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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감호소는 충청남도 공주의 한 산자락에 있었다. 안 그래도 오늘 면회 예약을 해 뒀었는데 아침부터 연락이 왔다. 잠시 지훈의 정신이 돌아온 것 같은데, 지겸을 다급하게 찾는다고. 다른 알츠하이머 환자처럼 지훈도 종종 예전의 기억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동생을 너무 찾는다는 연락에 급히 찾아가 보면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돌아가 있곤 했다.
오늘은 어떤 상태의 그를 만나게 될까. 지겸은 어릴 때 제 형제가 좋아하던 과자와 장난감을 잔뜩 사 들고 갔다.
“우와! 건담!”
지훈은 신나서 선물을 받아들더니 지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건담 프라모델을 뜯어 조립하기 시작했다. 병실 창가에 놓인 수십 개의 건담도 모두 지겸이 보내온 것이다. 그는 치료수감 중 주어지는 개인 시간을 모두 이 장난감을 만드는 데 쏟아붓는다고 들었다.
집중하느라 굽은 등이 못 본 사이 더 말라 보였다. 원래 지훈은 지겸과 비슷하게 체격이 좋은 편이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많이 신경 쓰는 사람답게 운동도 꾸준히 했던 걸 알고 있고. 낯선 형제의 모습에 안타까웠다가도 다시 화가 난다. 죄를 제대로 묻고 그동안 그가 한 짓들을 책임지게 하고 싶었는데 결국 모든 것에서 도망쳐 버렸으니까.
“참, 내일 수학 시험이잖아. 그거… 니가 대신 봐라.”
다른 생각에 골똘하던 지겸이 고개를 들어 지훈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건담의 작은 부속품을 조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재의 지겸을 어린 시절 자신의 쌍둥이 형제로 여기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보통은 종종 찾아와 자신을 돌봐주는 아저씨 정도로 여기거나, 아버지로 착각하곤 했으니까. 대답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지훈이 말을 이었다.
“왜, 너도 시험이라서 싫어?”
아. 어린 시절이 떠올라 지겸이 씁쓸한 조소를 띠었다. 지훈은 운동 시합이나 수학 시험과 같이 자신이 하기 싫거나 잘 해낼 자신이 없는 일엔 주로 지겸을 대신 불렀다. 문제는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던 그도 주로 지훈과 비슷한 스케줄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지훈은 지겸보다 더 공부와 운동 모두 완벽한 아이로 통했다. 그런데도 인기는 지겸이 더 많았고, 지훈은 내내 불만이었다.
“아니, 형 하고 싶은 대로 해.”
“고마…. 어! 아, 아버지…?”
고개를 돌려 지겸을 발견한 지훈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뿌연 눈동자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손에 쥐었던 장난감은 이미 바닥에 떨어뜨린 채였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 공부할 거예요. 잠깐, 아주 잠깐 쉰 거예요.”
겁에 질린 목소리. 병에 걸린 이후 지훈은 지겸을 마주할 때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떠올리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면 대체로 이렇게 몸을 떨며 불안해했는데, 보호소로 오기 전까진 지겸 앞에선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전혀 몰랐다. 지훈이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아버지의 애정이 간절했던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마음껏… 놀아.”
그 말에 지훈의 표정이 환해진다. 지겸도 웃어주고 싶지만, 그것까지는 잘 되지 않았다.
“또 올게.”
면회시간이 어느덧 끝나 일어나 나가려는데, 지훈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근데 아버지.”
지겸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겸이 걘 언제 와요?”
“…뭐?”
지금 그의 머릿속은 몇 년도일까. 언제의 아버지와 자신을 떠올리고 있을까.
“저도 미국 보내 주시면 안 돼요?”
후. 지겸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눈을 깜빡이며 답을 기대하는 지훈의 표정이 꼭 열 살 무렵의 아이 같아 보였다.
“아마 지겸이는… 안 올 거야, 앞으로도.”
참담한 기분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훈은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창밖 저 멀리, 산 중턱 어딘가를 쳐다볼 뿐.
“또 올게.”
지훈은 마치 다른 세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답도 없고 미동조차 없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창밖 너머에는 이미 가을이 불그스름하게 물들고 있었다.
***
올해 가을은 유난히 짧았다. 낙엽이 서둘러 지고 바람이 금세 차가워졌다. 학기가 시작되며 소희는 많이 바빴지만, 지겸이 거의 매일 직접 출퇴근을 시켜주고 서로의 집을 오가느라 둘의 사이는 더욱 깊어졌다.
어느덧 12월. 방학하자마자 둘은 겨울 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소희가 지겸을 지훈으로 알았던 시절, 두 사람이 함께 휴가를 보냈던 그 산장으로. 이번엔 정말로 단둘이서.
겨울의 오대산은 고독한 절개가 느껴진다. 산장으로 오는 길, 둘은 잠시 차를 세우고 오대산의 명물인 사스래나무의 군락을 산책했다. 종잇장처럼 얇게 껍질이 벗겨지는 회백색 기둥이 빽빽하게 들어선 산자락은 을씨년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고풍스럽고 제법 운치 있었다.
하얗게 일어난 입김이 나무 기둥 사이 부딪는 게 재밌어서 소희가 자꾸만 제 입술을 벌려 더운 숨을 내뱉었다. 지겸은 그런 그녀의 뺨에 계속 입을 맞췄다. 언제나 그렇듯, 소희를 향한 남자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다.
“애도 아니고.”
“겨울엔 공기에서 타는 향이 나요. 겨울의 산은 더해. 난 그게 너무 좋아요.”
“가만 보면 우리 소희는 은근히… 좋아하는 것도 많더라.”
질투 나게. 그렇다고 뭐 온 계절을 다 질투할 수도 없는 일이고.
지겸이 장난하듯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고 소희의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서늘해진 머리 위로 전해진 손끝의 온기에 그녀는 뒷덜미가 간지럽다.
“그래도 알잖아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한다. 고고한 이 겨울 산과 참 어울리는 새까맣고 깊은 눈동자. 어느덧 몸과 마음을 모두 빼앗겨 버린 남자.
“…좋아하는 건?”
피식. 긴장하며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지겸의 표정에 괜스레 장난기가 샘솟았다. 워낙 표현을 잘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소희는 할 수 있을 때마다 나름대로 진심을 말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소희의 애정이 갈급한 사람처럼 이렇게 긴장하고, 또 기다린다.
“음… 배고파.”
“뭐?”
그가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소희가 크큭 웃으며 제 검지로 스윽 그의 찌푸림을 꾹 눌러 펴본다.
얼른 가자 우리 강아지, 밥 먹으러.
소희가 그의 손을 잡아 차 쪽으로 이끌었다. 지겸이 못마땅하다는 듯 이끌려오는 척하더니 뒤에서 그녀를 확 껴안아 버렸다.
“앗 하, 하지 마요!”
귓가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어오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애무에 소희가 버둥댄다.
“네 입으로 그랬잖아, 밥 먹자며.”
척척해진 귓구멍으로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파고든다.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몸이 더 저릿했다.
지겸이 요리한 파스타와 샐러드를 배불리 먹고, 소희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장작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겸이 레시피를 바꾼 건지, 아니면 자신의 입맛이 어느새 그의 요리에 익숙해진 건지 헷갈리지만 이젠 그가 해 주는 건 뭐든 맛있었다. 소희가 읽던 책을 잠시 무릎 위에 펼쳐뒀다. 평소보다 많이 먹어서인지 어른거리는 불꽃에 나른한 잠기운이 돋는다.
“이번엔 무슨 책 가져 왔어?”
그때 다가온 지겸이 물었다. 대답하려던 소희의 입가 가까이에 그가 만들어 온 핫초콜릿을 가져다 댄다. 소희가 입술을 살짝 벌리고 그가 기울여준 대로 호륵, 하고 한 모금을 마셨다. 딱 먹기 좋게 따뜻한 온도. 몸에 달콤한 열기가 감돈다. 지겸은 다시 컵을 옆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몸을 기울여 소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달았다. 조금 전 마신 핫초콜릿보다 더.
“위대한 개츠비?”
지겸이 그녀의 의자 아래쪽 카펫에 앉으며 물었다.
“응.”
내 책이네. 그의 말에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지겸의 집에서 자고 같이 출발한지라, 어쩔 수 없이 그의 서재에서 한 권 골라온 참이었다.
“참 내가 얘기했었어요? 며칠 전에 재단 이사회 있었잖아.”
“알지.”
그는 자연스럽게 소희의 다리를 부드럽게 주물러주며 답했다. 임 재단장이 수감된 후 소희와 그녀의 어머니는 재단 이사회의 의결권을 갖게 됐다.
“몇 년 뒤에는 재림대 신입생 모집 때 베타 학생도 지원할 수 있도록 바꿀 거예요. 대입 면접 때 면접관이 페로몬으로 우성을 골라내지 못하도록 비대면 면접으로 바꿀 거고. 아직 의결이 과반수를 넘지는 못했지만 다음 이사회 때 다시 논의하기로 했어요.”
“드디어 시작이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해 봐야죠.”
제법 결의에 찬 소희의 모습을 지겸이 자랑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재림대학교는 명실상부 알파/오메가 교육의 산실로 오랜 기간 그 명목을 유지해 왔으나 이는 분명한 균열과 비(非)재림대생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불러왔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에서 재림대 학생이 아니면 서류전형에서부터 불이익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한 구조를 바꿔보고 싶다는 게 지겸과 소희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두 아버지의 죄도 결국 베타와 열성 알파/오메가를 극단적으로 차별했던 선민의식에서 온 것이니 다름없으니까. 그 편협한 사고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던 게 우성 위주로만 폐쇄적으로 운영되어 온 재림재단일 테고.
재림 법대에 최초로 여성 오메가가 입학했던 건 불과 60여 년 전 일이었다. 그 후로 6년 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됐다. 우성 알파/오메가가 아니면 차별이 점점 심해지는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도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번에 모든 걸 바꿀 수는 없겠지만, 작은 노력과 변화가 쌓인다면, 또 다른 60년 후에는 뭔가 조금 더 달라져 있지 않을까.
“이제 책, 읽어 소희야.”
그녀의 무릎에 슬쩍 얼굴을 기대며 지겸이 말했다. 제 다리에 실린 그의 무게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든든하기도 했다. 소희는 다시 책을 펼쳤다.
편안하게 입고 있던 스커트 아래. 피로한 제 종아리를 주무르던 남자의 큰 손이 조금씩 올라와 무릎 뒤를 간질인다. 그에게 이미 익숙해진 몸이 야릇한 손길에 빠르게 반응했다. 맞붙인 허벅지 사이에 뭉근한 기대감이 감돈다.
“아.”
순간 지겸이 소희의 무릎 한쪽을 깨물었다. 당황해 아래를 쳐다보니 부러 자신과 눈을 마주친 남자가 혀를 길게 빼 무릎 위를 핥는다. 자신이 하는 행동을 똑똑히 보란 듯한 눈빛. 두껍고 축축한 혀에 살이 쓸리는 감각이 아찔하다. 방금 전, 뻔한 신음을 내뱉어 놓고도 최대한 모르는 척을 하고 싶어서. 소희는 입술 한쪽을 지그시 깨물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다시 집중할 새는 없었다. 쪽, 쪽. 그의 입술이 점점 다리를 타고 침입했다. 어느새 말려 올라간 치마 속으로 그의 손이 느긋하게 파고든다. 서늘한 공기에 드러난 맨살이 휑했다. 자꾸만 다리 사이가 벌어져서, 다시 붙여보려고 힘을 줬지만 지겸이 가만히 붙들어 막았다. 그의 손끝이 더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여린 사타구니 안쪽을 놀리듯 간질인다. 아직 그에게 닿지도 않은 밀부가 제멋대로 움찔댄다.
“나 좀 봐… 소희야. 책만 보지 말고.”
벌써 이렇게 젖었으면서.
으흡. 지겸의 엄지가 촉촉해진 속옷 가운데를 꾹 눌렀다. 집중하려고 해도 흰 종이 위 까만 글씨가 자꾸 이지러진다. 그가 느릿하게 엄지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책의 글씨가 흐릿하게 뭉개지더니 마구 뒤섞인다.
“당신이, 읽으, 흐, 라고….”
왜 이럴 때만 말을 잘 듣는 척할까, 개새끼 주인은 자기면서.
그의 손가락이 좀 더 노골적으로 젖은 속옷 위를 문댔다. 그러다 남자가 제 클리토리스를 슬쩍 건드리기라도 하면 소희가 턱을 가늘게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이 퍽 흡족한지 지겸의 입에서 낮은 웃음이 부서져 나왔다.
소희는 결국 책 읽기를 포기했다. 아무렇게나 펼쳐 옆에 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를 배경으로 지겸의 숨소리가 제 아래를 집요하게 훑는다. 그의 손가락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소희의 속옷을 옆으로 젖혔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지겸의 얼굴이 파묻혔다. 남자의 높은 콧날이 음핵을 뭉개고 입술이 음순을 빨아들인다.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가는 게 나무 장작이 아닌 꼭 제 음부인 것만 같다. 소희가 지겸의 뒷머리 사이사이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그의 혀끝이 속살을 핥을 때마다 발가락 끝이 둥글게 휘었다.
지겸이야말로 오늘따라 평소보다 강한 그녀 특유의 페로몬에 정신이 녹아버릴 것만 같다. 소희와 사스래나무 군락을 산책할 때부터 착실하게 달아올랐던 몸이 지금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다. 머리가 뿌옇게 흐려지고 심장 박동이 지나치게 빨라졌다. 그녀를 애무하는 기쁨과 그에 따른 흥분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평소와 다르게 몸이 지나치게 예민하다. 한계까지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도 뻐근함을 넘어 통증으로 시큰하다. 가슴이 뻐근하고 갑갑한 게 점차 숨쉬기도 힘겹다. 설마….
뭔가를 깨달은 순간 그가 애무를 멈추고 소희에게서 제 몸을 물렸다.
기분 좋게 자신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갑자기 사라지자 황망해진 소희가 눈을 떴다.
눈앞엔 여전히 지겸이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지겸이 소희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한다.
“소희야… 미안.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잠깐 방에 가 있을게.”
“…응?”
놀란 소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남자가 이러다가 그냥, 이렇게 여기, 자신을 혼자 두고 방에 들어간다고? 진짜로?
당황한 그녀에게 더 설명하지도 않고 지겸이 급히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사라졌다.
소희는 그저 멍하니 타는 장작을 바라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