리며 흩뿌
려진 상테에서 악서령은 다리의 근육을 움직여 아환의 살덩이를 아래에 물은채로 허리를 위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장대한 사내의 실체가 악서령의 엉덩이가 들릴 때 그 아래에서 악
서령의 속살을 끌어내며 물기에 젖은 그 위용을 드러내곤 하였다.
'용(用)'
직경 세치가 됨직한 붉은 화인(火印). 악서령의 아랫배에 새겨진 글자 하나가 어스름한 밤
의 빛에 사이한 매력을 뿜어내었다.
열락의 혼재 속에 악서령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길들여진 육체로 아환의 양물을
자신의 비처에 담는 쾌감은 여태까지 그 어떠한 것에서도 맛보지 못한 새로운, 그리고 전혀
다른 차원의 쾌락을 가져다 주었다. 불과 보름 남짓한 시간, 그동안 거의 매일 아환의 양물
을 작고 예쁜 그 입술에, 또 양 가슴의 사이에, 보름전까지만 하더라도 처녀의 저항을 숨기
고 있던 비지에 담으면서 악서령은 아환에게 익숙해졌다. 어제에는 급기야 배설의 공혈까지
도 아환의 거대한 육봉이 파고 들어왔다.
아환의 손에 들려 있는 나뭇가지, 회초리는 악서령에게 있어 공포와 고통의 상징이었지만
그와 상반되게 악서령에게 쾌락과 기이한 감흥의 제공물이기도 하였다. 새하얀 육체에 거미
줄같이 그어졌던 빨간 줄들은 회복되고 다시 새겨짐을 반복하면서 악서령의 그 매력적인 여
체에 희미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으흠..아하.."
악서령의 아랫 입술이 가지런한 하얀 치아 사이에서 살짝 이그러지고 미미하게 벌려진 그
붉은 입술사이로 가쁜 숨결이 배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악서령의 허리의 움직임이 점차로
빨라졌다. 모양있게 자리잡은 탄력있는 젖가슴이 작은 폭으로 빠르게 출렁이고 있었다.
차아악!
"아흑!"
악서령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검은 머릿채가 허공으로 비산을 하다 악서령의 뒤로 내려
앉았다. 그런 여체의 가슴에 그어지는 새빨간 선하나. 그러면서 움찔거리는 악서령의 비처가
급격한 조임을 보이고 그것은 그대로 아환의 양물로 전달되어 아환의 신경에 쾌락으로 변해
전해졌다.
착!..차앗!..쫘앗..
"아흑..악..하악..."
육체를 꿈틀이면서 몸을 비틀어 대며 아환의 매질을 피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악서
령은 젖가슴에, 어깨에 작열하는 매질에 전신을 날카로운 바늘로 관통당하는 전율을 느끼면
서도 이율배반적으로 찾아오는 색다른, 그렇지만 이젠 잘 알고 있는 감각을 느꼈다.
어느새 아환 역시 허리를 튕기면서 악서령의 빠른 움직임에 보조를 맞춰주고 있었다. 아환
의 양물이, 그 커다란 체구가 자신의 몸에 부딪힐때마다 육중한 쇠몽둥이가 아래에서 위로
쳐올라 오는 기분을 느끼는 악서령은 마침내 절정의 순간이 찾아왔는지 무릎의 펼침과 굽힘
이 가속화 되다가는 급기야 그 가녀린 육체가 뒤로 활처럼 휘어졌다.
"아아..."
질끈 감겨진 두 눈, 꽉 다물려진 입술로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다가는 악서령은 무너지듯
아환의 몸위에 자신을 실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은 모양으로 축 늘어지듯 악서령은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아환의 몸에 자신을 최대한 밀착시킨채로 그렇게 엎어졌다.
하체에 가득 전해오는 뜨거운 분출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자궁이 아환의 정액으로 가득차
올라오는 느낌. 악서령은 움찔거리면서 아환의 사정을 그 여체의 내밀한 곳으로 한껏 받아
들였다.
눈을 감은채 아환 역시 사정이 주는 쾌감을 맛보며 정사의 여운을 즐기다가는 불쑥 악서령
의 머릿채를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악서령은 머리카락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느꼈지만 아
환과 눈이 마주치고 그리고 아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눈속에서 그의 마음을 읽고는 힘겹
게 몸을 일으켰다.
악서령은 교구를 세워 밑으로 약간 이동한 다음 상체를 굽혔다. 그런 악서령의 얼굴이 다
가가는 곳, 아환의 양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악서령은 빨간 입술을 살포시 벌리고는 아환
의 남근을 한입 베어 물 듯 입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욕망의 잔재가 남아 있는 아환의
양물을 정성껏 빨고 핥았다. 정액과 자신의 비처에서 나온 애액들, 그리고 땀들이 뒤섞여 비
릿한 냄새와 함께 역겨운 느낌을 주었지만 악서령은 개의치 않고 타액으로 그것을 다 씻어
낸 다음 입안으로 그 것들은 삼켰다. 악서령의 목젖이 꿈틀거렸다.
악서령은 처리를 끝마친 후에도 계속해서 아환의 육봉을 입안에 넣은채 지속적인 혀와 입
술의 공양을 멈추지 않았다. 적어도 아환이 그만하라고 할때까지는 그치지 말아야 함을 알
기에 악서령은 입술에 아환의 검붉은 살덩이를 물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 동안 그렇게 아환은 악서령의 봉사를 즐겼다. 그런 그의 귓가에 희미한 기척
이 들려왔다. 풀잎 밟는 소리,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가 미미하게나마 아환의 청각에 잡혔다.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십여명 정도 되어 보이는 인원이 일정한 방향, 아환과 악서령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한 이삼십장 정도 거리 남짓, 발놀림을 보아하니 경신술을
익힌 무림인들의 기척이었다. 그것도 꽤 무예를 닦은 수준의 무리들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
을 느끼고는 아환의 육체가 팽팽히 긴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악서령은 한참 아환의 양물을 입에 물고 있다가 사내의 육체가 경직이 되자 고개를 들어
의아한 눈으로 아환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감정이 실리지 않고 번뜩이는 눈으로 한곳을
응시하는 아환을 보고는 악서령은 무심결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는 얼마 안 있어 사람
들이 몰려오는 기척을 감지해 내었다.
일순, 창백해지는 악서령의 여체. 아무리 아환에게 굴복을 하였다 하더라도 얼마전까지 무
림 최고의 후지기수 중의 하나 였던 악서령이었다. 최소한 칠룡 중의 만검창룡이나 소림의
우성에게는 한수 접는다고는 하지만 세인들의 평가에 있어서 다른 칠룡보다는 고절하다고
평가를 받았던 사화 중의 일인이었다. 난화성녀 유가형이나 혈장미 석영은 남궁비나 우성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로 무림사화는 그 미모만큼이나 뛰어난 무예로 강호의 젊
은이들의 우상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런 외진 산속에서 사내와 관계를 갖는 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명예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그녀의 사문이 화산에 커다란 누를 끼칠수
있는 일이기에 악서령이 얼마나 당황하는 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상대는 칠
룡이나 그와 버금가는 명문의 자제도 아니고 오늘 처음 강호의 세인들에게 알려진 강호신예
에다가 출신조차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또 그와의 관계가 순수한 사랑도 아닌 성의 노
리개라 할 수 있는, 그보다 더 심한 굴욕도 받아들이는 관계이기에 악서령의 긴장은 극도에
다달았다.
다급히 한쪽에 벗어서 개어놓은 옷가지로 손을 뻗어가는 악서령, 어서 의복을 챙기고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경고성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쉼없이 울려 퍼졌다. 허나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지 아환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그녀의 동작은 멈추어질 수 밖에 없었다.
"계속해."
무심한 한마디의 말이 아환의 입에서 떨어졌다. 악서령은 옷가지로 향하던 손을 멈추고는
아환을 쳐다 보았다. 아환은 그러한 악서령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채 한
쪽, 사람들이 몰려오는 쪽을 계속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환의 손에 들려 있는 회초리가
올라 가자 악서령의 손에 힘이 빠졌다.
악서령은 자신의 비단 옷가지에서 손을 떼고는 힘없이 아환의 하체로 갸름한 얼굴을 가져
갔다. 그리고는 떨리는 입술을 벌려 아환의 양물을 입에 다시 머금었다.
아환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서 자리에 앉았다. 근육으로 뒤덮인 그의 상체가 그의 움직임
에 따라 꿈틀거리며 모양을 그려내었다.
이제 불과 십장이 채 되지 않는 거리까지 다가온 사람들의 기척, 아환이 손을 뻗자 아환의
옆에 떨어져 있던 그의 병기인 묵패도가 손에 잡혔다. 아환은 한손으로 도의 손잡이를 잡고
는 그 상태에서 몰려오는 자들을 기다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지 않는 비스듬한 다른 쪽에
탐스러운 둔부를 치켜 올리고 머리를 아환의 아랫도리에 파묻은 악서령이 보였다.
나무를 헤치고 사람들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숲 속의 어느 한
공터에 아환이 자리를 잡고 있고 또 그와 다른 한 사람, 왠 여인이 매혹적인 엉덩이를 자신
들이 나타난 방향과 어슷한 방향을 향한채 솟아 있는 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칫하다가는
이내 천천히 아환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타낸 사람들의 하나하나의 모습이 명확하게 아환의 눈에 들어오자 아환은 그 선두에선
낯익은 한 인물의 모습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히 십이명, 선두에선 자는 아환만큼이
나 커다란 체켝을 지닌 사내였다.
"나를 찾았나? 황보두균."
선두에 선 사내, 황보두균은 살광(殺光)이 번쩍이는 눈초리로 아환을 노려 보면서 이를 갈
았다.
"개새끼. 여기 있었구나."
명가의 후손에 어울리지 않은 거친 말이지만 거침없이 황보두균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왠 일이지?"
"몰라서 묻나? 이런 처죽일 네놈 때문에 나와 황보세가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다. 어디서 온
놈인지는 몰라도 네깟놈 덕분에 당한 치욕을 오늘 갚아주마."
아환이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하나하나 범상해 보이는 자들이 없었다. 아마도 황보세가의
인물들인지 황보두균과 같은 문양을 새긴 무복을 입고는 안광을 빛내면서 황보두균의 주위
를 호위하는 형태로 서있었다.
"물론 네 놈 혼자는 아니겠지?"
"뿌드득..그래. 네 놈의 무예가 한 수 하는 것은 안다. 허나 이 들은 황보세가의 정예. 오늘
네놈은 여기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것이다."
이를 가는 황보두균의 뇌리에 낮의 광경이 떠올랐다.
아환의 무전에서 선보인 일권(一拳).
아무 초식도 없이 단순하게 내지른 일권이었다. 허나 그 자리에 있는 제법 한가닥한다는
자들은 그 일권에 담겨있는 가공할 힘을 느꼈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화려한 변화가 있지도
않았지만 아환의 일권이 뻗어졌을 때 그 직선상에 있지 않은 황보두균은 일시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형용할 수 없는 기세, 도저히 자신의 연배에서는 출수할 수 없는 권경이었다. 이는 다른 병
기를 주로 하는 무인들과 달리 권각무예를 비전으로 삼는 황보세가이기에 아득한 절망감은
그 누구보다도 컸다.
단순한 일권에 그 직선 상에 있는 몇몇이 권경이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무형의 기세에 주춤
뒷걸음질치고 어떤 이는 자리에 주저앉기도 하였다. 황보세가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기도,
가주와 세가의 원로라 불리우는 몇몇만이 보일 수 있는 정제된 일격이었다.
절망감에 빠져드는 황보두균의 심정에 불을 지른 것은 그런 아환의 무전을 보고 나타난 중
인들의 반응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비롯한 칠룡과 사화에게 찬사와 경이로움을 보
내던 자들이 아환의 무예에 경탄을 하면서 선망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같은
칠룡 중에서도 남궁비와 수가위 마저도 아환에게 찬탄이 담겨진 시선을 보내질 않는가. 천
궁의 귀인이라는 은아려라는 여인도 아환의 일권에 눈을 빛내면서 그 이후 아환에게서 시선
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황보두균의 절망과 좌절은 그 색이 변질되어 버렸다. 분노와
저주, 그리고 질투가 혼재된 살심(殺心)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아환의 무전을 끝내고는 아환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아환에게 쏠렸
다. 일개 외가 무사 나부랑이로만 알았던 커다란 사내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번 사화지연은
그 모습을 바꾸었다.
원독에 찬 황보두균의 시선을 아환은 느꼈지만 그를 무시한 채 아환은 남궁비와 많은 대화
를 나누었다. 환하고 밝은 감탄에 찬 남궁비의 얼굴이 황보두균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내리
꼽혔다. 칠룡의 수좌인 남궁비는 항상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모습이어서 뇌룡(惱龍)
이라 불리우기도 하였다. 그런 남궁비가 저렇게 밝은 모습을 보이다니.
사화지연은 유가형과 악서령, 그리고 석영이 피곤을 이유로 물러갈 것을 중인에게 말한 후
자리를 뜨자 자연스레 연회가 마무리 되어졌다. 그러면서 남궁비의 만류를 뒤로 하고 홀로
자리를 뜬 아환을 황보두균은 세가의 인원을 데리고 쫒은 것이었다.
"근데 하필 이런 자리에 오나?"
왜 여자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찾아왔냐는 아환의 물음에 황보두균의 눈가가 가늘게 접
혀지며 찌푸려졌다.
"그래, 서둘러 자리를 뜬 이유가 창녀와 관계를 갖고자 함이었나? 출신이 비천하니 하는 짓
도 그렇지. 보아하니 미리 창녀를 이곳에 부른채 사화지연에 왔구나. 하는 짓도 창녀와 버금
가는 음탕한 놈. 네깟놈의 피로 내 손을 더럽혀야 하다니.."
창녀라는 말이 나오자 아환의 아래에 머리를 파묻은 여체가 움찔거렸다.
창녀, 창녀라니..그 말은 악서령의 여린 가슴을 후벼파듯 사정없이 상처를 내었다. 고결한
여인의 표상이었던 자신이 창녀라니. 악서령은 유곽에 가지 않았지만 창녀라는 어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짓을 행하는 지도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천하디 천한 여자들이라 생각하고 여인으로서 못할 짓이라 생각했었다. 그런 창녀라
는 단어가 이제 자신에게 적용이 되다니..
아환의 남근어림에 축축하고 따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악서령의 고운 눈에서 눈물이 샘솟
듯 흘러나와 아환의 아랫도리를 적셨다. 입에 물려진 아환의 육봉 때문에 소리는 크지 않지
만 오열이 배어나왔다. 그런 악서령의 귓전에 들려오는 전음에 악서령의 상처는 더욱 크게
벌어졌다.
'창녀? 천향매화가? 크크크..이봐, 계속 창녀의 짓을 해야지.'
악서령의 파괴된 정신, 그리고 아환의 명령에 길들여진 여체는 머리를 다시금 움직였다. 혀
로 입안에 들어온 아환의 양물을 휘감아 빨아 당겼다.
미묘하게 움직이는 여체, 그럼에 따라 하얀 박을 쪼개놓은 것 같은 둔부가 꿈틀거렸다. 황
보두균을 비롯한 황보세가의 인물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별다는 긴장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아환의 태도에 신경쓰이면서도 매혹적인 여체로 눈길을 힐끗 힐끗 가져갔다. 그런 그들의
눈에 담겨 있는 것은 질펀한 욕망이었다.
"이봐! 그럼 나를 죽인 다음엔 이 창녀는 어떡할꺼지? 네 놈들이 무더기로 나와 싸운 것을
알고 있을텐데."
유난히 창녀라는 단어에 힘을 주면서 아환이 황보두균에게 질문을 던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언뜻 보자니 꽤 반반한 계집같은데 실컷 즐긴 후에 네 놈의 뒤를 따
르게 해주지."
"그게 명가의 자제가 할 말인가?"
"크핫핫하! 감히 네 놈따위의 주둥이에 오를 세가의 이름이 아니다. 잔말말고 일어나 목을
길게 늘이거라."
"호오..그렇게 자신있나? 낮에 낭패를 보았으면서도 덤빈단 말인가? 사화보다도 낮은 경지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 사화의 무예가 고절함은 나도 알지. 그 계집들의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지만 계집은 계집! 얼마 있지 않아 내 발바닥을 핥으며 내 손
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아무래도 한수 숨겨진 것이 있나보군."
아환이 악서령의 머릿채를 쓰다듬으며 말을 했다. 아직 아환의 양물을 입에 문채 봉사를
하고 있는 악서령, 한번 사정을 했지만 이내 다시 발기되어 우뚝 솟아오른 육봉이 악서령의
입안을 가득채웠다.
황보두균이 조금만 주의가 깊거나 심기가 있는자라면 한쪽에 개어져 있는 악서령의 비단
옷에 놓여진 검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검이 범상치 않음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지만 불
행하게도 황보두균에게는 그러한 점이 없었고 아환의 다음에 이어진 말에 의한 그 '창녀'라
불리운 여인의 행동에서 비로소 그 '창녀'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이봐! 창녀. 네가 저 명가의 후예와 한번 어우러려 보아라."
아환의 말이 떨어지자 악서령은 고개를 들고 아환을 쳐다보다가 그의 눈에 담겨있는 강압
의 힘에 옷가지로 교수를 뻗어갔다. 옷을 차려 입고 검을 들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아환의
이어진 말.
"창녀가 옷가지 따위 걸치지 않으면 어때. 그냥 해."
멈칫, 악서령의 교구가 정지되다가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옷가지를 손에서 놓고는 그
위에 포개 놓은 자신의 청하검(靑霞劍)을 들었다. 연한 하늘빛이 감도는 화려한 검집에서 검
을 빼어들었다.
창..
그때까지 여체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황보세가의 사람들은 세가지의 심상치 않은 느
낌을 받았다. 하나는 여체가 생각보다 극치의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이었다. 어디 한 곳 흠잡
을 데 없는 완벽한 조각상 같은 희디흰 여체의 곡선이 황보세가의 사내들에게 욕망을 부채
질하였다. 또하나, 그러한 여체의 몸에 그어지 붉은 선들. 아마 채찍이나 다른 것에 의한 매
질같아 보이는 그물같이 그어진 빨간 줄들이 기묘한 느낌을 주었고 마지막으로 그 욕정덩어
리의 여체가 보여준 검을 뽑아드는 한 동작에 황보세가의 무인들의 육체가 팽팽한 긴장을
보였다.
잘 정련되어진 동작. 일류의 무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동작에 빼어들어진 검에서
보이는 푸른 검광이 예사 보검이 아님을 짐작하게 하였다.
그런 황보세가의 사내들의 경악은 마침내 악서령이 몸을 돌리고 그들에게 검을 겨눌 때 극
도에 다달았다.
"천...천향매화.."
"천향매화?"
"설마.."
"어찌.."
"악소저!"
너무 놀라 일순 멍해진 사내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다름아닌 천향매화, 그것도 발가벗은 나체의 천향매화를 보고
서 사내라면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아름다움으로 무림의 으뜸이라 평함을 받고 있
는 악서령이었다. 일반 후지기수들이라면 그 옥용을 한번 보는 것만이라도 꿈에서 그린다고
하는 천향매화였다. 항상 그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는 악서령이지만 가끔 사화지연등의
자리에 맨 얼굴을 드러내어 그 고운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황보두균을 비롯한 몇몇의 입에
서 천향매화란 말이 나오자 다른 이들 역시 대경실색하였다.
악서령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앙다문 작은 입이나 그린 듯 가늘게 뻗쳐진 눈매에 묻어
나오는 것은 수치와 분노, 그리고 살기였다. 평생 단 한명의 사람에게 보여줄것이라 생각했
던 몸이었다. 그런 소중한 몸이 십여명의 사내들에게 낱낱히 보여졌다. 두 소담스러운 젖가
슴과 그 위에 앙증맞게 매달려 있는 작은 유실에 보드라운 수풀로 뒤덮여져 있는 비처까지
사내들에게 숨김없이 드러내어 보여졌다.
악서령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러한 악서령을 바라보는 황보세가의 무인들의 눈
가에는 몽롱함과 욕정이 피어 올랐다. 천하제일의 미모답게 그 여체에서 피어오르는 매혹은
저항하기 힘들었다. 앞으로 탄력있게 돌출된 두 젖가슴이나 감추어진 비림까지 송두리째 사
내들의 시선속으로 악서령의 나신이 투영되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비처의 바로위에 새겨진
'용(用)'까지도..
'네 명예, 화산의 명예를 잃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야 할꺼야. 손속에 사정을 두어서도 안
되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좋은 말이지. 선공은 항상 유리한 법이야.'
악서령의 귓가에 아환의 전음이 들려왔다. 굳이 아환의 전음이 아니더라도 악서령은 이들
을 살려 보낼 마음이 없었다. 아환에게 그 수치를 당한 것과는 별개로 항상 자신을 추앙하
던 사내들에게 치부를 샅샅히 드러내고 창피한 모습을 보인지라 이들을 살려 두어선 안되었
다. 악서령은 아까의 정사로 인하여 비처에서 흘러 내려 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희끄무레한
아환의 체액을 신경쓸 겨를 없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유운신법(流雲身法).
구름이 흐르듯 유유히 신형을 펼치는 경신술이지만 악서령의 급한 마음으로 변형되어진 신
법은 악서령의 희뿌연 잔영을 남긴채 황보세가의 무사들에게 악서령의 나신을 밀어내었다.
약 오장여의 거리가 순식간에 단축이 되어지고 악서령의 유방이 출렁이며 언뜻 언뜻 비처의
속살이 그 윤곽을 나타내었다 모습을 감추면서 악서령이 그들의 앞까지 달려나올 때에도 사
내들은 미처 방비를 하지 못하였다.
발을 굴러 땅을 딛고 허공에 떠오른 악서령의 발가벗은 육체, 그리고 떠오르면서 벌려진
다리사이로 밤하늘에 환히 드러난 악서령의 음부의 속살..그 악서령의 치켜올려진 청하검이
허공에서 수십송이의 푸른 매화를 그려내었다.
이십사수 매화검의 매화현현(梅花現現). 허공에 새겨진 매화 송이가 순간적으로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덮쳐내렸다. 그제서야 황보두균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뒤로 물러서며 천왕권의 천
왕폐성(天王閉城)의 초식으로 두 주먹을 교차하며 매화검기를 권경으로 쳐내었지만 미처 방
비를 해내지 못한 다른 몇몇의 황보세가의 정예들은 그 검기를 그냥 뒤짚어썼다.
"크악!.."
"커억.."
은은한 월광에 치솟아 오르는 수줄기의 피분수가 아로새겨졌다. 사내들이 미처 방비를 갖
추기 전에 펼친 단 한초식으로 두명의 사내가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고 세명의 사내는 전
신 곳곳에 검기에 의한 상처를 입었다. 노린 것인지 아닌지 악서령은 황보두균에 정면으로
맞서기 보다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펼친 초식이라 황보두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끼친 경력
은 대단하여 순식간에 네다섯을 전투불능의 상태로 빠뜨렸다.
악서령은 그 상태에서 동작을 멈추지 않고 비스듬히 다리를 벌려 몸을 세우고는 청하검을
빠르게 수평으로 선을 그었다. 비열이 기묘한 모양으로 일그러진 상태에서 펼처진 쾌검의
한 동작에 떠오르는 사내의 머리..조금전의 아름다운 천하제일의 여체를 보고난 후여서인지
그 부릅뜬 눈에 담겨져 있는 것이 고통이라기 보다는 욕정이었고, 어이없음이었다.
"천왕출현"
쾅! 굉음에 가까운 진각과 함께 세찬 권경이 악서령의 갸녀린 육체로 짓쳐들어왔다. 악서
령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면서 검을 사선으로 번갈아 휘두르며 그 권영을 흐트렸다. 그러
고는 물러선 그 자세에서 검을 곧추세우고는 안광을 반짝이며 황보두균을 노려보았다.
"악..악소저, 왜 이러는 거요? 천하의 천향매화가 이 무슨 짓이요?"
"..."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악서령은 대답을 하지 않고 검을 내려 그 끝이 황보두균을 향하
게 하였다. 과연 무림사화라는 평을 듣기에 충분한 실력을 보이는 악서령이었다. 정제된 동
작에 그녀의 경지가 어림잡아졌다.
이제 남아 있는 황보세가의 정예는 불과 아홉, 그 중 둘은 중상을 입어 싸움에 참가하는
것조차 힘들어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이는 일곱밖에 남지 않았다. 각자 주먹을 말아쥐고 신
중한 태도를 보이는 황보세가의 무인들. 하지만 얼핏 얼핏 눈길이 악서령의 나신으로 향하
는 것은 들끓는 청춘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천향매화가 이런 행동을..이러고도 화산의 금지옥엽이라 할 수 있겠소? 어서 검을
거두시오."
황보두균의 노기에 찬 음성은 악서령에게 있어 수치나 분노를 삭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위
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화산의 명예, 자신의 명예..악서령의 두 눈에서 나오는 빛이 새파
래졌다. 살기.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했지요."
영롱한 음성이 빨간 입술을 헤집고 흘러 나왔다. 조금전에 자신이 아환에게 했던 말, 그 말
을 그대로 악서령이 되풀이해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이 자리의 모두를 죽이겠다는
말. 황보두균은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갈무리하고 이를 갈면서 내공을 끌어 올
렸다. 그런 황보두균의 두 손이 마치 피칠을 한 듯 새빨갛게 물들었다. 기공을 끓어 올리는
품세에 악서령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황보두균의 손이 붉게 물들더니 이제는 얼굴까지 색이 점차 변해갔다. 목 부위에서부터 올
라오는 붉은 기운은 급기야 황보두균의 얼굴 전체를 빨갛게 물들였고 그 모양새를 보아 옷
속에 감추어진 전신도 붉은 기운으로 뒤덮여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긴장된 눈빛으로 그 것을 바라보던 악서령의 아리따운 봉목이 크게 뜨여졌다 그러면서 신
음처럼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사혈장(死血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