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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강탈-104화 (완결) (10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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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팅하는 내내, 그의 품에 안겨 달콤한 키스 세례를 받다 기절했던 것 같다. 가물가물 정신이 다시 들었을 땐 타닥타닥 장작불 타오르는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무거운 눈을 겨우 뜨니 언제 옮겼는지 그녀는 벽난로 앞 데이베드에 누워 있었다. 서로의 사정액으로 끈적하던 몸은 말끔하고 은은한 비누향이 맴돈다.

“깼어? 더 자….”

아. 뒤에서 자신을 더 깊이 끌어안는 그에게서 평온하고 좋은 체향이 묻어난다. 각인한 제 오메가와의 만족스러운 섹스와 노팅 덕분인지 러트 사이클이 쉽게 물러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을 덮은 담요도 보드랍고 따뜻하지만, 지겸의 품 안이라 분명 더욱 안온한 거겠지.

“지겸 씨.”

응? 다정하게 되물으며 그가 소희의 뒷덜미에 키스한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줄래요?”

사실 계속 물어보고 싶었는데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약속했잖아. 다시는 속이지도, 거짓말도 하지 않겠다고.”

장작 위로 일정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지켜보며 소희가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도, 지훈 오빠와 비슷한 거죠?”

그녀의 등 뒤로 지겸이 멈칫하는 게 느껴진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했어요. 싱가포르에서, 당신이 내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잖아요. 그게 우리의 오해와 당신에 대한 내 증오를 키웠는데도.”

물론 그녀가 모든 걸 알게 됐을 때 그녀의 아버지에게 실망하고 충격받을 것을 염려했으리란 건 알았다. 구 회장이 자신의 비리를 아는 소희에게 해코지할까 걱정했을 것이고. 하지만 그것만으론 뭔가 석연치 않았다.

원래의 지겸이라면 솔직히 모든 걸 다 말하고 곁에서 도와주며 위험하지 않게 지켜주는 쪽을 택했을 테니까.

아버지도 그렇다. 아무리 선민의식으로 가득한 일그러진 부성애를 가졌다고 해도, 단순히 완벽한 후계자를 위해 구 회장을 도와 그 수많은 죄를 저질렀을까. 게다가 발현되기도 전,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로열 오메가가 될 거라고 확신하지 않으셨는가.

만약 자신이 애초에 로열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구지훈과 똑같이 만들어진 거라면, 모든 정황이 더 이해가 간다.

“말해 줘요. 나는 그럼 원래 뭐였어요? 그냥 우성 오메가? 아니면… 열성?”

지겸은 한참 대답이 없더니 소희를 그저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틈 없이 그의 품에 안겨졌다.

“넌… 임소희지.”

소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지겸은 흔들림 없는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소희를 바라본다.

그게 왜 궁금하냐는 듯. 네 생각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정말로 아무 상관이 없다는 표정으로.

“로열이든, 그냥 우성이든, 열성이든. 심지어 오메가가 아닐지라도. 넌 그냥 임소희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거 말고 뭐가 중요해.

소희의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에게 더 물어봤자, 어떠한 답도 얻을 수 없으리란 걸 안다.

쪽. 이제 괜한 소리는 그만하라는 듯 지겸이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저녁 먹기 전에, 우리 잠깐 산책할까?”

“…응.”

소희는 더욱 복잡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로열이니 아니니 집착했던 두 아버지 때문에, 가족과 주변의 모든 사람이 불행해질 뻔했는데. 두 사람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지금,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겐 담요를 덮고 편히 앉아 있으라고 하고는 지겸이 혼자 올라가 옷을 챙겨 내려왔다. 자기는 적당히 따뜻하게 입은 주제에 소희 옷은 엄동설한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과하다. 패딩에 털모자에 장갑에 털양말에.

“자, 입자.”

“아니! 혼자 할래요!”

속옷까지 입혀주려는 남자에게 아연실색한 소희가 지겸에게 뒤돌아보라며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다 아는데, 뭘. 새삼스럽게.

담요가 흘러내려 드러난 그녀의 젖꼭지에 키스하다가 한 소리 더 들은 지겸이 그제야 아쉬운 듯 뒤를 돌았다.

역시 변태 같아.

투덜거리는 소희의 말에 계속 웃음이 나는지 등진 그의 어깨가 자꾸만 미세하게 움찔댔다.

***

손을 잡고 산장을 나서는데 소희의 코끝으로 차가운 알갱이가 떨어졌다가 바로 사르르 녹았다.

올해 첫눈이었다.

“와! 눈이에요! 당신이랑 올 때마다 이러네.”

첫눈을 같이 맞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던데.

자꾸만 손바닥을 펴 내리는 눈을 받으며 설레는 기분을 숨기지 못하는 소희를 지겸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쓰다듬었다.

사실은 일기예보를 매일 확인하고 기상청에 전화까지 해 본 끝에 오늘, 이곳에 눈이 올 확률이 높아서 여행 일정을 잡았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참! 김 실장님이 오신다고 했었는데?”

갑작스레 떠올라 묻자 지겸이 여유롭게 답한다.

“한참 전에 연락드렸지. 서울로 다시 차 돌리셨어.”

아 다행이다. 소희가 마음이 놓인다는 듯 미소 지었다.

전나무 숲은 몇 년 전보다 더욱 울창해 보였다. 하늘 끝까지 닿을 것만 같이 곧게 뻗은 나무에 눈이 조금씩 쌓여 새하얀 눈꽃을 피우고 있었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광경에 소희는 숲의 초입에서 잠시 멈춰 섰다.

“어, 원래 저런 게 있었던가…?”

예쁘다….

전나무 가지마다 마치 트리 장식과 같은 크리스털 볼이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사륵 불 때마다 이따금 딸랑거리는 종소리도 들려왔다. 어디선가 겨울잠을 자고 있을 새들이 꼭 뽀로롱 노래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같이 걸을까?”

지겸이 손을 내밀었다.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희가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천천히 발을 맞춰 걸었다.

이제 막 해가 지고 있었다. 은회색 빛이었던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더니 온 세상이 천천히 사위었다. 캄캄하고 고요한 겨울밤 설산에는 흰 눈이 가지 위로 사뿐히 쌓이는 소리와 연인의 발소리만 가만가만 정적을 밟아갔다.

“어어?”

타다닥. 순식간에 소희가 스쳐 지나간 전나무의 크리스털 볼 장식에 불이 들어왔다. 꼭 언젠가 어느 정원에서 그와 함께 보았던 것처럼. 마치 요정이 마법 가루라도 뿌린 듯이.

그다음 나무도, 또 그다음 나무도. 소희와 지겸이 걸음을 옮겨 스쳐 지나갈 때를 정확히 맞춰 조명이 켜졌다.

마치 숲 전체가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된 것 같았다. 어느덧 쌓인 하얀 눈 위에 반짝이는 빛이 반사돼 온 숲이 반짝였다.

“당신이…….”

분명 그녀를 위해 준비한 지겸의 선물일 테다. 소희가 멈춰 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조명의 향연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임소희.”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다정한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가 보인다.

소희가 너무 놀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곳에 오는 길에, 네가 물었잖아. 꿈이 뭐였냐고.”

미국 유학 초기, 혼란스러웠던 날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그녀가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답하려고 하니 지겸은 우습게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의사가 장래희망이었던 적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아버지의 영향이었지 스스로 바라던 미래는 아니었을 거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 나이 되도록 한 번도, 누구도 나한테 물어본 적이 없더라. 꿈에 대해서.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아이였는지.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지만 실은 외로웠다. 끔찍했다.

눈앞의 이 여자를 다시 만나고, 품에 끌어안기 전의 자신은 살아도 살았던 게 아니었다.

“생각해 봤는데, 소희야.”

지겸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소희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키스했다. 많이 긴장했는지 남자의 얇은 입술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이젠 네가 내 꿈이야.”

어쩌면 그 정원에서, 너를 만난 날 이후로 쭉 아무도 묻지 않았던 그 꿈의 이름은 너였는지도 몰라.

“영원히 너란 사람만을 꿈꾸고, 그 꿈을 지키며 살게.”

소희 곁에 오래도록 머물면서 언제나 안온한 그늘이 되고, 비가 올 땐 우산도 되어주면서. 그러다 너무 비가 거세져서 그녀의 말처럼 우산이 소용없어지는 날에는 같이 손을 잡고 비를 맞을 거다. 지금처럼, 그래. 눈을 맞추고, 입도 맞추고.

“그러니까, 소희야. 평생 이 미친 알파의 오메가가, 개새끼의 주인이 되어줄래?”

지겸이 주머니에서 붉고 네모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가 상자를 열자, 둘의 주변을 감싼 크리스털 볼보다 더 반짝이며 부서지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소희의 눈가에 어느덧 울음이 고여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미 잡힌 오른손이 아닌, 왼손마저 내밀었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승낙의 표현.

반지는 소희의 약지에 맞춘 듯 꼭 맞았다.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남자라,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사랑해.

오메가를 옭아매는 각인 대신, 오롯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치는 존경과 맹세의 징표가 손가락에 끼워졌다.

나도, 사랑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지겸이 소희를 품에 끌어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심장과 심장이 만난다. 하얀 눈 위로 방울방울 떨어져 흐른 눈물이 누구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하늘에선 축복처럼, 여전히 첫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쌓였다가 녹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다시 봄이 오겠지. 가장 추운 계절도 결국 끝이 난다. 얼어붙었던 땅에서 꽃이 피고 휑했던 가지에는 연둣빛 새순이 돋는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대부분이 행복을 좇으며 처절하게 살지만,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모를 때가 많으니까.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당연한 게 두 가지 있다.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올 거라는 것.

구지겸이 사랑하는 건 지금도, 앞으로도 임소희 한 사람뿐이리라는 것.

함께한다고 해서 두 사람 앞에 행복만이 펼쳐지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니까. 서로를 꿈꾸며 살아가는 한 조금씩은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다.

다시 추위가 찾아와도, 멀리 돌아온다 해도, 사라진 듯 보여도 봄은 꼭 오고야 마니까.

그러니 마치 봄이 오듯 행복이 그녀에게 제대로 찾아가게 하려고, 지겸은 소희의 손을 더 꼭 붙잡는다.

임소희.

당신은 나의 꿈.

오래 돌아와 되찾은 나의 신부.

그리하여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뿐일, 나의 각인.

-신부강탈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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